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병법서 중 『삼십육계(三十六計)』는 마지막 36계책이 도망가는 것이기에 유명하다. 한 장(章)에 여섯 개씩 총 서른여섯 가지 계책을 담고 있다. 그중 미인계는 마지막 6장 패전계(敗戰計)의 첫 번째 계책으로 전체로는 제31계책이다. 미인계가 패전계에 분류된 것은 불리한 상황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비상책을 뜻한다.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흉노(匈奴) 정벌에 나섰던 한 고조 유방(劉邦)은 평성(平城:지금의 대동(大同)시 부근)의 백등산(白登山)에서 되레 흉노에게 포위당한다. 고조는 7일 만에 미인계를 써서 겨우 빠져나오는데 『한서(漢書)』 ‘한왕 신(韓王信)열전’이나 ‘흉노(匈奴)열전’은 “사람을 보내 알씨(閼氏:흉노 황후)에게 후한 예물을 보냈다”고만 기록할 뿐 자세한 내용은 쓰지 않았다. 개국시조가 흉노에게 죽을 뻔하다가 미인계로 겨우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이 창피했던 것이다. 이때 한 고조가 쓴 미인계에 대해 설(說)이 많았다. 후한(後漢)의 순열(荀悦)은 『전한기(前漢紀)』에서 “진평(陳平)의 꾀를 사용해 알씨 부인을 설득해서 탈출했다”면서 “그 계략은 비밀에 부쳤다”고 전하고 있다. 『휘원(彙苑)』이란 책은 “한 시조가 평성에서 포위되었을 때 진평이 목우(木偶:나무 인형) 미인을 알씨에게 주었다”고 전하고 있다. 사신 진평이 흉노 황후에게 미인계를 사용했다는 내용인데, 진평이 미남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가 미남계를 사용했다는 추측도 있다.
『오월춘추(吳越春秋)』는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회계(會稽)에서 패배한 후 미녀 서시(西施)를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바쳐 오나라 조정을 교란시켰다는 내용이 전하고 있듯이 미인계는 패자의 전략이었다. 그러나 미인계가 반드시 패전계인 것만은 아니다. 일본은 조선과 만주를 침공할 때 미인계를 즐겨 사용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였던 배정자(裵貞子)는 일제의 조선 점령에 앞장섰으며 또 유명한 첩보장교 아카시(明石元二郎)의 앞잡이가 되어 만주와 시베리아를 오가며 공작했다. 청나라 숙친왕(肅親王)의 제14왕녀 김벽휘(金璧輝)도 가와지마(川島浪速)의 양녀로 대륙침략 전선에서 간첩으로 활약해 동양의 마타하리로 불렸다. 상하이의 한국 영사들이 한 중국인 여성과 얽히고설킨 ‘상하이 스캔들’은 이런 미인계와 비교하기 과분한 정도로 삼류냄새가 난다. 본인들이 한때 대표했던 대한민국까지 삼류로 전락한 느낌이어서 국민들로서는 화가 날 수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