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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韓中日近現代史(since2011) 원문보기 글쓴이: 정암
메이지 정부는 이전 에도 막부와 협약된 각종 조약을 새 정부의 상황에 따라 대체하기 위해 메이지 첫해부터 순차적으로 협상을 계속하고 있었다. 1872년 7월 1일(메이지 5년)을 기해 구미 15개국과 수교 조약의 개정 시기를 맞아 이후 1개년 통보로 조약을 개정할 수 있다고 동의했었기 때문에 메이지 정부는 이것을 기회로 불평등 조약의 개정을 시도한 것이다.[1]
이들의 첫째 임무는 대단히 수행하기가 어려워서 상대국에 체류하는 기간이 늘어났지만, 둘째 임무는 성공했다고 할 만하다.
후에 언론인, 문필가로 활약하고입헌제정당의 창당에도 참가한 후쿠치 겐이치로
후에 외교관으로 활약하며 1902년 영일동맹 체결 시 주영 공사였던 하야시 다다스
귀국 후 미구회람실기를 펴낸 구메 구니다케 세이난 전쟁에서 죽은 무라타 신파치
사절단 46명, 수행원 18명, 유학생 43명이었다. 사절은 사쓰마를 중심으로 서기관 등은 이전 막부의 신료들이 선정되었다. 이와쿠라 도모미와 그 사람을 돕는 부특명전권대사 3명이 동행하였다. 부특명전권대사는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로 당시 정권의 장관이었다. 이와 행정가들과 학자들도 대동하였는데 그 총수는 48명이었고 함께 데려간 유학생 60명은 미국과 유럽에서 유학하고 나서 귀국하여 일본을 지도하는 중요한 사람들이 되었다.
니지마 조(新島襄, 영어 통역)
이 여행 중에 이와쿠라는 각국에서 격렬히 충격받았다. 미국의 근대국가다운 모습은 이와쿠라의 사상을 훨씬 뛰어넘어, 상당히 충격스러워서 산조에게 전한 서신에도 은부(殷富)를 진흥시키는 사상에, 밖을 나오는 것이 매우 놀랍다’라고 적혀 있다. 그 원인은 철도에 있고 일본의 번영은 철도에 걸려 있어 일본의 동서를 잇는 철도 설치가 급선무가 되었으므로, 이와쿠라는 귀국하고서 일본 철도 회사 설립에 적극으로 관여했으며, 영국에서는 일본에서 생각할 수 없는 공업 기술에 압도되었다. 이미 사절단은 조약 개정이 아닌 각 국에서의 유학이 주요 목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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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쿠라 사절단
출처: http://blog.naver.com/lys1917/221019567372
1871년 5월 일본정부는 신화폐조례를 제정해 7월부터 일본 내에 엔화를 통용시키기 시작했다. 미국 달러와의 환율은 1 : 1이었다.(이후 엔화 가치가 떨어져 1897년에는 0.5 달러로 고정되었다).
8월 29일 일본 정부는 봉건 영주의 영지인 번(藩)을 폐지하고 새로운 행정구역으로 현(縣)을 설치한다고 발표했다(3부府 302현縣 설치).
사쓰마 번은 가고시마 현이 됐고, 조슈 번은 야마구치 현이 됐다. 한 달 뒤에는 번의 군대도 해산시켰다. 칙령 하나로 번을 폐지하는 것을 보고 해리 파크스 주일 영국 공사는 “유럽에서는 수년간 내전을 치르고서야 이룰 수 있는 일”이라며 놀라워했다(파크스는 1865년에 올콕의 후임으로 주일 영국 공사로 부임).
다이묘들이 대체로 번의 폐지에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찬성하기까지 했던 것은 재정난 때문이었다. 많은 번들이 과도한 채무에 시달리고 있어 신정부가 그것을 인수해주기를 갈망했다.
이때 일본의 근대화는 한층 속도를 내고 있었다. 일본에 4년간 체류하면서 이런 변화를 생생히 목격한 프랑스 의사 루도비치 사바티에 (Ludovic Savatier)는 1871년 12월 25일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본의 발전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지난 2년간 일본이 겪은 변혁이 어떠한 것인지 당신은 상상할 수도 없을 겁니다. 이 사람들은 우리가 지난 200년간 이룬 발전보다 더 많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20년 이내에 유럽인이 유럽인인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보다 일본인이 일본인인 것을 더 자랑스러워 할 날이 올 것입니다. 정말로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1871년 12월 사절 46명, 수행원 18명, 유학생 43명을 포함해 모두 107명으로 구성된 일본의 구미사절단이 미국의 태평양 우편 증기선 회사 (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 소속 정기여객선 아메리카(SS America) 호를 타고 요코하마 항을 출발했다. 우대신 이와쿠라 도모미가 특명전권대사였고, 참의 기도 다카요시, 대장경(大藏卿: 재무장관) 오쿠보 도시미치, 공부대보(工部大輔: 공업부 차관) 이토 히로부미, 외무소보 야마구치(山口尙芳) 등 4인이 부사(副使)였다. 이 사절단은 조약개정을 요구하고 서양 문물을 시찰하기 위해 파견됐다.
주일 미국공사 드롱(Charles E. Delong, 1832~1876)도 일본 사절단이 미국으로 가는 길에 동행했다.
1872년 3월 후쿠자와 유기치는 《학문의 권장》제 1권을 간행했다. 이 책은 개개인의 합리주의적 각성을 유도하는 국민 계발서이다.
이 책에는 "독립의 기력(氣力)이 없는 자는 반드시 남에게 의존하고, 남에게 의존하는 자는 반드시 남을 두려워하고, 남을 두려워하는 자는 반드시 남에게 아첨한다"는 구절이 있는데, 많은 일본인이 크게 공감했다. 모두 17권으로 나온 《학문의 권장》은 일본에서 300만부가 넘게 팔렸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태평양을 횡단해서 미국에 도착하여 1872년 3월 4일 그랜트 미국 대통령을 면접했다. 그랜트는 조약개정이 가능하다고 말했으나 피시 국무장관은 조약개정 협상에는 전권위임장이 필요하다며 이를 요구했다. 오쿠보와 이토는 전권위임장 문제로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7월에 다시 미국 워싱턴에 도착했다. 그동안 주일 독일 공사 브란트가 독일로 돌아가던 중 워싱턴에 들렀을 때 기도 다카요시를 방문해 최혜국 조항에 대해 설명해주며 섣불리 미국과 교섭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이때 일본 정부 요인들은 아직 전권위임장과 최혜국 조항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국제법에 어두웠던 것이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미국은 경탄할 만하지만 배울 것은 별로 없는 나라라고 보았다. 미국과 같은 민주공화정은 일본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미국을 떠나 8월 영국에 도착했다. 영국에서 이들은 몇 개의 소그룹으로 나뉘어 리버풀, 맨체스터, 글래스고, 에든버러, 뉴캐슬 등을 방문하여 영국의 엄청난 공업발전 상황과 도시행정을 관찰했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영국에 대한 소감을 적은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영국의 공업발전에 대해 경탄했다.
우리가 가본 곳 어디에서나 땅에서 자라는 것은 없고 오직 석탄과 철뿐이다. … 공장은 셀 수 없이 늘어나 검은 연기가 곳곳에서 하늘로 치솟고 있다. … 이것이 곧 영국의 부강을 말해준다.
이와쿠라 사절단이 보기에 영국은 일본과 비슷한 점이 많기는 하지만 영국과 같은 입헌군주제가 일본에서도 가능한지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이어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러시아,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위스를 시찰했다.
1872년 12월 16일 프랑스로 들어간 이와쿠라 사절단은 파리 코뮌으로 파괴된 파리 시내를 목격했다. 프랑스 대통령 아돌프 티에르(Louis Adolphe Thiers, 1797~1877)는 이와쿠라 사절단을 접견하면서 일반 국민은 무지몽매하므로 뜻대로 하게 내버려두면 큰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백성들의 주의, 주장을 그대로 묵인하면 그것이 사회를 파괴하는 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독일에 가서는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1898) 수상을 만났다. 비스마르크는 평화는 국가들이 서로 세력균형을 유지함으로써 유지되는 것이지 결코 만국공법(萬國公法: 국제법)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와쿠라 일행은 독일이 위로부터 개혁을 하여 통일을 이루었고 뒤늦게 산업혁명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과 유사한 처지임을 알게 됐고, 따라서 독일에서는 배울 것이 많다고 판단했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돌아오는 길에 이집트, 실론, 베트남, 싱가포르 등을 들른 뒤 홍콩과 상해를 거쳐 1873년 9월 일본에 도착했다. 사절단은 이런 나라들이 서양 열강의 식민지가 되는 것은 문화적인 격차로 인해 불가피하다는 서양 열강의 논리를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