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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12일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제1독서 : 야고 1,1-11
복 음 : 마르 8,11-13
그때에
11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13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표징을 요구하지마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미국에서 교포사목을 할 때입니다.
성당 앞뜰에 성모님 상을 모시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 마음을 안 어떤 분이
“한국 어느 성당에 모셔진 성모님은 성모상에 머리를 갖다 대면 꼭 안수하는 모습인데 기적도 많이 일어난답니다.
그 성모님 상을 모신 곳이 어딘지 알아보고 그런 성모님을 모셨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쁜 성모님을 모시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고 은총도 그 만큼 더 크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일반 판매용 성모상도 눈을 쌍꺼풀 해야 한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만 사람들은 신비한 현상에 민감합니다.
어디에 어떤 기적이 있다고 하면 그곳에 쫓아가고 그 혜택을 입고자 애를 씁니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 신비한 현상이나 기적을 통하여 드러내 주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찾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현상에 더 많은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현실입니다.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주어진 은총의 열매에 매달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찾기보다 자신이 하느님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베풀어 주셨음에도
종교지도자들의 불신은 계속되고 결국 주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집과 몰이해 속에 믿음이 없는 완고한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자기들의 욕구에 맞는 것만을 요구하고 이미 보여 진 표징을 올바르게 보려하지 않고
또다시 표징만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내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일도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보여주기 위해서 오신 쇼맨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결코 보여주기 위한 기적, 기적을 위한 기적을 행하진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기적을 많이 보고 체험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기적의 삶을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기적이 믿음을 가져오기보다 믿음이 기적을 낳습니다.
어떤 성모님 상을 모시든 그 앞에서 그분의 마음으로, 그분의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다면
기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랑을 베풀고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며 소외된 사람들의 상황을 바꾸어 주시고
영원한 삶을 살게 해 주어도 그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살아있는 기적입니다. 그리고 어떤 특별한 기적을 베풀어 준 것은
그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적 사건 안에 담긴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현상을 쫓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기적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하늘의 기적이 아무리 많이 일어난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무엇을 보여 달라고 조르지 말고 여러분이 기적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주님, 표징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눈과 깨닫는 마음을 주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스페인 바르셀로나는 엄청난 관광지입니다.
그런데 이곳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관광지가 된 것은 한 사람 덕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의 작품으로 인해 어마어마한 관광수입을 올릴 수가 있었고,
이로 인해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냐 주정부는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까지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평생 곡선 건물만을 건축한 안토니오 가우디입니다.
성가정 성당, 구엘공원, 구엘저택 등의 건축물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가우디의 천재성에 모두 감탄을 하지요.
이러한 건축물은 신이 만든 기적과 같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의 천재성을 일찍부터 사람들이 알아차렸을까요?
그는 건축학교에 다닌 것이 학력의 전부였습니다.
건축학교 때에도 성적이 너무 나빠서, 회의를 거듭한 끝에 졸업시켜 주기로 결정할 정도였지요.
졸업식장에서 교장은 가우디를 향해서
“우리가 천재에게 졸업장을 주는지, 바보에게 주는지 모르겠다.”는 말까지 덧붙였다고 합니다.
이런 그를 알아본 한 인물이 바로 구엘 백작이었습니다.
가우디의 재능을 알아본 한 사람이 바르셀로나를 완전히 바꿔놓은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기적이라고 말하는 모든 건축물은 가우디를 알아본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 가능해졌습니다.
알아봄으로 인해 기적이 나온 것입니다.
누군가를 알아본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할 때 가능합니다.
즉, 그 사람의 편에서 생각하고 바라볼 때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반적인 모습은 어떨까요?
자기 생각의 틀에 빠져서 상대방을 인정하기보다는 부정하고
또 이로 인해 거부할 때가 더 많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우리 곁에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을 스스로 거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표징을 요구하는 바리사이들을 향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많은 기적을 베풀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합니다.
왜 그럴까요? 병자의 치유만으로는 믿기 힘들었을까요? 빵의 기적으로도 부족했을까요?
바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기적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 역시 많은 표징을 주님께 요구합니다.
그러나 표징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삶 안에서 함께 하시는 주님을 알아봐야 합니다.
나의 이웃들과 함께 하시는 주님을, 사랑의 삶 안에 계시는 주님을 알아볼 때
주님께서 주시는 표징이 하나둘씩 보일 것입니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4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에 이어, 예수님께 대한 바리사이들의 시험을 전해줍니다.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해줍니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마르 8,11)
그들은 예수님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메시아임을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시험을 합니다.
마치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넘어뜨리기 위해,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에게 빵이 되라 해보시오.”(마태 4,3)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마치 모세 때에 광야에서 내린 ‘만나’(탈출 16장)나,
여호수아의 간구로 해와 달이 멈춰졌던 일(여호 1,12-14)이나,
사무엘 시대의 우뢰사건(1사무 7,10)이나,
엘리야의 카르멜산의 승리사건(1열왕 18,30-40)과 같은 하늘에서 오는
초자연적인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속 깊은 저의는 이러한 표징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을 넘어뜨리는 데 그 초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메시아인지를 스스로 증명해보이라는 지극히 도전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심문하듯이 예수님을 다그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표징’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순결하고도 온전한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 8,12)
이는 마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 부자가 죽은 라자로를 자기 아버지의 집으로 보내어
다섯 형제들에게 경고하게 해달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한 말을 떠올려줍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
그래서 <마태오복음>의 병행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징은 분별하지 못한다.”(마태 16,3)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징밖에는 아무런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6,4)
그렇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의 시대의 표징을 드러내셨지만,
바로 앞 장면의 ‘4천명을 먹이신 기적이야기’를 통해서도 드러내셨지만,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받아들이지 않음은 불충하고 악한 까닭임을 말해줍니다.
과학자 아인쉬타인은 말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한 부류는 세상에는 기적이 없다는 사람들이요,
또 한 부류는 세상의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나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오늘 우리의 마음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표징을 구하는 마음 안에 자리 잡은 불신과 절개 없음을 말입니다.
왜곡된 우리의 마음이 진실과 진리를 왜곡하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도처에서 드러내시는 당신의 신성을 보고 또 보고 보면서도,
여전히 무시하고 거부하고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아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동창 신부님 중에 운동을 잘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탁구, 테니스, 스키를 거의 선수 정도의 수준으로 잘 합니다.
저는 흉내는 내지만 동창 신부처럼 잘 하지 못합니다. 동창 신부와 저는 딱 하나 차이가 있었습니다.
동창 신부는 시간이 걸려도 먼저 기초를 잘 익히는 것입니다.
꾸준히 기초를 익히면 길이 보이고, 길이 보이면 쉽게, 편하게 운동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기초를 충실하게 하지 않으면 몸에 무리가 오고, 운동을 하지만 실력이 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기초를 제대로 배우지 않고 먼저 운동을 하면 나쁜 습관이 굳어져서
어느 정도는 하지만 어려운 단계로 나갈 수 없다고 합니다.
초대교회의 순교와 신앙을 다룬 영화중에 ‘Quo Vadis Domine’가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고,
박해의 두려움과 공포가 너무 커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 앞에 주님께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께 이렇게 말을 합니다.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로마로 갈 것이다.’
이 말씀에 베드로 사도는 다시금 용기를 내고,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마저 던져 버리고
주님과 함께 로마로 가서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베드로 사도에게 이제 어디로 가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그곳이 어느 곳이든지 상관이 없었습니다.
지난주에 동창 신부들과 함께 며칠 동안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휴가를 떠나는 장소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휴가를 ‘누구와 함께 가느냐!’도 중요합니다.
마음이 맞고, 뜻이 통하고, 오랫동안 우정을 함께 나누었던 동창 신부들과의 휴가는
어디를 가도 즐겁고 재미있는 휴가이기 때문입니다.
가는 곳이 비록 생각보다 아름답지 않았다고 해도, 교통이 불편했다고 해도, 고생을 했다고 해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그것도 추억이고, 즐거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은 인사이동이 있는 날입니다.
신부님들은 이제 정들었던 본당과 임지를 떠나서 새로운 곳으로 가게 됩니다.
사제생활을 하면서 자주 겪게 되는 일이지만 정든 곳을 떠난다는 것은 언제나 부담입니다.
새로운 곳에서 적응을 하는 것도 또한 긴장입니다.
그러나 사제들이 아무런 조건 없이 새로운 곳으로 향해 가는 것은 주님과 함께 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그곳이 어느 곳이든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먼 길을 떠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어디에 있느냐!’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더 중요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삶은 그곳이 어느 곳이든 이미 행복한 삶이고, 이미 은총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돈이 많다고 부자는 아니잖아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우연히 작년 가을 방영된 ‘인간 극장’에 등장한 중2 농부 한태웅 군의 스토리를 보았습니다.
기특하기도 하고 특별하기도 해서 혼자서 한참을 웃었습니다.
해맑은 사춘기 소년이지만, 새마을 모자에, 농사용 장화에, 느릿느릿한 말투에,
영락없는 중견 농사꾼이었습니다.
장래 희망은 ‘할아버지 같은 멋진 농부’랍니다. 꼭 갖고 싶은 것은 ‘힘좋은 트랙터’랍니다.
피곤해서 잠시 드러누워 있는 아버지를 향해, 일거리가 저렇게 산더미 같은데,
이렇게 누워있으면 어떻하냐며 호통을 칩니다.
직접 기른 닭과 계란을 동네 어르신들에게 배달해드리고, 팔아서 할아버지 할머니 용돈도 드립니다.
다음의 말을 중 2짜리가 한 말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돈이 많다고 부자는 아니잖아요? 돈만 많으면 뭐해요? 행복해야지.
농사도 짓고 가축도 키우면서 대농(大農)이 되고 결혼해서 지금 계신 가족들과 행복하게 사는
거, 그게 제 목표예요.”
“한 2백 평, 한 마지기 논으로도 대농이 될 수 있고, 염소 다섯 마리로도 대농이 될 수도 있어요.
혼자 돈 갖고 혼자 살면 뭐해요? 저는 먹고 살 만큼만 벌고,
남한테 욕 안 듣고, 제가 남들에게 베풀면서 가족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자신도 모르게 경제지상주의나 물질만능주의에 푹 젖어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큰 경종을 울리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이 은연중에 ‘돈이면 다’라는 천박한 자본주의 논리의 덫에 묶여있는
우리가 귀담아 들을 말입니다.
어떻게든 이웃을 밟고 올라서겠다는 살벌한 야수의 눈빛으로, 바벨탑 쌓아 올라가듯,
끝도 없는 재물의 탑을 쌓아가는 사람들, 정말이지 귀여겨들을 말입니다.
그 모든 수모 당해가면서, 청춘과 평생을 바쳐가면서 쌓아올린 그 허황된 탑,
그러나 그 재물 한번 마음 놓고 써보지도 못하고, 식물인간으로 누워계신 분들의 얼굴도 떠오릅니다.
탑을 쌓아올리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지, 절대로 이웃들의 고통스런 얼굴을
돌아볼 여유가 없이 살다가 죽음을 목전에 둔 분들의 얼굴도 떠오릅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도 우리들의 폐부를 깊숙이 찌릅니다.
“비천한 형제는 자기가 고귀해졌음을 자랑하고, 부자는 자기가 비천해졌음을 자랑하십시오.
부자는 풀꽃처럼 스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해가 떠서 뜨겁게 내리쬐면, 풀은 마르고 꽃은 져서 그 아름다운 모습이 없어져 버립니다.
이와 같이 부자도 자기 일에만 골몰하다가 시들어 버릴 것입니다.”(야고보서 1장 9~11절)
바보 같은 사랑
전삼용 요셉 신부
현대 실존주의 철학의 선구자인 키에르케고르는 교회 비판을 수행한 종교사상가였습니다.
철학은 이성적 사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학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자주 종교와 부딪히게 됩니다.
믿음은 어느 정도 이성을 바탕으로 이해 될 수는 있어도 이성이 신앙을 포함할 수는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키에르케고르도 생각을 너무 많이 하여 사랑에 있어서는 불행한 일생을 살아야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스물네 살 때 자기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녀 레기네 올센을 보고
첫눈에 반해 그녀와 결혼을 결심합니다.
원래 그녀는 자신의 가정교사이자 키르케고르의 친구인 슐레겔을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녀를 슐레겔로부터 떼어 놓았고,
마침내 3년 만에 구혼하여 승낙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키르케고르는 자신이 과연 한 여자를 구속할 권한이 있는지 심사숙고하기 시작했습니다.
“결혼하면 두 사람이 서로에게 절대적으로 솔직해야 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도저히 그녀에게 말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은 그녀와 결코 결혼해서는 안 된다”라고 결론을 내린
그는 약혼녀가 먼저 파혼하도록 혐오스럽게 처신하고 타락한 행동을 일삼았습니다.
그렇게 키르케고르는 그녀와의 관계를 청산했는데도 계속 그녀를 예의주시하며 일기를 썼습니다.
심지어는 코펜하겐의 어느 거리에서 그녀가 서 있었는지 앉아 있었는지,
그녀가 웃었는지 웃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도 빠짐없이 기록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감히 올센에게 말을 건넬 엄두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나같이 더럽고 미천한 놈이 그녀에게 가까이 갈 수 없다”라고 생각했습니다.
2년 후에 올센은 결국 슐레겔과 약혼하고 결혼까지 하고 말았습니다.
슐레겔은 1855년 서인도의 장관으로 부임되었고 올센 역시 따라갔습니다.
키르케고르는 비록 자신이 자초하긴 했지만 절망과 배신감에 그녀를 비난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으며 희망 또한 버리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의 일기나 저서에는 자신을 자책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으며,
죽을 때까지 그녀를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키르케고르가 그녀에게 고백하지 못한 ‘문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사창가에 단 한 번 갔던 일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그곳에서 여자와 은밀한 관계를 가지지도 못한 채 오히려 조롱만 받고 돌아왔을 뿐이었습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바보 같은 사랑, 청소년을 위한 서양철학사, 평단문화사 2008]
모든 불행은 자신이 그래야한다고 자신을 규정해놓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의 지은 죄에 대해
자신이 그렇게 벌을 받아야만 한다고 믿고 있었고 그대로 실천하였습니다.
이것이 이성적 숙고의 한계입니다.
이성적으로 따지자면 예수님은 절대 칭찬받을 행동을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지난 주 복음처럼 사람들이 많이 찾는데도 다른 고을로 복음을 전하자고 떠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오늘은 나병환자 한 사람에게 손까지 대며 고쳐주십니다.
이 말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부정한 인간으로 손가락질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부정한 것과 접하면 부정하게 되는 것이 이스라엘 율법이었습니다.
물론 그에게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는 온 세상에 떠들고 다녔고
그래서 예수님은 마을 안으로 들어가실 수 없는 처지가 되셨습니다.
다른 고을로 복음을 전하자고 떠나놓고 길거리에서 만난 한 사람의 연민 때문에
고을들을 돌아다니는데 장애가 생긴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에게 매니저가 있었다면 예수님은 사려 깊지 못한 행동에 엄청 혼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고통 앞에서는 중립이 있을 수 없다는 말씀대로 사랑은 이성을 넘어서는 법입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그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합친 것과 같은 존귀한 존재로 보였을 것입니다.
다른 고을에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그 한 사람의 믿음에 보답을 주어야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성적으로는 손해 보는 행동처럼 보일지라도 남의 눈치 안 보고 당신의 행동을 하십니다.
반면 이성으로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성적 사고로 사람들을 판단하기에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판단할지 걱정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말과 행동이 매우 경직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사랑의 법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 안에 있는 사랑의 법이 이성의 법을 넘어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공익광고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아이는 그림을 그리라고 했더니 도화지에 온통 검은 색만을 칠합니다.
가끔은 흰 곳을 남겨놓기도 합니다.
그림을 그렇게 검은 색만 쓰면 안 된다고 선생님이 아무리 말해도 들으려하지 않습니다.
결국 아이는 정신병원에 보내집니다.
정신병원에서도 검은 색으로 흰 도화지에 새까맣게 칠만 합니다.
누군가 그 도화지들을 모아 넓은 체육관 안에 펼칩니다.
그리고 하나하나 맞추다보니 아주 커다란 고래를 실물크기로 그린 그림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아이는 사람들의 시선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명확한 그림이 자신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이성으로 규정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만 있으면 누구의 심판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요 정점입니다.
사랑이 이성에 의해 규정되면 항상 비극이 따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둘은 서로를 목숨처럼 사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가 전쟁터로 가게 됐습니다.
남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서 돌아오겠노라 다짐했고
여자는 언제까지나 기다리겠노라 약속했습니다. 전쟁은 치열했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매순간 숨통을 조여 왔지만
남자는 오로지 사랑하는 이에게 돌아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수많은 전투를 치러냈습니다.
하지만 얄궂은 운명은 남자를 가만 두지 않았습니다.
빗발치는 총탄을 뚫고 적진으로 진격 중 무릎에 폭탄 파편을 맞은 것입니다.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몸은 예전과 달랐습니다.
한쪽 다리만으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게 그의 현실이었습니다.
전쟁터에서 불구가 된 남자는 이런 모습으로 사랑하는 사람 앞에 나타느니
차라리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자고 결심을 했습니다.
한편 애인이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여자는 어느 날,
남자의 전우로부터 그가 전사했다는 편지를 받고 슬픔을 이기지 못해 그만 앓아눕고 말았습니다.
무심한 세월이 한 달 두 달, 일 년 이년, 물처럼 흘러갔습니다.
전쟁터에서 돌아와 행여 여자의 눈에 뛸까 숨어 사는 남자에게 그녀의 결혼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남자는 가슴이 아렸지만 그녀가 행복해진다면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먼발치에서 마지막으로 얼굴이나 한번 보려고 여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조용한 주택가 낮은 담장 너머엔 남자가 그토록 사랑하는 여자가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남편과 함께 있었습니다.
한쪽 다리만 잃고도 여자 앞에 나서지 못했던 남자는 숨이 막혔습니다.
“헉! 바보 같이..... 바보 같이......”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고백하는 사람과 한다고 합니다.
고백하지 못하는 것은 사랑을 이성의 법이 가두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성으로부터 벗어나면 자유로워져 누구의 심판도 두려워하지 않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절에 가보면 십우도(十牛圖)라고 한 소년이 소를 잡으러가는 열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한 사람이 참 자신을 찾는 과정을 그린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우선은 자아가 자신인 줄 알고 자아를 찾아 잘 길들이지만
결국 자아가 사라지는 게 제일 좋은 것이고
그렇게 자신까지 사라지고 그러면 자신은 공(空)이 되고 신적 존재가 그 자리를 채웁니다.
그러면 그 신적 존재는 이 해탈의 경지를 다른 이들에게 전하라고 그 사람을 세상으로 내려 보냅니다.
그렇게 십우도가 끝납니다.
그렇게 자신이 비워지고 사랑의 법으로 채워진 이는 세상에서 누구에게도 심판 받지 않습니다.
심판 받을 자신이 없고 자신 안에는 누구도 심판 할 수 없는 하느님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이성적인 심판에 상관없이 사랑의 법으로 자유롭게 살아가시는 이유입니다.
타인의 이성적인 판단에 얽매이며 살아서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참 자유는 사랑의 법으로 살 때만 누릴 수 있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