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4월 노무현 정권의 첫 번째 육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한 남재준 대장은 참여정부에서 군을 이끌 대표 주자였다. 노무현 대통령의 신임과 정권 실세의 전폭적인 지원, 여론의 찬사를 한 몸에 받은 그는 완벽함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총장처럼 보였다. 계룡대 앞뜰의 라일락이 향기를 뿜어내던 4월. 남재준 참모총장은 취임하자마자 육군본부(육본) 간부들을 대강당에 소집해 ‘군인의 길’에 대한 강연을 했다. 육군 장교단의 ‘정신 혁명’을 외치는 2시간 동안의 폭풍 강연에 간부들은 마치 무엇에 홀린 듯 열광했다.
너무 인기가 치솟은 게 문제였다. 세간의 시선이 남 총장에게 쏠리던 중 한 일간지가 ‘노무현은 남재준에게 배워라’라는 칼럼을 실었다. 가판에 게재된 이 칼럼에 육본은 발칵 뒤집혔다. 육본이 총동원돼 해당 언론사를 압박해 간신히 제목만 바꾸는 데 성공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군사 지도자의 인기가 치솟게 되면, 그것은 언제나 비극으로 끝났다. 정치권력은 자신에게 복종해야 할 군인의 권위가 커지면 이에 대해 숙명적으로 위협을 느끼게 돼 있다. 당시 육본은 자신들의 왕국이 영토를 너무 확장했다는 사실에 당혹해했고, 일말의 불안감을 가졌다. 그 불안은 이듬해 사상 초유의 육본 인사 비리 의혹 수사로 구체화된다.
2013년 12월23일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이 국회에서 열리는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하기 위해 회의실에 들어서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정확히 10년이 지난 2013년 4월. 이번에는 국정원장 남재준이 취임 첫 외부 일정으로 계룡대를 방문해 3군 본부의 간부들을 모아놓고 강연을 했다. 총장 시절과 같이 ‘군인의 길’을 민간인 남재준의 신분으로 웅변하는 동안 배석한 조정환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한 주요 간부들은 10년 전의 그 긴장감을 기억했다. 이 강연이 있고 나서 남 원장은 한국 정치에 파란을 몰고 올 ‘종북 세력과의 전쟁’을 수행했다. 공교롭게도 그 상대는 10년 전 자신을 총장으로 임명한 참여정부였다.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로 민주당을 압박하면서 이석기 의원을 비롯한 통합진보당과 진보 단체에 대한 전선이 대폭 확대됐다.
“<양양가> 안 불러” 해명 불구 논란 계속
역시 10년 전처럼 또 남재준 열풍이 불었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첫해가 저물어가던 지난 연말의 언론에는 남재준 국정원장에 대한 기사가 폭주했다. 청렴하고 결백한 군인, 명예와 희생의 정신, 단호하며 냉혹한 전사의 풍모를 묘사하는 무수한 일화가 쏟아져 나오고 디테일이 추가됐다. 그중 압권은 2013년 12월21일 국정원장 공관에서의 송년 만찬이었다. “2015년에는 자유 민주 체제로 통일이 될 것”이라며 “통일을 위해 다 같이 죽자”고 한 남 원장의 결기 어린 발언이 알려졌다. 조선일보는 이날 남 원장이 간부들과 함께 자신의 애창곡인 독립군 군가 <양양가>를 불렀다고 전했다. “인생에 목숨은 초로(草露)와 같고 / 이씨 조선 오백년 양양하도다 /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 아아 이슬같이 기꺼이 죽으리이다.” 그리고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며 의식을 마무리했다고 한다.
2003년 4월2일 노무현 대통령이 보직 및 진급 신고식에서 남재준 육참총장의 삼정도에 수취를 달아주고 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어둠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국가 정보기관의 수장이 과도하게 언론에 노출되는 게 정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오직 남재준이기 때문에 가능해 보인다. 각종 블로그와 사회관계망(SNS)에서 남 원장에 대한 추억, 헌사, 평가가 줄을 잇는 ‘남재준 현상’ 조짐도 보인다. 영웅을 만들어내고, 그를 통해 무언가를 숭배할 남성적 권위를 찾는 대중심리가 남 원장에게 쏠리고 있다는 평가도 이어졌다. 그러나 10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불안이 내포되어 있다.
2013년 12월31일 국회 법사위에 출석한 남 원장은 자신의 송년회 회식 발언에 대한 언론 보도는 “와전된 것”이라며 진화에 나섰다. “<양양가>를 부른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스스로 영웅이 되는 데 대한 부담을 이기지 못하는 바로 그 모습은 총장 시절 그대로였다.
말 한마디, 노래 한 자락까지 기사화되는 남 원장의 파격 행보에 대해 당사자인 남 원장은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 질문을 남 원장에게 직접 하면, 그의 답변은 허탈할 정도로 간단하다.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서”다. 북한이 곧 쳐들어와 남한을 사흘 만에 공산화하고 우리는 잔혹한 공산 치하에서 살게 되는 그런 파국을 실제적 가능성으로 믿는다. 여기에서 남 원장이 미국의 초대 국방장관인 제임스 포레스털과 닮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국가는 안보에 실패할 수 있다”는 비관적 국가관, “적이 곧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위기의식, “조직을 지켜야 한다”는 헌신성까지 모두 닮았다는 것이다.
이른바 ‘정중부의 난’(고려 시대 무신의 난)으로까지 회자될 정도로 당시 청와대와 군을 발칵 뒤집어놓았던 노무현 정권과 남재준 총장 간의 갈등 양상은 군 검찰단이 인사 비리 혐의로 육본을 압수수색한 2004년 말 긴장감이 정점으로 치달았다. 당시 남재준 총장은 집무실에 들른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의 국군 통수라는 것이 무엇인가? 대통령과 군사 지도자 중간에 그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당시 검찰의 인사 비리 수사와 청와대 일부 인사의 군 인사 개입에 대해 불편한 심경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참여정부 측 핵심 인사들은 이런 남 총장이 못내 불만스러웠다. “대통령이 직접 군 운영에 대해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지침을 줄 만큼 한가하지도 않고 군 인사에 대해 전문적이지도 않다. 그렇다면 국방장관이나 청와대 수석이 대통령을 대신해서 인사 지침을 협의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총장이 국방부나 청와대와 인사를 잘 협의해서 하면 그만인데, 왜 이렇게 이 사람은 까다로운가?”라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남 총장의 생각은 달랐다. 군대 지휘관은 부하에게 “사지로 들어가라”고 명령할 수 있어야 한다. 부하에 대한 생사여탈권이 달린 문제를 결정하는 지휘관이 자기 소신대로 인사를 할 수 없다면 부하가 과연 명령에 복종하겠느냐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언뜻 보면 합리적인 생각이지만 혹시라도 이런 생각이 “반드시 내 사람을 중용한다”는 결과로 구체화될 때, 인사에서 소외된 대다수 장교로부터 지탄을 받는 큰 함정에 빠질 수 있게 되는 셈이었다.
장교 인사 청탁을 배제한다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당시 남 총장의 지침을 받은 윤일영 인사참모부장이, 야전의 의견이 전달될 수 있는 언로까지 차단하면서 아예 전화도 끊어버리고 문까지 걸어 잠그는 것을 두고 일선 지휘관들의 분통이 터져 나왔다. 예전에 인사참모부장의 역할은 연초부터 야전을 순회하면서 인사에 대한 주요 지휘관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것이었는데, 이것도 없어졌다. 여기에다 법에도 없는 임의 조직인 인사운영위원회를 만든 것을 두고 “총장이 야전을 소외시키고 제 사람 챙기는 수단으로 악용하려는 것 아니냐”는 곱지 않은 시선도 많았다.
남 총장이 자기 사람만 챙긴다는 의혹이 불거진 계기는 그해 10월 소장 진급에서 탈락한 육사 31기생 중 한 명이 총장실로 찾아와 전역지원서를 내던지며 총장의 인사에 정면으로 반발한 사건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얼마 후 서울 용산 삼각지의 장교 숙소에 “남 총장이 자기 사람만 챙긴다”는 비방을 담은 괴문서가 뿌려졌다.
당시 육본은 아래로부터의 도전과 더불어 상급자인 윤광웅 국방장관과도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윤 장관은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실로부터 “대통령 지시로 군 장성 진급 심사를 다시 하라”는 지침을 받고 장군 진급 심사 종료 직후에 김승렬 차관보를 육군에 급파해 대통령 지시 사항을 이행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청와대 국정상황실이 다시 개입해 “대통령은 그런 지시를 한 적이 없다”며 지시를 철회하도록 해 급파되었던 김 차관보가 서울로 발길을 되돌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남 총장은 이런 일련의 사태를 청와대와 국방부가 육군을 와해시키려는 의도로 해석했다. 이 사건 이후 육본 장교들이 사석에서 해군 출신이었던 국방장관을 지칭하면서 아예 직함이나 존칭을 빼고 “윤광웅”이라는 이름만 부르기도 했다. 상급 기관의 인사에 대한 부당한 정치적 개입이 부각되면서 남 총장에 대한 야전에서의 불만이나 반발 여론은 자연스럽게 희석되었다.
김종환 전 합참의장(왼쪽.ⓒ 시사저널 이종현)과 이상희 전 국방부장관. ⓒ 시사저널 이종현
이상희 “밑에서 한 일이라 모른다고?” 비난
2004년 11월 군 검찰단의 육본 압수수색에서 실무자들은 수사관들에게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서류 캐비닛을 열지 못하도록 했다. 그 속에는 인사에 대한 남 총장의 친필 지침이 들어 있었다. 수사가 확산되자 야전의 사단장급 지휘관들 사이에서 인사 사태에 대한 육군 수뇌부의 책임을 촉구하는 연판장까지 돌았다. 한편 괴문서와 인사 반발 여파로 진행된 국방부 검찰단의 인사 비리 수사에서 비록 남 총장 본인은 기소되지 않았지만 주요 인사 실무자들이 항소심에서 선고유예 판결을 받음으로써 육군은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진급 대상 장교 중 일부에 대해서만 선택적으로 기무사의 신원 자료가 검증 없이 활용돼 인사의 공정성에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노무현 정권 당시에 불거졌던 남재준 총장의 인사 논란은 정권이 물러간 최근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명박(MB) 정권 시절 국방장관을 지냈던 이상희 전 국방부장관은 지난해 3월 ‘국가안보전략연구’에서 ‘공은 나에게, 책임은 부하에게?’라는 제목의 논평을 게재했다. 2004년 당시 육군 인사에 대한 절차의 위법성 문제가 불거진 사건을 지목하며 “당시 육군의 최고 책임자는 밑에서 한 일이라 자신은 모른다”며 책임을 회피했다고 비판한다. 사실상 남재준 총장에 대한 직격탄이다. 남 총장과 육사 동기생이면서 당시 합참의장이던 김종환 대장은 아예 면전에서 동기생인 남 총장을 모욕한 적도 있다. 장군 진급 인사가 발표된 2004년 말 국방부 복도에서 마주친 남 총장에게 김 의장은 노골적으로 “나는 이런 따위의 진급 심사를 절대 인정 못한다”며 막말을 퍼부었다.
더 심한 비난도 있다. 2002년 제2 연평해전 당시 국군 정보사령관이었던 한철용 예비역 소장은 지난해 7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제2 연평해전 당시에 북한의 도발 정보를 누락한 당사자로 남재준 당시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지목하고 “기회주의적인 장군”이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출세 가도를 달린 사람이 바로 남재준 대장이 아니고 누구냐는 투다. 윤광웅 전 장관 역시 자신이 남 총장을 제거하려 한 핵심 인물로 지목된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필자의 질문에 무척 괴로워하며 “절대 진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육본 수사 당시 청와대 민정비서관이었던 전해철 민주당 의원은 필자에게 “당시 남재준 총장에게 면죄부를 준 곳은 다름 아닌 우리(민정수석실)였다”며 “참여정부는 남 총장에게 빚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직각 보행만 하는 ‘생도 3학년’ 별명
군과 정치권 주변에서는 이렇듯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자기 사람을 챙기는 데 집착한 그를 두고 “마치 생사를 같이할 일종의 운명 공동체를 형성하는 듯하다”고 말한다. 실제 박근혜정부에서 첫 국정원장에 임명된 남재준 원장은 부임 직후 군 출신 등용과 관련해 파격적 행보를 보였다. MB 정권에서 임명돼 3개월째 일하고 있던 국정원장 국방보좌관(육사 42기)인 ㄱ준장을 군으로 돌려보내고, 자신의 과거 총장 시절 수석 부관을 역임했고 이제는 군복을 벗을 처지인 ㄴ대령(육사 37기)을 대신 기용했다. 국정원의 파격적인 인사 교체에 대해 육본은 “인사 관행에 어긋난다”고 항의했으나, 국정원은 “당신들이 ㄴ대령을 진급시키지 않으려면 더 이상 말하지 말라”며 일축했다. 이 파문이 잦아들 무렵 남 원장은 자신의 오랜 측근인 군 통신장교 출신을 국정원 3차장에 기용하는 또 한 번의 파격을 감행했다. 여기에다 남 원장은 국정원 내부 살림을 담당하는 총무국장 자리까지 해병대 출신의 자기 사람으로 채웠다. 한편 총장 시절 비서실 출신인 ㄷ 예비역 대령(육사 38기)도 국정원에 입성했다. 자기 사람이 아니면 절대 쓰지 않는 예전의 행태 그대로다.
남재준 원장이 보여주는 지사적이고 혁명가적인 면모가 5·16 군사 쿠데타 전야의 박정희 육군 소장이나 10·26 전야의 김재규와 흡사해 보인다는 평가도 있다. 무언가 큰일을 낼 것 같은 긴장감을 순식간에 전염시키는 것, 그게 바로 혁명가적 군인의 면모라는 것이다. 별명이 ‘생도 3학년’인 남 원장은 직각 보행을 하던 생도 시절과 마찬가지로 지금 바라보는 세상도 여전히 직각인 것처럼 보인다. 사각형의 세상에서 공산주의냐, 아니냐는 가로와 세로를 구분하는 명확한 꼭짓점인 셈이다. 그것이 횡적으로는 ‘종북 세력 척결’이라는 전선을 형성하고, 종적으로는 북한에 대한 집요한 심리전으로 나타난다. 이 사각형이 바로 ‘남재준의 전쟁터’라고 할 것이다.
지금껏 국정원이 왜 북한 김정은의 “3년 내 무력 통일” 발언, 모란봉 예술단 단원 처형과 리설주에 대한 구설 확산, 장성택 숙청에 대한 신속한 정보 수집 등 북한에 대해 직접적인 심리전을 수행해왔는지를 짐작케 한다. 여기에다 최근 정보 당국은 북한이 기존의 국지적인 도발에 안주하지 않고 핵무기로 남한을 협박하면서 3일 만에 남한을 공산화하는 전면전을 새롭게 준비하고 있다는 정세 인식으로 기울고 있다. 최근 국정원장 국방보좌관인 한 예비역 장성이 이에 대한 정보를 종합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국정원은 영문으로 ‘NIS(National Intelli-gence Service)’다. 자신들이 수집한 정보를 정책 결정자들이 활용하도록 지원(Service)하는 기관이다. 그런데 최근 북한 정보가 수집되면 국정원이 이를 직접 활용하는 행태가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그렇게 되면 국정원이 스스로 정보를 활용해야 하기 때문에 타 기관에 줄 필요가 없어지는 셈이다. 지난 연말 장성택 숙청 정보를 바로 그렇게 국정원이 독점했다. 이렇게 정보를 직접 활용하면서 국정원의 전사적·영웅적 이미지를 강화하고, 그것이 다시 국정원 개혁 논의를 일정 정도 차단하는 반사이익까지 거두려는 정치 과정이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런 폐단을 의식했는지 지난 연말 김장수 청와대 안보실장 측은 “앞으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설 조직을 설치해 청와대 주도로 위기관리를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국정원의 독자 노선에 견제구를 날리면서 다시 외교·안보 시스템을 대통령 중심으로 정상화하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숙명의 라이벌인 남재준과 김장수의 정면 대결이 노무현 정권에 이어 현 정권에서도 이어질 조짐이다.
* 다음 호에는 ‘제2화-김장수와 남재준의 대결’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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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軍들의 전쟁] #2. 남재준 “○○○ 진급시켜달라”, 김장수 “……”
육사 2년 선후배로 다른 ‘군인의 길’…박근혜정부에서도 경쟁 이어져
기사입력시간 [1265호] 2014.01.15 (수)
김종대│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노무현 정권 3년 차이던 2005년, 김장수 육군참모총장이 새롭게 취임했다. 노 정권 출범 이후 두 번째 육군 수장이었다. 그의 전임이자 첫 번째 수장은 남재준 전 총장이었다. 김 총장은 취임 이후 군 인사에서 장군 진급 대상자를 복수로 추천해 청와대가 진급 결정에 개입하도록 아예 제도를 바꿔버렸다. 청와대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다. 전임자인 남 전 총장이 설정한 원칙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김장수와 남재준 간 갈등의 시작이었다.
2007년 국방부장관이 된 김장수는 노무현 대통령과의 담판을 통해 영관급 장교의 정원을 증원시키는 난제를 해결한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정치권력의 요구를 유연성 있게 수용하면서 군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통령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한 것은 지금도 그의 자랑거리다. 이후 2007년 10월의 제2차 남북 정상회담 때 노 대통령을 수행했고, 정상회담 중간의 오찬장에서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바로 옆 헤드테이블에 앉은 사람이 바로 김장수 장관이었다. 또한 남북 국방장관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한 국내 최초이자 마지막 국방장관이기도 하다. 이는 전임 남재준이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숙명의 라이벌’ 김장수와 남재준은 이처럼 서로 달랐다. 실제 자신의 군 재임 기간 중 가장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일화에서도 그 차이가 느껴진다. 남재준의 경우 육군참모총장 시절 자신이 노 대통령의 청와대에 맞서 얼마나 소신 있게 원칙을 고수했는지를 강조한다. 이 점은 전회(시사저널 제1264호 ‘군 검찰 압수수색에 육본 필사적 저항’ 참조)에 이미 소개한 바 있다. 그는 원칙 수호가 당시 노무현 정권의 종북주의자에 맞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남재준의 육사 2년 후배(육사 27기)이자 2005년 남 총장으로부터 총장직을 물려받은 김장수의 경우는 달랐다.
2013년 6월10일 남재준 국가정보원장, 김관진 국방부장관, 김장수 국가안보실장(맨 왼쪽부터)이 청와대에서 열린 외교안보장관회의 시작 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김장수는 ‘아이젠하워’, 남재준은 ‘맥아더’
미국의 장교단 사이에는 두 가지의 상이한 전통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하나는 민주주의와 산업 문명을 반영하는 친근감 있고 사교적이며 편안한 군인들로서 아이젠하워 장군과 같은 유형이라고 하여 ‘아이크(Ikes) 전통’이라고 한다. 이와 반대로 불변하는 군인의 전형으로, 총명하지만 권위적이고 민간인에게 쉽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 자존심 센 장교들로 맥아더 장군과 같은 유형이라고 하여 ‘맥(Mac) 전통’이라고 부른다. 1952년 T. 해리 윌리엄스가 한 논문에서 제시한 이 분류가 매력적이었는지 이후 미국의 정치인들도 카리스마 있고 굽힘이 없는 맥 타입의 정치인과, 유연성 있고 겸손하며 사교적인 아이크 타입으로 분류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맥아더는 남과 구별되는 특출한 인물이 되고자 했다. 반면 아이젠하워는 주변 사람들의 태도와 행동에 동화되고자 했다. 새뮤얼 헌팅턴은 그의 저서 <군인과 국가(The Soldier and The State)>에서 “맥아더는 횃불이었고, 아이젠하워는 거울”이라고 말했다.
이를 오늘날 한국에 견줘본다면 단연 남재준 국정원장은 맥 전통이고, 김장수 청와대 안보실장은 아이크 전통이다. 이 둘은 현 박근혜정부의 주기율표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상이한 원소들이다. 남 원장은 절대 다른 물질과 반응하지 않고 오직 홀로 존재하는 비활성의 기체, 즉 아르곤(Argon)이다. 외곬이며 고집불통이라는 비난과 함께 강직함이라는 찬사가 교차하는 그의 성격은 북한만이 아니라 그가 고개를 숙이지 않는 민간 정치인들까지도 상당수를 적으로 돌려세웠다. 반면 김 실장은 다른 원소와 쉽게 결합해 다양한 물질을 창조해내는 활성형 물질, 즉 탄소(Carbon)다. 친화력 있는 성격을 앞세워 당파를 초월한 협력의 가능성을 꾸준히 암시하지만 일견 기회주의적이라고 오해받을 수 있을 만큼 다양한 행보를 보여준다.
동시대를 살았던 맥아더와 아이젠하워는 판이한 성격 때문에 관계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재준 원장과 김장수 실장의 경우는 어떠할까. 이것이 지금 우리의 핵심적인 관심사다. 2차 세계대전 말기에 맥아더와 아이젠하워의 경쟁 관계가 미국의 정치와 외교 정책에 큰 영향을 주었듯이 지금의 한국 정치와 대북 정책 역시 이 둘의 관계에 상당 부분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2007년 11월28일 남측 김장수 국방부장관(오른쪽)과 북측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이 2차 남북 국방장관 회담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 공동사진취재단
김일철과 평양 송전각에서의 한바탕 격돌
사교성이란 일종의 인간적 신뢰와 친밀함을 도모하는 과정이다. 김장수 실장과 관련해 의미 있는 일화가 있다. 2003년 4월 합참 작전본부장으로 부임한 그는 당시 조영길 국방부장관이 주재하는 국방부·합참의 간부 조찬·오찬 모임에 자주 참석하게 된다. 이때 김장수는 육사 출신이 아닌 갑종 출신의 조 장관이 입지전적인 노력으로 장관직에까지 오른 것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은 듯하다. 조 장관은 클래식 애호가여서 식사 중에 항상 음악이 나오도록 했고 “저게 베토벤의 ○○ 작품이다” “모차르트의 △△ 음악이다”라며 음악 평론을 반찬으로 삼다시피 했다. 대다수 고위 장성이 못 알아듣고 밥만 먹었지만, 조 장관은 “너희들은 이런 걸 아느냐”는 식으로 계속 평론을 늘어놓았다. 이에 ‘나라고 못할 것이 뭐냐’며 김장수 본부장은 사무실로 돌아와 부관에게 베토벤의 작품 CD를 몽땅 구해오라고 했다. 그런데 베토벤 작품이 그처럼 많은지 미처 몰랐던 게 문제였다. “이렇게 많은 걸 언제 다 듣나”라며 괜히 베토벤을 선택했다고 후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참고 성실하게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기회가 왔다. 며칠 전에 들었던 베토벤 곡이 때마침 식사 시간에 흘러나왔던 것이다.
“장관님, 지금 베토벤의 작품에서 카덴차가 나옵니다”라는 김 본부장의 말에 놀란 조 장관이 “카덴차가 뭐냐?”고 물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악보와 관계없이 연주자가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부분을 말하며, 작곡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삽입되는 부분이라는 등 공부한 내용들을 설명했다. 김 본부장은 조 장관에게 승리하는 기쁨과 동시에 자신이 모시는 상관과의 친밀성까지 다졌다. 이것이 바로 김장수 사고의 특징, 즉 “공감의 범위가 넓을수록 좋다”는 다다익선 전략이기도 하고, 사교의 미학이기도 했으며, 성공을 보장하는 처세도 되었다.
국방부장관직을 수행하던 2007년 10월2일, 남북 정상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노 대통령과 평양에 도착한 김장수가 김정일 위원장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고 전봇대처럼 뻣뻣하게 서서 인사하는 장면 하나로 그는 ‘꼿꼿장수’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것 하나로 국민적 인기를 모은 김 장관을 향해 일각에서 시기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한 예비역 장성은 “허리 한번 세웠다고 누구는 인기가 치솟고 이게 뭐냐?”고 했고, 또 다른 예비역 장성은 “그 허리는 다림질했냐”며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들은 모두 이후에 정치권 진출과 고위직 진출을 두고 김 장관과 경쟁했던 인사였다.
2007년 11월27일부터 평양 인근의 송전각에서 개최된 남북 국방장관회담은 김장수의 마력이 드러난 극명한 사례다. 회담 이틀째까지 김일철 북한 인민무력부장과 밀고 당기는 협상을 하면서 양쪽은 극도로 피로해 있었다. 이틀째 남한 측이 준비한 저녁 만찬에 북한 쪽 대표들이 참석할지도 미지수였다. 김왕경 준장이 만찬에 참석하라는 유혹의 메시지를 북쪽에 계속 보내는 동안,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은 김정일 위원장으로부터 “북방한계선(NLL) 문제를 계속 고집하지 말고 공동어로구역을 제외한 나머지 남측의 요구 사항을 전부 수용하라”는 지침을 받게 된다. 이제껏 NLL 문제가 재협상되지 않으면 어떤 합의도 할 수 없다고 버티던 북한 쪽의 태도가 확연히 달라진 것이다. 이 지침이 있고 나서 김일철은 이제껏 지었던 험악한 표정을 거두고 우리 측이 준비한 만찬에 온화한 얼굴로 참석하게 된다.
김일철은 심장이 좋지 않아 박동기를 가슴에 달고 다닌다. 이랬던 그가 김 장관이 제조한 폭탄주를 4잔이나 마셨다. 그리고 회담에서의 승강이 때 김 장관이 툭하면 자신에게 “서울에 돌아가서 (국방부장관) 사퇴하면 그만이다. 후임 장관하고 잘해보시라”고 말한 걸 거론하며 “장수 장관, 사퇴하지 마시오. 우리 한번 잘해봅시다”라며 손을 잡았다. 총 7개조 21항의 합의서가 채택되었고, 김 장관은 노 대통령으로부터 전화로 재가를 받아 서명했다. 송전각에서의 국방장관 회담은 남북 관계에서 새로운 역사가 탄생하는 시대의 여명이었다. 우리 측 참석자 일부는 술에 너무 취해 거의 들려서 나왔다.
남재준 “김장수 이후 육군 인재 다 죽었다”
대개 비관주의자는 현실 분석에는 탁월하지만 문제 해결에서 약점을 드러낸다. 반면 낙관주의자는 분석은 철저하지 못하지만 문제 해결은 한다. 김장수의 경우,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협조를 구하는 스타일이다. 2006년 말 당시 윤광웅 국방부장관이 장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확실시되던 때에 김장수 총장이 그를 찾아왔다. 김 총장은 “장관이 되고 싶다”며 마음을 털어놓았고, 이에 대해 윤 장관은 무척 놀랐다고 한다. 이 점이 낙관주의자 김장수와 비관주의자 남재준의 다른 점이기도 하다.
남재준 원장은 2005년 육군참모총장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후임자인 김장수 총장으로부터 시작된 육군의 새로운 진급 관리 시스템에 대해 “육군의 쓸 만한 인재들을 다 죽인 결과를 초래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속내를 남 원장은 필자에게 딱 한 번 직접 말한 적이 있다. 단순히 김장수 총장만이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후임으로 이어지면서 이명박 정부에서까지 초래된 정치권력의 인사 개입이 그런 결과를 초래했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남 원장의 육사 동기(25기)인 한 예비역 장군 ㄱ씨는 “둘 사이에는 인사와 관련된 구원(舊怨)이 있다”고 말한다.
노무현 정권의 청와대와 갈등을 빚으며 물러나는 남재준 전 총장이 새로 임명된 김장수 총장과 계룡대에서 오찬을 하면서 “◇◇◇를 진급 인사에서 구제해달라”고 말한 데 대해 김 총장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이를 무시하는 인사를 했다는 얘기였다. 그래서일까? 남 원장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당시 육군본부 출신의 예비역 장성들이 김장수 실장을 칭찬하는 얘기를 필자는 이제껏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여기에서 둘 사이에 일종의 숙명적 관계가 느껴진다. 그러나 박근혜정부 청와대에서 이 둘 사이의 불협화음을 의심하는 세간의 시선과 달리 지금까지 청와대 안보실과 국정원 사이에 어떤 갈등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갈등이 없어서인지, 알려지지 않은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말이다.
박근혜정부 국방부장관 추천으로 첫 격돌
2012년의 대통령 선거 당시 상황을 보면 박근혜정부 안보 권력의 지형은 이미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김장수는 새누리당 국방추진단장으로, 남재준은 대통령 후보 안보특보로 이미 조직을 달리하고 각기 추종 세력을 관리했다. 김장수는 언론에 새누리당의 안보 정책을 설명하는 밝은 면을 차지했지만, 추종 세력이 적었고 그들의 충성도도 떨어졌다. 반면 남재준은 그 역할이 뚜렷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과거 육군본부 측근들로 구성된 강력한 추종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 간에 파워게임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시점은 박근혜정부의 초기 국방부장관 인선 때였다. 대통령직인수위에서 안보분과 간사위원으로 활동하던 김장수는 한기호 새누리당 의원을 국방부장관 후보로 강력히 추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 국방위원실의 한 관계자는 “당시 한기호 의원은 이미 장관직으로 진출할 것을 확신하고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김장수 단장이 전폭 지원하던 한기호 의원은 국방부장관 후보가 되지 못했다. 대신 안보특보단에 소속돼 있던 김병관 예비역 대장이 장관 후보로 발표되었다. 여기에는 새누리당 특보단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는데, 김장수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소문이 덧붙여졌다.
그러던 중 김장수 단장은 한 소신 발언으로 엄청난 비난 폭풍을 맞아야 하는 시련을 겪었다. 북한이 3차 핵실험을 단행한 지 사흘 후인 2013년 2월15일.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내정자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전환을 연기해야 한다는 주장은 해선 안 되는 말이다. 한미 양국 대통령이 전작권 전환을 합의한 상황에서 연기하자는 건 이상한 얘기다”라고 말했다. 이 말이 알려지자 예비역 장군들 모임인 성우회에서 ‘김장수 영구 제명안’을 회부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북한의 핵실험 이후 성우회 등 보수 세력들이 전작권 전환 및 한미연합사령부 해체 연기를 당연시하는 주장을 내놓은 것에 대해 김 내정자가 정면으로 반박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명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김 내정자는 취임도 하기 전에 원로 예비역 장성들에게 괘씸죄를 지은 셈이다. 여기에다가 김 내정자가 “나는 (북한에 대해) 매파도 비둘기파도 아닌 올빼미파”라며 다소 유연한 대북관을 표명한 것을 두고도 보수 세력은 그를 향한 의구심을 가슴에 담게 됐다.
남재준과 김장수에 대해 예비역 장교들의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과연 무엇이 한국에서 ‘군인다움’의 표상이냐, 또 누가 우리 시대에 필요한 인재냐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평가가 다를 수밖에 없다. 남재준에게 세상은 직각이고, 김장수에게 세상은 동그라미다. 이 둘은 각기 다른 인생관과 철학으로 일한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공통점은 있다. 2012년 대선 정국에서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로 지난 노무현 정권의 안보 정책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필자는 이 둘을 싸잡아 공격한 적이 있다. 이런 필자의 공격에 대해 이 둘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은 게 분명해 보인다. 이 일을 겪으면서 정치 논리는 오랜 인간적 연민도 변형시키면서 인간 공동체를 예측할 수 없는 복잡한 세계로 이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드러났다. 그러나 이들이 어떤 유형의 군인이건 간에, 한 시대를 책임지고 있다는 역사적 소명과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 다음 호에는 ‘제3화-김관진의 귀환’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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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軍들의 전쟁] #3. 연평도 포격 맞은 MB, 청와대 ‘면접’ 후 국방장관 낙점
‘억세게 관운 좋은 사나이’ 김관진…“전쟁은 극단을 지향” 강경 분위기 주도
기사입력시간 [1266호] 2014.01.22 (수)
김종대│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노태우 정권이 저물어가던 1992년 10월1일 오후 3시30분. 합참 전략본부 산하 군사전략과장을 맡고 있던 김관진 대령은 우리 군의 대변혁의 시작을 알리는 감격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한국군의 작전권 환수에 비타협적으로 반대하던 리스카시 한미연합사령관이 청와대로 들어가 김종휘 외교안보수석과 담판 끝에 “1994년까지 평시작전통제권을 한국이 환수한다”고 합의해준 것이다. 그 당시 평시작전권 환수를 방해하려는 각 군 총장과 서완수 기무사령관 등 우리 군 내부의 방해 공작은 집요했다. 이들 방해 세력은 리스카시 사령관의 사주를 받아 평시작전권 환수 반대 논리를 개발해 노태우 대통령의 자주국방 의지를 흔들어댔다.
이에 굴하지 않고 청와대 김희상 국방비서관과 연계해 작전권 환수 논리를 개발한 ‘자주국방’ 장교들의 본산은 합참 전략본부였다. 당시 합참 전략본부는 노태우 대통령이 제시한 ‘민주화와 통일을 추구한다’는 국정 좌표 위에서 한국군에게 요구되는 장기적 안목의 군사 전략을 준비하는 전위대였다. 합참 전략본부장인 천용택 중장, 그 산하 미주전략과장인 권안도 대령과 함께 김관진 대령은 평시작전권 환수의 논리를 개발하는 군사전략과를 이끌고 있었다.
천용택·권안도·김관진 등 호남 출신 3인방의 계획은 명확했다. 1994년까지 평시작전권을 환수한 다음, 곧바로 전시작전권(전작권)까지 환수함으로써 민족자존과 통일의 시대를 준비하는 자주적 국방 태세를 정립하겠다는 것이었다.
2010년 12월4일 김관진 국방부장관이 연평도를 찾아 포격 피해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 연합뉴스
참여정부 시절 김관진, 전작권 전환에 몰두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2006년 11월. 김관진 대령은 어느새 네 번을 더 진급해 대장으로서 3군사령관을 역임하고 있었다. 그 시점에 김 대장이 뜻밖에 합참의장으로 부름을 받은 것은 전임 이상희 합참의장이 사사건건 노무현 대통령의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의지를 거스르다가 임기를 6개월이나 남겨놓고 낙마한 데서 비롯됐다. 김 대장이 합참의장으로 발탁되기 직전인 10월20일 윤광웅 국방부장관은 미국의 럼스펠드 장관과 ‘2012년에 전시작전통제권을 한국으로 전환한다’는 합의를 성사시켰다. 윤 장관은 이 합의를 끝으로 국방부장관에서 물러났고, 새로 부임한 김장수 국방부장관과 김관진 합참의장은 새로운 국방 수뇌부를 형성하는 ‘투톱’을 이루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김장수와 김관진 두 사람은 모두 호남 출신이다.
전임자들이 전작권 전환과 관련된 정치적 짐을 모두 지고 떠난 자리에서 새로운 수뇌부는 또다시 우리 군의 미래를 설계해야 할 중차대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한국군 내부적으로는 ‘국방개혁 2020’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밖으로는 한미동맹 조정을 통해 자주적 방위 태세를 구축한다는 전략적 목표에서 과거 노태우 정권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국군의 역사에서 ‘미래 기획’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호남 군맥’은 그 전위를 자부해왔다. 어쩌면 기득권 세력이었던 보수적인 영남 군맥과 숙명적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 무렵 김관진 합참의장은 미래 전작권 전환을 준비하는 한국군 개혁의 청사진을 마련하는 데 골몰했다. 한반도 전시작전을 지휘할 합동군사령부 창설, 각 군 사관학교 통합과 군 구조 및 부대 구조 개편 등 거시적 개혁안을 차곡차곡 구상해나갔다. 더불어 미래 한국군의 단독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합동 전장의 운영 개념도 이 시기에 최초로 구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군의 근원적 변혁을 초래할 핵심 의제들이었다. 대령 시절 미완으로 끝난 군 개혁과 작전권 전환의 숙제를 대장이 되어 자신의 손으로 마무리 짓는 데 대해 김관진 합참의장은 역사적 소명을 느꼈다. 그는 작전권 전환이 “우리 군의 백년대계”라며 그 역사적 사명을 다할 것을 명확히 했다.
MB 정권에서 “전쟁 불사” 강경 발언 쏟아내
2010년 12월4일. 이명박 대통령은 김관진 예비역 대장을 국방부장관으로 발탁했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아수라장이 된 와중에 국방부장관으로 유력시되던 이희원 대통령 안보특보를 물리치고 난국을 헤쳐나갈 적임자로 김관진 예비역 대장을 낙점한 것이다. 정권 실세들이 밀었던 이희원 특보를 배제시킨 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영남 군맥, 특히 대통령을 에워싼 상주 출신 ‘이너서클’의 완패였다. 이 대통령은 김관진 국방부장관 내정을 결정하기에 앞서 그를 청와대로 불러 오랜 시간 면담했다. 청와대 안팎에서 “김관진에 대한 예비청문회는 이 대통령이 직접 했다”는 말이 흘러나올 정도였다. 이 면담을 통해 이 대통령은 정권의 취약성이었던 위기관리와 안보 역량을 상당 부분 보완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았다.
제43대 국방부장관으로 취임한 김관진은 군심을 다잡으면서 안보 위기를 관리해야 할 중차대한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 무렵부터 김 장관의 행보는 독일식 합리주의에 바탕을 둔 전쟁의 과학, 전쟁의 술(術)에 천착하는 모양으로 이어진다. 독일의 군사평론가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용기와 모험성, 담대함, 행운에 대한 믿음이라는 자유로운 정신, 즉 직관에 의해 전쟁을 주도하는 군사 지도자의 상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전쟁이란 피를 아끼지 않고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자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다. 그 점에서 전쟁은 일종의 폭력 행동이며 그 폭력의 운용에는 한계가 없는 셈이다. ‘전쟁은 극단을 지향한다’는 법칙을 제시한 클라우제비츠는 근대 독일군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고, 김 장관은 육사 생도 시절 독일 육사에 유학해 이런 사조를 일찍이 접했다.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 한반도에 전쟁의 기운이 감돌던 2010년 말 김 장관은 부임하자마자 전쟁을 불사한다는 강경 발언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향후 북한이 연평도 사건과 같은 도발을 해오면 “전투기로 도발 원점을 타격하겠다”고 공언했다. 이전 김태영 국방부장관과는 판이하게 다른 접근법이었다. 전임 장관이 한반도 전쟁 수행의 특수한 측면, 즉 동맹인 미국과의 협의, 전면전으로 확전될 가능성에 대한 정치적 고려 등을 앞세웠다면, 김관진 장관은 이런 정치적 고려를 제거하고 순수한 전쟁술과 과학으로 복귀하는 군사 지도자였다.
이 발언 이후로도 김 장관이 국방부와 합참의 참모들에게 주문한 것이 있다. “왜 한반도 군사 정세는 북한이 주도하고 우리는 적응해야만 하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우리가 주도할 수 있는 방책을 만들어오라”는 것이다. 우리가 북한에 대해 방어적인 태도를 벗어나 공격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주도권을 잡고 우세를 이룰 수 있다는 클라우제비츠의 가르침 그대로였다.
이 주문이 있고 나서 이후 2년여간 “북한의 도발 시 도발 원점과 그 지원 세력 타격” “북 도발 시 정권 궤멸” “김일성·김정일 동상 파괴” “북 핵심 목표에 대한 정밀 타격” 등을 천명하는 김 장관의 발언이 연이어 나왔고, 정승조 합참의장으로 하여금 “북 도발 징후 시 선제 타격”이라는 방향도 제시되도록 했다. 이 기간 중 군의 대응은 극단적 상황을 신중하게 고려하는 정치적 고려가 완화되고 극단적 상황을 전제로 하는 군사적 조치가 강조됨으로써, 비로소 전쟁 전략은 탈정치화의 과정을 겪게 된다.
2013년 3월22일 청와대에서 국방부장관에 유임된 김관진 장관(오른쪽)과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김병관, ‘동양식 전쟁관’으로 김관진과 대립
그러나 동양의 사상은 정치와 군사의 경계를 엄격히 구별하는 서구 사상과는 다르다는 지적이 많다. 박근혜정부가 출범하면서 2013년 2월 김관진 장관 후임으로 김병관 예비역 대장이 내정됐다. 그러나 김병관 장관 후보자의 도덕성에 대한 시비가 불거지면서 국회 인사청문회 통과를 낙관할 수 없었던 그해 3월 필자는 전쟁기념관에서 그와 장시간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김 후보자는 클라우제비츠 같은 서구식 전쟁 사상과 달리 ‘<손자병법>의 대가’라는 별명처럼 동양적이며 인간적인 군사 사상을 신봉하는 인물이다. 그는 “북한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하며 구석으로 모는 우리의 행위가 반드시 전쟁에서 유리함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며 “전쟁은 피를 흘리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손자의 부전승(不戰勝) 사상을 강조했다.
오늘날 전쟁의 개념에서 폭력의 사용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가급적 적게 죽이고 적게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군사 전략은 많이 죽이고 많이 죽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게 대량 소모전으로 전쟁을 이긴다 한들 과연 승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무렵 “북한이 서해 5개 도서를 점령할지 모른다”며 도서 방어를 위해 강력한 군사 조치가 필요하다는 말들이 나오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도 김병관 후보자는 “북한은 남한 공격을 목적으로 섬을 점령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며, “섬을 점령할 전술적 필요는 자신들의 방어 필요성에서 나올 수밖에 없지만 그럴 가능성도 희박하다”며 이에 대비하는 데 신중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수도권은 이제껏 전쟁에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전쟁터다. 인류 역사상 전쟁터 한복판에 이렇게 높은 인구밀도가 있고 많은 인구가 거주한 적은 없었다. 이런 전쟁터가 어떻게 다른 전쟁과 비견될 수 있는가?”
서구의 전쟁 사상이 통하지 않는 아주 특별한 전장 환경의 한반도에서 억지와 봉쇄라는 외국 이론이 과연 통할 수 있을 것인가. 전투는 군대가 하지만 전쟁은 국민이 하는 것이다. 한순간의 폭력으로 엄청난 국민의 피해가 예상되는 한반도 전쟁을 고민할 수밖에 없는 당시의 분위기였다. 이런 맥락에서 김병관 후보자는 적게 희생하면서 승리하는 방향으로 국방 태세를 개혁해야 한다며 ‘인본주의 국방 개혁’을 주장했다. 김관진 장관과 뚜렷한 대립각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김병관은 그의 주장을 더는 지속할 수 없었다. 우선 청와대 김장수 안보실장과 청문회 준비 과정에서 만나 정책을 조율하지 못했다. 김장수 실장은 김병관 내정자와 상당히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였다. 국회 국방위 야당 측 간사인 민주당 안규백 의원은 김병관 청문회를 앞두고 김장수 실장에게 “도덕성 문제가 불거진 김병관을 청와대가 계속 지지할 것인지 입장을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안 의원에 따르면, 김장수 실장으로부터 “안 의원 소신대로 하라”는 입장이 되돌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후 김병관은 인사청문회에서의 거센 공격을 이기지 못한 채 낙마했다. 서양의 ‘무한 전쟁’과 동양의 ‘제한 전쟁’이 대립하던 박근혜정부 초기는 다시 김관진의 유임으로 이전의 기조를 이어나간다.
2013년 3월8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김병관 국방부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가 열리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MB 때 “국방 개혁”, 현 정부에서는 말 바꿔
노태우 정권과 노무현 정권 당시 작전권 환수를 앞장서 추진하면서 자주국방 태세를 지향하던 김관진 장관은 이명박(MB) 정권 시절에는 군 지휘 구조 개혁을 핵심으로 하는 국방 개혁에 몰입했다. MB 정권 시절 김 장관은 “국방 개혁에 직을 걸겠다”고 했다. 그런데 박근혜정부에서는 지난 정부의 국방 개혁에 대해 “의견 수렴이 미흡했다”며 스스로 이를 백지화했다. 전작권 전환도 그가 노무현 정권 시절 합참의장으로서 마련한 ‘전략적 이행 계획(STP)’을 무효화하고 연합사령부를 현재와 같이 존치하거나 한국군이 사령관을 맡는 형태로 개편을 추진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미국과 협의가 되지 않자 또 무효화되고, 이제는 작전권 전환을 추진할 건지, 말 건지조차 모호해졌다. 적어도 김 장관은 예전 정권에서 그가 직접 만든 전작권 전환 계획과 국방 개혁 계획을 모두 부정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는 셈이다. 이것으로 자신의 지도력과 철학을 스스로 잠식하면서도 장기간 장관직을 역임하는 특이한 경우다. 정권에 따라 말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평가가 이어진다.
군사 지도자로서 김 장관에게는 수시로 바뀌는 정치권력은 동반자이자 짐이었다. 자신이 적응하고 복종해야 하는 정치권력이지만 매번 정권 때마다 국방 개혁의 방향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것이 김 장관의 입으로 하여금 여러 말을 하게 한 일차적 배경이기도 하지만, 일견 타협하고 협력하는 그의 유연한 성격도 한 요인이 되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김 장관에게는 딸만 셋이 있다. 지난해 3월 장관직을 내놓을 무렵에는 퇴임 직후 미국에서 음악을 전공하는 딸의 연주회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 표까지 끊어놓은 상태였다. 그러다가 예기치 않게 다시 부름을 받고 국방부장관 자리에 머물렀다. 이미 공관에서 뺀 이삿짐이 다시 되돌아왔다. 이런 김 장관도 권력의 무상함을 느낀 적이 있었나 보다. 4월에 장관직 유임이 발표되자 그는 간부회의에서 참석자에게 “지난번 내가 장관에서 나간다니까 뭘 지시해도 수첩에 받아 적지 않더니 이제 유임되었다니까 열심히 받아 적네”라고 뼈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이 말에 국장급 간부들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한편으로 소탈하면서 부하를 챙기는 김 장관에게는 상반된 두 가지 부정적 평가가 있다. 하나는 “디테일에 약하다”는 것이다. 지난 정부에서 군 상부 구조 개혁을 추진할 당시에 청와대가 정한 방침이라고 덥석 개혁안을 수용하고 급격하게 추진하려다가 실패한 사례가 그것이다. 지휘 구조 개편이야 좋지만 그것이 초래할 다양하고 자세한 문제점들에 대한 고려가 왜 없었느냐는 지적이다. 두 번째는 또 “너무 디테일하다”는 것이다. 국방부장관이 군의 대비 태세에 일일이 간섭하고 챙기는 것은 본연의 임무를 넘어선 과도한 간섭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육군이 아닌 해군이 합참의장으로 부임한 상황에서 국방부장관이 합참의장 역할까지 다 수행하는 건 일견 당연하다는 반론도 있다. 이런저런 엇갈리는 평가 속에서도 일치된 하나의 의견은 분명하다. “김관진은 억세게 관운이 좋다”는 것이다.
* 다음 호에는 ‘제4화 - 국방 로비스트 린다 김 사건’ 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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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軍들의 전쟁] #4. “이양호는 내 손도 제대로 못 잡았다”
‘린다 김 스캔들’, 공군 출신 국방장관 몰아내려는 ‘육군 패권주의’ 음모
기사입력시간 [1267호] 2014.01.29 (수)
김종대│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1996년 가을 어느 날. 린다 김에게 이양호 국방부장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김영삼 대통령에게 장군 진급 인사 재가를 받으려고 청와대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대통령이 이상한 말을 하더라는 얘기였다. “이 장관,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인가?” 도대체 대통령의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게 이 장관의 얘기였다. 혹시 이 장관 자신과 린다 김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일까? 무언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날 밤. 숙소인 하얏트호텔 방문 앞으로 걸어가던 린다 김의 눈에 문 앞에 서 있는 호텔 보이가 보였는데 어쩐지 엉거주춤하는 게 이상했다. 린다 김이 앞으로 다가가 노려보며 말했다. “너 누구야, 왜 내 방문 앞에 서 있어?” 그는 눈만 멀뚱거렸다. “너 호텔 직원 아니지, 너 누구야?” 잠시 정적이 흐르다가 린다 김이 “호텔 직원인가 보네”라는 말을 남기고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 순간 안에서 린다 김의 방을 수색하던 5명의 기무사 요원들이 밖에서 나는 린다 김의 목소리를 듣고 일제히 욕실로 숨었다. 린다 김이 욕실로 들어가면 5명이 들어찬 욕실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질 판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린다 김은 곧바로 침대로 가서 고목나무처럼 쓰러졌다. 이 틈에 욕실에 있던 5명은 몰래 방을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호텔 정문 앞에서 린다 김이 들어오는 것을 놓친 기무사 요원의 조인트를 사정없이 깠다. 린다 김은 모든 게 꺼림칙했지만 통 큰 여자답게 ‘들여다보든 훔쳐가든 마음대로 하라’는 듯 잠에 빠져들었다.
2000년 6월21일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린다 김이 서울지법에 들어서고 있다. ⓒ 시사저널 이종현
‘부적절한 관계’라는 말을 유행시킨 ‘린다 김 사건’은 한 불운한 국방부장관에게 가해진 파국의 비극성을 드러낸다. 1995년 국방부장관에 임명된 이양호 장관은 문민정부의 대규모 군부 숙청인 ‘하나회 척결’의 대표적 수혜자였다. 육군의 핵심 인물들이 줄줄이 거세되고, 공군 출신으로 합참의장과 국방부장관으로 승승장구한 그였다. 그러나 청와대에 다녀온 직후인 1996년 10월 국정감사 기간 중에 이 장관은 대우로부터 뇌물을 수수했다는 스캔들에 휘말려 전격적으로 경질된다.
이양호, “린다 김과 부절한 관계” 고백
국정감사 마지막 날, 국방부에 감사를 나온 여야 의원들은 어제까지 합참의장이던 김동진 대장이 국방부장관 자리에 앉아 있는 걸 보고 거의 기절초풍했다. 하룻밤 사이에 합참의장이 군복을 벗고 장관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준전시 상황인 한반도에서 군사 작전을 총괄하는 합참의장은 누구란 말인가? 국방부 답변은 “지금은 공석”이었다. 그해 9월 잠수함을 타고 강릉에 들어와 상륙한 북한군과 우리 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지는 비상사태가 발생했다. 다수의 군인과 민간인이 사망하면서 침투한 북한군을 소탕하는 군사 작전은 11월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그 기간에 군사 작전을 총지휘할 한국군 사령관은 없었던 셈이다. 당시 국방부에서 일어난 급변 사태는 하나의 작은 ‘정변’이라고 불러도 될 판이었다.
린다 김 스캔들은 이로부터 4년 후인 2000년에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이양호 전 장관이 자신의 장관 시절이던 1996년부터 린다 김에게 보낸 연서(戀書) 수백 통이 언론에 흘러들어가 둘의 관계에 대한 의문이 증폭됐다. 그러던 중 이 전 장관이 이를 취재하던 한 언론사를 제 발로 찾아가 린다 김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었다”며 사생활을 언급했다.
한국 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모든 언론사의 사회부 기자들이 서울 논현동 린다 김의 집 앞에서 일명 ‘뻗치기’라고 하는 대기 상황에 들어가고, 취재 경쟁이 과열되면서 온 나라가 초대형 스캔들에 휘말려 들어갔다. 지금도 중앙 언론사 중견 기자들은 사회부 초년병 시절 논현동 골목에서 대기하던 일이 한 번쯤 있었을 법하다. 공사장에서 주워 온 나무로 깡통에 불을 지피고, 밤을 새는 기자들이 안쓰러웠는지 린다 김이 중국집에서 배달시켜준 짜장면을 얻어먹은 기억들도 한 번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신드롬도 일어났다. 린다 김이 착용한 것과 유사한 선글라스가 백화점에서 동나기도 했다. 그가 쓰는 모자, 핸드백, 즐겨 마시는 커피까지 모든 주변이 화제였다. 심지어 한 여성지는 ‘여고생이 닮고 싶은 여성 1위’에 린다 김이 선정되었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여성 로비스트의 이미지는 연예인, 미모, 선글라스, 무기 로비, 재벌 2세와의 관계, 권력의 이면, 국제 사업가, 연애편지와 같은 무수한 키워드로 확장되었다.
대중은 왜 이 사건에 그토록 빠져들었을까. 바로 우리의 내면에 은밀하게 서식하는 욕망의 판타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스캔들이라고 하지만 미모와 재능, 재력을 겸비한 성공한 여성의 이미지는 숭배의 대상이다. 심지어 그 스캔들까지도 부러움이 되고 마는 기가 막힌 일이 이어진다. 그것이 어떤 때는 소설로, 또 다른 때는 드라마로 재현되기까지 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0년경, 필자가 인터뷰를 하기 위해 만난 린다 김은 그런 세간의 이미지와 다르게 노년 초기에 진입한 보수적인 여성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서인지 그 사건을 회고하던 그는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다”며 후회했다.
당시 린다 김이 손을 댄 무기 사업은 거의 다 성공했다. 1970년대 27세의 나이로 중동에서 전투기를 팔아 한 번에 큰돈을 벌고 남미로 건너가 셀 수도 없는 무기를 팔았다. 한국에서도 그는 전두환 정권 시절에 미국의 노스롭그루먼사의 F-20 전투기 판매가 거의 성사될 상황까지 갔었다. 하지만 1984년 성남 비행장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비행 시범을 보이던 중, 조종사가 너무 과시욕을 부리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처박히는 사고를 당했다. 이후 이 비행기는 탈락했고 전두환 정권은 전투기 사업을 아예 하지 않았다.
“사업 나누라는 말 들었어야…” 뒤늦게 후회
그러다가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1990년대에 와서야 린다 김이 중개한 이스라엘의 팝아이 미사일 도입이 성사됐고, 동부 지역의 전자전 장비 사업도 곧 성사될 것으로 보였다. 가장 큰 사업인 백두·금강 정찰기 도입 사업까지 이어졌다. 린다 김이 혼자 하기에는 너무 벅차서 영상 정보 수집 정찰기 도입인 금강사업은 또 다른 무기 로비스트인 조풍언씨에게 떼어줘야 할 정도였다. 린다 김은 신호 정보 수집 정찰기인 백두사업에만 전념했다. 이 사업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센서를 공급하는 4개 회사, 이를 탑재하는 비행기를 공급하는 항공기 3개 회사로 총 12개의 센서-항공기 조합 시나리오가 나왔다. 이걸 도맡아 한 것이 국방부나 합참의 정보본부도 아니고, 정찰기를 운용하는 정보사령부도 아닌 바로 린다 김이었다. 우선 한국군은 사업의 판을 짤 수 있는 실력과 경험이 없었다. 이 무렵 린다 김은 이미 단순한 무기 로비스트가 아닌 권력자였다.
하루는 무기 도입을 관장하는 국방부의 윤종호 차관보가 거꾸로 린다 김에게 부탁을 했다. 린다 김이 담당하는 몇몇 사업에 대해 “다른 회사에 넘기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당시 린다 김의 성격으로는 자기 것을 남에게 주라는 제안을 용납하기 힘들었다. 물론 지금에 와선 “그때 그 말을 들었어야 했다”고 후회하지만. 안기부·기무사와 같은 권력기관들이 전부 무기 사업에 관여하면서 한 다리 걸치려 하는 데 대해 린다 김이 단호히 거부하자 국방부 일원에서 그는 어느새 공공의 적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뇌물 사건이 불거졌다.
2000년 5월11일 백두사업과 관련해 로비 의혹을 받고 있던 린다 김이 논현동 안세병원에서 퇴원하기에 앞서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 시사저널 임준선
‘엘리트’ 육군, 공군 출신 국방장관 ‘왕따’
이양호 장관의 전격 경질과 그 후 이어진 자신과 관련된 스캔들. 린다 김은 지금도 당시 김영삼 정권에서 소외돼 있던 육군 세력들이 조직적으로 공모해 이양호를 제거하려 했고, 자신은 그 과정에서 이용됐다고 확신한다. 공군 출신이 합참의장과 국방부장관이 되는 걸 과연 우리 군의 파워엘리트라고 하는 육군 세력이 용납할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이양호 장관에 대한 내사를 진행한 육군 출신의 권영해 안기부장과 임재문 기무사령관 그리고 김동진 합참의장까지 전부 한패였다고 본다. 이양호 장관이 청와대에 인사 재가를 받으러 가기 전 권영해 안기부장이 먼저 청와대에 들어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이 장관의 뇌물 스캔들과 ‘충청 군맥을 만들려 한다’는 인사의 문제점을 먼저 보고한 것은 여러 언론 보도를 통해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육군 출신들이 해·공군 출신들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패권을 유지하는 경향이 있다는 건 한국군의 아주 기이한 특징 중 하나다. 이는 이양호가 합참의장이던 시절부터 그랬다. 의장으로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1993년 어느 날 합참 고위 장군들과 회의를 하던 의장이 뜬금없이 한마디 했다. “그런데 전투지경선이라는 게 뭔가?” 어떤 부대가 인접 부대와의 작전구역을 구분하기 위해 전방·후방·측방으로 설정하는 선이 전투지경선이다. 이걸 모르는 육군 장교들은 없다. 그런데 합참의장이 이걸 묻자 대다수가 육군인 합참의 장군들은 ‘의장이 저런 것도 모르냐’며 조롱하는 분위기였다. 이후 이 의장은 합참 업무에서 겉도는 듯했다. 그래서일까? 이양호는 합참의장임에도 불구하고, 현행 작전에 대한 개입보다 특정한 정책에 더 몰입하는 것처럼 보였다.
1996년 장관 지시로 합참 정보본부는 ‘한국군 정보 현대화 계획’을 최초로 수립한다. 그 보고서는 충격적이었다. 한국군은 신호 정보의 99%, 영상 정보의 98%를 미국에 의존한다. 이제껏 자주국방을 표방한 한국군 전력 증강 사업, 일명 ‘율곡사업’을 추진한 이래 한국군이 정보 전력에 투자한 예산은 총 전력 증강비의 0.6%에 불과하다. 정보병과는 아예 육사 출신들이 기피하는 소외된 병과였다. 한때 합참의 정보본부장을 역임한 이양호가 한국군의 ‘정보 자주화’를 자신의 핵심 과업으로 인식하고, 이후 금강·백두 사업을 장관실에서 직접 관장한 것이다.
그러나 분위기가 이상했다. 이런 일이 있었다. 백두사업이 이미 문제가 되던 1998년 10월에 당시 국회 국방위원 보좌관으로 국정감사 배석차 국방부에 와 있던 필자가 잠시 감사장 밖으로 나온 사이에 한 장교가 필자에게 다가왔다. “잠깐 조용한 데서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말을 건넨 이 장교는 필자를 민간인이 절대 출입할 수 없는 국방부 청사 맨 위층으로 데려갔다. 복도에서부터 필자를 발견하고 제지하는 헌병을 제압한 이 장교가 데려간 방에는 백두 정찰기를 운용하는 정보사 소속의 9125부대 주요 간부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준장 계급의 한 장성이 자신을 부대 참모장이라고 소개하고 첫마디부터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1994년 5월30일 김영삼 대통령이 안보장관회의에서 이양호 합동참모본부 의장과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백두사업만 저지할 수 있다면 감옥 가도 좋다”
“백두 정찰기 도입 사업만 저지할 수 있다면 저는 감옥에 가도 좋습니다. 무슨 비밀 자료든 다 제공할 터이니 국정감사에서 이 정찰기 도입만은 막아주십시오.” 그야말로 황당했다. 책상 위에는 백두사업과 관련된 갖가지 비밀 자료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는 사실상 국방부장관에 대한 항명이나 마찬가지였다. 김영삼 정권 때 이양호 장관이 추진한 사업이고, 김대중 정부에 들어와서 천용택 국방부장관도 계속 추진하려 했던 사업이다. 필자는 당시 이 장성의 문제제기에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흘러 지금에 와서 만약 한국군에 백두·금강 정찰기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를 상상해보게 된다. 이 정찰기가 도입되고 나서 한국군의 대미 정보 의존도는 90%대에서 80%대로 낮아졌다. 심지어 미군도 우리의 정보를 얻으려고 한다. 그 덕분에 좀 더 대등한 관점에서 한미 간의 정보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다. 눈과 귀가 먼 한국군에게 이만한 효자 무기도 없다. 그런데 그 시절에 육군 출신들은 왜 그처럼 이 사업을 못마땅해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또 왜 대형 스캔들로 번진 것인지도 미스터리다.
한때 백두사업은 “머리를 하얗게 세게 만든다”는 애물단지라는 의미의 백두(白頭)사업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의 천용택 장관은 이 사업에 반대하는 9125부대장과 그 참모장을 구속시키면서까지 이 사업을 강행했다. 그렇다면 최소한 이양호 전 장관이나 린다 김이 세간에 알려진 대로 국방 사업을 말아먹은 역적은 아니라는 얘기다. 린다 김 역시 필자에게 “백두사업을 성사시키고 나는 훈장을 받을 줄 알았다”며, 훈장은커녕 거꾸로 공공의 적으로 내몰린 데 대해 억울해했다.
백두사업의 진실이 그처럼 왜곡되었다 하더라도 린다 김과 이양호 장관 간의 부적절한 관계의 진실은 지금도 여전히 궁금증으로 남는다. 이에 대해 린다 김은 “결코 부적절한 관계는 없었다”며, 2000년에 이 전 장관이 언론사에 찾아간 배경을 설명했다. 그날 이양호 전 장관은 그 신문사를 찾아가기 전에 가족회의를 하고 부인으로부터도 양해를 얻었다고 했다. 사생활 문제라면 사법적 문제가 아니므로 법적 책임을 피할 수 있었다고 본 것이다. 실제로 이양호는 린다 김의 손 한번 잡아본 일조차 없다고도 했다. 그렇게 수줍어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린다 김에 대한 연모를 편지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린다 김에 대한 기무사의 수사는 온통 백두사업의 실무자와 국방부 주요 인사는 물론 장관에 이르기까지 ‘어떤 부적절한 관계가 있었는가’에 맞춰져 있었다. 굳이 린다 김의 해명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되면 중령부터 대령, 장군, 차관보, 장관까지 전부 내연의 관계라는 이야기인데 이는 상식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수사기관과 언론은 사태를 그렇게 몰고 갔다.
린다 김과 이양호의 관계는 한때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을 만큼 대형 스캔들이었다 하더라도 그 이면의 진실과, 우리 사회 내부의 권력 관계를 심층적으로 고려하면 우리는 역사적 사건도 얼마든지 정직하게 재구성할 수 있다. 그러나 말초적 관심에 끌려 사건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데 그친다면 이는 역사를 제대로 볼 줄 모르는 것이다.
* 다음 호에는 ‘제5화 - 린다 김, 이제는 말한다’ 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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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軍들의 전쟁] #5. "권력 실세들과 나눈 편지 어디론가 사라져”
린다 김 스캔들, 미스터리로 남아…이양호 장관 연서만 공개돼
기사입력시간 [1269호] 2014.02.12 (수)
김종대│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1996년 이양호 국방부장관이 무기 로비스트 린다 김에게 보낸 많은 연서(戀書) 중에 유독 눈길을 끈 한 통이 있다. ‘사랑하는 린다’로 시작해 ‘당신을 사랑하는 L’로 끝맺은 ‘아날로그식’ 순정이 잘 드러난 이 편지는 그해 4월5일에 작성됐다. 편지를 작성한 이 시기는 북한군이 한국과 미국의 합동 군사훈련인 ‘호국훈련’에 반발해 잇달아 “전쟁 불사”와 같은 강경 발언을 쏟아내던 무렵이다. 실제 편지를 쓰기 하루 전날인 4월4일, 중무장한 북한군 1개 중대가 판문점에 난입해 긴장이 최고조로 치닫기도 했다.
편지를 작성한 4월5일 이 장관의 하루 일정은 이렇다. 식목일이어서 휴일이지만 심각한 안보 상황 때문에 아침 일찍 집무실로 나온 이 장관은 정오까지 이 편지를 썼다. 이어 오후 2시20분에 국방부와 합참의 주요 간부들과 함께 북한군의 판문점 무력시위 사태에 대한 비상대책회의를 주재했다. 이 회의에서 이 장관은 대북 정보 감시 태세인 ‘워치콘’을 격상하도록 지시했다. 3시에는 청와대로 가 안보 관련 부처 장관들이 참석하는 안보정책조정회의에 참석했다.
1996년 4월7일 북한의 판문점 중무장 병력 투입과 관련해 이양호 국방부장관이 국방부 지하 벙커에서 전화로 현황을 보고받고 있다. ⓒ 연합뉴스
정치 논리에 오염되고 만 군대
하지만 당시 미군 측은 워치콘 격상에 반대했다. 판문점에서의 북한군 동향은 정전협정 무력화를 도모하려는 계산된 무력시위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측의 집요한 요구에 마지못해 동의했다. 불과 6일 후인 4월11일은 15대 총선일이었다. 정부·여당은 곧 전쟁이 일어날 것처럼 위기가 고조되는 여론을 원했다.
4월8일 밤. 합참 상황실에 유종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거의 매일 합참에 전화를 해 위기 상황을 언론에 브리핑하도록 지시하던 유 수석은 이날 “(집권 여당) 여론이 15% 이상 좋아졌다. 그동안 합참이 고생 많았다”고 격려했다. 전화를 받은 김동신 합참 작전본부장은 합참 요원들에게 “그동안 너희들 고생 많았다. 이제 언론 브리핑은 그만 하라”고 말했다. 이에 한 중령이 들뜬 목소리로 “총선 승리합시다”라고 외쳤고, 일부 장교들은 박수를 쳤다. 장관실에서도 “이제 판문점 상황에 대한 일일 보고는 그만 하라”는 지시가 합참으로 내려왔다. 4월11일 실시된 총선에서 집권 여당인 신한국당은 당초 100석도 버거울 것이라던 여론조사 예상치를 훨씬 웃도는 139석 확보로 선전한 반면,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는 79석 확보에 그치며 완패했다. 그해 10월 이양호 장관이 전격적으로 경질될 무렵 진행된 장군 진급 인사에서 총선 당시 북풍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합참의 장교들은 대거 진급된 데 반해, “위기가 아니다”라며 다른 의견을 낸 장교는 진급에서 배제됐다. 특히 합참에서 북한정보과장으로 근무했던 김남국 대령(육사 29기)이 그 대표적 피해자였다.
백두사업과 린다 김 스캔들을 둘러싼 당시 상황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한국군은 크게 두 개의 도덕적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첫 번째는 국가 안보가 국내 정치에 이용될 수 있는가의 문제이고, 두 번째는 공식적인 의사 결정 시스템이 공정하고 투명한가의 문제였다. 군대는 문민 정치권력에 자발적으로 예속되는 국가 안보의 전문가 집단이지, 그 자체로 정치적 의사 결정을 하는 집단이 아님은 분명하다. 새뮤얼 헌팅턴은 그의 저서 <군인과 국가(The Soldier and The State)>에서 “군대는 국가 안보의 수단이자 도구”라는 도구적·수단적 의미를 강조하며, 군대에 대한 국민의 우위를 명확히 했다. 그러나 이미 특정한 정치 논리에 오염돼 군대의 전문성이 왜곡되고 정치에 개입하며 부조리가 만연된 군대는 국민의 자산이 아니라 짐이 된다. 이는 사실 오늘날 한국군이 처해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북한에 대한 정보가 정치적 의도로 왜곡돼 국내 정치에 활용되는가 하면, 각종 인맥으로 얽힌 국방 사업 부조리 문제는 아직도 국민들에게 도덕적 의문을 불식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1996년에 한국군은 이러한 도덕적 문제를 관리하는 데서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양호 장관이 경질되고 미국에 가 있던 린다 김에 대한 수사가 착수되면서 국방부 검찰단이 미국으로 건너가 출장 조사를 벌였다. 미국 시민권자인 린다 김에 대한 조사는, 당초 이양호 장관 경질로 마무리 수순에 돌입한 것처럼 보였다. 3명의 검찰단 장교들이 LA에 거주하는 린다 김을 찾아가 그동안의 감청 자료를 근거로 군 및 정부 고위층과의 관계를 추궁했다. 린다 김에게 제시된 감청 자료에는 이양호 전 장관과의 전화 통화 내용이 상당 부분 포함돼 있었지만, 노태우 정권과 김영삼(YS) 정권에서 권력의 실세들과 나눈 무수히 많은 통화 내용은 고의로 삭제돼 있었다. 이를 본 린다 김은 코웃음을 쳤다. “왜 감청 자료가 이것밖에 없죠?”
괴한 침입해 보관 중인 편지 300여 통 절도
린다 김이 사업을 하기 위해 상대했던 주요 인맥, 예컨대 대통령 가족과 친인척, 정권의 막후 실세, 주요 정치인들과의 관계를 대부분 파악한 것으로 보이는 당시 군 검찰이 유독 이양호 전 장관과 관계된 부분만 캐고 나머지는 다 묻어버릴 심산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처럼 관대한 수사라면 린다 김이 두려워할 필요조차 없었다. 린다 김은 ㄱ 중령을 비롯한 검찰단 요원들을 극진히 대접해서 돌려보냈다.
재차 린다 김 스캔들이 불거진 계기는 1996년 식목일에 작성한 이양호 전 장관의 연서가 2000년 중앙일보에 공개된 사건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도 똑같은 문제가 드러난다. 이 전 장관의 편지 문제는 그해 린다 김의 서울 강남 사무실에 괴한이 침입해 보관 중이던 편지 300여 통을 절도해 간데서 시작됐다. 여기에는 이 전 장관의 편지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힘이 센 권력 실세의 편지들도 있었다. 이것이 어떻게 중앙일보에 흘러 들어갔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지만, 문제는 유독 이 전 장관의 편지만 보도되고 나머지는 몽땅 어디로 사라져버렸다는 점이다. 더욱이 처음에는 미주 중앙일보 지국에 정체불명의 인사가 접근해 이 전 장관의 편지를 제공하는 대가로 상당액의 금품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편지가 국내 중앙일보 본사로 입수되었다는 점도 석연치 않다. 그 편지를 소지했던 인물은 기소 중지된 상태였는데, 이 인물이 어떻게 검거되지 않고 미국과 한국, 중국을 자유롭게 오갔는지도 의문이다.
2000년 5월11일 린다 김이 서울 안세병원에서 퇴원한 후 기자회견을 하러 들어오고 있다. ⓒ 시사저널 임준선
YS 정권 말 외환위기 속에도 무기 도입 강행
린다 김은 필자와 인터뷰하면서 여러 차례 이 문제에 대한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린다 김에게도 아직 그 자신에 대한 스캔들의 전모는 대부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그 당시나 지금도 한국 언론은 린다 김과 국방부장관 사이의 검증되지 않는 스캔들만을 부각하면서, 이 사건의 배경을 이루는 권력 구조와 정치 공작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더 근본적인 사건의 본질이 있을 법하다. 1993년 출범한 YS 정권의 문민정부는 과거 군부의 무기 도입 사업인 ‘율곡사업’ 비리를 척결하는 특별감사에 착수해 수없이 많은 전직 장관과 장교, 무기중개상 등을 구속시켰다. 당시 이 감사를 주도하던 이회창 감사원장은 일약 국민적인 인물로 부각되었다. 더불어 YS 정권이 스스로 ‘성전(聖戰)’이라고 부른 군의 사조직인 하나회 척결도 이어졌다. 너무 관련자가 많아서 나중에는 영관급 장교들은 비리가 발견되더라도 사법 처리 대상에서 제외하기도 했다. 폐허가 된 국방부에서 새롭게 문민정부의 군을 이끈 핵심 군맥이 바로 권영해 국방부장관으로, 후에 그는 안기부장(현 국정원장)으로 영전했다.
1998년 출범한 김대중(DJ) 정권은 국방 비리를 척결한다고 했던 YS 정권이 사실은 또 다른 비리의 온상이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문민정부가 출범한 해인 1993년은 율곡 사업 비리 감사가 진행되던 때로, 이해의 무기 도입액은 5억5788억 달러인데 이전 10년간 무기 도입액 중 가장 적다. 이 추세는 1994년에도 마찬가지로 이어지면서 새 정권 초기에 무기 도입액이 줄어드는 뚜렷한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다가 YS 정권 말기인 1996년과 1997년 두 해의 무기 도입액은 32억8600만 달러로 급격히 늘어났다. YS 정권 말기에는 미스트랄 지대공미사일, 백두정찰기, 수송기, 동부 지역 전자전 장비, 헬기 야간 침투 장비 등 각종 외제 무기가 물밀듯이 들어왔다. 1997년 말은 외환위기로 환율이 달러당 2000원에 육박하고 국민들이 금 모으기 운동에 착수하던 국가 위기 상황이었다. 그러나 국방부는 YS 정권 말기에 착수한 각종 무기 도입 사업이 DJ 정권 출범 후에도 진행되도록 계약금·중도금·착수금으로 국방부 조달본부가 보유한 달러를 몽땅 집행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정권 말기의 무더기 무기 구매는 이후 새로 출범한 정권에게는 규명해야 할 또 다른 비리의 서식처로 의심될 만했다.
DJ 정권이 출범한 1998년 3월, 권영해 전 안기부장은 대선 당시의 북풍 공작 혐의로 구속되었다. 그가 구속된 직후 국방부 산하 기관인 국방연구원·국방과학연구소 등에 각기 50억원대 규모의 괴자금이 관리되고 있음이 발견돼 군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수사 과정에서 이 자금의 주인은 구속된 권 전 안기부장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가 국방부장관에서 물러난 1993년 12월에 국방부 산하 기관에 분산해 은닉하고 있던 수백억 원대 괴자금의 원금을 회수해가면서 그때까지 발생했던 이자는 “산하 기관이 알아서 쓰라”고 남겨두었는데, 50억원은 바로 그 이자였다.
이 자금은 산하 기관이 보관 대가로 챙긴 자금이지만 거기서 또 이자가 발생해 그것을 주로 기관장 회식비, 접대비, 품위 유지비에 쓰고 있었다. 안기부장으로 자리를 옮긴 1994년에도 국방부 무기 도입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권영해씨가 정확히 얼마의 자금을 조성했는지는 그 이후에도 밝혀지지 않았다.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던 그가 할복자살을 시도하면서 소동을 일으키자 DJ 정권도 더 이상의 수사에 부담을 느끼고 이 문제를 조용히 덮어버린 것이다. 당시 이 문제를 수사하기 위해 서울구치소를 방문한 사람이 바로 린다 김을 수사하던 ㄱ 대령이었다. 그에게 권씨는 “정치범으로 수감됐는데, 돈 문제가 나오면 안 되지 않나?”라고 호소했다.
1998년 4월3일 권영해씨가 안기부법과 선거법 위반 혐의로 구속 수감되고 있다. ⓒ 연합뉴스
엉터리 장비로 부대가 5년 이상 놀기도
이 말이 당시 천용택 국방부장관과 청와대에 보고되었고, DJ 정권은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부터 ‘군 전력증강위원회’ 위원장으로 오랜 기간 무기 도입에 관여해온 권 전 부장이 어떻게 율곡사업 비리 특별감사를 거치면서도 이렇게 많은 괴자금을 은닉할 수 있었을까? YS 정권에서 국방부장관·안기부장으로 영전하면서 무기 도입의 또 다른 실세 역할을 한 그가 간직한 비밀의 실체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린다 김의 진단은 이렇다. “그 당시 군의 주요 무기 도입 사업에는 모두 임자가 따로 있었다. 어떤 사업은 국방부장관, 어떤 사업은 안기부장, 또 어떤 사업은 기무사령관이라는 식이었다. 엿을 나눠 먹듯이 너도 하나 먹고 나도 하나 먹는 식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유력자를 중심으로 국방 사업에는 분할된 소유 구조가 있었다는 설명이다. 이처럼 이런 배분이 합리적이어야 하는데, 어느 날 주류에 속하지 않은 공군 출신 국방부장관이 함부로 여기에 덤비면 판 전체가 이상해진다. 사업에는 원래 임자가 있는 것이다. 그것도 반드시 주류이고 핵심이어야 했다. 이렇게 보면 복잡한 절차와 감시라는 국방 무기 획득의 시스템은 형식에 불과한 것이고, 실제로 사업이 진행되는 내막에는 권력과 로비의 방정식이 관철되고 있다. 무기 도입 사업을 장악함으로써 기득권과 영향력이 확장되는 권력의 논리가 있다는 그런 이야기다.
그러면 여기에서 독자들은 하나의 의문이 생길 것이다. 당시 국방이 이런 식으로 운영되었다면, 우리 국가 안보가 과연 제대로 될까 하는 것이다. 분명히 폐해가 있었다. 동부 지역 전자전 장비의 경우 1993년경에 도입되었어야 하는데, 특정 장비를 밀어주려고 군의 요구 성능(ROC)을 바꿔 엉터리 장비를 도입하느라 1997년에도 장비가 도입되지 않았다. 이미 창설한 부대는 장비가 없어서 주한미군의 낡은 장비를 빌려서 연습만 하고 실제 임무는 수행하지도 못했다. 한마디로 부대가 5년 이상 할 일이 없어서 놀고 있었던 것이다. 미스트랄 지대공미사일은 합참 지시로 엉뚱하게 해군 함정에 도입되었는데, 이는 흔들리는 함상에서 사용할 수 없는 무기였다. 백두정찰기는 도입 당시 군 내부의 암투로 사용이 지연되었다. 그러나 국방 실세들에게는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무기였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어쩌면 우리 군은 실제 싸우는 ‘전투형’ 군대와 남에게 보여주는 ‘행정형’ 군대라는 두 개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천문학적인 첨단 무기 도입이 로비와 권력의 암투에 휘말리는 동안 일선 전투부대의 필수 장비들은 도입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국방부장관, 합참의장, 각 군 총장은 자신의 재임 기간 중 업적을 남기기 위한 과시형 무기 도입에 치중하는 반면에 일선 전투원의 생명 가치를 고양하는 필수 장비들은 항상 외면되었다. 오히려 첨단 무기를 도입하기 위해 야전의 필수 장비는 그 여건이 더 약화됐다.
이는 지금도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다. 전시에 지상군에게 지급되는 수류탄이 1인당 하루 한 발이다. 대대와 연대 화력은 1990년대 당시나 지금이나 개선된 것이 없다. 공군 첨단 전투기의 핵심 무장인 장거리 정밀 타격 미사일은 지금 재고가 거의 제로다. 2010년 천안함 사건 당시 해군 수뇌부는 천안함의 음향 탐지 장비인 ‘소나’가 어뢰를 잡을 수 있는 장비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또한 연평도 포격 당시 연평도 해병부대의 자주포가 북한 포격 원점을 정확히 타격하지 못한 것은 풍향과 풍속이라는 기상 관측과 좌표 설정을 못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전투원들이나 야전 장교들은 무기 체계에 대한 지식과 관심이 부족하고 편제 장비의 성능이 발휘되는 완전성을 추구하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군 지휘부의 역할과 책임이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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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軍들의 전쟁] #6. 군인아파트에 ‘하나회 명단’ 괴문서 살포되다
YS, 대통령 취임 직후 참모총장·기무사령관 옷 벗겨…‘대숙군’ 작업 신호탄
기사입력시간 [1270호] 2014.02.19 (수)
김종대│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권위주의 시대에 국가를 통치하는 최고 엘리트 집단으로서 군 장교단이 있었다면, 그 장교단의 기세를 확실히 꺾어버리고 제압한 정치인은 오직 한 사람 있었다. 바로 김영삼(YS) 전 대통령이다. 1993년 출범한 YS의 문민정부는 그동안 군 내부에서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던 전두환·노태우의 군맥이라고 할 수 있는 군 사조직, 일명 ‘하나회’에 대한 전면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스스로 ‘성전(聖戰)’이라고 부를 만큼 기세등등했던 수십 명 고위 장성의 군복을 벗겼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영관급 장교라 하더라도 하나회와 연관만 되어 있으면 장군 진출까지 봉쇄해버리는 사상 초유의 대규모 숙군 작업이었다.
YS가 대통령에 취임한 지 불과 11일 만인 1993년 3월8일 아침에 권영해 국방부장관과 회동을 하고 오후에 하나회 출신 육군참모총장·기무사령관 등을 갈아치운 이 전광석화와 같은 숙군 조치에 대해 기록은 ‘3·8 사태’라고 칭하기도 한다. 당시 정권 핵심부조차 놀란 이 조치가 있은 다음 날, 김영삼 대통령이 아침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니들도 많이 놀랐제?”라고 웃으며 말하자 청와대 수석들도 그 배포에 혀를 내둘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997년 10월 김영삼 대통령과 당시 권영해 안기부장이 공군 행사를 참관하고 있다. 김 대통령과 권 장관은 문민정부가 출범하자마자 하나회 숙청 작업을 주도했다. ⓒ 시사저널 포토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수방사령관, 특전사령관 등 하나회로 의심되는 인물에 대한 숙군이 이어지던 4월2일 서울 동빙고동 군인아파트 우편함과 승용차 앞유리창에 ‘하나회 명단’이 적힌 괴문서가 대량으로 살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훗날 이 문서를 살포한 ‘거사’를 일으킨 이는 육사 31기 출신의 백승도 당시 대령으로 밝혀졌다. 명단에는 현역 중장급 인사인 육사 20기부터 중령급인 육사 36기까지 기수별로 7~11명씩, 총 142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원래 하나회는 1973년의 ‘윤필용 사건’에서 문제가 된 조직으로, 육사 26기를 마지막으로 명맥이 끊어진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해체되기는커녕 오히려 그 세를 더 확산하면서 시퍼렇게 살아 있으며, 이들이 동기생들 중에서 1차 진급과 핵심 보직을 독식하면서 군 사조직으로 활동해왔다는 점은 직업 장교단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또한 전두환·노태우의 5·6공화국 정권을 거치면서 사실상 한국 정치를 좌우한 권력의 줄기세포로 기능해왔다는 점에서 국가적으로도 심각한 일이었다.
육사 31기 ‘하나회’와 ‘비하나회’ 멱살잡이
‘백승도 대령의 거사’와 관련해 필자는 육사 31기생들로부터 그 전후 사정에 대해 다양한 증언을 들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동기생들 사이에서 증언이 엇갈린다. 이미 작고한 육사 31기생 노 아무개 예비역 준장은 노태우 정권 마지막 해인 1992년 당시 대령으로 기무사 1처 5과장을 맡고 있었다. 장교의 신상에 대한 동향 관찰을 총괄하는 게 주 임무였다. 당시 기무사는 사령관과 1처장이 모두 하나회 소속이었는데 청와대로부터 “일선 장교들 중 정부의 시책을 비판하는 자들이 있다는 첩보가 있으니 그 실태를 조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래서 관찰을 시작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기무사령관과 1처장 등은 이 일을 “군 내부에 사적 조직이 암약하고 있다”는 방향으로 몰고 가려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즉, 하나회가 아닌 다른 사조직이 있는 것으로 믿는 분위기였다는 설명이다.
그 직후 대통령 선거가 있고 나서 1993년 초쯤 육사 31기생 동기회장 선출이 있었다. 과거에는 동기생들이 모여 추대하는 방식이었으나, 일부 동기생이 이의를 제기해 선거로 뽑자는 주장이 나왔다. 이때 백승도 대령이 주도해 하나회 동기회장에 반발하는 ‘비(非)하나회’ 동기를 옹립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설전이 오가는 사태가 발생했고, 하나회 측과 비하나회 측은 서로 멱살잡이까지 했다. 물리적 충돌 직전까지 간 상황이 진정되자 백 대령이 노 대령에게 다가와 “너는 기무사에 있으니 상황을 똑바로 인식하라. 군에 하나회라는 사조직이 있다”며 격앙된 주장을 하더라는 것이다. 이 동기회장 선거가 이후 문민정부가 출범하고 난 뒤 하나회 명단 살포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게 노 준장의 증언이다. 그러나 한민구 전 합참의장을 비롯한 일부 육사 31기생들은 이후 필자에게 “당시 동기회장 선거에서 물리적 충돌은 없었다”며 “(노 준장의 증언은) 과장된 것”이라고 말했다. 사건의 주인공인 백승도 예비역 준장은 현재 이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다.
왜 육사 31기생이 주축이 되어 군 내부의 사조직 논란이 터져 나왔을까. 적어도 한국 현대사에서 군의 주요 사건을 이해하려면 31기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31기는 510명을 입학시켜 126명을 퇴교시키고 384명이 임관됐는데, 이는 전임 기수보다 임관 인원이 26% 증가한 수치다. 당시에는 북한의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한 사건인 ‘1·21 사태’(1968년)를 겪고 나서 ‘생도 배가운동’이 진행되던 때였다. 생도 시절 가혹한 스파르타 훈련과 극심한 경쟁을 견뎌냈다는 자부심과 에너지로 무장된 31기 출신들은 역동적인 집단문화를 표출시켜왔다. 이런 문화가 임관 이후에도 고스란히 이어져 동기회장 선거에서는 ‘하나회’와 ‘비하나회’로 양분되는 사태가 벌어졌고, 이는 이후 하나회 숙군을 가속화한 배경이 됐다.
2004년 벌어진 남재준 육군참모총장의 진급 비리 사건도 소장 진급을 앞두고 있던 육사 31기 출신들의 공개적 불만 표출에서 시작됐다. 1993년 하나회 명단을 살포했던 백 준장이 2004년 10월께에도 남 총장실을 찾아와 전역지원서를 던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이 발생하기 하루 전에 남 총장은 소장 진급 대상자인 3명의 31기 출신 준장을 계룡대 인근의 한 식당으로 불렀다. 남 총장은 이들에게 술을 권하며 진급을 시킬 수 없는 사정을 설명하고 위로했다. 이들 가운데 한 명은 남 총장의 말을 수용했고, 한 명은 유보적 입장이었는데, 나머지 한 명은 총장 면전에서 극심하게 반발했다. 그가 바로 백 준장이었다. 이후 남 총장에 대한 공개적 불만 표출이 육군 인사 비리 수사로 연결되었다는 게 육군 안팎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하나회 숙청 없었다면 DJ·노 정권도 없어”
YS 정권은 하나회 숙군에 이어 12·12 군사반란에 대한 국회 청문회를 수용하고, 군의 무기 도입 비리까지 파헤치는 ‘율곡 사업 비리 특별감사’를 진행함으로써 뇌물을 받은 전직 국방부장관, 참모총장들을 줄줄이 감옥으로 보냈다. 이 모든 것이 정권이 출범한 1993년 한 해에 전격적으로 다 이루어졌다. YS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이후 여러 차례 인터뷰와 회고록을 통해 “당시 이 조치가 없었다면 김대중(DJ) 정권, 노무현 정권은 절대 출범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사상이 불온했다고 여겨지던 DJ와 노무현을 군부가 절대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YS 자신이 군부의 기를 확 꺾어놓았기 때문에 이후 군부가 감히 정치에 개입하지 못했던 것이고, 그 바탕 위에서 민주적 절차에 따라 정상적인 선거가 이루어져 야당으로의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는 설명이다.
1991년 12월5일 취임한 김진영 신임 육군참모총장은 취임 1년3개월 만인 1993년 3월 YS의 하나회 숙청으로 인해 옷을 벗어야 했다. ⓒ 연합뉴스
전두환·노태우, 유력 정치인들 자질 평가
1987년 시민항쟁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신군부의 시각으로 보자면 민주주의에도 한계가 있는 것이었다.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민주주의는 국가 안보에 위해를 가하고 북한 공산 집단을 유리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 안보에 책임이 있는 군부는 어떤 위기의 순간에는 국가를 보위하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돼 정국이 혼란스럽던 1979년의 신군부 반란, 즉 12·12 사태는 바로 그런 애국심과 충성심의 발로였다고 스스로 정당화한다. 비록 1987년의 민주화 시위가 군부에서 용납할 만한 수준이었다 하더라도 이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는 군부가 믿을 만한 안보관과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국가 안보를 위해 ‘행동할 수 있는 군부’였다. 그런데 YS의 하나회 척결은 그러한 군부를 ‘행동할 수 없는 군부’로 바꾸어놓았다.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리면, 군부는 한때 대통령을 낙점하려고도 했다. 1980년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을 맡으며 현역 군인 신분에서 국가의 최고 권력자로 부상해 있었다. 하루는 최규하 대통령이 전 사령관을 불러 “나는 하야를 하겠으니 전(全) 장군이 국정을 맡아달라”고 말했다. 얼마 후 최 대통령의 하야 성명이 나오고 정권을 인수하는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전두환 사령관과 노태우 서울계엄분소장은 머리를 맞대고 유력 정치인들의 자질을 평가했다. <노태우 회고록>(2011년)에 따르면, 당시 전두환과 노태우는 김종필(JP) 전 공화당 총재에 대해 유신과 장기 집권에 책임이 있는 사람인데 이제 와서 “유신을 반대했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신의가 없는 사람이라며 배제했다. YS에 대해서는 “국가 안보에 대한 신념이 부족하고 군에 대한 친근감이나 인맥이 두텁지 못하다”는 이유로 배제했다. DJ의 경우 “군 내부로부터 한마디로 ‘위험한 인물’로 평가돼 김일성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래서 신군부가 스스로 정권을 인수하게 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당시 군부는 혼란스러운 정국을 믿고 맡길 정치인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스스로 정권을 인수한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권력 기반이었던 민정당에 YS의 민주당, JP의 공화당이 합쳐져서 탄생한 민자당의 뿌리는 역시 민정당이었다. 군부의 지분이 그만큼 강했던 집권 민자당에서 스스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 이가 YS였다. 따라서 YS가 군부와의 관계를 원만히 가져갈 것이라는 점은 상식에 속했다. 그런데 그런 YS가 집권하자마자 거꾸로 신군부를 대거 몰아낸 것은 세간의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오늘날 국방부 사이버사령부의 댓글 공작과 군내 종북 교육 등 군의 정치 개입이 사회적인 논란이 되는 걸 지켜보면서 필자에게는 한 가지 떨쳐버리기 어려운 의문이 생긴다. 최근 우리 군의 장교단 사이에서 “우리 사회의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정치가 국가 안보에 부정적 영향을 초래하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이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에는 국가 안보 논리에 민주주의가 희생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민주주의 논리에 의해 국가 안보가 희생되고 있다는 인식이 장교단 내부에서 확산되는 것처럼 보인다. 국가에 반역하고 적을 이롭게 하는 세력에게까지 정치적 자유를 허용하는 민주주의 때문에 국가 안보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는 불안 심리가 그것이다. 이런 상황을 단순화한다면, ‘민주적 가치’와 ‘안보적 가치’라는 우리 사회의 핵심 가치가 서로 충돌하는 상황이 된다. 민주와 안보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사회의 중요한 구성물로서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데, 서로가 서로를 잠식하는 구도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공방의 자기 파괴 속성은 의학에서 말하는 ‘자가 면역’과 흡사해 보인다.
왜 민주주의가 국가 안보에 부정적이라고 인식할까. 교육사령부 교재에서도 지적하듯이, 자유민주주의는 전체주의에 비해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우월’한 제도이지, 전체주의와의 결전에서 ‘유리’한 제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극단적 상황을 지향하는 전쟁에서 전체주의는 잘 단결돼 있는 반면에 민주주의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옛 소련에 대한 봉쇄 정책을 주장했던 미국의 대표적 소련 전문가인 조지 케넌은 최근 국내에 번역된 <미국 외교 50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민주주의가 이 강의실만큼 커다란 몸집에 바늘만 한 크기의 뇌를 가진 선사시대 괴물과 비슷한 게 아닌가 하는 썩 유쾌하지 않은 궁금증이 일곤 합니다.”
정규 육사 첫 기수로 통하는 육사 11기 동기인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군 사조직 ‘하나회’를 이끌었다. ⓒ 연합뉴스
‘민주적 가치’와 ‘안보적 가치’의 충돌
이처럼 군 일각의 의식 속에서는 민주주의와 국가 안보가 잘 조화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군 장교단이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해 스스로 논리적 모순으로 자신을 몰고 가지는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 개념 자체가 일반인과는 다를 수 있다는 데 그 차이가 있다. 국가 공동체의 생존과 이익을 더 중시하는 민주주의는 그 반대자를 배격한다는 전제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이는 로마식 민주주의, 즉 국가 공동체의 가치를 이끄는 집정관과 같은 엘리트의 통치에 바탕을 둔 공화적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일반인들이 선호하는 민주주의는 자유적 민주주의로서 국가보다는 개인의 가치를 더 존중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적어도 이 점에서 일반인과 장교단이 민주주의에 대해 가지는 개념은 확연히 다르다. 이렇게 민주주의에 대한 다른 이해가 한국 현대사에서는 극심한 갈등과 충돌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왜 군 사조직은 탄생했을까. 물론 하나회는 “육사 장교들끼리 친분을 도모하라”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를 계기로 만들어진 정권 친위적인 엘리트 장교들의 모임, 즉 ‘일심회’가 그 기원이다. 윤필용 사건 당시에는 하나회 소속 장교들이 서빙고 보안사 분실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군복을 벗기도 했다. 사조직을 이끌던 전두환과 노태우가 고문을 받지 않고 그 후에 진급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과 박종규 경호실장의 특전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만이 사조직의 본질은 아니다. 정치권력과 국가에 대한 무한한 충성과 애국심을 통해 나약한 개인은 무언가 위대하고 숭고한 체험을 한다는 국가주의 엘리트 의식이 그 핵심이다. 이것이 집단의식으로 한 번 형성되면 다른 조직, 다른 개인에 대해 “우리가 가장 스마트하다”는 상대적 우월감으로 이어진다. 여기에서 한없이 숭고한 그 무엇에 복종하는 선택된 선민, 즉 엘리트 집단이 창출되는데 그 순간 절차적 민주주의가 교란되기 시작한다. 이들은 도덕적 정당성을 스스로 만들었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법을 위반하고 지휘 체계를 마비시키는 일을 해도 된다는 면죄부를 주었다. 그리고 자유적 민주주의자와의 숙명적인 전쟁이 발생하게 된다.
적어도 이 점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은 권위주의 시절을 떠받치는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한 뿌리를 제거했다는 역사적 평가만큼은 받아야 한다는 게 필자가 접한 대다수 전문가의 공통된 견해다. 당시 숙군 작업에 국민의 90% 이상이 환호하며 지지했다.
* 다음 호에는 ‘제7화 - 북풍공작의 실체’ 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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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軍들의 전쟁] #7. 한국군 장교, ‘북핵 폭격’ 하려던 미 장군에 저항하다
1994년 한반도 전쟁 먹구름…청와대·군 수뇌부 상황 파악 못하고 허둥지둥
기사입력시간 [1271호] 2014.02.26 (수)
김종대│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김영삼(YS) 정권 출범 첫해인 1993년, 한미연합사 작전부장으로 부임한 토미 프랭크스 소장은 성질이 매우 급하고 단순한 군인이었다. 전쟁이란 군사적인 요인 외에 정치·외교·문화적 요인이 결부된 매우 복잡한 문제임에도 그는 이런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다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에게 전쟁이란, 마치 한국전쟁 당시의 맥아더 사령관처럼 오직 이기지 않으면 지는 것이고,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것이며, 상대방을 지배하지 않으면 내가 지배당하는 그런 단순하고 명쾌한 문제였다. 그 중간을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폭력의 행사가 극단으로 치닫는 파국적 상황에서 오직 결과만을 생각해야 했다. 이런 그의 기질은 훗날 대통령이 된 조지 W. 부시와 같은 텍사스 출신이라는 점에서 미국의 네오콘과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는 10년 후 대장으로 진급해 미군 중부사령관으로 부임한 2003년 이라크 전쟁이 벌어지자 단 17일 만에 전쟁을 끝냈다.
그가 한미연합사 작전부장으로 부임해 있던 1994년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와 영변 핵시설 가동으로 핵 위기가 고조되었다. 위기의 3월을 넘어 4월에 북한 대표가 판문점에서 ‘서울 불바다’ 같은 협박 발언을 하고 모든 대화 채널이 단절된 가운데 6월이 되자 전쟁은 이제 기정사실화되었다. 걸프 전쟁에서 이라크군을 완벽하게 제압했었던 프랭크스 장군에게 북한은 단 며칠이면 붕괴시킬 수 있는 원시 국가처럼 보였다.
1993년 6월22일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게리 럭 신임 한미 연합사령관에게 지휘봉을 수여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반도 전쟁 직전까지 간 1994년 6월
그러나 당시 김영삼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군 수뇌부와 정부 관계자 누구도 미국에 “군사행동을 중지하라”고 말하지 못했다. YS는 회고록에서 자신이 클린턴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전쟁을 중지하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한국군을 한 명도 동원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미국의 전쟁을 저지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나중에 통역은 ‘YS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나중에 백악관 역시 “YS에게서 그런 전화를 받은 적이 없다”며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의 통화 기록까지 제시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청와대는 급박한 전쟁 위기에서 거의 판단력이 마비되다시피 했다. 군대 내 사조직 척결과 무기 도입 비리 조사를 통해 군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은 정치권력은 실제 전쟁 위기에서 국군 통수 능력의 한계를 드러냈다. 미국 국가안보회의(NSC)에서 영변을 폭격하기 위한 미군의 군사 계획이 구체적으로 논의되는 시점에도 동맹국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한국 정부는 혼란에 빠져 아무런 정책도 결정하지 못했다. 미국의 동향뿐만 아니라 북한의 전후방 상황에 대해서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미국의 전쟁 의지가 확고하다고 본 한국군 수뇌부는 6월에 육해공군의 전쟁 준비 실태를 점검했다. 그런데 곳곳에서 허점이 드러났다. 우리 전투기는 북한의 표적을 식별하는 적외선 센서와 야간 항법 장비가 없었고, 북한 장사정포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신형 대포병 레이더도 없었다. 무엇보다 탄약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당장 국방 예산에서 긴급 소요로 3300억원을 전용해 긴급한 물자를 조달하도록 했다. 이제 한반도의 운명은 미국에 맡겨야 할 판이었다.
미국이 북한 핵시설을 포격하면 전방의 북한 장사정포가 대응할 것이 분명했다. 연합사에 근무하고 있던 한국군 장교들은 그럴 경우 서울이 불바다가 되기 때문에 사전에 북한의 장사정포를 항공력으로 제압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당시 작전참모부의 한국군 연락장교 정경영 중령(육사 34기)이 “폭격 계획만이 아니라 장사정포 대비책이 있어야 한다”고 발언하자 프랭크스 장군은 “회의 시간에 이미 계획된 폭격 계획 외에 절대 다른 말을 하지 말라”고 일축했다. 6월 초 게리 럭 연합사령관 주재로 개최된 작전회의에서 정 중령이 “장사정포 대책이 없으면 북한 핵시설 폭격은 불가하다”며 이 문제를 재차 거론했다. 순간 옆자리에 있던 프랭크스 장군이 정 중령의 목을 옥죄며 “그 말 하지 말랬잖아”라며 발언을 제지했다. 정 중령이 “한 말씀만 더 드리겠다”고 하자 게리 럭 사령관이 프랭크스를 가로막고 정 중령에게 발언하도록 했다. 정 중령은 군산에 배치된 미 7공군의 F-16 전투기는 ‘야간 저고도 항법 및 적외선을 통한 목표 획득 장치’로 알려진 랜턴 장비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동원해 영변 폭격과 동시에 북한 장사정포에 대한 항공 작전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난장판이 된 작전회의가 끝나고 그날 저녁 프랭크스 장군이 정 중령을 호출하더니 “축하한다. 너희들 건의를 게리 럭 사령관이 수용했다”고 비아냥거리면서 말했다. 그러자 즉시 미 7공군 조종사들 사이에 난리가 났다. 북한의 조밀한 방공망을 뚫고 저고도로 지상에 착 붙어 날아가 북한의 장사정포를 실수 없이 포착해 공격하라는 아주 어려운 임무가 자신들에게 부여된 사실을 안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하면 작전에 투입된 미 전투기의 50%는 손실된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1994년 3월19일 북한의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실무 접촉이 결렬된 뒤 박영수 북측 대표가 눈길을 돌린 채 송영대 남측 대표와 악수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서울 불바다’에 집착한 북한
이 무렵 전쟁 위기를 지켜본 카터 전 대통령이 클린턴 대통령에게 “내가 직접 김일성을 만나겠다”며 자신을 특사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이어 게리 럭 사령관은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국 대사와 만나 8만명의 주한 미국인 철수 계획을 논의했다. 클린턴 대통령이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 존 샐리캐슈빌리 합참의장과 함께 마지막 결심을 앞둔 6월15일, 북한에서 돌아온 카터는 주한미군 벙커에서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해 “김일성 주석과 핵 동결에 합의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 장면을 지켜본 게리 럭 사령관 역시 전쟁이 발발하면 초기 90일 동안 5만2000명의 미군과 49만명의 한국군 사상자가 발생하고 민간인 피해가 막대하다는 점을 들어 신중론으로 돌아섰다. 8만명의 미국인을 대피시킬 계획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미국의 전쟁 비용 610억 달러도 동맹국으로부터 보전받기 어렵다고 판단됐다.
북한은 1990년대 벽두부터 비정상적으로 ‘서울 불바다’에 집착했다. 전방의 장사정포를 비롯한 포병 화력이 서울을 타격할 수 있도록 전진 배치하고 집중시키는 새로운 작전이 출현함에 따라 서울의 안전은 크게 위협받았다. 불과 40km 밖에서 적의 대포가 겨누는 수도권 일원에 1500만명이 살고 있었다. 인류가 전쟁을 시작한 이래 전쟁터 한복판에서 이렇게 높은 인구 밀도를 보인 적은 어떤 기록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사실 북한의 이런 포병 배치는 전쟁의 원리에 비춰본다면 비합리적이다. 자신들의 포병 전력을 분산해 은닉해야 하는데 서울 불바다에 병적으로 집착한 나머지 전방에 포병 전력을 밀집시켰다. 이럴 경우 유사시 상대방의 공격에 의해 한꺼번에 파괴되기 쉽다. 그러나 북한은 서울 시민을 인질로 한 강한 전쟁 억지력을 구축함으로써 자신의 안전이 도모될 수 있다고 믿었고, 그 전략은 주효했다. 당시 전쟁 위기가 불상사 없이 지나간 것은 카터의 중재 역할 때문이기도 했지만, 서울의 안전이 볼모로 잡혀 있는 국가적 상황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8년 후인 2002년. 이남신 합참의장의 방에 리언 러포트 연합사령관이 찾아왔다. 그는 “럼즈펠드 국방장관의 지시를 받아 구상한 미국의 새로운 작전계획을 설명하겠다”며 “미국의 현대화된 항공력으로 북한의 장사정포 포탄이 서울에 단 한 발도 떨어지지 않도록 하면서 북한의 핵시설을 정밀하게 폭격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이게 그 유명한 ‘작전계획 5026’이라는 북한 핵시설에 대한 선제공격 계획이었다. 기존의 전면전 계획인 ‘작전계획 5027’과 달리 북한을 정밀 타격하는 또 하나의 ‘비상계획(contingency plan)’인 것이다. 이 계획은 북한이 핵과 미사일로 위협하려는 징후가 있을 때 이를 선제 행동으로 제거하면서 서울의 안전을 도모하는 각종 군사적 방책을 담고 있었다.
“미국은 언제든 전쟁을 결심할 수 있다”
이 설명을 들은 이남신 합참의장과 그 자리에 함께 배석했던 의장 비서실장 한성주 준장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항공력에 의한 북한 선제공격과 화력 제압 계획을 듣는 순간 공군 출신인 한 준장은 “천재적인 발상”이라고 느꼈다. 1994년과 달리 2002년에는 미국의 항공 작전 능력이 눈부시게 발전해 있었다. 스텔스 기술이 적용된 폭격기(B-2)와 전투기(F-22), 스마트 폭탄인 합동직격탄(JDAM), 여기에 지하 시설을 타격할 수 있는 벙커버스터까지. 예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신무기들을 사용하면 단기간 내 전방의 북한 포병을 제압하고 북한의 전쟁 능력을 마비시키는 게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이 계획은 즉시 이준 당시 국방부장관에게 보고됐다. 이 설명이 있고 나서 2002년 말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에서 이준 국방부장관과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작전계획 5026과 5029 등 새로운 비상계획을 공동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무모할 정도의 이 계획은 다행히 한반도가 아닌 이라크로 향했다.
다시 1994년의 서울 불바다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북한의 전쟁 위협 못지않게 한국 정부에게 큰 충격을 준 것은 ‘미국은 언제든 전쟁을 결심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이 그해 김일성 주석의 사망에 이은 대기근으로 국가 시스템이 붕괴 위기에 직면한 북한뿐 아니라 김영삼 대통령의 한국 정부를 임기 말까지 신경쇠약증에 시달리게 했다. 적대적인 분단 체제에서 남북한은 ‘언제든 전쟁으로 국가가 파국을 맞이할 수 있다’는 공포와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대북 정책에서 냉탕과 온통을 오가며 정책이 일관성 없이 흔들리는 양상이 심화된 것은 그러한 신경쇠약증의 또 다른 일면이었다. YS는 1993년 대통령 취임사에서 “어떤 동맹도 민족을 대신할 수 없다”며 민족을 강조한 바 있고, 남북 정상회담과 4자회담을 추진해 한반도 핵문제와 평화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1994년 김일성 사망 직후 한국전쟁 전범론을 부각시켜 남북 관계에서 최악의 파국을 초래했고, 전쟁 위기를 고조시켜 국내 정치에서 반사이익을 노리는 이중적 행태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1996년 4월 유종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양호 국방부장관-김동진 합참의장-김동신 합참 작전본부장으로 이어지는 안보 라인은 판문점에 무장 북한군이 난입해 박격포 진지를 설치하는 등 무력시위를 벌이는 상황을 정치화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강릉에 북한 잠수함이 침투하며 벌어진 9월의 안보 위기에서도 우리나라 국방·안보 태세는 총체적인 난맥과 무능으로 상황에 끌려다니기만 했다. 그 와중인 10월에 뇌물 사건으로 이양호 장관을 경질하는 등 안보 위기와 정치 논리가 뒤섞여 마치 가면무도회 같은 대혼란이 연출되고 있었다.
1996년 9월22일 해군 군함이 강릉 앞바다에 좌초한 북한 잠수함을 동해항으로 예인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합참의장 지침, 일선 부대 하달에 17일 소요
전쟁을 겪어본 군인은 함부로 평화를 말하는 민간인보다 더 전쟁을 두려워하며 신중하기 마련이다. 이런 특징 때문에 2003년 이라크 전쟁 때 콜린 파월 같은 정통 군 출신 인사나 에릭 신세키 대장 같은 프로 장군들은 대부분 전쟁에 반대하며 신중한 선택을 주문했다. 그러나 우리 고급 장교들의 경우 전쟁에 관한 깊은 통찰력과 신중한 판단력으로 안정적인 국방 정책을 책임지기보다는 시류에 따라 책임지지 못할 강성 발언을 남발하고 위기 앞에서는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수없이 보였다. 이런 군사 문화에 대해 김종업 예비역 육군 대령(육사 36기)은 “군의 문화는 조작의 문화”라고 단언한다.
그는 정치권력과 상급자의 의도에 따라 전투 상황이 조작되고 허위 보고가 만연한 우리 군은 철저한 자기반성으로 군대 문화를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한국군 군사 문화의 난맥상을 드러내는 증거로 1996년 9월의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을 예로 들었다.
우리 군 17명이 사망한 당시 동부전선 군사작전에서 현장 부대의 전투 상황 기록과 군사령부, 합참의 전투 상보는 상당 부분 사실관계가 맞지 않았다. 상급자가 전투 상보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사후에 이리저리 뜯어고쳤기 때문이다. 우리 군은 전투에 대한 상세한 교훈 분석도 없었다. 1996년 당시 우리 군의 상황을 보면, 합참의장의 지침이 일선 말단 부대에 하달되는 데 17일이나 소요되는 등 믿을 수 없이 느린 행정과 비효율적 사례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합참과 각 군 본부 사이의 책임 전가와 비협조, 취약한 지휘통신 체계, 무엇보다 조작을 당연시하는 군대 문화가 어우러져 있었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에서 합참의장으로 새로 부임한 윤용남 대장(육사 19기)은 우리 군의 작전 수행 태세를 현대적으로 개혁하기보다 자신이 총장 시절부터 강조한 새로운 지상군 전술인 ‘견부진지 종심 타격’이라는 새로운 전술 개발에 몰입해 군이 요구하는 큰 개혁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게다가 자신의 말에 반발하거나 저항하면 여지없이 재떨이가 날아가는 ‘재떨이 지휘관’에 가까웠다. 그가 만든 마일스톤 접근 기법이나 상황 판단 논리는 우리 군에 새로운 의사소통 체계를 이루어낸 성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지만 군이 적응하지 못하는 실패작에 가까웠다. 게다가 지상군 편제도 3각 대대에서 4각 대대 편제로 수시로 바뀌면서 일선 부대들은 새로운 진지 조성 공사와 새로운 작전 계획 작성이라는 소모적인 업무에 시달려야 했다. 모두 최고 지휘관의 취향에 부응하려다 빚어지는 관료주의의 병폐였다. 후에 윤용남 합참의장이 퇴임한 다음 날, 이제껏 의장 지시로 운용해오던 그 복잡한 상황판은 몽땅 뜯어져 국방부 소각장에서 불살라졌다. 그러는 가운데 1997년 대선 열기가 정국을 뒤덮었고, ‘북풍’(北風)의 어두운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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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軍들의 전쟁] #8. DJ 밀사, 안기부장 찾아가 “천만명의 민란 일어난다” 경고
15대 대선 직전 ‘오익제 편지 사건’…YS와 DJ, 권영해·임복진 통해 ‘북풍’ 협상
기사입력시간 [1272호] 2014.03.05 (수)
김종대│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1997년 12월 초. 15대 대선 선거운동이 막바지로 치닫던 시점에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 김대중(DJ) 대통령 후보에게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터졌다. 안기부로부터 ‘오익제 편지 사건에 대해 조사할 것이 있으니 12월16일까지 안기부로 출두하라’는 통보서가 날아온 것이다. 19일이 대통령 선거니까 그 사흘 전까지 안기부로 출두하라는 건 아예 대선의 판을 깨겠다는 것처럼 여겨졌다. ‘오익제 편지 사건’이란 그해 11월20일 서울 목동 국제우편국에서 북한 우표와 북한 우체국 소인이 찍힌 이상한 편지 한 통이 발견되면서 시작되었다.
1998년 1월13일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이 주례회동을 갖기 위해 회담장으로 향하고 있다. ⓒ 연합뉴스
“사상 이상한 사람 대통령 되면 안 되지 않는가”
‘평양시 중구역’이 발신인이고, 수신인은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한영빌딩 3-4 김대중 귀하’로 돼 있었다. 8월에 무단으로 월북한 오익제 국민회의 고문의 편지는 “후광(DJ의 호) 선생님이 집권하시면 금세기 안에 반드시 통일 성업을 성취할 수 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대선에서 필승하시고 다가오는 통일의 그날 반갑게 상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끝맺고 있었다. 이 편지 한 장이 어떻게 처리되느냐에 따라 대한민국의 운명이 바뀔 수 있었다. 안기부는 즉시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편지를 압수하고 고성진 대공수사단장이 서울지검 검사실에 나타나 직접 이 사실을 공개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편지가 온 경위에 대해 DJ를 직접 조사하겠다며 이를 통보한 것이다.
당시 국민회의 천용택 의원(육사 16기)이 안기부를 접촉해 협상을 하려 했으나 별 성과가 없자, DJ는 임복진 의원(육사 17기)에게 자신의 전갈을 갖고 권영해 안기부장(육사 15기)을 만나도록 지시했다. 영문도 모르는 편지에 대해 대선 직전에 야당의 대통령 후보를 조사하겠다는 건 명백한 정치 개입이라며 그 부당성을 주장하러 찾아간 것이다. 더불어 편지 사건에 대해 공정하게만 처리해준다면 대선 이후 어떤 정치 보복도 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덧붙였다. 임 의원을 만난 권 부장은 요지부동이었다. “내가 방침을 바꾸려 해도 부하들이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라며 버텼다. “그 부하가 누구냐?”는 다그침에 권 부장은 고성진이 단장으로 있는 대공수사단을 지목했다. 이에 임 의원이 고 단장을 부장실로 불러 설득하는 동안 밤이 깊어졌다. 벌써 7시간째 설득이었다.
강골 무사 스타일인 임 의원의 말이 거의 호소형으로 바뀌고 있었다. “수사도 좋지만 이렇게 해서 대선 판이 깨진다면 1000만명이 저항하는 민란이 일어날 것이다”라며 마음을 돌릴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고 단장은 “사상이 이상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안 되지 않는가”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임 의원이 “나는 제대로 된 답변을 들을 때까지 안기부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겠다”며 버텼다. 아무래도 파국이 임박한 것 같았다.
임복진 의원. 1992년에 헌정 사상 최초로 야당에 입당해서 국회의원이 된 육사 출신 의원이다. 호남 출신으로 한때 잘나가는 군인이었지만 하나회에 의해 견제받으면서 3성 장군 진급이 좌절돼 군복을 벗은 시점에 DJ가 직접 만나 정치권에 끌어들인 인물이다. 3성 장군으로 진급이 될 줄 알고 계급장까지 준비한 상황에서 돌연 탈락하면서 영남 군맥, 특히 하나회에 대한 피해의식이 상당했다. 당시 육사 17기 그룹은 하나회의 주축이었고, 동기생들에 대한 진급까지도 일일이 관여했다. 임 장군이 진급되려는 순간에 일부 영남 지역 출신 동기생들이 “우리에게 잘못 보이면 절대 진급이란 없다”는 경고를 하더라고 했다. 임 장군 자신은 이 말을 무시했지만, 육군에서 진급자가 결정되어도 하나회는 청와대 경호실이나 기무사령부와 같은 권력기관을 움직여 이를 변경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한을 품고 나온 임 장군이 DJ의 영입 제의를 받아들여 1992년 정치권에 입문하자 예비역 장성 집단은 발칵 뒤집혔다. 정규 육사 출신인 예비역 장군이 DJ 쪽에 가담한다는 건 일종의 도박이었다. 어떻게 사상이 위험한 인물에게 육사 출신이 갈 수 있단 말인가. 당시만 해도 DJ가 대통령이 된다면 군에서는 “수류탄을 들겠다”는 극언이 나올 정도로 DJ에 대한 군의 반감과 불신이 상당했다. 주변에서 엄청난 회유와 압박이 임 의원에게 가해졌다. 그러나 임 장군은 “수평적 정권 교체를 위해 목숨을 걸고 입당한다”며 정치의 거친 물살에 몸을 던졌다. 일단 그가 정치권에 들어오자 뒤이어 강창성(육사 8기), 나병선(육사 14기), 장준익(육사 14기) 등이 야당 공천으로 14대 국회에 입성했고, 15대에는 천용택 의원까지 합류했다. 하나회 군맥에 맞설 수 있는 김대중 진영의 군 장성 그룹이 형성된 셈이다.
“정치 보복 않겠다” 약속 뒤집은 DJ
1992년 14대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 수행실장을 맡으며 대선 패배를 지켜보았던 임복진 의원이 보기에는 이번이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이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창밖에 어둠이 깔리면서 “이것으로 나의 역할도 끝인가”라는 한탄이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임 의원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바로 그 순간, 권영해 부장이 갑자기 임 의원을 보자고 했다. 권 부장은 “방금 김영삼(YS)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며 “오익제 편지 사건 수사는 대통령 선거 이후로 연기하기로 했다”는 결정을 전달했다. 아마도 권 부장이 YS를 설득한 모양이었다. 이것은 YS에게도 매우 어려운 결정이었던 것 같다. 이 결정을 전하면서 권 부장은 몇 가지 이야기를 했다. 권 부장은 며칠 전 YS로부터 “이인제 후보를 도우라”는 지침을 받았는데 이건 도저히 이행하기 어려운 주문이었다. 이 후보는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신당 창당에 나섰다. 권 부장은 안기부 간부들을 모아놓고 “대선 개입은 없다”며 정치적 중립을 주문했다. 육사 15기의 권 부장은 임 의원보다 2년 선배지만 같은 1937년생이다. 둘은 항상 친구처럼 보였다.
이로부터 며칠 후인 12월19일 DJ는 근소한 표 차이로 한나라당(신한국당의 후신) 이회창 후보를 따돌리고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정치 보복을 하지 않겠다던 당초 약속과 달리 권영해 안기부장과 고성진 단장은 이듬해 3월 ‘북풍’ 조작 혐의로 구속됐다. 임 의원이 DJ에게 격렬히 반발하며 항의했으나 외교안보 분야에서 새로운 정권의 주도권은 임 의원이 아닌 천용택 의원을 향하고 있었다. 협상파인 임 의원보다 강경파인 천 의원이 정권 실세와의 두터운 교분을 바탕으로 국방부장관에 오르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 굳이 이 일이 아니더라도 임 의원과 천 의원 사이에는 군 생활부터 이어져온 오랜 갈등이 있었다. 똑같은 호남 출신이지만 장군 진급에서 앞서던 임 의원이 군에서 배제되고 난 뒤 육사 1년 선배인 천 의원이 중장으로 진급하면서 둘 사이에는 감정적 앙금이 조성되었다.
1998년 4월3일 북풍 조작 혐의로 구속 수감되는 권영해 전 안기부장. ⓒ 연합뉴스
오익제, 황장엽 망명으로 수사기관 주목받아
정치에서의 음모와 배신은 별로 새로울 것도 없지만 대선을 불과 열흘 정도 앞둔 시점에 긴박하게 진행된 이 시기의 사건들을 보면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도대체 오익제라는 인물은 왜 뻔히 문제가 될 줄 알면서 그런 편지를 보낸 것일까. 그 이전에 그는 왜 월북을 한 것일까. YS와 권영해 안기부장이 이 편지 사건 수사를 통해 정말로 대선 판을 깨려고 한 것일까. 그야말로 미스터리의 연속이다. 이미 안기부는 12월에 공개적으로 이 수사를 진행하면서 DJ를 소환하려는 의지가 확고했고, 빈틈없는 수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당연히 대선을 앞둔 시점에 나타난 초대형 변수임에 분명했다.
오익제 고문이 수사기관으로부터 주목받게 된 것은 대선이 있던 1997년 3월에 북한의 황장엽 노동당 비서가 한국으로 망명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당시 안기부에 감금돼 조사를 받던 황장엽이 국내 좌익 인물이나 간첩에 대해 진술했을 것이라는 이른바 ‘황장엽 리스트’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커질 무렵, 황장엽의 한국 망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망명 중개인 이연길씨(북한민주화협회장)가 안기부 안가에서 황장엽을 면담한 일이 있다. 이때 일부 리스트가 밖으로 흘러나온 것으로 보이는데, 안기부는 이씨마저도 부산의 한 호텔에 감금시켜버렸다. 심지어 5월경에 있은 이씨의 딸 결혼식도 그 호텔에서 안기부 감시하에 열렸다. 그런 이씨를 월간조선의 김용삼 기자가 접촉했는데, 이때 김 기자는 천도교 교령이자 국민회의 이북5도민회 회장 겸 고문으로 있던 오익제라는 인물에 대해 처음 알게 된다. 이후 감시의 시선이 집중되자 이를 눈치챈 오 고문이 자진 월북을 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실제로 당시 국민회의 정동영 대변인은 안기부의 묵인과 방치하에 오 고문을 월북하게 한 것이라는 이른바 ‘기획 입북설’을 주장해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정 대변인은 그 정보를 안기부의 대북 이중 스파이로 알려진 암호명 ‘흑금성’, 즉 박채서씨로부터 제보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는 박씨를 2012년에 딱 한 번 본 일이 있다. 이후 그가 당시 오익제 사건의 전모를 꿰뚫고 있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국내 정치에서의 민주주의와 선거, 국제 정치에서의 전쟁과 평화는 완전히 상이한 영역이다. 더빈(Durbin)이라는 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국내 문제에 관한 한 눈부시게 다양하고 창조적이었던 자유주의 철학은 대외 정책과 국방에 적용될 때는 우물쭈물거린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안보의 논리는 한국 정치에서 숙명적으로 서로를 잠식하고 불화를 겪었지만, YS 정권의 막바지는 그 극단의 전형을 만들었다. 결국 오익제 편지 사건에 대해 권영해 부장이 DJ에게 양보한 것도 “1000만명의 민란이 일어날 가능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즉, 민주주의가 소중해서라기보다는 민란으로 국가 안보가 위태로워질 수 있기 때문에 양보한 것이다. 여전히 핵심은 안보 논리였다.
그러나 안보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국가 안보의 최대 자산이라 할 수 있는 국방에 대한 운영이 건실해야 했다. 국방은 정치논리와 기득권에 왜곡되지 않는 국가 안보의 프로토타입(prototype), 즉 원형에 충실히 접근해 있어야 했다. 하지만 YS 정권 시절에는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국민이 어떤 지도자를 선출하느냐와 별개로 군은 항상 자신의 총사령관인 군 통수권자를 선출하는 데 개입하고 싶어 했다. 일단 DJ가 대통령이 된다면 반드시 군에 정치 보복을 할 것이라는 불안감, 사상이 이상한 사람에게 복종할 수 없다는 군인의 자존심, 민주주의보다는 국가 안보가 우선이라는 장교의 직업의식이 복합적으로 정치에 대한 직업군인의 태도를 결정하는 경향이 있다. 매트 리들리의 저서 <붉은 여왕>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아프리카 초원에 사는 영양은 치타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일단 치타가 공격해올 때는 다른 영양보다 더 빨리 도망치려고 애쓴다. 아프리카 영양에게 중요한 것은 치타보다 더 빨리 뛰는 것이 아니다. 다른 영양보다 더 빨리 뛰는 것이다.’
1996년 10월18일 국방부 국정감사에서 국민회의 임복진(가운데)·천용택(오른쪽)·정동영 의원이 이양호 전 국방부장관 군사 기밀 유출 사건을 협의하고 있다. ⓒ 뉴스뱅크 이미지
영호남의 군 권력 교체와 북풍의 좌절
이 생물학자에게 인간과 동물을 불문하고 관통하는 원리는 ‘내부 경쟁’이다. 겉으로는 공동체의 안전을 위협하는 적에 맞서기 위해 국가를 조직하고 군대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내부의 위계질서를 형성하는 데 이용되는 명분이다. 중요한 것은 적에 맞서는 것보다는 내부의 경쟁자보다 더 우위를 점하는 것이다. 공동체 안전의 실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보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군 내부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특정 군부가 일정한 위상을 점하기 위해 안보 논리가 이용될 따름이다.
암묵적으로 이런 맥락을 이해하고 있던 정치권은 선거 때 경쟁적으로 북한을 접촉하고자 했다. 우선 보수 여당의 입장에서는 북한이 선거에 개입하기를 바랐다. ‘북풍(北風)’을 일으켜 선거에서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기 위함이다. 불발로 끝났지만 훗날 문제가 된 ‘총풍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반면 야당 입장에서 는 북한이 선거에 개입하지 않도록 부탁하기 위해서라도 북한을 접촉해야 했다.
1997년 대선에서도 DJ 진영이 해외에서 북한을 접촉한 것이 실제 문제가 되었다. 이렇게 보면 남한 정치 세력들의 의도와 목적이 종합되는 당사자는 다름 아닌 북한이다. 북한이 여당과 야당 세력을 각기 접촉하면서 누구보다 정확히 남한 내부의 정치 상황을 꿰뚫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정보가 종합되고 축적된 북한이 언제든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정치에 개입하고, 심지어 정계 개편을 촉진시킬 수도 있다. 다름 아닌 남한이 그럴 능력을 북한에 제공했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에서 이른바 ‘색깔론’이라는 것은 사실상 북한이 남한 정치에 개입하도록 하는 초대장이나 다름없다.
YS와 DJ의 막후 대화 통로였던 권영해와 임복진 두 명은 이후 쓸쓸하게 무대에서 퇴장했다. 이후 많은 장군이 정치권을 거쳤지만 이 당시처럼 사활을 건 안보 세력의 투쟁과 갈등은 그 이후 어느 순간에도 목격되기 어려웠다. YS가 하나회를 제거했다면, 그 터전 위에서 새로 집권한 DJ 정권에서 호남 군맥은 이제껏 군 역사상 가장 찬란한 전성기를 맞게 된다. 이전 정치권력이 그 권좌를 내줌으로써 세력이 교체되었다. 권력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가장 극단으로 치닫는 순간에 국가 공동체의 존립을 위해, 또 민주주의를 위해 더 이상의 불상사 없이 권력은 교체되었다. 북풍은 결국 극복된 것이다. 이것은 과거 국가 안보 논리에 굴복을 강요받던 민주주의가 가장 극적으로 승리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또한 권력에 맹종하던 군대와 권력기관 내에 새로운 견제 세력이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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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軍들의 전쟁] #9. 노태우, 이종구 육참총장에게 “개혁 의지 없으면 물러나라”
정권마다 국방 개혁 시도…기득권 지키려는 장군들 저항으로 번번이 무산
기사입력시간 [1273호] 2014.03.12 (수)
김종대│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중국 군대인 인민해방군은 원래 11개 군구였다가 7개로 개편됐다. 대군구는 단독으로 지역 방위를 책임지는 육·해·공군 합성사령부 체제를 유지한다. 과거 군벌 체제의 유산이 남아 있는 중국 군부는 군구사령부 체제 변경에 대단히 민감하다. 군구가 통폐합돼 조정되면 상당수의 지상군 별자리가 줄어들고 지역에 뿌리내린 기득권도 잠식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은 지난해 전쟁을 지도하는 최고기구로 국가안전위원회라는 중앙 기구를 창설했으며, 7개 군구사령부를 5개로 통폐합한다고 발표했다.
육군 군 구조조정, 25년째 제자리걸음
중국뿐만 아니라 최근 일본 자위대와 대만 군에서도 병력과 부대 구조가 활발하게 재조정되고 있고, 선군정치를 표방한 북한조차 상상하기 어려운 군 내부 개혁을 단행하고 있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 오직 변하지 않는 딱 하나의 군대가 있다면 바로 한국군이다. 한국군의 경우 노태우 정권 당시인 1990년 이른바 ‘818 군제 개혁’을 통해 경쾌하고 간편한 군 지휘 구조로의 전환이 표방된 이래 역대 정권마다 매년 유사한 취지의 국방 개혁안이 성안됐으나 지금까지 개혁된 것이 거의 없다. 국방 개혁에 관한 한 동북아 국가들 중 가장 먼저 눈을 떴음에도 내부 반발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이제는 가장 낙후된 신세가 된 것이다. 그런 한국군은 사령부의 천국이다. 서해에서 전투기가 뜨면 동해까지 10분도 걸리지 않는 이 좁은 전장에서 우리 군에는 별의별 사령부가 다 있다.
1991년 1월30일 노태우 대통령이 국방부 청사에서 이종구 국방부장관에게 1991년도 주요 업무를 보고받고 있다. ⓒ 연합뉴스
우리 육군의 야전군 사령부 체제를 보자. 1970년대 베트남 전쟁으로 한국군 고위 장교들을 과잉 양성한 결과,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들에게 보직을 제공해야 할 필요성에 따라 ‘개선문 계획’이 수립되고 이에 따라 3군사령부가 창설되었다. 그러나 한 번 만들면 없어지지 않는 게 조직의 속성이라서 1군과 3군을 통합한다는 개혁안이 노태우·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권의 국방 개혁안에 모두 포함됐으나, 박근혜정부가 되어서는 통합될 기미조차 없이 또 다음 정부로 연기될 전망이다. 육군 구조조정이 25년째 제자리걸음이다. 구조조정이 지체되는 동안 육군의 조직을 팽창시키는 사령부와 기관 창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인사사령부, 국군정보사, 국군수송사, 국군지휘통신사, 국군의무사, 국방참모대, 국방심리전부대, 국방조달본부(현 방위사업청), 전쟁기념관, 국방군사연구소, 국군복지단, 국방어학원 등등, 이 좁은 나라의 군에 없는 것이 없다. 여기에다 앞으로 국군군수사와 국군교육사가 또 창설될 예정이다.
이렇게 국방부 산하 직할 기능 조직이 많으면서도 이와 중복되게 육·해·공군 본부의 조직과 기능 역시 팽창했다. 과거 노태우 대통령 지시로 개혁안 구상을 책임진 818위원회는 불필요한 상급 기관을 없애고, 군령과 군정의 기능을 재조정해 중첩되거나 필요 없는 기능은 과감히 없애기로 했다. 이럴 경우 육·해·공군 본부 인력은 40%가 감축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 당시 이종구 육군총장은 818위원회 보고 내용을 대부분 왜곡했다. 실제 본부 감축 인력은 2~3%에 그쳤다. 예하 부대 구조개편에서도 경기갑사단 창설을 주도했다. 전차와 항공은 군단급 이상 제대로 전환하고 사단은 경쾌한 전투 조직으로 전환한다는 818위원회 결정을 뒤집은 것이다. 공군으로 전군 조치하기로 되어 있던 방공포대조차 증편하는 것으로 했고, 수색대대를 기계화대대로 증편하며, 3각 편제로 개편하기로 한 보병연대는 수색중대를 추가해 4각 편제로 증편하겠다는 등 육군 조직과 기능을 오히려 확장하는 것으로 개혁을 왜곡했다. 당시 이상훈 국방부장관이 대통령의 질책을 두려워한 나머지 본부 인력을 20% 감축하는 것으로 수정해 1989년 8월24일 각군 총장과 함께 대통령 보고를 진행했다. 이를 본 노태우 대통령이 진노하며 “개혁을 추진하라고 총장에 보임시켜놨는데, 의지가 없다면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핀잔을 주었다.
818 계획은 철저히 왜곡되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경악스러운 부분은 인력 구조의 왜곡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1992년 7월10일 국방부에서 올라온 ‘군 정원 조정안’에 서명했다. 이 서명으로 이제까지 군에서 정원을 초과해 운영하던 영관급 장교와 준장 등을 모두 정원으로 인정하는 조치가 이루어졌다. 중·대령 이상의 고급 장교 정원이 1000명 이상 늘어났다. 정원 조정은 818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 향후 보병을 줄이고 항공·기갑·정보·통신과 같은 미래전력 병과 위주로 정원을 늘린다는 취지였다. 그런데 그해 11월 육군은 진급 심사에 임하면서 늘어난 정원 대부분을 보병에 할당했다. 결국 보병은 급격하게 팽창했고, 기갑은 약간 증가, 그 밖의 병과는 정체된 형태로 1993년부터 한국군 장교의 인력 구조가 정착되었다. 여기에다 군 인사법을 개정해 영관급 장교의 정년을 53~56세까지 연장했다. 이는 이후 한국군의 모든 개혁 시도를 좌절시키는 단초를 제공하는 계기가 됐다. 인력 구조가 보병 위주로 되어 있으니 보병 부대를 감축하고 기계화 부대를 늘릴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군이 싸우는 방법을 혁신하려고 해도 보병 작전 위주의 장교단 인력 구조가 딱 버티고 앉아 그것을 가로막는 주범으로 작동하고 있다. 어떤 군사 기동이 포위냐, 돌파냐, 공격이냐 같은 용어를 두고 밤새도록 논쟁하는 형식주의에 기울어진 점도 없지 않다. 여기에다 진급 적체로 군내 유휴 인력이 급증하면서 한국군 전체가 부실화되었다. 믿을 수 없이 느린 행정과 진급 경쟁에 골몰하고 줄 서는 장교단 문화, 더 이상의 혁신을 거부하는 정체된 관료주의 폐단 등 전형적인 ‘관리형 군대’로의 추락이었다.
국방부가 3월6일, 2022년까지 병력 11만명을 감축하는 등 ‘국방 개혁안’을 발표했다. 사진은 지난해 10월1일 건군 제65주년 국군의 날 기념 시가행진. ⓒ 연합뉴스
조성태의 ‘21세기 위원회’ 비운으로 끝나
그러나 이런 한국군의 정체에 대해 분연히 맞선 인물이 있었다. 조성태 육군 중장은 1군단장으로 부임한 지 불과 10개월 만인 1993년 10월 권영해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국방부 정책실장 임명 통보를 받았다. 권 장관이 김영삼(YS) 정권의 첫 국방부장관으로 취임해 의욕적으로 군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차관 재임 시 정책국장으로 근무했던 조 장군을 눈여겨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돌연 12월에 국방부 조달본부에서 포탄 도입 사기 사건이 터지면서 그 책임을 지고 권 장관이 물러났다. 후임으로 임명된 하나회 출신 이병태 국방부장관은 전임 장관이 만든 국방개혁위원회를 해체하는 대신 “각 군별로 개혁안을 만들어 보고하는 것으로 대체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조 장군이 이병태 장관실로 들어가 “국방개혁위원회에는 육·해·공군의 최정예 자원이 모여 있으니 이들로 하여금 우리 군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존치해 저에게 그 운용을 위임해달라”고 건의했다. 이 장관의 승낙을 받아 조 장군이 위원회 명칭을 ‘21세기 국방연구위원회’로 바꾸고 위원회의 미래 기획 기능을 더욱 보강했다.
미완의 818 계획을 완결 짓고 “21세기 통일 대비 ‘신국방태세’를 정비한다”는 목적으로 전군의 대령급 최정예 18명으로 구성된 ‘국방개혁위원회’는 모두 3명의 위원장이 거쳐갔는데, 그중에서도 3기 위원장이 훗날 김대중(DJ) 정권에서 국방부장관이 된 조성태 장군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77년에 육군은 ‘전력증강연구위원회’, 일명 ‘80위원회’를 운영한 적이 있었는데 위원회 간사장으로 임동원(DJ 정권 때 국정원장·통일부장관 역임) 준장이 업무를 총괄할 당시 중령으로 기획 업무를 담당하던 인물이 조성태였다. 80위원회 시절부터 구상해왔던 우리 국방의 백년대계를 이번에는 반드시 완결 짓고 싶었던 그는 이 위원회에 온 힘을 쏟아부었다.
당시 조 장군이 위원회를 통해 구현하고자 한 것은 통일 이후까지 내다본 한국군의 ‘군축’과 ‘감군’ 규모를 기획하는 것이다. 조성태는 훗날 17대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자신의 기록을 구술로 남긴 적이 있다.
“북한의 김일성은 걸핏하면 ‘남북한 군을 10만으로 감축하자. 만일 그것이 어려우면 1단계 30만, 2단계 10만으로 감축하자’고 공세적인 제의를 해온 반면, 북한의 적화 야욕과 전략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우리 군은 으레 ‘북한의 대남 적화 전략 포기가 선행되지 않는 한 감군은 있을 수 없다’며 거부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참으로 궁색한 논리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고 특히 명분에서 밀리는 형국이었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문제의 ‘군축’에 관한 우리의 대안을 도출해야 했다. 각종 비효율이 만연된 우리 군을 그대로 방치할 수만은 없는 형국이었다.”
문제는 국방 재원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군 구조였다. 1989년 당시에는 국방비 중 경직성 경비라 할 수 있는 운영유지비가 61.9%였는데 그 후 계속 늘어나 1995년에는 70.1%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전력투자비는 같은 기간에 38.1%에서 29.1%로 감소해 국방 예산의 태반이 인건비를 비롯한 운영유지비 위주로 짜였다. 전력투자비 중에서도 신규 사업 비율이 1989년 9.2%에서 1995년 1.0%로 줄어들었다. 국방이 미래를 설계하는 장기 기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병력과 장비 유지에 급급한 상황으로 추락하고 만 것이다. 연구위원회는 이와 같은 구조가 지속된다면 미군이 철수할 경우 대체 전력 확보가 곤란하고 자주국방 태세는 지연될 수밖에 없음을 진솔하게 고백하고 있다.
합참의장과 참모총장 지휘 동시에 받아
전력을 제대로 증강하려면 병력을 줄이고 군 구조를 바꿔야 했다. 이는 너무나도 당연하고 핵심적인 진리이지만 가장 외면당하는 진리이기도 하다. 연구위원회는 2002년까지 병력을 50만명으로 10만명 줄이는 목표를 제시했다. 그러면서 국방 조직과 기능을 과학화하고 정보·지식화한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그런데 문제는 줄이는 방법에 따라 효과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국방 예산 절감 효과는 순수하게 사병만 10만명 감축할 경우 1070억원, 사병과 간부를 군 비율에 따라 함께 감축하면 5528억원 정도 되는 것으로 평가됐다. 군 구조를 그대로 놓아둔 채 병력만 감축한다고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병력 감축에 상응해 부대까지 감축할 경우 2조9968억원이 절감되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부대가 감축되면 부대 장비와 물자, 시설 같은 각종 운영 비용이 절감되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조성태 전 장관의 구술 내용이다.
“21세기 위원회의 가장 큰 업적은 장차 남북 간에 병력 감축을 합의했을 때를 대비해 우리의 ‘50만 감축안’을 기획한 일이었다. 이는 수적으로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해·공군 병력은 그대로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육군을 56만에서 35만으로 감축·정예화해야 하는 안이었고, 이를 다시 구체적으로 기획해보면 육군의 상비 사단을 12개로 절반 가까이 줄여야 하는 어마어마한 개혁안이었다. 이 기획안이 있었기에 후에 노무현 정권에서 ‘국방 개혁 2020’이 나왔다. 기획안이 갖는 의미로는 ‘비로소 우리도 북한의 상투적인 군축 공세에 실질적 대안을 갖고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전력 보강 및 증강 과정에서 부대 위치 조정, 건물 신축, 신형 장비 교체 등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는 분야에서 장차 남북 간 군비 축소 또는 통일 이후에도 유지·보유하게 될 부대·전력 위주로 투자의 우선순위를 획정할 수 있게 해주는 가이드라인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예산 낭비 방지와 효율적 집행을 가능케 해주는 지침서 역할도 가능했다.”
YS 정권 3년 차인 1995년 3월 조성태 중장이 대장으로 진급해 2군사령관으로 부임하기까지 18개월 동안 군 구조 개편의 골격은 거의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특히 위원회의 주축인 육군은 818 계획에서 완결 짓지 못한 육·해·공군의 실질적 통합, 즉 단일군 체제를 만들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위원장을 지낸 예상호 장군을 비롯해 이재달 장군, 장세용 장군, 임형규 대령, 김국헌 대령 등이 통합군제 관철을 위한 활동을 수시로 전개했다. 작전은 합참의장, 군정은 각 군 참모총장으로 역할 분담이 이원화되어 있는 기존의 조직은 ‘지휘 통일의 원칙(unity of command)’에 위배된다고 보고 각 군의 예하 부대가 상부 지휘권의 이원화로 혼선과 부담이 가중되고 있는 국방 현실을 격렬히 비판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818 계획 이후 각 군의 예하 작전부대들은 참모총장과 합참의장의 지휘를 동시에 받는, 말하자면 머리가 둘 달린 격이었다. 따라서 합참 기능을 통합군 체제로 전환해 3군에 대한 지휘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군 상부 구조를 바꾸고자 했다. 이와 더불어 각 군 본부는 총사령부 체제로 전환하고자 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1995년 3월29일 청와대에서 해군참모총장으로 승진 임명된 안병태 해군대장의 진급 및 보직신고를 받은 후 삼정도에 수치를 달아주고 있다. 오른쪽은 2군사령관에 임명된 조성태 장군. ⓒ 연합뉴스
통합군파와 합동군파의 격돌
그러나 조성태 장군이 야전으로 가고 난 이후 통합군 체제에 대해 해·공군이 격렬히 반발하면서 보고서를 채택조차 못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결국 1995년, 21세기 국방연구위원회는 흐지부지 연구를 종결한 채 해체되고 말았다. 말로는 21세기 통일 한국의 위상을 지향하는 국방 정책과 전략을 기획한다고 했지만, 각 군 간의 갈등으로 제대로 된 연구가 진행될 수 없었고, 청와대나 국방부도 표류하는 위원회를 방치했다. 연구가 종결된 이후 위원회의 해·공군 장교들이 배제된 채 육군 단독으로 국방부장관에게 비밀리에 연구 결과를 보고하는 전횡과 독선이 나타난 것도 연구위원회의 순수성을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결국 연구위원회는 국방의 대의를 세우는 조직이 아니라 각 군 간의 기득권이 치열하게 충돌하는 전쟁터였으며, 이로 인해 아무런 성과도 남기지 못했다.
얼핏 보면 군의 시스템을 현대화하면서 싸우는 방법을 혁신하고 효율성을 달성하는 것이 국방 개혁의 취지인 것 같지만, 사실 국방 개혁은 또 다른 권력 관계를 둘러싼 양보 없는 전쟁이기도 했다. 통합군, 또는 단일군으로의 전환에 대해선 육군의 패권을 강화해 군 운영의 민주성·합리성을 왜곡한다는 해·공군의 우려가 있고, 반면 육·해·공군의 병립 구조는 중복과 비효율의 극치라고 주장하는 육군의 통합군론자들이 격돌하는 방향으로 국방 개혁이 왜곡되었다. 그러는 순간 개혁은 마치 유산 상속을 앞둔 형제들처럼 이제껏 서로 협력하던 조직들 사이에 갈등과 분쟁이 전면화하는 양상으로 변질되는 상황이 이후에도 계속 벌어졌다. 국방 개혁을 방치한 YS 정권의 유산을 물려받은 DJ 정권이 직면한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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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軍들의 전쟁] #10. “청와대 그 자리는 호남 장교 몫 당신은 국방부로 돌아가라”
대구 출신 육군 대령 NSC 부임 사흘 만에 방출…호남 장교들이 요직 독점
기사입력시간 [1274호] 2014.03.19 (수)
김종대│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인사 문제는 어느 역사에서나 사람의 기본 욕구인 명예욕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잡음이 나지 않는 때가 없다. 이럴 경우 현명한 리더는 ‘내 사람’이라는 사적 판단보다 국가공동체와 조직의 발전이라는 공적인 판단을 앞세워야 잡음을 최소화할 수 있다. 반면 리더가 자신의 명예욕을 충족하기 위해 내 사람 심기에 급급한 행태를 보이면, 조직의 사기와 단결을 훼손함으로써 실패의 운명을 겪게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 군 조직만큼 이 평범한 진리가 외면되고 정치권력의 사적인 판단에 따라 군 인사가 좌지우지되는 불행을 겪은 나라도 흔치 않다.
김영삼(YS) 대통령 시절은 하나회 숙군 이후 군의 중심축이 PK(부산·경남) 인맥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거론되는 이들은 윤용남(육사 19기, 부산), 김희상(육사 24기, 경남 거창), 김판규(육사 24기, 경남 마산), 엄항석(육사 28기, 경남 밀양), 박종달(육사 29기, 경남 밀양) 등으로 알려져 있다. 하나회 측은 숙군 작업으로 자신들이 거세당하자 새로운 군의 주류 세력인 이들도 하나회에 대항하는 비밀 사조직을 결성했다며 이를 일컬어 ‘만나회’라고 불렀다. 하나회에 맞서 만나회의 존재 여부는 노태우 정권 말기부터 거론되던 문제였다.
1998년 10월1일 김대중 대통령이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에서 거행된 건군 50주년 기념식에서 사열하고 있다. ⓒ 연합뉴스
또 하나의 군 사조직 ‘만나회’ 실체 못 찾아
개신교 신자인 김영삼 대통령과 ‘소통령’으로 불리던 아들 현철씨 부자와 친분이 있는 경남 출신의 장교 그리고 개신교 신자 장교를 지칭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분위기였다. YS 정권 말기에도 이 문제가 재차 거론돼 만나회의 존재를 어느 장교가 언론사에 폭로하는 투고를 했으나, 해당 언론은 이를 군부 내 또 다른 암투로 판단하고 보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에 내일신문이 이를 특종으로 보도하면서 당시 육군본부의 인사참모부 출신 인물들이 집중적인 견제 대상으로 부각됐다. 그 주된 인물로는 관리처장을 역임한 김판규, 후에 인사참모부장으로 진출하는 박흥렬(육사 28기, 부산, 현 대통령 경호실장), 훗날 인사참모부장·인사사령관으로 진출하게 되는 한홍전(육사 32기) 등 육군 인사 라인에 대한 견제의 의미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만나회의 존재를 입증할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시중에 떠도는 설에 불과하다는 해석에서부터 숙군에 불만을 품은 하나회나 그 아류 조직의 창작물이라는 등 갖은 추측만 난무할 뿐이다. 실제로 기무사는 이 문제를 규명하기 위해 주요 인물들에 대한 미행·감청 등 온갖 수단을 동원했으나, 그 존재를 확인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이 문제는 새로 등장한 김대중(DJ) 정권에서나 그 이후 노무현·이명박(MB) 정권을 거치면서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군을 이간질하거나 인사를 교란시키는 문제로 표면 위로 떠오른 것을 보면 기이하다고밖에 볼 수 없다.
이런 괴소문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실제 사조직이 없었다 할지라도 군인을 줄 세우려는 정치권력과 줄 서고 싶어 하는 장교 집단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만큼은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 움직일 수 없는 증거는 바로 영남 정권이 등장하면 영남 장교가, 호남 정권이 등장하면 호남 장교가 진급과 보직에서 특혜를 누리는 지역 패권 경쟁 양상이 군 내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즉 출신 지역을 배경으로, 또는 유력자와의 근무 인연에 의해 권력과 밀월 관계에 있는 실세 장교 그룹이 어떤 식으로든 존재했다는 점이다.
만나회 명단이 적힌 괴문서는 YS 정권 시절부터 지금까지 총 9번 나왔는데, 나올 때마다 명단이 달라 이제는 그 신빙성을 신뢰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군에 사조직이든 출신 지역을 배경으로 한 실세 집단이든, 하나의 군사 권력이 사적인 원리로 형성되는 것은 매우 치명적이다. 장교단의 집단정신, 즉 명예와 동질성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적 원리가 권력과 명예에 대한 인간의 주체할 수 없는 욕망에 굴복하는 순간 군은 항상 심한 몸살을 앓았다.
DJ 정권 출범 후 호남 출신 군 요직 장악
DJ는 1998년 대통령 취임 첫해에 국가의 주요 요직이라 할 수 있는 국회의장·대법원장·감사원장·국정원장·대통령비서실장 등에 호남 인물을 단 한 사람도 기용하지 않았다. 그만큼 지역감정의 최대 피해자인 그 자신이 이제는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극복하고 역사상 최초로 국민 대통합을 성취하는 밝은 면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얼마 못 가서 무너졌다. 그 무렵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에 위기 판단 업무를 수행하게 될 직위에 새로 부임한 ㅇ 대령(육사 30기, 대구)은 부임한 지 사흘 만에 “당신은 청와대 근무에 부적합한 것으로 판단되었으니 다시 국방부로 돌아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미 일을 시작한 지 사흘이 지난 시점이었다. 충격을 받은 ㅇ 대령은 곧 기무사가 자신에 대한 음해성 자료를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에 제출한 것을 알고 격분했다. 대대장·연대장 시절에 있었던 몇 가지 일화를 악의적으로 조작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소명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후 ㅇ 대령은 기무사가 “청와대 그 자리는 호남 장교 몫이다”라는 말을 하고 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다.
무언가 인사에서 격변이 몰아칠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DJ 정권 출범 직후인 1998년 3월 말, 김동신 대장(육사 21기, 광주)이 사상 최초로 호남 출신 육군참모총장으로 부임하면서 “오랫동안 차별을 받아왔던 호남 장교들을 배려함으로써 인사를 정상화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인사 분위기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더불어 설로 떠돌던 정체불명의 군내 사조직에 대한 재조사 요구가 육군 인사참모부에서 제기되었는가 하면, 학생군사교육단에서 부적절한 포교 활동으로 헌병 조사를 받던 한 중령에게서 “나를 건드리면 배후 세력이 용서치 않을 것”이라며 “국방부 차관이 그 명단을 보관하고 있다”는 폭탄선언도 터져 나왔다.
오랜 기간 차별에 시달려온 호남 장교들이 고위직 장성으로 진출하는 데 영남세에 밀려 어느 정도 불이익을 받아온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인위적으로 한꺼번에 이를 바로잡는다는 건 인사의 자연스러운 도리를 거스르는 만큼 갑작스러운 인사 정책의 변화는 군에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사안이었다. 그 흐름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군의 최고 요직에 호남 출신들이 포진하면서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1998년 12월11일 김대중 대통령이 청와대 만찬에 앞서 김동신 육군참모총장(오른쪽)과 악수하고 있다. 맨 왼쪽은 천용택 국방부장관. ⓒ 연합뉴스
DJ 정권 첫해인 1998년에 천용택 국방부장관(육사 16기, 전남 목포), 김동신 육군참모총장(육사 21기, 광주), 이남신 기무사령관(육사 23기, 전북 전주)이 핵심을 장악했고, 주요 인사 라인에 오점록 국방부 인력차관보(육사 23기, 광주), 고기원 육군 인사운영처장(육사 29기, 광주) 등이 포진됐다. 새로운 정권의 실세로 국방부 획득실장 문일섭(육사 23기, 전남 강진), 정책차장 차영구(육사 26기, 광주), 획득국장 이원형(육사 26기, 광주) 등이 꼽힌다. 청와대 국방비서관 역시 하정렬 준장(육사 31기, 광주)이 발탁되었다. 이후 핵심 권력직에 진출한 호남 인사로는 이한구(육사 29기, 광주), 기무사 참모장을 거쳐 기무사령관을 역임한 문두식(육사 27기, 전남 화순), 군복을 벗고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진출한 안주섭(육사 24기, 광주), 육군참모차장을 거쳐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으로 진출한 신일순(육사 26기, 광주) 등이 꼽힌다.
“내 비리 조사하면 뇌물 전모 밝히겠다” 협박
사실 호남 장교들이 오랫동안 핍박을 받았다고 하지만 군의 각 분야에 엘리트 호남 장군들이 어느 정도 포진돼 있다가 DJ 정권을 만나 일제히 약진하게 되는 호남 인재 풀이 있었던 것이다. 핵심 요직에 호남 출신들이 대거 진출하면서 상대적으로 영남은 위축돼 군의 지역색이 강화된 것은 바람직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이들이 육군의 인사에 깊숙이 개입한다”는 소문은 정권 초기부터 있었던 게 사실이지만, 사실 과거 국방부 일원에서 숨죽이며 살던 이들이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동향끼리 만나 자유롭게 식사라도 하던 때는 이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억눌린 지역의 한을 푸는 일종의 해원(解寃)이라고 할까. 다소 소박한 지역 균형의 바람을 실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군사의 지역 패권을 형성하는 또 다른 권력 개편으로 이어지는 건 우리 군엔 엄청난 비용을 수반하는 일이었다. 여기에 과거 사조직 논리가 악용됐다.
이렇게 시작된 김대중 대통령 시절의 군은 여전히 비리와 청탁, 줄 서기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또 하나의 자화상을 만들어냈다. 군이 특정 인맥으로 재편되는 것은 정치화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이 전반적인 혼란과 함께 도덕 수준의 저하로 이어지는 경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DJ 정권의 오점록씨는 훗날 도로공사 사장으로 영전했으나 행담도 사건에 연루돼 조사를 받았다. 문일섭 획득실장은 나중에 국방부 차관으로 영전했으나 운전병에 의해 현금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차관 신분으로 구속되었다. 이원형 획득국장은 후에 품질관리소장으로 영전했으나 역시 뇌물 수수로 구속돼 실형을 살았다. 신일순 부사령관은 후에 부대비 횡령으로 구속됐다.
당시 군에는 병역 비리나 납품 비리가 끊이지 않았다. 비록 일부에 국한된 것이고 대다수 호남 장교들은 나름으로 전문성을 갖춘 인재로서 정당한 진출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일부가 호남 전체를 욕되게 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를 상징하는 사건이 있다. 이상용 예비역 중령이 21년간 군대 생활에서 보고 겪은 일을 담아 실화소설이라는 형식으로 2001년 <장군의 밥상머리>라는 책을 냈다. 이 책은 발간 즉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여기서는 진급을 위해 이리저리 청탁하고 돈봉투가 건네지며, 상급자의 부인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영관급 장교 부인의 시선이 녹아 있다. 출판사 서평은 다음과 같이 이 책을 묘사하고 있다.
“오로지 진급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야 하는 고단한 직업군인들의 삶, 그 와중에서 독버섯처럼 돋아나는 각종 비리 그리고 장군과 그 사모님을 둘러싼 음흉한 각축전, 군 조직사회의 내면이 숨김없이 들춰지는데, 그 이면에는 한낱 운전병조차 사단 내 장군 숙소를 제 집 드나들 듯 허술하기 짝이 없이 내버려둔 군 지휘관 장군의 정신 상태가 그들만의 치부(약점)로 산재해 있었다.”
“나라의 안보를 책임져야 할 영관 장교들, 그 부인들, 고작 해야 하는 일은 허구한 날 장군과 그 장군 부인의 영화를 위해 술상무가 되어주고 춤추고 노래 시중드는 상대가 되어주는 일, 그리고 장교 부인들의 남편 진급을 위해 아양 떠는 서비스 노동, 진급 때가 되면 백화점에 가서 빳빳한 만원짜리 현금을 고급 포장지에 고이 싸서 쥐도 새도 모르게 장군 사모님에게 전하곤 했다. 심지어 새벽 두 시! ‘5분 내에 이 방(장군 숙소)으로 술상을 차려온닷, 실시!’라는 거나하게 취한 장군의 구령이 떨어지자마자 어김없이 영관 장교와 그의 아내, 당번병으로 조직된 특수 임무 요원들이 일사불란하게 벌이는 긴박한 5분간의 스릴은 이 작품의 백미일 것이다.”
어느 서해안 부대에서 벌어지는 일상을 고발한 이 소설 때문에 당시 부대 지휘관의 부패가 문제 되었으나 나중에 4성 장군으로 진출한 문제의 인물은 만일 자신을 조사할 경우 “장군들의 뇌물에 대한 전모를 밝히겠다”는 언동을 해 육군에서는 없었던 일로 처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5년 7월27일 오점록 전 도로공사 사장이 행담도개발㈜과 불리한 자본투자협약을 체결해 도로공사에 손해를 초래한 혐의로 서울지검에서 구속되고 있다. ⓒ 연합뉴스
현 정부 유력 인사 연루설에 수사 덮기도
호남 출신 장교들이 요직에 대거 진출한 것이 김대중 대통령의 호남 정권 5년 동안 군 인사의 판도에 어떤 변화를 초래했을까. DJ 정권 시기 마지막 시점을 기준으로 육사 27기에서는 중장이 9명 배출됐는데, 그중 6명이 호남 출신이었다. 육사 28기 중장 3명 중 2명이 호남이었다. 29기의 경우 소장 20명 중 8명이 호남이었고, 30기의 경우 소장 9명 중 4명이 호남이었다. 3사 17기의 경우 대령 1차 진급자 9명 중 8명이 호남이었다. 2000년 말을 기준으로 하면 이른바 ‘진급되는 자리’로 인식되는 군단 작전참모의 90%가 호남 출신 일색이다. 기무·헌병 등 이른바 힘 있는 보직에는 호남 지역 편중이 더 심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필자의 이 글이 호남 등 특정 지역을 비하하기 위한 의도로 쓰인 것이 절대 아니라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호남이냐, 영남이냐 문제가 아니라 군의 패거리 문화를 말하기 위함이다. 지난 MB 정권과 현 정부에서는 다시 영남 편중의 군 인사가 진행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미 국민들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지역감정이 완화되고 있음에도 유독 공직자 집단, 특히 군에서 이런 지역 패권 경쟁이 지속되는 것은 공공 집단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조장하고 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우리 군에 암약하는 지역과 출신을 추종하는 근본주의자들은 타 지역 출신을 배제하기 위해 추후 경쟁자가 될 만한 인물을 사전에 제거해 경쟁 자체를 없앤다는 목적으로 고급 인력을 사장시키는 행위를 자행하고 있다. 여기에 특정 인사를 배제하기 위한 음해와 모략의 수단으로 기무사가 관리하는 장교 신원 자료가 악용되고 헌병의 범죄 정보도 활용된다.
그런 우려는 현 정부 들어서도 지난해에 있은 장경욱 전 기무사령관의 석연치 않은 경질이라든지, 군 출신인 국정원장과 청와대 안보실장 등의 영향력이 있을 것으로 의심되는 비정상적인 진급 인사에서도 이미 드러나고 있다. 여기에다 지난해 말, 3군사령부에서 벌어진 한 대령의 비리 수사에서도 안보 라인 유력 인사 ㄱ씨의 연루설이 거론되자 석연치 않게 수사가 마무리된 사건도 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시스템과 법치(法治)에 의한 국방이 아니라 인치(人治)에 의한 전근대적 요소가 우리 군에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등용’과 ‘발탁’이 무시된 ‘시혜’와 ‘은전’으로 군 인사가 전락하는 순간, 그 군대에는 미래가 없다. 군의 강력한 규율과 권위, 복종의 정신이 그렇게 정치적으로 악용됨으로써 국가 위기관리, 안보 태세, 조직 발전이 모두 희생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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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軍들의 전쟁] #11. “전투 중에 막후교섭은 이적 행위… ”
제1 연평해전 당시 해군 2함대사령관 비판…DJ 정권에서 중용된 김동신·조성태 등 공적 몰려
기사입력시간 [1275호] 2014.03.26 (수)
김종대│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햇볕정책을 표방한 김대중(DJ)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것은 군사적 보수주의를 신봉하는 장성과 장교 등 직업군인들에게 새로운 적응을 필요로 했다. 햇볕정책의 기본 골격이 북한에 대한 화해와 협력이었기 때문이다. 북한이라는 적과 협력하는 정치 지도자를 군의 최고사령관으로 인정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모순에 어떤 식으로든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유달리 군에 대한 피해의식이 강했던 DJ는 군 출신을 정부 요직에 중용했다. 임동원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육사 13기), 이종찬 국정원장(육사 16기), 천용택 국방부장관(육사 16기) 등이 DJ 정권 초기 외교안보 진용에 합류했다. 그 뒤를 이어 조성태(육사 20기), 김동신(육사 21기) 등이 국방부장관직을 거쳐 갔다.
1999년 6월21일 임동원 통일부장관(왼쪽에서 두 번째) 등이 서울 세종로 청사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를 마친 후 장관실을 나서고 있다. 사진 맨 왼쪽은 조성태 국방부장관, 맨 오른쪽은 천용택 국정원장이다. ⓒ 연합뉴스
적과 협력한 배신자들이라는 낙인찍어
예비역 장성들을 중심으로 ‘육사 오적(五賊)’이란 말이 한때 유행한 게 사실이다. 필자는 지금도 육사 출신 예비역 장군들과의 대화에서, 그들이 특히 DJ 정권을 거쳐 간 육사 출신 고위 공직자 및 장성들에 대해 “동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의미에서 ‘육사 오적’이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는 모습을 자주 봤다. 특별한 잘못이 있었든 없었든 그건 중요치 않다. 적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직업 장교단 특유의 적개심 같은 것이 이들을 향해 작동한다. 여기에는 국가 유기체설을 신봉하는 어떤 완고함이 있어서 북한이라는 적을 최종적으로 굴복시키고 정복하지 않는 한 그 전에 손을 잡는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배신 행위라는 의미가 강하게 담겨 있다.
남북정상회담 준비로 분주한 2000년 5월. 김대중 대통령이 임동원 국정원장을 청와대로 호출했다. 그동안 국정원이 황장엽씨와 같은 북한 고위층 증언을 토대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 대한 신상 정보를 정리해 청와대에 올렸는데, 이를 본 DJ가 크게 실망했다. 모든 증언에서 “김정일은 음험하고 부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로서 “도저히 마주할 수 없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DJ가 임 원장에게 “아니 김정일이 ‘미친놈’이라는데, 내가 그런 사람과 정상회담을 어떻게 하느냐”며 “임 원장이 북한에 특사로 가서 김 위원장이 진짜 미친놈인지 알아보라”고 했다. “가급적 김정일과 오랜 시간을 이야기해보라”는 지침까지 덧붙였다.
그해 5월27일에 이어 6월3일 평양으로 간 임동원 특사는 김정일과 가급적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했다. 총 5시간 정도 김 위원장과 직접 대면하면서 그는 김정일이 유머 감각이 풍부하고 말이 통하는 지도자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군 장성 출신인 임 원장이지만 그는 전략가·사상가로서의 면모를 지닌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육사 출신 예비역 장성들로부터 ‘육사 오적’의 대표적 인물로 공격받기도 하지만, 1971년 미국과 중국이 수교하는 데 막후 외교를 수행한 키신저 전 국무장관에 빗대서 ‘한국의 키신저’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이북 출신으로 육사를 나와 준장 시절인 1970년대 말에 한국군 자주국방의 장기 구상을 기획하는 육군본부의 ‘80위원회’ 간사장으로 활약했고, 이후 한국군에 비정규전 교리를 최초로 도입했던 군대 내에서 손꼽는 전략기획통이었다.
그랬던 그가 군복을 벗고 외교관을 역임한 데 이어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는 통일부 차관으로 남북 기본합의서 채택과 이산가족 상봉, 남북 고위급회담 등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국방부·안기부와 같은 냉전 세력의 반대쪽에 위치해 있었다. 이런 그를 1995년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DJ가 삼고초려해서 끌어들였고, 그는 DJ가 만든 아태평화재단 초대 사무총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한때는 자주국방의 설계자였던 그가 이제는 햇볕정책의 설계자가 되어 안보와 통일을 추구하는 사상의 궤적은 마치 긴 여정에 돌입한 혜성과 같이 긴 여운의 꼬리를 남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임 원장의 행적은 여전히 북한을 적으로 삼고 있는 장교단이나 예비역 사회의 시각에서 보면 배신자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다.
최근 번역된 헨리 키신저의 <회복된 세계(restored world)>를 보면, 외교란 상대방과 이익을 조정하고 타협하는 상대적 논리로 전개된다. 그러나 전쟁이란 이기지 않으면 지는 것이고, 죽이지 않으면 죽는 것이고, 지배하지 않으면 지배당하는 절대적 논리로 전개된다. 전쟁의 논리에는 그 중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DJ 정권은 비록 북한이 적이라고 해도 전쟁의 논리를 초월한 외교로 가야 한다고 봤다. 하지만 이런 생각 자체가 당시 장교 집단으로부터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냉전의 질서가 유지되는 한반도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전쟁론자’와 ‘외교론자’로 극심한 분열
남북정상회담이 있기 1년 전인 1999년 6월15일 서해 연평도 인근에서 남한과 북한 해군이 충돌하는 최초의 교전이 일어났다. 현장에서 전투원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청와대는 북한과의 막후교섭을 통해 위기를 진정시키고 더 큰 위기를 막고자 했다. 전쟁의 논리와 외교의 논리가 동시에 진행되던 당시 상황에서 국가의 정체성은 ‘전쟁론자’와 ‘외교론자’로 분열되었다.
제1 연평해전 당시 해군 2함대사령관으로 전투를 지휘했던 박정성 제독은 필자에게 전투가 임박한 상황에서도 북한과 막후교섭을 한 임동원 외교안보수석을 ‘살아 있는 간첩’, 즉 ‘생간(生間)’이라고 격렬히 비판했다. 전투가 임박한 상황에서 교섭이란 “간첩이나 하는 행위”라는 주장이다. 물론 여기에는 반론도 뒤따른다. 만일 그렇다면, 1962년 10월의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해 핵전쟁이 거의 임박했다고 믿어지는 순간에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이 도보르닌 미국 주재 소련 대사와 만나 흥정과 거래를 한 막후교섭도 동일한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반문이 그것이다. 적어도 이 문제만큼은 무엇이 옳은가를 떠나 국가가 숙명적으로 안아야 될 숙제인 것처럼 보인다.
2002년 10월4일 국방부에서 열린 국회 국정감사에서 한철용 5679부대장이 서해교전 직전 북한의 도발 가능성을 경고하는 정보보고서를 올렸다면서 비밀 문서를 공개하고 있다. 그러나 국감장에 있던 군 수뇌부의 제지로 곧 비공개로 진행됐다. ⓒ 연합뉴스
“김동신·남재준이 북한 도발 징후 누락”
정치권력과 군부의 매끄러운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가운데 안보 위기는 국가의 정체성을 분열시킨다. 이 같은 비난은 이후 DJ 정권 말기의 김동신 국방부장관에게도 가해졌다. 2002년 6월29일 아침 10시쯤. 집무실에 있던 김 장관은 인터폰으로 “방금 서해에서 교전이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러나 2함대의 최초 보고에는 ‘교전이 벌어져 적함이 불타고 있다’는 내용만 있어 우리 측이 일방적으로 승리한 것으로 인식되게끔 했다. 합참의 지휘통제실에서도 승전한 것으로 알고 제일 먼저 달려온 안기석 합참 작전처장을 비롯해 주요 실무자들이 박수까지 치며 환호했다. 이후 국방부장관·합참의장 등 주요 군사 지도자들이 국방회관으로 자리를 옮겨 장군 진급자들의 신고를 받은 데 이어 오찬까지 하는 동안 서해에서 우리 장병 6명이 사망하고 총 24명이 사상하는 끔찍한 피해가 발생한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 오후부터 우리 측이 선제공격을 당한 끔찍한 패전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우리 국방은 그 정당성에서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된다.
서해에서 불행한 사태가 발생할 당시에 국군 정보사령부 예하의 감청부대(일명 쓰리세븐부대) 지휘관이었던 한철용 소장(육사 26기)은 “정보수집 활동에 태만했다”는 책임을 추궁받고 징계를 받게 된다. 그러자 그는 “김동신 장관을 비롯한 군 수뇌부가 북한의 도발 징후를 고의적으로 누락한 당사자”라고 그해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폭로했다. 이후 군복을 벗은 그는 북한의 도발 정보를 은폐한 당사자로 당시 김동신 국방부장관과 남재준 한미연합사 부사령관(현 국정원장)을 지목하며 가혹하게 비난한다.
이에 대한 논란은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과연 북한의 도발 첩보를 햇볕정책을 의식한 군 수뇌부가 고의로 은폐해 장병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는가 하는 논쟁이 지금 이 순간에도 법정에서 벌어지고 있다. 한철용 전 사령관의 주장이 나오자, 당시 사망한 장병의 유족들이 군 수뇌부를 고소한 것이다. 그 대상자는 당시 김 장관과 이남신 합참의장, 이상희 작전본부장을 비롯해 14명에 이르고 있다.
북한을 대화의 장에 끌어들이는 데 막후 외교와 안보를 동시에 진행하는 DJ 정권에서 국가 정체성이 크게 흔들리고 지도층이 분열된 것은 이후에도 극심한 갈등으로 이어졌다. 그것이 2012년 대선에서 ‘NLL 논쟁’으로 또 재연되었다는 점에서 국방에서의 지도층 분열이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지는 긴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안타깝게도 이 문제가 국민 통합이 아닌 분열로 작동하는 메커니즘이 되고 있다.
이와 별도로 조성태 전 국방부장관 역시 또 다른 특별한 이유로 육사 출신 예비역들에게 ‘오적’의 한 명으로 비난받고 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국방부장관이었던 조성태는 임동원 국정원장과 함께 과거 중령 시절 ‘80위원회’에 소속된 우리 군의 빼어난 정책통 가운데 한 명이었다. 역대 정권에서 장기적 안목의 국가 전략을 기획하는 국방 사상사는 조성태를 빼고는 이야기를 전개할 수 없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그랬던 그가 예비역들에게 극렬한 비난을 받게 된 이유는 어처구니없게도 ‘군인연금법’을 잘못 개정했기 때문이다.
완벽을 지향하는 지략가가 조직의 리더가 되면 참모들은 피곤해진다. 조직의 리더는 때로는 참모들의 거짓 보고에도 어느 정도는 속아줄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여지가 바로 사람이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 장관에게는 그런 면이 없었다. 주된 부작용은 매일 아침 진행하는 국방부 간부들과의 조찬 회동에 있었다. 여기서 장관이 참모를 호되게 질책하다 보니 즐거워야 할 아침 식사는 소화불량으로 이어졌다.
마침 2000년의 그날도 남해일 국방부 인사복지국장이 군인연금법 개정 문제점을 말하기 시작한 데서 발단이 됐다. 조 장관이 짜증을 내며 “빨리 그 법을 개정해버리지 왜 우물쭈물하느냐”고 질책했다. 결국 법안 개정의 부작용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 채 이 문제가 그냥 넘어갔다. 당시 국방개혁위원회 부위원장 자격으로 조찬에 참석했던 조남진 예비역 장군(육사 26기)은 “중요한 군인연금법 개정이 조찬 회동에서 결정된 것이 문제”였다고 증언한다. 이렇게 참모들을 휘어잡는 조 장관은 ‘조 하사’라는 별칭으로 통했다.
1999년 연평해전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보여주는 해군 함정들. ⓒ 연합뉴스
‘조 하사’ 이후 국방장관 조찬 회동 사라져
이런 과정을 거쳐 2001년부터 새로 발효된 군인연금법 내용은 군인연금 지급액을 줄이기 위해 산출 기준이 전역 시 보수 월액에서 전역 전 3년 평균 보수 월액으로, 연금액 인상 기준이 재직자 봉급 인상률에서 소비자 물가 변동률로, 연금 지급 정지 대상이 국가 및 지방단체의 출자 기관에서 모든 근로소득으로 확대된 것 등이 그 골자였다. 당장 이상훈 전 재향군인회장(육사 11기)이 예비역에 대한 노골적인 푸대접이라며 공개 반발하고, 재향군인회가 조직적으로 국방부를 성토했다. 이후 정부 측과 대립하며 재개정 운동을 추진해온 권오강 영관장교연합회장은 이명박 정권 때인 지난 2010년 당시 김태영 국방부장관에게 보낸 공개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군인연금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성태 전 국방부장관님은 김대중 정권 때인 2000년도에 군인연금을 깎아내리는 군인연금법 개정에 동의 서명한 국방부장관으로서 군인연금 수급자에게는 만고의 역적이 되고 있습니다.”
‘만고의 역적’이라는 게 공식 서한에 등장한다는 사실 자체도 이채롭지만 이걸 또 언론에 그대로 발표할 만큼 예비역들의 반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전역 후의 삶과 연관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건드린 조 전 장관이 육사 오적의 반열에 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예비역의 거센 반발로 2010년에 군인연금법은 재개정돼 상당 부분 예비역들의 의견을 수렴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조성태 전 장관의 조찬 업무 수행 이후 최근까지 어떤 국방부장관이 부임하더라도 “조찬 모임은 없다”고 말하는 걸 장관이 국방부 간부를 배려하는 조치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또 한 명의 ‘조 하사’로 통하는 조영길 전 국방부장관(노무현 정권 때 첫 국방부장관)을 끝으로 국방부에서 조찬 간부회의는 없어졌다.
이렇게 군인, 특히 장교단에 상처를 준 육사 출신들이 DJ 정권 시기에 다수 발견된다는 점은 향후 정치권력이 대북 정책을 수행하면서 군에 대한 관리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는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예비역 장군들 500명 이상이 집단으로 16·17·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한나라당(이후 새누리당)에 입당해 각기 이회창·이명박·박근혜 후보 진영에 포진한 것은 아무래도 장교단의 집단정신과 명예를 고취하는 데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특정 정당으로 몰렸다는 것은 현역 군인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쳐 군이 정치 논리에 오염되는 현상을 부채질하고 군 내부에 파벌주의를 심화시키는 등 더 큰 부작용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애국심도 좋고 국가관도 좋지만, 자칫 그것이 지나쳐 정치 세력화를 지향하는 군사 집단이 형성된다면 민주주의가 뿌리째 흔들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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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軍들의 전쟁] #12. 9·11 테러 터진 날 저녁 김동신 국방장관은 만취해 있었다
밤 10시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 소집 청와대 파견 나간 장교들 로비로 연기
기사입력시간 [1276호] 2014.04.03 (목)
김종대│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9·11 테러’가 일어나던 2001년 9월11일 오전 8시30분. 로널드 럼스펠드 미국 국방장관은 공화당 하원의원들과 펜타곤에서 조찬회동을 하고 있었다. 50여 일이 지난 12월5일 미국 CNN방송의 ‘래리 킹 쇼’에 출연한 럼스펠드는 “9월11일 조찬회동에서 무슨 대화를 나누었나”라는 래리 킹의 질문에 “나는 앞으로 1년 이내에 엄청나게 충격적인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의원들에게 말했어요. 그런데 제 보좌관이 들어와서 급히 쪽지를 건넸어요. 여객기 한 대가 세계무역센터와 충돌했다는 내용이었죠. 우리는 조찬을 중단했고, 저는 CIA(미국 연방수사국)의 브리핑을 받기 위해 일어섰죠”라고 말했다. 이 말에 래리 킹이 “당신은 예언자였군요”라고 응수하자 럼스펠드는 “그렇죠”라고 답한다.
이는 ‘부시 정권 2인자’인 럼스펠드의 거짓말이었다. 2010년 비밀이 해제된 당시 펜타곤의 메모는 그날 실제 회동의 목적이 ‘미사일 방어’(MD·Missile Defense)에 관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럼스펠드는 “북한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을 입증했다”며 “시급히 MD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2002년의 MD 연구·개발비는 달랑 83억 달러”라며 “이는 전체 국방비의 2.5%에 불과하고 2001년에 사용된 대테러 관련 예산 110억 달러보다도 훨씬 적다”고 말했다. “미국이 직면한 최대 위협은 미사일인데 테러 방지 예산보다 MD에 적은 돈을 쓰는 게 말이 되느냐”는 말도 덧붙였다.
2001년 9월11일 테러범에 의해 납치된 민간 항공기가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건물과 충돌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 연합뉴스
“장관님, 이걸 씹으십시오”
9·11 테러 소식이 외신을 타고 전 세계에 타전될 무렵인 밤 9시쯤, 한국의 김동신 국방부장관은 몹시 취해 있었다. 이날 오후의 국회 국정감사에서 4성 장군 출신인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 박세환 의원이 북한 상선이 제주해협을 통과한 사건을 지목하며 김 장관을 거세게 몰아세웠다. 이에 격분한 김 장관이 “선배님 혼자 애국하는 것 아닙니다”라고 되받아치자, 이번에는 한나라당 국방위원 전체가 김 장관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몹시 속이 상했던지 국감이 끝나고 만찬에서 김 장관은 평소의 주량을 초과했다. 그런데 테러 소식을 접한 청와대가 이날 밤 10시에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소집을 국방부로 통보해왔다.
이 난처한 상황에서 국방부 참모들이 장관 공관으로 내달렸다. 맨 먼저 달려온 장관 직속의 국방개혁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던 조남진 소장이 김 장관을 흔들었지만 김 장관의 정신은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누군가 “솔잎을 먹으면 술이 깬다”고 말해 공관 인근의 소나무를 찾아 비닐봉지에 한가득 솔잎을 따왔다. “장관님 이걸 씹으십시오”라며 생수와 함께 솔잎을 입에 물렸지만, 아무래도 청와대 회의 참석은 불가능했다. 뉴욕과 워싱턴에서 테러의 폭음(爆音)이 울릴 무렵에 한국에서는 국방부장관의 폭음(暴飮)이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 문제는 국방부의 남다른 로비력으로 해결되었다. 밤 10시로 예정된 청와대 회의를 다음 날 아침으로 연기하기 위해 청와대에 파견 나간 군 장교들이 조직적인 로비를 했고, 그것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공교롭게도 한·미 양국 두 국방장관의 혼돈 속에 세계 질서의 근본적인 변혁을 초래할 중대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던 셈이다. 유토피아적인 세계 패권을 꿈꾸는 미국의 핵심 세력과 그런 미국을 일거에 붕괴시킬 수 있는 묵시록의 이미지를 전하는 음험한 반대편의 세력이 9월11일 정면충돌했다. 그러나 9·11 테러는 첫 번째 충격파에 불과했다. 미국의 네오콘(neocons·신보수주의자)은 9·11 테러를 자신의 유토피아적 세계관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로 활용했고, 반면 그 적대 세력은 미국에 더욱더 적대적으로 바뀌었다. ‘테러와의 전쟁’은 향후 50년 이상 지속될 미국 대외 정책의 핵심 기조가 될 것이 분명했지만, 네오콘은 그 상대로 이라크와 북한과 같은 ‘불량 국가’를 지목하고 있었다.
럼스펠드, 새로운 한반도 작전계획 내밀어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진행되고, 이제 그 다음 차례가 북한이 될지, 아니면 이라크가 될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던 2002년 여름. 이남신 합참의장의 방에 리언 러포트 한미연합사 사령관이 찾아왔다. 그는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지시를 받아 구상한 미국의 새로운 작전계획을 설명하겠다”며 “미국의 현대화된 항공력으로 북한의 장사정포 포탄이 서울에 단 한 발도 떨어지지 않도록 하면서 북한의 핵시설을 정밀하게 폭격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이게 그 유명한 ‘작전계획 5026’이라는 이른바 북한 핵시설에 대한 선제공격 계획이었다. 기존의 전면전 계획인 ‘작전계획 5027’과 달리 북한을 정밀 타격하는 또 하나의 ‘비상계획(contingency plan)’이다. 더불어 북한 급변사태 발생 시 한·미 연합군이 조속히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작전계획 5029에 대한 설명도 이어졌다. 그 자리에 배석했던 합참의장 비서실장 한성주 준장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항공력에 의한 북한 선제공격과 화력 제압 계획을 듣는 순간 공군 출신인 한 준장은 “천재적인 발상”이라고 느꼈다고 회고한다.
러포트 사령관은 이처럼 새로운 전략 개념이 그해 예정된 제34차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SCM)에서 양국 국방장관에 의해 합의되기를 강력히 희망한다는 뜻을 전달했다. 새로운 전쟁 개념이 계획되기 이전까지 한미연합사령부는 한반도 전쟁 계획인 작전계획 5027-98에 의한 한반도 전략의 기본 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럼스펠드 장관은 5단계(북한의 침공-방어-격퇴-반격-수복)로 작전 단계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5027이 현대 전장의 역동성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역설했다. 현대 전쟁은 5단계가 순차적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나타날 수도 있고, 아니면 어떤 단계를 건너뛰어 더 높은 수준으로 도약할 수도 있다. 예컨대 북한군의 침공을 격퇴하면서 동시에 반격도 이루어질 수 있고, 아예 침공을 격퇴하는 단계 없이 곧바로 북한 지역에서 안정화 작전을 수행할 수도 있다.
럼스펠드의 지시를 받은 러포트 사령관은 북한 핵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노력이 실패해 서울이 적의 공격 위협에 처했을 때 한·미 연합군은 북한의 핵, 화생무기를 사전에 무력화하고 선제공격을 통해 북한의 지휘·통신 체계를 신속하게 파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반도에서 ‘악의 축’이자 ‘불량 국가’인 북한을 향한 럼스펠드의 전쟁 의지는 분명한 실체를 갖고 있었고, 이것이 새로운 작전계획으로 예고되었다. 한국군 장교들은 전율했다. 안보를 책임지는 전문 직업인으로서 한국군 장교단은 “이게 바로 전쟁이다”라는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 전쟁이란 단순히 나를 지키고 방어하는 소극적인 수준을 초월해 상대방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최종적 승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국제법이나 정전협정과 같은 외교적 장치들은 현상을 유지하는 장치에 불과한 것이고, 전쟁에서 불변하는 목표는 승리하는 것, 즉 현상을 힘으로 타파하면서 진보의 길로 나아가는 데 있다. 그런 인식이 럼스펠드가 형형색색으로 펼쳐놓는 새로운 작전계획을 혁신적이며 천재적인 그 무엇이라고 여기게 만들었다.
2002년 12월5일 이준 국방부장관과 도널드 럼스펠드 미국 국방장관이 미 국방부에서 열린 제34차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서해교전에서 우리 군의 총체적 부실 드러나
국방부가 미국의 새로운 전쟁 교리를 추종하는 동안 햇볕정책을 추진하는 김대중(DJ) 대통령의 청와대는 조지 부시 행정부를 거의 재앙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미국이 국무부가 아닌 국방부를 앞세워 대외 정책을 강압적으로 밀고 나가면서 한반도 비핵화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는 1994년의 제네바 합의가 거의 무력화되고 있었다. 2003년까지 북한에 경수로를 지어주고 북한의 핵을 동결시키기로 한 이 합의에 대해 부시 행정부는 ‘클린턴 행정부의 굴욕적인 실패작’이라고 폄하하면서 판을 깨려는 태도를 보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을 MD 체제에 편입시켜 미국의 단일 군사 패권에 종속시키려는 입장도 드러냈다. 이는 한국이 노태우 대통령 이래 추진해왔던 북방정책의 성과를 한꺼번에 잠식해버리는 커다란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미국의 군사주의에 경도되면 중국·러시아 등 주변국과의 관계가 악화됨은 물론이고, 남북 화해도 물 건너갈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정권 말기에 DJ는 국내 정치에서 극심한 지지율 하락과 레임덕을 겪고 있었다. 즉 이를 정면으로 돌파할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이 거의 소진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2002년 6월29일 서해에서 남북 함정 간에 교전이 발생했다. 이날 상황은 정상적인 국가 시스템이 작동하는지 자체가 의심스러울 만큼 기이한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한국과 터키의 월드컵 3, 4위전이 치러지던 그날 청와대 전 직원은 박지원 비서실장 주관으로 청와대 인근 삼계탕집인 토속촌에서 점심 회식을 했다. 이 회식 자리에서 서해교전 소식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직원은 한 명도 없었다. 이날 오전 10시 집무실에 있던 김동신 장관은 인터폰으로 서해교전 발생을 보고받고도 이상하게 국방회관으로 가서 장군 진급자 신고를 받고 같은 자리에서 오찬까지 참석했다. 여기에는 합참 상황실에 있어야 할 합참의장도 동석했다. 합참 작전본부 주요 관계자들은 첫 번째 교전 소식을 듣고 지휘통제실로 달려왔으나 “적함이 불타고 있다”는 정병칠 2함대사령관의 보고에 일방적으로 승리한 교전인 것으로 알고 박수를 쳤다. 그리고 이날 합참의 고위 장교 중 일부는 그동안 밀린 골프를 치러 갔다. 같은 시각에 서해에서는 사망 6명을 포함해 아군 24명이 사상당하는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있었다.
작전은 대실패였다. 북한 도발 징후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 안이한 자세, 첩보 수집 활동의 제한, 함정 선체와 승무원의 방호력 미비, 두절된 통신과 부정확한 지휘 보고, 접적 수역에서 합동 작전 체계와 전력 운용의 미비점 등 우리 군에 내포된 각종 문제점이 일거에 드러났다.
당시 합참 정보작전과장이던 해군 출신 심동보 대령은 사태가 발생한 직후인 7월 초, 이러한 문제점을 담은 합참의장 지휘서신을 작성해 이남신 의장에게 보고했다. 심 대령은 서신을 작성하면서 “이건 작전이 아니다”라는 생각까지 했다. 적의 기습에 제대로 응사도 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한 전투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담겨 있는 지휘서신을 보고 이 의장은 탄식 조로 “이대로 하라”고 했다. 서해에서의 교전에 김대중 정부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은 정권 말기에 치명적인 타격이 되었다. 그 여파로 김동신 장관이 경질되고 이준 장관이 새로 임명되었다.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잘못된 정책 때문에 의외로 간단히 붕괴될 수도 있다는 두 개의 끔찍한 경고가 있다. 하나는 국내에도 잘 알려진 아나톨 칼레츠키의 저서 <자본주의 4.0>이다. 이 책에는 세계 경제에 대해 가장 낙관적인 전망이 팽배하던 2006년 “미국에서 금융 위기가 일어날 확률은 3조분의 1”이라며 배제했던 위기가 실제로 일어난 과정이 소개된다. 이 당시 위험이 다가오는 줄 몰랐고, 위기 발생 이후에는 엉뚱한 정책으로 대처하려 한 미국의 재무장관 헨리 폴슨에 대해 칼레츠키는 “스탈린과 모택동을 합친 것보다도 더 위험한 인물”이라고 혹평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로버트 호메츠의 <자유의 대가>다. 이 책에도 미국의 국방장관 로널드 럼스펠드와 부장관 월포위츠 등 네오콘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에 대해 망상에 가까운 낙관론에 취해 있다가 몰락하게 된 핵심 이유들이 나와 있다. “이라크 전쟁은 역사상 최초로 전후 복구 비용이 수반되지 않는 가장 저렴한 전쟁”이라는 네오콘의 호언장담과 달리 이 전쟁은 끝을 알 수 없는 재앙 덩어리다. 이런 경고를 통해 초강대국 미국의 경제와 안보 시스템이 의외로 간단히 붕괴될 수 있는 가능성이 드러난다.
2010년 6월3일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참수리-357호정 안보전시관’ 개관식에서 참석자들이 제2연평해전 당시 북한 함정의 기습 공격으로 침몰한 고속정 ‘참수리-357호’ 모형을 둘러보고 있다. ⓒ 연합뉴스
미국의 한반도 전쟁 계획은 무려 5개
이러한 비극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럼스펠드는 2002년 12월5일 이준 장관을 워싱턴으로 불러들여 국방장관 회담을 했다. 현대적인 군으로의 변환에 대한 럼스펠드의 갈증은 미래 한·미 동맹의 새로운 밑그림을 그리는 데까지 나아갔다. 한·미 양국은 2년여 간의 전문가 논의를 거친 ‘미래 한·미 동맹 정책 구상에 대한 약정서(TOR)’도 체결했다. 이 보고서에는 훗날 주한미군의 대변환을 초래하게 될 핵심 기제인 ‘전략적 유연성’ 개념이 담겨 있다. 이는 한국군이 한반도 방위를 전담하고 주한미군은 이를 지원하는 역할로 변모하는 동시에 동북아 지역군으로서의 성격 변화, 즉 냉전형의 한반도 붙박이 군대가 아니라 ‘날아다니는 군대’를 지향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럼스펠드는 단순히 주한미군에 한해서만 동북아 분쟁 지역 어디라도 투입할 수 있는 신속대응군으로 변화하는 것을 고려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한·미 연합군’이 신속 대응 전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한반도 전쟁 계획으로 기존의 작전계획 5027 외에도 우발 계획인 5026과 5028, 북한 급변사태 대비 계획인 5029, 태평양사령부가 수립한 5030이 탄생했다. 전 세계에서 미국이 한 지역에서 5개의 전쟁계획을 갖고 있는 곳은 한반도가 유일하다.
한국과 동맹 변환에 대해 원만한 협의를 이끌어낸 럼스펠드 장관은 크게 만족했다. 한반도 방위라는 협소한 목표를 넘어 중국 견제, 불량 국가 소탕, 테러 세력과의 전쟁 등을 위한 각종 글로벌 전략 수행을 위한 ‘지역 동맹’으로의 전환이 바로 그 방향이다. 새로운 동맹 변화의 대원칙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이준 장관과 함께 마치고 나오는 럼스펠드 장관의 얼굴은 시종 밝았다. 바로 그 럼스펠드의 미소 속에 새로운 전쟁이 준비되는, 한반도 전략 변화의 숨은 그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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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軍들의 전쟁] #13. 육사 38기의 반란, 남재준 총장에게 ‘인사 문제’ 편지 보내
청와대·기무사에 알려져 파문…진급 경쟁으로 군 조직 만신창이
기사입력시간 [1277호] 2014.04.09 (수)
김종대│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군 인사에서 장군 진급자가 발표되는 매년 10월이 되면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까지 시끄러워진다는 말이 있다. “진급자가 누구냐”는 말로 무덤 속에서도 수군거린다는 이야기다. 한국군 장교들의 과도한 진급 경쟁은 승리한 자와 패배한 자를 명확하게 구분한다. 위관급 시절에는 ‘동기’이던 사이가, 영관급 시절에는 ‘경쟁자’가 되고, 장군이 되면 ‘적’이 된다. 우리 군은 진급에서 탈락한 장교에게 명예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진급 자체가 달콤하고 영광스러운 것이기보다는 진급에서 탈락했을 때 맛보는 패배감과 상실감이 더욱 두려운 것이다. 오랫동안 전쟁을 하지 않고 대군을 유지하는 한국군에는 그런 현상이 만연될 대로 만연되어 있다.
“장교 정년 연장으로 진급 적체 시작”
노무현 정권 첫해인 2003년 4월,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남재준 육군참모총장에게 이메일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존경하는 참모총장님께’로 시작되는 4쪽 분량의 이 편지에는 군 생활의 애환과 비애 그리고 군 인사 정책에 대한 고언이 구구절절 담긴 육사 38기의 입장이 적혀 있었다. 참모총장은 이 편지를 인사참모부장에게 건네주었다. 이어 편지는 청와대·국방부·기무사 등 관계 기관에 전파돼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같은 시기 육사 총동창회(회장 박세직) 회장단은 국방부와 육군을 방문해 “군 인사에서 진급 적체가 현 상태로 방치될 경우 군의 장래가 걱정스럽다”며 대책을 촉구하는 간담회를 가졌다. 군 인사 적체 현상이 심상치 않다는 분위기가 군 내외부로 확산되는 가운데 2003년 5월2일 각 군 본부를 순시한 조영길 국방부장관은 의미 있는 말을 한다.
2003년 10월17일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중장 진급 및 보직 신고를 받은 뒤 조영길 국방장관과 대화하며 군 수뇌부와 함께 행사장으로 향하고 있다. 두 사람 사이로 걸어오는 이가 남재준 육군참모총장. ⓒ 청와대사진기자단
“인사 제도가 합리적이지 못할 때는 젊은 나이에 (일할 사람은) 전역을 해야 하고, 지금처럼 33년을 근무하는 사람들이 16년 만에 중령·대령 진급까지 끝내놓고 대령으로만 15년을 근무하는 불합리한 계급 조직이 생겨날 수 있다. 본인들은 좋을지 모르지만 그 사람들이 바위덩어리처럼 눌러앉아 있으니까 인사의 흐름 자체, 즉 (하위 계급의) 상위 진출의 흐름 자체가 중단되어버리는 것이다. 물의 흐름이 중단되면 썩는 것과 같다.”
대령 이상의 상위 계급이 적체된 결과 대위·소령·중령 계급으로 그 효과가 연쇄적으로 파급되고 있었다. 당시 대위는 8년, 중령은 6년을 복무해야 상위 계급으로 진출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군이 점차 늙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대대장을 맡고 있는 중령이 나이가 많아 병사들과 함께 걷고 뛸 수 없다. 조 장관이 군 인사를 ‘고인 물’로 비판하며 “장관이 앞장서 인사 개혁을 이끌어나가겠다”고 하자 자리에 참석한 장성들은 긴장했다.
국방의 최고위층까지 나서 인사 개혁을 외친 배경에는 2003년에 대령 진급 심사를 앞둔 육사 38기 이하 기수의 위기의식과 더 이상 군 인사를 방치할 수 없다는 예비역들의 인식이 함께 작용했다. 상명하복이 철저한 군 조직에서 무엇이 “이대로는 안 된다”는 집단적인 목소리를 내게 했을까. 육사 38기부터 41기까지 4개 기수가 처한 특수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이들이 임관하던 박정희 정권 말기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1976년 3월 박정희 대통령이 사관학교 출신들을 소정의 시험을 거쳐 5급 공무원으로 특채하는 방안을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그해 8월31일 대통령 재가를 얻어 시행된 이 제도가 바로 ‘유신사무관’이다. 유신사무관은 1977년부터 1987년까지 총 11개 기수 784명을 국가 공무원으로 진출시켰다.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대위까지 복무하면 행정고시 합격자와 같은 공직 진출의 길을 열어준 파격적인 ‘특혜’였다. 이 내용이 육군사관학교 모집 요강에 정식으로 명기된 때가 육사 38기가 사관학교에 입학한 1978년이다. 당연히 육·해·공군 사관학교의 인기는 치솟았다.
그런데 정작 육사 38기 출신들에게 유신사무관으로 진출할 자격이 주어지는 1988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돌연 이 제도를 폐지한다. 때문에 유신사무관 제도를 알지도 못하고 사관학교를 지원했던 선배 기수들은 오히려 상당한 혜택을 입은 데 반해, 정작 사관학교 모집 요강을 믿고 군문을 지원했던 38기 이후는 공무원 진출의 꿈을 접어야 했다. 더 큰 문제는 유신사무관으로 진출시킬 목적으로 38기부터는 이전 37기보다 50명 정도 증가한 322명을 임관시켰다는 데 있었다.
국가로부터 사실상 ‘사기’를 당했다고 생각한 육사 38기 이후의 기수에서는 진급 경쟁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더 큰 재앙은 1989년의 군 인사법 개정이었다. 2003년 육군 인사참모부장을 역임한 윤일영 예비역 소장은 “1989년에 군 인사법이 개정돼 장교의 연령 정년을 연장한 결과 진급 적체가 시작되었다”고 설명한다. 1993년에도 인사법이 개정돼 두 번에 걸쳐 정년이 연장되었다. 개정 결과 1989년과 비교해 소령은 43세에서 45세로, 중령은 47세에서 53세로, 대령은 50세에서 56세로 대폭 연장된다. 윤 소장은 “이렇게 정년을 연장하다 보니 진급에서 누락되어도 남은 정년 기간을 다 채우고 나가려는 인원이 많아져서 불가피하게 후배 기수들에게 적체 요인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결국 38기 이하 기수는 ‘유신사무관 폐지’와 ‘정년 연장’이라는 두 개의 카운터펀치를 얻어맞은 셈이 됐다.
“딸 초등생 때도 중령, 대학 진학해도 중령”
군에서는 진급 시기를 놓쳐버린 장교를 ‘대·포·중’(대령을 포기한 중령), ‘장·포·대’(장군을 포기한 대령)라고 부른다. 군의 계급별 정원은 대통령령으로 엄격히 통제되기 때문에 선배 기수가 계급을 차지하고 있으면 당연히 후배들의 진급은 밀리게 된다. 고참 대령 한 사람만 퇴직시키면 그 밑으로 줄줄이 진급 공석이 5개나 생기는 셈이다. 그런데 ‘장·포·대’ 한 사람의 정년을 채우기 위해 후배들 진급이 연쇄적으로 늦어지다 보니 전체가 불만 계층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육사 28기는 대상자의 79.9%, 29기는 75.4%, 30기는 77.4%가 각각 대령으로 진급했다. 그러나 1968년 1·21 사태로 임관 인원이 80명 증가한 31기는 그 비율이 69.5%로 뚝 떨어지고, 그 이후 32기 67.4%, 33기 66.5%, 34기 63.6%, 35기 60.7%로 계속 하락했다. 그런데 38기에 이르면 대령 진급률은 56%로 확 떨어지고, 그 이후 기수는 50~60% 사이에서 진급 비율을 유지하는 것으로 육군은 인사를 관리하고 있다.
단순히 진급 가능성이 작아진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진급을 하더라도 언제 하느냐가 중요하다. 38기 출신의 한 장교는 “예전이면 중령 5년만 해도 대령으로 진급했는데 우리는 8년을 했다. 한 동기생의 딸이 초등학교 때 아빠가 중령이었는데 대학에 진학해서도 보니 아빠가 중령이더란다. 딸아이가 신상명세서의 아빠 직업란에 ‘중령’이라고 적어 넣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기가 차더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이렇게 최저 복무 기간이 연장된 결과, 38기 이후 기수들은 대령 진급에 총 22년, 준장 진급에는 26년이 소요된다. 최근 육사 42기의 경우에는 그 기간이 27년으로 더 늘어났다. 이런 추세라면 대략 48~50세에 장군 진급을 노려볼 수 있다는 것인데, 민간 기업에서는 부장도 마치고 퇴직을 준비할 나이다. 40대 초반에 총경이 되는 경찰에 비해서도 진급이 늦고 무관으로 나가는 고참 대령들의 나이도 다른 나라와 비교해볼 때 높은 편이어서 실무 협조를 하는 데서도 어색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참고로 육사 22기의 경우 41~42세, 27기부터 29기까지는 44~46세, 30기의 경우는 47~48세에 장군이 됐다. 군의 고령화 현상이 뚜렷해지면서 병영에서 생동감과 활력이 결핍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더 심각한 것은 중령 이하 계급에서의 지체 기간은 길었던 데 반해 대령 진급 이후의 최저 복무 기간은 4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연대장(대령)을 마치고 다음 진급 준비에 바쁘기 때문에 국방대학 교육 이수 등을 기피하게 되고 해외 무관으로도 나가지 않으려 한다. 게다가 2차 진급자는 대령 진급 후 연대장으로 부임하는 중에 곧바로 다음 진급 대상이 된다. 연대장 재임 기간도 계속 단축돼 예전에는 2년 이상 지휘관을 맡았으나 지금은 15개월이다. 이 기간도 못 채워 12개월 만에 연대장이 교체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바로 이 점이 우리 군의 전투 조직 중 중간 지휘계층이 왜 부실해지는가를 보여주는 핵심 이유다. 전문성이 가장 뛰어나야 할 지휘관 계층이 가장 부실한 복무 여건에 처해져 사실상 무너지고 있는 중이다. 42기부터는 ‘5년 차 전역’, 즉 군 복무 5년이 지나면 전역을 허용하는 제도를 운영했다. 그 결과 초급 장교 시절에 상당수를 전역시켜 진급 경쟁은 다소 완화될 것으로 예상되지만, 적체 현상이라는 군 구조의 본질 자체는 아직도 불변이다.
2008년 3월11일 육군사관학교 연병장에서 열린 육사 64기 졸업식 및 임관식. ⓒ 청와대사진기자단
진급 포기자 장교 한 명에 연 1억여원 소요
기수 간에 극심한 불평등이 나타나고 군 인사 기반이 흔들리게 된 일차적 원인은 군의 인사 정책에서 비롯된다. 우선 사관학교 정원이 일관성 있게 관리되지 못했다는 지적을 낳고 있다. 기수별 임관 인원을 보면 육사 28기 208명, 29기 247명, 30기 304명으로 3년 만에 100명 가까이 늘어났다. 그런데 특이한 기수가 바로 육사 31기다. 31기는 510명을 입학시켜 126명을 퇴교시키고 384명이 임관했는데, 이는 전임 기수보다 임관 인원이 26% 증가한 수치다. 당시에는 1·21 사태를 겪고 나서 ‘생도 배가 운동’이 진행되던 때였다. 생도 당시 가혹한 스파르타식 훈련과 극심한 경쟁을 견뎌냈다는 자부심과 에너지로 무장된 31기 출신들은 역동적인 집단문화를 표출시켜왔다. 1992년 말 31기 동기회장 선거에서는 동기회가 ‘하나회’와 ‘비하나회’로 양분돼 물리적 충돌까지 빚어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여파로 1993년 문민정부(김영삼 정권) 출범과 함께 31기 출신의 백승도 대령에 의한 ‘하나회 명단 살포’ 사건이 벌어진다. 노무현 정권 출범 직후 남재준 육참총장에 대한 진급 비리 수사가 실시된 데도 31기 출신 장군들의 육군 인사에 대한 반발이 도화선이 되었다.
육사 임관 인원은 31기에서 정점을 찍고 32기부터는 다시 급격히 감소해 그해 314명, 33기 305명, 34기 327명이 유지되다가 35기에서는 296명으로 대폭 줄어든다. 그 이후 37기까지 280명 수준으로 유지되던 임관 숫자는 ‘유신사무관 세대’인 38기에서 전 기수에 비해 50명 정도 증가한 322명이 임관한다. 이후에도 41기까지 이 숫자는 유지되었다.
군 인사 정책에 대한 불만 고조는 정치적 불안으로 연결된다. 1960년 박정희 장군의 ‘5·16 쿠데타’나 1980년 전두환 장군의 ‘12·12 쿠데타’가 일어난 배경에는 장교의 진급 적체로 인한 불만 고조라는 시대적 배경이 있었음을 간과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인사 문제에 따른 혼란과 불만으로 가득 찬 긴 터널이 이어지는 한국군의 자화상은 군의 정치와 사회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을 불러일으킨다. 군 내부의 진급 경쟁에서 탈락한 이후 사회에 진출한 장교들의 취업률이 20%대에 불과하다는 것도 장교라는 직업에 대한 자긍심 박탈의 이유가 된다. 미국이나 일본의 경우 중기복무자(10년 이하 근무자)가 전역하면 90% 이상 취업되는 것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예비역은 현역의 미래다. 사회적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직업군인에 대해서는 정년이 짧은 만큼 약간의 연금 혜택이 주어지는 걸 제외하곤 사회적 존경과 배려가 부족하다.
2009년 11월11일 한민구 육군참모총장이 대전무역전시관에서 열린 ‘2009 벤처 국방마트’에서 K-2 소총을 이용한 사이버 전투 시뮬레이션을 체험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민구 “이것이 과연 참모총장의 직무인가”
진급 포기자, 즉 진급 적기 경과자가 보직되는 부사단장 대령 한 명에게 소요되는 연간 비용이 얼마나 될까. 연 급여 8300만원, 퇴직금 1800여 만원, 판공비 30만원, 그리고 차량 등 부속 인력을 100만원으로 보았을 때 약 1억200여 만원이 소요된다. 이를 기준으로 육군 대령 한 계급의 적기 경과자를 위한 국방 예산만 아무리 적게 잡아도 610억원이다. 대령보다 적기 경과자 숫자가 훨씬 많은 중령 계급까지 포함할 경우 그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그런데 육군보다 사정이 나빠 진급 경과자 비율이 더 높은 해군이나, 비록 사정이 나은 공군의 경우까지 고려하면 전군의 중령·대령 진급 경과자 유지 비용으로 수천억 원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우리 군의 지방분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에게 이처럼 막대한 국방 예산이 소요되는 동안 하위계층은 그 불만을 속으로 삭여야 하는 것이 우리 군의 현주소다. 고위 장교가 남아돌아 군에 생겨나는 불필요한 조직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전군에 대령이 2700명인데, 이 중 전투 직위에서 일하는 대령은 불과 300여 명뿐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비전투 지원 조직에서 일한다.
필자가 계룡대를 방문하면서 겪게 되는 기이한 일이 많다. 3년 전 육군을 방문했을 때는 육군의 예술대 출신들을 모아 국전급 예술제를 개최하는 일에 육군 정책실이 완전히 몰입했다. 2년 전 해군을 방문했을 때는 제2 연평해전 관련 영화를 만든다고 난리가 났다. 영화 기금을 모금하느라 대령과 장군들이 1인당 300만원 상당의 바자회 물품을 거의 반강제로 내놓았다. 지난해 공군을 방문했을 때는 공군이 에어쇼 홍보에 거의 사활을 걸다시피 하는 모습이었다. 실제 전투와는 전혀 무관한 이런 일들에 참모총장은 거의 직을 걸다시피 한다. 반면 각 군 총장의 핵심 임무인 전투 발전은 뒷전으로 밀린다.
각 군 교리는 2년마다 참모총장이 결재하도록 돼 있다. 그런데 임기가 짧은 총장의 경우는 결재할 기회도 없지만, 아예 교리를 읽어보지도 않고 총장직에서 물러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육군참모총장이 육군 교리를 읽어보지 않는 경우가 실제 있다는 이야기다. 불과 6개월 남짓 총장직을 수행한 한민구 대장(육사 31기)은 필자에게 ‘이것이 과연 총장의 직무인가’라는 회의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게다가 교리를 만들어야 할 군 교육사령부는 더 이상 진급이 되지 않는 고령 장군들이 나가는 자리로 인식되고 있다. 전투 발전은 눈에 보이는 성과로 입증하기 어렵지만 영화를 만들고 예술제를 여는 것은 업적을 홍보하기에 좋은 프로그램이다. 여기에 총장의 의중이 실리니까 우리 군의 핵심 엘리트 장교들이 투입되고 있다. 그래서 만들어진 기형적 현상 중 하나가 각 군의 공보·홍보 조직 팽창이다. 중앙 부처의 경우 10여 명 남짓한 게 공보 조직인데 국방부와 각 군, 산하 기관이 거느린 공보 인력은 수백 명에 달한다. 오랫동안 전투를 하지 않은 대군이 무엇에 주로 관심을 갖는지를 보여주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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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軍들의 전쟁] #14. “참모는 대통령 뜻에 따르라” 노무현의 격노
참여정부 첫해 ‘동맹파’와 ‘자주파’ 정면충돌…김희상 국방보좌관, 노 대통령에 반기
기사입력시간 [1278호] 2014.04.16 (수)
김종대│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거침없는 말투와 직설적인 주장이 육중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리처드 롤리스 미국 국방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부차관보는 노무현 정권 당시 한국 정부에는 ‘목 안의 가시’였다.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핵심 측근인 그가 한국에서 “점령군 행세를 한다”는 비아냥거림을 들은 것이 한두 번 아니지만,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유창하게 한국어를 구사하면서 상대를 압박하는 협상 기술도 수준급이었다. 상대방을 튀기고 굽고 삶아 먹는 재주는 한국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과 논리력의 산물이었다. 그런 그의 고압적인 스타일은 ‘무법자(Law-less)’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그의 이름과 잘 어울렸다.
1970년대 CIA(미국 중앙정보국) 요원으로 한국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핵 개발 계획을 통째로 빼내 본국에 보고한 당사자로서, 왕년의 실력은 조금도 녹슬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 만큼 한국에 관한 한 막후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 한 명의 올드보이, 1970년대 국방장관을 지냈던 럼스펠드가 조지 부시 행정부의 국방장관으로 귀환했을 때 그와 함께 미국의 대한반도 안보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인물로 성장해 있었다. 당연히 한국의 유력 인사들은 롤리스를 만나기 위해 줄을 댔고 너도나도 정보를 갖다 바쳤다.
2003년 6월24일 노무현 대통령이 NSC 위기관리센터 개소식에 참석해 이종석 사무차장(맨 왼쪽) 등 참석자들과 환담하고 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롤리스 부차관보, 주한미군 감축 일방 통보
노무현 정권 첫해인 2003년 6월6일 오후, 서울 삼각지 국방부에서 있은 미래한미동맹 정책회의(FOTA)가 막 끝날 무렵이었다. 롤리스는 새로 출범한 노 대통령의 참여정부와 서울의 주한미군 기지 이전을 통한 미군 재개편, 주요 임무의 한국군으로의 전환 등 굵직한 동맹 조정 현안을 처리해야 했다. 이날 차영구 국방부 정책실장과 회의를 마친 롤리스 부차관보는 청와대로 향하는 승용차에 몸을 실었다. 위풍당당하게 대통령 비서실 서별관 3층에 있는 국방보좌관실에 그가 들어서자, 낡은 건물 바닥이 쿵쿵 울렸다. 작은 체구의 김희상 대통령 국방보좌관과 만났을 때 그 체격의 불균형은 한국과 미국의 국력 차이만큼이나 엄청났다.
이날 첫 번째 화제는 단연 전날 국방부에서 합의돼 발표한 ‘주한미군의 2단계 재배치 및 기지 통폐합’ 계획이었다. 한수(漢水) 이북의 동두천·의정부·포천 등지에 흩어져 있는 미군 기지를 남쪽의 평택·군산·대구의 거점 기지로 통합하는 동시에 용산의 주한미군 기지도 합친다는 구상이었다.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은 이 계획이 실행될 경우 한수 이북에 미군이 한 명도 없게 된다며, 전방에서 주한미군이 사라질 경우 한국 안보에 커다란 공백이 초래된다고 주장했다.
미국통으로 소문난 김희상 국방보좌관은 이런 저간의 논란들이 몹시 부담스러웠다. 그는 롤리스에게 평택으로 미군 기지를 옮기더라도 서울에 미군 사무소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000명 안팎의 지휘부와 연락소가 서울에 있어야 양국의 업무 협조가 원활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무언가 미국의 마음이 자꾸 한국으로부터 떠나는 것 같은 불안감이 밀려왔다. 바로 그때 롤리스의 메가톤급 발언이 나왔다.
“우리는 한국에서 1만2000명의 미군을 감축할 예정이다. 주한미군을 대폭 감축하겠다는 것은 미국 정부 내에서도 극비리에 검토된 사항이다. 적어도 고위층에서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부시 대통령, 럼스펠드 장관 그리고 나 세 명밖에 없다.” 김 보좌관이 롤리스의 말을 가로막았다. “당신들 그런 식으로 하면 동맹을 잃어버린다. 무슨 정책 검토를 그딴 식으로 하는가? 동맹국과는 아무런 협의도 없이. 이러면 미국이 한국 정부 뒤통수를 때린 것으로 알려질 것이고, 그러면 앞으로 한국에서 반미 감정이 더욱 커질 것 아닌가?”
롤리스의 말은 미군 감축에 대한 한국과의 ‘협의’가 아니라 ‘통보’였다. 그것도 한국 안보 전체를 뒤흔들어 놓을 결정을 일방적으로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 한 달 전인 5월14일 미국에서 있은 노무현-부시 한·미 정상회담은 북한에 대한 미국의 군사행동을 누그러뜨리면서 한국에서의 급속한 주한미군 재편을 저지하려는 한국의 외교 역량이 총동원된 행사였다. 그런데 불과 한 달여 만에 나온 이 ‘통보’는 한국 정부에 대한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기색을 느꼈는지 롤리스 부차관보가 에둘러 변명을 늘어놓았다. “우리도 주한미군이 급격히 감축될 경우 한국에서 반미 감정이 고조될 것을 우려한다. 내가 제일 걱정하는 것은 한국에서 미국을 성토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날 가능성이다. 장관급에서 이 문제를 협의하는 절차를 갖자. 6월 말에 조영길 국방부장관이 워싱턴으로 온다. 그때 주한미군 규모를 조정하는 문제를 장관들끼리 협의하는 자리를 만들면 어떨까?”
‘주한미군이 감축되면 반미 데모가 일어난다’는 롤리스 부차관보의 논리는 다분히 1970~80년대를 풍미한 전통적 지한파다운 발상이었다. 국내에서의 정치적 논란을 피해가면서 단시일 내에 미군 감축을 완결 짓겠다는 속셈인 것이다.
연일 쏟아진 부시 정권의 대북 강경책
“일단 이 사실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보안을 잘 지키세요.” 김희상 보좌관의 보고를 받은 노 대통령이 말했다. 김 보좌관은 롤리스를 만난 직후 주한미군 재편 동향에 관해 3쪽짜리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에는 미국이 최근 추진하고자 하는 군사 변혁과 전 세계 미군 병력 및 기지 조정 의도, 주한미군 감축에 대한 롤리스의 발언, 그리고 우리 정부의 대응 방향이 정리되어 있었다. 보고서를 받아 본 노 대통령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하필이면 자신의 집권 초기부터 미국이 연일 북한을 압박하면서 한편으로는 주한미군 존재 자체를 흔들어대는 것인가. 결국 주한미군 감축이라는 것도 전방의 위험한 지역에서 미군을 빼내고, 멀리 후방에서 첨단무기로 북한을 타격하겠다는 의도로 보였다. 2003년 새해 벽두부터 북한 핵시설에 대한 미국의 정밀 폭격을 암시하는 기사가 쏟아져 나오는가 하면, 미국의 강경파 고위 관리들은 북한의 정권 교체와 체제 변환을 경쟁적으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의 대북 압박은 김정일 체제를 흔드는 데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북한의 김정일 체제는 세계로부터 고립돼 긴장이 고조되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 오히려 미국의 압박이 김정일에게는 북한 내부를 결속시키는 통치 기반으로 역이용되었다. 미국의 대북 강경책으로 정작 충격과 공포를 겪은 당사자는 북한의 김정일 정권이라기보다 한국의 새로운 정부였다. 5월에 이종석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은 노 대통령에게 보고서를 제출했다. 만일 미국이 북한에 대해 공격을 감행할 경우 우리는 국가적 비상사태를 준비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보고서에는 비상사태 진전에 따른 한국 정부의 준비 절차와 위기 단계별 대응 방향이 수록되어 있었다. 안보에 대한 위협은 국민들보다 청와대가 훨씬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2003년 4월9일 롤리스 미 국방부 부차관보, 차영구 국방부 정책실장, 심윤조 외교부 북미국장 (왼쪽부터)이 국방부에서 미래한미동맹 정책구상 1차 회의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 시사저널 임준선
“전작권 환수와 자주군대 건설이 정책 핵심”
‘서지컬 스트라이크(surgical strike)’! 순식간에 한반도를 공포로 몰아넣는 이 단어는 한때는 낯설기만 하더니 이제는 잊을 만하면 불쑥 날아오는 세금고지서처럼 전율과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미국의 강경 네오콘(neo-con·신보수주의자)들은 연일 북한이 핵무장의 상한선(red line)을 넘기만 하면 영변의 핵시설에 대해 외과수술 같은 정밀 폭격을 할 수 있다는 뜻에서 이 단어를 유행시켰다. 그에 따라 한반도의 안전을 위협하는 당사자는 이제 북한이 아니라 미국의 부시 정부라는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국내의 젊은 층은 일방주의 행태를 보이는 미국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대통령 보고 직후 김 보좌관은 조영길 국방부장관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기로 했다. 마침 6월21일에는 NSC 조찬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때 장관에게 롤리스의 발언 내용을 알려주며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27일, 워싱턴에서 개최될 한·미 국방장관 회담에서 럼스펠드와 이 문제를 협의할 것을 당부하기로 했다. 노 대통령은 이제 미국도 한국으로부터 떠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한반도 운명은 우리가 스스로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연일 불안해지는 한반도 정세에서 우리의 운명을 미국의 선의에 믿고 맡기는 시대는 지났다고 여겼다. 이종석 차장에게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구상해온 ‘자주국방’에 대해 관련자들을 모아 토론 자리를 마련할 것을 지시했다. 이 지시의 이면에는 미국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한국에서 일방적 군사행동을 하려는 조짐을 견제하려면 한국은 스스로 자주국방을 구현할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 미국에 의존하지 않아도 한반도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오늘 이 자리는 대통령님을 모시고 참여정부의 자주국방에 대한 비전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한 토론회입니다.” 서주석 NSC 전략기획실장이 말했다. 2003년 6월 중순, 대통령 집무실에서는 노 대통령을 중앙에 두고 조영길 국방부장관, 라종일 안보보좌관, 김희상 국방보좌관, 이종석 NSC 사무차장이 서 실장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서 실장의 모두발언은 우리나라 국방의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촉구하는 획기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한국 대통령이 안보의 모든 것을 미국에 의존하는 것이 현재의 한·미 연합 방위 체제입니다. 한반도 유사시에 작전 지휘를 미군이 주도하는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인수위 시절부터 저희는 전시작전통제권을 미국으로부터 환수하고 자주적 억지력을 갖춘 자주군대로 가야 한다는 철학과 비전을 가다듬어왔습니다. 자주국방의 핵심 의제라 할 수 있는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와 강한 자주군대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 참여정부 국방 정책의 중심이라고 볼 때 그 시기와 방법 그리고 전략을 수립해서 체계적으로 정책을 추진해야 하고, 여기에 국방부를 비롯한 유관 기관의 협조가 요구되고 있기에 이에 대해 논의하고자 합니다.”
이 토론회가 열리기 한 달 전인 5월에 조영길 장관은 육·해·공군 참모총장들과 함께 노 대통령에게 ‘자주국방 비전’ 구상을 보고한 바 있다. 여기에서 조 장관은 향후 10년 이내에 한국 단독으로 대북 억지가 가능한 역량을 구비하는 수준으로 국방력을 발전시키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그리고 목표 달성을 위해 △미국에 의존하는 핵심 전력을 우선적으로 확보해 대북 억지력을 완비하고 △한국군 독자적인 작전 수행 체제를 구축하고 군 전력 구조를 개선하며 △현행 한·미 연합 지휘 체계를 발전시키겠다는 자주국방 추진 방향을 설정했다. 합참의장을 지냈던 조 장관의 군사력 발전에 대한 의지는 매우 야심 차고 획기적인 것이었다. 조 장관은 합참의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2003년 3월26일 김희상 국방보좌관이 청와대 춘추관에서 이라크전 파병에 따른 청와대 입장을 브리핑하고 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난장판 된 청와대 ‘자주국방 토론회’
“우리나라가 평시작전통제권을 환수받고 육·해·공군 합동군 제도를 시행한 지 13년째다. 이제는 작전 수행 기능을 더욱 보강해 합동군 작전 지휘와 역할에 빈틈이 없도록 새로운 체제를 준비하는 것이 군사력 발전의 핵심이다. 전장의 종심(縱心)들을 동시에 보면서 육·해·공군의 전력을 체계적으로 할당하고 적을 타격할 수 있는 작전 지휘가 가능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군은 아직 이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이제 합참의 지휘통제실부터 합동 작전 지휘·통제가 가능한 시스템으로 바꾸어야 한다.”
일견 군의 개혁을 촉구하는 조 장관의 언급은 그러나 다름 아닌 대규모 무기 도입 계획이기도 했다. 국방부는 전작권에 대한 논의를 회피하면서 대신 막연하게 ‘한·미 군사 지휘 체계 발전’이라는 모호한 용어로 정치적 논란을 피해가려 했다. 서주석 실장의 모두발언이 끝나자 조 장관이 전작권 문제에 대해 먼저 의견을 내놓았다. “서 실장은 한미연합사를 해체하고 전시작전권을 환수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지만, 이 주장에는 몇 가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연합사는 한반도 유사시에 한·미 양국 군의 지휘를 통일하기 위해 구성된 것입니다. 한국과 미국의 합작회사, 일종의 컨소시엄이라고 보면 됩니다. 상호 동등한 지분으로 참여하고 있는 연합사는 주권 침해 논란의 대상은 아니라고 봅니다.”
서 실장은 곧바로 반박했다. “그렇게 동등한 지분으로 참여하고 있다면 한·미가 번갈아가며 사령관을 하면 안 됩니까? 자꾸 이런 식으로 미군에 의존하려고 하면서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주장은 사실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전시에 사실상 미군에 흡수되는, 세계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지휘 체계가 바로 현 연합사 체제입니다. 평시에도 정보와 작전, 기획 같은 핵심 요직은 미군이 장악하고 있고 한국군 핵심 전력은 전시에 전부 미군의 작전 통제에 흡수되는 구조입니다. 이렇게 대미 의존 국방 체제에 한국군이 안주한 결과, 우리 스스로 한반도 정세를 주도할 수 있는 국가적 역량이 발전하지 못해 한국군 자체의 발전도 제약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장차 한반도에서 평화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도 군사 주권을 확립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김희상 국방보좌관이 끼어들었다. “지금 우리가 전작권을 거론한다면 이것은 미군보고 나가라는 소리와 같습니다. 지휘권이 없는 미군이 무엇 하러 머나먼 이국 땅에 와 있겠습니까? 한국이 작전권을 환수하면 한미연합사는 단지 기획사령부로 전락할 것이고, 역할이 없는 미군은 본국으로 빠져나갑니다. 왜 우리가 먼저 그런 빌미를 주어야 합니까?”
참모들 간의 자주국방 토론회는 점점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었다. 노 대통령이 사태를 정리했다. “우리가 언젠가 전작권을 가져와야 한다는 것은 맞습니다. 그것은 대통령 선거 전부터 내가 가져왔던 생각이고요. 다만 그 시점이 언제냐, 어떤 조건에서 하는 것이 적절하냐가 문제가 됩니다. 정 전작권 문제를 풀기가 어렵다면 대체적인 원칙만 잡아놓고, 예컨대 전작권은 환수되어야 한다는 방향만 잡아놓고 환수 시기는 2010년이 될지, 2020년이 될지 적절한 시점을 검토한다는 것으로 오늘 토론을 정리합시다.”
그런데 김희상 보좌관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실익이 뭡니까? 한미연합사가 어차피 없어질 부대라고 한다면 식물사령부가 됩니다. 언제 환수할지도 모르는 전작권 문제를 미리 거론해서 연합사가 없어질 부대라는 인상을 주게 되면 미국은 즉각 주한미군 감축을 검토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논의 자체가 부적절하며….”
갑자기 노 대통령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럼 아예 말조차 꺼내지 말란 이야기요? 참모는 대통령 뜻에 따라 대안을 만들어야지 거론조차 하지 말라는 이야기 아니오?” 노 대통령이 김 보좌관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김 보좌관도 이왕 대든 터에 물러날 기색이 없었다.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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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軍들의 전쟁] #15. 자주파와 동맹파 암투 청와대 하루도 바람 잘 날 없어
주한미군 감축 문제로 격돌…노무현 대통령, 부시와 통화 직후 이라크 파병 결단
기사입력시간 [1279호] 2014.04.23 (수)
김종대│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전시작전권(전작권)을 한국군에 전환하면 주한미군은 한국을 떠날 것인가. 조영길 국방부장관과 김희상 대통령실 국방보좌관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전한 메시지는 “떠난다”였다. 그러니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전작권에 대해 논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일종의 경고 메시지였다. 2003년 6월 중순에 열린 청와대의 자주국방 토론회에서 김 보좌관이 노 대통령의 심기를 거스르면서까지 표출한 강경한 주장이었다. 그 강경함에 노 대통령도 놀랐고, 당사자인 김 보좌관조차 대통령에 대한 자신의 불경함으로 인해 자책감에 시달렸다.
청와대 토론회가 있고 나서 김 보좌관은 경복고 선배인 문희상 대통령 비서실장을 찾아가 “일전에 대통령에게 너무 대들었다”며 사의를 표명했다. 문 실장으로부터 김 보좌관의 사의를 전해들은 노 대통령은 미소를 지으며 “나는 개의치 않으니 국방보좌관도 걱정 말고 계속 근무하라”고 말했다. 갈등은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다.
2003년 5월26일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 관저에서 부시 미국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하고 있다. ⓒ EPA 연합
그런데 이런 김 보좌관의 주장은 공교롭게도 미국의 일방적인 주한미군 감축 ‘통보’로 인해 허물어졌다. 우리의 전작권 논의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미국이 범세계적인 자체 군사 계획에 의해 주한미군 감축에 먼저 시동을 건 것이다. 그렇다면 주한미군에만 의존하지 말고 우리 스스로의 방위 역량과 의지를 강화하자는 취지의 자주국방에는 왜 문제가 있는 것인가.
1977년 미국의 카터 행정부가 한국에서 미군 7사단을 철수시키겠다고 통보해오자 박정희 대통령은 즉시 이를 받아들이면서 자주국방 추진 계획으로 나아갔다. 작전권도 가져오겠다고 했다. 동맹이란 기한이 없는 사실혼이 아니라 언제든 국가 이익에 따라 변경될 수 있는 계약혼과 같은 것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안보의 본질은 국가의 신성불가침한 주권으로 회귀하는 것이고, 적어도 안보 분야에서 이것만큼 더 분명한 것은 없다. 김희상 보좌관을 견제하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의 이종석 차장과 서주석 실장의 입장이 바로 그러했다.
7월 초에 다시 청와대에서 자주국방 토론회가 열렸다. 두 번째 토론회에서는 동맹파인 김 보좌관이 더는 반대하지 못하는 가운데 NSC 사무처가 주도하는 자주파가 우세를 점했다. 이 회의 결과 국방부와 NSC 합동으로 작성된 자주국방 추진 계획에는 2010년까지 전작권을 한국군에 전환하는 것으로 목표 시점이 설정되었다. 훗날 조영길 장관은 “전작권 전환에 반대했다”고 주장했지만, 목표 시점 자체는 그가 정한 것이었다. 물론 국방 예산을 대폭 증액한다는 전제가 있었지만, 그도 더는 자주국방 계획에 반대하지 않았다. 이제 동맹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한반도 정세를 주도하면서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주권의 기반을 확립해야만 했다. 그 기반 위에서만 우리가 안보의 당사자로서 외세 의존적인 타성을 벗어나 남북관계를 발전시키고, 평화공존의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다는 시대 인식이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본질적인 의문이 있다. 지구상의 어떤 나라가 자주국방이 우선인가, 아니면 동맹이 우선인가라는 아주 이상한 논쟁으로 몸살을 앓느냐 하는 것이다. 만일 안보가 직사각형이라고 한다면 그 면적을 구하는 데 가로축이 더 중요한지, 아니면 세로축이 더 중요한지를 따지는 것과 같았다. 어찌 보면 군사작전의 주도권 문제로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안보의 핵심적인 문제로 자주와 동맹의 딜레마에서 장기간 빠져나오지 못하는 나라는 아마도 대한민국밖에 없을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건 자주적으로 국가를 방위하고 부족한 부분은 동맹으로 보완한다. 그렇다면 한·미 동맹의 어떤 속성, 어떤 구조가 안보라는 당연한 건축물에서 지붕이 중요한지, 서까래가 중요한지와 같은 괴상한 논쟁을 촉발시키는 것일까.
“미군이 떠날지도 모른다” 불안감 상존
그것은 한·미 동맹 자체에 내장된 아주 독특한 구조와 속성 때문이다. 1953년의 한미상호방위조약에는 한반도 분쟁에 대한 미국의 자동 개입 조항이 없다.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경우 위기가 발생하면 미국이 개입하는 절차와 군사 지원의 경로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반면 한미상호방위조약은 “각자 헌법 절차에 따라” 안보 지원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미국은 전쟁 선포가 대통령 권한이 아니라 의회 권한이다. 만약 미국 의회가 한반도 위기에 개입하기를 거부한다면 미국이 한국에 안보 지원을 한다는 것도 보장받기 어려울 수 있다. 그만큼 헌법 절차라는 게 불안하고 막연했다. 그럴 경우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한미연합사령부와 주한미군의 존재다. 1978년 한미연합사 창설과 동시에 한·미 국방장관이 서명해 연합사령관에 하달한 ‘전략지시 1호’는 미군 4성 장군인 연합사령관에게 한반도 방위의 임무를 맡긴다고 명기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연합사령관이 본국에 증원군을 요청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연합사령관과 주한미군의 존재가 바로 미국의 자동 개입을 보장하는 ‘인계철선(wire trap)’이라는 게 그동안의 통념이었다.
그런데 전략지시 1호는 국가 간의 공식 조약이나 협정도 아니고, 단지 행정규칙 정도의 위상을 갖는 지침에 불과하다. 게다가 한·미가 동등하게 참여하는 연합사가 있다고 하지만, 연합사령관은 미 합참과 태평양사령부의 군사 지침을 따르는 반면 우리 합참으로부터는 어떤 지침도 받지 않는다. 연합사령관은 미국 의회 청문회에 출석해 정책과 예산을 보고하지만, 방위비 분담금을 지원받으면서도 정작 한국의 국회에는 아무런 보고를 할 의무가 없다. 이렇게 동등하지 못한 연합사인 탓에 만일 미국과 한국의 국가 이익이 다를 경우 우리가 불리한 위치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늘 상존하게 마련이다.
바로 이 때문에 “미군이 떠날지도 모른다” “미국이 한국을 방기(放棄)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한국 군부에 자리 잡도록 했다. 심지어 미국은 유사시 한반도에 얼마만큼의 증원군을 제공할 수 있는지 그 세부 내역이라 할 수 있는 ‘시차별 부대 전개 목록(TPFDL)’조차 한국군에 공개하지 않는다. 막연히 전시에 69만명의 증원군, 5개의 항모 전단, 3000대의 전투기라는 ‘립서비스’ 외에 실제 증원 규모를 우리가 알기조차 어렵다. 그런데 이 69만명이라는 증원군 규모는 240만명의 병력을 보유했던 1980년대 레이건 대통령 시절의 이야기지, 140만명으로 감축된 지금에 와서는 아무런 현실성이 없다. 더구나 미국의 재정 상황이 악화된 지금은 더더욱 미국의 안보 지원 의지를 확신할 수 없다. 우리 군부의 의식 속에 자리 잡은 이런 불안감이 커지면 커질수록 비록 마음속으로는 미국에 불만이 있더라도 하염없이 미국에 협조하고 끌려다니는 행태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런 문화, 그런 정신, 그런 인맥이 광범위하게 동맹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는 게 정설이다. 그것이 노무현 대통령이나 청와대 자주파에게는 ‘굴욕적’이고 ‘종속적’인 한·미 동맹의 이미지로 다가온 것이다.
2003년 11월15일 열린 ‘이라크 파병반대 국민 총궐기대회’에서 참가자 들이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고 있다. ⓒ 연합뉴스
“클린턴 보면 기분 좋은데, 부시는 기분 나빠”
적어도 동맹을 말하는 사람들의 행태는 미국에 머리를 조아리고, 미군이 나갈까 봐 바짓가랑이 붙들고 늘어지는 그런 굴욕의 상징이었던 셈이다. 그러므로 노 대통령이 성역이나 다름없는 동맹을 거침없이 건드리는 건 골수 동맹파의 입장에서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런 기류로 인해 노무현 정권 전반기 동안 자주파와 동맹파 간의 사활을 건 싸움으로 청와대는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필자는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도 못하던 2002년 1월 노 대통령과 장시간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때 그는 무심코 “클린턴을 보면 기분이 좋은데, 부시를 보면 기분이 나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말에 필자도 무척 놀랐지만, 사실 그 당시 상황을 보면 그리 새로울 것도 없었다. 당시 전 세계 국가들이 대부분 미국에 등을 돌렸다. 거침없이 전쟁을 말하고 또 행하는 조지 부시 대통령의 등장은 한국에도 재앙이었고 전 세계적으로도 재앙이었다. 오늘날 세계적인 금융 위기와 안보의 불안은 거의 다 그 시절에 잉태된 미국의 독선과 독주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게 대다수 전문가의 분석이다.
게다가 ‘네오콘(neo-con·신보수주의자)’은 도무지 남의 의견을 경청하는 미덕을 아예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입만 열면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을 응징하고, 그 다음 차례는 북한의 김정일이라고 했다. 자고 일어나면 국내 일부 언론은 미국이 영변의 핵시설을 곧 폭격할 것처럼 보도했고, 이에 대한 한국 국민의 불안감은 아예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죽하면 2004년 초에 육군사관학교에 가입교한 신입생 설문조사에서 “우리 안보를 누가 위협하느냐”는 질문에 미국이라는 응답자가 34%, 북한이라는 응답자는 33%로 나왔을까. 그런 미국의 패권주의, 혹은 일방주의에 대한 반감이 노무현 대통령을 탄생시켰다는 점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미국과 한국의 정치권력 사이에 낀 군부는 갈수록 입장이 난처해졌다. 조영길 장관은 2003년 6월 말 한·미 국방장관 회담을 위해 워싱턴으로 향했다. 럼스펠드 미국 국방장관은 조 장관과 주한미군 감축 및 주한미군 기지 통폐합 문제를 완결 지으려고 했다. 이에 대한 럼스펠드의 협의 요청이 이미 한국에 전달되어 조 장관이 워싱턴으로 온 것인데, 어찌 된 일인지 조 장관은 이에 대해 일절 언급을 회피했다. 기다리다 못해 럼스펠드가 주한미군 감축 문제를 꺼내며 의견을 묻자, 조 장관은 의견 제시는커녕 아예 논의 자체를 피했다. 이런 태도에 럼스펠드가 격분해 조 장관이 돌아간 즉시 롤리스 부차관보를 다시 한국에 보내 김희상 국방보좌관을 찾아가 항의하도록 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무언가 말이 안 통하는 한국 정부에 대해 럼스펠드의 근심은 깊어졌다. 이러면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 즉 이라크에 한국의 전투병 파병을 요청해도 한국 정부가 거부할 것만 같았다. 근 한 달 이상 미국 국방부에서는 ‘한국에 파병 요청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마침내 9월5일 한국을 방문한 롤리스 부차관보가 반기문 청와대 외교보좌관을 만나 정식으로 전투병 파병을 요청하게 된다. 아주 완곡하게, 공식적인 경로가 아니라 개인 접촉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회담의 공식 의제가 아닌 사적 대화라는 형식으로 아무런 문서도 없이 파병을 요청했다.
주한미군 감축과 이라크 파병이라는 두 개의 난제가 얽혀버리자 청와대의 고민도 깊어졌다. 노 대통령은 이 두 가지 문제를 국민에게 공개해 공론화하라고 지시했다. 굳이 미국이 한국에서 미군을 감축하겠다면 그 사실을 공개하고 우리도 자주국방 계획을 추진하자는 취지였다.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9월25일 서주석 NSC 전략기획실장, 차영구 국방부 정책실장, 외교부의 위성락 북미국장으로 구성된 대표단이 미국 국방부로 향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주한미군 감축을 공론화하지 않은 채 이 문제를 2004년으로 1년간 연기하자는 쪽으로 합의를 했다. 노 대통령의 공론화 의도가 관철되지 않았던 것이다. 역시 한·미 정치권력 사이에서 어려운 문제를 회피하려는 국방부의 속성이 조영길 장관에 이어 차영구 정책실장에게서도 재현되고 있었다. 아무리 대통령이 지시해도 국방부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 무렵 이라크 파병 문제에 대해서는 현지 상황을 조사하기 위한 정부 합동조사단의 조사 발표가 있었는데 이라크가 안전하다는 국방부 주장과 불안하다는 민간인 조사위원인 박건영 가톨릭대 교수의 의견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었다. 게다가 용산 기지 이전 협상도 한·미 간에 결렬되고 주한미군 감축도 마무리 짓지 못한 채 이라크 파병 문제까지 얹어지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다시 윤영관 외교부장관을 미국에 보내 콜린 파월 미국 국무장관과 북핵 문제와 이라크 파병 문제를 논의하고 오도록 했다. 그런데 파월 앞에서 윤 장관이 ‘이라크 파병에 대해 국민여론을 설득할 수 있도록 미국 정부가 북핵 문제에 의미 있고 전향적 조치를 취해달라’는 내용의 영어로 번역된 본국의 훈령을 느닷없이 낭독했다. 이에 대해 파월은 “한국 정부가 파병 여부와 북핵 문제를 연계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며 “그렇게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현재의 길을 그대로 갈 것”이라고 차갑게 응답했다.
2003년 11월17일 제35차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에 참석한 미국 럼스펠드 장관과 조영길 국방부장관. ⓒ 사진공동취재단
롤리스 “이럴 것이면 파병하지 말라” 협박
미국은 잘못된 이라크 침공의 수렁에 빠져들고 있었고, 한국은 북핵 문제와 파병 논란에 빠져 서로 위기감을 갖게 되었다. 재차 청와대는 라종일 안보보좌관을 미국에 특사로 보내 부시 대통령을 직접 설득하기로 했다. 10월12일 라 보좌관이 가지고 간 노 대통령의 친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친애하는 조지 부시 대통령께. 지난 5월의 정상회담 때 대통령께서 저에게 ‘노무현 대통령은 내 친구다. 나는 내 친구가 나로 인해 정치적 곤경에 빠지는 걸 원치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최근 미국 정부가 주한미군을 감축하려 한다는 것이 저를 곤경에 빠뜨리고 있습니다(이하 생략).”
어떻게든 북한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바꾸고, 주한미군 감축을 유보하는 등 좋은 분위기에서 파병을 논의하자는 우리 측 입장에 대해 롤리스 부차관보는 “이럴 것이면 파병하지 말라”며 노골적으로 협박했다. 그리 밝지 않은 표정으로 라 보좌관이 막 귀국한 직후 국내에서는 파병 문제로 온 나라가 벌집을 쑤신 듯했다. 그때 친서를 받은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노 대통령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주한미군 감축은 한국과 충분히 협의해 신중히 검토할 것이니 너무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었다.
성숙한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은, 구체성이 결여된 한·미 동맹은 언제나 주한미군이라는 존재로부터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허약하고 서글픈 동맹이라는 사실이 또 한 번 확인되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한국은 결국 진보 성향의 정권에서도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붙들도록 했다. 그리고 10월17일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열려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다. 온 나라가 파병 찬성과 반대 여론으로 양분돼 서로 잡아먹을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이라크는 마치 한국군을 기다리는 죽음의 깊은 심연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그 먼 사막에 무슨 병력을 얼마나 보내야 할 것인가. 잠 못 드는 밤은 영원히 이어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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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軍들의 전쟁] #16. “우리 병사 한 명이라도 죽으면 감당 못할 사태 온다”
자이툰 부대 주둔지 놓고 국방부-NSC 충돌 김선일씨 피살에 ‘파병 반대’ 역풍
기사입력시간 [1280호] 2014.04.30 (수)
김종대│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운전대를 잡은 이지은 일병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외곽에서 팔루자 방향으로 뻗어 있는 고속도로 위에는 깊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어디선가 들개들이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동을 걸고 기어를 올리자 차는 심연 속으로 빨려들 듯이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침착해!” 뒷좌석의 최종일 준장이 말했다. 이 일병의 뒷모습이 불안해 보였던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겨우 권총 한 자루에 목숨을 맡기고 아무런 경호도 없이 고속도로를 달린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어디서 저항군이 나타날지 모르는 상태에서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상태로 35㎞를 가야 한다. 저항군에 나포된 교포 김선일씨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연락이 온 때는 2004년 6월22일, 이라크 현지시각으로 오후 5시20분쯤이었다. 어슴푸레 석양이 질 무렵 미군 순찰대가 고속도로 주변에서 동양인으로 추정되는 시신을 발견했다며 미군 이라크 사령부에서 서희부대와 제마부대에 연락을 해온 것이다. 현지 한국군 부대를 지휘하는 책임자이자, 8월에 이라크로 추가 파병될 한국군 자이툰 사단의 작전 부사단장으로 내정된 최종일 준장은 시급히 시신을 확인하고 인도받기 위해 운전병 한 명만 달랑 데리고 무작정 현지로 출발한 것이다.
2004년 10월8일 이라크 아르빌에 주둔 중인 자이툰 부대원들이 긴급상황 대비 출동 훈련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김희상 청와대 국방보좌관과 함께 청와대 국방보좌관실에 근무하던 최종일 장군은 미국의 워 칼리지 출신으로 미군과 협조를 도모하는 데 최적의 자원으로 선발돼 자이툰 사단의 선발대로 이라크에 와 있었다. 이라크 현지에서 미군과 함께 한국군의 새로운 파병 지역을 점검하고 물색하던 5월31일, 바그다드 팔루자 지역에서 가나무역의 김선일씨가 저항 세력에 피랍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가나무역 측은 정부에 자기 회사 직원이 납치된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사태가 심각해진 6월20일께야 회사 사장은 대사관에 이 사실을 알리며 도움을 청했다. 이 사건이 알려진 6월21일, 국내 여론은 발칵 뒤집어졌다. 이 인질 사건이 기폭제가 돼 국내에서는 연일 이라크 파병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미국 한 번도 공식 문건으로 파병 요청 안 해
노무현 정권 초기에 청와대 국방보좌관실에서 근무하던 최 장군은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에 한국이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똑똑히 지켜봤다. 예나 지금이나 미국은 단 한 번도 공식 문서나 또는 공식 회의 안건으로 한국에 파병을 요청한 적이 없었다. 한국 측 인사를 개별적으로 접촉해 비공식적으로, 구두로 파병을 요청했다. 그들은 절대 파병을 요청했다는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이 때문에 1960년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결정도 미국의 요청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박정희 정권이 자발적으로 결정한 것인지 아직도 논란이 일고 있다.
이라크 파병 요청 역시 2003년 9월에 롤리스 미국 국무부 부차관보가 반기문 청와대 외교보좌관을 만나 개별적으로 전달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미국의 파병 요청과 우리의 파병 결정은 어두운 구석에서 이루어지는 ‘속삭이는 외교’, 즉 ‘밀약’의 성격을 갖는다. 훗날 이명박 정권에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파병 요청 역시 그러했다.
이렇게 불분명하게 전달되는 파병 요청에 한국은 극심한 혼란을 겪는다. 우선 구두로 전달된 파병 요청을 공식적인 요청으로 볼 수 있느냐의 문제다. 조선 시대 때 후금 정벌을 위해 파병하라는 명나라 황제의 요구도 광해군에게 구두로 전달되었다. 광해군은 “황제의 칙서가 아닌 구두로 전달된 요청이 황제의 진의인지 확신할 수 없다”며 시간을 끄는 구실로 활용했다. 이것이 명 황제를 거역하는 것이라고 인식한 신하들의 반발로 광해군은 극심한 레임덕을 겪다가 제거되는 정변을 맞았다. 구두로 전달된 파병 요구는 그 내용부터가 불분명했다. 미국은 “사단급 전투병을 파병해달라”고 했지만 미군의 사단은 7000명 정도이고 한국군은 1만5000명이 넘는다. 사단급이라고 해도 그 병력 규모가 천차만별이다. 그렇다면 아예 “이라크 어느 한 지역을 장악하는 데 이 정도의 전투력이 필요하니 한국이 이를 담당해달라”고 분명하게 요구 사항을 적시해야 하는데 미국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너무 구체적인 요구를 했다가는 한국으로부터 거절당할 수 있는 위험이 크기 때문이었다. 초강대국으로서 전략적 위신을 중시하는 미국은 모호하게 파병 요청을 하면서 나머지는 한국이 스스로 결정하도록 뒤로 물러선다. 그러면 국내에서는 극심한 파병 찬반 논쟁으로 국론이 분열된다.
NSC 상임위에서 아르빌로 파병지 결정
파병에 따른 국내 정치의 부담을 덜기 위해 노무현 대통령은 부시의 강경한 대북 정책을 완화시키려 했다. 2004년 4월 방콕에서의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의 대북 군사행동을 견제하려는 노 대통령의 발언이 나오자 부시 대통령이 “내가 몇 번이나 북한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왜 또 그 문제를 거론하는가”라며 화를 냈다. 이에 노 대통령이 “이라크에 파병을 빨리 해주겠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하자 부시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파병이 밀약의 성격을 갖고 있다면 미국은 한국에 그 대가로 무엇을 줄 것인가. 당시 김희상 국방보좌관은 ‘석유’라고 확신했다. 유전 지대인 키르쿠크를 한국군 파병지로 권유한 것이 바로 그 이유라는 것이다. 그러나 키르쿠크는 치안이 불안하다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석유 따위는 아예 관심조차 없는 것처럼 미국의 대북 정책 전환을 대가로 챙기려 했다. 이후 파병지로 이라크 남부 바스라 지역을 고수하는 국방부와 이라크 북부 아르빌을 주장하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이에 첨예한 논쟁이 벌어졌다. 국방부는 남부 바스라 지역이 다소 치안이 불안하긴 하지만 병참 보급선이 짧아 부대를 전개하고 숙영지로 운용하기에 유리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북부 아르빌은 병참 보급선이 길고 인근 터키와 인접해 쿠르드족과 외교 문제가 발생할 경우 난처한 입장에 처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국방부 의견에 이종석 NSC 사무차장은 “왜 북부 아르빌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느냐”고 국방부를 거세게 몰아붙이면서 “우리 병사가 한 명이라도 죽으면 감당할 수 없는 사태가 온다”고 주장했다. 결국 “치안 상태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이 차장의 주장이 관철돼 남부 바스라 지역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됐다.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지가 북부 아르빌로 결정된 것은 김선일씨가 피랍되었던 6월18일 NSC 상임위에서였다. 물론 당시 정부가 김씨 피랍 사실을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음은 분명하지만, 한국의 파병 지역 선정이 임박한 상황에서 이라크 테러 세력들이 한국의 파병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이에 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돌연 6월21일 오전 4시, 이라크 알 자지라 방송이 한국인 김씨 피랍 사실을 공개하며, 알 자르카위 소속 그룹의 납치범이 “24시간 내 한국군이 이라크 내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살해하겠다”고 협박하는 내용을 방송으로 내보냈다. 오전 4시40분 주카타르 한국 대사가 외교부 본부에 한국인 1명 피랍 사실을 보고하고 외교부는 주이라크 대사에게 연락해 대책을 협의하기 시작했다.
한편 오전 6시30분 최영진 외교부 차관 주재로 긴급대책반이 꾸려지면서 정부 대책이 본격 가동되기 시작했다. 오전 8시에는 NSC 회의가 열렸고 외교부에는 국외테러대책본부가 구성됐다. 오전 9시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가 열리는 등 비상체제가 가동되는 가운데 돌연 오전 10시에 최영진 차관이 “김선일씨 피랍에도 불구하고 한국군 파병 원칙은 변함없다”고 천명했다.
2004년 6월26일 김해공항에 도착한 고 김선일씨 시신을 실은 운구차량이 경찰특공대의 호위를 받으며 공항을 출발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피랍된 김씨의 살해 직전 모습. ⓒ 사진공동취재단
외교부 강경 태도에 노무현 대통령 노여움
당시 외교부가 무엇이 그리 급해 납치범들을 자극하는 말을 했는지 확실치 않으나, 외교부는 이후 아프가니스탄 인질 사태가 발생했을 당시에도 사태 해결보다는 “테러범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국제적 규범에 더 경도되는 행태를 종종 보였다. 훗날 아프가니스탄 인질 사태가 발생했을 때 보여준 외교부의 이런 행태는 노 대통령의 노여움을 크게 샀다. 이날 오후 3시30분에는 청와대에서 NSC와 청와대 국정상황실 관계 기관 대책회의가 열렸다. 정재룡 본부대사 등 긴급 협상대표단 6명이 현지로 급파되었다. 22일 오전 현지에 도착한 협상대표단은 알 자르카위 측과 협상을 시도하는 한편, 반기문 외교부장관은 알 자지라 방송 등을 통해 이라크 파병 한국군의 역할이 전투 지원이 아닌 평화 재건 지원이라는 점을 집중 홍보했다. 노 대통령이 “김선일씨 구출 노력에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한 가운데 이날 오후 6시쯤 아랍 위성TV 알 아라비야가 TV 화면 아래 자막으로 “한국인 억류 납치범 요구 시한 연장”이라고 보도해 사태 해결 가능성이 보이는가 싶었다. 그러나 오후 10시20분, 미군으로부터 결국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복면을 한 납치범 다섯 명이 서 있고 그 앞에 김선일씨가 울먹이고 있는 가운데 그중 한 명이 성명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당신들에게 경고를 했지만 당신들은 이를 거부했다”며 납치 목적이 파병 철회였음을 재확인했다. “이것은 당신들이 스스로 초래한 일이다. 당신들의 군대는 이라크인들을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저주받을 미국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 성명서를 읽고 나서 그들은 울먹이는 김씨를 참수했다. 지옥의 묵시록에나 나올 법한 처참한 광경이었다. 다음 날 밤중에 시신 발견 현장으로 달려간 최종일 준장은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시신은 ‘신체 봉합 수술’을 받기 위해 인근 미군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야말로 그곳은 명백히 전쟁터였다.
김선일씨의 무사 귀환을 비는 촛불집회가 서울 광화문에서 연일 벌어지는 등 전 국민이 이를 기원하던 터에 날아온 이 비극적인 소식은 정부의 파병 방침에 거센 역풍으로 몰아칠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정부는 22일 새벽 2시 권진호 청와대 국가안보보좌관 주재로 긴급 NSC 상임위원회를 열고 이라크 파병 원칙을 재확인했다. 이날 회의에는 권 보좌관 외에 정세현 통일부장관, 반기문 외교부장관, 조영길 국방부장관, 고영구 국정원장, 한덕수 국무조정실장 등이 참석했다. 노 대통령은 김씨의 사망 소식을 보고받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노 대통령은 회고록 <성공과 좌절>에서 김씨의 사망이 “나의 탓인가”라며 큰 자책과 부담에 시달렸음을 고백하고 있다.
2004년 6월21일 저녁 이라크파병반대국민행동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광화문에서 이라크 파병 반대 및 피랍된 김선일씨 석방을 촉구하는 촛불시위를 벌이고 있다. ⓒ 시사저널 자료사진
이라크 현지, 한국군 친화력 돋보여
참여정부는 ‘범정부파병지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하고 본격적인 파병 채비에 들어갔다. 파병 부대는 현재 이라크에 주둔 중인 서희부대·제마부대를 포함해 3655명 선으로 사단사령부와 민사 2개 여단으로 편성되었다. 숙영 지역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사단본부와 1개 여단은 아르빌 공항에서 약 1.5㎞ 떨어진 라쉬킨 지역에 2×2㎞의 국유지를 무상 지원받는 것으로 했고, 나머지 한 개 여단은 스와라시 지역 1×1.5㎞의 사유지를 연간 1000달러에 임차하기로 했다. 한편 자이툰 부대 병력 및 물자 공수 임무, 환자 수송 등 항공 지원 업무를 맡게 될 공군 ‘항공수송단’을 C-130H 수송기 4대와 150여 명 규모로 편성해 자이툰 부대의 직할 부대로 운용하되, 쿠웨이트 ‘알리 알 살렘’ 공군기지에 주둔하도록 했다. 이러한 결정에 NSC 사무처는 부처의 다른 의견들을 제압하며 명실공히 파병 사령탑으로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이라크 평화 재건을 지원하기 위해 창설된 한국군 자이툰 부대는 출국한 지 50일 만인 2004년 9월22일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 자치지역인 아르빌에 도착했다. 자이툰 부대가 사용할 수백 대의 차량과 수천 톤의 장비·물자 및 병력이 1115㎞에 달하는 지상 구간을 종단했다. 이 엄청난 부대 이동은 한국군 창설 이래 최장거리 원정기동이었다.
자이툰 부대 황의돈 소장은 국방부 대변인으로 근무하던 김대중 정권 시절에 김동신 국방부장관이 집어던지는 재떨이를 가장 많이 얻어맞은 참모로 알려져 있다. 고약한 상관으로부터 마음을 강건하게 단련시킨 그는 국가를 대표하는 지휘관이었다. 선발대로 파견되어 와 있던 최종일 준장은 작전부사단장으로 그를 보좌하게 되었다. 군에서는 서로 파병군에 참여하려는 경쟁이 심해 육군 외에 해병대로 하여금 자이툰 부대의 외곽 경비를 담당하도록 했다. 아르빌의 벌판에 공항이 있고, 거기서 1km 남짓 떨어진 곳에 자이툰 부대 숙영지가 있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머나먼 이국땅이지만 높은 경쟁률을 뚫고 선발되었다는 자부심과 국민적인 격려와 지원을 등에 업은 부대원들의 사기는 매우 높았다.
이라크에서 미군은 주민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등 문화적 갈등을 겪었지만, 한국군 부대원들은 남다른 친화력을 보여주었다. 한국군은 미군과 같은 문화적 우월감을 보이지 않고 겸손했다. 미군은 한 손으로 껌을 던져주었지만, 우리는 두 손으로 건네주면서 주민의 손을 잡았다. 그런 미군은 이라크에서 갈수록 몰락했다. 아르빌은 문명과 문화가 만나는 국제 정치의 첨예한 현장이었다.
전 지구적 범위에서 미국의 네트워크가 작동하는 네오콘의 세계관, 패권으로 전 세계를 안정시키는 유토피아적인 미국의 구상이 있었다. 그러나 변두리에서 그 유토피아는 동시에 무너지고 있었고, 한국군은 독자적인 지휘권을 확보해 자신의 영역을 구축했다. 한국군은 이라크에 파병한 세계 3위의 국가로서 이라크에서 미군이 철수하기까지 아르빌을 수호하면서 나름 성공적으로 국가 이익을 수호했다. 한편으로는 북한의 핵문제,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이 벌인 세계 전쟁을 마주하면서 한반도의 운명은 또 한 번 요동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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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軍들의 전쟁] #17. 양주 두 상자 순식간에 바닥 미국 측, 돌고 도는 폭탄주에 녹다운
안광찬, 삼각지 고깃집에서 폭탄주 36잔으로 고압적인 롤리스 KO시켜
기사입력시간 [1281호] 2014.05.07 (수)
김종대│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청와대 국방보좌관 자리에서 김희상 육군 예비역 중장이 물러나고 해군 제독 출신의 윤광웅 전 비상기획위원장이 부임한 때는 2004년 1월말이었다. 한국이 미국의 이라크 파병 요구에 부응하면서도 대북 정책과 관련해서는 한·미 동맹의 수레바퀴가 계속 삐걱거렸다. 동아일보는 신년 벽두부터 미국의 한반도 정책 전문가들의 입을 빌려 직설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공격했다.
‘하나회’로 밀려난 안광찬, 윤광웅이 재발탁
“한반도를 둘러싼 위기는 두 개다. 하나는 북한 핵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바로 한·미 동맹의 현주소다.” “노무현 정부의 평화 번영 정책은 무책임한 평화지상주의다.” “노무현 대통령은 북한에 항복할 자세가 되어 있는 것으로 해석될 만한 발언을 했는데 한국 지도자로서 적절치 못하다.” “한국의 이종석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차장에 대해 ‘탈레반’이란 별칭이 미국 내에서 널리 사용됐을 만큼 그에 대한 인식은 악화되어 있다.”
안광찬 국방부 정책실장(오른쪽)과 리처드 롤리스 미국 국방부 동아태 담당 부차관보가 2004년 8월19일 국방부 청사에서 열린 제11차 미래한미동맹정책구상(FOTA)회의에 앞서 포토세션을 갖기 위해 대표들을 부르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이어 조선·중앙·국민·문화일보 등 평소 노무현 정권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보수 색채의 언론이 노 대통령 공격에 가세했다. 이들 언론은 “미국은 노무현을 싫어한다”는 메시지를 계속 강조했다. 이런 여론의 압력은 외교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위성락 북미국장이 주도하는 저녁 회식 자리에 20명 정도의 북미국 직원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이런 말들이 나왔다. “김정일 호감 세력이 노무현 대통령 지지층이라는 한나라당 홍사덕 총무의 최근 발언은 맞는 말 아니냐?” “영어도 못하는 청와대 자주파 애들은 싹 갈아 마셔야 한다.”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이기면 대통령이 무슨 힘이 있겠나? 대통령은 해양수산부와 과기부만 관리하면 된다.”
이들의 막말 파동은 2004년 1월 노 대통령에게 그대로 보고됐다. 그 여파로 윤영관 외교부장관이 경질되었다. 두 달 후인 3월12일 마침내 노 대통령이 국회로부터 탄핵을 당했다. 이날 외교부 북미국에서는 박수를 치고 만세를 부르는 직원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것 역시 노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이런 여론의 압력에 진보 정권이 마냥 의연할 수 없는 게 한국의 현실이라는 점에서 노무현 정권은 큰 짐을 지고 있었다. 무언가 한·미 동맹을 관리할 수 있는 새로운 인물이 필요했다. 2004년 4월 어느 날, 안광찬 육군 예비역 소장은 갑자기 윤광웅 청와대 국방보좌관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국방부 정책실장을 맡아달라는 부탁이었다. 안광찬은 “지금의 차영구 실장보다 (육사) 선배인 저는 적임자가 아니니 후배들 중에서 골라보시라”며 거절했다. 그런데 두 달 후인 6월에 또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는 안 하겠다는 말을 하지 말아달라”는 윤 보좌관의 당부였다.
안광찬 장군은 육사 25기 대표 화랑 출신으로 한미연합사에서 부참모장과 유엔사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를 역임했다. 하나회 출신으로 숙군 대상자였던 탓에 군에서 밀려나는 뼈저린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으나, 연합사 근무 시절에는 미군 속으로 가장 깊숙이 들어간 인물이었다. 한때 거침이 없었고 키가 장대같이 큰 그였지만, 한 번 좌절감을 맛보고 나서는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다. 민간인이 된 그가 시내를 돌아다니던 중 우연히 눈에 띈 ‘사무자동화 정보 시스템’이라는 간판이 걸린 한 학원에 들어가 ‘파워포인트’를 6개월간 이수하고 난 다음에는 프레젠테이션의 달인이 되었다. 예쁜 여자 학원 강사가 파워포인트 애니메이션 기능을 가르쳐주면 그는 집에 와서 밤늦게까지 복습하고는 형형색색으로 아름답게 보고서를 꾸몄다. 안 장군이 눈을 치켜뜨며 입술을 씰룩이면 ‘∽’ 모양이 되었는데, 이를 본 상대방의 반응은 둘 중 하나였다. 겁을 먹거나, 솔직해지거나. 평등하면서도 격의 없는 대화가 오가는 중에도 그는 어이가 없을 때는 눈을 치켜뜨고는 상대방을 노려보면서 논리적으로 자기주장을 개진했다. 그 적극적인 태도에 상대방은 대부분 긴장했다. 그의 그런 태도가 롤리스 미국 국무부 부차관보에게도 먹혀들었다.
용산 미군기지 항공 촬영 사진. ⓒ 청와대사진기자단
“시끄러워. 이 이상은 절대 안 돼, 알았어?”
2004년 7월 윤광웅 보좌관은 국방부장관으로 부임했다. 윤 장관은 한없이 고압적이고 냉혹한 롤리스 부차관보의 버릇을 고쳐줄 것을 안광찬 실장에게 주문했다. 1946년생 동갑내기인 안 실장과 롤리스 부차관보는 서로에게 복선을 깔지 않는 진솔한 태도로 말이 잘 통했다. 워낙 적극적인 성격인 안 실장의 접근에 이들은 만나자마자 친구가 되었다.
2004년 9월까지 모두 12차례에 걸쳐 미래 한미동맹정책구상회의(FOTA)가 열렸는데 주한미군 감축, 용산기지 이전을 포함한 주한미군 재배치, 군사 임무 전환 등 핵심 현안은 안 실장이 부임한 6월 이후에 본격적인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었다. FOTA 회의는 크게 보면 △주한미군의 성격 변화와 그에 따른 한국 내 미군의 재배치 △재래식 임무의 한국군 이전이라는 두 가지 방향성을 갖고 있었다. 이는 한·미 동맹의 현대적 변환을 도모하는 두 개의 축이었다. 새로운 미군 전략에 따라 롤리스 부차관보는 평택 기지에 미군이 장기적으로 주둔할 수 있는 규모와 시설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말하는 ‘장기적’이란 중요 거점 기지의 조건으로 그 어떤 천재지변에도 끄떡없을 만큼 완벽한 기준이 적용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미 양국은 용산기지 이전 협상과 관련해 그동안 걸림돌로 작용했던 대체 부지 면적과 전술지휘통제체계(C4I) 이전 방법 등에 대해 지리멸렬한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2004년 7월22일 워싱턴에서의 제10차 FOTA 회의. 롤리스는 지난 9차 FOTA 회의에서 전년도에 잠정 합의된 대체 부지 면적 312만평 외에 주택 부지 50만평, 유엔사 및 연합사 부지 28만평 등 총 390만평을 요구했다. 그러다 나중에 360만평의 절충안을 제시했으나 안 실장은 330만평을 고수해 협상이 결렬됐다. 롤리스는 우리 국방부를 강하게 압박하고 들어왔다.
“부지 규모가 줄면 주한미군의 추가 감축이 불가피하다. 이제 더 이상의 양보는 어렵다.”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안 실장이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롤리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잠깐 나하고 옆방에서 얘기 좀 나눕시다.” 롤리스를 회의장 옆 밀실로 데리고 들어간 안 실장은 롤리스에게 옆자리에 앉으라고 하면서 말했다. “아니 사람이 왜 그래? 부지 몇 십만 평 가지고 주한미군까지 들먹거리고 말이야. 에이 씨….”
안 실장은 메모지에 연필로 ‘349만평’이라고 쓰고는 롤리스에게 던졌다. “우리가 이라크에 파병까지 해주는데 고마워하는 법이 없어. 그렇지 않아도 국민 여론이 안 좋은데 미국이 자기들 잇속만 차려서야 되겠어?” “아니, 그게 아니라….” “시끄러워. 이 이상은 절대 안 돼, 알았어?” “알았어.”
미국은 한국에 주한미군용 숙소 1200채를 무상으로 지어줄 것을 요구했으나, 이날 합의문에는 330여 채만 한국이 지어주고 890여 채는 민간 업체가 평택기지 영내에 건립하는 주택을 미군 측이 임차하는 방식으로 하기로 의견 접근을 이루었다.
2005년 6월30일 국회의 해임건의안 표결이 예정된 윤광웅 국방부장관이 대전 국방과학연구소를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자체 개발 장비들을 둘러보고 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脫美’ 노무현 정권, 역설적으로 미국 더 배려
2004년 8월19일 서울에서의 제11차 FOTA 회의. 10차 회의에서 얘기하다 말았던 주한미군 감축 문제에 대해 안 실장이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미국 측은 지난번 회의에서 2005년 말까지 주한미군 1만2500명을 감축하고 다연장로켓(MLRS)과 아파치헬기 부대 등 핵심 전력도 조기에 빼기로 우리에게 통보한 바 있다. 이런 일방적 통보가 적절한가. 우리가 이라크에 3000명이나 파병하는데 미국도 같은 시기에 움직여버리면 우리 체면이 뭐가 되는가.” 그러자 롤리스가 반박했다. “무슨 소리? 최근 한국도 자체 전력 증강을 통해 MLRS를 50문이나 보유하고 있다. 이제는 미군보다 한국의 포병 전력이 더 앞서는 상황에서 뭐 이런 것까지 따지고 드는가. 한국이 스스로 자주국방을 한다고 하지 않았나.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이미 수립된 계획을 변경하기 어렵다.”
다시 안 실장의 반박이 이어졌다. “한국의 MLRS하고 미국의 MLRS는 서로 다르다. 우리 것은 정밀 전자통신 장비가 갖춰지지 않은 MLRS다. 따라서 북한의 장사정포가 포격을 개시하면 일단 얻어맞은 다음에 쓸 수 있는 무기다. 그런데 미국 것은 그런 문제가 해결돼 북한 장사정포 발사 징후만 포착되면 선제타격을 가할 수 있는 장비 아닌가. 우리가 이런 문제점을 개선하려면 시간이 1년 정도 필요하니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철수하라는 것인데 뭐 그리 인색하게 나오는가. 아파치 헬기는 북한의 기갑부대 남하를 저지하고 특수부대 침투를 차단하는 전력이다. 이것을 1개 대대나 빼간다고 하면 당장 대체 전력이 없는데, 너무 하는 것 아닌가.”
“MLRS 문제야 한국이 예산을 투입해서 보완하면 되고 아파치 헬기는 구형 기종을 철수시키고 잔여 전력은 신형 장비로 교체하는 것이다. 그러면 전력이 3배 증강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자연히 공백은 해소된다”는 롤리스의 주장에 안 실장은 “어렵게 파병을 하고 기지 이전까지 도와주는데 미국은 주한미군 감축으로 답했다. 뭐 이런 동맹이 다 있는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대화가 오가던 8월에는 한국군 자이툰 부대가 비밀리에 이라크 아르빌로 이동 중이었다. 롤리스는 이런 문제점들을 럼스펠드 미국 국방장관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럼스펠드는 곧바로 한국의 윤광웅 장관에게 전화를 했다. 한국이 어려운 결단을 내려 이라크에 파병해준 것에 감사하며, 한국 측 요구 사항을 고려해 미국의 주한미군 전력 감축을 재조정하겠다는 이야기였다.
2004년 10월, 한·미 양국은 주한미군의 감축 일정을 2005년에서 2008년으로 늦추기로 합의했다. 한국의 자주국방은 주한미군 감축 일정과 연계해 체계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요지부동이던 미국의 입장을 돌려세운 것은 이라크 파병과 미군기지 제공을 협상 카드로 시의적절하게 활용한 것이 주효했다. 또한 연합사에서 미국의 국가 전략과 정책을 연구한 안광찬 실장의 역할이 컸다는 점도 간과하기 어렵다. 이런 일련의 현상을 지켜본 윤 장관은 “안 실장이 일을 참 잘한다”며 더욱더 그에게 의존했다.
롤리스 부차관보는 안광찬 실장과 협의한 내용에 크게 만족했다. 일본·독일·괌과 같은 전 세계 주요 미군을 재편하는 데 한국에서와 같이 신속하게 군사 변혁의 중요 현안이 마무리된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미군 감축과 기지 재편을 원만하게 타결함으로써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담당하는 롤리스 부차관보의 펜타곤 내에서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고, 여기에다 덤으로 이라크 파병까지 얻어냈다. 역설적으로 ‘탈미(脫美)’를 주장한 좌파 진보 정권이라고 하지만 노무현 정권처럼 미국을 배려하고 만족시킨 정권도 드물었다.
폭탄주 36잔의 삼각지 돼지고깃집 혈투
이걸로 FOTA 회의는 종결되고, 한·미 관계는 2005년부터 미래안보정책구상(SPI) 회의로 업그레이드됐다. 2005년 2월3일의 제1차 SPI 회의에 이어 이튿날 저녁, 서울 용산 삼각지 돼지고깃집 ‘홍돈’. 제1차 SPI에 참석한 롤리스 부차관보를 비롯한 미국 측 일행 18명과 우리 측 안광찬 실장을 비롯한 국방부와 외교부 직원 17명 등 도합 35명이 모여들었다. 돼지껍질이 타는 냄새가 진동하는 소란한 식당에서 안 실장은 폭탄주를 돌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기겁을 하던 미국 측 일행도 차츰 끌려오기 시작하더니 돼지껍질을 집어먹고 폭탄주를 입에 털어넣기 시작했다. ‘너희들 오늘 다 죽었다.’ 안 실장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폭탄주를 돌렸다. 국방부에서 가져온 양주 두 상자가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계속해서 소주 35병과 맥주가 4상자 더 들어왔다. 롤리스가 손사래를 치면 안 실장은 눈을 부릅뜨고 잔을 디밀었다. “술 처먹어, 자식아!”
이날 안 실장이 먹은 폭탄주가 약 36잔. 나올 때는 부하 직원의 부축을 받아야 했다. 그 다음 날, 안 실장은 부하 직원에게 어제 술값이 얼마 나왔느냐고 물었다. 돼지껍질을 비롯한 고기 값과 술값을 합쳐서 68만원이었다. 흐뭇한 표정으로 안 실장이 부하 직원에게 말했다. “여보시오. 단돈 68만원에 미국 놈들 꼼짝 못하게 다루는 외교의 천재가 나 말고 또 있어?” “우리 국방부에는 실장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흐흐흐….”
안 실장은 미군이 반환하기로 되어 있는 군사기지의 환경오염에 대한 미군의 책임과 반환 후 치유 비용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부각될 수 있다는 점을 롤리스에게 경고했다. 롤리스는 안 실장의 고민을 이해하고 미국 국방부 예산에서 1억5000만 달러를 치유 비용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합의한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안 실장이 국방부를 떠난 2006년 1월 이후 국방부는 이 문제를 세심하게 관리하지 않았다. 미국과의 협상에 능한 실무자가 이뤄낸 성과를 후임자들이 지키지 못하고 다시금 공수표가 되게 만든 것이다. 한·미 동맹에서 ‘사람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한·미 관계에서 소통의 문제가 제기되는가 하면, 정치권력과 공직자가 분열의 조짐을 보이던 노 정권에서 안광찬이 점하는 독특한 위치는 바로 ‘퍼실리에이터(faciliator)’, 즉 ‘촉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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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軍들의 전쟁] #18. “장군 진급 심사 다시 하라” 민정수석실 압력에 육군 발칵 뒤집혀
청와대 인사 개입 남재준 총장 반발…해군 출신 윤광웅 장관 맹비난
기사입력시간 [1282호] 2014.05.14 (수)
김종대│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2005년 6월19일 새벽 2시30분. 경계근무로 지친 병사들이 단잠을 자던 경기도 연천군 28사단 81연대 비무장지대 GP 내무반에서 이 부대 소속 김 아무개 일병이 수류탄 한 발과 K-2 소총을 난사해 8명이 숨지고 2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런 사건이 벌어지면 으레 그랬던 것처럼 국방부는 사망자 시신을 한 곳에 안치하지 않고 수도통합병원 등 4곳에 분산해 안치했다. 윤광웅 국방부장관의 정책보좌관 정태용은 오랫동안 국회 국방위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다. 그는 항상 국방부의 이런 조치가 못마땅했다.
조문 갔다가 봉변당한 윤광웅 장관
현안 업무를 조정하는 국방부 현안점검회의에서 정 보좌관은 “왜 시신을 한 곳에 안치해 합동분향소를 차리지 않느냐”고 따졌다. 이에 인사복지 업무를 총괄하는 김승렬 차관보는 “군의 실정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이렇게 해야 말썽이 안 난다”고 답변했다. 이 말에 자극받은 정 보좌관이 “그게 말이 되느냐”며 “시신을 수도통합병원에 안치하고 합동분향소를 차려 유가족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기세에 밀려 양주 병원, 포천 일동병원, 고양 벽제병원 등에 분산 안치되어 있던 시신이 20일 새벽에 성남의 국군수도통합병원으로 옮겨지고 합동분향소가 차려졌다. 이 과정에서 시신이 안치된 장소를 잘못 알고 가는 바람에 몇 시간을 허비한 유가족과 친지들의 감정이 격앙되기도 했다.
2004년 12월15일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윤광웅 국방부장관(가운데), 남재준 육군참모총창(오른쪽)이 생각에 잠겨있다. ⓒ 연합뉴스
윤광웅 장관이 조문을 간 것은 이날 오전 11시였다. “분향소의 유가족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국방부 간부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조문을 간 윤 장관에게 유가족들이 거세게 항의하며 아수라장이 됐다. 분향소 입구에서 수십 명의 군인과 유가족, 언론사 취재진이 뒤엉켰다. 이날 일부 유가족이 윤 장관을 시신이 안치된 관 쪽으로 끌고 갔다. 우여곡절 끝에 분향소 밖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다른 유가족이 국방부장관의 승용차를 가로막고 거세게 항의했다. 윤 장관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뼈아픈 조문이었다. 이날 소동이 알려지자 국방부의 노련한 간부들은 저마다 “그럴 줄 알았다”며 조롱했다. 특히 김장수 육군참모총장이 있던 육군본부 간부들은 노골적으로 윤 장관을 비난했다. 장관이 조문을 가는 바람에 총장도 조문을 가지 않을 수 없게 된 상황을 불평하며 “육군 실정도 모르는 장관의 경솔한 행태”라고 수군거렸다. 1953년 국방부장관에 임명된 손원일 제독에 이어 해군 출신으로는 역대 두 번째로 국방의 최고위직에 임명된 윤 장관에 대해 육군 출신이 장악하고 있는 국방부 내부에서의 견제와 조롱이 심했다.
이런 문제를 처리하는 데 육군은 노하우가 있었다. 1996년 북한 잠수함이 강릉에 침투해 거기에 탄 공작원들을 소탕하는 작전에서 우리 장병 17명이 전사한 일이 있다. 작전이 종료되고 언론에는 이들에 대한 합동위령제가 있을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시신을 분산 안치해 개별적으로 장례를 치르게 하고 합동위령제는 아예 열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대통령이나 국방부장관은커녕 군 최고위직도 조문을 하지 않았다. 전사자임에도 쥐꼬리만 한 국가 보상금 외에 국가가 이들을 위해 해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봐도 국가는 항상 그렇게 했다. 일본군 전통을 답습해 군대에서의 사람은 사실상 소모품이었고, 인간적 유대에 기초한 인본주의 정신은 무너져 있었다.
윤 장관에게는 청와대 근무 시절부터 하나의 원칙이 있었다. 적어도 군에서 사망 사건이 발생하면 반드시 자신이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직접 조문을 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수모를 당하더라도 그 원칙을 지키겠다고 여러 번 말했던 그다.
2005년 6월24일 전방부대 총기 난사 사건의 피의자인 김 아무개 일병이 국회 국방위 진상조사단의 조사를 받은 후 헌병과 수사관의 호위 속에 차량에 탑승하고 있다. ⓒ 연합뉴스
“장관은 우리 편 아닌가” 군의 반발
그러나 이날 조문에서는 그도 인간인지라 마음이 상했다. 이후 어느 날. 그는 필자를 호출했다. 저녁 때 만난 윤 장관은 평소보다 과음을 했다. 그리고 필자에게 “장관직에서 물러나고 싶다”고 말했다. 국방부에서 현역 군인을 내보내고 민간인으로 주요 직위를 교체하겠다는 국방 문민화를 핵심으로 한 국방 개혁안, 미국으로부터의 전시작전권 전환 계획 등 노무현 대통령이 맡긴 굵직한 현안들도 버거웠지만, 윤 장관에게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이 소굴에서 벗어나고 싶은 바람이 강렬하게 솟구쳤다. 그가 장관으로 부임할 당시 첫 일성은 “국방부는 군을 대표하는 조직이 아니라 국민을 대리해 군을 통제하는 조직”이었다. 현대 민주사회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이 말은, 그러나 현역 군인들로부터 “그러면 장관은 우리 편이 아니란 말이냐”는 역풍으로 휘몰아쳤다. 이에 대해 윤 장관은 “과거에는 ‘국민이 군대화’되는 것을 요구받았다면, 이제는 ‘군대가 국민화’되는 것을 요구받고 있다”고 반박했다.
시대의 요구에 맞게 군대가 변하라는 윤 장관의 강한 철학은 당시 현역 장교들이 듣기에는 어색하고 거북할 수 있지만, 언젠가 우리 사회에서 국민과 군이 정상적인 관계를 정립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명확한 발전 단계를 제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우리나라 장교 집단이 갖고 있는 국가안보에 대한 전문성과 책임성, 외부의 간섭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집단정신과의 충돌이 불가피했다. 특히 육군의 병력 감축을 핵심으로 한 50만명으로의 감군 계획이나, 1군과 3군을 통합하는 부대 구조 개편 등은 육군의 기득권을 뿌리째 흔드는 것으로 비쳐지기에 충분했다.
2004년 8월11일 노무현 대통령이 전군 주요 지휘관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식사에 앞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민정수석실 인사 개입, 국정상황실에서 제동
윤광웅 장관과 육군의 감정적 갈등과 앙금은 이미 남재준 총장 시절에 깊게 형성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노무현 정권의 청와대가 단단히 한몫을 했다. 2004년 10월13일, 군 정기인사 발표를 코앞에 둔 시기.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한 행정관이 윤 장관을 찾아가 “금번 육군에서 추천한 장군 진급 대상자는 적어도 3분의 1이 부적격 자원이니 진급 심사를 다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의 중대성을 알아차린 윤 장관은 순간적으로 집무실이 도청되는 것이 아닌지 우려했다. 장관실 안쪽에 위치한 또 다른 밀실로 자리를 옮긴 후 윤 장관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묻자 행정관은 여전히 “대통령 지시”라며 민정수석이 서명한 대통령 지시라는 확인 문서를 제시했다.
때마침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전해철 비서관으로부터 윤 장관에게 전화가 왔다. ‘육군 추천 장군 진급자 중 영남과 호남의 비율을 비슷하게 맞추어야 한다’는 내용과 함께 ‘기무사가 추천한 장군 진급자 세 명도 부적격자이니 바꾸라’는 내용이었다. 윤 장관은 워낙 사안이 중차대하다고 생각했는지 유효일 국방부 차관과 김승렬 차관보를 따로 불렀다. 유 차관은 하나회 출신이지만, 2004년 초 노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치러진 총선 때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의 ‘노인 폄하 발언’이 불거지자 대한노인회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나름으로 기여한 바가 있었다. 김승렬 차관보는 인사 계통으로 잔뼈가 굵은 전문가이면서 하급자를 하대하는 일이 없어 국방부 안팎에서 신망을 얻고 있었다. 이들은 안광찬 국방부 정책실장과 함께 윤 장관이 믿고 의지하는 국방부의 핵심 참모들이었다.
윤 장관은 김 차관보에게 진급 심사를 다시 하라는 대통령의 지시 내용을 육군에 가서 전달하라고 말했다. 마침 서울에 와 있던 육군 인사참모부장인 윤일영 소장은 아예 자신이 물러나겠다고 사의를 표명했으나, 유 차관이 “이러면 사태가 커진다”며 사의를 만류했다. 다음 날 김 차관보가 육군으로 가서 “진급 심사를 다시 하라”는 장관 지침을 전달하자 육군은 발칵 뒤집혔다. 당장 남재준 총장이 윤 장관과 전화로 “군 인사법상 재심은 곤란하다”며 버티기로 들어가 국방부와 육군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이어졌다. 그와 동시에 육군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청와대 국정상황실은 사태 파악에 나섰다. 이내 민정수석실이 국방부에 진급자를 교체하라는 압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경악했다. 당시 국정상황실에 파견돼 있던 장혁 중령이 허겁지겁 윤 장관을 찾아갔다. 장 중령은 “대통령은 진급 심사를 다시 하라는 지시를 한 적이 없다”며 “민정수석실은 검증 기능만 있지 진급 심사를 좌우할 어떤 권한도 없다”는 점을 설명했다. 이어 장 중령은 김우식 대통령비서실장과 윤 장관을 전화로 연결해 “대통령은 그런 지시를 내린 적이 없다”는 점을 윤 장관이 직접 확인하도록 했다.
사태가 이상하게 꼬였다는 걸 뒤늦게 안 윤 장관은 육군에 가 있던 김승렬 차관보에게 전화를 걸어 “당장 서울로 올라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기무사 장군 진급자를 교체한 것 외에는 육군이 추천한 진급자 명단 그대로 윤 장관이 제청 서명을 했다. 군 인사법에 의하면 육군이 장군 진급자를 추천하더라도 국방부장관의 제청 서명이 있어야 대통령이 최종 재가를 하게 돼 있다. 즉 대통령의 임면권, 장관의 제청권, 총장의 추천권으로 삼분되어 있기 때문에 청와대와 국방부, 육군 사이에는 과연 누가 진급자를 결정하는 주도권을 행사하는지, 항상 갈등의 소지를 안게 되어 있는 셈이다. 2004년 10월14일의 이 인사 파동은 윤 장관과 육군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윤광웅에 대한 남재준의 원한과 오해
그러나 육군이 의도했던 장군 진급 인사안도 기어이 사달이 났다. 자기 사람이 아니면 절대 쓰지 않는 것으로 평가받는 외곬의 남재준 총장에 대한 불만이 군 내부로부터 폭발한 것이다. 그 주역은 소장 진급에서 탈락한 육사 31기 출신 3명에서 비롯됐다. 1993년 하나회 명단을 살포해 유명해진 백승도 준장을 비롯한 진급 탈락자 3명을 남 총장은 진급자 발표 직전에 계룡대 인근 식당으로 불러냈다. 남 총장은 이들을 위로하며 양해를 구했으나 그중 한 명이 총장 면전에서 “절대 승복할 수 없다”며 불경하게 답변했다. 당시 3명 중 한 명으로 이 자리에 동석해 있던 김형수 준장은 거침없이 저항하는 한 동기생의 태도에 무척 놀랐다고 회고했다.
김 준장 등 3명은 육사 31기 중에서 준장으로 1차 진급을 한 선두 그룹에 속했다. 그만큼 이들의 진급 누락은 큰 불만을 야기했다. 이들의 거센 반발에 놀란 남 총장이 인근에 있던 윤일영 인사참모부장을 식당으로 불렀다. 일체의 청탁을 배제한다는 윤 부장이 이들을 설득하는 데 끝내 실패했는지, 이튿날 총장실에 나타난 3명 가운데 2명은 기어이 남 총장에게 전역지원서를 제출했다. 이 사건에 대한 소식이 국방부 검찰단에 소속된 법무관들에게 알려지면서 남 총장에 대한 인사 비리 의혹 수사가 착수됐다. 수사가 이어지는 동안 전방 사단장으로 진출해 있던 육사 31기생들이 주축이 되어 ‘현 육군의 인사 파동에 총장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연판장을 돌리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육군 창설 이래 최악의 자중지란이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과 국정상황실, 국방부와 육군, 기무사, 국방부 검찰단이 뒤엉켜 마치 가면무도회처럼 주요 행위자의 정체성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어느 누구도 사태를 수습하지 못했다. 송영근 기무사령관은 인사 파동 여파로 임기를 6개월 남겨놓은 상황에서 전역했다. 남재준 총장의 원성은 주로 윤광웅 장관에게로 향했다. 심지어 남 총장은 “윤 장관이 청와대 386 공산주의자들을 배후 조종해 육군을 장악하려 한 것”이라는 뼛속 깊은 피해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피해의식은 윤 장관이 인사 파동 이후 노 대통령에게 남 총장의 경질을 극구 반대한 사실로 비춰볼 때 정당성을 갖기 어려웠다.
날로 자유주의가 확산되는 현대사회에서 국방부를 문민화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지평을 열겠다는 이상으로 가득 찬 윤광웅 장관은 지금도 국방부 일반직 공무원들 사이에서는 역대 가장 존경하는 장관으로 꼽힌다. 그러나 동시에 이제껏 유지되어온 군의 전통을 수호하고자 하는 육군으로부터는 강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육군의 집단의식은 이후 이명박 정부로 정권이 교체되면서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대한 적개심으로 분출되기도 했다. 2009년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이 연이어 서거하자 국방부 일원에서 고위직들 사이에 “이제는 더 이상 좌파의 괴수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는 대화 내용을 흔히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배타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개혁에 저항하는 걸 당연시하는 등 완고한 보수성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군사문화의 폐쇄성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도 잇따랐다. 정치 지도자와 군 지도자 간에 필요한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소통과 신뢰를 오히려 군 스스로가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군도 성찰해야 한다는 지적이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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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軍들의 전쟁] #19. “저놈들 다 끌어내라” 국정원 요원들 개처럼 끌려나가
합참, 연평도 해전 복수 위해 거짓 보고…노무현 대통령, 진상조사 지시
기사입력시간 [1283호] 2014.05.21 (수)
김종대│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2004년 어느 날 노무현 대통령은 ‘북한이 과연 도발하고 전쟁을 지속시킬 능력이 있는가’에 대해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에 자문을 구했다. 이에 NSC 서주석 실장은 국방연구원(KIDA) 황동준 원장(예비역 육군 대령)에게 연구를 의뢰했다. 이 연구는 ‘과연 우리가 북한의 위협을 얼마나 객관화할 수 있는가’에 대해 정부 차원에서 이뤄진 것으로는 최초이자 마지막 시도였다. 국방연구원은 미국에서 도입한 워게임 모델(M&S: Modeling&Simulation)을 활용해 남북한 군사력을 측정했는데, 육군은 북한 대비 열세, 해군과 공군은 대등하거나 우세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연구 과정에서 자기 군의 예산이 삭감될 것을 우려한 각 군이 NSC와 국방연구원에 각기 사람을 보내 “우리가 열세인 것으로 해달라”는 로비를 집요하게 해온 결과였다.
“국방부 요구대로 데이터 바꿔라”
이 연구를 둘러싸고 갈등이 고조된 때는 2004년 5월이었다. 아무래도 청와대의 ‘주문 생산’에 의한 연구이다 보니 국방부와 합참은 이 연구를 못마땅해했다. 논란이 많을 수밖에 없는 이 연구에 국방부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황 원장은 조영길 국방부장관과 김종환 합참의장이 참석한 토론회를 열었다. 합참의 영관급 장교들이 나서서 국방연구원 연구원들에게 “우리가 제시한 데이터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며 강하게 압박했다. 토론회에 참석한 서주석 실장은 토론의 방향이 국방연구원의 연구 결과를 공격하기 위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데 대해 경악했다. 황동준 원장은 갑자기 자신이 공격받는 것에 놀라서 다소 반항적인 어조로 조 장관에게 말했다. “그러면 우리 연구원이 잘못된 연구를 했단 말입니까?” 조 장관이 가소롭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쓸데없는 연구를 해서 공연히 시끄럽게 만드나? 국방연구원이 그런 곳인가?”
2007년 10월1일 노무현 대통령이 건군 제59주년 국군의 날 기념식에 참석해 열병 차량에 올라 각군 기수단 앞을 지나며 거수경례로 답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 대목에서 김종환 합참의장 역시 “전문가도 아닌 연구원들이 이런 연구를 해서 군의 사기를 꺾어놓는다”고 거들고 나섰다. 북한에 비해 군사력이 대폭 열세임을 평소 강조해왔던 국방부와 합참은 북한의 위협을 부풀리는 쪽으로 데이터를 수정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국방부에서 질타를 받고 국방연구원으로 돌아온 황 원장이 “우리 연구에 대해 군 수뇌부가 불쾌해한다”며 “국방부 요구대로 데이터를 바꾸라”고 연구원들에게 지시했다. 그 결과가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얼마 후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NSC와 국방연구원의 남북 군사력 평가 보고 내용이 국방부 압력에 의해 조작된 데이터에 근거했다고 믿고, 관련 연구원들을 불러들여 조사를 벌였다. 두 명의 연구원이 조사를 받았는데 그중 한 명으로부터 데이터를 바꾸라는 황 원장의 지시가 있었음을 시인하는 자술서를 받았다. 그해 6월 민정수석실은 NSC가 조작된 수치를 바탕으로 잘못된 보고서를 대통령에게 제출했다는 조사 결과를 노 대통령에게 올렸다. 황 원장은 대통령과 국방부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몹시 흔들리는 것 같았다.
7월에 열린 NSC 상임위원회와 그 후에 열린 안보관계장관회의. 이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안보 위협에 대한 객관성 있는 평가와 체계적인 접근 방식이 무엇인지를 참석자들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국방부장관을 비롯한 그 누구도 이 질문에 답변하지 않았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런 문제가 왜 중요한가’라는 참석자들의 무덤덤한 반응이었다. 노 대통령은 이에 대해 너무 이상하다는 느낌을 가졌으나 더는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정치 지도자와 군사 지도자는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같은 시기에 유사한 또 하나의 심각한 갈등이 전개되고 있었다.
2002년의 제2 연평해전 이후 2함대에 서해는 가히 전쟁터였다. 국방부와 해군으로선 NSC 사무처가 NLL에서 남북 간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북한과 협력을 모색하는 것 자체가 못마땅했다. 적어도 2함대는 2002년 패전을 갚아주고자 하는 복수 정서로 가득 차 있었다. 사건은 2004년 7월14일에 일어났다.
이날 오후 4시47분, 연평도 서방 15마일 해상에서 불법 조업 중인 중국 어선을 단속하던 북한 경비정이 NLL 남방 0.7마일까지 침범했다가 우리 해군 함정의 함포 경고사격을 받고 7분 만에 퇴각했다. 한 달여 전인 6월3일 개최된 남북 장성급 회담에서 서해 남북 함대 간 핫라인 개통을 합의하고 뒤이어 12일에 장성급 회담 1차 실무 접촉에서 서해에서의 남북 간 우발적 충돌 방지를 위한 국제상선공통망(공동주파수) 운영에 합의했으며, 14일에는 남북 해군 함정이 서해 NLL 부근에서 첫 무선 교신에 성공함으로써 15일부터 핫라인이 공식 개설되었다. 또한 6월29일에도 2차 실무 접촉이 이뤄져 군사분계선(MDL) 선전물을 단계적으로 철거하는 문제를 협의하는 등 남북 간에 군사 협력이 발 빠르게 진행되던 와중에 우리 함정이 북한에 포를 발사하는 ‘뜻밖의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당연히 남북 함정 간 교신이 없었느냐에 관심이 고조되었으나 합참은 “6월에 개통된 핫라인을 통해 네 차례 경고 방송을 했는데도 북측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며 “그 때문에 경고용 함포 두 발을 발사해 내쫓은 것”이라고 발표했다.
합참과 2함대의 조직적인 반발
이에 주요 언론은 북한이 NLL 수호 의지를 시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영해를 침범했을 가능성까지 추측하는 보도를 내보내며, 곧이어 개최될 3차 실무 접촉에서 우리 측이 북에 강력히 항의할 것이라는 합참의 입장을 내보냈다. 그런데 이튿날인 7월15일 북측이 “중국 어선이 넘어갔다는 내용으로 남측을 호출했는데 왜 응답하지 않았느냐”는 내용의 항의성 전화통지문을 보내면서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청와대 NSC 사무처의 정보관리실은 국가정보원을 통해 북측의 주장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군이 고의로 교신 사실을 은폐하고 허위 발표를 한 것을 확인했다. 이에 노 대통령이 허위보고를 한 경위에 대해 진상조사를 할 것을 지시했고, 국방부도 합참이 잘못 발표한 사실을 시인하며 대국민 사과를 하는 등 수모를 겪는 일이 일어났다. 그 여파로 함정의 발포를 승인한 합참까지 조사 선상에 올랐다. 당연히 합참과 2함대는 조사에 조직적으로 반발하기 시작했다. 합참은 해군의 경고사격이 있기 이전인 4시50분쯤 청와대 NSC 위기관리센터에 보고한 후 경고사격을 해군에 지시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즉, 청와대 승인을 받았으니 아무 문제가 없다는 설명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6월21일 충남 논산시 계룡대를 방문해 조영길 국방부장관과 김종환 합참의장 등 장성 100여 명을 대상으로 특강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국방부 복도에서 국정원-합참 물리적 충돌
합참의 발표가 언론에 보도되는 상황을 지켜본 청와대 위기관리센터는 경악했다. 분명 보고를 받은 시각은 이미 사격이 끝나고 북한 함정이 퇴각하던 오후 5시가 넘어서였다. 그러나 이를 규명할 방법이 없었다. 여러 차례 통화 가운데 어느 것이 합참의 상황보고인지 가려낼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논란이 지속되던 7월17일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합참에서 상황을 보고받는 위기관리센터의 한 중령은 3교대로 돌아가는 상황실 근무의 휴무여서 집에서 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조사할 것이 있다”는 기무사 요원의 연락을 받고 불려갔다. 기무사에 가보니 합참 지휘통제실 요원 장교 9명이 “4시50분에 위기관리센터에 보고한 후 경고사격을 해군에 지시했다”고 진술한 내용이 적힌 서류가 놓여 있었다. 기무사는 이 진술서를 근거로 위기관리센터의 중령을 “4시50분에 보고받고도 5시 이후에 보고받은 것처럼 사실을 호도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다그쳤다. 심지어 그 중령을 ‘시간도 기억 못하는 멍청한 놈’ 또는 정신병자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다음 날, 사무실에 출근한 위기관리센터장 류희인 공군 준장은 기무사의 전날 사건을 보고받고 격분했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사전 협의도 없이 기무사가 자신의 부하를 데려가 고강도로 조사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분명 군부의 심상치 않은 조짐은 청와대에 대한 조직적인 항명처럼 보였다. 합참의 거짓말을 밝혀낼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하던 류 센터장은 우연히 청와대 경호실의 통신 담당 요원과 같이 청와대 지하에 있는 목욕탕에서 몸을 담그고 있었다. 교신 내용을 어떻게 확인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 류 센터장에게 경호실 요원이 방법을 알려주었다. 위기관리센터의 교신일지와 합참 청사의 전화 단자판을 뜯어서 그 기록을 비교하는 방법 등이었다. 즉시 NSC에서는 이 문제를 국정원과 협의해 작전을 짰다.
국정원 요원 2명을 업체 기술요원으로 위장시켜 비밀 조사단을 편성한 후 합참에 투입했다. 합참과 위기관리센터를 연결하는 핫라인의 단자판을 열어 실제 교신 시각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막 단자판을 여는 순간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헌병들이 국정원 요원들을 강제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헌병을 지휘하는 한 간부가 “저놈들 다 끌어내라”고 소리쳤다. 진실을 규명하려는 측과 이를 덮으려는 측 간에 막말과 고성이 오가며 승강이가 벌어졌다. 국정원 요원들이 헌병에 의해 개처럼 끌려나갔다. 보고가 15분 전이냐, 후냐를 두고 청와대와 합참 간에 필사적인 진실게임이 물리적 충돌로 번지는 사태가 초래된 것이다. 이 소동 이후 합참의 보고는 5시 넘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 소동을 겪고 조사가 완료되어서야 2함대는 “제대로 보고하면 청와대가 쏘지 말라고 할 것 같아서 허위보고를 했다”고 실토했다. 이에 군에 대한 문책이 논의될 시점에 이번에는 국방부 정보본부장인 박승춘 중장(현 국가보훈처장)이 한 언론사의 국방부 출입기자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 사건이 일어나던 당시의 남북한 함정 간 교신 내용을 상세히 설명하며 군의 입장을 변호했다. 이것도 청와대로서는 명백한 항명이었다. 사건 조사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공식 브리핑이 아니라 특정 언론을 선택해 중요한 정보가 보도되도록 한 것은 노골적인 불만의 표출이었다.
정동조 합참 전력기획2차장(해군 준장)이 2002년 7월7일 국방부에서 서해교전 브리핑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정보본부장의 ‘거사’…청와대의 응징
당시 국방부 정보본부는 박 중장 부임 이전에 임기를 제대로 마친 본부장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혼란과 침체에 시달리고 있었다. 모처럼 제대로 된 본부장이 부임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에 일어난 박 본부장의 ‘거사’에는 즉각 청와대의 응징이 이어졌다. 길게 갈 것도 없이 7월에 박 본부장은 불명예 전역을 하는 수모를 겪는다. 이 시기에는 군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을 뿐이지 사실상 군의 정책과 정보라는 핵심 분야에서 사사건건 청와대와 충돌했다. 군이 보기에 청와대는 현행 작전에도 깊숙이 개입하는 등 부당한 간섭을 자행하는 권력이었고, 청와대가 보기에는 군이 입만 열면 서슴지 않고 국민과 대통령을 기망하는 거짓말쟁이였다.
결국 한반도에서 남북 관계의 발전이라는 것은 정치권력이 군의 협조를 받지 않으면 달성할 수 없는 목표였다. 그러나 군은 국가안보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내세워 정치권력에 대한 협력을 거부했다. 이런 정치와 군사에서의 갈등은 비단 우리 사회만의 독특한 현상도 아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터키에 주둔하는 미군 사령관이 공격을 받을 경우 대통령의 승인 없이도 소련에 핵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다는 ‘긴급방위계획(EDP: Emergency Defense Plan)’이 수립되어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위기가 지나가고 케네디 대통령과 맥나마라 국방장관이 전략공군사령부(SAC)의 토마스 파워 장군으로부터 소련과의 핵전쟁 계획에 대해 보고받았다. 어떠한 중간 단계도 없이 첫 번째 핵 공격으로 중국과 소련의 대도시 인구 1억명 이상이 살상되는 엄청난 규모의 핵 준비 태세였다. 이에 대통령이 계획의 무모함을 지적하자 파워 장군은 이렇게 대꾸했다. “대통령 각하, 만일 핵전쟁이 일어나서 소련에서 1명 살아남고 미국에서 2명이 살아남는다면 미국이 이기는 것입니다.”
이 말에 케네디는 좌절했다. 20만의 병력과 수천 개의 핵미사일을 보유한 전략공군사령부는 케네디가 보기에는 인류 전체를 멸망시킬 괴물이었다. 그들은 분명히 인류의 종말도 불사할 것 같은 냉전의 전사들이었다. 이듬해인 1963년 케네디는 유엔총회에서 역사적인 연설을 했다. “인류가 전쟁을 끝장내지 않으면 전쟁이 인류를 끝장낼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이 연설은 미국 대통령 역사상 핵무기의 권위에 대한 최초의 도전이었다. 그해 10월에 케네디는 소련과의 핵무기 감축 협상에 착수하겠다는 선언을 했고, 그 직후 암살당했다. 미국 군부에 케네디는 동지라기보다 적에 가까웠다.
분명히 군이라는 조직은 국민의 위임을 받은 안보의 ‘대리인(agent)’이라기보다 정치 지도자도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가공할 ‘권력(power)’이었다. 자신의 권위와 위계질서, 문화를 완강하게 고수하며 쉽게 말이 통하지 않는 곤란한 존재였다. 사람들은 진보 성향의 노무현 대통령 시절이기 때문에 청와대와 군 간에 이런 불화가 일어났을 것이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이후 보수 정권에서도 그 못지않은 갈등은 무수히 반복된다. 오히려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을 겪은 이명박 정부에서 군에 대한 불신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결국 한국이건 미국이건 정치와 군의 관계는 정치권력이 보수냐, 진보냐를 뛰어넘는 숙명적인 그 무엇으로 얽히고 충돌하는 관계였다. 당시 노무현은 서서히 케네디를 닮아가고 있었다. 아예 미국에 가서 “북한에 대한 미국의 강경책을 명확히 반대”하는 연설을 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한·미 간에도 매우 어려운 시기가 닥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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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軍들의 전쟁] #20. “최고 군사 지도자가 대통령에게 궁색한 편지나 써서야…”
노 대통령-이상희 합참의장, 국군의 날 행사장서 정면충돌… 이 의장 사과 편지에 윤광웅 장관 역정
기사입력시간 [1284호] 2014.05.28 (수)
김종대│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국군 기무사령부나 국가정보원이 청와대에 올리는 보고서에는 ‘동향’ ‘관찰’ ‘수집’과 같은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여기에 바로 정보기관의 속성이 담겨 있다. 무슨 동향을 관찰하고 수집한다는 말일까. 정보기관 사람들 하면 검은색 선글라스 이미지가 떠오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사람은 나를 보고 있지만, 나는 그가 나를 보고 있다는 걸 모른다. 선글라스는 눈동자의 방향, 즉 시선을 감춰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왠지 주눅이 든다. 그 시선으로 뭘 보고 있다면 대체로 군 장교단이 관찰의 대상이 될 터인데, 여기서 또 자주 등장하는 용어가 바로 ‘군심(軍心)’이다. 국어사전에도 없는 이 말은 군 장교단의 여론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대통령은 이 말을 지독히도 싫어했다. 국군통수권자가 바로 대통령 자신인데, 대통령의 국방정책에 대한 ‘군 장교단의 여론은 어떠하다’는 식의 보고서는 대통령에 대한 무언의 압력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대통령에게 할 말이 있으면 군사 지도자가 대통령에게 직접 하면 그만이지, 정보기관이 끼어들어 군심이라는 용어로 뭘 전달한다는 게 영 못마땅했던 것이다.
2006년 6월16일 노무현 대통령이 계룡대 대회의실에서 군 주요 지휘관 대상 특강을 위해 윤광웅 국방부장관(앞줄 맨 오른쪽)·이상희 합참의장(맨 왼쪽) 등과 입장하고 있다. ⓒ 청와대기자단
합참의장의 전작권 전환 시기상조론, 미 일축
이런 보고서가 2005년부터 무수히 노 대통령에게 전달됐다. 당시는 본격적으로 미국으로부터 전시작전권 전환을 도모하던 시기였다. 2006년이 되자 청와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전작권 전환의 당위성을 쏟아냈다. 이에 대해 일부 언론과 예비역 장성들은 한국 안보의 기축이 붕괴되는 것처럼 위기감을 조성하며 반대 의지를 확산시켜나갔다. 노 대통령은 그해 8월9일 연합뉴스와의 회견에서 일부 보수 언론에 대해 “안보 장사 시대에 성공한 일부 신문들이 국민의 눈과 귀를 오도하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한·미 간에) 자연스러운 협상 과정을 갈등이라고 계속 부풀리고 정치적 공격 자료로, 심지어 (내가 부시 대통령과) 전화한 지 몇 달 됐느냐고 한다. 유치하게 하지 말라”고 비꼬기도 했다. 이에 비위가 상한 예비역들은 군 서열 1위인 이상희 합참의장에게 불만을 터뜨렸다. 전작권 전환이 불가한 이유를 대통령에게 제대로 직언했느냐며 압박을 가한 것이다. 그러면 이 의장은 “전작권 전환에 협조하면 국방비가 많이 확보된다”며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했다.
2006년 3월21일 국방부에서 열린 한·미 미래안보정책구상회의에서 권안도 국방부 정책홍보부장 (가운데)과 롤리스 미국 국방부 부차관보 (왼쪽 두 번째) 및 양측 대표단이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화가 난 노 대통령에게 합참의장 사과 편지
8월15일 노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동북아시아의 패권주의를 반대하고 ‘평화공존의 새로운 질서’를 강조하면서, 자주국방에 대한 신념을 재차 밝혔다. 이날 전작권에 대한 대통령의 16번째 공식 발언이 나왔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는 나라의 주권을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국군통수권에 관한 헌법 정신에도 맞지 않는 비정상적인 상태를 바로잡는 일입니다. 또한 달라진 우리 군의 위상에 걸맞은 일입니다. 지난 20년 동안 준비하고 미국과 긴밀히 협의하면서 체계적으로 추진해온 일입니다. 확고한 한·미동맹의 토대 위에서 진행되고 있고, 미국도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군의 역량을 신뢰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시점이었다. 미국은 2009년까지 작전권을 한국군으로 전환하겠다고 했으나, 우리의 준비 정도를 고려할 때 너무 촉박했다. 이상희 합참의장은 “2009년 전작권 환수는 한국군 준비 상황으로 볼 때 시기상조”라는 주장을 담은 편지를 작성해 미국 국방부에 발송했다. 대통령의 8·15 경축사가 나오던 때와 거의 동시에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답장을 피네건 한국과장이 갖고 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이 자꾸 자체 준비 부족을 이유로 전작권 전환을 연기하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전작권이 전환되더라도 전쟁이 나면 한국 홀로 북한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미국이 한국의 취약한 전력을 보완하게 되면 얼마든지 대비가 가능하다. 그런데 마치 한국은 혼자 싸우는 것처럼 인식하고 단독 방어 준비가 안 되어 있으니 전작권 전환을 연기하자고 하는데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다. 예정대로 2009년까지 전작권 전환을 완료하고자 한다.”
미국은 전작권이 한국으로 전환되더라도 이미 예정된 주한미군 감축 외에 추가 감축은 없으며 한국에 대한 방위 공약은 준수되기 때문에 조기 이양하겠다고 압박해왔다. 9월14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은 ‘전작권을 한국에 전환하는 문제는 정치적 문제가 아닌 군사적 문제로 접근한다’는 합의를 보았다. 정치적 논란을 피해 조속히 전작권을 이양하겠다는 미국의 의도에 노 대통령이 동의한 것이다. 이 무렵 한국의 보수 세력이 전작권 전환에 반대하면서 보여주었던 가장 큰 맹점은 “한국이 자주국방을 주장하지만 않으면 미국은 전작권을 한국에 전환하지 않으려 할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을 드러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언제까지나 미국은 한국을 도와줄 것’이라는 기대와 환상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전작권이 거론되기 이전에 이미 주한미군 감축을 통보했고, 자체 필요에 따라 변화하는 중이었다. 이제는 혈맹이라는 미국도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냉정한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그럼에도 한국의 보수층이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잡는’ 모양새를 보이자 미국 국방부는 짜증을 냈다. 전작권 문제가 정치쟁점화하면서 이상희 합참의장은 더욱더 궁색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10월1일 국군의 날 행사가 열리는 계룡대. 대통령 내외, 윤광웅 국방부장관과 이상희 합참의장, 김장수 육군 참모총장, 남해일 해군 참모총장, 이한호 공군 참모총장이 기념식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다과를 먹고 있었다. 노 대통령이 다시 이상희 합참의장에게 질문했다. “군은 2012년까지 전작권을 가져올 수 있도록 준비할 수 있습니까?” 한 달 전쯤 청와대 회의에서 노 대통령으로부터 “2009년까지 전작권 전환을 준비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세 번 받고도 대답을 안 했던 이 의장이었다. 마지막엔 노 대통령이 역정까지 냈으나 끝까지 입장을 밝히지 않았던 이 의장은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열심히 하고는 있으나 어려움이 많습니다.”
이 대답에 이어 이상희 합참의장이 계속 “어렵다”고 주장하는데, 그 태도가 무엇이 준비가 안 되어 있고, 무엇이 부족하고 등을 죽 늘어놓는 식이었다. 이 의장은 이미 8월부터 전군 순회강연을 하면서 ‘2012년 전작권 전환의 당위성’을 전파했고, 합참에는 이를 전담하는 TF(태스크포스) 팀까지 구성한 상황이었다. 합참이 2009년이 어렵다고 해서 2012년에는 가능한 것으로 노 대통령이 양보한 것인데, 또 어렵다고 하는 합참의장의 말을 듣는 순간 노 대통령의 얼굴이 굳어지며 실망과 분노 같은 것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다. 대통령과 군 수뇌부 사이에 싸늘한 냉기가 흘렀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날 국군의 날 행사를 마치고 집무실로 들어온 윤 장관의 표정도 밝지 못했다. 안색을 살피던 정태용 정책보좌관이 장관에게 다가가 “장관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라고 묻자 윤 장관이 한숨을 쉬면서 “합참의장이 정치를 하고 있다”고 탄식을 했다. 아마도 윤 장관은 이 의장이 군 수뇌부가 모여 있는 자리에서 자신이 전작권 전환을 반대하는 걸 과시하는 정치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2006년 3월21일 국방부에서 열린 한·미 미래안보정책구상회의에서 권안도 국방부 정책홍보부장 (가운데)과 롤리스 미국 국방부 부차관보 (왼쪽 두 번째) 및 양측 대표단이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국군의 날에 ‘불경’을 저지른 이상희 합참의장은 좌불안석이었다. 그는 고심 끝에 합참의 한 장군을 청와대의 박선원 대외전략비서관에게 보냈다. 이 장군은 박 비서관을 만나 “합참의장이 고민하고 있다”며 “의장께서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고 조언을 구했다. 박 비서관이 “사의를 표명하든지, 대통령께 정중하게 사과 편지를 쓰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답변했다. 이 조언에 의해 작성된 사과 편지를 본 윤 장관은 적잖이 놀랐다. 최고의 군사 지도자가 이런 따위의 궁색한 편지나 써서 대통령에게 보낸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자신의 편지를 노 대통령에게 전해달라는 합참의장의 부탁을 거절하면서 윤 장관은 “합참의장은 대통령과 언제든 만나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대통령과 자리를 마련해줄 테니 직접 말하라”고 일축했다.
이라크 문제에 쏠린 럼스펠드의 파격적 양보
10월20일의 한·미 연례 안보협의회(SCM)를 엿새 앞둔 2006년 10월14일은 토요일이었다. 이날 청와대에서는 안보 관계 장관 간담회가 열렸다. SCM을 앞두고 미국과의 협상 전략을 마지막으로 점검하기 위한 자리였다. 간담회에서 노 대통령은 “미국이 우리의 2012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미국의 요구대로 2009년에 전작권을 가져오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런데 대책회의를 마치고 일어서는데 갑자기 이상희 의장이 노 대통령에게 “이것을 좀 읽어주십시오”라며 문제의 편지를 건넸다. 분명히 직접 말로 하라고 했는데 무슨 편지를 건네는 걸 보고 윤 장관은 크게 놀랐다.
2006년 10월19일, 백악관 바로 옆 건물 옥상에서 한·미 연례 안보협의회 참석차 미국을 방문한 윤광웅 국방부장관 일행을 환영하는 럼스펠드 국방장관 주최의 환영 리셉션이 열렸다. 럼스펠드는 약속된 시간보다 30분 늦게 나타났다. 럼스펠드는 프랑스 국방장관 미셀 알리오 마리와 얘기가 길어졌다고 해명했다. 기분이 좋아진 럼스펠드가 무심코 한마디를 던졌다. “미니스터리 윤, 전작권 전환? 그것 한 5, 6년이면 되는 것 아니오?” 윤 장관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당연하죠. 그래서 2012년에 전환하자는 것 아닙니까?”
한·미 실무진 간에 환수 시기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동안에도 럼스펠드는 거의 이 문제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이라크 상황으로 꽉 차 있었기 때문이다. 이 말이 나오자마자 옆에 서 있던 롤리스 부차관보의 표정이 못마땅한 듯이 일그러졌다. 이날 낮에 롤리스는 한국 측에 “전작권 전환은 2011년 10월15일로 하자”고 제안했다. 롤리스 입장에서는 럼스펠드 장관이 협상의 마지막 카드를 다 내보인 것 같아 불만스러웠을 것이다. ‘롤리스가 알아서 하겠지.’ 럼스펠드는 금방 이라크 문제로 마음을 돌려버렸다. 원래 술을 한 잔도 못하는 럼스펠드는 서둘러 행사를 마무리했다. 윤 장관은 이제껏 강경하던 미국의 태도가 한국에 협력적인 분위기로 누그러진 데 대해 적잖이 놀랐다. 리셉션을 끝내고 숙소인 리츠칼튼호텔로 돌아온 윤 장관은 그의 방에서 이상희 합참의장, 정태용 정책보좌관, 권안도 국방부 정책실장, 김규현 국제협력관, 합참 전략기획본부장인 송영무 해군 제독, 합참 작전부장인 안기석 해군 제독 등 핵심 참모들과 함께 다음 날 SCM 본회의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한편 다른 장소에서는 한·미 전략 실무자들이 다음 날로 예정된 SCM 본회의에서 전작권 전환 시기를 합의하기 위한 조인트 커뮤니티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김규현 국제협력관이 무언가 전갈을 받더니 숨 넘어가는 소리로 윤 장관에게 보고했다. “롤리스 차관보가 2011년 12월31일로 하자고 합니다.”
미국과 협상 결렬 예상하고 특별선언 준비
마침내 10월20일 제38차 SCM 본회의 당일이 되었다. 한국 일행은 펜타곤 앞에서 의장 환영 행사를 했다. 이어 30분간의 양국 장관 단독 회담. 그리고 곧바로 SCM 본회의가 열렸다. 럼스펠드 장관은 재차 전작권이 한국에 조기 이전되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며 한국의 취약한 전력은 미국이 지원해주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는 이를 ‘연계전력(bridging capability)’이라고 표현했다. 연계전력은 전시작전권이 전환된 이후에도 한국이 당분간 미국에 의존하게 되는 전력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에 윤 장관은 우리의 자주국방 계획과 주한미군의 점진적 감축 추세를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전작권 이양은 최소한 2012년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이날 회의에서 두 장관은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회의는 벌써 일곱 시간째. 럼스펠드 옆에 롤리스 부차관보가 앉아 있고 바로 그 맞은편에 권안도 정책실장이 앉아 있었다. 며칠 전부터 사전 실무 협의를 통해 미국을 계속 압박한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의외로 강경하던 미국 측의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져 있었다.
두 장관이 회의를 하는 동안 롤리스와 권안도 실장의 설전이 계속되었다. 밀고 밀리는 신경전이 계속되는 동안 계속 롤리스가 쪽지에 무엇인가 적어 권 실장에게 건네주었다. “2012년 1월1일.” 그러면 권 실장이 또 이를 반박했다. “설날에 무슨? 안 돼.” 또 쪽지가 날아왔다. “2012년 3월1일.” 그러면 권 실장이 “3·1절이야. 안 돼.” 롤리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3·1절이 뭐야? 왜 안 돼?” 그러자 권 실장, “한국이 자주독립한 날 아니야? 휴일이라 안 돼.” 쪽지는 거기서 멈추고 롤리스가 호통을 치듯이 말했다. “자주독립을 한 날이니까 전작권을 가져갈 수 있는 것 아니야?”
회담 중이던 두 장관도 흠칫 놀라 각자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실무자들끼리 얘기하도록 놔두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는지 두 장관은 일어나 펜타곤을 떠났다. 결국 이날 ‘2012년 3월15일’로 전작권 전환 일자가 합의되었다. 이날 밤 9시에 윤 장관은 노 대통령에게 전화를 했다. 한편 청와대는 SCM에서 합의가 결렬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노 대통령과 송민순 안보실장 등 관련자들이 대책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때가 한국 시간으로는 10월21일 오전 8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윤 장관은 노 대통령에게 “전작권 전환 시기는 한국의 입장대로 2012년 3월15일로 합의를 이루었다”고 보고했다. 노 대통령은 이를 재가했다. 훗날 윤 장관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날 윤 장관의 이러한 보고가 없었다면 노 대통령은 “2009년에 전작권을 환수하겠다”고 자신이 직접 발표할 작정이었다. 청와대의 대책회의는 바로 이 특별선언을 하기 위한 회의였던 셈이다.
이로써 1991년 10월 한·미 연례 안보협의회에서 전시와 평시 작전통제권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 이래 16년간의 긴 여정이 일단락되었다. 이 합의 이후 보수 정권은 대미 외교에서 어떻게든 이 합의를 수정해 전작권 전환 시기를 연기하는 데 사활을 걸었다. 그리고 정권이 바뀌자 한때 전작권 전환의 주역이었던 노무현 정부에서의 김장수 국방부장관, 이상희·김관진 합참의장 등은 일제히 전작권 전환 반대론자로 말을 바꿔 탔다. 그 천연덕스러운 입장 변화는 한때 그들의 협상 상대였던 미국 국방부마저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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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軍들의 전쟁] #21. 류우익 실장, “국방장관에겐 알리지 마라” 각 군 총장 은밀히 호출
이명박 정부 첫해 군 장악 나선 청와대…이상희 장관 격분
기사입력시간 [1285호] 2014.06.04 (수)
김종대│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한국 보수 세력에게는 ‘잃어버린 10년’이었던 진보 정권(김대중·노무현 정권)이 종언을 고하고 2007년 12월 대선에서 압도적인 지지율로 당선된 이명박 대통령에게 군은 조속히 장악해야 할 거대한 권력이었다.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2008년 3월 초 이 대통령은 류우익 대통령실장에게 “군 인사에 관심을 가지라”고 지시했다. 그해 4월로 예정된 군 정기 진급 인사를 앞두고 확실히 군을 장악하라는 지침이었다. 류 실장은 이 말이 지난 정부에서의 “노무현 군맥을 청산하고 우리 사람들로 교체하라”는 의미로 들렸다. 김병국 외교안보수석에게 이 대통령의 지침을 전달한 류 실장은 “군 인사를 청와대에서 확실히 챙겨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 수석은 국방부에 “4월 대장 진급 대상 후보자 명단을 제출하라”고 했다.
이 장관 “참모총장들 가만두지 않겠다” 격노
문제는 국방부였다. 이상희 국방부장관이 “대장 진급 인사는 국군통수권자와 국방부장관이 협의해 재가받는 사항이므로 외교안보수석에게 이를 보고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대통령의 군 인사를 보좌하는 것은 자신의 당연한 임무라고 생각한 김 수석 입장에서 국방부의 태도는 충격이었다. 김 수석은 이 사실을 류 실장에게 보고했다.
이상희 국방부장관, 김태영 합참의장, 류우익 대통령실장(왼쪽부터)이 2008년 3월27일 합참의장 보직 신고식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 연합뉴스
3월29일 토요일 오후. 류우익 실장이 육·해·공군 참모총장에게 각기 연락해 일요일에 대통령실장 공관으로 다른 시간에 각각 들어오라고 했다. 4월 군 정기인사를 앞둔 시점에 대통령실장이 각 군 총장과 인사 문제를 직접 협의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런데 여기에 단서가 붙었다. “국방부장관에게는 알리지 말라”는 것이다. 3월30일 일요일, 연락을 받은 각 군 총장들은 서울로 올라가는 도중에 직속상관인 장관에게 알리지 않은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임충빈 육군참모총장, 정옥근 해군참모총장, 김은기 공군참모총장이 모여서 서울로 향하는 고속철도에 몸을 실었다. 무언가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 벌어지는 데 대해 불안을 느낀 총장들이 숙의하다가 임 총장이 이상희 장관에게 전화로 서울에 올라간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문제가 폭발한 것은 다음 날인 월요일 아침 국방부 간부회의에서였다. 이상희 장관은 전날 총장들이 무단으로 근무지를 이탈해 서울로 올라온 사실에 격분해 격한 말을 쏟아냈다. “총장들 가만두지 않겠다”는 엄포와 함께 “보고 없이 근무지를 이탈한 것은 군인복무규율 위반이다. 앞으로 이와 같은 사례가 발생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벌하겠다”며 화난 감정을 표출했다. 우리나라 4성 장군 중 근무지 이탈 범위가 정해지지 않은 유일한 대장은 한미연합사 부사령관밖에 없다. 현역 대장이라면 반드시 사전에 근무지를 벗어나는 사실을 국방부에 보고하도록 돼 있다. 장관의 훈시문은 국방부 내부망을 통해 전군으로 전파되었다.
청와대의 인사 개입 행태에 이상희 장관이 격렬히 반발했다는 사실이 류우익 비서실장의 귀에 들어가면서 두 사람 사이에 감정의 앙금이 쌓이기 시작했다. 군 인사를 둘러싸고 새로 출현한 정치권력과 군사권력은 새 정부 초기부터 예사롭지 않은 충돌 조짐을 보였다. 군대의 진정한 권력은 지휘권이 아니라 인사권이었다. 청와대는 이를 자기네 권한이라고 생각했고 국방부장관은 자신만이 대통령의 위임을 받아 실질적인 인사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미 국방부의 실무 부서에서는 장관의 인사지침을 받아 ‘전문성에 기초한 인사 관리’라는 새로운 인사 정책 수립이 예고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이 장관은 이제껏 군 인사가 싸우는 군대의 본질을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행정과 관리에 물든 관료주의의 적폐물이라고 못마땅해왔던 터였다.
그동안 각 군의 인사는 각 군 본부 인사참모부와 인사운영감실이 주도했다. 각 군 인사참모부장과 인사운영감실 통제과장은 요직 중의 요직이었다. 통상 인사참모부장은 군단장(중장), 통제과장은 준장 진급이 보장된 자리였다. 그러나 그 폐단도 적지 않았다. 육군의 경우 총장은 규정에도 없는 임의 조직인 인사운영위원회를 운영하면서 총장의 의도를 관철했는데, 이것은 군 인사법에서 인정되지 않는 절차였다. 이로 인해 인사 직능 출신이 장성 진급에서 유리하게끔 인사 출신이 할당되는 폐단이 나타난 것이다. 이 때문에 정기 인사 때마다 인사 출신의 전횡 및 특혜 논란이 불거졌고, 야전 작전 출신 홀대에 대한 반발 여론이 조성되었다.
이명박 정부 출범 당시를 보면 11명의 군단장급 지휘관 중 경계소초(GOP)가 있는 전방 사단장 출신은 단 2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주로 후방 향토사단이나 동원사단, 대도시 주변의 군사령부 참모 출신들이 차지했다. 이 때문에 야전 작전 출신들의 진급이 저조하다는 여론도 빗발치던 상황이었다. 이 장관의 인사 개혁은 바로 이러한 적폐를 일소하는 데 그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분명히 예전의 군대는 엘리트 군인일수록 최전방의 지휘관을 선호했고, 힘든 오지에서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는 걸 당연시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전방에서 작전의 주요 보직을 거친 장교들보다 후방에서 유력자 측근으로 근무한 장교들이 더 출세하는 이상 현상이 나타나더니 이제는 이것이 만성화되었다. 이에 야전을 중시하는 이상희 장관은 ‘전문성에 기초한 인사 관리’라는 군 인사 개혁안을 들고나왔는데, 그 실체는 다름 아닌 ‘작전 우대 방침’이었다. 4월에 이 기조를 완성한 이 장관은 5월쯤에는 이미 작전 위주로 진급되도록 인사 지침을 계룡대에 하달했다. 이런 지침이 알려지자 “인사·군수 직능의 장교들은 진급시키지 않는다”는 소문이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이제껏 진급 하나만 보고 보직을 관리해온 비작전 병과의 장교들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청와대가 관리하는 이너서클 TK가 장악
야전을 우대한다는 취지는 좋았으나, 군의 직능 체계는 하루아침에 바뀔 문제가 아니었다. 군을 경영한다는 것은 종합예술이다. 앞에서 싸우는 자, 뒤에서 지원하는 자, 인사를 하는 자, 정책을 하는 자가 제자리에서 제 역할을 다하는 것이 국방을 경영하는 것이다. 작전·인사·군수·정책 직능을 두는 것은 이들이 모두 국방의 중요한 구성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전 지상주의라는 인식으로 개혁을 밀어붙인 결과 군 내부에서는 불가피하게 분란이 조성되었다. 비교적 소폭으로 진행되는 4월 인사에서 이런 문제가 전면화되지는 않았지만 가장 큰 폭의 인사인 10월 정기인사에서는 대대적인 변화가 예견되었다.
한편 군 인사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청와대 인사비서관, 기무사령관, 국방부 인사복지실장이 모두 TK(대구·경북) 출신으로서 사실상 이너서클을 형성하고 있다는 군 내부의 비판 여론도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류우익 실장을 필두로 한 경북 상주 인맥과 이명박 정부의 주류라 할 수 있는 영포(영일·포항) 라인의 약진, 이에 대한 불안감으로 저항의 색채가 농후한 호남 장교들 사이에도 갈등의 조짐이 나타났다. 류 실장은 군의 핵심 요직인 기무사령관에 자신의 이종사촌이자 상주고 후배인 김종태 소장을 추천했다. 김 소장은 4월1일 중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기무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석연치 않게 비리 혐의로 기관 조사를 받고 사단장에서 보직 해임된 그는 결국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고, 한직인 교육사로 좌천돼 있던 중이었다. 비육사 출신에다가 새로운 정권과의 인맥이라는 이점이 작용한 결과 3사 출신으로는 드물게 기무사령관이라는 요직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 한편 영·호남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장교들은 ‘기타 잡도’로 불리는 비주류였다.
2008년 3월12일 이상희 국방부장관이 국방부 업무보고를 하고 있다. 오른쪽 두 번째부터 박흥렬 육참총장, 송영무 해참총장, 김은기 공참총장, 김병관 연합사부사령관. ⓒ 연합뉴스
인사·법무·군수 등에서 연이어 전역지원서
본격적인 분란은 2008년 10월부터 11월까지 이어진 정기인사에서 터져나왔다. 11월5일 진급 및 보직 인사 발표를 앞두고 육군은 임명된 지 6개월밖에 되지 않은 인사참모부장 이승우 소장을 좌천시키고 후임에 이상희 장관의 측근인 포병 작전 출신 서길원 소장을 임명했다. 이에 이 소장이 전역지원서를 제출하며 반발하자 총장이 직접 나서 이를 만류해 가까스로 진정되었다. 그러나 인사 직능 출신 전체의 반발에 이어 법무·군수 직능에서 전역지원서 제출 사태가 잇따랐다. 이들은 평생을 진급만 바라보고 경력을 관리해왔는데, 기대에 어긋나게도 초라하게 차려진 밥상을 보고는 즉시 엎어버리겠다는 분위기였다. 바야흐로 군에서는 작전 출신이 여타 병과를 제압하는 작전 전성기가 개막된 것이다. 이는 이 장관이 내내 꿈꿔온 ‘국방의 이데아’였다.
이 당시 정기인사에서 이 소장을 비롯해 논산훈련소장 장종대 소장 등 인사 직능 진급 유력자가 대거 탈락했다. 인사 직능만이 아니라 군수의 경우에도 3사 출신 고참 기수를 진출시킨 것 외에는 진출자가 저조했다. 정책은 통상 3~5석이 진급되던 것이 2명으로 줄어들었다. 반면 야전 작전의 진급자는 8개 군단 작전참모 중 통상 1~2명 수준이던 데 반해 6명이나 진출했다. 인사 출신으로 유일하게 진급한 박성우 소장의 경우, 진급을 하면 사단장으로 내보내야 하는데 “작전이 아니면 지휘관을 할 수 없다”며 종합행정학교장으로 발령 냈다. 이렇게 작전 출신만을 지휘관으로 진출시키려다 보니 사단장으로 내보낼 자원이 부족해지는 현상이 발생했다. 때문에 작전 출신 한 사단장의 경우, 두 번 연거푸 사단장으로 내보내지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이런 와중에 김인종 청와대 경호처장의 측근으로 알려진 유 아무개 대령은 이미 진급 적기가 한참 지났음에도 준장으로 진급되며 특혜 의혹이 일기도 했다.
군 인사에 대한 후폭풍이 거세지자 청와대도 군 인사와 관련된 잡음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11월에 이 대통령이 “군 인사에 잡음이 많다”고 직접 지적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난데없이 감사원이 군 인사 시스템을 감사하겠다고 나섰다. 군의 고유한 권한인 인사 문제에 감사원이 개입하는 데 대해 이번에는 국방부가 강력히 반발했다. 국방부의 새로운 인사 방향은 이른바 ‘김장수 사람’ ‘박흥렬 사람’이라고 낙인찍힌 장교들을 한직으로 내모는 것이었다. 이는 이 장관이 주도했다기보다는, 청와대가 직접 장교 신상을 관리하는 이른바 ‘검증 자료’를 운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런 반전을 통해 유력자와의 근무 인연에 따라 진급이 좌우되는 인연 중시, 줄 서기 풍토가 확산되었다. 장교가 진급을 하려면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1등을 하면 되는 것이고, 외부로 시선을 돌릴 필요가 없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외부의 입김에 따라, 정치 논리에 따라 진급이 좌우된다는 믿음이 군 내부에서 확산되기에 이른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2008년 4월3일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김종태 국군기무사령관 등으로부터 중장 진급 및 보직 신고를 받은 뒤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인사권 없다” 육참총장 발언에 장교들 반발
2009년 4월 임충빈 육군참모총장은 계룡대에서 장군 보직 신고를 받으면서 “총장에게 인사권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폭탄선언을 했다. 사실상 인사에 외압이 존재했음을 암시하는 이 발언으로 육군은 발칵 뒤집혔다. 이날 보직을 이동하는 장군들을 전부 계룡대에 모아놓고 신고를 받는 이례적인 행사가 임 총장의 지시로 있었는데, 외압의 실상을 폭로하려는 총장의 의도가 아니었는지 의심이 갔다. 이 행사가 있기 직전에 국방부는 “거듭되는 인사 잡음을 총장이 앞장서서 수습하라”는 당부를 했다. 하지만 이날 임 총장의 발언은 오히려 잡음을 확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외압을 방어하지 못하고 총장이 굴복하는 양상이 드러나자 즉시 “과장만도 못한 총장”이라는 장교들의 비난이 나오는 가운데, 진급을 하려면 청와대에든 국회에든 로비를 해야 한다는 잘못된 메시지가 퍼져나갔다. 이런 굴절된 인식이 새로 출범하는 정권 초기에 광범위하게 형성된 것은 과거 어떤 정권과 비교해도 유례가 없는 이상 현상임에 분명했다. 이명박 정부 첫해 군은 과거 정권의 색채를 지우고 새로운 진용의 군맥으로 일신하려는 정권의 과욕 탓에 연이어 불안한 모습을 나타냈다.
군인은 그들이 주적이라고 말하는 북한을 바라봐야 하는데, 이런 인사 풍토는 그 시선을 청와대로, 국방부로 향하게 했다. 여기에다 육군 야전의 작전 출신들이 군의 거의 모든 핵심 요직을 장악함에 따라 다양한 전문성이 존중되는 것이 아니라 사고방식이 동질화되는 이른바 ‘집단사고(group thinking)’의 위험이 증대된 것은 안보에 매우 불길한 조짐이었다. 이들이 고수하는 지상군의 전술 방식은 표준행동절차(SOP: Standard Operating Procedure)로 정착돼 한국군 조직의 강력한 문화를 형성한다. 여기에서 한국군은 경력이 엇비슷한 지상 작전 전문가들에 의한 편향된 전략 문화(strategic culture)가 형성되는 부작용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육군 작전 병과 장교들이 갖는 폐쇄적 문화였다. 우리나라 작전 장교들은 어떤 군대의 기동을 두고 이것이 돌파냐, 포위냐, 공격이냐는 용어를 선택하는 것을 놓고 밤새도록 논쟁을 한다. 거시적 안목에서 큰 틀의 전략을 고민한다기보다는 전술적 차원에서 개념과 용어로 다투는 그들의 문화, 그들의 속성은 다른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는 강한 구심력을 갖고 있었다. 바로 이 점은 훗날 이명박 정부가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을 겪으면서 한반도 위기관리의 중대한 결함으로 구체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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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軍들의 전쟁] #22. ‘노무현 지우기’ 나선 MB, 청와대 지하 벙커 위기관리센터 해체
국가안보와 재난 위기관리 핵심 요원들 대거 퇴출…그때부터 세월호 비극 싹터
기사입력시간 [1286호] 2014.06.11 (수)
김종대│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김대중 정부 시절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에 파견되어 있던 류희인 공군 대령에게는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만일 대통령 유고와 같은 리더십의 공백 사태가 발생하면 국가는 어떻게 관리되어야 하는가”였다. 그가 이런 의문을 갖게 된 것은 2000년 6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을 방문하는 장면을 TV로 지켜보면서였다. 평양에서 대통령이 억류되거나 사고라도 발생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갑자기 어둠 속에서 빨간 비상등 하나가 켜졌다. 즉시 그는 정부 문서를 다 찾아보았으나, 헌법에서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한다는 것 외에 아무런 행동 절차도, 비상계획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과거에도 그랬다. 1961년에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군부가 5·16으로 군대를 동원했을 때 잠적한 장면 총리에게 연락이 닿지 않았다. 당시 유엔군 사령관과 주한 미국대사는 사흘 만에 나타난 장 총리에게 “빨리 쿠데타군 진압을 명령하라”고 독촉했지만 장 총리는 내각 총사퇴를 발표하고 다시 숨어버렸다. 만일 그때 장 총리가 자신의 국군통수권을 적극 행사했더라면 미국은 주한미군까지 동원해서 쿠데타군을 진압할 용의가 있었다. 국군 통수 체계가 사라진 힘의 공백에서 5·16은 성공할 수 있었다.
2009년 3월30일 이명박 대통령이 런던 G20 정상회의 출국 전날 청와대 지하 벙커에 설치된 비상경제상황실에서 관계자들의 보고를 듣고 있다. ⓒ 청와대 제공
MB의 냉소 “돈 많이 들였으면 잘 써먹어야지”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연행하면서 시작된 1979년의 12·12 사태 역시 대통령을 보좌해야 할 노재현 국방부장관이 행적을 감추면서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장군의 신군부에 국정의 주도권이 넘어간 사건이다. 만일 그때 국방장관이 제자리에서 역할을 다했다면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국가의 지휘체계가 붕괴되었을 때 누가 어떤 절차로 위기를 수습해야 하는가는 국가 존립에 가장 핵심적인 문제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그렇게 위기를 겪고도 국정 운영에서 ‘위기관리’라는 의제를 발전시키지 못하는 것일까. 또한 안보 위기나 사회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왜 대통령과 정부는 이렇게 무능한 것일까. 위기관리에 대한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예방하고 대비하고, 사건이 발생하면 신속하게 대응한다는 관리의 개념이 빈약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우리나라 국가 시스템이 제법 선진화되어 있다고 믿을지 모르나, 사실 그 내용을 뜯어보면 무언가가 뻥 뚫려 있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기 직전에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파견되어 있던 류 대령이 “우리나라에는 안보와 사회 재난까지 포괄하는 체계적인 위기관리 시스템이 없다”며 이 문제를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에게 제기했고,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청와대 위기관리센터였다.
정작 국가안보를 외치며 집권한 이명박 대통령의 청와대는 이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과거 노무현 정부의 색깔 지우기에 집중하다 보니, 국가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위기관리의 연속성과 국가 보위의 기본을 망각했다. 우선 사람을 너무 급격히 바꾸는 데서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청와대에는 군에서 파견된 26명의 장교가 안보수석실, 경호실, 국정상황실, NSC 위기관리센터 등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집권한 지 한 달 만인 2008년 4월 이 중 20명을 군으로 복귀시켰다. 상당수는 자리 자체를 없애거나 정권과 줄을 댄 정치장교들로 채워졌다. 심지어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에서 14명의 수석들을 보좌해온 여직원까지 내보냈다. 새로 정치권에서 데리고 온 여직원은 전화 연결을 할 줄 몰랐고, 운전기사는 주요국 대사관이 어디 있는 줄 몰랐다. 각 사무실의 컴퓨터 작동에 필요한 패스워드를 아는 사람도 사라져 업무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극심한 혼란이 초래되는 와중에 청와대는 위기관리센터도 해체하겠다고 했다.
당시 센터장을 맡고 있던 류희인 소장은 어떻게든 센터 해체만은 막아야 했다. 류 소장이 김병국 외교안보수석에게 센터의 기능을 설명하며 해체를 막아달라고 도움을 청하자, 김 수석은 이를 경청했다. 김 수석이 이 대통령으로 하여금 위기관리센터를 방문하도록 한 때는 4월 초였다. 당시 위기관리센터에 근무하던 김형근 행정관은 이 대통령 앞에서 정부의 총 27개 안보·재난 및 안전 관련 상황 정보가 센터 상황실과 연결되어 있어 대통령이 필요시에 언제든 국가의 상황 정보를 실시간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설명했다. 더불어 안보 위기나 재난이 발생했을 때 정부 주무 부처가 어디인가를 알려주는 총 33개의 위기 유형에 대비한 국가 위기관리 기본지침과 운영 매뉴얼도 소개했다. 그런데 브리핑을 다 듣고 난 이 대통령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돈 많이 들였으면 잘 써먹어야지.”
위기관리센터 요원들 연수원으로 좌천
이날 이명박 대통령은 8월 말까지만 센터를 더 시험 운영해보고 해체 여부를 결정하겠다며 4개월여 유예 기간을 두기로 했다. 그래서 청와대를 나가려고 짐을 싸던 센터 요원들이 다시 짐을 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상황실 핵심 요원들에게 보직 해임 통보와 함께 중앙공무원연수원에 입교해 교육 프로그램에 참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청와대 경호실에서 잔뼈가 굵은 김형근 행정관도 여기에 포함돼 청와대에서 쫓겨난 공직자들과 함께 연수원으로 좌천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교육 도중에 갑자기 KBS·MBC 카메라가 교육장으로 들이닥쳤다. 그날 밤 9시 뉴스에 “정부가 무능한 퇴출 공무원을 재교육한다”는 소식과 함께 자신의 모습이 TV에 나오는 걸 보고 김 행정관은 경악했다. 이렇게 해서 센터는 사실상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고, 위기관리센터라는 명칭도 위기관리상황실로 바뀌었다. 물론 센터장 자리도 행정관급으로 격하되었다. 이어 5월에는 청와대 지하 벙커에 위치한 위기관리상황실이 이명박 정부 초기에 엄습한 국가 경제위기에 대응하는 비상경제상황실로 그 기능이 바뀌었다. 국가 위기나 재난 상황에 대비하던 상황판은 가려지고 각종 물가지수나 증권지수를 표기하는 새로운 데이터로 교체되었다. 국가안보와 재난에 대한 위기관리가 국가 경제 위기관리로 대체된 것이다. 이 비상경제상황실에서의 첫 작품이 당시 미네르바라는 필명으로 경제평론을 하던 네티즌 구속이었다.
노무현 대통령 당시의 위기관리센터에는 27개 상황 정보 시스템 중 하나로 선박 관제 시스템(VMS: Vessel Monitoring System)도 구축돼 500톤급 이상의 선박에 대해 전 세계 어디서든 조난이 발생하더라도 즉각 청와대가 이를 파악할 수 있는 체계가 구축되어 있었다. 더불어 해경의 주요 경비정에 설치된 감시카메라(CCTV) 화면을 청와대가 직접 볼 수 있는 시스템도 마련돼 해난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청와대가 그 상황을 얼마든지 모니터링할 수 있었다. 오늘날까지 이런 시스템은 각 기관별로 진화하고 있지만, 오히려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청와대 시스템만은 거의 개선되지 않거나 심지어 퇴화했다. 각종 재난 사태에서 청와대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난 4월16일 세월호 침몰 사고가 발생했을 당시 김장수 청와대 안보실장이 “청와대는 재난의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라고 언급한 배경에는 안보 위기 외에 재난 상황에 대해서는 청와대 안보실이나 위기관리센터가 거의 개선된 것이 없다는 사실이 놓여 있다.
NSC 사무처도 해체되고, 외교안보 부처 장관들의 정책조정회의인 NSC 상임위원회도 완전히 무력화되었다. 전시에 정부의 기능을 유지하고 군사 작전을 지원하는 국무총리실 비상기획위원회도 해체되었다. 청와대는 위기관리 매뉴얼은 없애지 못하니까 트럭에 실어 행정안전부로 보내버렸다. 오늘날 그 매뉴얼의 일부는 어디론가 유실되어 찾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NSC의 각종 회의록, 중요한 외교 문서, 정부의 행동 매뉴얼 등이 노무현 대통령 말기에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이미 이명박 정부 차원에서는 그러한 노무현 시대의 흔적을 체계적으로 지워나가고 있었다.
2008년 전반기 공군 지휘관 회의가 4월23일 공군본부에서 열려 김은기 참모총장(맨 오른쪽)을 비롯한 공군본부 참모 및 예하부대 지휘관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청와대 ‘금강산 관광객 피격’ 7시간 지나 알아
이와 함께 이전 정부 시절 NSC에서 위기관리 업무에 종사하던 군 장교들에 대해서도 압박이 시작되었다. 이상희 국방부장관은 김은기 공군참모총장에게 전화를 해서 “류희인 소장을 구속해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김 총장이 “아니 뭘로 구속을 시킵니까?”라며 반문했다. 김 총장은 이 당시 류 소장을 비호했다는 게 괘씸죄의 이유 중 하나로 작용해 그해 임기를 6개월 남겨놓고 총장직에서 물러난다. 국방부장관실과 한나라당 국회 보좌관들이 “(김 총장과 류 장군이) 노무현 정부 당시 측근 군맥을 형성했다”며 부적절한 인사 개입 문건을 만들어 청와대에 제출했고, 그 직후 김 총장이 자리에서 물러난 것이다. 그 결과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에 근무했던 중령·대령의 장교들이 이후 인사에서 불이익을 받기도 했다.
이런 전문성의 해체는 즉각 효과를 발휘했다. 국가의 위기를 관리하는 현장,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 공무원의 손가락 끝이 서서히 마비되기 시작한 것이다. 2008년 6월말까지 쇠고기 수입 개방 반대로 촛불시위가 벌어지자 대통령과 청와대는 거의 공항 상태였다. 시위 현장에서는 진압의 전문성이 없는 사람들로 경찰의 요직이 교체되자 무리한 지시가 남발되었고, 그 결과 용산에서 시위를 하던 8명의 철거민이 불에 타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금강산에서 우리 관광객이 피살되었지만 7시간 넘게 청와대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이명박 대통령은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하면서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고 북한에 대화 제의를 하는 해프닝을 연출했다. 사회 곳곳에서 불행한 사건이 반복되어도 청와대의 재난 관리 시스템은 거의 작동되지 않았다. 국정에서 위기관리라는 의제 자체가 실종된 것 같았다.
미국의 경우 국가 비상사태에서 국가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는 섬세한 계획으로 준비되어 있다. 심지어 대통령 연설문과 장관의 담화문까지도 다 준비되어 있다. 9·11 테러 당시를 살펴보자. 2001년 9월11일 오전 8시45분에 여객기가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에 충돌할 당시에 조지 부시 대통령은 플로리다 주 초등학교에 있었다. 사건 발생 20분 후인 9시5분에 최초 보고를 받은 부시는 급히 백악관으로 귀환하면서 대국민 메시지를 준비한다. 사건의 주범을 모르는 상황에서 당일 부시의 행적에는 모두 3건의 성명 발표가 포함되어 있다.
1차는 “미국에 대한 명백한 테러 공격”이라며 사건의 성격을 명확히 하는 데 집중되었다. 2차는 테러에 대한 보복 의지를 천명하고 국제사회의 협조를 요청한다. 3차는 테러 공격 배후자들과 이를 보호하는 국가에 보복 의사를 천명한다. 담화 이후 즉시 부시는 먼지가 자욱한 테러 현장으로 가서 소방관들과 함께 서서 또 연설을 한다. 이후로 부시는 거의 매일 직접 성명을 발표하는데, 그 내용으로는 △‘21세기 첫 전쟁’이라 규정하고 반드시 승리한다는 의지 천명(9월12일) △“우리의 책임은 악의 세계를 제거하는 것”이라는 명확한 방향 제시(9월13일) △“악을 제거하기 위한 성전 개시” 성명 발표(9월17일) 등이다. 이와 함께 국무·국방·법무·보건·농업 등 각부 장관들이 일제히 자기 분야 조치 사항과 추진 방향에 대해 거의 매일 브리핑을 하는데, 3일 동안의 브리핑만 50회가 넘는다. 전대미문의 테러를 당한 상황에서 미국 국민들은 가장 불안한 시기에 용기 있게 행동하는 국가 지도자에게 높은 지지와 성원을 보냈다. 불안에 빠진 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요구(demand)에 대통령이 직접 나서 용기를 북돋아주고 함께한다는 신뢰로 화답(support)하는 관계, 이를 일컬어 ‘소통’이라고 한다.
2008년 3월26일 김태영 합참의장 내정자가 국회 국방위 인사청문회에 출석해 의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국회사진기자단
“북한 핵기지 선제 타격” 합참의장 발언 파장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인 2008년 3월26일, 창군 이래 최초로 합참의장 인사청문회가 열렸다. “제일 중요한 것은 적이 핵을 가지고 있을 만한 장소를 빨리 확인해서 적이 그것을 사용하기 전에 타격하는 것이고, 그것이 저희 쪽에 사용되지 않게끔 하는 것, 그 다음에 또….” 당시 김태영 합참의장 내정자의 이 말 한마디에 한반도는 크게 요동쳤다. 김 내정자는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보았을 때 우리의 대비책은 무엇이냐”는 김학송 한나라당 의원의 질문에 이와 같이 답하며 “미사일에 대한 방어 대책 등을 통해 그 핵이 우리 지역에서 작동되지 않도록 하는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다음 날인 27일 중앙일보가 ‘북한이 핵무기 공격한다면 작동하지 않게 핵기지 타격’이란 제목으로 1면 톱기사를 내보내고, 기타 신문과 방송들이 일제히 인용 보도함에 따라 김태영 합참의장의 발언이 일파만파 확산되기 시작했다. 더욱이 일부 언론은 김 의장의 답변을 “예방적 차원의 선제공격 개념”이라고 언급하면서 “북한 핵무기에 대한 선제공격론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부시 독트린’과 유사한 개념이지만 우리 당국이 밝히기는 처음이다”라고 확대 해석해 북한은 물론 국내 진보 정당 및 시민단체들을 자극했다. 당장 이에 반발한 북한은 28일 오전 급기야 서해상에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해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을 극도로 고조시켰다. 안보 상황 자체는 변함없는데, 오직 ‘말’만으로 위기가 조성되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국민 안전 그 자체라는 포괄적 안보 개념은 사라지고 오직 북한의 위협만을 보는 전통적인 군사 안보로 이명박 정부의 정책이 기울기 시작했다. 이 파장은 얼마 후 역대 어느 정권도 겪어본 적 없는 전대미문의 안보 위기로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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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軍들의 전쟁] #23. 제2롯데월드 반대한 공군총장 옷 벗겨
MB, 인사 문제 빌미로 김은기 총장 교체…노무현 정부 군 인맥 거세 나서
기사입력시간 [1287호] 2014.06.18 (수)
김종대│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찜통 같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1989년 8월24일 늦은 오후. 서울 삼청동 경북궁을 따라 늘어선 은행나무 길에 검은 승용차 한 대가 쏜살같이 달려와 국군 수도통합병원으로 들어섰다. 임기 9개월을 남겨놓은 공군참모총장 정용후 대장은 보안사 요원들에 의해 차에서 내려져 곧바로 입원 조치됐다. 56세의 정 총장이 돌연 입원한 사유는 공군 진급 비리 관련 조사 때문으로 알려졌다. 약 25일간 보안사로부터 조사를 받은 정 총장은 전역식도 치르지 못하고 31년 군 생활을 마감했다. 이 사건은 3년 후 한국 정치를 격랑으로 몰아간 대변혁의 불씨가 된다. 김영삼 정부 출범 직후인 1993년 4월24일. 정용후 전 총장은 자택에서 기자들과 만나 놀라운 사실을 폭로했다. 1989년 8월의 조사는 진급 비리 조사가 아니라, 한국형 전투기 사업(KFP) 선정 기종을 둘러싼 공군과 청와대의 갈등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공군은 F-18을 주장했으나, F-16을 선호하는 청와대와 국방부 고위층의 압력으로 자신이 강제 전역하게 됐다는 폭로였다.
정 전 총장은 “1988년 11월 당시 노태우 대통령에게 차세대전투기 기종을 F-18로 해야 한다는 건의를 하기 위해 청와대에 들어가기 직전, 김종휘 외교안보수석이 서울 하얏트호텔로 나를 불러 F-18뿐만 아니라 F-16도 장점이 있다며 두 기종을 함께 건의할 것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수사한 검찰도 “당시 김 수석이 ‘노 대통령에게 잘 보일 수 있는 기회니 내 말대로 하라’며 정 총장에게 압력을 가했으나, 이를 거절한 후 노 대통령에게 F-18을 채택하도록 건의해 최종 재가를 받았다고 정 전 총장이 진술했다”고 밝혔다.
2008년 10월1일 이명박 대통령이 국군의 날 기념 경축연에서 김태영 합참의장 등 군 지휘부와건배하고 있다. 맨 왼쪽이 김은기 당시 공군참모총장. ⓒ 연합뉴스
정 전 총장이 강제 전역하고 후임 공군참모총장으로 한주석 중장이 발탁되었다. 한 총장은 전임자의 F-18 고수 방침을 번복하고 청와대 지침대로 F-16으로 기종을 바꾼다. 그 결과 1991년 초, 한국 정부는 F-16으로 한국형 전투기 대상 기종을 변경한다. 더불어 정 전 총장 측근으로 분류됐던 공군본부의 핵심 인재들을 거세한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고 정 전 총장의 폭로가 도화선이 되어 군 무기 도입 전반에 대한 검찰의 수사와 감사원의 특별감사, 일명 ‘율곡 비리 특감’이 이어졌다. 한국형 전투기 사업의 기종 변경 의혹을 핵심으로 한 군 무기 도입 전반으로 그 범위가 확대되었다.
김은기·류희인 등 노무현 공군 인맥 제거
그로부터 20년 후인 2008년 8월 초. 김은기 공군참모총장은 잠실의 제2롯데월드 건립을 허용할 경우 인근 성남의 서울공항에 미칠 영향을 검토해 이상희 국방부장관에게 보고했다. 서울공항의 군사적 중요성과 전투기 비행 안전 문제, 그리고 유사시 외국인 철수 문제를 고려할 때, 공항으로부터 불과 2㎞ 남짓 떨어진 인근에 초고층 빌딩인 제2롯데월드 건립을 허용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내용이 보고의 핵심이었다. 5월에 이명박(MB) 대통령이 경제단체장과의 회동에서 제2롯데월드를 허가하겠다고 말한 것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보고였다. 8월 중순부터 청와대에서는 “공군참모총장이 대통령에게 항명하겠다는 거냐”는 불만이 공공연히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이 무렵 청와대와 여권 핵심부는 김은기 총장이 공군 인사에서 전횡을 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내사에 들어갔다. 2008년 당시 공군본부의 핵심 보직인 참모총장·참모차장·정보작전참모부장·인사참모부장이 공군본부 훈련처 출신에 편중돼 있었다. 작전의 핵심 기관이라 할 수 있는 작전사령부 출신 인사는 배제되고 공군본부 내 주요 보직에서 근무 인연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김 총장 재임 중에는 공사 24기들이 소장으로 버젓이 근무하고 있는데, 노무현 정부 말기에 들어오자 후배 기수인 25기에서 중장 진급자가 나왔다. 이는 김 총장과 류희인 전 NSC 사무차장(예비역 공군 소장) 등이 유착되어 추진한 인사의 결과라는 게 MB 정권 권력 핵심부의 논리였다. 따라서 김 총장 이하 인사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한다면 공군 내 주요 직위는 노무현 정부 사람들로 계속 채워질 것으로 보고 김 총장 교체를 건의하는 문건이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으로부터 청와대에 전달되었다.
9월 중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과 국방부는 공군참모총장 교체를 건의하기로 하고, 조원건 공군작전사령관을 1순위로, 이계훈 합참차장을 2순위로 검토했다. 그 결과 한 고위관계자가 이 대통령에게 이 보고서를 가지고 들어간 날은 9월18일이었다. 이 대통령은 보고서를 받자마자 설명을 듣지도 않고 “이 사람으로 해”라며 이계훈 합참차장을 지목했다. 재가를 받기까지 걸린 시간은 30초 남짓. 그리고 이날 국방부는 이 차장을 새 공군참모총장으로 발표했다. 전광석화 같은 의사 결정에 공군참모총장 교체를 건의한 한나라당 관계자들마저 크게 놀랐다. 바로 이날, 서울공항을 이전하지 않고도 제2롯데월드를 건립할 수 있는 ‘윈윈(win win) 방안’이 모색되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제2롯데월드 허용이 공군참모총장 교체와 모종의 관련이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은 당시 이 문제를 접근하는 모든 의혹의 시발점이었다. 김은기 전 총장이 과연 ‘제2의 정용후 총장’이 되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한나라당 국방위 핵심 관계자는 “아니다”라고 부인했다. 2008년 10월 김은기 전 총장에 대한 교체는 노무현 정부의 공군 인맥, 즉 공군본부 내 특정 부서 근무 인연을 청산하고 새로운 진용을 갖추기 위한 것이지, 제2롯데월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의문이 있다. 과연 10월 군 정기인사에서 새로 부임한 이계훈 공군참모총장이 특정 부서 인사 편중을 시정했느냐는 것이다. 막상 정기인사 뚜껑을 열어본 결과, 작전사령부 출신은 여전히 홀대받았다는 게 중론이다. 특히 고위 장성일수록 그러한 현상은 두드러졌다. 그렇다면 갑작스레 공군참모총장을 교체한 이유가 새로운 인재의 진용을 갖추기 위해서라는 MB 정부의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실제 이명박 정부에서 공군 작전사령관 출신은 단 한 명도 공군참모총장으로 진출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31대 이계훈 총장에 이어 32대 박종헌, 33대 성일환 총장은 모두 교육사령관 출신이다. 바로 이 점이 공군 인사에서 작전이 배제되는 이상한 풍조의 원인이 되었다.
이전 정부를 보면 24대 이광학, 25대 박춘택, 26대 이억수, 27대 김대욱, 28대 이한호 총장이 모두 작전사령관 출신이다. 항공작전을 관장하는 작전사령관은 공군 내에서도 최고의 전문가가 거치는 직위다. 긴박한 순간에 빠른 의사 결정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작전사령관을 역임해야 참모총장으로 진출할 수 있다는 전례를 깨고, 주로 정권의 유력 인사와 가까운 인사·교육·정보 분야 출신들이 공군본부의 요직으로 진출하는 풍조는 공군의 정상적인 인사 시스템을 교란시키는 요인으로 작동하게 된다.
2008년 4월28일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투자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을 위한 민관 합동회의’에 참석해 경제 5단체장 및 대기업 회장들과 커피타임을 갖고 있다. ⓒ 국회사진기자단
작전사령관 출신, 공참총장에서 배제
공군 조종사의 경우 한 기수에서 조종사로 임관한 동기생 중 순직률이 10%가 넘는 기수도 있을 만큼 위험하고 난이도가 높은 직업이다. 공군 조종사는 민간 보험회사에서 생명보험도 잘 받아주지 않을 정도다.
이처럼 전격적인 공군참모총장 교체가 과연 제2롯데월드 허용과 관련이 있지 않느냐는 의혹이 논란의 대상이 됐다. 정치권력이 군사 지도자를 관리하는 데 정책으로 통제하지 못할 경우 항상 인사 문제에서 약점을 찾는 경향이 있었다. 이 대통령이 선뜻 이계훈 총장을 낙점한 배경에도 그런 시각이 있었다. 경쟁자인 조원건 작전사령관에 대한 문제점이 청와대에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한 관계자에 의하면, 강원도 출신인 조 사령관이 노무현 정부에서 실세로 불린 이광재 의원의 후원을 받았다는 소문이 그것이다. 차별과 소외로 피해의식이 강한 강원도민회는 고향 출신 공직자가 상위 직급으로 진출하면 ‘강원도의 힘’을 보여주기를 갈구하는 강한 지역성을 가진 집단이었다. 여기에다 군 정기인사를 앞두고 조 사령관의 가족이 부하 가족들을 공관으로 초청한 사실까지도 인사에서 ‘줄 세우기’로 비춰지며 당시 한 정보기관에 의해 청와대에 보고되기도 했다. 참모총장 인사 발표가 난 후 한 지인을 만난 조 사령관은 “나에 대해 안 좋은 말이 청와대로 들어갔다는 말을 들었다”며 저간에 자신에 대해 떠도는 여러 소문들을 알고 있음을 드러냈다.
9월30일. 국방부는 제2롯데월드에 대해 다양한 대안을 상정하고 이를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국방위원회에 보고했다. 12월30일. 롯데 측은 비행 안전을 위한 여러 조치에 자신들이 비용을 부담하겠다며 서울시에 제2롯데월드 신축 관련 협조를 요청한다. 그 이튿날인 12월31일. 서울시는 행정안전부에 이 문제를 행정협의조정위원회를 열어 협의해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따라 국무총리실은 2009년 1월7일 행정협의조정위 실무위원회를 개최해 사실상 롯데 측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공군이 건의한 세 가지 방안 중 동편 활주로를 3도 변경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명박 정부가 마치 전봇대를 뽑아버리듯 공군의 반대를 묵살하고 제2롯데월드를 허가해주자 주목된 곳은 예비역 장성들의 반응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들이 거세게 들고일어날 만했다. 그런데 예비역 장성들의 모임인 성우회가 이상한 행보를 보였다. 이정린 성우회 정책실장은 언론에 “롯데월드에 찬성하는 장군들도 있는데 반대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내기는 곤란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당시 성우회장인 이종구 전 국방부장관은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과 육사 14기 동기였다. 또한 1989년 정용후 전 공군참모총장이 강제 전역당하는 걸 옆에서 지켜본 당시 육군참모총장이기도 했다. 군 사조직인 하나회의 맏형 격인 이 회장과 하나회 소속 장교들을 30년 넘게 후원해 온 당사자가 이 의원이었다. MB 정권 초기에 이 회장이 이 의원과의 친밀한 관계를 활용해 국방부장관 인사에 개입한 정황은 예비역 장군들 사이에 꽤 잘 알려져 있었다. 당시 이상희 국방부장관이 이 회장과 같은 전의 이씨(全義 李氏) 종친이라는 점도 눈길을 끌었다.
이상희 국방부장관(오른쪽)이 2008년 3월17일 성우회를 방문해 이종구 회장 등과 환담하고 있다. ⓒ 연합뉴스
재벌 친화적 정부와 예비역 장성의 유착
단지 제2롯데월드 건립 허가에만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도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지난 노무현 정부 시절부터 공군이 가장 우려한 것은, 서울공항을 롯데에 양보할 경우 전국의 모든 군 공항을 비롯한 군사시설에 대해서도 유사한 민원이 폭주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그러한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와 임태희 정책위의장은 차제에 전국 군사공항 주변의 고도 제한 같은 규제 등을 일괄적으로 완화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키로 했다고 조선일보가 2009년 1월 보도했다. 홍 원내대표는 “군사공항의 상당수가 과거에는 도시 외곽에 있었지만 도심이 커지면서 시내 중심에 위치하게 됐고, 성남 지역만 해도 서울공항 때문에 고도 제한을 받아 도시계획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는 등 문제가 많으니, 이번 기회에 전국적으로 검토해 불필요한 규제는 과감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남경필 의원 역시 “성남·수원·대구·광주·청주 등 전국적으로 10개가 넘는 도심 군사공항 때문에 피해 받는 주민들이 1000만명이나 되고 과도한 규제 때문에 재산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소음 피해 등도 심각하다”고 지원 사격을 했다. 친기업 성향의 이명박 정부는 스스로를 ‘비즈니스 프렌들리’라고 부르며 자유로운 기업 활동에 걸림돌이 되는 군사 분야의 규제를 대부분 없애고자 했다. 여기에 육사 출신 예비역 장성들이 적극 협조한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권력 추종적인 행태로 비칠 만했다.
성남의 서울공항은 수도권 방어에 긴요한 공군의 핵심 전력이 전개되는 전략적 요충일 뿐만 아니라 유사시 외국인들이 해외로 탈출하는 집결지이기도 하다. 유사시 영종도와 김포공항이 접경지역에 가까워 예비공항이라 할 수 있는 성남의 서울공항이 마비될 경우 국가는 커다란 혼란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런 공항의 활주로 앞에 초고층 빌딩이 세워질 경우 미국의 9·11 테러에서처럼 항공기가 빌딩과 충돌하는 상황이 재연되지 않는다고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실제로 2010년 6월 공군의 F-5E 전투기가 귀환하다가 강릉비행장을 2㎞ 앞두고 인근 해안에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안개도 없어 시야가 트인 날에도 비행장 앞에서 이런 추락 사고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 성남 비행장 앞에 버티고 있는 고층 빌딩이 얼마나 심각한 시한폭탄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적어도 안전에 관한 문제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미세한 요인에 의해 얼마든지 큰 재앙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중차대한 사안이 제대로 된 토론도 없이 권력에 의해 일방통행식 밀어붙이기로 강행되고, 여기에 국방부와 공군, 예비역 장성들이 들러리를 서는 행태는 MB 정부 초기 안보정책의 난맥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눈앞의 커다란 이익은 안전의 문제를 살필 수 있는 눈과 귀를 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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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軍들의 전쟁] #24. 대통령 보고 군사기밀 3일 만에 언론에 통째로 유출
‘서해 NLL 북한군 도발’ 군 대비 계획 조선일보에 상세히 보도…국방장관, 기무사에 “발설자 색출” 지시
기사입력시간 [1288호] 2014.06.25 (수)
김종대│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세상에는 많은 장군이 있다. 지략이 뛰어난 지장(智將), 덕성이 풍부한 덕장(德將), 용맹스러운 용장(勇將) 등이 있지만, 가장 선망의 대상이 되는 최고의 장군은 운이 좋은 운장(運將)이다. 예측하기 어려운 전쟁에서 무언가 운명의 여신이 함께할 것만 같은 그런 장수여야 한다. 내가 만일 전투원이라면 ‘저 장군과 함께 가면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장군이 최고의 지휘관이다. 반면 똑똑하기는 하지만 같이 다니면 내가 죽을 것 같은 장군은 지휘관이 될 수 없다. 용맹스럽기는 하지만 개인의 전공에 눈이 멀어 사정없이 부하를 사지로 몰아넣는 그런 장군을 따라다니면 내가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사고가 경직되지 않고 유연하며 부하와 소통이 되는 장군이 최고사령관이 되면 부하들은 ‘싸우면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군대란 바로 그런 ‘믿음의 공동체’인 까닭에 비로소 전투력을 발휘하게 된다.
2008년 4월8일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앞서 티타임 자리에서 이상희 국방장관으로부터 전날 발생한 군 정찰기 추락사고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있다. ⓒ 청와대 제공
“군이 국익 아니라 군익(軍益) 추구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에서 한국군은 또다시 암흑의 시대에 들어서고 있었다.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위협이 우리의 지각 능력 밖에서 조용히 다가오고 있음에도,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전쟁 방식을 고집하는 일종의 관성이 상상력을 질식시키고 있었다. 노무현 시대의 색깔을 지우며 다시 국방의 패권을 장악한 육군 세력들은 참여정부 당시의 ‘국방 개혁 2020’이 해군과 공군에 편중된 국방 개혁안이라며 이를 무효화시키려고 했다. 미래 한반도의 전쟁 양상은 ‘대규모 지상전’이 될 것이라는 전제 아래 우리의 지상군 전력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하는 게 국방의 정통이고, 그 외의 다른 흐름은 이단시하는 배타적 국방 사상이 다시 등장했다. 그 계기는 2008년 4월 어느 날에 합참 작전본부와 정보본부가 합동으로 이상희 국방부장관에게 보고한 새로운 한반도 정세 판단이다.
이 보고에서는 이전 노무현 정부 시절의 북한 위협 평가를 크게 수정했다. 북한이 지상군 위협을 크게 증강해 2020년이 되어도 유독 지상군 전력에서만 우리가 크게 열세라는 게 핵심 기조였다. 북한이 전방 제대를 3단계에서 2단계로 통합했으며, 후방의 경보병사단을 전방 사단에 통합한 것은 기동성과 신속한 공격력을 크게 강화한다는 신호였다. 이 분석에 따라 8만명으로 추정되던 북한 특수부대가 16만명으로 대폭 늘어났고, 이것은 훗날 20만명으로 상향 평가된다. 110만명에 달하는 북한군 전력의 80%가 전방으로 전진 배치돼 아무런 경고 없이 현 위치에서 전쟁을 도발할 수 있는 대규모 지상전이 임박했다는 게 전장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었다. 이런 평가가 훗날 육군의 아파치 공격 헬기, 신형 포병 전력 도입의 명분으로 작용하면서 국방 예산이 다시 육군의 전면전 대비 요구에 치중하게 되었다.
육군의 병력 감축을 유보하면서 대규모 지상군 기동군단을 창설하고, 반면 해군의 이지스함과 공군의 글로벌호크 무인정찰기와 같은 신형 전력 도입은 지연되는 게 그 요체였다. 대규모 지상전에 대한 새로운 준비에 치중하는 것이 바로 육군 엘리트 장군들의 신념으로 정착되면서 그들이 마치 안보 전문가인 것처럼 포장되었다.
청와대의 이상희 국방장관 견제
전장에 대한 이런 국방부와 합참의 인식이 보고서로 청와대에 제출된 시점은 2008년 6월이었다. 그러나 청와대는 군의 순수성을 의심했다. 군이 현대화된 다양한 위협에 대비하지 못하고 전통으로 회귀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김태효 청와대 대외전략비서관은 노골적으로 “군이 국익(國益)이 아니라 군익(軍益)을 추구하고 있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상희 장관은 8월1일 각 군 참모총장을 포함한 대장급 지휘관회의를 열어 국방 예산이 부족한 상황을 설명하고 현존 지상군 위협에 대비하는 국방 개혁 기본계획안에 협조할 것을 요구했다. 8시간 계속된 회의 끝에 이 장관은 총장들에게 폭탄주를 돌리며 각 군의 합의가 원만히 이루어진 것을 자축했다. 국방부는 8월14일로 예정된 이명박 대통령의 계룡대 방문을 앞두고 새로운 개혁안에 대한 재가를 받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 장관의 행태가 석연치 않다고 판단한 청와대는 국방부장관의 보고를 차단하고, 8월 말 국방 개혁안에 대한 검토회의를 개최한다. 김성한 외교안보수석 주재로 열린 청와대 검토회의에서 국방연구원(KIDA) 백승주 박사(현 국방부 차관)는 “이 계획이 과연 미래를 대비하는 계획인지 의심스럽다. 2008년 8월의 정지된 시계를 보고 만든 계획 아닌가”라고 반문하며 그 수구적 속성을 통렬히 지적했다. 당시 백 박사는 “참여정부 당시 ‘국방 개혁 2020’에 대해 ‘더 이상 손볼 것이 없는 퍼펙트한 작품’이라고 했던 이상희 합참의장이 장관이 되자 말이 바뀌는 것 자체가 신뢰하기 어려운 행태였다”고 필자에게 털어놓았다. 더군다나 김경덕 국방부 개혁실장 역시 합참 전투발전부장으로 ‘국방 개혁 2020’을 만든 당사자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국방부는 자기가 만든 개혁이 잘못되었다고 스스로 말을 바꾸는 것 아니냐는 반문이다. 결국 이상희 식 국방 개혁안은 청와대에 의해 거부되었다. 더 나아가 청와대는 개혁안을 만든 핵심 브레인으로 김 실장을 지목해 각종 신상 털기를 통해 경질하겠다는 의도를 명확히 했다. 얼마 후 그는 국방개혁실장에서 물러난다.
사실 지상에서 남북한의 군사 대치는 장기간 교착 상태였다. 특히 1990년대에 전방 비무장지대 일대에서의 북한군 도발은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 전방 3사단에서 야간에 북한군이 우리 군에 의해 1개 분대 정도의 병력이 궤멸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를 겪고 난 이후 지상에서의 북한 도발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각종 야간 감시 장비와 우세한 화력으로 무장한 소부대 전투에서 북한군은 더는 우리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북한군은 지상에서의 불리함을 인식하고 우리 군의 현대화된 전투력에 대한 끊임없는 공포에 시달렸다. 그 대신 북한은 전투의 규칙을 변화시키고자 했다. 지상이 아닌 해상에서, 또는 수중에서,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들의 선제공격이 유리한 다른 공간에서 위협을 가하는 쪽으로 전술적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우리 국방부와 합참은 현대 전쟁에 대해 아예 눈과 귀를 꽉 닫은 듯한 행태를 보이면서 마치 노무현 정부 기간 중 “육군이 홀대받았다”는 한풀이를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군 개혁의 이상은 붕괴되고 있었다. 육군은 1군과 3군을 통합하는 새로운 부대 구조조정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그 속셈은 무엇보다 육군 대장 자리가 없어지는 데 대한 저항이었다. 전시작전권이 한국군으로 전환되고 부대 구조가 조정되면 대장 직위인 한미연합사 부사령관과 3군사령관 자리가 없어진다. 합동군사령관 직위를 신설한다고 해도 1개는 줄어드는 것이다. 이걸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전시작전권은 전환되지 않아야 했고, 야전군 사령부도 흔들지 않아야 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사령부 조직을 자꾸 늘려서 자리를 만들어야 남아도는 장군들에게 새로운 보직을 부여할 수 있다. 그래서 인사사령부를 창설하고, 육군사관학교 부교장 자리도 만들고, 합동참모대학도 만들고, 국방어학원도 창설하며, 유해발굴단도 만들어야 했다. 이렇게 육군 조직이 팽창하려면 그 명분은 북한의 지상군 위협뿐이었다.
정치권력과 군사 지도자 사이에서 균열의 조짐이 나타나는 동안 북한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고 내부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었다. 이것이 한반도에는 또 다른 안보 불안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김정일 사망 이후 북한은 5년 내 붕괴될 것”을 확신하는 분위기에 잠긴 청와대는 2009년 벽두부터 한반도가 위기에 직면하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2009년 1월17일 북한의 총참모부가 “대남 전면 대결 태세”를 천명하자, 청와대는 즉각 안보정책조정회의를 개최해 대책을 논의했다. 이에 대한 강경한 무력 대응 차원에서 이상희 국방부장관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서해 북방한계선(NLL)에서 북한군 도발 시 육·해·공 합동의 응징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건의했다. 반면 통일부와 외교부는 북한의 위협에 대해 “무시하자”고 이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좀 더 신중하게 사태를 관망하자”며 이 대통령은 사실상 통일부와 외교부의 손을 들어주었다.
2009년 2월16일자 조선일보 4면.
군사기밀 언론 보도로 북의 전술 변화 초래
그러나 국방부는 물러서지 않았다. 마치 전쟁을 불사하는 듯한 대북 강경책 수립을 시사했고, 각 군 총장들이 경쟁적으로 “대북 응징”을 거론하는 상황이 이어진다. 2월13일 이 장관은 이 대통령을 따로 만나 서해 NLL에서의 북한군 도발에 대응한 군 대비 계획의 핵심 내용을 보고했다. 그런데 그 핵심 내용이 단 3일 만에 언론에 통째로 샜다. 조선일보의 “합참과 해군 등 군 당국은 북한이 NLL에서 다시 도발할 경우 백령도 등에 배치된 K-9 자주포, 해군 4500톤급 구축함·초계함·호위함 등의 76·127㎜ 함포, 공군 F-15K·KF-16 전투기 등 육·해·공 전력을 총동원해 초기에 제압한다는 계획”이라는 2월16일자 보도가 그것이다.
이러한 국방부 계획은 기존의 NLL 등 국지 도발 계획을 넘어선 초강경 대응이었다. 서해 일원의 무력 충돌이 전면전으로 비화되지 않도록 하는 마지막 장치인 ‘비례성의 원칙’, 즉 북이 함정을 내려보내면 우리도 함정을 올려보내고, 북이 포를 쏘면 우리도 포를 쏘는 식으로 대응하는 기존의 원칙이 무너지고, 본격적인 ‘비대칭 국면’이 초래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정부 내에서조차 합의되지 않은 대북 강경 메시지가 조선일보를 통해 북한에 전달된 순간 이제껏 우리가 알고 있던 서해상의 분쟁 양상은 근원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한편 이 신문은 “북한의 도발은 시간문제”라며 북의 도발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했다. 이제껏 서해상의 국지적 충돌은 전면전으로 비화되지 않는다는 남북한의 암묵적 게임의 규칙(비례성의 원칙)이 적용돼 서해 일원이 성공적으로 관리되어왔다. 그러나 이제는 서해상의 작은 충돌이 육·해·공군이 총동원된 전면전으로 얼마든지 비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급격히 증폭시켰다. 아울러 재래식 해군 전력에서 절대 열세를 절감하고 있는 북한으로 하여금 한국 해군에 대한 ‘비대칭전’을 적극 고려하도록 하는 동기를 부여했다. 이런 변화는 불과 1년여 후에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이라는 전대미문의 안보 위기로 이어진다.
조선일보 보도가 나오자 이상희 장관은 격분했다. 기무사에 발설자를 색출하라고 지시한 데 이어, 계룡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기밀은 고위 장성들 계층에서 샌다”고 말했다. 대통령에게 보고한 핵심 기밀이 언론에 보도되는 것 자체가 비정상적이지만, 정부 내에서 통제에 따르지 않는 국방부장관은 위험한 전쟁광인 것처럼 매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무사의 한 간부는 필자에게 “이제껏 진보 언론이 국가안보에 위해 세력이라는 인식이 있었지만, 기실 군사기밀에 대한 보도를 남발하는 보수 언론이 더 문제”라며 “피아가 구분되지 않는 게 언론 환경”이라고 탄식했다. 서해에서 무언가 미묘한 폭력의 파장(波長)이 느껴지는 순간에도 국방부는 지상군 중시와 서해 ‘육·해·공 합동 전력의 전진 배치’라는 기존 방침을 변경하지 않고 예전의 관성대로 국방 태세를 유지했다. 바로 여기서 상상력의 빈곤이 나타났다. 위협은 군사 지도자의 자각 범위 밖에서부터 다가왔다.
2009년 1월17일 북한 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은 남한 정부가 대결을 선택했다면서 “우리의 혁명적 무장력은 그것을 짓부수기 위한 전면 대결 태세에 진입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 연합뉴스
육군 장성 보직 지키는 데만 민감
1950년대의 소련군이 핵미사일 경쟁에서 미국에 밀린 이유는 단순했다. 소련군 수뇌부가 지상전에 숙달된 육군 장군들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동유럽의 대평원에서 지상군 기동 전술을 연마한 그들은 전략 무기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다. 그 결과 1960년대에 와서야 핵미사일을 증강하며 미국과의 군사력 균형을 도모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흐루시초프는 미국에 뼈아픈 굴욕을 감수하며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시켰던 것이다. 언제나 전쟁의 고유한 법칙은 누가 더 혁신적이며 변화에 잘 적응하느냐의 문제로 우열이 결정된다. 당면한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고 좀 더 차분하게 위기를 관리하면서 유리한 게임의 법칙을 개발해내는 자가 진정한 승자가 된다. 진정한 전략가는 혁신가인 셈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초기의 국방 태세를 관찰해보면, 전장에 대한 이 당시 우리나라 군사 엘리트들의 인식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다. 이미 교착 상태에 있는 지상의 전선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하면서 육군 장성들의 보직을 지키는 데만 매우 민감한 국방 정책의 수구성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런 관료적 군대의 허점은 야전에서 전투 준비의 허점으로 곧바로 연결된다. 서해에 북한이 8척의 잠수함을 배치해 수중 전술을 개발한 지 벌써 10여 년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서해에 잠수함 위협은 없다”고 단정하는 합참과 해군, 성능이 낮은 각종 탐지 장비와 노후화된 전력,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전술과 정체된 조직문화 등이 그것이다. 이상하게 북한보다 몇 갑절이나 많은 국방비를 투입하면서도 여전히 대비의 허점을 노출하고 우리의 전술이 북한에 그대로 노출되면서 우리 전투원들은 사지로 내몰렸다. 그러는 동안 장관·총장들은 입으로만 안보를 외쳤다.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그 초강경 발언도 알고 보면 허장성세였다. 이런 국방의 거품이 꺼지는 데는 그로부터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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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軍들의 전쟁] #25. 함장이 폭발 충격으로 실신한 그 시간, 합참의장은 술취해 실신했다
천안함 침몰 때 합참 기능 마비…육·해·공 합동성 논란 현실화
기사입력시간 [1289호] 2014.07.02 (수)
김종대│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봄기운이 완연한 2010년 3월26일. 대전시 유성구 자운대 육군 교육사령부에 모처럼 활기가 돌았다. 교육사 대강당에 별들이 모여든 시각은 오후 1시. 합참이 사상 최초로 개최한다는 전군 ‘합동성 대토론회’가 열리는 시각이다. 대통령 직속의 국방선진화추진위원회 이상우 위원장과 이상의 합참의장, 한민구 육군참모총장, 김성찬 해군참모총장, 이계훈 공군참모총장, 미 합동전력사령부(JFCOM)의 케이츠 후버 부사령관, 그 밖에 연합사·합참 관계자 등 150여 명이 모였다.
먼저 각 군의 조직 이기주의를 척결하고 범군 차원에서 전쟁기획과 작전 수행, 국방의 효율화라는 합동성을 증진하자는 육사 18기 출신 권태영 박사의 기조발제가 있었다.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개혁과 혁신을 외치는 권 박사는 군에서 후배들이 자신을 “진보 사상을 가진 군사 전문가 아니냐”는 따가운 시선으로 바라볼 때마다 마음이 괴로웠다. 그러나 이날 그는 작심하고 한국군의 적폐를 척결하자는 주장을 용기 있게 펼쳐나갔다. 한국군은 변혁의 중간 산물에 불과한 미군의 새로운 개념과 제도를 무분별하게 수입했다. 한국 실정에 맞지도 않는 미군 제도를 서둘러 모방하다가 소화불량에 걸리고, 그 결과 군은 자주적 방위 의지와 개혁의 추진 동력이 소진되면서 이제는 개혁 실패를 당연시하고 피곤증이 만연되어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천안함 함미 인양 작업이 진행된 2010년 4월15일 백령도 해상에서 함미가 크레인에 의해 올려져 바지선에 실려 있다. ⓒ 연합뉴스
“합동성은 결국 군을 ‘물오리’로 만들 것”
그런데 문제는 권 박사의 그 다음 주장이었다. “합동군의 주인을 확실히 세우기 위해 합참의장이 관리하는 합동직위(JSO)를 각 군 본부와 작전사로 대폭 확대하되, 합참의장에게 진급 선발권과 주요 직위 보직권을 부여하는 방법을 고려하자. 프랑스의 경우 합참이 장군 진급 선발권을 행사한다.” 이에 해군과 공군 총장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권 박사의 주장을 자신들의 권한을 침해하는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전력 소요 검증도 합참이 하고, 진급과 보직에 대한 권한도 일부 가져간다면 각 군의 최고 지휘관이요, 전문가라는 총장들은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 되는 셈이다. 이어지는 시간에 자유토론이 벌어지자 김성찬 해군총장이 이 점을 명확히 했다. “군의 전문성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물에서는 상어처럼 싸우고, 땅에서는 호랑이처럼, 공중에서는 독수리처럼 싸우는 군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합참이 모든 걸 다 가져가면 물오리가 된다. 물오리는 물에서 헤엄치며 땅 위에서는 걷고 공중으로 날기도 한다. 그래봤자 오리 아닌가?”
여기서 육군과 해·공군 간의 해묵은 불신과 갈등이 다시 불거진다. 육군은 자신들의 전문성만 전문성이고, 해·공군의 전문성은 전문성이 아니라고 본다. 이상희 전 국방부장관은 각 군 본부에 설치된 전투발전단을 폐지하고, 그 기능을 모두 합쳐 합참의 전력발전본부에서 수행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해·공군의 입장에서는, 결국 말이 국방 개혁이지 합참의장이 사심을 갖고 자신의 파벌이나 만들면서 각 군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려는 ‘권력 의지’가 그 본심 아니냐며 불신한다. 1990년 합참이 발족하고 난 이후부터 시작된 육군의 아주 ‘오래된 음모’를 이제껏 해군과 공군은 국민 여론에 호소하며 분쇄해왔다. 그럴수록 육군은 육군대로 더 집요하게 그 의도를 드러내며 지배 의지를 보였다.
이날 토론회를 실무적으로 준비한 주체는 합참 전력발전본부장이었던 박정이 중장이었다. 한 번의 토론으로 의견 정리가 쉽지 않다는 걸 잘 아는 박 본부장은 토론 이후 예정된 육·해·공군과 한미연합사 3성 장군 이상 직위자들이 참석하는 별도의 만찬과 이튿날 토요일에 각 군 주요 직위자들과의 골프 회동도 준비하고 있었다. 계룡호텔에서의 만찬은 저녁 8시20분에 마무리되었다. 이상의 합참의장은 입구에 서서 나오는 참석자들과 일일이 악수하고 기념품을 나눠주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서울에 올라오지 않고 현장에 남아 후버 부사령관을 영접하고 다음 날 골프 회동까지 마무리하고 올라와야 할 박 본부장은 서울로 올라가고, 그 대신 김기수 합참 전략기획본부장이 남기로 임무가 변경되었다. 이날 두 사람의 우연한 임무 교대는 이후 두 사람의 운명을 정반대로 바꿔놓게 된다. 이날 서해에서 한국전쟁 이후 가장 끔찍한 사건이 벌어질 때, 합참에 누가 있었고 없었는가가 이후 인사에서 영전과 좌천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짧은 만찬 이후에 합참과 연합사 장성들이 헬기를 타고 서울로 이동한 데 반해, 어쩐 일인지 이상의 합참의장은 고속철도로 뒤늦게 이동하기로 계획하고 서대전역으로 향했다. KTX를 타기까지 약 50분 정도의 시간 여유가 있었는데, 바로 이 순간이 이 의장에게는 또 한 번 운명을 가르는 시간이 된다. 그는 서대전역 인근의 한 식당에서 지인을 만나 또 한잔을 했다. 이 한잔은 한국군이 가장 긴박했던 순간에 군사 지휘부를 마비시키는 독배가 되고 말았다.
이 시간, 천안함은 경비구역인 백령도 서방에서 최저 속도로 기동하고 있었다. 밤 9시22분. 무언가 수중에서 큰 충격의 파장이 천안함의 정중앙을 예리하게 갈랐다. 그 충격으로 함장실에서 전술지휘통제시스템을 통해 다음 날 작전을 구상하던 최원일 함장은 큰 폭발음과 함께 충격을 받아 몸이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천안함이 두 동강 나던 바로 그 시각에 이 의장은 KTX에 몸을 실었다. 최 함장이 충격으로 정신을 잃는 그 순간에 이 의장은 음주로 의식을 잃었다. 이후 이 의장은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서해에서 우리 함정이 침몰하고 있다”는 합참 지휘통제실장의 전화를 받지 못했다. 전화가 오지 않아서 못 받은 것이 아니고, 전화가 왔지만 받을 수가 없었다.
무언가 긴박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던 상황에서 해상과 지상에서는 미묘한 군사적 반응들이 있었다. 적어도 이 순간에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분석은 불가능했다. 오직 동물적인 감각과 직관에 의한 상황 통제라는 긴박한 요구가 우선시되었다. 합참의장은 기차에서 내린 밤 10시11분쯤에야 군함이 침몰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합참이 청와대 위기상황실로 사건을 보고한 지 26분이 지난 시점이고, 청와대가 안보관계장관회의 소집을 결정한 지도 11분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청와대가 이렇게 신속히 반응한 것은 합참의 한 해군 중령이 청와대의 해군 대령에게 “지금 지휘계통으로 초계함 침몰에 대한 보고가 되고 있으니 선배님도 확인하십시오”라고 전화로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늦은 저녁을 먹다가 전화를 받은 해군 대령이 숟가락을 놓고 상황실로 달려가 이 사실을 외교안보수석을 비롯한 청와대 주요 직위자들에게 전파했다. 이로 인해 김태영 국방부장관보다도 청와대가 먼저 조치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2010년 5월4일 이명박 대통령이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를 주재하면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헤드테이블 왼쪽부터 이계훈 공군참모총장, 한민구 육군참모총장, 김태영 국방부장관, 이 대통령, 이상의 합참의장, 김성찬 해군참모총장, 황의돈 연합사 부사령관. ⓒ 연합뉴스
합참 작전 라인에 육군본부 출신 일색
여기서 이날 오후에 있었던 합동성 대토론회가 제기한 문제의 핵심, 즉 육군과 해군의 서로 다른 전문성이 작동했다. 해군 장교의 경우 “군함이 침몰한다”는 사실은 그 어떤 사태보다도 최고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군함은 해외에 나가서도 치외법권이 통하는 하나의 ‘영토’로 인식된다. 그러므로 영토가 침몰하는 상황은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비상사태로 보고되어야 한다. 해군의 시스템은 상하 단계를 불문하고 군사 정보를 전 제대가 동시에 공유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신속한 상황 전파가 그 특징이다. 반면 육군은 어떤 불확실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상급자의 질문에 대비해 더 확인해보고 상부에 보고하는 문화다. 여기에다 군함이 침몰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감이 떨어지는 그들은 과장이 부장에게, 부장이 본부장에게, 본부장이 의장에게 보고하는 단계를 거치면서 지체 현상이 발생한다. 더구나 2함대사령부로부터 합참에 올라온 보고는 ‘50퍼센트 침수되었다’ ‘60퍼센트 침수되었다’라는 상황 보고가 전부였다. 당시 등장한 단어는 ‘파공’과 ‘침수’뿐이었고, 어뢰 공격이라는 말은 없었다. 만약 당시 합참 작전 라인에 해군 장성이 있었다면, 어뢰 공격이라는 말이 없더라도 비상사태로 인식했을 것이다. 하지만 육군 일색인 합참의 조직문화는 어뢰 공격이라는 말이 없었기 때문에 비상사태가 아닌 단순한 사고로 봤다. 바로 이런 전문성의 차이는 이날 토론회에서 김성찬 해군총장이 “합참은 물오리가 될 것”이라고 경고한 그대로 현실이 되고 말았다.
사건 당시 합참 작전 라인의 인적 구성을 보면, 이상의 합참의장과 황중선 합동작전본부장(중장), 김학주 작전참모부장(소장), 양철호 작전처장(준장), 박철희 합동작전과장(대령)으로 직위자 전원이 육사 출신 선후배로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이 중에서 합참의 업무를 아는 경험자로는 황 본부장이 유일하고, 의장을 포함한 나머지는 합참에 처음 근무하는 순수 육군본부 출신들이었다. 물론 이들이 무능한 군인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군단과 사단 작전에 정통한 지상군 작전 전문가들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합참에는 합참 업무에 맞는 전문가 양성과 보직 관리의 원칙이 있다. 이런 원칙이 무시되고 합동 작전의 전문가들이 해당 직위에 보직되어 있지 못한 것은 결과적으로 큰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노무현 정부 군 인맥에서 이명박 정부 군 인맥으로 대거 바뀐 것도 한 요인이었다. 실제 이 무렵 한민구 육군총장은 “과거 정부에서 작전의 요직에 근무했던 사람들에 대한 출처가 불분명한 인사 참고 자료를 읽어보면, 도저히 진급을 시킬 수 없는 부정적인 내용들로 가득 차 있어 어떤 총장이라도 이들을 진급시키려면 상당한 심적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탄한 바 있다. 군 내부의 전문성이 전 정부 사람이냐, 현 정부 사람이냐는 줄 서기 문화, 파벌문화라는 정치논리로 인해 붕괴되고 있었다. 결국 개혁이란 건 없고 권력에 대한 인간의 의지와 탐욕이 공적인 가치와 군인의 책임성을 잠식하는 상황이었다.
경찰은 이날 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인천해양경찰청에 갑호 비상령을, 전국 경찰에는 을호 비상령을 하달했다. 더 황당한 것은 당시 해외 출장 중이던 마잉주 타이완 총통이 천안함 사건을 보고받고 밤 11시쯤 화상회의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소집하고 즉시 전 타이완군에 비상령을 하달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 합참은 이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다가 그 다음 날인 3월27일 새벽 3시30분에야 ‘군 대비 태세 강화’라는 가장 낮은 조치를 하달했다. 이 시간에도 이 의장은 의장실에서 취침을 하다가 새벽 5시가 넘어서야 이미 하달된 대비 태세 강화 지시에 사후 재가를 했다. 이후 천안함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국방부와 합참은 일종의 공황 상태를 겪게 된다. 모든 것이 혼란이었다. 천안함 민군합동조사단 조사본부장인 윤종성 육군 소장은 “그 당시 국방부와 합참, 민군합조단은 극심한 혼란이었다”며 “그 모든 문제의 근원은 전문성을 고려하지 않은 부적절한 인사에서 비롯되었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합참이 ‘제2의 육군본부’가 되어버린 데서 오는 재앙을 만난 셈이다. 이 점은 역대 정권 중 오직 이명박 정부에서만 나타난 아주 특이한 현상이었다. 그 전후 어느 정권에서도 이런 행태가 재현된 바 없었다.
국방부·합참·민군합조단 극심한 혼란
김태영 국방부장관 역시 이런 행태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을 터다. 노무현 정부 당시 합참 작전처장을 지낸 이양구 소장은 육군 개혁실장으로, 작전처장 출신 김종배 소장은 부사관학교장으로, 역시 작전처장 출신인 신원식 소장은 국방부 정책차장으로, 합동작전과장 출신인 김왕경 준장은 교육사령부로, 역시 합동작전과장 출신인 장경석 준장은 3사관학교로, 한결같이 좌천되거나 현행 작전과 무관한 분야의 보직으로 이동했다. 모두 이전 정부의 사람으로 이명박 정부에서 배제의 대상이 된 인물들이다. 이런 인사 관행은 훗날 역시 노무현 정부에서 합참의장을 역임한 김관진 국방부장관이 부임해서야 비로소 정상화된다. 그러나 뒤늦게 소외된 이들을 구제하는 인사를 단행하자 이번에는 그 후배 기수들이 “고참들 구제 인사만 한다”며 김관진 장관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합참이 흔들리자 김태영 국방부장관은 국방부에 있던 신원식 소장을 합참에 보내 업무를 지원하도록 한다. 합참의장 역할을 김태영 장관이 다 떠맡고 나서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런 김 장관마저도 천안함 침몰을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몰아가려는 해군의 행태에 불신을 표시했다. 김 장관이 윤종성 조사본부장에게 “해군 말을 너무 믿지 말라”며 같은 육군 후배를 통해 해군을 견제하는 의도를 내비친 것이다. 이때 원세훈 국정원장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북한의 특이 동향이 없었다”며 천안함 사건에 북한이 개입했을 개연성이 작다는 요지의 조언을 이미 하고 있던 상황이다. 결국 어뢰 공격을 주장하는 해군이 정부 내에서 점차 고립되는 양상으로 천안함 직후 국면이 전개되었다. 그랬던 김태영 장관이 북한의 어뢰 공격 쪽으로 생각이 기운 것은 4월 초에 수도통합병원에 가서 천안함 생존자를 면담하고 난 이후였다. 무언가 상황이 급반전되려는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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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軍들의 전쟁] #26. “항공모함 보내달랄 땐 언제고…” 게이츠 국방장관 격분
G20 앞두고 오락가락한 MB 정부 김태영 국방장관, 줄타기하다 미·중 동시 반발 불러
기사입력시간 [1290호] 2014.07.09 (수)
김종대│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2010년 6월 하순의 월요일 아침. 집무실에 출근한 월터 샤프 한미연합사령관은 부관에게 벌컥 화를 냈다. 7월6일로 예정된 신임 합참의장 취임식을 전후한 자신의 일정이 온통 만찬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떠나는 이상의 전 합참의장 환송 만찬, 새로 오는 한민구 합참의장 취임식과 환영 만찬, 떠나는 황의돈 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환송 만찬, 새로 오는 정승조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취임식과 환영 만찬 등 온통 이·취임 행사들이었다. 한 주 내내 밥 먹고 건배하다가 시간이 다 갈 판이었다. 2008년 6월 부임한 월터 샤프가 겪은 한국 합참의장은 김태영·이상의 대장에 이어 한민구 대장까지 2년 동안 벌써 세 사람째다. 한국 합참의장은 한미연합사령관과 군사 문제를 협의하는 주요 파트너다. 이렇게 자주 바뀌는 한국 합참의장을 상대하는 일은 언제나 버거웠다. 말귀를 알아들을 만하면 얼굴이 바뀌기 때문이다. 자신의 휘하에 있는 한국 측 최고 선임자인 한미연합사 부사령관도 이성출 대장에 이어 황의돈·정승조 대장까지 세 번째다. 지난 2년간 월터 샤프와 군사 문제를 긴밀히 협의하는 한국 측 핵심 요직에 모두 6명의 한국군 대장이 거쳐간 것이다. 사람 좋은 월터 샤프도 정신없이 바뀌는 한국의 대장 인사에 “이게 무슨 후진국형 인사란 말이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통상 미국에서는 합참의장 취임이 6개월 전부터 내정된 인사를 중심으로 치밀하게 준비된다. 그런데 지난 2년간 한국의 군 인사를 보면 새로운 군사 정책에 대한 아무런 비전과 개념도 준비하지 않은 장성이 하루아침에 합참의장으로,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으로 등장했다가, 조금 업무를 알만 하면 또 갑자기 사라져버린다. 한국의 국내법에 의하더라도 합참의장과 각 군 참모총장은 법으로 2년 임기를 보장하는 직위지만 1년, 심지어 6개월 단위로 대장들이 마구 교체된다는 것은 아무래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왼쪽부터 2010년 당시 로버트 게이츠 미국 국방장관, 김태영 국방장관, 량광례 중국 국방부장. ⓒ 연합뉴스·사진공동취재단
일주일 내내 만찬 일정에 샤프 사령관 분통
한국군 수뇌부에 대해 월터 샤프는 오래전부터 불만이 있었다. 합참에서 의장에게 보고되는 주요 보고서가 생산되는 단위는 13명의 부장, 즉 소장급 장성들이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에 대비해 합참 기능이 강화된 이후, 합참의장이 부장급에서 생산되는 보고서를 제대로 읽고 컨트롤하려면 하루에 잠을 4시간 자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런데도 한국군 대장들은 아예 그런 개념조차 없이 매일 사람이 바뀌고 이·취임식을 반복하는 ‘인사 군대’ ‘의전 군대’였다. 월터 샤프는 이동 중에도 차 안에서 노트북을 펴놓고 이메일을 통해 업무를 처리한다. 작은 시간이라도 쪼개서 효율성을 높이지 않으면 사령관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판이었다. 그런데 한 주를 온통 만찬에 허비해야 한다는 데 제대로 짜증이 난 월터 샤프는 마침 이날이 김태영 국방부장관과 회동이 예정돼 있다는 사실에 속으로 ‘잘됐다’고 여기며 중요한 현안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2010년 5월20일 국방부 민군합동조사단은 천안함이 북한 잠수정의 중어뢰에 의해 폭침당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5월24일에는 국방·통일·외교부 장관이 대북 제재를 강화하는 특별조치를 발표했다. 이 대북 조치에는, 전방에서 확성기를 동원한 대북 심리전을 재개하고, 미국 항공모함이 동원되는 서해 한·미 연합 해상 훈련을 실시하며, 제주해협에 북한 선박 통과를 불허하는 등 지난 노무현 정부 때의 남북 군사 협력 합의 사항을 대부분 파기하는 것으로 그 방향이 설정되어 있었다. 이날 오후 김태영 장관을 만난 월터 샤프 한미연합사령관은 대북 심리전 재개에 따른 우려를 우선 제기했다. 그는 남북한 간 합의로 중단된 심리전이 재개된다는 데 대해 “첫째, 왜 하는지 모르겠다. 둘째, 재개해서 효과가 뭔지 모르겠다. 셋째, 북한이 반발하고 도발했을 때 대비 계획이 뭔지 모르겠다”며 이 조치에 강한 의문을 표시했다. 이에 김 장관에게서 뜻밖의 반응이 나왔다. “전방에 확성기를 설치한 것만으로도 이미 대북 심리전의 효과를 거두었다”며 “굳이 방송은 안 해도 된다”고 말해 샤프 사령관의 우려를 간단히 수긍해버렸다. 샤프는 더 황당해졌다. 그러면 하지도 않을 대북 심리전 방송을 위해 확성기를 설치하느라 예산을 허비하고 국민들에게 발표한 것은 또 뭔가. 이날 두 사람의 회동에서는 말만 무성했던 서해상에서의 한·미 연합 대잠 훈련에 대해서는 일정조차 협의되지 못했다.
“항모 보내달라”는 김 장관 부탁 단호히 거절
우리 국방부와 합참은 점점 초조해졌다. 이미 국민들에게 미국 항공모함을 불러들여 연합 해상 훈련을 하겠다고 발표했는데, 미국은 전혀 항공모함을 보내줄 의사가 없었다. 한국 정부가 북한에 대해 무언가 강경한 군사 정책을 구사하려고 하면, 한반도의 분쟁에 연루될 것을 우려한 미국은 선뜻 응하지 않고 갖은 구실을 대며 빠져나가려 했다. 연합사령부 작전처장을 역임하고 있던 김왕경 육군 준장은 거의 매일 “항공모함을 보내주겠다는 미국 측의 약속을 받아내라”는 국방부와 합참의 독촉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미국 국방부와 태평양사령부에 온갖 연줄을 다 동원해 항공모함을 모셔오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미국 국방부는 “1년 스케줄이 다 계획된 항모를 갑자기 보내줄 수 없다”는 표면적인 이유를 내세웠지만, 사실 항모 전단 전개에 소요되는 예산 자체도 미국에는 큰 부담이었다. 원자력 항공모함은 출동을 위해 시동을 거는 데만 1억 달러 이상이 소요된다.
2010년 7월26일 동해상에서 열린 한·미 연합 훈련에서 미군 전투기가 해군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 호에서 이륙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G20 이유로 한국에 문전박대 당한 미 항모
그러나 펜타곤(미국 국방부)의 고민은 다른 데 있었다. 6월 초, 미국과 중국의 긴밀한 외교적 협조로 이란 핵 개발에 따른 유엔 안보리의 이란 제재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만일 서해에 항모를 보낸다면 중국과의 공조 분위기를 훼손하게 될 상황이었다. 이런 이유로 6월 말 싱가포르 샹그릴라 안보 대화 때 김태영 장관이 직접 부탁했음에도 로버트 게이츠 미국 국방장관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런데 6월26일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항모 전개를 직접 부탁하자 무심코 오바마가 이를 수락해버렸다. 이에 게이츠는 “이러면 내가 국방장관을 그만두겠다”며 화를 내며 반발하는 상황이 이어진다. 우여곡절 끝에 7월에 항모는 서해가 아닌 동해에 출동하는 것으로 전개된다. 특별한 대북 메시지도 없는 형식적인 훈련이었다. 펜타곤은 남북한 간의 군사적 긴장에 가급적 연루되지 않으면서, 대중국 관계를 기본으로 동북아 정세를 관리하는 강대국 정치에 충실하고자 했다. 한·미동맹은 어디까지나 그 아래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8월부터 우리나라 서해를 둘러싸고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국제 정세의 급반전이 일어났다. 중국이 7월 말부터 남중국해에서 서해에 이르는 해양교통로에 대해 ‘핵심 이익’을 언급하며 “배타적 주권을 행사하겠다”고 공언하자 미국의 매파 현실주의자들이 이를 중대한 도발로 간주하고 일제히 “중국 견제”를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갑자기 워싱턴 정가에서 중국과의 공조 분위기가 중국을 견제하는 방향으로 반전되던 8월 초, 미국 국방부는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서해에서 추가로 실시하며, 조지 워싱턴 항공모함을 참가시킬 것”이라고 발표해버렸다. 이로 인해 서해에 미국 항공모함이 들어올 것을 예상한 중국이 연일 관영 매체를 통해 이를 극렬히 비판하면서 미·중 양국 간에 새로운 군사적 긴장이 조성되었는데, 그 무대가 바로 서해였다. 미국은 “서해는 공해이므로 우리는 그곳에서 군사 훈련을 할 자유가 있다”고 했고, 중국은 “서해는 중국의 근해이므로 미국 항모가 들어와 위협하면 군사적으로 대응하겠다”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 무렵 중국은 미국 항공모함을 서해로 끌어들이는 한국에 대해서도 ‘괘씸죄’를 적용해 김태영 장관의 중국 방문을 전격적으로 취소시킨다. 이로 인해 중국을 방문해 량광례(梁光烈) 국방부장과 천안함 침몰 사건 이후의 양국 간 군사 협력 방안 등을 협의하려던 김 장관의 방중 계획이 전격 취소된다. 천안함 사건으로 조성된 서해에서의 남북한 간 대결 국면은 어느새 뒷전으로 밀려나고, 미·중 강대국 간의 대결이 그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그러자 이제껏 목소리를 높이던 남북한은 일제히 입을 다물고 강대국 눈치나 보는 궁색한 상황으로 전락했다. 한편 중국 정부는 “만일 서해에 항공모함이 들어오면 후진타오 주석은 11월 서울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에도 참석하지 않겠다”고 한국 정부에 최후통첩을 보내왔다.
이런 상황이 김왕경 한미연합사 작전처장을 또 다른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제 겨우 미국 항공모함이 서해에 들어오도록 일정을 조율하는 시점이 되니까, 이제껏 “항모를 모셔오라”고 닦달하던 국방부와 합참이 “미국 항모가 서해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라”고 거꾸로 압박하고 나선 것이다. 할 수 없이 “항모 훈련을 연기하자”는 김 처장의 통보에 미국 국방부는 “너희가 그렇게 보내달라고 해서 가겠다는데 왜 이제 와서 오지 말라 하느냐”며 화를 냈다. 김 처장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G20 정상회의에 모든 것을 올인하고 있던 이명박 대통령은 서해에서 한·미 연합 훈련만 중지시킨 것이 아니었다. 매월 수행하던 서해 백령도와 연평도 일대에서의 우리 해병대의 해상 사격 훈련도 모두 중지시켰다. G20 정상회의 성사를 위해 북한이나 중국을 자극하는 그 어떤 군사행동도 삼가라는 지침이었다. 이 순간 북한의 추가 도발을 억제하기 위한 5·24 조치는 사실상 증발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히려 천안함 사건 이전보다 서해의 군사 대비 태세는 더 후퇴했다고 할 수 있다. 8월에 우리 정부는 “한·미 연합 훈련을 10월로 연기하자”고 미국에 통보했고, 미국은 이를 수락했다. 그러나 결정적 사건은 10월19일에 일어났다.
연평도 북한 해안부대, 또 하나의 결전 준비
이날 11시쯤 게이츠 미국 국방장관이 “항모 조지 워싱턴호를 10월20일 서해로 보내겠다”고 김태영 장관에게 전화로 통보했으나, 김 장관은 “청와대와 협의해야 한다”며 이를 유보시켰다. 마침 그날은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이 이 대통령에게 무기 수출을 활성화하는 ‘국방산업 G7 전략’을 보고하는 날이었다. 이 회의에 김 장관이 배석하지 못하고 미국 항모 진입에 따른 대책을 청와대 안보수석실과 협의하는 긴박한 상황이 벌어졌다. 청와대 지시를 받은 김 장관이 오후가 되자마자 다시 게이츠에게 전화를 해 “항모 진입을 연기해달라”고 요청하자 게이츠는 차갑게 반응했다. “한국이 보내달라는 걸 보내주는데 거부하니까 나도 백악관과 이 문제를 협의하겠다”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날 오후에 한국과 미국은 G20 정상회의가 종료되는 11월 말로 또다시 연합 훈련 시기를 늦추었다. 이미 조지 워싱턴호는 요코스카 항에서 서해로 출항해 들어오고 있던 상황이었다. 9월에도 서해로 출항하던 조지 워싱턴호가 한국 정부의 서해 진입 반대로 필리핀의 마닐라 항으로 항로를 변경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 또 한국 정부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한 이 항모는 재차 마닐라 항으로 항로를 변경했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필리핀은 정국에 파란이 일었다. 필리핀은 비핵화를 선언한 나라인데 연이어 두 달째 미국의 원자력 항모가 들어오자 야당 의원들이 일제히 베니그노 노이노이 아키노 대통령에게 “미국의 항모가 자꾸 들어오는 이유가 뭐냐? 미국의 핵무기를 몰래 반입하려는 음모 아니냐”며 거세게 추궁한 것이다. 그러나 그 까닭을 알 길이 없는 아키노 대통령의 답변이 시원치 않자 야당이 이를 문제 삼으며 정국 자체가 거의 마비되다시피 했다.
미국과 중국으로부터 다 같이 욕을 먹는 참으로 기구한 운명에 놓인 김태영 국방부장관은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대북 군사 대비 태세 강화라는 군사적 요구에 부응하기도 어렵고, 정치권력의 요구에 마냥 부응하기도 어려운 현실에서 국가 안보 정책의 중심이 크게 흔들리는 이런 상황은 지정학적 딜레마에 처한 중견국 국방장관이 처한 비운이자 운명이기도 했다. 이런 그의 궁색한 처지와 우리 국방부의 혼란스러운 행태는 결국 11월 말 연평도에서 일어난 더 큰 비극으로 연결된다. G20 정상회의가 종료되자마자 국방부가 이제껏 미뤄두었던 서해 해상 사격훈련을 재개하는 등 그간의 밀린 숙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
통상 10월에 진행되던 호국훈련도 11월 하순으로 조정되었고, 이때는 마침 조지 워싱턴호가 서해에 들어올 예정이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합리적인 군사적 결정처럼 보였다. 북한은 미국과 중국의 강경한 군사 대치 국면을 활용해 더욱 대담한 대남 군사행동을 결행할 절호의 호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천안함 사건이 일어나고 유엔 안보리에 이 문제가 회부되었을 때도 중국은 대북한 제재 결의안의 통과에 반대했으며, 이후 미국에 맞서 더욱 결연한 군사행동을 과시했다. 북한은 중국이 자신의 든든한 배후임을 확신했다. 때마침 한민구 합참의장이 이끄는 합참은 군사적 충돌 가능성이 한껏 커진 서해에서 마치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연례적인 군사훈련을 계획하고 실행하고자 했다. 이러는 동안 연평도 일원의 북한 해안부대들은 또 하나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국군의 군사행동에서 일말의 명분이라도 주어진다면 이제껏 비축된 힘을 한꺼번에 쏟아낼 수 있는 기회가 올 터였다. 그리고 이것은 천안함에 이어 한국군에 또 한 번의 쓰라린 패전을 예고하는 전주곡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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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軍들의 전쟁] #27. “한국군이 어떻게 이라크군보다 못하단 말인가”
한미연합사 정보작전부장, 연평도 포격 때 합참 장군들 무능 질타
기사입력시간 [1291호] 2014.07.16 (수)
김종대│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2010년 11월11일부터 이틀간 서울에서 G20 정상회의가 개최됐다.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이명박 정부는 서해에서 한미연합훈련을 취소한 데 이어 매달 실시하던 해상 포사격훈련도 일절 하지 않았다. 매년 10월 실시하던 호국훈련도 정상회의가 끝난 이후인 11월22일부터 30일까지 실시하는 것으로 계획이 변경됐다. 정상회의를 하는 동안 북한에서는 그 어떤 군사적 특이 동향도 없었다. 마치 이명박 대통령의 G20 정상회담에 대한 애착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북한은 조용했다.
11월20일 집무실에서 국정원의 특별보고서 한 건을 집어든 김인종 청와대 경호처장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김정일 유고 가능성’에 대한 비밀 보고서였다. 어쩌면 북한이 저토록 조용한 것은 북한 내부에서 무언가 중요한 사건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국정원은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이미 평양이 프랑스 의사에게 보낸 김정일 뇌 사진을 입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11월 초, 김숙 국정원 1차장이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해 “천안함 사건에 대한 북한의 사과 문제를 6자회담과 연계시키지 않겠다”는 이 대통령의 입장을 전달하고 돌아온 터였다. 은밀하게 남북정상회담이 추진되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한반도에 큰 태풍이 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명박 대통령이 북한의 서해 연평도 포격 도발과 관련해 2010년 11월23일 저녁 합동참모본부 지휘통제실을 방문해 현황 보고를 받은 뒤 김태영 국방부장관(왼쪽), 한민구 합참의장과 함께 나오고 있다. ⓒ 연합뉴스
11월16일 합참은 23일에 연평도 남서쪽 수역에서 해상사격훈련을 한다고 발표하고, 이를 국립 해양조사연구원의 항행경보란에 공지한 상황이었다. 서해에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 북한은 사격훈련 전날부터 국제 상선망을 통해 우리에게 “사격훈련을 감행하면 군사적 대응을 하겠다”는 경고를 보내왔다. 훈련 당일인 23일 아침에도 북한은 전화통지문을 통해 “군사훈련을 중지하라”는 통지문을 또 보내왔다.
이날 아침 9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한민구 합참의장은 해병 연평부대장인 이상도 대령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만일의 사태에 만전을 기해 대비하라는 지시였다. 남북 비밀 대화가 은밀히 추진되는 상황에서 북한과 대화를 해야 하는지, 아니면 결전을 불사하는 강경한 군사적 행동을 보여주어야 할지, 모든 게 애매한 상황이었다. 이명박 정부의 핵심 세력은 대부분 북한이 곧 붕괴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 마당에 북한과의 대화는 결국 망하게 되어 있는 북한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남한에 대해 군사적 위협을 가하지 못하게 하려는 일종의 ‘관리’였다.
‘화력 도발’ 경고 무시한 합참작전본부장
합참 작전본부는 사격이 임박함에 따라 육·해·공군 작전부대를 차례로 호출하며 점검했다. 공군 작전사령부에서는 박병진 대령이 화면에 나와 있었다. “공군!”을 호출하자 박 대령은 “예, 공대공(空對空) 대비하겠습니다”라고 응답했다. 이 말은 중앙방공통제소(MCRC)를 통해 북한의 항공기 위협에 대비한 초계 임무를 수행하겠다는 뜻이었다. 이에 합참은 “대비 잘하고 합참의 상황을 작전사령관께 즉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이 대화가 오가던 시각에 서해 일원에서 북한의 수호이 전투기(미그기) 몇 대가 출격했다는 경보가 발령돼 공군은 즉시 초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F-15K 3대를 출격시켜 서해 쪽으로 비행하도록 했다. 우리 전투기가 서해에 나타나자 북한 전투기는 곧바로 귀환했다. 통상 북한의 항공기 위협에 대비하는 공대공 임무는 3분 대기, 5분 대기, 15분 대기와 같은 즉각 출격 태세다. 만일 북한 전투기가 나타나면 공군 작전사령부는 합참에 보고하지 않고 먼저 전투기를 출격시킨다. 그런데 분 단위 출격 대기와 같은 공대공 임무와 달리 지상의 목표물을 타격하는 공대지 임무는 2시간, 3시간 대기로 임무 수행에 시간이 소요된다.
오전 10시15분부터 연평도 서남쪽 방향, 즉 북한의 해안 쪽으로 사정거리 2~3㎞의 벌컨포 사격이 시작되었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는 사정거리 13㎞의 105㎜ 견인포 사격이 이어졌다. 북한 쪽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나타났다. 국방부 정보본부의 정보참모부는 11시15분에 ‘긴급 수시 첩보’로 “접적 지역 일대에 화력 도발 및 NLL(북방한계선) 근접 무력시위 비행 가능성이 있어 화력·공중 도발 징후를 집중 감시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11시30분에도 “북한 해안에서 탄약 차량 움직임을 포착했고 레이더와 필수적인 통신망이 활동하고 있으며, 지휘관이 현장에서 지휘하고 있다”고 상황을 설명한 후 “접적 해역 일대에 (북의) 화력 도발 가능성”을 경고하는 긴급 수시 첩보를 청와대·국방장관·합참의장에게 배포했다.
문제는 합참 작전본부였다. 작전본부장인 이홍기 육군 중장을 비롯한 대다수 작전본부 요원들은 “북이 포를 쏜다면 바다에 쏘기밖에 더 하겠느냐”며 별다른 추가 조치를 하지 않았다. 오후 1시쯤부터 연평부대는 사정거리 40㎞의 K9 자주포 사격을 시작했다. 연평 앞바다에 굉음과 함께 일제히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이 정도 화력이면 방향만 약간 바꿔도 해주의 4군단사령부를 포격할 수 있는 위력이었다. 그로부터 90분여가 지난 2시34분쯤. 우리의 사격훈련이 종료된 지 1시간쯤 지나 북한은 76.2㎜ 평사포, 122㎜ 대구경포, 130㎜ 대구경포로 연평도 군부대 및 인근 민가를 향해 무차별로 포탄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연평도 전체가 검은 연기에 휩싸이며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2010년 7월9일 존 맥도널드 한미연합사 정보작전부장이 연합사를 방문한 해사 66기 생도들과 오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정전협정 체결 이래 남북한 군이 최초로 지상 포격전을 벌인 이날, 우리 정부의 위기관리 시스템은 붕괴되었다. 먼저 청와대는 이 대통령 주재로 긴급 안보장관회의를 소집했으나, 김태영 국방부장관이 국회에 출석해 있던 탓에 이날 교전이 거의 다 끝난 시점에야 청와대로 들어왔다. 게다가 해병 연평부대가 대응사격을 하던 오후 3시가 넘은 시각에도 군사적 대응보다는 “우리 군이 왜 연평도에서 사격훈련을 했느냐”며 주로 우리 측 원인을 따지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이 순간 김인종 경호처장은 순간적으로 북한 내부에 김정일 유고와 같은 급변 사태가 발생해 북한이 주민의 관심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도발한 게 아닌가라는 의심을 품었다. 그는 위기관리센터 요원들에게 “지상의 군사분계선 상황도 점검하라”고 독려했다. 한민구 합참의장은 이 대통령이 호출하자 화면에 등장했다. 이 대통령은 “단호하게 대응하되 확전하지 말라”는 지시를 했다. 어느 정도 상황이 진정되는가 싶던 3시11분쯤 북한이 두 번째로 포격을 가해왔다. 다시 이 대통령과 한 의장이 화상회의로 통화를 했다. 여기서도 전투기 출격과 같은 추가적인 군사적 대응은 논의되지 않았다. 훗날 이 대통령이 “전투기를 동원하여 응징하려고 했는데 군이 반대해서 하지 못했다”고 밝힌 것과 달리, 한 의장은 지난 6월29일 있었던 국방부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전투기 동원과 같은 지시는 없었다”고 이를 정면으로 부인했다.
한민구 합참의장 “전투기 동원 지시 없었다”
한편 이날 오후 3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안보관계장관회의가 개최되고 있던 청와대 지하 벙커에 들어온 김희정 청와대 대변인은 김인종 경호처장이 휴전선의 안정적 통제에 관심을 두는 모습이 마치 “확전되지 않도록 하라”는 이 대통령의 지침 때문인 것 같아 보였다. 누군가 김 대변인에게 대통령의 첫 지시가 “확전 방지”였음을 메모로 확인해주었다. 김 대변인이 대통령 국방비서관인 김병기 육군 준장에게 이 메모를 보여주며 “맞느냐”고 문의하자, 김 비서관은 몇몇 구절을 손질까지 해주었다. 김 대변인은 이 메모대로 춘추관에 대기 중이던 기자들에게 브리핑을 하도록 지시했다. 교전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3시40분쯤 모든 방송에 이 대통령의 이 메시지가 보도되기 시작했다. 바로 이 시각 한민구 의장은 청와대와 상의 없이 자신의 직권으로 “공대지 무장을 한 F-15K 전투기를 현장으로 보내 대기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여기서 또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지시를 받은 공군작전사령부가 즉시 공대지용 F-15K를 출격시켜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 절차가 복잡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 공군 조직 절차의 속성이 그대로 드러났다. 먼저 원거리에서 공대지 타격이 가능하려면 냉장고에 진공포장으로 보관 중이던 SLAM-ER 미사일을 반출해 포장지를 뜯어야 한다. 한 번 포장을 뜯으면 20억원을 호가하는 이 미사일의 수명은 크게 단축된다. 그 다음으로 전투기에 탑재하려면 차량으로 운반해야 하는데, 첨단 정밀 무기를 실은 차량은 최저 속도로 기동해야 한다. 그 다음엔 미사일에 타격할 표적의 좌표를 입력해야 한다. 이러는 동안 전투기 조종사는 표적을 브리핑 받아야 한다. 그 다음에 출격하는데, 여기까지 걸리는 총 시간이 2시간이다. 1000억원짜리 공중 자산에 20억원짜리 미사일 두 발을 탑재하고 뜨는 데 이렇게 절차가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렇게 해서 서해에 이 전투기를 띄웠다면, 그 다음엔 또 어떻게 될까.
먼저 표적이 정확히 확보되어야 한다. 이날 적의 포격 원점은 무도와 개머리 두 군데였기 때문에 이건 해결되었다. 두 번째는 표적을 정확히 타격해야 한다. 이건 자신이 없다. SLAM-ER 미사일은 적의 전략 목표를 타격하는 첨단 미사일이지, 소규모 해안포 진지를 타격하기에는 지나치게 큰 무기일뿐더러 맞힌다는 보장도 없었다. 만일 이런 고가 장비를 투입하고도 정확히 타격하지 못할 경우 우리의 심리적 패배는 매우 클 수밖에 없다. 세 번째는 타격의 결과 확인인데, 이 역시 시간이 소요될뿐더러 다양한 정찰 감시 자산이 필요하다. 네 번째는 인근에 있는 북한의 다른 대공 미사일, 예컨대 SA-2, SA-5가 반격할 수 있고 추가 도발이 있을 수도 있는데 여기에도 대비해야 한다. 이 네 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함부로 전투기를 동원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제 당시 연평부대의 대응 포격 역시 대부분 북한의 진지를 타격하지 못하고 인근 논과 밭에 떨어졌다. 연평부대는 평소 북한의 포진지를 식별해 좌표를 자주포에 입력하고 있지만, 문제는 풍향·풍속과 같은 기상 변수를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작전상의 이유로 합참의장이 전투기를 동원하는 데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면, 그때 이명박 대통령은 “전투기 타격은 유엔사령부 정전 시 교전규칙에 의해 미군의 협조를 받아야 투입할 수 있다”는 엉뚱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 교전규칙에 의하면 “표적 선정과 항공 작전은 미 7공군 사령관 소관이므로 그 협조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우리 대통령 마음대로 때리라 말라 지시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설명이었다. 이튿날 이 대통령이 잔뜩 화가 나서 “교전규칙을 개정하라”고 지시하는 등 논란이 확대되자 정작 놀란 당사자는 월터 샤프 한미연합사령관이었다. 한민구 합참의장으로부터도 “국지전에서 전투기로 타격하는 것이 교전규칙 사항인가, 아니면 한국 정부가 자위권 차원에서 독단으로 결정할 일인가”에 대한 질의서가 날아왔다. 이미 김태영 국방부장관은 “교전규칙 사항으로 우리 독단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국회에도 이를 보고한 상태였다. 그러나 샤프 사령관은 11월30일께 우리 국방부에 답신을 보내 “한국 정부가 자위권 차원에서 결정할 일”이라고 했다. 이 답변서가 도착하기 이전까지 합참의 장군들은 자위권이냐, 교전규칙이냐로 양분되어 논쟁을 하고 있었다. 쉽사리 결론이 내려지지 않자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은 “어디에 해당되는지 국제법 학자에게 연구 용역을 발주하기로 했다”는 희대의 브리핑을 한다.
2010년 11월23일 북한의 포격으로 연평도가 화염에 휩싸여 있다. ⓒ 옹진군청 제공
샤프, “국가 주권의 핵심인 자위권 차원”
누구도 전쟁하는 방법을 몰랐다. 오랜 기간 미국에 안보의 모든 걸 의존하면서 우리 스스로 작전을 결심할 수 있는 군사 주권의 실체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많은 국민이 의아해하는 것은 “왜 한국군 장성들은 작전권을 단독으로 행사하는 걸 거부하는가” 하는 문제다. 장교라면 모름지기 자신의 군대를 직접 지휘하고 통제하기를 원하지 외국 군대의 휘하에 들어가길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우리 군의 장성들은 미군이 한국군에 대해 작전을 통제해주길 바란다.
교전 다음 날 한미연합사 간부회의에서 연합사 정보작전부장인 존 맥도널드 소장이 불같이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이라크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이다. 이라크의 신생 군대도 자기 목숨이 걸린 상황이 되면 스스로 판단한다. 그런데 어제 합참에서 뭘 해도 되느냐는 전화가 매 시간, 매 분마다 수도 없이 왔다. 어떻게 한국군이 이라크보다 못하단 말인가?” 연평도 사태로 김태영 국방부장관은 경질되었다. 뒤이어 부임한 김관진 국방부장관은 전임 장관의 말을 뒤집고 “전투기로 타격했어야 했다”며 이는 “국가 주권의 핵심인 자위권 차원”이라고 주장했다. 이 말을 들은 한민구 합참의장은 전투기를 출격시키지 않은 데 대한 책임을 지고 김 장관에게 사의를 표명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과연 한민구 합참의장이 부적절하게 판단했느냐에 대해 선뜻 “그렇다”라고 답할 수는 없다. 이날 이 대통령 지침과 한 의장의 작전 목표는 “북한의 추가적 도발 억제”에 있었다. 그렇다면 구태여 전투기를 동원해 상대방의 영토를 타격한다는 것은 전면전을 불사한 최고 강도의 위기 대응을 의미한다. 그런 전쟁 불사의 강경 논리는 우리에게 초래될 국가적 재앙의 결과를 예상하고 또 감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전쟁 상황을 당시에 우리가 감수한다는 것은 실제로 가능하지도 않았고 또 바람직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그냥 당하고 있어야만 하는 것인가. 우리 군의 고민은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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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軍들의 전쟁] #28. “청와대 입김에 구애받지 않겠다” 육참총장, 설화로 옷 벗어
MB 정권 시절 황의돈 총장, 권력에 찍혀 불명예 전역
기사입력시간 [1292호] 2014.07.23 (수)
김종대│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2010년 천안함 사건 여파로 청와대에 신설된 대통령 안보특보는 사실 역할이 불분명했다. 기껏해야 위기관리센터 업무를 관장하며 대통령에게 월 1회 정례보고를 하는 것이 눈에 띄는 전부였다. 정부 외교안보 정책 결정에 개입하거나 발언권을 행사할 여지 자체가 없었다. 6월에 이 자리가 신설돼 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인 이희원 예비역 육군대장이 임명된 배경에는 경북 상주 출신인 류우익 전 대통령실장, 김종태 전 기무사령관과 동향이라는 지역 논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청와대에서 외교안보 실세로 알려진 김태효 대외전략비서관은 이 특보가 부임할 무렵 언론에 “안보특보는 외교안보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자리가 아니다”라며 견제성 발언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청와대는 안보특보에게 사무실 운영비도 지원하지 않아 합동참모본부(합참)에서 매월 안보특보실 운영비 100만원을 상납하는 기형적 행태가 빚어졌다. 게다가 합참 장교가 안보특보의 실무를 지원하는 이상한 구조였다. 그런 이 특보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이명박 대통령이 2010년 12월16일 청와대에서 김상기 육군참모총장의 보직신고를 받고 삼정도에 수치를 달아주고 있다. 오른쪽은 이홍기 3군사령관으로 두 사람 모두 TK 출신이다. ⓒ 연합뉴스
예전에 검증된 사안 다시 들춰 총장 옷 벗겨
정권 실세의 후원을 받은 이희원 특보는 경질된 김태영 국방부장관에 이은 국방부장관 ‘0순위’나 다름없었다. 연평도 포격 사건이 벌어진 지 나흘째 되던 11월26일, 이명박 대통령은 전사한 고(故) 서정우 하사와 문광욱 일병의 빈소가 마련된 성남 국군수도병원으로 가고 있었다. 이동 중에 이 대통령은 YTN을 통해 차기 국방부장관으로 “이희원 특보 유력”이라는 뉴스를 접했다. 자신이 아직 재가하지도 않은 국방부장관 인사가 보도되는 데 대해 이 대통령은 적잖이 언짢은 기분을 느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문을 마치고 돌아온 이 대통령은 언론이 온통 이 특보를 거론하는 데 대해 “도대체 내가 모르는 국방부장관 인선을 누가 언론에 발표했느냐”며 참모들을 심하게 질책했다.
이 특보에 대한 자체 예비청문회를 진행하던 정진석 청와대 정무수석은 “연평도 포격 사건 당시 ‘확전 방지’ 논란에 연루된 이 특보는 국방부장관으로서 부적격하다”는 의견을 이 대통령에게 개진했다. 이 말에 이 대통령은 “내가 직접 사람을 검증하겠다”며 이 특보에 이어 2순위로 추천된 김관진 전 합참의장을 “당장 청와대로 부르라”고 지시했다. 이날 이 대통령은 김 전 의장을 불러 장시간 면담했다. 김관진 후보에 대한 청와대의 예비청문회를 대통령이 직접 한 셈이다. 당시 청와대 핵심 관계자에 의하면 “거의 3시간 만에 김 후보자가 대통령을 만나고 나오면서 전적으로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다”고 이날 분위기를 전했다. 이날 저녁 언론은 김관진 후보자가 장관으로 내정되었다는 소식을 속보로 긴급 타전했다. 이튿날 김관진에 대한 국방부장관 인사청문회 요청서가 발송되었다.
남북한 간에 지상포에 의한 교전이라는 전대미문의 안보 위기를 겪은 이명박 정부는 북한에 대해 강경한 군사정책을 표방하는 새로운 국방부장관을 발탁해 위기 당시 조성된 혼란을 일소하고 군사 대비 태세를 재정비하는 것처럼 보였다. 호남 출신인 김관진 장관의 등용은 군내에 화합과 통합을 도모하는 파격적 인사로 비치기도 했다. 김 장관은 취임하자마자 “당분간 대장 인사는 없다”며 장관 교체로 인한 군 내부의 동요를 진정시키고 전투 준비에 전념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호남 장관 부임으로 예기치 않게 영남 군맥 형성에 적신호가 켜졌다고 인식한 정권은 후속 장군 인사를 강력히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명분이 뚜렷하지 않았다.
그해 12월 초만 하더라도 강원도 출신으로 부임한 지 6개월밖에 되지 않은 황의돈 육군참모총장이 전격 경질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12월9일 조선일보가 갑자기 황 총장이 8년 전 용산 삼각지에 있는 한 빌딩을 매입했던 사실을 들춰내며 ‘부동산 투기를 한 총장 재산 형성 과정의 의혹’을 보도했다. 이미 오래전에 검증이 끝난 사안을 새삼스럽게 보도하면서 조선일보 고위 관계자들은 “우리는 대장 하나쯤은 너끈히 날릴 수 있다”는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 주변을 놀라게 했다.
황의돈 육군참모총장이 2010년 7월22일 국제평화지원단에서 열린 동명부대 7진 환송식에서 격려사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3군 총장 모두 영남 출신으로 채워져
12월13일 저녁 8시30분. 시내 모처의 국방부장관 공관에 황의돈 총장이 들어왔다. 무거운 표정의 황 총장은 김 장관을 면담하면서 용퇴할 의사를 밝히고 담담하게 전역지원서를 제출했다. 12월 초 연말 정기인사에서 “대장급 인사는 없다”고 공언했던 김 장관도 체념한 듯 황 총장의 전역지원서를 접수했다. 조선일보의 보도는 바로 ‘청와대의 뜻’이었다. 그로부터 20분이 지난 8시50분. 이번에는 충청도 출신인 한민구 합참의장이 공관으로 들어왔다. 한 의장은 이미 김 장관이 부임할 무렵에 사의를 표명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대장 인사는 총장 하나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김 장관은 “청와대에서 합참의장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으니 계속 근무하라”며 힘을 실어주었다. 대화를 마치고 한 의장이 공관을 나설 무렵 시각은 저녁 9시30분을 막 넘어서고 있었다. 아무래도 연평도 포격 사건의 책임이라면 한 의장이 경질되는 것이 마땅했으나, 전임 이상의 의장이 천안함 사건에 대한 책임으로 물러난 지 불과 6개월밖에 되지 않은 상황에서 또 합참의장을 교체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14일부터 언론은 “황 총장의 사의를 청와대가 수용했다”는 보도를 내보내기 시작한다. 이어 청와대는 이 대통령의 동지상고 후배인 김상기 3군사령관을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시킨다고 발표했다. 역시 이 대통령 고향 후배인 박종헌 공군참모총장과 김해 출신인 김성찬 해군참모총장과 더불어 육·해·공군 참모총장이 모두 영남으로 채워진 셈이다. 이는 문민 정부가 들어선 김영삼 정부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총장 인사는 15일부터 예정된 군 장성 정기 진급 인사에 대한 국방부 제청 심사를 앞두고 벌어진 일이었다. 당연히 정권의 의도에 따라 장성 진급자에 파란이 일어날 것 같은 조짐 탓에 군 전체가 술렁거렸다.
황의돈 참모총장의 전격 경질은 날조와 음해로 군을 길들이는 후진 독재 국가에서나 있을 법한 정치권력의 횡포였다. 여기에는 육군총장에 대한 청와대의 불편한 심기가 작용했다. 2010년 6월 총장으로 부임하고 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에 황 총장은 육군본부 측근에게 “앞으로 나는 청와대 실세 누구의 입김에 구애받지 않고 인사를 하겠다”는 말을 한 게 화근이 되었다는 설명이 있다. 필자가 접촉한 상당수의 육군 관계자들은 “황 총장이 그런 말을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며 간접적으로 시인했다. 이 말은 뒤이어 “황 총장을 한번 손보겠다”는 청와대의 역풍을 불러온 설화(舌禍)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황 총장은 한 가지 군 인사 개혁 방안에 몰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황 총장 측에 의하면, 북한군은 봄과 여름에 군인들을 영농에 투입해야 하기 때문에 중요한 군사훈련을 주로 겨울에 한다. ‘동계 훈련’을 주축으로 하는 북한군을 마주하는 우리 군은 특히 겨울에 많은 위협에 직면한다. 그런데 우리 군은 주로 연말에, 즉 겨울에 진급과 보직 이동이 활발하다. 결국 북한으로부터 위협이 가장 농후한 시기가 우리 군에는 취약 시기가 된다는 점에서, 황 총장은 겨울에 진급이 되더라도 실제 보직 이동은 몇 개월 후에 하는 방향으로 조정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관진 국방부장관이 취임 이틀째인 2010년 12월5일 서부전선 초소를 방문해 장병들을 격려하고 있다. ⓒ 연합뉴스
‘상주 군맥’ 등 TK 출신들이 득세
이러한 진급과 보직의 시기 조정은 많은 장교에게 반발과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를 빌미로 인사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총장을 공격하고, 총장 관련 사실을 상부에 유포시키는 등 육군 내부의 불만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황 총장 경질로 인한 혼란의 아수라장은 그 다음 순간 분노로 바뀌었다. 대다수 군 관계자들은 황 총장의 자격 여부를 떠나, 언론을 통해 명예를 짓밟고 군복을 벗게 만드는 그 방법의 치졸함에 경악했다. 당시 한 장교는 필자에게 이렇게 토로했다.
“천안함 사건 이후 지난 9개월 동안 집에 들어간 날이 거의 없다. 죽을 고생을 하면서도 군이 욕만 바가지로 먹는 데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도 견디기 힘든데, 이제는 이런 식으로 군을 짓밟는 데 대해 허탈감까지 느낀다. 이렇게 총장을 자를 거라면 애초 임명은 왜 했나. 당시에는 이런 문제가 없었나. 대다수 군인들은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를 짐작하고 있다. 무언가 사심으로 가득 찬 세력의 불순한 장난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육군참모총장은 임충빈(18개월), 한민구(9개월), 황의돈(6개월) 등 군 인사법에서 정한 2년 임기를 채운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대장 인사가 자주 발생하니까 연쇄적으로 각 군 사령관들도 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연이어 교체됐다. 전부가 ‘하다가 말고’ 나가는 사람들뿐이었다. 정권 입장에서 굳이 황 총장이 성에 차지 않는다면, 2011년 정기인사를 통해 교체해도 될 터였다. 그런데 연평도 사건으로 군이 어려운 때에 총장을 교체해야만 하는 비정상적인 행태를 보인 것은 총장을 교체함으로써 군 장성 진급 인사를 정권의 의도대로 하겠다는 것 외에 다른 해석의 여지를 찾기 어려웠다.
후임 3군사령관으로 임명된 이홍기 대장 역시 이명박 정부의 실세 군맥인 경북 상주·김천 출신이다. 여기에다 군 인사정책의 핵심이었던 김용기 인사복지실장, 김명식 청와대 인사비서관도 같은 상주 출신이었다. “야전형을 우대한다”는 이상야릇한 말로 군 인사의 숨겨진 내막을 포장하는 동안 우리 군은 어느새 줄 서기와 특정 지역 편중이라는 암적 병폐에 감염돼가고 있었다.
청와대의 군 인사 개입은 노무현의 유산
청와대의 군 인사 장악은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뿌려진 잘못된 씨앗이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 맺은 결실이었다. 노 대통령 시절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군 인사의 영호남 할당 비율을 제시하는 등 인사에 직접 개입할 조짐을 보이자 남재준 육군총장이 반발하면서 큰 갈등을 빚은 바 있다. 이후 김장수 총장 시절에는 최초로 ‘복수 추천’으로 청와대가 관심 인물에 대해 직접 검증하는 관행이 최초로 생겼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아예 청와대가 장군 진급 부적격자 명단을 만들어 검증을 시도했다. 이 무렵의 군 인사를 보면, 각 군의 진급심사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여한 장성들이 진급이 유력한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네가 진급추천은 되었으나 청와대에서 뒤집힐지 모른다. 청와대에 줄이 있거든 지금부터 잡으라”고 노골적으로 정보를 알려주고 권력에 로비할 것을 권유했다. 이렇게 각 군이 청와대와 진급 예정자 명단을 교류하는 동안 국방부장관은 이 사실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가 나중에 제청 절차를 거치는 과정에서 알게 되지만, 이미 청와대의 보이지 않은 손이 진급에 영향을 미치고 난 다음이었다.
평소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 묵묵히 일해온 많은 장교는 좌절감에 젖었다. 특히 호남 장교들에게는 그 피해의식이 더 가중되었다. 이런 가운데 군의 지휘체계 역시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되었다. 연평도 포격 사건 당시 전투기로 북한의 도발을 응징하는 데 실패했다고 생각한 청와대는 각 군의 협조 관계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육·해·공군의 노력을 단일한 군사 목적에 통합하는 능력, 즉 ‘합동성(Jointness)’이 결여돼 있어 이를 보완하는 국방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국방 개혁에 관해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는 국방선진화추진위원회(위원장 이상우)와 안보총괄점검회의는 김관진 국방부장관에게 군 지휘 구조 개혁을 주문하고, 김 장관은 과거 노태우 정부 시절부터 가져온, 육·해·공군을 통합하는 ‘통합군의 꿈’으로 한 단계 다가가기 위한 전 단계로 군 지휘 구조를 개편하겠다고 했다. 그 핵심은 합참의장이 각 군 총장을 작전지휘하고, 총장은 자기 군에 대한 군정(인사·군수)뿐만 아니라 군령(정보·작전)까지 행사하는 것으로 군 상부 구조가 개편되는 것이었다. 각 군이 자기 군 조직의 속성에 따라 제각기 움직이는 게 아니라 그 노력을 한반도 전구(戰區) 작전의 목적에 집중시키는 이 개혁은 일견 합리성이 있어 보였다. 군정과 군령이 단일한 지휘 계선으로 통합되고 각 군의 작전지휘가 일관성을 갖추는 한국군 대개혁의 출발점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권력이 군을 정치적으로 길들이면서 사심에 가득 찬 인사를 하는 정치군대를 조장할 수 있는 위험한 개혁이기도 했다. 또한 육군이 해군과 공군을 지배하는 통합군으로 가기 위한 전단계의 개혁이라는 권력의 관점으로 볼 때, 이 개혁은 개악에 가까웠다. 이로 인해 이명박 정부 말기, 군 전체를 극심한 혼란으로 몰고 가는 재앙이 일어날 조짐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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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軍들의 전쟁] #29. “군 인사에 머리가 5개 있다” 장경욱 기무사령관, 김기춘에 보고
격분한 김관진 장관, 장 사령관 등 기무사 서열 1~3위 한꺼번에 목 날려
기사입력시간 [1293호] 2014.07.30 (수)
김종대│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국가정보원에서 고위 간부를 지낸 한 인사는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절 외교안보 분야 가정교사였다. 박근혜 의원을 옆에서 지켜본 이 인사는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을 통해 박 의원이 외교안보 분야에서 이명박(MB) 대통령의 오락가락하는 행태에 사뭇 비판적임을 알게 되었다. 2010년 5월 천안함 사건에 대한 민군합동조사단의 “북한 중어뢰에 의한 천안함 폭침” 발표에 대해서도 박 의원은 “저런 발표를 어떻게 국민이 믿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그 직후 필자를 만난 이 관계자는 “박 의원을 만나 이야기해보니 천안함 정부 발표를 믿지 않더라”는 뜻밖의 말을 전했다. 이 말에 필자도 크게 놀랐다.
박근혜정부에서 부활한 ‘노무현 사람들’
이상하게도 박근혜 대선 후보 캠프에는 이명박 대통령의 안보정책에 매우 비판적인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김병관 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의 경우, 천안함 사건에 대한 정부 발표가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태효 청와대 대외전략비서관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나가 보니 김태영 장관 후임의 국방부장관으로 부임할 의사를 묻는 사실상의 장관 후보자 면접이었다. 이때 김병관 전 부사령관은 “이 정부와 뜻이 맞지 않는다”며 고사했다. 이는 김 전 부사령관의 진심이었다. 아무래도 MB 정부에서는 국방에 대한 자신의 열정과 철학을 구현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2013년 4월26일 박근혜 대통령이 주재한 긴급 외교안보장관회의에 참석한 김장수 국가안보실장, 허태열 비서실장, 남재준 국정원장, 류길재 통일부장관, 윤병세 외교부장관, 김관진 국방부장관 (왼쪽 두 번째부터 시계 방향). ⓒ 연합뉴스
남재준 전 육군참모총장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훗날 그가 박근혜정부의 첫 번째 국정원장이 된 이후에도, “인간성으로 따지자면 이명박보다 노무현이 훨씬 나은 사람”이라는 말로 측근을 놀라게 했다. 자신과 그토록 갈등을 겪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뜻밖에 호의적인 발언을 한 것이다. 정통 군사 엘리트들은 군에 갔다 오지 않은 MB의 안보 리더십에 많은 의문을 가졌다. 그건 MB 정부 당시 군의 요직에 있는 장군들도 마찬가지였다. 최근 발간된 월간 ‘신동아’에는 천안함 사건 전후에 당시 합참의 최고위층이 MB와 전화로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왜 자신이 당시 작전을 지휘하면서 대통령을 불신하게 되었는지를 상세히 폭로하는 증언이 나왔다.
이 밖에도 박근혜 후보 캠프 출신인 윤병세 현 외교부장관이나 류길재 현 통일부장관 등도 MB의 대북 정책인 ‘비핵 개방 3000’에 몹시 비판적인 인물들이었다. 굳이 이 두 장관의 성향을 따지자면, 이명박 정부보다 노무현 정부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일까. 박근혜정부의 외교안보팀은 ‘노무현 청산’이 아닌 ‘이명박 청산’이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노무현의 부활’이란 성격을 낳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남재준과 박흥렬, 국방부장관이던 김장수, 합참의장이던 김관진 등 노무현 정부 핵심 군 요직 인사들이 박근혜정부 첫 내각 안보 분야의 요직을 모두 휩쓸었다. 2013년 3월 청와대 첫 안보실장으로 부임한 김장수는 임명되자마자 장관 시절의 부관(육사 47기 출신)을 청와대 안보실의 중요 직위에 임명했다. 또한 육군참모차장 황인무 중장과 장혁 국방부 정책기획국장 등도 김 실장의 비서 및 보좌관으로 근무했던 최측근이었다.
남재준 국정원장 역시 부임 직후 군 출신 등용과 관련해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MB 정부에서 임명돼 3개월째 일하고 있던 국정원장 국방보좌관인 아무개 준장을 군으로 돌려보내고, 남 원장이 노무현 정부 시절 총장을 지낼 때 수석 부관을 역임했고 이제는 군복을 벗을 처지인 ㄱ 대령을 대신 기용했다. 국정원의 파격적인 인사 교체에 대해 육군본부는 “인사 관행에 어긋난다”며 항의했으나, 국정원은 “당신들이 ㄱ 대령을 진급시키지 않으려면 더 이상 말하지 말라”며 일축했다. 이 파문이 잦아들 무렵 남 원장은 자신의 오랜 측근인 군 통신장교 출신 김규석 예비역 소장을 국정원 3차장에 기용하는 또 한 번의 파격에 이어, 국정원 내부 살림을 담당하는 총무국장과 특보를 과거 자신의 부하들로 채웠다.
김관진 장관, 장경욱 사령관 보고서에 격분
군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육사 출신 유력자들이 핵심 요직을 장악함에 따라 군 인사에 대한 일선 장교들의 인사에 관한 불안은 더욱 고조되었다. 이 여론을 최초로 포착한 당사자는 장경욱 기무사령관이었다. 남재준 원장의 지원을 받은 그가 기무사령관으로 발탁되면서, 야전 장교들의 여론을 수렴해 작성한 보고서가 청와대에 제출된 때는 군 정기인사를 앞둔 2013년 8월이었다.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제출된 이 보고서에는 청와대 안보실장과 경호실장, 국정원장, 국방부장관, 육군총장 등을 지칭해 “군 인사를 관리하는 5개의 머리가 있다”는 야전 장교들의 여론이 가감 없이 기록돼 있었다. 장 기무사령관 측근의 증언에 따르면, 기무사는 “인사에 대한 야전 장교들의 불안 여론을 수렴한 후 이를 구체적으로 검증하여 보고서를 작성한 것”이라고 했다. 그만큼 보고서는 “박근혜정부의 첫 번째 군 인사를 성공적으로 관리하려는 의도에서 있는 그대로 사실만을 적시하였다”는 주장이다. 이 보고서에는 김장수 안보실장은 과거 측근, 박흥렬 경호실장은 부산고 후배, 남재준 국정원장은 과거 육군본부 측근, 김관진 국방부장관은 독일 육사 출신 후배를 각별히 챙긴다는 구체적 행태까지 적시되어 있었다.
소장 계급의 기무사령관이 그 직속상관이자 군 선배들을 비판적으로 기술한 보고서인 데다, 비판의 대상자인 장관과 안보실장을 경유하지 않고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직접 제출된 것은 나름대로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의 발로라고 이해될 수도 있었다. 문제는 이 보고서를 받은 김기춘 실장이 김장수·박흥렬 실장에게 “참고하라”고 건네주면서 시작되었다. 보고서를 본 이들은 당연히 격분했다. 그 다음으로 보고서 내용을 전달받은 김관진 국방부장관은 기무사령관이 남재준 국정원장과 연결돼 자신을 견제하려는 것으로 여기고 더 격분했다. 보고서에는 김 장관이 독일 육사 출신 후배인 건설업자 ㄴ 예비역 중령과의 사적인 관계까지 거론하고 있었다. 김 장관은 야인 시절에 ㄴ 예비역 중령 후원으로 미국에 건너가 유력 정치인과 교분을 쌓으며 한·미동맹을 나름대로 관리해왔다. 김 장관이 국방부장관이 된 이후에 ㄴ 예비역 중령은 기무사 이전 공사, 연평도 진지 공사를 수주한 바 있다. 이것까지 기무사가 문제로 본 것이다.
2013년 10월28일 국회 법사위 국감에서 이재수 신임 기무사령관이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국방부장관과 기무사령관, 끊임없는 갈등
10월25일, 김관진 장관은 장경욱 기무사령관의 중장 진급을 탈락시키고, 기무사령관직에서 전격 경질했다. 더불어 기무사의 핵심인 국방부 기무부대장(100기무부대장), 기무사 2부장, 참모장 등 주요 보직자까지 모두 교체해버렸다. 기무사 서열 1·2·3위 모두 목이 날아간 것이다. 기무사 창설 이래 초유의 사건이었다. 그 다음 달 열린 국회 국방위에서 야당이 이를 문제 삼자 김 장관은 “장 전 사령관의 여러 가지 능력이나 자질 등이 기무사를 개혁하고 발전시킬 만하지 못하다는 평가가 있어 교체했다”며 장 전 사령관을 ‘무자격자’로 몰아붙였다. 이에 경질된 장 전 사령관이 그 다음 날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4월 인사 때 김 장관의 인사 절차와 방식에 대한 군 내부 불만과 비판 여론을 (청와대에) 여러 차례 보고했었다”며 자신에 대한 경질은 그로 인한 ‘보복성 인사’라고 받아쳤다. 더불어 “이런 식으로 교체하는 것은 다분히 감정적이고 인격 모독적”이라며 김 장관의 자질을 문제 삼는 발언을 했다.
두 사람의 논쟁에서 극명한 시각 차이가 드러났다. 김 장관은 기무사령관이 중요한 군 관련 보고를 장관인 자신을 경유하지 않고 청와대에 직보한 것은 ‘사실상의 항명’이라고 주장하는 데 반해, 장 전 사령관은 “장관을 견제하는 것은 기무사령관의 임무”라며 장관을 경유하지 않고 국군통수권을 보좌하는 자리가 기무사령관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사실 이러한 두 주장은 매우 뿌리 깊은 논쟁의 한 갈래이다. 청와대에 직접 보고서를 제출하는 막강한 권한의 기무사령부지만 법적으로는 엄연히 장관의 지휘통제를 받는 국방부 직속 기관이다.
기무사가 장관의 지휘를 받는 법적인 지위와 청와대와 직거래하는 현실에서의 지위는 다르게 운영되어왔다는 점은 이 논란을 쉽사리 마무리할 수 없는 한국군의 독특하고 애매한 측면이었다. 이런 이중적인 지위로 인해 예전에도 기무사와 장관실이 종종 마찰을 빚은 적이 있다. 조영길 국방부장관 시절인 노무현 정부에서의 송영근 기무사령관이 바로 그랬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기무사령관이 청와대에 직보한 사항이 있으면 청와대에서 돌아오는 길에 장관실에 들러 그 사실을 알려주는 것”으로 조용히 절충된 바 있다.
그런데 박근혜정부 출범 이후 7개월 만에 이 문제가 원만하게 조정되지 못하고 ‘기무사 집단 학살’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극단적인 양상으로 흐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는 점이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여기에는 고지식하고 직설적인 장경욱 전 사령관의 성격도 한 이유로 거론되고 있다. 그를 아는 많은 지인은 “그 친구는 정치 감각이라는 걸 따로 갖추려고 하지 않는 단순한 성격으로, 오직 임무 외에 다른 걸 고려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정치 감각이 부족하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그게 6개월 만에 물러날 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될까. 그 속에는 “권력과 적당히 타협할 줄 아는 것”이 바로 그 ‘정치 감각’이라는 의미가 숨어 있기도 하다. 그런데 경질된 이후에도 장 전 사령관은 이 점을 결코 인정하지 못했다.
기무사의 인사 참사를 보면서 군 관계자들이 제기한 또 하나의 의문은 장 전 사령관을 발탁하는 데 후원자였던 남재준 원장이 왜 이 사태에 개입해 장 전 사령관을 지켜주지 못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이미 진급 적기가 한참 경과된 자신의 측근인 국정원장 국방보좌관을 준장으로 진급시키기 위해 육군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한 ‘전과’ 탓이다. 이 때문에 후배 군 장교들로부터 위신이 추락한 남 원장이 발언권을 행사하기엔 궁색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2013년 4월23일 박근혜 대통령이 군 장성 보직 및 진급신고에서 장경욱 기무사령관의 삼정도에 수치를 달아주고 있다. ⓒ 뉴시스
박지만의 37기 동기생들의 ‘누나회’ 논란
그러나 정권 차원에서는 군사 권력의 또 다른 설계도가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이명박 대통령에게는 ‘육사 13기’의 ‘형님’(이상득)이 있고,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육사 37기’의 ‘동생’(박지만)이 있다. MB는 이상득 전 의원의 육사 동기이자 과거 군 최대 사조직 ‘하나회’의 맏형으로 불린 이종구 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국방부장관을 추전받았고, 그 결과 2008년 3월에 이 전 장관과 전의이씨(全義李氏) 종친인 이상희 전 합참의장이 장관으로 임용되었다. 박 대통령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은 다름 아닌 하나회를 만든 장본인이다. 게다가 박근혜정부 임기 중에는 동생 박지만씨의 육사 37기 동기들이 군 수뇌부로 진출하는 시대로서, 이 37기가 바로 하나회의 마지막 기수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육사 37기는 하나회의 변종으로서 박지만씨를 매개로 한 집합이 성립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를 가리켜 일각에서는 ‘누나회’라고 이름 붙여 부르기도 했다. 박 대통령이 군 출신을 중용하는 이유가 북한 3차 핵실험에 대한 안보 중시 국정 기조 때문이라지만, 개발독재 시절을 주도한 군 출신의 애국심과 충성심, 높은 효율성과 조직력을 고려했기 때문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그 점에서 육사 37기는 차기 국방권력을 장악할 핵심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는데, 이런 흐름은 장경욱 전 사령관 경질 이후 더욱 확연하게 드러났다.
후임 기무사령관으로 임명된 육사 37기 출신 이재수 중장은 군내에서 박지만씨와 가장 절친한 인사로 알려져 있다. 한편 정기인사에서는 전인범 특전사령관, 신원식 합참 작전본부장, 조보근 국방 정보본부장과 함께, 2012년 10월 22사단 ‘노크 귀순’ 사건 당시 사단장이었던 엄기학 군단장 등 중장급 지휘관 중 8명이 육사 37기생으로 채워졌다. 통상 다른 기수가 5~6명 정도 중장으로 진급하는 관례에 비춰볼 때 두드러진 약진이라고 할 수 있다. 군 주변에서는 “지금의 분위기라면 올해 하반기에 대장 진급자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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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軍들의 전쟁] #30. 남재준과 김장수, 무인기와 함께 추락하다
간첩 증거 조작 위기 국면에서 ‘무인기 사건’ 모호하게 처리한 ‘비정무적’ 태도에 청와대 불만
기사입력시간 [1294호] 2014.07.30 (수)
김종대│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이명박 정부에서 박근혜정부로 전환되는 권력 교체기에 국가정보기관의 대선 개입 문제가 정치적 현안으로 불거졌다. 이것이 국가안보를 위한 것인지, 정권안보를 위한 것인지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다수의 엘리트 요원을 동원해 인터넷에 수많은 댓글을 게시하는 정보기관의 여론 조작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이는 북한의 대남 심리전에 대비하기 위한 행동이고, 국내 종북 세력을 식별하기 위한 비밀공작의 일환이라는 게 국정원과 국방부의 해명이었다. 북한에 대한 심리전의 일환이기 때문에, 설령 국내 정치 개입이라는 비도덕적인 요인이 일부 포함되어 있더라도 어느 정도 용인해줘야 한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적의 실체가 더 뚜렷하게 드러나야 했다. 북한의 대남 선전·선동을 겨냥한 대응이라고 하지만, 국내 인터넷 공간에서 활동하는 북한 공작원이나 그 거점을 적발한 사례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그저 “북한이 개입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형체도 없고 실체도 없는 적과 싸우다 보니, 정작 그 정체가 드러난 것은 북한의 공작원이나 공작 부서가 아니라 우리 정보기관이었다.
지난 4월21일 김기춘 비서실장(오른쪽)과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이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장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참으로 기이한 것은 남과 북이 사이버 심리전을 진행하면 할수록 북한의 정체는 점점 더 베일에 가려지고, 우리 정보기관만 그 정체가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는 전략적 실패로 나아간다는 사실이다. 비록 남과 북의 체제 차이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우리의 안보 전략에서 심각한 결함이자 무능력이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애국적인 전위의식이라는 전략가들의 특권도 크게 위협을 받게 되고, 정보기관의 국내 정치 개입도 법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위기로 내몰리게 된다.
무인기 항공사진 놓고 청와대와 국정원 갈등
올해 3~4월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은 우리 안보와 정치에 또 다른 도전이었다. 3월5일 중국의 국정원 협조자인 김 아무개씨(61세)가 네 장의 유서에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씨의 간첩 혐의를 입증하는 중국 측 1개의 문서는 국정원의 요구로 자신이 조작했음을 시인하는 내용을 남기고 자살을 시도했다. 김씨는 유서에서 국정원을 ‘국조원(국가조작원)’이라고 부르며 “국정원을 개혁해달라”고 말했다. 이후 ‘간첩 사건 증거 조작 의혹’ 사건 수사에서 국정원이 직접 조작에 가담했던 사실이 드러나자 남재준 국정원장은 큰 위기에 내몰렸다.
사태가 국정원에 불리하게 전개될 무렵인 3월24일 또 미묘한 사건이 발생했다. 경기도 파주에 일제 캐논 카메라가 부착된 무인비행기가 추락한 것이다. 즉시 국군 정보사, 기무사, 국정원, 경찰이 참여하는 지역 합동심문조(합심조)가 이를 조사해 “대공 용의점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각자 상부에 보고했다. 성능이 조잡한 소형 무인기가 위협이 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합심조의 간사 기관인 기무사 요원은 국정원 요원의 동의를 받고 만장일치로 대공 용의점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3월28일에 국정원이 간사 기관이 된 중앙 합심조가 무인기를 수거해 갔다. 그리고 사흘 후인 31일, 백령도에 같은 유형의 무인기가 또 추락했다. 이때부터는 기무사와 정보사가 조사 내용을 전혀 모른 채 국정원이 조사 내용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4월3일 조선일보 1면에는 무인기에서 촬영한 사진이라며 청와대 전경이 찍힌 항공사진 한 장이 대문짝만 하게 실렸다. 이후 여론은 “북한 무인기가 강남 고층 건물 사이를 비행하며 우리 사생활까지 엿본다” “무인기에 생화학무기를 탑재하면 서울에 심각한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며 무인기를 ‘심각한 위협’으로 몰고 갔다. 사실 조선일보에 실린 항공사진은 구글 위성 영상에 비해 품질이 조악한 것으로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심리적 효과는 매우 컸다. 정작 이 사진이 보도된 데 대해 큰 충격을 받은 당사자는 국방부였다. 바로 전날인 2일 국방부 김민석 대변인은 기자단에 “무인기에서 촬영한 사진은 절대 공개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사진이 공개되면 북한에 자신들의 정보활동 성과를 보고하는 꼴이 되기 때문에 이적 행위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 국방부도 감쪽같이 모르게 국정원에서만 분석되고 있었던 사진이 통째로 언론에 누출되었다는 건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군다나 김관진 국방부장관은 사진이 공개된 시점까지도 국정원에서 분석한 무인기 관련 정보에 대해 아무런 보고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대북 군사 정보를 총괄하는 국방부 정보본부 역시 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더 뜻밖의 일이 있었다.
지난 4월15일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이 국가정보원에서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서류 조작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한 후 고개를 숙이고 있다. ⓒ 연합뉴스
기무사령관의 질책에 정보사 요원들 반발
그 시각, 남재준 원장 역시 조선일보의 보도에 크게 당혹해했던 것이다. 남 원장 측근은 필자에게 “조선일보가 사진을 게재한 것을 남 원장은 국정원에 대한 노골적 협박이라고 본다”라고 설명했다. 언론이 국정원을 길들이면서 대북정책을 주도하려는 의도가 느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극비 정보인 무인기 사진을 조선일보에 제공한 것은 남 원장의 지시에 따라 이뤄진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항상 정치에 부당하게 개입한다는 정치적 논란의 중심에 선 남 원장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도덕적 정당성을 갖추려고 꽤나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매월 국정원장의 판공비를 직접 반납한 것 또한 그런 강박관념의 표현 중 하나였다. “법에서 정한 월급 외에는 한 푼도 받지 않겠다”며 현금성 판공비 수천만 원을 모두 반납하며 청빈한 생활을 고집했다. 결론적으로 남 원장은 사진을 언론에 누출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누가 이를 제공했을까? 이 대목에서 청와대와 국정원 간의 미묘한 갈등이 드러난다.
무인기에 관한 대처가 미흡했다는 비난에 휩싸인 기무사 역시 크게 당황했다. 이재수 기무사령관은 초동 대처에 미흡했다는 이유로 요원을 질책하며 “조선일보에 사진이 보도된 경위를 수사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국군 정보사 요원들로부터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정보사는 이미 올해 북한의 무인기 출몰을 포착하고 이에 대한 기술 분석까지 마친 상태였다. 동해와 서해 일원에서 발견된 무인기는 육상 기지에서 정찰용으로 활용하기에는 성능이 크게 미흡하고, 다만 잠수함이나 공작선에서 사용할 수 있는 해상용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 정보사의 결론이었다.
지난 4월11일 김종성 UAD 체계개발단장이 북한 추정 무인기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무인기에 탑재된 부품과 카메라 제원 등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국정원 안에 청와대와 ‘직거래’ 멤버 있어”
이미 전방과 연안 지역에서 북한 무인기가 수거된 사례는 20건이 넘었고, 그 대부분은 폐기된 상황이었다. 이런 분석 결과를 여러 번 상부에 보고했는데도, 기무사령관은 마치 정보기관이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고 보고도 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고 있는 데 대해 반발한 것이다.
한편 기무사는 사진의 유출자로 서천호 국정원 2차장을 의심하고 있었다. 4월2일 합심조에서 사진을 분석하던 국정원 요원이 “사진을 가져오라”는 서 차장의 지시를 받은 다음 날 조선일보에 그 사진이 게재됐기 때문이다. 국가안보와 도덕의 경계가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확인하고도 기무사는 조사를 더 이상 진행하지 않은 채 사건을 흐지부지 마무리했다.
무언가 안보 권력의 재편이 예고되고 있었다.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과 김장수 안보실장의 사이가 벌어진 것도 바로 이 무인기 사건 때문이었다. 무인기 사건에 대해 국정원과 국방부가 손발이 맞지 않은 채 허둥댄 것과 관련해 “김장수 안보실장의 모호한 태도가 문제라는 게 김기춘 비서실장의 판단이었다”고 안보실 관계자가 필자에게 설명했다. 5월의 김장수 실장 경질을 놓고 일각에서는 세월호 참사에 대해 “청와대는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라고 발언한 것을 질책하는 의미라는 관측이 대두됐다. 그러나 7월에 열린 국회 세월호 특위에 출석한 김기춘 실장 역시 김장수 실장과 똑같이 “청와대는 컨트롤타워가 아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발언은 김장수 실장의 경질 이유가 될 수 없는 셈이다. 바로 무인기 사건을 처리하는 김장수 실장의 ‘비정무적 태도’가 문제였다. 간첩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마당에 북한의 4차 핵실험 가능성이든, 무인기 문제든 안보 위기와 관련된 뭔가를 부각시켜야 했는데 안보실이 타이밍을 제때 맞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세월호’와 직접 연관성 없는 남·김 전격 경질
4월14일 간첩 사건 증거 조작 의혹 수사 중간발표가 나온 후 국정원 2차장이 경질되었다. 이날 3분에 걸친 남재준 원장의 대국민 사과 성명의 후반부에는 “북한의 4차 핵실험과 무인기로 조성된 엄중한 안보 국면”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도 무인기 문제에 대한 언급은 남 원장의 의도가 아니었다. 청와대의 의지였다. 이에 대한 또 다른 관계자의 설명은 이렇다. “남 원장을 비롯한 국정원 내 군 출신 인사들은 무인기 문제를 언급할 의도가 없었다. 그러나 국정원 내에도 청와대와 ‘직거래’하는 오리지널 국정원 멤버들이 있다. 이들이 청와대 의중을 남 원장에게 전달하는 메신저들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2014년 4월의 ‘세월호’ 참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으로 팬티 차림에 맨 먼저 구조되는 이준석 선장의 모습을 떠올린다. 이어 6월21일 벌어진 22사단의 일반전초(GOP) 총기 사건에서 어디론가 사라진 소초장(중위)의 사연도 충격으로 다가왔다. 큰 위기의 순간에 헌신과 용기로 책임감을 보여야 할 현장의 책임자들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이 도망자들의 공화국에서 국민은 큰 위험에 처하게 된다.
남재준 국정원장과 김장수 안보실장은 날개 없이 추락했다. 두 사람의 경질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우선 세월호 사건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두 명이 전격적으로 경질된 것도 그렇고, 퇴임 이후에 어떠한 정권 차원의 배려도 없었다는 게 더 충격적이었다. 통상 청와대에서 수석급 이상, 또는 집권 동지인 장관급 인사를 경질할 때는 퇴임 이후에 대한 배려가 어느 정도 있기 마련이었다. 외국 대사로 내보낸다든가, 대학 총장으로 보낸다든가 하는 배려는 관행이었다. 그리고 이런 중량급 인사를 경질할 때는 그 후임자를 물색한 다음에 자연스럽게 경질함으로써 국정의 혼선을 최소화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그런 것이 전혀 없이 단칼에 경질이라는 초강수를 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2014년 3월부터 5월까지 이어지는 정국에서 우리 안보와 도덕의 경계는 무척 모호했고, 여러 사람을 혼란스럽게 했다. 여기서 청와대를 비롯한 집권 세력에게는 국가의 기강을 유지하고 정부의 위신을 세우는 데 안보의 위협은 매우 긴요하게 활용될 수 있는 정치적 자산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즉 국민에게 북한의 위협을 수시로 일깨우면서 경각심을 불어넣고자 하는 일련의 활동은 국가의 기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발상은 일반 국민 대중이 우매하면서 나약하고 불완전한 존재라는 전제에서 나온다. 반면 국정을 주도하는 지도층은 명령하고 조작하고 윽박지르는 특권이 있다는 내재적 결론을 이끌어낸다. 이러한 특권의식에 바탕을 둔 ‘엘리트 통치론’은 단기적으로는 매우 편리한 통치 방식이다. 그러나 직업군인은 안보의 원형을 추구한다. 외부의 정치 논리에 좌우되지 않는 순수하고 합리적인 안보, 정치적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숭고한 그 무엇이어야 한다. 이 대목에서 청와대와 군 출신 인사들은 대립했다.
새로 임명된 한민구 국방부장관은 오랜 기간 친일 세력이 득세해온 국방 분야에서 모처럼 독립운동가 자손이라는 정통성과 합리적인 유연성을 두루 갖춘 인사로 평가됐다. 그 때문인지 여당보다는 야당의 지지를 더 받기도 한다. 5월에 개각이 발표된 후,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유일하게 여야 합의로 추대되어 맨 먼저 장관직에 취임한 행운아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안보를 국내정치에 적극 활용하고자 하는 박근혜정부의 집권 세력과 향후 어떤 관계를 정립할지는 미지수이기도 하고, 그의 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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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軍들의 전쟁] #31. 장군들의 권력욕이 군을 망쳤다
장관 자리 놓고 대장들 암투…정치권력에 줄 서며 명예 더럽혀
기사입력시간 [1295호] 2014.08.13 (수)
김종대│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높은 곳에서 떨어질수록 더 아프다. 위관급보다 영관급이, 영관급보다는 장군이 진급이 좌절됐을 때 더 큰 상실감을 갖는다는 이야기다. 사람들은 장교들이 일단 장군이 되면 웬만히 누릴 만한 명예는 다 누렸으니 만족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명예욕이란 것은 충족되면 될수록 배가 고파지는 무한 욕망이다. 장군이 되면 위계와 서열로 이루어진 거대한 욕망의 피라미드의 정상이 보인다. 눈앞에 최고의 자리가 보이면 보일수록 그곳에 도달하려는 충동과 경쟁에서 이기겠다는 의지는 더 고취된다. 설령 장군 개인은 그러한 욕망을 초월했다고 자위할지 모르지만, 군대는 그러한 개인이라도 정신없이 경쟁에 몰두하게 만드는 거대한 구조물이다.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 위에 군대가 작동하고 있다. 권력을 추구하는 자는 어떤 때는 배신도 하고, 어떤 때는 미덕도 저버려야 한다. 따라서 이 군대의 실질적 통치자는 바로 ‘목적만 정당하다면 수단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비윤리적 견유주의(犬儒主義)를 제창한 마키아벨리일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10월1일 김관진 당시 국방부장관(오른쪽 두 번째)과 서울공항에서 열린 건군 65주년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고공강하 시범을 보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군의 현실에서 군 장성이 군 최고 계급인 대장이 되었다고 해서 입신양명의 기회가 끝나지 않는다. 군인 이후에 또 다른 명예가 기다리고 있다. 한때 ‘장군 되기를 포기한 대령’이라는 뜻의 ‘장포대’라는 용어는 이제 ‘장관되기를 포기한 대장’이라는 의미로 통하고 있다. 김병관 예비역 대장은 2006년 당시 장관이 되기 위해 경쟁하는 육군참모총장과 합참의장을 빗대 이 말을 처음으로 만들어냈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은 현역 장군 출신이 문민 국방장관이 될 수 없도록 법으로 금지하고 있지만 한국의 현실에선 대장이 장관이 되는 또 하나의 진급이 기다리고 있다. 지금의 한민구 국방부장관은 육사 31기로 권오성 육참총장의 육사 3년 선배다. 육참총장과 합참의장을 지휘하는 양복 입은 군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이 한국 국방의 가장 비정상적인 요인이라고 할 것이지만 안보 현실이 엄중한 우리 현실에서는 폭넓게 용인되어온 군사주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비정상이 초래한 가장 큰 부작용은 민주주의와 안보가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갈등하게 된다는 점이다.
국방정책 굴절시키는 ‘양복 입은 군인들’
전문가는 편견을 가진 존재이기도 하다. 500년 전에 영국의 솔즈베리 경은 이런 말을 했다. “신학자의 말을 들으면 세상 사람은 모두 죄인이고, 의사의 말을 들으면 세상 사람은 모두 환자이며, 군인의 말을 들으면 세상 사람은 모두 전투원이다.” 국가라는 유기체는 그런 편견의 집합체다. 이런 전문가들은 통제되어야 한다. 교사가 교육정책을 수립하는 것이 아니고 검사가 사법정책을 수립하지 않으며 의사가 보건정책을 수립하지 않는다. 정책수립은 해당 분야 전문가가 아니라 행정 관료가 의회와 협력해서 한다. 군인이 국방정책을 수립하는 것은 민주주의 원리에 반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군인의 편견과 이익에 맞게 국방정책이 굴절된다. 이렇게 되면 군대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할 군인의 직업의식이 군대 밖으로 무분별하게 표출되면서 사회와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여기에는 어떤 숙명과도 같은 대립점이 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가 진정되고 난 이후 미국 전략폭격사령부(SAC)를 방문한 맥나마라 미국 국방장관에게 사령관인 토머스 파워 장군은 이런 말을 했다. “만일 핵전쟁이 일어나 소련에서 1명 살아남고 미국에서 2명 살아남으면 미국이 이긴 것 아닙니까?” 이 말에 맥나마라는 거의 기절했지만 전면 핵전쟁을 준비하는 파워 장군에게는 그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장군의 관점으로는 세상은 항상 전쟁 중이고, 마지막에 전투원이 살아남는 쪽이 이기는 것이다. 전쟁에서의 승리라는 지상명령 앞에 나머지 변수는 제거된다. 이것이 맥나마라 장관에게는 장군의 지독한 직업적 편견이었고 통제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 통제 장치가 명확하지 않은 것이 고질적인 문제다. 국방부가 존재하는 이유는 국민을 대리해 군을 통제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에는 국방부가 군을 대리해 국민을 통제하는 조직이 되고 말았다. 군인이 직접 국방정책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군인의 권력과 명예를 향한 욕망이 군대라는 껍질을 벗고 민간 영역으로 범람했기 때문이다. 이 자제되어야 할 욕망을 통제하지 않으면 국가가 불행해진다. 이 점에서 장군이라는 존재는 국가안보에 대한 전문성과 책임성이 강조되는 전문가이기도 하지만 국민의 요구에 맞게 통제되어야 하는 윤리적 존재이기도 하다. 즉 장군은 안보의 주체인 국민의 대리인(Agent)이 되어야 하는데 거꾸로 민간 영역에 간섭하고 부당한 통제력을 행사하는 권력자(Power)가 될 위험도 가지고 있다.
김관진의 석연찮은 윤 일병 사건 행보
최근 우리 지상군 병영에서는 <지옥의 묵시 록>에서나 나올 법한 끔찍한 사건이 연이어 벌어졌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일련의 현상은 바로 권력 게임이다. 윤 일병이 사망한 다음 날인 4월8일 김관진 당시 국방부장관은 가혹행위로 병사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보고받았다. 구타로 병사가 사망한 사건은 우리 군에서 14년 만에 발생한 중대 사건이었기 때문에 이후 김 장관은 전군에 대한 정밀 진단을 실시하는 등 사안의 심각성을 분명하게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외부에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고 조용히 처리하려고 사건을 은폐·축소했다. 지휘관에 대한 경징계, 28사단 차원에서 자체 마무리가 되도록 조치하고 유족의 접근을 차단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사건의 의미를 축소했다. 이는 이후 엄청난 국민적 저항을 불러왔다. 왜 그랬을까. 시계를 당시로 되돌려보면 3월 말에 발견된 북한제로 추정되는 무인기가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놓은 시점이다. 안보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정치권력은 애초 “위협이 아니다”라는 최초 판단을 뒤집고 무인기가 “심각한 위협”이라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이에 적극적으로 부응해 무인기 방어 대책을 수립하는 등 김관진 장관이 직접 사태를 주도하던 시점이기도 하다.
왜 이렇게 무리한 입장 변경이 있었는지는 자명하다. 서울시 간첩 증거 조작 사건으로 청와대와 국정원이 궁지에 몰릴 수 있는 위험이 최고로 고조된 상황에서 북한의 위협을 부각시켜 정국을 관리해야 할 필요성이 절박했기 때문이다. 무인기 사건을 처리하면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과 군 출신인 남재준·김장수의 갈등이 표면화되던 이 시기에 김관진 장관의 선택은 정치권력과의 협력이었다. 그것이 위협 같지도 않았던 무인기가 심각한 위협으로 돌변하게 된 배경이다. 그런데 돌연 4월16일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면서 정치권력은 궁지에 몰렸다.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비난에 시달리던 정치권력의 위기감이 극도로 고조된 상황에서 병영의 심각한 폭력행위가 외부에 알려진다면 이는 ‘제2의 세월호 참사’라고 불러도 무방한 복합 위기로 발전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여기서 모든 걸 조용하게 덮으려는 정치적 동기는 충분히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이때 윤 일병 사망 사건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제대로 일을 처리했더라면 두 달여 후인 6월21일 22사단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 사건은 예방이 가능했을 것이다. 단지 전 부대에 대한 정밀 진단과 구타 근절이라는 일반 명령에 그치지 않고 각종 스트레스와 불만이 팽배한 병영을 조속히 정상화하는 방향으로 관리에 만전을 기했더라면 불행한 사건이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는 차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지 않고 장병들을 더욱 조여붙이고 통제하는 방향으로 처방이 이어지자 묵은 병영의 스트레스는 마침내 폭발하기 시작했다. 외출·외박·휴가가 제한되고 영외에서 2인 이상의 집단행동도 금지되고 각 사단마다 감찰활동이 강화되자 일상을 빼앗긴 장병들의 불만은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내부에서 응축되기 시작했다. 사건이 발생하는 것은 장병의 스트레스가 가중되었기 때문인데, 국방부와 육군이 내린 처방은 장병의 스트레스를 더 악화시키는 것이었다.
8월4일 국회 국방위원회의에서 한민구 국방부장관과 권오성 육군참모총장이 윤 일병 사망 사건에 대한 의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시사저널 이종현
육참총장이 사의 표명을 번복했던 내막
더 이상한 조짐은 8월4일 국회 국방위와 법사위에서 윤 일병 사건에 대한 긴급회의가 열리던 시점에 나타났다. 이날 “권오성 육참총장이 사의를 표명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고 있었는데, 막상 국회에서 권 총장은 “언제든 책임을 질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사의를 표명한 사실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날 회의가 끝날 무렵에는 아예 사의 표명은 없었던 일이 되었고 청와대는 “진상규명이 우선”이라며 육참총장에 대한 경질 인사는 당분간 없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권 총장은 윤 일병 사망을 계기로 출범하는 민관군 병영문화혁신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사건의 사후 수습과 재발 방지 대책을 수립하는 임무도 수행하기로 되어 있던 터라 육군 수장이 바뀔 수는 없었다. 만일 권 총장을 경질하게 되면 당시 국방부장관이던 김관진 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에 대한 책임론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권 총장의 사의 표명을 번복하도록 한 당사자는 다름 아닌 김관진 실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8월5일 대다수 언론은 윤 일병 사망 사건에 대한 수습 및 처리가 미흡한 책임이 김관진 당시 국방부장관에게 있다는 보도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사건의 불똥이 청와대로 튈 조짐을 보이자 이를 차단하기 위해 청와대가 다급하게 움직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갑자기 국무회의에서 “군에 수십 년간 쌓여온 적폐”를 거론하며 “윤 일병 사망 사건에 대한 가해자와 방조자를 모두 발본색원하여 일벌백계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같은 날 구원파 교주인 유병언에 대한 검거에도 실패하고 수습에도 무능했던 경찰에까지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런 대통령의 말이 있자 이제까지 붙어 있던 꼬리였던 권 총장은 잘라내야 하는 꼬리로 그 의미가 바뀌었다. 이날 청와대는 권 총장의 사의를 수용하기로 했다. 여기에서 권 총장의 거취 결정은 ‘김관진 일병 구하기’ 맥락에서 움직였다. 이 결정이 있고 나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경질 인사는 육참총장으로 충분하다”며 김관진 방어에 나섰다. 8월6일의 병영문화혁신위원회 출범식에 권 총장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야당은 더욱더 김관진 책임론에 집중하게 돼 이제 윤 일병 문제는 김관진 구하기와 낙마시키기 사이에서 요동치고 있다. 이런 권력 게임은 누가 책임을 지고, 누가 생존하느냐를 다투는 서바이벌 게임이다. 또다시 윤 일병 문제가 정치화되고 있다.
최근 우리 지상군에서 표출되는 불행한 사건을 목도하면서 우리는 국가안보에 대한 책임과 윤리성이라는 장교단의 직업의식에 대해 다시 성찰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전방 소대장의 90%가 단기 복무를 하는 의무복무자이며 부사관의 대다수가 고졸이다. 이런 아마추어들을 과연 전투를 수행하는 전문가라고 말하기에는 선뜻 망설여진다. 장기 복무 직업군인, 그중에서 군사 엘리트이자 최고의 전문가라고 하는 장군들은 우리 장교단의 집단정신을 대표하는 최고의 선망이다. 그러나 최근 진급과 보직 전쟁으로 이어지는 장군들의 행태는 장병의 안위를 뒷전으로 하고 진실을 은폐하는 어두운 모습으로 비치고 있다. 여기에서 장교단이 만들어내는 한국적 군사문화, 즉 군성(軍性)이 과연 무엇인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장군들이 개인의 영달을 초월해 신뢰받는 집단이 되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문화이기 때문이다. 군사 전문기자 이동훈에 의하면 진정한 군사문화는 “잉여에서 창출된다”고 한다. 즉 무언가 치장하고 의식을 만들고 멋진 행사를 할 수 있는 군사문화란 어느 정도 물질적·정신적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 군에는 그런 여유가 없다. 바쁜 일과와 과중한 업무, 전역하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척박한 풍토와 땅에 떨어진 신뢰, 진급 전쟁에서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성으로 평생을 살아가도록 강요받는 것이 작금의 장교단 현실이다. 기껏해야 골프와 회식으로 연상되는 게 장교들의 사교문화일 뿐이다. 전역한 장성들은 막상 집으로 돌아오면 마누라가 군에서 자신을 괴롭히던 어떤 상관보다도 더 무섭다고 말한다.
7월16일 국방부에서 열린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군 장성들이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장군다움을 저버린 줄 서기·줄 세우기
사회는 이미 장군들이 모르는 딴 세상이 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장군들은 정신적 귀족으로서 부르주아가 아니라 정신적 지체자로서 프롤레타리아가 되기를 사실상 강요받고 있다. 이것이 품격과 명예를 구현하는 장군단을 형성하는 장애 요인이라고 할 것이다. 이런 문화에서는 장군의 장군다움, 군인의 군인다움이 무엇인지를 국민에게 선뜻 제시하지 못한 채 정치의 눈치나 보고 줄 서야 하는 비굴한 이미지로 비칠 소지가 다분하다.
만약 윤 일병 사건으로 육참총장이 책임을 져야 했다면 그것은 정치논리와 무관하게 소신 있게 책임지는 모습이어야 했다. 그러나 사의 표명을 번복하는 모습은 그런 장군다움을 잠식하는 정치논리였다. 권 총장 자신이 스스로 책임지는 명예스러운 모습으로 사의가 표명되어야 했는데 대통령의 강한 질책을 받고 물러나는 이런 모습이 한국군의 명예와 신뢰를 잠식하게 된다. 그것이 하부로 전이되면 부하가 죽어가는데 도망을 간 소초장의 모습으로, 사건을 축소하고 은폐하는 사단장·군단장의 모습으로 구체화된다. 군인이 가장 위험한 결정적 순간에 몸을 사리고 자신만 살 기회를 엿본다면 이미 군인이 아니다. 군인의 군인다움이 사라진 빈자리에 명예와 권력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결코 영광이 아니다. 이런 군대는 군대가 아니라 군중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 정치권력은 군인에게 군인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정권의 이해득실에 따라 군인의 운명을 결정하도록 한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장군의 명예보다는 군인을 줄 세우겠다는 의도가 깔린 잘못된 군 관리다.
그렇다면 우리 장교단, 장군들은 스스로를 구제하기 위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국가에 대한 애국심과 충성심은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지만 정치논리에 초연하면서도 명예를 목숨같이 지키는 집단윤리를 확립해야 한다. 만일 장교단을 정치권력이 이용하고 줄 세우려고 한다면 그것에 소신 있게 저항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명예와 권력이 어디까지나 군대라는 집단 내에 한정된 것이라는 규범적 제한을 수용해야 한다. 장군들은 자발적으로 문민 권력에 예속되고 복종하면서도, 전쟁에 대한 전문성 하나만큼은 철저히 보호받고 존중받아야 한다. 이 문제를 고민한 젊은 천재 새뮤얼 헌팅턴은 저서 <군인과 국가>에서 보수적 집단으로서의 군은 정치권력에 복종해야 하는 의무와 군사적 조언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조화시키는 것이 현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원리라고 보았다. 복종해야 할 때 복종하더라도 말을 제대로 하는 것, 이것보다 더 큰 장군의 덕목은 없다. 그런 바탕 위에서 비로소 한국적 군사문화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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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신현돈 1군사령관 전역조치
뉴시스 입력 2014-09-02 16:03:00 수정 2014-09-02 17:14:20
軍대비태세 기간 중 지인들과 과도한 음주 '물의' 대장이 불명예 전역조치된 것은 군 역사상 최초
국방부는 신현돈(대장·육사 35기) 1군사령관이 과도한 음주로 군의 품위를 손상시키고 군사대비태세를 소홀히 해 2일부로 전역 조치됐다고 밝혔다. 국방부 역사상 대장이 이런 일로 전역 조치되는 것은 처음이다.
국방부는 "신 사령관이 지난 6월 군사대비태세 기간 중 안보강연을 위해 모교를 방문해 지휘관으로서 위치를 이탈하고 출타 중에 품위를 손상시킨 데 대해 책임을 지고 오늘부로 전역지원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군에 따르면 신 사령관은 지난 6월19일께 고향을 방문해 지인들과 술을 마신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됐었다. 최근 국방부는 이를 인지하고 신 사령관이 충북 청주의 모교에서 안보강연 후 학교 교사 및 고향 친구들과 술을 마신 사실을 적발했다.
특히 신 사령관은 술자리 후 복귀하는 과정에서 복장을 풀어헤친 채 휴게소에 들렀다 다른 사람에게 목격됐고, 수행요원은 민간인과 실랑이를 벌이기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직후 한 민간인이 수방사에 민원을 제기해 군 당국이 조사에 착수했고 국방부 인사계통에서는 최근에 사건을 인지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방부 관계자는 "저녁식사 후 올라오다가 휴게소에 들렀는데 군복 복장이 흐트러진 상태에서 화장실을 간 것을 목격한 사람이 있었다"며 "수행 요원들이 다른 민간인들을 화장실에 들어가지 못하게 제지하기도 했다. 이는 과잉보호다"고 밝혔다.
신 사령관이 모교에서 안보강연을 하고 지인들과 술을 마시던 때는 전 군에 특별 경계태세가 내려진 시기였다. 육군 22사단 총기난사 사건 직후인데다 박근혜 대통령이 중앙아시아를 순방 중이었기 때문이다.
신 사령관은 이같은 일이 군 내에서 문제가 되자 책임을 지겠다며 이날 전역지원서를 냈고 정부가 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전해졌다.
국방부 관계자는 "이번 일이 논란이 되자 본인이 책임지고 관두겠다고 했다"며 "국방부 인사기획관실의 (전역지원서 제출) 종용은 없었다. 후임이 임명되기 전까지 부사령관이 직무대리를 하게 된다"고 말했다.
한편 신 사령관이 물러남에 따라 오는 10월로 예정된 국방부의 대장급 인사 폭도 대폭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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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인 시기 왜 한국군은 무력해지는가
대청해전 승리 질책한 이명박
신동아 입력 2014년 08월호 659호 (p260~265) 이정훈│편집위원 hoon@donga.com
한국군은 많은 훈련을 하고 최고 수준의 무기를 갖췄지만, 결정적인 시기에 ‘무력(無力)’해진다. ‘자주국방’ 구호가 무색하게 위기에 처하면 미군에 매달린다. 그리고 다시 자주국방을 하는 척하다가 유사한 사건을 당하면, 무력한 대응을 하고 한미동맹을 강조하는 패턴을 반복한다. 도대체 왜 그럴까.
천안함 사건 후인 2010년 5월 4일, 처음으로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주재한 이명박 대통령.
기자는 천안함 사건에 대해서는 2권(‘천안함 정치학’, ‘천안함 루머를 벗긴다’), 연평도 사건에 대해서는 1권(‘연평도 통일론’)의 책을 내며 두 사건을 추적해왔다. 그럼에도 미진한 부분이 있었다. 북한 수뇌부의 도발 준비상황을 알 수 없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우리 권부(權府)에 대한 취재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접근해갈 수는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요직에 있던 이들이 조금씩 입을 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식 인터뷰에는 응하지 않기에 익명으로 처리해 다큐멘터리식 기사를 쓸 수밖에 없었다. ‘신동아’ 2012년 12월호와 2013년 4월호, 2014년 3월호 등에 쓴 기사가 그것들이다. 이런 취재를 통해 품게 된 화두가 ‘왜 한국군은 약한가?’였다.
천안함 사건 후 정부는 국제민관군합동조사단의 조사를 통해 북한의 연어급 잠수정이 CHT-02D 어뢰를 쏴 천안함을 격침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밝혀냈다.감사원을 동원해서는 ‘어느 부대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밝히게 했다. 이에 대해서는 “감사원은 작전 전문가 집단이 아닌데 어떻게 작전을 조사하게 하느냐”는 반발이 많았지만, 어쨌든 조사하게 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국가 지도부의 대응에 대해서는 조사하지 않았다. 천안함 사건 당일 청와대 측은 “북한과의 연계성이 확실치 않다”고 주장했다. 군에서는 ‘북한이 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고, 그에 대한 보고가 빗발쳤는데, 왜 청와대는 다른 판단을 한 것일까. 이 판단이 끼친 영향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조사가 없었다.
이것을 알아보지 않고는 ‘결정적인 시기 한국군이 무력해지는’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최근 기자는 이 화두에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 천안함 사건 당시 요직에 있었던 그로부터 익명을 전제로 숨은 이야기를 끌어낸 것이다. 그의 증언을 토대로 그때 군 통수권자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일반 국민은 ‘국방의 목표’와 육·해·공군의 목표, 각 부대의 목표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외부의 군사적 위협과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하고…’로 시작되는 국방의 목표는 ‘국방백서’에 나와 있다. 이 목표를 구현하기 위해 각 군은 자기 목표를 설정한다. 군에 갔다 온 이라면 훈련병 시절 ‘육군의 목표’ 등을 외우지 못해 얼차려 받은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일선 부대들은 그 연장선에 있기에, ‘전선 사수(死守)’를 목표로 할 수밖에 없다.
이 목표들과 가끔 심각하게 충돌하는 것이 ‘정권의 목표’다.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제1의 목표로 정한 정권이라면 군에 “MDL(군사분계선)과 NLL(북방한계선)에서 충돌이 일어나지 않게 하라”는 주문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북한은 우리의 정치 상황을 예의주시하기에 그 틈을 노린다. 틈을 만들기 위해 정상회담에 응하는 것 같기도 하다.
국방의 목표 vs 정권의 목표
서해 NLL에는 지뢰나 철책 같은 장애가 없으니 침투하기 쉽다. 그 때문에 NLL 방어를 책임진 합동참모본부(합참)와 해군 작전사령부 및 2함대사령부는 정권이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한다고 하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이 복잡한 사고가 허점으로 작용해, 결정적인 시기 한국군은 무력해지는 것이다.
국민은 ‘북한 배가 NLL을 넘어오지 못하게 우리 해군이 철저히 지킨다’고 믿고 있겠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북한 배는 수시로 넘어오고 있다. 서해 5도 가운데 포병 부대가 주둔할 정도로 큰 섬은 백령도와 연평도뿐이다. 반면 북한은 황해도 전 해안에 포대를 배치할 수 있다. 이러한 인민군 화력을 두 섬 사이에 투입되는 해군 함정이 상대한다.
함포는 함정 크기에 제약을 받지만, 육상 포는 그렇지 않으니, 우리 함정은 항상 화력 열세에 놓이게 된다. NLL 바로 밑에서 작전하고 있으면 한 방에 ‘수장(水葬)’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합참은 적 포탄이 도달하기 힘든 NLL 남쪽 4~5해리쯤(일부 구간은 2~3해리, 1해리=1852m) ‘합참통제선’을 설정해놓고, 평시에는 그곳까지만 북상하게 한다.
그러니 북한 함정과 어선은 물론이고 중국 어선도 동서(東西)로 항해할 때는 무시로 NLL을 넘나든다. 우리는 그것을 지켜보다가, 침로(針路)를 남쪽으로 잡아 내려오는 것이 있으면, 도발로 판단해 고속정을 합참통제선 이북으로 출동시킨다. 그리고 경고방송과 경고사격을 하는데 그래도 침로를 돌리지 않으면 함대사령관의 허락을 받아 격파사격을 한다.
따라서 서해상 남북 충돌은 항상 NLL 남쪽과 합참통제선 사이에서 일어난다. 제1연평해전과 제2연평해전, 대청해전이 그러했다. 육군은 이러한 상황을 잘 모른다. 해·공군과 함께 작전하는 합참에 온 후 이를 처음 아는 경우가 많다. 기자에게 비화를 털어놓은 사람도 육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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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군 질책하는 MB의 전화
합참에 처음 근무하게 된 그는 상황보고를 받으면서 NLL이 수시로 뚫린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그가 “왜 북한 함정의 NLL 월선(越線)을 보고만 있느냐”고 묻자, 해군 측은 이와 같은 설명에다 “남북관계의 경색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덧붙였다고 한다.
그는 후자에 집중해 “우리는 정치인이 아니니 ‘군인 짓’에 충실하자. 정치적인 것은 고려하지 말자”며 제대로 방어할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 한 달여가 지난 2009년 10월 23일 임태희 노동부 장관과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 부장이 싱가포르에서 만나 3차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했다. 정부는 이를 비밀에 부쳤다.
이어 11월 10일 대청해전이 일어났다. 제1연평해전은 우리가 대승한 전투이지만, 우리 쪽에서도 7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아덴만 여명작전도 성공작이지만, 인질로 잡혔던 석해균 선장 등이 총격을 받아 큰 부상을 입었다. 제2연평해전에서는 우리 고속정이 침몰하고 6명이 전사했다.
대청해전은 단 한 명의 부상자도 나오지 않은 완전 승리였다. 그런데도 대접을 받지 못한다. 세 작전에 대해서는 기념비까지 세우게 됐지만, 대청해전의 경우 아무것도 없다. 그 이유는 나흘 뒤인 11월 13일부터 언론이 보도하기 시작한 3차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남북비밀접촉설’에서 찾아야 한다. 그 무렵 이명박 대통령의 전화를 받았던 이 요인의 말이다.
“승리에 대해 칭찬해주실 줄 알았는데, 대통령은 그 승리로 인해 3차 남북정상회담이 무산될 가능성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하셨다. 화까지 낸 것은 아니지만,‘왜 그렇게 강하게 대응했느냐’며 매우 서운해했다. 말씀을 다 한 다음에도 미진한 감정이 남았는지, 계속 혀를 차며 전화를 끊지 않았다. 전화 통화라 직접 얼굴을 뵐 수는 없었지만 남북정상회담이 무산될 수 있음을 무척 안타까워하는 느낌이었다.”
국방의 목표와 정권의 목표가 정면 충돌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인데, 그때가 군 지휘관으로서는 가장 힘들다. 그는 ‘자기의 길’을 선택했다. 그해 말 작전사급 부대와 화상회의를 하는 자리에서 지휘관들에게 “적은 반드시 보복한다. 적은 수상이 아닌 바다 밑으로 공격해올 가능성이 높으니 대비하라”라는 요지의 지시를 내렸다.
그에 대해 해군 관계자들은 “서해는 수심이 낮고 물이 탁해, 잠수함을 이용한 공격은 하기 어렵다. 서해에서 잠수함정은 공작원을 침투시키는 수단으로 이용된다”고 했다. 북한은 남포 앞바다의 비파곶에 로미오와 상어급 등 공격 잠수함을 배치한 기지를 갖고 있다. 그는 그 사실을 거론하며 “서해에서 잠수함 작전이 어렵다면 왜 북한은 비파곶에 공격잠수함 기지를 운용하느냐”고 반문했다. 그리고 “키리졸브 연습이 끝나는 2010년 3월 말 적의 잠수함 공격에 대한 대비를 잘 하는지 검열하겠다”는 말로 회의를 마쳤다.
wishful thinking에 빠진 대통령
그리고 운명의 2010년 3월 26일이 다가왔다. 그날 합참은 육군 교육사에서 국군 역사상 처음으로 3군 참모총장을 참석시킨 가운데 합동성에 관한 심포지엄을 열었다. 해·공군은 합동성 강화를 육군이 해·공군을 지휘하는 통합군을 만들려는 것으로 보기에, 합동성의 ‘합’자만 들어도 경기(驚氣)를 일으킨다. 그런 회의를 열게 됐으니 많은 관심이 육군 교육사로 쏠렸다.
같은 날 합참에서는 적 잠수함 공격에 대한 대비 태세를 알아보기 위한 검열단의 예비회의가 있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백령도 서남방에서 천안함이 침몰했다는 놀라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 즉시 ‘어뢰를 맞은 것 같다’와 ‘1977년 백령도 해역에 설치한 우리의 MK-6 육상조종 기뢰에 걸렸을 수도 있다’는 양론이 나왔다. 다수 의견은 어뢰 쪽이었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 기뢰는 육상에 있는 조작반에서부터 도선(導線)이 연결돼 있어 조작반을 조작해야 폭발한다. 그런데 백령도 근해에서 조업하는 어민들이 계속 불안을 호소했기에 그후 대부분을 회수했다. 위치가 바뀌어 찾지 못한 기뢰에 대해서는 조작반과 육상에 있는 도선을 제거하는 조치를 취했다. 조작반과 도선이 없으면 이 기뢰는 터질 수가 없다. 그러나 대통령은 반대로 기울었다. 이 요인의 말을 옮겨본다.
“대통령 처지에서 가장 리스크가 적은 것은 무엇이겠는가. 적 어뢰가 천안함을 격침했다고 하면 정상회담을 추진해온 그로서는 큰 위기에 직면한다. 피로골절로 부러졌다고 하면, ‘같은 연수(年數)의 초계함이 작전 중인데 왜 천안함만 부러지는가’라는 논란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회수하지 못한 기뢰가 터졌다고 한다면 큰 부담을 받지 않을 수 있다. 남북정상회담도 다시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기대가 대통령을, 국가를 책임진 사람이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wishful thinking(소망적 사고)’ 쪽으로 유도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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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청와대에서 정확한 설명을 요구했기에, 외교안보수석이 배석한 가운데 그는 대통령에게 MK-6 기뢰가 폭발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대통령은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눈치를 보였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5월 15일 두 사건이 일어났다.
첫째는 천안함 사건 후 처음으로 북한 함정이 연평도 근해에서 한 번 내려왔다 물러나더니 다시 넘는 식으로 NLL을 침범한 것이었다. 화상회의로 실시간 보고를 받은 그는 다시 넘어온다고 했을 때 격파사격을 지시했다.
“같은 배가 다시 넘어오는 것은 의도가 분명하지 않은가. 더구나 그때는 천안함에서 많은 시신을 인양하고 있었으니 우리 군의 적개심이 극에 달해 있을 때였다. 우리의 격파사격에 북한이 대응한다면, 천안함 사건에 대해 하지 못한 보복까지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화상회의장에 국방부 고위관계자가 들어오더니, ‘지금 뭐 하는 거야. 모두 원위치!’를 지시했다. 결국 해군은 다시 넘어온 그 배를 향해 경고방송과 경고사격을 해 물러나게 하는 것으로 끝내고 말았다. 그때 화상을 통해 그 광경을 지켜보던 주요 지휘관들이 무슨 생각을 했겠는가? 정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보복하는 것이 아니라, 좋게좋게 넘기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않았겠는가.”
변죽만 울리다 주저앉는 우리 군
그날 백령도의 사건 현장을 긁고 있던 쌍끌이 어선이 CHT-02D 어뢰의 잔해를 끌어올렸다. 이로써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그제야 대통령은 생각을 바꾸고 5월 24일 전쟁기념관에서 북한을 제재하겠다는(5·24조치) 연설을 했다. 이어 김태영 국방부 장관이 “6년 만에 대북심리전을 재개한다”는 선언을 했다.
북한은 심리전을 재개하면 격파사격을 하겠다고 반발했지만, 합참은 심리전용 확성기를 설치하고 이를 운용할 부대를 위한 지하진지를 구축해나갔다. 북한이 격파사격을 해오면 바로 북한 GP를 공격하기 위해 GOP 부대에 토 미사일을 배치했다. 그리고 전 야전포병에 “북한이 공격해왔는데 한참 뒤 대응하면 우리가 새로운 도발을 했다는 비난을 들을 수 있으니, 10분 안에 초탄을 발사할 수 있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7월 21일 부산항을 방문한 미 해군의 조지워싱턴 항모가 25일부터 28일까지 전투단을 이끌고 동해에서 우리 해군과 ‘불굴의 의지 작전’을 하게 되었다. 미 항모가 참여한 훈련을 하면 북한은 강하게 반발하니, 합참은 그때를 심리전 재개 시기로 잡았다. 그리고 정부의 승인을 요구했는데 허락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 군은 변죽만 울리다가 또다시 돈좌(頓挫)하게 된 것인데, 이것만큼 힘 빠지는 것도 없다. 그의 말이다.
“천안함 사건은 기습을 당한 것이지만, 연평도 사건은 대낮에 당한 명백한 도발이다. 그런데도 현장 부대만 대응하고 전군은 가만히 있었다. 왜 그랬다고 생각하는가. 천안함 사건의 진실이 밝혀진 후 우리 군이 준비한 많은 전략이 돈좌되는 것을 보고, 지휘관들은 ‘정치권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모 지휘관이 ‘참모 가운데 한 명이라도 대응하자고 했으면 결행했을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모든 지휘관과 참모가 청와대 눈치를 보고 있으니 우리 군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한다.”
대통령도 군사훈련에 참여하라
그는 결정적인 시기 국군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은 정치권이라는 아주 날카로운 지적을 했다.
“우리 군은 ‘허상(虛像)’ 위에서 훈련한다.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보복이나 반격작전을 승인했다고 보고 연습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대통령은 그 작전을 승인해주지 않으니,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 대통령이 승인해줄 것으로 치고 하는 ‘했다 치고 작전’만큼 허망한 것도 없다. 대통령과 측근들이 항시 군사훈련에서 배제되는 것이 큰 문제다. 키리졸브 등 큰 훈련에 참가해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유사시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지 않고 남북정상회담 같은 허황된 목표만 내세우니, 우리 군은 무력한 대응으로 이어지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안보는 가장 중요한 사회간접자본(SOC)인데 대통령이 경제에만 더 주목하는 것도 큰 문제다. ‘경제가 죽는다’는 소리가 나오면 대통령은 어떠한 결심도 하지 못한다. 정치와 경제에 발목이 잡히는 이 틀을 깨지 못하면 한국군은 좋은 무기가 있어도 결정적인 시기에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그는 “군이 정치에 개입해서도 안되지만 결정적 시기에 정치도 군에 마구 개입하면 안된다”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