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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II(憎惡:Hatred)
사랑과는 상반되는 것이 바로 ‘증오(憎惡)’인데, 사랑 때문에 상처를 받았거나 배신을 당했다고 하면 인자의 마음에서 자라나는 것이자, 이것 때문에 고통과 시련이 있는 삶을 살기도 한단다. 너희들의 사랑은 온전하지 않기 때문에 부작용이 뒤따르며 인생에 있어서 통과해야 되는 여러 단계가 설정되기도 한단다.
진실하고 진정한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 배워야 되는 과정에서 만나는 것이 ‘증오’이며 이것을 통하여 마음의 상처가 어떻게 생기고 치유되는가를 터득하게 된단다.
너희들은 사랑을 주고받으면서 믿음과 신뢰가 깨지고 배신당하게 되면 ‘증오’가 마음에 들어오게 되는데 처음에는 ‘원망(怨望)’에서 시작하여 ‘미움’의 과정을 지나 ‘증오(憎惡)’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단다. 마음에 ‘증오’가 들어서면 행동으로까지 옮겨지기도 하는데, 폭력을 동반하기 때문에 사고로 연결되기도 한단다. 행동뿐만 아니라 마음에 쌓인 ‘증오’는 독소를 분비하여 육체의 건강도, 정신의 건강도 해치게 되는 결과로 나타나는 구나.
사랑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품어주지만 ‘증오’는 복수를 낳고 자신의 인생이 평탄치 못하게 펼쳐지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니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에게도 부정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란다. 증오’를 품은 사람은 마음이 닫히고 꽁꽁 얼어붙어서 사랑을 거부하며 살기 때문에 외롭고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란다.
그 만큼 마음의 상처가 깊어서 쉽게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이고, 얼었던 마음을 녹이고 해빙시킬 수 있는 것은 사랑 밖에는 없다는 것이구나. 하느님의 사랑만이 그 깊은 상처를 치유해 준다는 사실이란다. 너희들의 사랑으로 받은 상처이기에 그것으로는 치유할 수 없으며, 오직 하느님의 사랑으로만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이란다.
성서에도 ‘증오’에 대한 기록들이 있단다. 찾아보아라.
<시편 78:56~61/ 81:15,16/ 89:38/ 잠언 22:14/ 에스겔 23:29/ 아모스 6:8/ 로마서 12:9> -KJV
그러나 그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시험하고 노하시게 하였으며 그의 증거들을 지키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들의 조상들과 같이 배반하고 신실하지 않게 행동하여 속이는 활처럼 빗나갔도다.
그들이 자기들의 신당으로 그를 노하게 하였으며 자기들의 조각한 형상들로 그를 질투하게 하였으니 하느님께서 이 일을 들으시고 진노하시어 이스라엘을 크게 증오하셔서 실로의 성막, 곧 그가 사람들 가운데 세우신 장막을 떠나시고 그의 능력을 사로잡힘에 내어주셨고, 그의 영광을 원수의 손에 내어 주셨도다.
주를 증오하는 자들은 그에게 복종하였을 것이나 내 백성의 때는 영원히 계속되었을 것이며 그가 또한 그들을 가장 좋은 밀로 먹였을 것이요.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내가 너를 만족케 하였으리라. 주께서 그를 버리시고 증오하셨으니, 주께서 주의 기름부음 받은 이에게 진노하셨나이다.
타국여인의 입은 깊은 구덩이라. 주께서 증오하시는 자는 거기에 빠지리라. 그들이 증오함으로 너를 다루고 네 모든 수고한 것을 빼앗아 가고 너를 벌거벗겨 알몸으로 두리니 네 음행의 벗은 몸, 즉 네 음란과 음행이 드러나리라.
주 만군의 하느님이 말하노라. 주 하느님이 스스로 맹세하기를 ‘나는 야곱의 탁월함을 증오하며 그의 궁전들을 미워 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그 성읍을 그 안에 있는 모든 것과 함께 넘겨주리라.’ 하였노라. 사랑에 거짓이 없게 하라. 악을 증오하고 선과 연합하라.
너희들의 사랑이 온전하다면 ‘증오’와 ‘원망’, ‘미움’, ‘시기’, ‘질투’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란다. 하지만 너희들이 하는 사랑은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하기에 ‘증오’를 낳게 한단다. 너희들의 사랑은 정직하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물질세계의 체험을 위해 지구에 들어온 너희들은 물질과 하느님을 둘 다 사랑할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결국 하나는 포기해야만 이 체험이 올바르게 이루어지는데 너희들은 대다수가 물질을 선택하여 인생 경험을 쌓게 된단다. 물질을 사랑하여 가능한 한 쌓아두면서 만족을 얻고 거기에서 성취를 얻으려고 하지만 마음은 계속해서 허전하고 공허감만 증폭되어 간단다.
물질은 아무리 쌓아도 결국 너희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란다. 너희들은 주고받는 것을 잘하는데 사랑 또한 주고받으면서 인생을 살아간단다. 아이 때의 사랑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젊은 청춘들의 정열적인 사랑이 오래갈 것 같으면서도 그렇지 못하며, 장년들의 완숙하다는 사랑도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식어버린단다.
종교에서 나오는 사랑도 편협(偏狹)되거나 편중(偏重)되어 있어서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사라지고 마는 것이 바로 너희 인류들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러다 보니 부족한 사랑으로 발생하는 부작용들이 있다는 것이란다. 너희들은 ‘용서’라는 단어를 쉽게들 사용하고 있단다. 과연 진실되고 진정한 용서를 알고는 있는지 묻고 싶단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있었을때 인류들을 향한 그의 용서가 진실 되고 진정한 용서였단다. 하지만 너희들의 용서는 가식과 거짓에 둘러싸여서 심각한 부작용들이 나오는 것이란다. 하느님의 사랑이 기본이 되어 있어야 그 사랑 안에서 용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란다. 너희들의 사랑으로 하는 용서는 완전하지 못하여 앙금을 남기게 되고 ‘증오’를 낳게 하는 것이란다.
‘증오(憎惡)’는 완전하지 못한 사랑 때문에 태동되어 나타나는데, 완전치 못한 사랑은 소유욕이 뒤따른단다. 물질을 향한 사랑이 인생에도 투영되어 조건부에 있는 사랑을 하게 되고, 그 조건이 충족되지 못하면 불만이 쌓이고 ‘화(禍)’가 되어 축척된단다.
조건이 붙는 사랑에 익숙해진 너희들은 주고받는, 그것도 물질이 오고가는 사랑을 하게 되는데 물질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한단다. 이렇게 조건에 의한 사랑을 하는 너희들은 조건이 충족되지 못하고 손해본다고 생각 하면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판단하게 되며 이 사랑은 가벼운 사랑이나 거짓된 사랑으로 치부하게 된단다.
이 사랑 때문에 배신감을 느낀 사람은 상대에게 ‘증오’가 쌓이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사랑에 의한 상처는 이렇게 부작용을 초래한단다. 사랑이 어떻게 상처를 줄 수 있나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너희들의 사랑이 온전하지 못하기에 받는 쪽에서 자신의 기대치를 만족시키지 못한 사랑을 받게 되면 상처가 된다는 것이고, 사랑에 물질이 도입된 조건부 사랑이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이구나.
너희들은 사랑의 결실로 결혼을 하면서도 각종 패물과 예단과 선물을 주고받으며 이것이 사랑인 것 인양, 포장을 한다만 물질적 조건의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더냐? 이것 때문에 서로가 싸우고 앙금이 남으며 마음에 생채기를 나게 하니, 사랑의 결과치고는 초라하기 그지없구나.
모든 것을 다주어도 그 마음에 평화가 있고, 생명을 희생하여도 아까워하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인데, 이런 사랑이 너희들에게 없기 때문에 분쟁이 끊임이 없으며 서로가 원수가 되어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란다.
너희들은 다르다는 이유로 민족 간의 사랑도, 인종간의 사랑도, 종교 간의 사랑도, 이념 간의 사랑도 거부하고 있음이니, 이것의 결과는 ‘증오(憎惡)’를 낳아 해결되지 않는 숙제로서 인류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란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함은 사랑이 부족하여 ‘증오’하기 때문인데, 전쟁과 테러가 일어나고 폭력사건들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것 또한 상대를 사랑하지 못하고 ‘증오’하기 때문이란다. 묻지마 살인과 폭력이 일어나는 것은 자신의 주변과 사회를 ‘증오’하기 때문이고, 성폭력 사건이 끊이지 않는 것도 부족한 사랑이 불러온 결과란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아이는 그 사랑을 보상심리라는 차원에서 찾으려고 하는데, 사랑을 주지 않았던 상대에 대한 ‘증오’가 쌓여서 성폭력이라는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이란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범죄들은 부족한 사랑 때문에 ‘증오’가 쌓여서 일어나는 일들이고, 물질을 사랑하여 타인의 것을 강제로 빼앗는 행위들을 거침없이 하게 되는 것이란다.
사랑에 대한 확인을 물질을 통해서 보상 받으려고 하는 것이 결국 물질을 사랑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란다. 물질을 통한사랑은 반쪽이므로 어떠한 형태든 만족시킬 수 없기에 너희들의 마음은 허전하고 공허하게 되는 것이란 다. 이런 갈급증이 집착을 불러오고 물질에 집착하게 하거나, 상대에 집착하게해서 더 심각한 상태를 연출하게 하는 데 그것이 바로 역으로 나타나는 ‘증오(憎惡:hatred)’라고 하는 것이란다.
이렇게 너희는 부족한 사랑으로 인하여 ‘증오’를 안고 살 수밖에 없도록 이끄는 것 또한 어둠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랑의 상처를 사랑으로 치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증오’를 품게 만든단다. 어둠은 사랑을 교묘히 이용하여 너희들의 마음에 허무감과 공허감을 일어나게 하고,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도록 유도한다는 사실이란다.
사랑을 받지못하고, 사랑에 배신당하고, 사랑에 버림당했다는 그 마음에 ‘증오심’을 채워서 사회를 향한 테러와 폭력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이 바로 사탄의 역할이라고 하는 것이구나. 너희들은 창조에 의해 지음받았기에 누구나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란다.
하지만 사탄은 이 사실을 너희들이 인식하지 못하게 하며 오직 버림받았다는 느낌만을 부각시켜서 ‘증오심’을 마음에 심는다는 것이란다. 아무것도 모르는 너희들은 사탄의 꼬임에 넘어가 놀아나는 꼭두각시 인형이 된다는 것이구나.
너희들이 인생에서 쓴맛, 단맛의 경험들을 두루 하다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찾게 된단다. 부족한 사랑을 채워줄 것은 물질세계에서는 찾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오히려 배반당하고 이용당하였기 때문에 깊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사랑밖에는 답이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이란다. 왜 이렇게 힘들게 돌고돌아서 오도록 설계했던 것은 너희들이 사랑의 진정한 가치를 알도록 한 것이고, 그 가치를 알게 되었을 때에 나타나도록 한 것이었단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증오’를 불식시킨단다. 모든 마음의 상처들을 깨끗하게 사라지게 한단다. 허전한 마음들을 채워주고, 공허한 마음들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도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란다. ‘증오’는 원수를 만들고 복수를 낳아 더 큰 상처를 남기지만 사랑은 하나를 형성하고 평화를 낳아 아름다움을 남긴단다.
‘증오심’은 복수를 하여도 해소되지 않는단다. 오히려 마음의 공허함과 허전함만을 더 증폭시킬 뿐이란다. 시원하지 않으며, 오히려 더 답답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증오’란다. 너희들이 ‘증오’의 상대에게 갚았다하더라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증오’는 ‘증오’를 낳아 허무감만 키운다는 사실이구나.
그 대상이 사라졌다고 해도 기쁘지 않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 아직도 공허하며 허무하기 때문이란다. 이것은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것이란다. 너희들의 ‘증오’로 가득 찼던 마음들은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채워질 수 있는 것이란다. 너희들은 인생의 경험들을 축척하고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결국 그리스도의 사랑을 찾아내게 된단다.
어둠의 질곡 속에서 처절하고도 고통스러운 과정과 체험을 하지 못했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텐데, 인생의 쓰라린 경험들이 깊은 상처로 남아 그 어떤 것으로도 치유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란다. 너희들은 ‘증오’의 아픔을 통하여 사랑을 찾아낼 수 있었으며, ‘증오’의 상처를 통하여 용서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란다.
‘증오’는 상대를 향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음이니, ‘증오’의 상대는 바로 자신이라는 것이란다. ‘증오’를 통하여 가장 상처받고 가장 고통받는 존재는 상대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에 ‘‘용서’’와 ‘‘사랑’’이 진정으로 다가오는 것이란다. 너희들이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을 찾아내는 순간이 자신을 향했던 ‘증오’의 칼날과 창을 내려놓을 때라는 사실이란다.
너희들은 사랑에 상처받았을 때 상대를 향한 ‘증오’의 마음을 키우고,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으면서 서슬이 시퍼런 그 칼날에 베이고 상처받는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단다. ‘증오심’을 풀었을 때에도 마음에 남는 앙금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것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그 원인과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란다.
사회에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한 인자들의 마음들이 어떤 상태일 것 같으냐? 쌓여있던 ‘증오심’을 다 해소해서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으냐? 아니면 아직도 적개심과 ‘증오심’에 불타고 있을 것 같으냐? 그들의 마음들은 여전히 ‘증오심’이 가득 차 있으며 분노가 해소되지 못하고 있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 어떠한 회심도 하지 않고 오히려 정당했다고 반응한다는 사실이란다.
이것은 ‘증오심’과 적개심의 원인이 모두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고, 그렇다보니 그 마음에 아직도 ‘증오심’이 남아있다는 사실이란다. 그 마음의 공허함과 허무함은 어떠한 것으로도 해소될 수 없음이니 심리치료를 해도 효과가 없는 것이란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만이 그것을 해결하고 치료할 수 있는 것인데, 자신에게 항상 있었다는 사실과 그것을 알 때까지 다양한 경험, 특히 ‘증오심’의 경험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단다. 닫힌 마음의 문은 자신만이 열수 있단다. 누구도 대신 열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들이 알게 되었을 때에 사랑으로 상처받은 마음은 사랑으로 치유해야 된다는 것을 스스로가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란다.
‘증오’는 사랑에 대한 반감, 즉 온전하지 못한 물질적 사랑에 대한 반감으로 생겨나서 온전한 사랑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된다는 사실이란다. 너희들이 물질적 사랑만 추구한다면 절대 그리스도의 사랑은 찾을 수 없어서 물질적 사랑에 의한 상처를 통하여 ‘증오심’이 생기도록 유도한 것이고 스스로의 마음에 공허감과 허무감을 두고 ‘증오’를 해소할 수 있는 것은 복수도 아니요, 폭력도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한 용서만이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안배한 것이란다.
물질을 향한 너희들의 사랑은 흡사 폭탄을 안고 불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단다. 물질의 사랑은 너희들의 마음을 평화롭게 해줄 수 없으며 아무리 채워도 만족하지 못하고 공허함과 허무함만 느끼게 한다는 것을 너희들은 죽음을 통해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도 모르는 사실이란다.
너희들은 허전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 더욱 물질에 탐닉하고 매달리게 되는데, 그런다고 해서 마음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을 알게 된다는 것이란다. 너희들은 물질의 속성을 배우며 사랑 또한 배우게 되는데, 사랑의 상처를 통하여 ‘시기’와 ‘질투’를 체험하고 ‘미움’과 ‘원망’을 체험하고 ‘증오’까지 경험하게 된단다.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사랑의 상처를 통한 체험을 경험하여 아픔이 무엇인지 고통이 무엇인지알게 하려는 것이란다. 사랑의 상처가 마음에 어떻게 작용하는것과 아픔을 통하여 성장하게 되는 것이란다. 시련과 고통은 참사랑을 깨닫게 하며, 진실함이 무엇인지 알게한단다. 거짓된 사랑과 조건적 사랑과 물질적인 사랑이 얼마나 허무하고 허망한지를 알게 하는 것이란다. ‘증오(憎惡:hatred)’를 통하여 너희들은 참사랑을 알게 되고 그 사랑이야말로 치료하는 약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단다.
‘증오’는 마음에 독을 품게 하여 마음에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된단다. 그러니 원인을 알아 해결하기 전에는 상처가 치유될 수 없음이구나. 너희들은 눈에 보이는 대상에게 복수하면 ‘증오’가 사라지는 것으로 생각한다만 과연 행동으로 옮겨서 ‘증오’를 실천하여 복수했다고 해서 마음에 참된 평화가 찾아오더냐? 아니란다. 오히려 회한 (悔恨:regret)을 남기고 앙금을 남기는 것뿐이란다.
너희들은 허전하고 허무(虛無)한 마음을 채워줄 그 무엇을 찾게 되는데, 그때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참사랑인 그리스도의 사랑이란다. 마음속 깊이 숨어 있다가 너희들이 참된 사랑을 할 때가 되어서야 그 진실을 드러내고 나타나는 것이란다. 설익은 상태에서는 너희들이 깊은 의미를 찾아낼 수 없기에 때가 되기 전까지는 절대 드러나지 않음이니, 그래서 숨겨진 보물로 인용하여 설명한 것이란다.
세상에서도 첫사랑이나 풋사랑은 사랑의 깊이를 알 수 없단다. 짝사랑도 역시 그러하단다. 너희들은 연인의 사랑을 시작으로 아이를 낳고 부모의 사랑을 시작하면서 사랑을 알아가지만 그것 역시나 초보단계 인지라 너희들이 종교 활동을 하면서 사랑과 자비를 접하지만 역시 깊은 묘미를 알 수 없음은 마찬가지란다. ‘증오’를 통한 반대의 경험은 사랑의 상처를 통해서 어떻게 치유해 가는지에 대한 과정을 통과하며 의미를 알아간다는 것이란다.
사랑을 줄때의 기쁨보다는 받지 못함에 따른 서운한 감정에 점차 상처가 더해지고 중첩되면서 사랑의 결핍이 어떤 현상으로 돌아오는지를 체험하면서 그것은 사랑에 대한 갈증과 갈급함으로 나타난단다. 너희들은 사랑의 상처를 ‘원망’과 ‘질투’로 풀어보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미움’과 ‘증오’로서 증폭시켜 풀어보려 시도하지만 오히려 더 깊은 상처가 되어 돌아옴을 본단다.
‘증오’로 얼룩진 마음의 상처는 참된 사랑만이 치유시킬 수 있어서 공허한 마음에 참된 평화와 참된 사랑이 가득 넘치도록 하는 것이란다. 너희들을 이 과정을 통과시켜서 참된 사랑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단다.
사랑의 상처는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원망’과 ‘증오’가 절대 치유 시켜줄 수 없다는 것을 직접 경험하면서 너희들은 부질없음을 알아가고, 오히려 더 큰 상처를 남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단다. 그리고 타인보다 자신이 더 망가지고 깊은 상처를 안게 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란다.
자신을 미워하고 증오하였던 굴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너희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만나고 나서야 드디어 억압 받고 억눌려 있던 족쇄에서 해방되어 참된 자유인이 되는 기쁨을 찾게 된단다.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은 너희 스스로를 온전하게 용서하고 받아들이도록 안내한단다. 그리고 조건없이 베푸는 사랑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알게 한단다. 그 동안 옹졸하고 편협했던 작은 마음에서 해방되어 큰마음을 갖춘 그리스도인으로 깨어나도록 안내한단다.
‘증오’는 이 과정으로 안내하는데 역할을 하게 되고, 너희들이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요소로서 쓰인다는 것이란다. ‘증오’는 자신을 노예로 만들고 죄를 만들며 죄인의 굴레를 씌우는 역할을 한단다. 깊은 좌절감과 수치심과 모욕감을 유발시켜서 어둠속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며, 마음에 독한 독소만이 배출되도록 하여 성전(聖殿)인 육체와 마음을 오염시키고 더럽히게 한다는 것이란다.
스스로를 채찍질하여 용서하지 못하게 하며, 상대를 향한 복수심만 키우게 하고 ‘저주’를 퍼붓게 하니 무엇이 유익 하리요. 얼어붙은 마음은 너희를 깊은 어둠으로 끌고 간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바란단다.
성서에 증오하는 하느님이 기록되었는데 너희 인류들의 편견과 편협한 사고가 잘못된 기록을 작성하도록 만든 것이란다. 하느님은 자녀를 훈육하는 것은 있어도 ‘시기’와 ‘질투’와 ‘증오’하지 않는단다. 완성되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인자들 시선에 그렇게 보인 것은 부족한 마음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란다.
더 이상 ‘증오심’을 품지 말거라. 너희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만을 남기고, 공허감만 채울 뿐이니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구나. 오히려 상대를 용서하고 ‘증오심’을 품었던 자신도 용서하여 그리스도의 참사랑으로 허전한 마음을 보듬어 채우기를 바란단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십자가형에 처하게 한 인간들을 향해 ‘증오심’을 품지 않고 오히려 모두 용서하고 사랑으로 받아들였음을 배워야 한단다. 자신을 버리고 도망간 제자들도 ‘원망’하지 않고 모두 사랑으로 품었음을 배워야 한단다.
창조근원에게 무지한 너희들을 대신하여 자신을 희생하며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실천한 그의 사랑을 배우기를 바란다. 이로서 ‘증오(憎惡)II’를 마칠까 한단다.
첫댓글 인간 관계속에서 반복되는 학습으로 하나 하나 습득하고 배워가요,,, 천태 만상의 사람들을 경험하면서 학습을하고,어둠을 극복하고 빛으로서 전화 위복해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