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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7년 8살 때였다. 문득 TV 드라마를 보다가 '나도 저기 나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치하지만 '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상황이었다. 그리고 연기자가 평생 꿈이 되어버렸다.
차마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은 못하고 그저 뭔가 배우고 싶다며 어머니께 떼를 써 이듬 해 연기 학원에 등 록했다. 특이한(?) 외모 덕분이었는지 다행이 1년이 되지 않아 단막극을 시작으로 얼굴을 조금씩 알리기 시 작했다.
내가 지금 출연하고 있는 프로그램은 MBC TV 시트콤 <뉴 논스톱>과 KBS TV 주말드라마 <태양은 가득 히>이다. 대학생 역할로 연기를 하고 있는 <뉴 논스톱>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춤을 조금씩 보여줄 수 있어 좋고 불량배 역할을 하고 있는 <태양은 가득히>는 쟁쟁한 선배님들에게 연기를 배울 수 있어 좋다. 데뷔한 지 13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연기는 어렵다. 하지만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나도 모르게 주어진 배역에 몰두하는 것을 보니 적성을 제대로 살리긴 살렸나 보다.
내가 태어난 곳은 서울이다. 내 외모를 보고 혹시 냇가에서 고기잡고 산에 밤따러 다니던 시골소년이 아닌 가 하는 분들이 계신데 난 정확히 서울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물론 나를 제외한 두 형들은 광주에서 태어나 셨다. 집에서는 어머니와 형들의 영향으로 사투리도 가끔 쓰지만 한번도 서울을 벗어나서 살아본 적이 없다.
또 한가지. 아직도 나를 보고 "MBC TV <전원일기>에 나오는 금동이 아니냐"고 물어오시는 분들이 많은데 다시 한번 이 자리를 빌어 말씀을 드리고 싶다. 난 <전원일기>에 한 번도 출연한 적이 없다.
그러면 이제부터 '금동이'가 아닌 '동근이'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다.
나는 3형제 중의 막내다. 나를 제외한 두 형과 부모님은 모두 고향이 광주다. 그렇다 보니 가족들의 서울 환 경이 낯설 수 밖에 없었다.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생활한다는 것이 그리 쉬울 턱이 없었지만, 부모님의 각별한 보살핌으로 어렵지 않게 생활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 그리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로지 '자식 하나 잘 되는 것'을 삶 의 즐거움으로 삼고 계신 부모님 덕에 오늘날의 양동근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난 9살 무렵 아역 탤런트 모집 공고를 보고 반드시 그곳에 가야 된다고 결심했다. 어머니는 쉽게 수긍을 하 셨다. 그리고 학원에 등록을 했다. 지금은 학원 관리가 비교적 체계적으로 이뤄지고 스타가 될 수 있는 길이 많지만 그때는 '얼굴 자주 내밀기'가 전부였다.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딱 두 달 정도 연습을 하고 나서 바로 오디션 기회가 찾아왔다. 87년 이종한 감 독님이 준비하시던 송년 특집 의 주인공을 뽑는 자리였다. 이제 1년도 안된 새내기 연기자가 뭘 알았을까. 난 카메라 옆에서 이리저리 지시를 내리는 연출자의 말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초보 연기자에게는 카메라 돌아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심장 박동소리보다도 더 클 때도 있다. 그 소리가 얼마나 무서운지는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한참 '연기'란 걸 하고 있을 때 귓가를 때리는 감독님의 목소리가 있었다. "좋아, 좋아" "그래, 그렇게 해.
막연히 꿈꾸던 연기자로 공식적인 첫발을 내딛던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각종 단막극에 아역으로 출연했다. 내 인상이 뚝심 있는 시골 아이의 그것과 닮았는지는 몰 라도 시골이 배경으로 나오는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했다.
KBS TV 6?5 특집극을 시작으로 SBS TV 창사특집극, MBC TV 베스트 극장 등 각종 단막극에 출연했다. 이때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신분은 분명 학생인데 교과서와 학교를 구경하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별것 아닌 일로도 고민이 많을 사춘기 무렵, 연기자와 학생을 놓고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
결국 청운중학교에 진학하던 86년 드라마 출연은 고사하고 CF만 출연하기로 했다.
이 때부터 공부에 몰입했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도 재미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좋았던 것은 잃어버린 학 교와 친구를 되찾은 것이었다. 친구들의 도움도 받아 학교 수업에 매달린 결과 중학교 1, 2학년 때 줄곧 40~50등을 맴돌던 성적이 졸업할 때는 8등으로 변해 있었다.
중학교 시절 나에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농구였다. 쉬는 시간은 물론, 방과 후에도 한 두 시간씩 꼭 농구를 해야 직성이 풀렸다. 발목 삔 것이 수십번, 손가락 골절이 또한 수십번이었다.
지금도 이때 입은 상처 때문인지 장시간 서 있으면 온 몸이 욱신거리며 아파온다. 그래도 사춘기 시절을 방 황하지 않고 넘길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농구 덕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값진 대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 다.
게다가 단체 경기를 통해 팀워크의 소중함도 배웠고 고민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친구도 생겼기 때문에 지금 이라도 다시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이 시절이 좋다.
아무래도 시청자들에게 가장 큰 인상을 남긴 것은 91년 방송된 KBS 2TV 드라마 <형>이었다. 내가 맡은 역은 부모님을 여의고 동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살아가는 듬직한 캐릭터로 당시 높은 시청률을 기록 하며 인기를 끌었다.
특히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이 나를 좋아했다. 길을 지나다 보면 할머니들이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얼 마나 고생이 많으냐"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슈퍼마?에 들어가 빵을 사주며 "배 고플텐데 많이 먹고 힘내라" 는 말로 격려를 해주셨다.
기분이 묘했다. 그들 중에는 드라마 상의 인물이 실제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의 극중 연 기가 좋아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더 기뻤다.
<형>의 아역 부분이 끝이 날 무렵 난 자신감을 얻었다. 이때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드라마 출연에 재미가 붙을 무렵 중학교 농구부에서 활동하던 작은 형이 내게 충고를 했다. 평생 연기자로 남고 싶다면 기본기를 좀 더 충실히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었다.
형은 농구가 너무 좋아 학업을 포기하다시피 하고 농구에 매달렸다. 하지만 공부 때문에 운동을 그만둔 경 험이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을 위해 마음을 가다듬는 형의 모습은 내게 큰 힘이 되었다.
그래서 이때부터 아침 먹고 가는 곳이 방송사가 아닌 학교가 됐다. 99년 특례가 아닌 정시로 서일대 연극영 화과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도 어찌보면 형의 충고로 가능했던 것 같다.
난 춤에 관심이 많다. 아니 그보다 춤을 사랑한다.
이런 춤에 대한 관심은 6살때인 19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화창한 봄날 오후 조용히 집에 앉아 만 화책을 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에 다니던 큰 형이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지만 마이클 잭슨의 공연 실황이라면서 <빌리진>을 부르는 장면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가져왔다.
형이 비디오를 틀어 놓고 그럴싸 하게 따라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형이 외출한 틈을 타서 몰래 마이클 잭슨 공연 실황을 보면서 따라서 했다.
형의 춤추는 모습이 너무나도 멋있었던 것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처음엔 몸이 생각대로 잘 움직이지 않았지만 어느 틈에 리듬을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일주 일이 채 되지 않아 마이클 잭슨의 춤을 어느 정도 따라 할 정도가 됐다. 춤에 재미가 들었다. 춤을 추는 동 안은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았다.
그 이후 난 음악 프로그램에 나오는 댄스 가수들의 모습을 녹화하기에 바빴다. 특히 가수 박남정의 춤추면 서 노래하는 장면은 수 백번 보게 되어 테이프가 늘어졌고 '현진영과 와와'의 토끼춤은 내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초등학교 5학년 학예회 때 마이클 잭슨의 노래, 안무를 준비해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그때 만큼은 이 세 상에서 내가 최고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도 가끔씩 출연 드라마 출연팀의 회식 자리가 있을 때 나이트 클럽에서 춤을 추곤 한다. 분명한 것은 춤을 조금 잘 추는 내 모습에 보내는 사람들의 환호 보다도 춤 자체가 좋아서 추는 것이다. 나보다 더 댄스 에 소질이 있는 선배나 동료들보다 퍼포먼스에서는 뒤질지 몰라도 춤에 대한 열정만큼은 절대 뒤지지 않는 다고 자부한다.
SBS TV 창사특집 <관촌수필>은 KBS TV 드라마 <형>과 느낌이 비슷해 연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충청도의 어느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주로 촬영이 이어졌는데, 농촌 분위기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된 덕분에 무리없이 진행됐다. 게다가 머리를 빡빡 밀어 분장도 별 차이 없었던 것도 도움이 된 것 같다.
중학교 시절에 가장 안타까웠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여자 친구 한 번 사귀어보지 못한 것이다. 사춘기가 되면 괜히 이성에 끌린다고들 하지만 난 도통 관심이 없었다. 하긴 지금도 별 관심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긴 하지만.
중학교 2학년 때 본격적으로 학교 공부에 돌입했다. 우등생들이 들으면 사실 우습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학교와 집을 왔다갔다 하면서 최선을 다했다. 언뜻 생각해보면 지겨울 것 같은 내 생활에 는 다행이 활력소가 있었다. 전에 말했듯이 그것은 농구와 춤이었다.
한번은 점심 시간에 교실 뒤편에 책상을 밀쳐놓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춘 적이 있었다. 반 아이들이 빙 둘러 싸고 구경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두명의 친구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리 고 그 친구들은 내 학창 시절에 남은 단 두명의 동창생이 됐다.
그때 우리 셋은 마치 형제처럼 붙어다녔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연결해 준 것은 바로 춤이었다. 지금은 서 로 바빠서 가끔 연락을 주고 받는 사이가 됐지만 당시는 주말에 함께 모여 연습하며 서로의 춤 솜씨를 자랑 하기도 하고 조언 하기도 했다.
이렇게 만난 친구들과의 우정은 고등학교 시절까지 이어졌다. 나는 이 시절을 '장미빛 나날들'이라고 말할 정도로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춤을 사랑했던 우리들은 한가지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됐다. 그것은 바로 춤을 출 공간이 없었다 는 점이다. 교실은 주변의 시선에 너무 신경을 써야 했고, 그나마 야외도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방해을 받기 일쑤였다.
그래서 우리는 이 어려움을 '종교적'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의기가 투합되자 가까운 교회로 곧바로 찾아가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쉬는 틈을 이용해 교회의 빈 공간에서 춤을 췄다.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는 춤을 경 박하거나 단순히 쾌락의 도구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만드는 경건한 의식으로 생 각한다. 하나님도 이 점을 널리 양해해 주셨으리라 여겨진다.
이때만 해도 서태지와 아이들은 우리의 우상이었다. 세 명이 <난 알아요>를 포함한 그들의 히트곡을 녹화 해 보며 춤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춤이 몸에 익을 무렵 어느샌가 우리는 자신들의 춤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때 우리들 생각은 철없는 아이들의 그것이었다.
이렇게 중학교 시절을 보내고 경복고에 진학하면서 난 인생 최대의 방황기를 맞이하게 된다. 물론 이 방황 기는 중학교 3학년 말에 찾아왔다. 짝사랑하던 여학생이 생기면서부터 모든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그녀 는 교회에서 만난 청순한 소녀였다.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이 열병에 난 몸을 추스리지 못했다. 그저 좋았다. 가슴이 콩닥거리고 식은 땀이 나는 증세를 처음 접한 나는 도저히 다른 생각이 파고들지 못하는 머리를 움켜쥐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짝사랑에 빠진 나는 3개월 가량 그녀를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을 뿐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중학교 때는 이 성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갑자기 찾아온 이런 느낌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함께 춤을 추던 친구들은 이때부터 나의 카운슬러가 됐다. 함께 땀을 흘리고 나서 내 감정을 정리해줬다. 한 마디로 이때 생활은 오로지 춤과 사랑(?)이었다.
친구들의 충고로 드디어 그녀에게 고백하기로 했다. 교회에서 만난 그녀를 과감하게 불러 사귀고 싶다고 했 다. 그녀는 한참을 생각하고도 일주일간 생각할 시간을 더 달라고 했다.
한 주동안 온갖 상상을 했다. 물론 그 나이에 흔히 일어날 수 있는 경험이었지만 당사자에게는 늘 특별한 법이다. 고등학교 입시인 연합고사가 끝나고 경복고에 진학하기로 확정되고 나서 찾아온 여유가 이런 감정 을 부채질 했는지도 모른다.
일주일이 지난 후 그녀가 내게 준 대답은 "평소처럼 지내자"는 것이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내게 이성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의미란 것을. 그저 가깝게 잘 지내자는 말로만 받아들인 나는 정말 눈치가 없었나 보다.
이렇게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KBS 1TV <신세대 보고서, 어른들은 몰라요>를 시작으로 방송활동을 재개했다.
주로 맡은 역할은 부모님께 반항하며 집을 나가는 '아웃사이더'였다. 그러나 실제 생활은 가출 따위는 생각 지도 않는 착한 학생이었다. 하긴 드라마에서 허구헌날 가출했으니 실제 생활에서 가출이 얼마나 시시했을 까.
고등학교 때는 정말 공부한 기억이 별로 없을 정도로 춤에 몰두했다. 방송 출연이 없는 날은 언제나 친구들 과 만나 춤 연습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들은 의기 투합해 다운타운에 본격 진출하기로 결심했다. 3~4년간 연습도 꾸준히 했고 가수들 흉내내는데 자신감이 붙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우리는 고교 1학년 가을 이태원에 있는 유명한 댄스 클럽을 찾아갔다.
지금은 없어진 '문 나이트'라는 곳이었다. 이곳은 정말 프로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우리가 찾아간 날도 많은 형들이 연습에 열중하고 있었다. 우리는 춤을 배우고 싶어 찾아왔다는 말로 은근히 '실력을 겨뤄보자'는 속 내를 표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린 정말 '우물 안 개구리'였다. 일단 그 형들은 우리들의 춤을 먼저 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그동안 연습한 서태지와 아이들의 춤 동작을 자신있게 선보였다. 뒤에서 팔짱을 끼고 보고 있던 형 들이 하나 둘 자신들의 춤을 보여줄 땐 정말 충격 그 자체였다.
우리들이 가장 힘들게 연습했던 동작을 너무나도 자연스레 보여준, 그것도 별로 고민하지도 않고 간단하게 펼치는 모습이 놀라웠다. 일단 우리들은 그 자리를 떴고 며칠 동안 충격을 잠재우기 위해 고생했다. 며칠 후 부터 문 나이트를 밥 먹듯이 드나들었다.
그리고 이태원 주변의 댄스 클럽들을 미친 듯이 찾아 다니며 춤을 배웠다. 덕분에 춤은 물론 랩 실력도 어 느 정도 수준급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친구 이모님이 찾아와 우리들에게 댄싱 그룹에서 활동해 볼 의향이 있는지를 물어오셨다. 댄 싱 그룹의 이름은 '윌(will)'이었다.
내가 참여한 댄싱그룹 윌은 벌써 1집을 내고 언더 그라운드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동안 이태원의 수많은 댄스 클럽을 돌아다니며 익힌 춤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절호의 찬스였다.
그룹 윌은 별반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해체됐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2집 음반 작업을 하면서 많은 것을 얻 을 수 있었다. 특히 곡을 믹싱하면서 얻게 되는 독특한 효과를 경험한 것은 꽤 큰 소득이었다.
또한 랩 어레인지먼트를 익힐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우리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랩 작 곡 혹은 작사가 어울릴 것 같다. 그때가 97년이었다. 랩이 한창 인기를 끌고 있던 때라서 쉽게 자료도 구할 수 있었고 조언해 줄 사람도 많았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랩을 작곡해주고 돈을 받기도 했다. 일종의 아르바이트였다. 돈을 받는다는 사실 보다 는 언더 그라운드에서는 어느 정도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더 기뻤다.
댄스클럽 문나이트에서 알게 된 형들이 곡을 주기도 하고 랩을 익히는데 도움을 많이 줬다. 이때 이를 악물 고 통과한 댄스 트레이닝 덕분인지는 몰라도 최근에 MBC 무용단 안무에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내가 춤을 춘다고 하면 주위 분들은 '어디 한번 춰 보라'며 춤을 실연으로 보여주기를 원한다. 이런 요청을 받을 때가 난 제일 당혹스럽다. 춤은 분위기고 마음의 표현이다. 그래서 난 보여주기 위한 춤은 거절한다. 몸과 마음이 모두 춤을 원할 때만 나선다. 실력이 아닌 열정으로 인정 받기 원할 뿐이다.
내가 참여한 그룹 윌이 비록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결코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단지, 마음이 그리 편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때 익힌 경험은 언제가 연예 활동의 좋은 밑거름이 되리라 짐작한다.
윌은 공중파 방송에 2회, 그리고 케이블TV 음악채널에 몇 번 출연했다. 그리고 방송을 완전히 그만뒀다. 인 기가 없으면 곧 바로 사라지게 되는 연예계 일면을 실감할 수 있었다.
사실 가수가 꿈은 아니었다. 그리고 연기와 노래를 같이 하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춤이 좋아서 댄싱팀에 가 입했을 뿐이었다. 따지고 보면 노래보다는 연기를 더 좋아한다.
좋아하는 배우는 홍콩에서 활약하고 있는 코믹스타 주성치다. 영화 <희극지왕>에서 보여준 연기는 아직도 내가 따라서 하고 싶은 것 중의 하나다.
영화는 주로 액션 영화나 스릴러, 사이코물을 좋아한다. 영화 <나이트 메어>를 보면서 좋아했던 기억이 난 다. 나도 언젠가는 액션 영화의 주인공으로 출연해 '영웅'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서서히 진학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춤을 전공하고 싶기도 했지만, 어릴적 꿈 이 연기자 였으니 당연히 연극 영화과를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해 공부는 열심히 하지 못했다. 게다가 걱정만 앞설 뿐 준비 상황도 미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난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지원했던 98년 대학 입시에서 쓴 잔을 마셨다. 내 생애 처음 찾아온 시련이나 다름 없었다.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괴로움을 처음 알게 되었다
재수를 하면서 영화 <짱> <화이트 발렌타인>에 출연 기회가 찾아왔고 KBS 2TV 청춘드라마 <광끼>에도 얼굴을 내밀었다. 이런 방송과 영화 출연은 의기소침하던 내 생활의 활력소였다.
오랜만에 드라마에 출연을 하니까 시청자들은 MBC TV <전원일기>의 '금동이'가 활동의 폭을 넓혔다며 좋아했다. 내 얼굴이 금동이 역할에 잘 어울리는지는 몰라도 난 <전원일기> 에 출연한 적도 없다. 이런 얘기는 여러 번 신문과 방송을 통해 알려졌는데, 아직도 길을 가 다보면 '금동이 지나간다'며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어 안타깝다. 정말 연예인은 이미지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에 합격해 공부를 했다면 아마도 공백기를 거쳐 사라져 버리는 아역탤런트가 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정말 인생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가 보다. 가끔 사람들이 ' 삶의 목표가 뭐냐'고 물으면 '되는대로 살겠다'고 대답한다. 이 말은 아무 생각없이 살겟다는 말이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대처하겠다는 뜻이다.
1년이 지난 후 난 서일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방송 활동을 마무리하지 못해 지금은 휴 학을 한 상태지만 올 여름 복학해서 학업도 병행할 계획이다. 아울러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춤연습을 하던 시절처럼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어하는 일들을 맘껏 즐기고 싶기도 하다.
올 한해도 확실히 기억에 남는 연기로 펜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진짜 양동근으로 남고싶다. 따뜻한 눈 으로 지켜바 주시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 " 저 금동이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