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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칠현(竹林七賢)
대나무의 숲의 일곱 현인이라는 뜻으로, 난세를 피해 죽림에서 청담으로 생활한 일곱 명의 현인을 일컫는 말이다.
竹 : 대 죽(竹/0)
林 : 수풀 림(木/4)
七 : 일곱 칠(一/1)
賢 : 어질 현(貝/8)
대나무의 숲의 일곱 현인이라는 뜻으로, 중국 진(晉)나라 초기에 유교(儒敎)의 형식주의(形式主義)를 무시하고, 노장(老莊)의 허무주의(虛無主義)를 주장하고, 죽림에서 청담(淸談)을 나누며 지내던 일곱 선비, 곧 완적(阮籍), 완함(阮咸), 혜강(嵆康), 산도(山濤), 향수(向秀), 유영(劉怜), 왕융(王戎) 등을 이르는 말이다.
어떤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을 숫자대로 걸(傑), 절(絶), 현(賢) 등을 붙여 기리는 경우가 많다.
쉽게 떠오르는 것이 제갈량(諸葛亮) 관우(關羽) 장비(張飛)의 촉한삼걸(蜀漢三傑)이고,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뛰어났던 윤두서(尹斗緖)나 김정희(金正喜) 등 삼절(三絶)은 다수 있다.
백제(百濟)를 마지막까지 지키려 했던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은 삼충신(三忠神)으로 추앙받는다.
이런 중에서도 난세를 피해 죽림에서 청담으로 세월을 보낸 중국 남북조(南北朝) 시대 7명의 선비 칠현(七賢)이 잘 알려져 있다. 여기에 포함되는 사람이 완적(阮籍), 혜강(嵇康), 산도(山濤), 왕융(王戎), 유령(劉伶), 완함(阮咸), 상수(向秀)다.
후한(後漢)이 망하고 삼국시대(三國時代, 220년~280년) 조조(曹操)가 떨쳤던 위(魏)나라는 사마염(司馬炎) 등 사마씨 일족의 진(晉)의 수중에 들어간다. 이후 외척과 귀족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국정을 농단하는 난세가 이어졌다.
환멸을 느낀 뜻있는 사람들은 노장(老莊)의 무위사상에 심취하여 죽림에 은거하며 술을 벗하여 청담을 이어갔다.
대부분 명문귀족 출신의 칠현들은 숨 막히는 체제 속에서 사회를 풍자하면서 파란만장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마씨의 회유에 끝끝내 저항한 혜강은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당(唐)의 방현령(房玄齡) 등이 편찬한 '진서(晉書)'에 완함(阮咸) 등 일부가 등장하지만 송(宋)나라의 문학가 유의경(劉義慶)이 명사들의 언행과 일화를 담은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모두의 이름이 나온다.
출신 지역을 나열한 뒤 이렇게 설명한다. "이 일곱 사람이 항상 죽림의 아래에 모여 마음 내키는 대로 술을 즐기며 지냈다(七人 常集干竹林之下 肆意酣暢),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죽림칠현이라 불렀다(故世謂竹林七賢)."
이들 중 완적(阮籍)은 상대하기 싫은 위인에게는 흰 눈자위로 흘겨보는 백안시(白眼視), 혜강(嵇康)은 닭의 무리에 우뚝한 학이란 학립계군(鶴立鷄群) 등 숱한 고사를 낳았다.
어지러운 시대를 살아가면서 세속의 변화에 휘둘리지 않고 산수에 묻혀 고고하게 살아가려는 풍조는 우리나라에도 예가 많다.
해좌칠현(海左七賢)으로 불리는 해동(海東) 죽림칠현은 고려 중엽 무신의 난(1170년) 이후 이인로(李仁老), 임춘(林椿) 등 선비들이 박해를 피해 산림에서 시와 술을 벗 삼아 지냈다.
이성계(李成桂)의 조선에 반대하여 경기도 개풍군(開豊郡) 광덕산에 은거하며 절의를 지켰던 두문동(杜門洞) 칠십이인(七十二人)의 이야기도 전한다.
고귀한 생활을 이어간 이들의 절개를 우러르면서도 난세를 헤쳐 갈 지혜를 사장시킨 것은 두고두고 아파할 일이다.
◼ 죽림칠현(竹林七賢)과 평판
우리가 학생때부터 배우고 알고 있는 '죽림칠현'은 속세를 초월한 고고한 사람쯤 일 것이다. 역사에 무관심한 사람조차도 알고 있는 고고한 '죽림칠현'에 대해서 이견을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확실한 '평판'을 가진 위인들이고, 이렇게 우리는 1,700년 동안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작은 한반도 땅에 있는 우리는 물론이고, 13억명이나 되는 중국인들은 지금도 자화상으로 간직하고 싶어 하는 위인들이다. 어찌보면 동양 역사상 거의 최초로 사회적 평판을 가진 그룹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조금 고리타분하지만, 그러면 죽림칠현에 대해서 조금 더 들어가 보자.
중국 위(魏), 진(晉)의 정권교체기에 부패한 정치권력에는 등을 돌리고 죽림에 모여 거문고와 술을 즐기며 청담(淸談)으로 세월을 보낸 일곱 명의 선비를 일컫는 말이다.
중국 위나라 말기 실세였던 사마씨 일족들이 국정을 장악하고 전횡을 일삼자 이에 등을 돌리고 노장의 무위자연 사상을 심취했던 지식인들을 일컫는다.
당시 사회를 풍자하고 방관자적인 입장을 취하였으며 정치와는 무관하였다. 그중 유명한 7인을 죽림칠현으로 부르는데 그들의 이름은 완적(阮籍), 혜강(嵆康), 산도(山濤), 향수(向秀), 유영(劉伶), 완함(阮咸), 왕융(王戎) 이다.
그들은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적인 노장사상(老莊思想)을 신봉하여 지배권력이 강요하는 유가적 질서나 형식적 예교(禮敎)를 조소하고 그 위선을 폭로하기 위하여 상식에 벗어난 언동을 하기도 하였다.
이후 이들은 위(魏)나라를 멸망시키고 진(晉)나라를 세운 사마씨의 일족에 의해 회유되어 해산되었다. 하지만 이들 중 혜강은 끝까지 사마씨의 회유를 뿌리치다 결국 사형을 당하였다.
이 정도가 우리가 아는 죽림칠현에 대한 교과서적인 정의이다. 즉 그들의 역사적 '평판'이다.
여기서 새삼, 지금으로부터 무려 1,700년 전에 있었던 위인들의 평판을 끄집어 내는 이유는 '평판'이란 가치의 소중함과 왜곡된 모습, 그리고 역사에 까지 미치는 영향을 알고자 함이다.
우선 그들이 과연 세속에 초탈하고 과연 일관되게 무위자연을 노래하며 자연 속에 파묻혀 살았는지에 대해서 여러 서적들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 정말 속세에 초탈하였나?
그렇지 않았다는 게 정답일 것이다. 이건 그들의 역사적 '평판'을 시샘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는 것을 여러 문헌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 중에 하나, 산도가 혜강에게 관직을 하나 제안한다. 사실 죽림에서 세상과 등진다고 했을 뿐이지, 기본적으로 출중한 능력들이 있었던 지라, 이들에게 관직은 늘 곁에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중에 꽤 일직부터 관직에 있던 산도가 자기가 눈 여겨 보던 혜강에게 관직을 나서기를 청한 것이다.
이쯤에서 미리 말해둘 게, 죽림칠현이라고 해서 모두 동년배이거나 비슷한 연배라고 생각할 지 모르나, 사실 이들 사이에 꽤 나이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위에서 언급한 산도와 혜강만해도 산도가 18살 손위라는 점이다.
이 정도 나이 차이라면, 지금으로 쳐도 자식뻘이고, 실제로 오랜 시간 동안 혜강이 산도로부터 죽림에서 가르침과 도움을 받았기에, 이런 귀한 제안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헤강은 이런 산도의 제의를 무려 4년간 고민하다가 거절한다. 그리고 심지어 산도와 절교까지 하게 된다. 사단은 산도가 제안한 관직의 자리가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혜강이 받아 들이기 어려웠던 낮은 직위가 문제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무려 4년간을 고민하면서, 고민의 일단을 불의한 시대에 타협하지 않는 참 선비의 모습으로 포장하고 유려한 문체로 글들을 써 남기면서 피했던 것이다.
그러나 혜강의 강직함과 능력을 잘 아는 산도로서는, 결코 낮지 않고 산도의 능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관직을 추천했음에도, 그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결과임이 확연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상황이 이럼에도 혜강은 산도가 죽림에서 자기와 함께 했던 도덕적인 약속을 저버렸다는 이유를 들어 죽림에 남게 된다. "대장부의 뜻과 기개는 부탁을 할 수는 있어도 빼앗을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속세 사람들이 모두 부귀와 영화를 쫒는다 해도, 나만은 이를 멀리 할 수 있다는 사회적 '평판'이 그를 1,700년동안 각인시킨 순간이다.
○ 과연 이들은 영원한 방랑자(放浪者) 였을까?
우리가 흔히 노장사상(老莊思想)하면 유유자적하며, 어느 속세에 욕심갖고 머물지 않고, 자유스럽게 시와 노래를 즐기며, 자연 속에서 자기 생각에 심취하는 모습이 연상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죽림칠현은 이름부터 이런 모습에 딱 어울린다. 이처럼 역사상 적합한 작명을 찾기도 쉽지 않을 정도이다.
이들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된 것처럼, 실제로 나이차도 많고, 서로가 갖고 있는 취향과 성향이 크게 다름에도, 요즘 흔히 말하는 '야자타임'은 저리 가도록 잘 어울리고 잘 놀았던 사이였음에는 틀림없었던 것 같다.
○ 그런 그들은 과연 정말 초야(草野)에 머문 방랑자들이었을까?
오랫동안 은둔하는 은둔자는 대게 산수와 관련이 깊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깊은 산속인 만큼, 사람의 접근도 용이치 않고, 또 흐르는 물에는 펄적 뒤어 오르는 물고기도 있고, 깊은 산속에는 수북히 쌓여있는 낙엽들이 있어서, 속세와 거리를 두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 요즘 방송에 많이 나오는 '나는 자연인이다'와 같은 모습을 상상해 보면 될 터이다.
그런데 실상 죽림칠현의 은둔은 '보통 은둔'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이들의 이야기 중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다름아니 조정에 숨어 지내는 '큰 은둔'이라는 거다.
한편으로는 벼슬을 하면서, 또 한 편으로는 은둔자인 이중적인 상황임을 즐기는 데도, 세상사람들은 그들을 방랑객 또는 은자(隱子)정도로 칭송해 주니 얼마나 호사를 부렸는지 알 수 있다.
부친이 유명한 문인이었던 완적은 그저 초야에 머물러 있던 인물이라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 은자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은둔이라는 것은 벼슬에 나서는 것에 상대적인 말로, 벼슬을 거절해야 비로소 그 뜻을 실천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34세 이전에 벼슬길에 나선 적이 없다고 해서 완전히 벼슬길에 들어설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완적이 벼슬에 대한 생각을 희석시킨 면이 있지만, 이 세상에서 경륜을 펼쳐보리라는 뜻은 항상 갖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는 비록 벼슬길에 나설 수 있는 과거급제 같은 길을 걷지는 않았지만, 이미 충분히 '명성'을 갖고 있었기에 언제나 벼슬길을 더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보통의 벼슬을 한 선비가 고관이 되고, 명성을 날리는 관리를 되려면 비교적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완적은 그런 관직을 충분히 할 수 있는 '명성'을 이미 갖고 있는 상태에서, 수도 없는 조정의 부름을 거절하며 몸값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어느 정도 '명성'을 쌓고 있던 완적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았다.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 자문쯤되는 장제라는 자가 그의 재능과 성품을 보고, 그를 지금의 장관으로 지명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를 완적이 물리치는 편지를 써서 청와대 같은 곳의 문 앞에 던져 넣었다. 그런데 이를 들은 장제가 불같이 화를 냈고, 그의 소환에 화를 당할 지도 모른다는 주변의 염려를 듣자마자 완적은 바로 장관직을 받아 들인다.
그러나 사실 그 당시 완적은 아직 나이가 많지 않았고, 비록 남보다 적지 않은 생각과 깨우침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현실세계의 경험이 부족했기에, 일처리가 능숙하지 못했다.
결국 완적은 장관의 자리에 갔으나, 번잡하고 딱딱한 관료의 업무로 인해 날이 갈수록 정상적인 근무가 힘들었고, 처음에 관직을 사양했듯이 같은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물론 장제 역시 그의 사직을 받아 들였으며, 이제는 더 이상 만류하지도 않았다.
완적은 은자가 되자 다시 자유를 얻었다. 완적이 그 후 어떻게 은둔하면서 방랑자의 생활을 영위했는지는 자세히 전해지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그가 좋아했던 일상생활의 습관을 따져보면 음주와 노닐기, 시짓고 낭송하기, 이야기하며 즐기기 등을 벗어나지 않았을 것으로 훗날 사가들이 전했다.
물론 그는 관직에 초탈하여 유유자적 방랑자 생활을 한 죽림칠현의 당당한 일인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사례 외에도 이들을 비판한 글들은 역사서에서 수도 없이 발견할 수 있다. 더 이상 '죽림칠현' 같은 '평판'은 힘들다. 이제 와서 그 고고한 죽림칠현의 명성을 훼손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다.
그리고 그런 걸 밝혀 본들, 역사상의 가십거리만 될 뿐이다. 단지 평판이 이뤄지고 사회 속에서 역사 속에서 굳어지는 과정을 보고 관찰하고 싶을 뿐이다
죽림칠현 때도 그렇고 상당히 최근까지도 사회적 평판은 주로 그들이 남긴 글과 자료, 그리고 사회적 여론형성을 좌우하는 파워그룹에 의해서 주도적으로 형성되었다. 그래서 그런 평판이 쌓아지기도 힘들지만, 잘 무너지지도 않는 공고함이 있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러기에 주변에 있는 서로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가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런 관계와 관게를 형성할 때, 자연히 서로가 서로에 대한 호감과 비호감, 또는 각자가 가진 기준으로 평가하게 되고, 그러한 구분이 판단의 기준이 되게 마련이다.
특히 사람과의 관계형성에서 유교적 기준과 도덕율이 엄격했던 동양의 사회에서는 특히 유별났을 거라고 보여진다. 즉, 지금과 같이 경영적 트랜드로서의 '평판'이란 개념이 생기지도 않았을 죽림칠현 시대 때 부터도, 동양사회에서는 '평판' 이상의 잣대가 엄연히 존재하였다고 보여 지는 이유이다.
즉, 유교적 사상의 뿌리가 짙게 영향을 미치는 동양사회에서의 '평판'은 이미 우리들 마음 깊숙히 자리잡은 심리적 기반구조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평판'이란 경영학적 용어가 돌아다니기도 전부터, 이미 평판의 영향력을 알고 있었고, 스스로 그 영향력의 그늘 아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평판의 출처가 확실하지 않은 경우에도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감히 평판을 건드리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누구도 1,700여년 동안 죽림칠현의 평판을 건들기를 꺼려한 이유이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지 않을 겁니다. 당연히 세상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 '평판'의 시대적 잣대
물론 '평판'의 출처를 중시하는 것도 최근의 조류이기는 하지만, 이제부터 사회적 평판은 명백히 출처가 분명해지고 있다. 그냥 그 사람 괜찮은 사람이 아니고, 왜 괜찮고 왜 좋은지를 말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조금 집단화하여, 위에서 언급한 죽림칠현 같은 그룹이나 기업과 같은 대규모 그룹인 경우에는 휄씬 더 구체적인 숫자로 평가가 가능해 지고 있다.
즉, 과거처럼 집단의 기억으로 스리슬쩍 '평판'을 부여하지는 않게 된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서로가 서로의 '평판'을 요구하는 이유가 구체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동양적 오랜 관행으로 타인 또는 다른 조직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비판적인 언급을 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봤기 때문에, 가급적 타인에 대한 비평을 꺼리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최근까지도, 이를 보정하기 위해서 기업의 인사고과에서 비밀을 보장하고 상대평가를 해달라고 하는데도 정확히 평가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이러한 관행과 역사적, 심리적 배경은 시대의 변화와 각종 온오프라인 네트워크가 다양해 지면서 변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즉 '평판'의 시대적 잣대가 생겼고, 방법도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사람 또는 집단이 왜 괜찮은지, 그리고 왜 싫은지를 구체적인 수치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1,700년동안 요지부동이었던 '죽림칠현'의 고고한 '평판' 역시 바뀔 수도 있는 운명이 되었다. 이런 것이 가능한 건, 시대를 초월하여 개인과 사회의 평가와 비판이 활성화 되었고, 특히 SNS의 폭발적인 발달로 개인간의 정보교류가 활발해 졌기 때문이다.
그 동안은 좋은 것에 대한 '평판'이 주를 이어 평판을 형성했지만, 이제부터는 그렇지 않은 다양한 정보로도 '평판'이 만즐어 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평판'의 흐름과 트랜드가 역사상의 '위인'과 독보적인 일들에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평판'의 시대적 잣대는 역사적 사실 조차 편안하지 않게 만들 정도가 된 것이다. 이제부터 명성이 스스로를 평가하는 잣대가 아니고, 평판이 명성이 된 것이다
(윤희성 문화평론가)
◼ 도시 은자(隱者)
대학시절 중국 시문학 수업 때 읽은 시 중 아직도 은은한 여운으로 남아있는 시가 있다. 당(唐)나라 시인 가도(賈島)의 '은자를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고(尋隱者不遇)'이다.
松下問童子 言師釆藥去
只在此山中 云深不知處
소나무 아래서 동자에게 물으니 "스님 약초 캐러 가셨어라. 다만 이 산 중에 계실 텐데 구름 깊어 계신 곳 몰라요"라고 말하네.
마음이 헝클어질 때면 이 시를 떠올려 본다. 적막한 산중의 오두막, 맑은 눈의 귀여운 동자는 소나무 아래에서 이제나 저제나 스승님 오시기를 기다리고, 방 안에는 찻물 끓는 소리, 운무 자욱한 골짜기에는 눈썹 하얀 은자(隱者)가 약초를 캐고…
속기(俗氣)라곤 찾을 수 없는 시다. 마른 목에 시원한 샘물 한 표주박 흘려보내는 듯 청량감을 준다. 마음이 고즈넉해진다. 법정스님의 '텅빈 충만'과도 비슷한 느낌…
요즘 부쩍 은자(隱者)의 삶에 관심이 간다. 옛 중국의 숱한 시인들 중 동진(東晉)때의 도연명(陶淵明)에 한결 마음이 향하는 것도 은자적 면모 때문이다.
전 생애 내내 가난과 인연이 끊이지 않았던 도연명은 워낙 농사짓고 책 읽는 것을 좋아했지만 가족들 입에 풀칠하느라 어쩔 수 없이 벼슬아치의 길에 들어섰다.
하지만 10년 남짓 동안 번번이 사직과 낙향을 반복했다. 생활고에 쫓겨 다시 관직에 나가도 이내 사직했다. 아래위 눈치코치 봐야 하는 관료생활이 안 맞았던 탓이다.
마지막 팽택 현령 때도 부임 석달이 안돼 그만두었다. 상부에서 파견 나온 감독관의 오만한 태도 때문이었다. "겨우 쌀 닷말(녹봉) 때문에 하찮은 향리의 소인에게 굽실거릴소냐!" 내뱉고는 낙향해 버렸다.
이후 죽을 때까지 20여 년간 갠 날에는 밭을 갈고 비 오는 날엔 글을 읽는 '청경우독(晴耕雨讀)'의 삶을 살았다. 여전히 가난했지만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꽃 꺾어 들어 멀리 남산을 바라보고, 해질녘 더욱 아름다워지는 산(山) 기운에 감탄하는 유유자적을 누렸다.
그 시절 일상에서 길어올린 '귀거래사'나 '음주' 같은 시들은 '도연명' 이름 석자를 중국문학사에 깊이 아로새겼다.
중국 역사에는 각양의 은자들이 많다. 죽림에 모여 거문고 뜯고 술 마시고 청담(淸談)을 논하면서, 속세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는 삶을 지향했던 죽림칠현(竹林七賢)도 그러했다.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동진시대 왕희지도 관직을 접고 은자의 길을 택한 사람이다. 부유한 귀족 출신이었지만 관료생활에 끝내 익숙해지지 않았던 왕희지는 자원하여 회계군으로 내려가 저 유명한 '난정집서'를 썼고, 얼마 후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산수 아름다운 회계에 묻혀 살면서 거위의 목 움직임을 보며 서법을 연구하고, 약초도 캐며 충일한 여생을 보냈다.
소동파와 함께 북송의 4대 서가(書家)로 꼽히는 미불(米芾)은 다재다능한 기인이기도 했다. 출세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던 그는 사사건건 상관과 충돌하고 좌천당하면서도 가족생계를 위해 40년 긴 세월을 관리로 지냈으니 이른바 '관은(官隱; 관료계 은자)'인 셈이다.
명말(明末)의 여행가이자 탐험가, 지리학자인 서하객(徐霞客)은 30여 년간 수많은 심산유곡을 탐험하느라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그 고독하고 험난한 여정의 기록물이 바로 '서하객유기(徐霞客遊記)'이다. 말하자면 '이동하는 은자'였다.
역시 명나라 때 소주의 유명 문인 4명을 일컫는 '오중(吳中)의 사재(四才)'의 스승격인 고명한 화가 심주(沈周)는 명 태조 주원장의 배척으로 집안이 크게 기운 탓에 83년 생애 동안 벼슬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시은(市隱; 도시의 은자)' 으로 일관했다.
심주의 영향으로 당시 소주에는 권력과 관료사회에 등 돌리는 '시은' 전통이 생겨나기도 했다.
깊은 산중에서 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다룬 TV 다큐물을 한때 즐겨보았다. 불현듯 산다는게 간단치 않은 무게로 다가오고, 인간관계가 덧없이 여겨질 때면 세상에서 한발짝 떨어지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자연인(自然人) 다큐물이 인기를 얻는 것도 대리만족 때문이다.
한데, 요즘 왜 이리도 세상은 더 소란스러울까. 정의니 공정이니 하는 단어들이 이토록 일상적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던가 싶다. 들끓는 세상에 염증을 느끼게도 된다. 깊은 산으로 들어갈 용기일랑 아예 없으니 도시 은자의 생활방식이라도 추구해야 하나.
하기야 끝이 안 보이는 코로나 공포로 우리 모두 약간은 도시 은자 비슷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참이다. 그런데 만약 앞으로 몇 년이고 코로나 공포가 걷히지 않는다면? 그 때에는 기상천외한 21세기형 은자들이 마구 생겨날 지도 모를 일이다.
(전경옥 언론인)
◼ 죽림칠현(竹林七賢)
중국 위진시대에 죽림에 은거하여 청담을 일삼은 아래 일곱 명의 은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죽림칠현(竹林七賢)은 진(晉) 초에 노장(老莊)의 사상을 숭배하여 속세를 떠나 죽림에서 혜강(嵇康)과 함께 놀던 완적(阮籍), 산도(山濤), 향수(向秀), 유령(劉伶), 완함(阮咸), 왕융(王戎)을 말한다.
이들은 정치권력을 멀리하고 세상의 압박으로부터 도피하여 술 마시고 시 짓는 일로 나날을 보냈다. 도덕과 관습을 벗어나 노장 사상을 숭배하고 무위자연을 노래하였다.
이들 중 혜강은 귀공자 종회(鍾會)가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왔을 때 예를 갖추지 않아, 뒤에 종회의 참소를 받아 사형을 당하였다.
완적은 조정에서 자주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였으며 거침없는 행동 때문에 원한을 가진 자들이 많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연산군이나 인조 때에 죽림칠현을 자처한 인물이 있었으나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탄핵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죽림칠현을 체제를 부정하거나 괴담을 주고받는 옳지 못한 무리로 규정하였다.
예컨대 1498년(연산군 4) 유자광은 안응세(安應世), 홍유손(洪裕孫) 등이 죽림칠현으로 이름하고 고담(高淡)·궤설(詭設)을 일삼고 있다고 국문하기를 청했다(연산군일기 4년 8월 16일).
이에 이미 죽은 남효온(南孝溫)과 멀리 유배된 무풍정(茂豊正) 이총(李摠) 외에 조자지(趙自知), 이정은(李貞恩), 한경기(韓景琦), 우선언(禹善言), 이현손(李賢孫), 노섭(盧燮), 유방(柳房) 등을 잡아들였다(연산군일기 4년 8월 20일).
기묘사화 이후 남곤이 조광조 등의 사림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죽림칠현이 총명하고 빼어난 자질이 있었으나 당고의 화(黨錮之禍)에 걸릴까 걱정하여 예법을 도외시하고, 명교에서 벗어나 청허(淸虛)의 풍습을 이루게 되어 결국 진나라가 망했는데, 조광조 일파도 말은 원대하지만 행동은 달라서 궤격(詭激)한 풍습을 이루어, 자기와 뜻이 다르면 소인으로 지목하여 배척하고, 자기를 칭찬하면 군자로 지목하여 결국 폐단이 일어나 구제할 수 없게 되었다고 비판하였다(중종실록 15년 9월 30일)
인조 때에는 승문원 부정자 유영(柳潁)이 두 차례나 가주서(假注書)로 임명되었지만 병을 핑계대고 나오지 않자 사간원에서는 그를 탄핵하며, 유영이 술이나 마시는 것을 고상하게 여기고 나라의 정치와 법에 대해서는 함부로 시비하면서 스스로 죽림칠현에 견주었다고 비난하였다(인조실록 6년 11월 26일).
○ 죽림칠현(竹林七賢)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대개 지식인은 빈곤한 계층이기 때문에 (꼭 그렇지만은 않았지만) 사대부의 사치는 죽림칠현 이래 대개 정신의 사치, 정신의 방탕이 중심을 이룬다.
죽림칠현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완적(阮籍), 혜강(乂康), 산도(山濤), 유영(劉伶), 완함(阮咸), 향수(向秀), 왕융(王戎) 등 일곱 사람이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3세기 중반, 조씨의 위에서 사마씨의 진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격동의 전환기였다. 이 위험한 시대에 죽림칠현은, 새로이 등장한 정권의 반대파를 색출하는 데 혈안이 된 사마씨의 첩보망을 피하기위해 노장사상의 '무위자연' 이념에 기반한 독특한 생활방식을 창조했다. 그들은 쓸모없는 존재가 되기를 자처하여 그 생을 마치고자 했다.
죽림칠현의 일원인 왕융이 명문귀족 '낭사 왕씨'의 일족인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모두 귀족층이었다. 육조시대를 거치면서 귀족층과 사대부층은 거의 일치하였다.
이 점이 근세 이후의 사대부층과는 크게 다른 점이다. 또한 죽림칠현이 후세에 알려진 모습처럼, 정치적 세계에서 떨어져 나가 죽림에 모여 다 함께 술에 취하고 음악을 즐기는 식으로, 하나의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는지도 확실치 않다.
그러나 죽림칠현 전설이, 기성 정치체제 속에서 살기를 강요하는 유교적 가치관을 배척하고, 자유롭고 다양한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후세의 사대부에게 이상형이 된 것은 틀림없다.
○ 몽환적 인생관
죽림칠현이라 해도 생활방식은 저마다 달랐다. 리더격인 완적이나 혜강의 일견 자유분방한 생활방식도 실제로는 권력기구와의 숨막히는 긴장관계 속에서 신변의 안전을 꾀하면서도 반항적 태도를 관철하기 위한 고육책의 성격이 강하다.
이에 반해 주량을 알 수 없는 대주가로 알려진 유영은 이 세상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정신을 통째로 탕진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완적이나 혜강처럼 영향력 있는 거물도 아니었다. 또한 문학자로서도 초일류급에 속했던 완적이나 혜강과는 달리 겨우 한 편의 산문(술의 효용을 칭송한 '주덕송(酒德頌)'이라는 작품)만을 남겼을 뿐이다. 어떤 면에서는 그가 매우 홀가분한 처지였기 때문에 더욱 돋보였다고도 할 수 있다.
유영은 '주덕송' 서두에 이렇게 말한다.
대인(大人) 선생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천지개벽 아래 이후를, 하루, 일만 년을 한 순간, 태양과 달을 자기 집 대문, 전 세계를 자기 집 뜰로 생각한다.
어디로 갈 때는 수레 바퀴자국 흔적이나 족적을 남기지 않고, 일정한 주거조차 없다.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이불 삼아서 생각하는 대로 행동한다.
멈출 때는 술잔을 손에 들고 움직일 때는 술잔과 호리병을 매달고 간다. 오로지 술을 마시는 데만 정신을 쓰고 그 밖의 일에는 일체 관심을 갖지 않는다.
유영의 이러한 유유자적한 술 찬가의 근본은 번거로운 현실세계에서 빠져나와 천지자연과 일체가 되고자 함이다. 넉넉한 생성과 소멸의 섭리에 몸을 맡기는 것이야말로 참된 인간존재의 모습이라는 노장사상의 이념을 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이 장대한 몽상을 자신의 몸속에 끌어들이기 위한 필수품이 바로 술이라는 것이다.
유영의 삶은 '술에 젖은 것'이라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그가 외출할 때는 항상 한 병의 술을 걸친 후 작은 수레에 타고는 시종에게 가래(흙을 퍼 담는 기구)를 지니고 뒤따라오게 하여 "죽으면 즉시 묻으라"고 말했다. 죽는 그 순간까지 꿈을 꾸듯이 살려고 한 것이다.
○ 왜 나의 잠방이 속에 들어오는가
이 확신범적 알코올 중독자에게는 이 밖에도 술에 얽힌 일화가 많다. 예를 들면 눈물을 흘리면서 술을 끊으라고 애원하는 처에게, 신에게 기도하고 금주 서원을 세울테니 신주(神酒)를 가져오라고 해놓고는, 술을 가져오자, "하늘은 유영을 낳고, 술로써 이름을 날리게 하신다"며 기도를 하는가 싶더니 신주를 단숨에 들이키고 금세 곤드레 만드레 취해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게다가 그는 취하면 집 안에서 옷을 홀딱 벗곤 했는데 그 모습을 본 사람이 비난하자, 숙련된 노장철학의 과장법을 방패 삼아 정색을 하고 나섰다. "나는 천지를 집으로 생각하고 집안을 잠방이라고 생각한다. 자네들은 왜 내 잠방이 속으로 들어오는가"라고 응수해 상대를 머쓱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유영이 언제나 그렇게 전투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술에 취해 있어도 쓸데없는 싸움은 멀리하려는 매우 유연한 면도 있었다.
어느 날 유영이 성질 급한 사람과 술을 마시게 되었다. 두 사람 모두 대취한 상태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상대방이 주먹을 치켜들고 때리려고 하자 유영은 유들유들한 말투로 이렇게 받아넘겼다. "나는 계륵(닭의 갈비뼈. 버리기는 아깝지만 그다지 쓸모도 없다는 것의 비유)이기 때문에 자네의 주먹을 받을 만한 인물이 못되네." 상대방은 웃어넘기고 긴장은 그 자리에서 풀렸다.
유영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장대한 우주적 환상속에서 정신의 해방을 꿈꾸면서도 우주와 인간을 대비하며 현세의 부질없음을 내보였다. 그는 이렇게 몸을 굽힘으로써 밀려오는 외부의 압력을 비켜가려 한 것이다.
술독에 빠져 산 유영은 위험하다 싶을 때 몸을 굽히는 방법을 완전히 체득하면서 정신적 방탕을 다하여 위진교체기를 큰 실수없이 살다가 유유히 천수를 다하려 했던 것이다.
이후 서진 동진을 통해 이러한 유영의 정신적 쾌락을 앞세우는 nonsharam(적극적인 관심이 없어 행동에 열의가 없는 모양)한 생활방식을 추종하여 술없이 무슨 인생이 있으랴, 하고 기절할 때까지 취하는 것을 즐기는 모방자가 속출하기에 이른다.
위진 시대는 지식인 귀족들이 쾌락 추구에 모든 것을 내맡긴 시대였다. '지식인은 곧 정치적 인간'이라는 중국 전통의 공식이 깨끗이 없어진, 역사상 드문 시대였다고 할 수 있겠다.
○ 지독한 낭만주의와 자연주의
완적의 이웃에 주점을 열어 술을 팔고 있는 아름다운 부인이 살고 있었다. 완적은 친구들과 어울려 그 부인과 함께 술을 마시곤 했다. 그리고 취하여 그 부인 옆에서 잠이 들곤 했다.
부인의 남편은 당연히 완적과 자기 아내의 관계를 의심했으나,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고 난 뒤 완적에게 다른 뜻이 전혀 없었음을 알게 되었다.
완적은 또한 친척들과 술을 즐겨 마셨는데 큰 동이에 술을 담고 둘러앉아 큰 술잔으로 퍼마시곤 했다. 그들이 술마시는 자리에 돼지 떼가 몰려오면 심지어 돼지들과 함께 마시기까지 했다.
요즘말로 하면 죽림칠현은 지독한 낭만주의, 자연주의자들로 보인다. 그들은 도덕 수양에 힘쓰고 나아가 천하를 평안케 해야 한다는 유교적 가치관과 거리가 멀었고, 현실을 도피하여 숨어사는 은자(隱者)로서의 태도도 보여주었다.
그들이 살았던 시기는 위나라가 후한 왕실을 찬탈하고, 다시 위나라의 신하인 사마씨들이 위나라 왕실을 무너뜨려 진 왕조를 세우려는 시기였다.
그러한 정치적인 격변기 속에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다만 죽림에서 술 마시고 청담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변형된 정치적 의사표현으로 볼 여지도 있다.
○ 혼란기 지식인의 초상
실제로 죽림칠현은 술만 마시고 청담만 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예컨대 혜강은 사마씨를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 관구검(고구려 동천왕 때인 246년에 유주 자사로서 고구려를 공격한 적이 있다) 진영에 가담하려 한 적이 있다.
왕융은 재물을 축적하는데 몰두했으며, 산도는 사마씨 정권에 아첨하여 벼슬을 했고, 완적 역시 사마씨 정권의 비호를 받았다. 세속에서 벗어나기를 원했으나 결코 세속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던 셈이다.
죽림칠현은 정치적, 사회적 혼란의 시기에 중국 지식인들이 대처하는 전통적인 방식, 즉 역사와 노동의 세계에 적극적으로 참여(出)하지 않고 자연과 은일(隱逸)의 세계로 물러나는(處) 태도의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 죽림칠현(竹林七賢)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당시 위나라와 진나라의 정권교체기 시대에 부패한 정치권력에 등을 돌리고 죽림에 모여서 거문고와 술을 즐기면서 청담으로 세월을 보낸 7명의 선비로 산도(山濤), 왕융(王戎), 유영(劉伶), 완적(阮籍), 완함(阮咸), 혜강(嵆康), 상수(向秀) 를 묶은 말이다. 강좌칠현(江左七賢)이라고도 한다.
죽림이 관련된 이유는 이들이 청담을 논하는 장소가 죽림인데, 탁한 속세와 멀리 떨어져 있어 죽림은 당시에 청담을 논의하기 위해 좋은 장소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친상에 가면서 거문고를 가져가 연주한 것, 상 중에 고기와 술을 먹는 것, 옷을 벗어던지는 것, 불효의 죄로 고소당한 친구를 변호하는 것 등 당시 유교라는 전통적인 가치관에 반기를 드는 행위를 많이 했다. 덤으로 나체 악기 연주 댄스 같은 현대에도 백안시 당할 일도 많이 했다.
● 호평
이들이 보이는 행동은 겉보기에는 자유분방하지만 속으로는 오히려 유가사상을 깊이 믿고 있었다. 완적이 정작 자신의 아들은 음주 행렬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거나 혜강이 가계(家誡)라는 책을 써서 자신의 아들에게 올바른 사람이 되기 위한 예절과 주의사항을 훈계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리고 후한시대의 청의(淸議)라는 사상에 따라 불의한 정권에 대한 소극적인 저항의식도 있어서 조정에서의 출사권유를 여러가지 방법으로 거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들의 사상은 하안(何晏)과 왕필(王弼)이 시작한 유학의 새로운 해석을 바탕으로 한 3현(三玄)이라고 불리는 도덕경(道德經), 장자(莊子), 주역(周易)의 연구와 해설을 중심으로 하는 현학(玄學)과 합쳐져서 청담사상을 완성한 공로가 있다.
적어도 이 때까지의 청담사상은 불의한 권력에 대한 저항의식을 가지고 유가 이외의 다른 사상에 대한 생각의 확대를 도모했으며 물욕과 권력욕을 억제해서 시대의 한계점은 있으나 나름대로 정상적인 발전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저항의지를 권력자들이 모를리가 없었고, 결국 탄압받게 되면서 청담사상은 저항의식을 상실하고, 현학도 2류 학자들의 얼치기 따라하기로 인해 망가지면서 청담사상은 사실상 권력가의 취미 겸 헛소리 경연대회라고 볼 수 있는 공담(空談)으로 급격하게 변질했다.
덕분에 청담사상은 위진남북조시대가 끝날 때까지 해악을 끼치게 되며, 공담을 즐기는 작자들이 '자신들의 한량놀음을 죽림칠현을 본받는 것이다'고 면피질까지 하면서 후세의 평가까지 덩달아 떨어지는 불운을 겪게 된다.
● 비판
이건 죽림칠현을 너무 높이 평가하는 것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것이 자오찌엔민(趙劍敏)이 쓴 '죽림칠현 빼어난 속물들'이라는 책이다. 상하이대 고대정치사상사 교수인 저자에 의하면 죽림칠현은 정치적 계산과 출세 목적이 섞인 결사체로 파악한다.
이 주장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는데, 혼자서 은거한 것이 아니라 여럿이 모여서 행동했다. 혼자서 은거하면 그냥 은둔이지만, 당대에 이름난 명사들이 모여서 은거하는 형태를 취하면 영향력을 유지하면서 명사로 이름을 알릴 수 있다.
이들이 은거했다는 곳은 산양인데, 산양은 당대의 중심지중 하나인 낙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이들의 행적은 금새 낙양을 통해서 천하로 알려졌다.
결정적으로 이들의 은거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고, 실제로 은거기인의 모습을 유지한 이들도 많지 않다. 실제로 이들이 출사권유를 거절한 것이 유명할 뿐이지, 실제로는 출사한 적이 있거나 대부분 출사했다라는 사실은 모르는 이들이 많다.
이들이 청담을 논하면서 세월을 보낸 것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뿐이다. 산도가 사마소의 천거로 벼슬자리에 나가면서 죽림칠현은 해체된다. 당장 구성원들의 말년 행적만 봐도 알 수 있다.
○ 산도(山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마소에게 천거되면서 죽림칠현 해체의 배경이 되었다. 사마소와는 먼 친척으로 삼공의 하나인 사도의 직위까지 오른 인물로 죽림칠현의 상당수는 산도의 천거로 관직에 올랐다. 혜강의 아들도 천거해줬다.
○ 혜강(嵆康)
처음에는 무제 조조의 아들 패목왕 조림의 손녀 장락정주와 결혼하고 낭중으로 천거되어 중산대부에 제수되는 등 일시적으로 관직 생활을 하다가 사마씨가 집권하자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산도에 의해서 천거되었으나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절교하는 등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죽림칠현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종실의 여인과 결혼해서 워낙에 정계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혜강의 발언은 정치적으로 큰 의미를 지닐 수 밖에 없었으며, 이 때문에 평소에 미움을 샀던 종회와 사마소에 의해서 반역과 불효죄 등이 엮여서 참형당했다.
○ 상수(向秀)
혜강이 처형된 후 관직에 올랐으며, 산기상서를 지내는 중 병사함.
○ 왕융(王戎)
종회의 추천으로 관직에 올랐으며, 산도와 마찬가지로 벼슬이 삼공에 이르렀다. 워낙에 정치적으로 문제가 많아서 후대에 왕융은 죽림칠현에서 제명해야 된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 유영(劉伶)
역시 관직에 올라서 왕융이 장군을 지낼 때 건위참군으로 일했다. 사마소에게 도가정치를 권유했다가 무능하다고 찍혀서 낙향당했다. 이후 술마시다가 인생을 마감했다. 술과 관련해서 일화가 많기 때문에 죽림칠현의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지만, 이 사람이 술 마시던 일화의 대부분은 죽림칠현 해체되고 한참 뒤의 이야기다.
○ 완적(阮籍)
조방 시기에 상서령에 올랐다가 낙향, 조상의 참군이 되었으나 다시 금방 낙향했고, 사마소의 총애를 받아서 유영과는 달리 술 마시고 막말을 많이 했음에도 꾸준히 관직을 유지했다.
○ 완함(阮咸)
완적으로 조카로 역시 산도의 천거를 받아서 이부령이 되며 관직에 올랐다. 대충대충인 성격에 술 좋아해서 평은 역시 좋지 않았다. 산기상서, 시평태수 등을 역임했다.
이를 보면 알 수 있지만, 혜강이 사마소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다음에 나머지 인물들도 모두 크건 작건 관직 경력이 있으며, 혜강마저도 그 전에는 벼슬을 지낸 적이 있다.
목숨걸고 관직에 안 오르고 그런거 없다. 좋게 본 것이 관직에 올라서 술마시고 제대로 일 안했더라는 것이 고작이고, 심한 경우에는 열심히 일해서 고위관직에 오르다 못해 줄타기까지 한 인물도 나왔다.
이것을 고려하면 후대 인물들이 죽림칠현의 고매한 뜻을 왜곡해서 정작 이들의 평가마저 나빠졌다라는 것이 신빙성을 잃게 된다.
이들 중에서 실제로 의식이 있어 보였다는 것은 혜강이나 산도가 출사했다는 것을 듣고 절교서를 보낸 완적 정도?, 나머지는 단순히 같이 묶여서 같은 평가를 받은 인물들일 뿐이다.
더구나 혜강은 일종의 부마라서 사마씨 집안과 관련해서 출사를 한다는 것이 어려웠으며 그 때문에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나, 혜강이 세상을 떠날 때도 완적이 크게 말을 하지 못하다가 결국 혜강을 살해한 사마소의 총애를 받았다는 것까지 고려하면 평가가 더더욱 박해지게 된다.
◼ 죽림칠현(竹林七賢)과 혜강(嵇康)
○ 중국 역사상 가장 고통스런 시대 중 하나
혜강(嵇康)이 살았던 위진 교체기는 도연명에 비해 훨씬 냉혹했고 위험했다. 위진 교체기는 조조의 아들 조비가 위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칭한 220년부터 서진 왕조가 수립된 265년까지를 말하는 것으로 40여 년 사이에 조비, 조예, 조방, 조모, 조환 다섯 명의 황제가 집권한 매우 혼란한 시대였다.
더구나249년(正始10년)에 일어난 고평릉(高平陵)의 변란을 통해 사마의를 영수로 하는 사마씨 집단이 조씨 세력을 밀어내고 실권을 장악했다. 이 사건 이후 조씨 왕조는 명목상 계속 되지만 권력은 사마씨의 수중에 떨어져 버렸다.
사마씨는 정권을 공고화하기 위해 명망가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한편, 반대파에게는 피비린내 나는 숙청을 단행했다. 권력 투쟁의 와중에 놓인 지식인들은 엄혹한 선택에 직면했다.
이름뿐인 황제에 충성해야 할지 아니면 신하지만 권력을 한 손에 쥔 집권파에 머리를 숙여야 할지를 선택해야 했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일신의 안위를 위해 사마씨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 역사상 지식인들에게 가장 고통스런 시대 중의 하나였다. 시대는 이처럼 추악했지만 개인을 각성한 인간들의 개성과 매력이 빛났던 시대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죽림칠현(竹林七賢)이다. 이들이 있었기에 암흑과 같았던 시대도 가릴 수 없었던 한줄기 빛을 우리에게 전해주어 따뜻한 위안이 된다.
○ 공자가 말하기를 '세상을 피한 사람이 일곱명'
죽림칠현은 위나라 정시(正始) 연간에 혜강(嵇康), 완적(阮籍), 산도(山濤), 상수(向秀), 유영(劉伶), 왕융(王戎), 그리고 완함(阮咸) 일곱 명으로, 이들은 지금의 하남성 수무현(修武縣)인 다시 산양(山陽)의 대나무 숲 아래에서 술 마시고 시를 짓고 노래하며 어울렸다. 진인각(陳寅恪)라는 저명한 학자에 따르면 죽림은 실제 대나무 숲이 아니라 불교의 죽림정사라는 이름에서 따왔다고 했다.
또한 칠현은 논어(論語) 헌문(獻文)편에 "현인은 세상을 피한다. 그 다음은 무도한 땅을 피하고, 그 다음은 안색을 보고 피하고, 그 다음은 언어를 보고 피한다. 공자가 말하기를 세상을 피한 사람이 일곱 명 있었다(子曰: 賢者辟世其次辟地 其次辟色 其次辟言. 子曰: 作者七人矣)"에서 따왔다고 했다.
그들이 어울렸던 당시 산양현에 실제로 대나무 숲이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유네스코에서 정한 세계지질공원 중의 하나인 운태(雲臺)산이 있는 곳으로 매우 아름다운 관광지다. 칠현도 단지 그들 일곱 명만이 어울렸다기보다 논어(論語) 구절에 맞춰 명명했다고 본다.
그들은 모두 항상 함께 모여 어울렸다는 말이 아니라 어떤 때는 세 명, 어떤 때는 두 명 식으로 서로 어울렸고, 어떤 경우에는 이 그룹에 속하지 않은 사람과 더 친한 경우도 있었다. 요즘 말로 하면 느슨한 관계로 엮인 일곱 명의 그룹이라고 보면 된다.
죽림칠현이라는 명칭은 대규(戴逵)라는 인물이 지은 '죽림칠현론(竹林七賢論)'에 처음 나온다. 눈 오는 밤에 왕휘지(王徽之)가 친구 생각이 나서 찾아갔다가 흥이 다해 그냥 돌아왔다는 설야방대(雪夜訪戴)의 대(戴)가 대규(戴逵)라는 인물이고 왕휘지는 왕희지의 서법(書法)을 계승한 왕희지의 다섯 째 아들이다.
○ 난세의 지식인, 죽림칠현의 삶
죽림칠현에서 중요한 세 사람만을 고르라고 한다면 산도, 혜강, 완적이다. 산도는 죽림칠현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맏형 격인 인물로 꽤 괜찮은 인물이다. 산도가 혜강과 완적이라는 나이 어린 친구 자랑을 하도 하기에 그의 아내가 두 친구를 초대하라고 해놓고 남편과 어울려 노는 모습을 숨어서 훔쳐보다가 날이 밝는지도 몰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산도는 혜강에게 좋은 마음으로 관직을 권했다가 절교 편지를 받았기에 후세에 나쁜 인상이 남아 있지만 혜강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아들 혜소를 부탁한 사람이다. 절교한 친구에게 죽으면서 혜강이 아들을 맡긴 이유는 천고의 미스터리다. 그래서 그 절교가 반은 진짜고 반은 거짓이라는 말이 있다.
산도는 좌우간 청렴한 관리였고 절교 편지를 보낸 친구의 아들을 잘 돌봐줬으니 박하게 평가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혜강이나 완적과 다른 길을 걷게 된 주된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사마의의 먼 조카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완적은 죽림칠현 중에 혜강과 비교되는 인물이다. 두 사람 모두 고집이 대단하였지만 완적은 노년에 이런 성질을 고치고 '인물의 옳고 그름을 입으로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목숨을 부지했다.
그는 젊은 시절 반기는 사람이 오면 청안(靑眼)으로, 싫은 사람이 오면 백안(白眼)으로 대했다. 백안시한다는 말은 여기서 유래했다.
완적은 알지도 못하는 이웃집 처녀가 죽자 가서 곡을 했지만 바둑을 두다가 어머니의 상을 당했을 때는 계속 바둑을 두고 나서 말술을 마시고 피를 토한 일도 있었다. 고독한 심정을 토로한 영회시(詠懷詩) 85수는 매우 유명하다.
상수는 장자에 주석을 단 인물이고, 유영은 술의 덕을 칭송한 주덕송의 작자로 자신이 술 마시다 죽으면 묻으라고 하인에게 삽을 들고 따라 다니도록 한 기행으로 유명하다.
한번은 유영이 술에 취해 옷을 벗고 나체로 있었는데 손님이 찾아와 그러면 되느냐 했더니 나는 천지를 집으로 삼고 나의 집이 팬티인데 왜 남의 팬티 속에 들어와 이러쿵 저러쿵 말을 하냐고 했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완적의 조카 완함은 돼지우리에서 돼지와 함께 술을 마시기도 한 인물로 비파라는 악기의 창시자이고 죽림칠현 중에서 제일 나이가 어린 왕융은 어려서 똑똑하고 담력 있는 신동으로 유명했다. 말년에 지독한 구두쇠가 되었다고 했다.
○ 혜강의 비정상적인 죽음
혜강은 죽림칠현 중에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다. 나이는 산도보다 거의 스무 살이나 어렸지만 죽림칠현의 정신적 리더였다. 초군(譙郡) 질현(銍縣) 지금의 안휘성 숙주(宿州)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형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 7척 8촌(대략 190센티미터)에 달하는 큰 키에 외모가 출중했고 재능이 빼어났다.
군계일학이라는 성어는 어떤 이가 그의 아들 혜소의 모습을 보고 "의젓하고 늠름해 마치 닭의 무리 속에 있는 한 마리의 학 같았다"고 한데서 유래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왕융이 "혜소의 아버지는 그보다 더 뛰어났었는데, 당신은 그의 부친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소"라고 했다. 이 말을 통해 혜강이 어떤 용모를 지니고 있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산도는 "홀로 우뚝 서있는 외로운 소나무처럼 장엄했고, 취했을 때는 무너지는 푸른 옥산과 같았다"고 평하기도 했다. 이런 혜강의 풍채를 묘사하는 말로 '용의 무늬와 봉황의 자태(龍章鳳姿)'라는 말이 있다.
재능이 출중하고 외모도 빼어났을 뿐만 아니라 취미도 상당히 멋있었다. 집 주변의 커다란 나무 밑에서 친구인 상수와 함께 쇠를 담금질하는 일이 취미였다고 했다.
혜강이 쇠를 단련하고 있을 때 한번은 종회(鐘會)라는 당시 세도가가 출세해서 단단히 차려 입고 여러 사람과 함께 그를 찾아온 일이 있었다.
혜강이 아는 체도 하지 않으니 종회가 머쓱하여 돌아가려고 하자 "무엇을 듣고 왔다가 무엇을 보고 가느냐"고 말했다. 종회가 "들을 걸 듣고 왔다가 볼 걸 보고 간다"고 대답했다.
종회는 이 일로 혜강에게 앙심을 품었다. 결국 이 사건은 혜강이 죽임을 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억울하게 형벌을 받게 된 친구 여안(呂安)을 위해 혜강이 용감하게 변호하자 그렇지 않아도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종회가 누명을 덧씌워 결국 혜강은 처형되고 말았다.
혜강의 사상은 '명교(名敎)를 초월해서 자연에 맡긴다(越名敎而任自然)'와 '탕무를 비판하고 주공과 공자를 가벼이 여긴다(非湯武而薄周孔)'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혜강이 명교를 비판 이유는 자연을 따라 본성대로 살아야 한다고 설파한 노장(老莊) 철학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유교의 이상에 대해 진정으로 믿었던 혜강은 입으로는 고상한 명교를 말하지만 속으로는 온갖 추악한 악행을 서슴지 않았던 사마씨 정권과 그 일당들의 허위에 분노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무력혁명을 했던 탕임금과 무왕, 섭정을 했던 주공, 선양을 높이 평가한 공자를 모두 비판한 이유는 당시 실권자였던 사마소가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모든 선택지를 부정하기 위해서였다.
사마씨 정권에 참여하고 있던 산도에게 절교 편지로 펼친 혜강의 행위는 '나를 죽여달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한 일과 다를 바가 없다.
그가 조조의 손녀(혹은 증손녀) 사위였던 점, 사마씨 정권에서 신망을 얻고 있었던 종회가 지난 일에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지 않으면 왕도를 바로 잡을 수 없다고 주장한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그는 결국 사형에 처해졌다.
그를 죽이려 할 때 태학생 3000명이 그를 죽이지 말고 최고 학부인 태학의 선생님으로 모셔야 한다고 상소문을 올렸다고 하니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내가 죽으면 이 곡은 전해지지 않으리라
그가 담담히 형장에 올라가 죽기 전에 고금(古琴; 우리로 치면 거문고지만 현이7줄이라 칠현금으로도 불린다)으로 연주한 노래가 바로 광릉산(廣陵散)이라는 곡이다.
혜강은 죽음을 앞두고 "원효(袁孝) 네가 이 곡을 배우고자 하였으나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이제 지금 이 곡이 끊어지게 되었구나!"고 탄식했다.
광릉산은 이제는 사라져서 전해지지 않는 학술이나 기예를 의미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중국 역사상 비정상적인 죽음을 맞이한 문인은 많지만 고금을 연주하면서 죽은 사람은 없다. 아니 세계 역사를 둘러보아도 아마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광릉산의 원래 이름은 '섭정이 한왕을 찌르다(聶政刺韓王)' 혹은 '금을 배워 부친의 원수를 갚다(學禁報仇)'이다.
전국시대 칼을 만드는 기일을 지키지 못해 피살된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고금을 배워 결국 한왕을 죽이고 자신도 자결한 섭정의 비장한 이야기가 담긴 곡이다.
광릉산에서 광릉(廣陵)은 지금의 강소성 양주의 옛 지명이고, 산(散)은 악곡의 이름인데 사실 이 곡은 사라지지 않았다. 민간에 떠돌던 악보가 수나라 황궁에 보관되었다가 당나라 황궁으로, 그리고 다시 민간에 흘러 다니다가 천여 년이 지난 명나라 초기에 주권(朱權)이 '신기비보(神奇秘譜)'에 악보를 수록했다.
신중국 이후에 저명한 고금 연주가인 관핑후(管平湖)가 현대적 형식으로 기록한 악보가 유명하다. 연주 시간은 대략30분이다. 비장하면서 애잔하고 울분과 투쟁과 반항이 어우러진 영웅의 기개를 표현한 명곡이다.
혜강은 일찍이 '음악엔 슬픔이나 즐거움이 없다(聲無哀樂論)'는 글을 쓴 일이 있는데 이 곡을 듣고 있으면 슬프면서도 고요해진다. 광릉산이 원래 슬픈 음악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혜강의 일생을 알고 있는 마음이 슬퍼서일까.
◼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완적(阮籍)
완적(阮籍, 210∼263)은 하남성 개봉 인근 진류 출신으로 자는 사종이다. 후한 말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명인 완우의 아들이다. 일찍이 보병교위를 지냈으며 혜강과 함께 죽림칠현(竹林七賢)의 대표적 인물이다.
죽림칠현은 위진 시대 당시 부패한 정치와 사회를 비판하고 술과 가무와 시로 청담의 삶을 영위한 지식인들이다. 완적, 혜강, 산도, 향수, 유영, 완함, 왕융의 7인이 이에 해당한다. 이중 완적과 혜강이 재주와 독설과 기행으로 유명하다. 죽림에 모여 술과 거문고와 시를 즐겼다고 해서 죽림칠현이라 불린다.
자연에 순응하고 인위적 행동을 자제하는 노자 장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에 심취했다. 유교적 질서와 형식을 배격하고 집권자의 권력행사를 비판하는 입장을 취했다. 후일 반(反) 체제 지식인의 전형으로 평가되었다.
완적은 위나라 말기 동평상에 임명되었다. 임지에 부임하자마자 관청의 담을 모두 헐어 안이 훤히 보이도록 했다. 이 조치로 관을 무서워 하는 백성들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의 명성이 높아진 것은 물론이다.
그는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났고 예의 바르게 사람들을 대했다. 말로만 의리나 예법을 떠드는 사이비 선비를 무시했다. 그는 '대인선생전'에서 어질고 의리를 지켜야 한다고 떠드는 무리를 '바지 혼솔에 숨은 이 새끼'라고 경멸했다. 속세의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을 경멸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면 청안(靑眼)으로 대했고, 싫어하는 자는 백안(白眼)으로 대했다. 사람을 무시하고 우습게 대하는 뜻인 '백안시 한다'는 고사가 여기서 유래했다.
어느 날 바둑을 두고 있는데 모친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바둑을 계속두었다. 이어서 술을 세 되 마시고 크게 목을 놓아 울고 난 후 몇 되의 피를 흘렸다고 한다. 상중에도 술이나 고기를 개의치 않고 먹었다. 상중에 연회에도 참석해 술과 고기를 즐겼다.
위의 실력자 사마소가 주최한 좌석에서도 기행을 부렸다. 사예교위 하증은 "바야흐로 효로써 천하를 다스리려 하는데 완적은 부모 상중에도 공식석상에서 술과 고기를 먹고 있다. 마땅히 귀양을 보내 풍속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고발했다.
인품이 넉넉한 사마소는 완적의 여윈 모습을 보고 병에 걸려 있을 때는 술과 고기를 먹어도 예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며 하증의 탄핵을 가납치 않았다.
술에 얽힌 완적의 일화는 '세설신어' 등에 많이 기록되어 있다. 사마소는 서진의 무제가 되는 장남 사마염의 아내로 그의 딸을 희망했다. 이를 눈치채고 60일 동안 계속 술에 취해 있어 혼담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권력을 백안시하는 그의 행동거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다.
보병아문의 주방에 맛있는 술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사마소에게 보병교위를 시켜달라고 간청했다. 이 때문에 완보병(阮步兵)이라는 별칭을 듣게 됐다.
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정권이 조씨에서 사마씨로 넘어가던 민감한 때였다. 조씨 집안과 오랜 인연이 있던 그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빠졌다. 그는 술과 현학적 언사로 위기를 빠져나갔다.
사마소는 "완적은 매우 신중했다. 그의 말은 늘 현학적이라 선악을 판정할 수 없었다"며 그의 처세를 칭찬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권력투쟁의 희생물이 되었을 것이다. "종신토록 살얼음판을 걸었다. 누가 내 마음이 타는 것을 알겠나"고 영회시라는 시구에서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다.
혼자 산과 강으로 돌아다녀 온종일 귀가 하지 않았다. 길을 잃으면 대성통곡을 했다. '완적이 길에서 통곡하다(阮籍窮途之哭)'는 일화가 탄생했다. 길을 잃어버려 운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마을에 어여쁜 유부녀가 술집을 운영하고 있는데 늘 그집에서 술에 대취해서는 그녀를 베고 누워 잤다. 남편이 의심해 몰래 동정을 살폈지만 도의를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기행은 권력자 사마씨 집안에 대한 반발이자 교묘한 생존술이었다. 조씨 집안과 막역했던 그로서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집안이 거덜날 판이었다. 그는 술과 청담으로 무장한 덕에 명철보신했고 수를 누렸다.
◼ 강좌칠현(江左七賢)
강좌칠현(江左七賢) 또는 해좌칠현(海左七賢)은 고려 후기에 현실 정치를 떠나 함께 사귀던 일곱 선비, 즉 이인로(李仁老), 오세재(吳世才), 임춘(林椿), 조통(趙通), 황보항(皇甫抗), 함순(咸淳), 이담지(李湛之)를 가리킨다.
1170년 정중부가 일으킨 무신정변을 피한 문인들은 자연 속에 깊이 파묻히면서 중국 진(晉)나라의 청담파(淸談派)인 죽림칠현과 같은 죽림고회(竹林高會)를 조직하고 시작(詩作)과 술로 생활했다.
그들은 중국의 문풍(文風)인 사부(辭賦)를 즐겨 창작했으며 중국 진나라의 시인 도연명의 '귀거래사', 송나라의 시인 소식, 두보 등의 시를 즐겨 추앙했다. 한편 죽림칠현계의 시인들과 함께 이규보 등과 같은 문인들이 속속 배출되었다.
● 이인로(李仁老)
고려시대의 문신이자 서화가이다. 자는 미수(眉叟), 호는 와도헌(臥陶軒)이며, 초명(初名)은 득옥(得玉)이다. 본관은 경원(慶源)이다. 증조부는 평장사(平章事) 이오(李오)이다. 이인로의 가문은 무신란 이전 고려 전기 3대 가문의 하나였던 경원 이씨로, 누대에 걸친 왕가의 외척으로서 부동의 문벌을 형성했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는데, 화엄종 승통인 승려 요일(寥一)에게서 성장했으며, 유교 전적과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으나, 1170년 정중부가 난을 일으키자 절에 들어갔다가 뒤에 환속했다.
1180년 문과에 급제하고 계양관기(桂陽管記)에 보직된 후 이어서 직사관(直史館)이 되었으며, 이후 14년간 사국(史局)과 한림원(翰林院)에 재직하였다. 신종 때 예부원외랑과 고종 초 비서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를 역임하였다.
관직에 있는 동안에도 혼잡한 현실에 싫증을 느끼고 오세재(吳世才), 임춘(林椿), 조통(趙通), 황보항(皇甫抗), 함순(咸淳), 이담(李湛)과 죽림고회(竹林高會)를 맺어 시와 술을 즐기며, 중국의 강좌칠현(江左七賢)을 자처하였다.
또한 최초의 시화(詩話)인 '파한집(破閑集)'을 지어서, 문학사에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며, 표현을 섬세하게 다듬는 것이 가치를 발휘하는 길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아들 이세황(李世黃)의 기록에 의하면, "문장의 역량을 자부하면서도 제형(提衡)이 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하다가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 올라 시관(試官)의 명을 받았으나, 시석(試席)을 열어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다.
고려의 대표적 문인의 한 사람으로 문장이 탁월했으며 초서와 예서에 뛰어났다. '고려사'에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리하여 글을 잘 지었고 초서와 예서를 잘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파한집'에는 "내가 일찍이 수거사(睡居士)의 묵죽을 배워서 종이나 비단으로 만든 병풍 또는 가리개를 보면 휘둘러 그리지 않은 적이 없어 비슷한 경지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시를 짓고, 남은 먹으로 푸른 대나무를 그리고 나니, 아마도 전생에 문동(文同)이 아니었을까 하고 웃었다"고 기록되었다.
● 오세재(吳世才)
본관은 고창(高敞). 자는 덕전(德全). 선대는 고창오씨 시조인 한림학사 오학린(吳學麟)이고, 할아버지는 직한림(直翰林) 오질(吳質)이며, 아버지는 탁라도(乇羅道: 제주도에 설치된 고려시대의 道) 구당사(句當使) 오인정(吳仁正)이다. 오세공(吳世功)과 오세문(吳世文)의 아우이다.
명종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성격이 소탈하여 구속함이 적어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였다. 친우 이인로(李仁老)가 세번이나 추천하였으나 끝내 벼슬에 오르지 못하였다.
그는 당시 18세였던 이규보(李奎報)에게 53세의 나이로 망년지교(忘年之交; 나이에 구애됨이 없이 사귀는 벗)를 허락하였다. 이른바 해좌칠현(海左七賢; 竹林高會)의 한 사람으로 이인로 등과 시주(詩酒)로 즐겼다.
만년에는 외할아버지의 출생지인 동경(東京; 지금의 慶州)으로 제고사(祭告使)의 축사(祝史)가 되어 역마를 타고 가 그곳에 살면서 서울로 돌아오지 않았고, 마침내 가난에 시달리다 죽고 말았다.
'주역'을 암송하고 육경에 박통할 정도로 유학 경전에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시문은 한유(韓愈)와 두보(杜甫)의 체(體)를 체득하였다. 이규보는 그의 시를 '주매경준(遒邁勁俊; 힘차고 굳셈.)'이라 평하였고, 최자(崔滋)는 '풍섬혼후(豊贍渾厚; 넉넉하고 원만함)'라고 평한 바 있다. 또한 글씨에도 뛰어났다.
경기체가 '한림별곡(翰林別曲)' 제3장 "오생 유생 두선생의 아, 붓 놀리는 모습 그 어떠합니까?"에서 오생은 바로 오세재를 가리킨다.
오세재는 명종시대 문신수난기를 당하여 현실에 타협 내지는 조화하지 못하고 문학과 시주에 탐닉함으로써 자신의 고민을 해소하려 한 것이다.
그러한 그에게 이규보는 나이를 떠난 진정한 벗이었다. 이규보 역시 그의 재주를 아끼고 삶을 애석히 여겨 '오선생덕전애사(吳先生德全哀詞)'를 지어 추모하였다.
오선생덕전애사(吳先生德全哀詞)에서 이규보는 오세재를 복양선생(濮陽先生)이라 부르고, 친구 아닌 문하생의 입장에서, 도연명(陶淵明)이 죽자 그 문인들이 정절선생(靖節先生)이라 사시(私諡)한 예를 따라, 현정선생(玄靜先生)이라 사사로이 시호하여 영전에 바쳤다. 현재 전하는 작품으로는 '동문선'에 오언율시 2수, 칠언율시 1수가 있다.
● 임춘(林椿)
고려 중·후기의 문인. 예천 임씨(醴泉林氏)의 시조. 자는 기지(耆之), 호는 서하(西河)이다.
고려 건국공신의 후예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할아버지 임중간(林仲幹)과 상서(尙書)를 지낸 아버지 임광비(林光庇) 및 한림원학사를 지낸 큰아버지 임종비(林宗庇)에 이르러 구귀족사회에 문학적 명성으로 기반이 닦여 있었다.
문헌을 상고하면 의종 무렵에 태어나 30대 후반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임춘은 일찍부터 유교적 교양과 문학으로 입신할 것을 표방하여 무신란 이전에 이미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그러다가 20세 전후에 무신란을 만나 가문 전체가 화를 입었다. 그는 겨우 피신하여 목숨은 부지하였다.
그러나 조상 대대의 공음전(功蔭田; 고려 시대에, 공신과 오품 이상의 벼슬아치에게 공을 따져 지급하던 토지)까지 탈취당하였다. 그는 개경에서 5년간 은신하다가 가족을 이끌고 영남지방으로 피신하였다. 약 7년 여의 유락(流落; 타향살이)을 겪었다.
그런 생활 중에서도 당시 정권에 참여한 인사들에게 벼슬을 구하는 편지를 쓰는 등의 자천(自薦)을 시도하였다. 다시 개경으로 올라와 과거준비까지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의와 빈곤 속에 방황하다가 일찍 죽고 말았다.
임춘은 끝내 벼슬길에 오르지는 못하였지만 현실인식의 태도에 있어 유자(儒者)로서의 입신행도의 현실관을 견지하였다. 남달리 불우하였던 생애를 군자의 도로 지켜가고자 하였다.
이인로(李仁老)를 비롯한 죽림고회(竹林高會) 벗들과는 시와 술로 서로 즐기며 현실에 대한 불만과 탄식을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큰 포부를 문학을 통하여 피력하였다.
임춘의 시는 강한 산문성을 띠고 있다. 그리고 거의 그의 생애의 즉물적 기술이라 할 만큼 자신의 현실적 관심을 짙게 드러내고 있다.
가전체소설인 '국순전(麴醇傳)', '공방전(孔方傳)'은 신하가 취하여야 할 도리에 대한 입언(立言)이면서 당세의 비리를 비유적으로 비판한 의인체 작품이다.
임춘의 서(書), 계(啓), 서(序), 기 등은 안분지기(安分知機), 가일(可逸)의 경지를 그려내고 있다. '장검행(杖劒行)'을 비롯한 장편시들은 불우한 그의 인생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와 비분의 토로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강렬한 현실지향성이 그의 문학의 특징이다. 그리고 그의 문학은 투철한 자아인식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문학사상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임춘은 예천의 옥천정사(玉川精舍)에 제향되었다.
문집인 '서하선생집'은 그가 죽은 뒤 지우(知友) 이인로에 의하여 엮어진 유고집으로 6권으로 편찬되었다. '동문선',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여러 편의 시문이 실려 있다.
● 조통(趙通)
경상남도 양산(梁山)에서 활동한 고려시대 문신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22권 명환(名宦)에 조통(趙通)이 양산수령을 지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1197년(신종 원년) 금나라에 원외랑(員外郞)으로 파견되었다가 3년간 구금을 당하고 풀려났다. 지서북면유수사(知西北面留守事)를 지내며 백성을 다스리고 1199년(신종 2) 2월 경주에서 민란이 일어났을 때 반란군을 무마시켰다.
1200년(신종 3)에는 소부감(小府監)으로서 중랑장 이당적(李唐績)과 함께 진주(晉州)에서 선정을 베풀었다. 후에는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국자감대사성(國子監大司成),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다.
이인로(李仁老)가 '파한집(破閑集)'을 집필할 때 도운 것을 계기로 평장사 최당, 백광신과 함께 기로회(耆老會)를 결성하였다. 오세재(吳世才), 이인로, 임춘(林椿), 황보항(皇甫抗), 함순(咸淳), 이담지(李湛之) 등과 함께 강좌칠현으로 불렸다.
저서로는 '동문선' 8권에 실린 오언율시 '작약(芍藥)'이 있다. 시는 다음과 같다. "꽃이 주인 없다고 누가 이르는고, 용안이 날마다 친히 와 보아 주시거늘, 철따라 첫 여름을 맞으면서, 저 홀로 남은 봄을 치다꺼리하는 듯, 바람이 불어서 낮잠을 깨우는 양, 새벽 단장을 비가 씻어 새롭다. 궁녀들 혹시나 시샘하지 마소, 예쁠사 비슷하여도 필경 참은 아닌걸."
● 황보항(皇甫抗)
고려 후기의 문인. 자는 약수(若水). 당시 시주(詩酒)로 종유(從遊)하던 죽림고회(竹林高會) 7인 중의 한 사람이다. 특히, 임춘(林椿)과 친교가 깊어서 임춘이 그에게 남긴 서한이 전해지고 있다.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 대체로 임춘의 편지 내용으로 추측할 뿐이다. 임춘보다는 상당히 연하였으며, 대대로 문한(文翰)을 세업(世業)으로 하던 귀족가문의 출신이었다.
박학다식하고 문사(文辭)에 능하여 1176년(명종 6) 승보시(升補試)에 수석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벼슬은 단지 중원서기(中原書記)를 역임하였을 뿐이니, 임춘이 그의 말직에의 부임을 위로하는 시를 보내주었다.
죽림고회의 인물들이 다 그러하였듯이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은 컸으나 사회현실에 크게 쓰이지 못하였으므로 큰 불만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악장(樂章)에 능하였다고 한다.
● 함순(咸淳)
고려 후기의 문장가. 본관은 양근(楊根). 자는 자진(子眞). 고려 건국공신 함규(咸規)의 6세손이며, 명종 때 공부상서(工部尙書)로 치사(致仕)한 함유일(咸有一)의 아들이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나고 절행(節行)이 있었다. 또한, 순박하고 중후하여 정도(正道)로 책임을 삼으며 효경과 충신을 바탕으로 한 문사(文辭)가 탁월하였다.
최충(崔冲)이 설립한 문헌공도(文憲公徒) 출신으로 급제 후 양양과 남방 어느 고을의 지방관이 되었고, 최충헌(崔忠獻) 집권시에는 사직(司直)이라는 한직에 머물렀던 것 같다.
한직에 만족하지 못하였으나, 무신정권이라는 한계 때문에 당시 이인로(李仁老), 오세재(吳世材), 임춘(林椿), 조통(趙通), 황보항(皇甫抗), 이담지(李湛之) 등 명유(名儒)들과 교유하였으며, 진(晉)나라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본떠 강좌칠현(江左七賢)을 조직하고 시와 술로 많은 나날을 보냈다.
● 이담지(李湛之)
고려 후기의 문인. 자는 청경(淸卿). 좌사(左思) 이중약(李仲若)의 내손(內孫)이다. 가계 및 생애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무인란 이후 임춘(林椿)과 마찬가지로 개경을 벗어나 유락객(流落客)이 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중앙에 기반을 둔 귀족출신으로 보인다.
죽림고회(竹林高會)의 한 사람으로 이인로(李仁老) 등과 친하게 지냈으며, 평소 술을 즐겨서 이인로가 술친구로 꼽았다. 죽림고회의 한 사람인 함순(咸淳)과 함께 최충(崔冲)이 설립한 사학인 문헌공도 출신으로 여겨지며, 임춘보다 먼저 개경에 돌아와 과거에 급제하였다.
관직은 그에 대한 일반적 호칭이 이유원(李留院)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유원(留院)이라는 하급벼슬을 했음을 알 수 있고, 금나라로 사신을 갔었으며 토적병마서기(討賊兵馬書記)를 지냈다.
이규보(李奎報)의 '논주필사약언(論走筆事略言)'에 이담지가 주필(走筆; 즉흥적으로 써내려가는 한시 창작법)의 창시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시는 전하는 것이 없고,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그와 공부(共賦)한 시를 보면 자신의 시에 대한 자부심과 빈약한 처지에 대한 한탄을 엿볼 수 있다.
이들은 서로 의를 맺어 망년지우(忘年之友)를 삼고 시(詩)와 술을 즐겨 중국 진(晋)나라 때의 죽림칠현(竹林七賢)에 비하여 강좌칠현이라 칭하였으며 한국 청담(清談)의 풍(風)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 竹(대 죽)은 ❶상형문자로 대나무 잎의 모양으로 대나무를 나타낸다. 竹(죽)의 옛 모양은 筍(순; 죽순) 따위의 글자에 붙어 있는 것에 의하여 알 수가 있다. ❷상형문자로 竹자는 '대나무'나 '죽간'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竹자는 두 개의 대나무 줄기와 잎사귀가 늘어져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갑골문에 나온 竹자를 보면 잎사귀만 늘어져 있는 모습만이 그려져 있었으나 금문에서 부터는 대나무와 잎사귀가 함께 표현되었다. 竹자는 '대나무'를 그린 것이기 때문에 부수로 쓰일 때는 대나무를 이용해 만든 물건이나 '죽간(竹簡)'을 뜻하게 된다. 또 부수로 쓰일 때는 모양이 바뀌게 되어 단순히 잎사귀 만이 표현된다. 그래서 竹(죽)은 (1)곡식을 물에 풀리도록 흠씬 끓여 훌훌하게 만든 음식 (2)팔음(八音)의 한 가지 대로 만든 관악기(管樂器) (3)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대, 대나무 ②대쪽(댓조각), 댓조각(대를 쪼갠 조각), 죽간(竹簡: 글자를 기록하던 대나무 조각) ③부챗살 ④피리(악기의 하나) ⑤죽(세는 단위)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대로 만든 창을 죽창(竹槍), 대로 만든 그릇을 죽기(竹器), 대나무를 가랑이 사이에 끼워서 말로 삼은 것을 죽마(竹馬), 대나무 숲을 죽림(竹林), 대로 만든 칼을 죽도(竹刀), 대자리를 죽석(竹席), 대나무의 가지를 죽지(竹枝), 대나무의 잎을 죽엽(竹葉), 대의 땅속줄기에서 돋아나는 어리고 연한 싹을 죽순(竹筍), 우거져서 숲을 이룬 대나무의 떨기를 죽총(竹叢), 가는 대통에 불을 지르거나 또는 화약을 재어 터뜨려서 소리가 나게 하는 물건을 폭죽(爆竹), 소나무와 대나무를 송죽(松竹), 나무와 대나무를 목죽(木竹), 산에서 나는 대나무를 산죽(山竹), 푸른 대나무를 녹죽(綠竹), 먹으로 그린 대나무를 묵죽(墨竹), 단면이 네모가 난 대나무를 방죽(方竹), 껍질을 벗긴 대나무를 백죽(白竹), 대나무 말을 타고 놀던 옛 친구라는 뜻으로 어릴 때부터 가까이 지내며 자란 친구를 이르는 말을 죽마고우(竹馬故友), 대지팡이와 짚신이라는 뜻으로 먼 길을 떠날 때의 간편한 차림을 이르는 말을 죽장망혜(竹杖芒鞋), 죽마을 타고 놀았던 오랜 벗이라는 뜻으로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친구를 이르는 말을 죽마교우(竹馬交友), 대나무 조각과 나무 부스러기라는 뜻으로 쓸모 없다고 생각한 것도 소홀히 하지 않으면 후에 긴히 쓰인다는 말을 죽두목설(竹頭木屑), 비가 온 뒤에 솟는 죽순이라는 뜻으로 어떤 일이 일시에 많이 일어남을 이르는 말을 우후죽순(雨後竹筍),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라는 뜻으로 세력이 강대하여 대적을 거침없이 물리치고 쳐들어가는 기세 또는 세력이 강하여 걷잡을 수 없이 나아가는 모양을 일컫는 말을 파죽지세(破竹之勢), 매화와 난초와 국화와 대나무 즉 사군자를 일컫는 말을 매란국죽(梅蘭菊竹), 깨끗한 땅에는 소나무를 심고 지저분한 땅에는 대나무를 심음을 이르는 말을 정송오죽(淨松汚竹), 저지른 죄가 너무 많아 이루 다 적을 수 없다는 말을 경죽난서(磬竹難書) 등에 쓰인다.
▶️ 林(수풀 림/임)은 ❶회의문자로 나무 목(木; 나무)部를 둘 겹쳐 나무가 많은 수풀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사물을 본떠 만든 상형문자는 글자를 빨리 만들 수 있었지만 다양한 뜻을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고안된 방법이 기존에 만들어진 상형문자를 서로 결합해 새로운 뜻을 만들어내는 회의문자(會意文字)이다. 그중에서도 서로 같은 상형문자를 결합하는 것을 동체회의(同體會意)라고 한다. 같은 글자끼리 결합했기 때문에 기존의 의미가 더해지는 효과를 주게 된다. ‘수풀’을 뜻하는 林자가 그러하다. 林자는 木(나무 목)자를 겹쳐 그린 것으로 ‘나무가 많다’라는 뜻을 표현하고 있다. 林자보다 나무가 더 많은 것은 ‘빽빽하다’라는 뜻의 森(빽빽할 삼)자이다. 그래서 林(림/임)은 ①수풀, 숲 ②모임, 집단(集團) ③사물(事物)이 많이 모이는 곳 ④야외(野外), 들 ⑤시골, 한적(閑寂)한 곳 ⑥임금, 군왕(君王) ⑦많은 모양 ⑧많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나무 목(木), 수풀 삼(森), 나무 수(樹)이다. 용례로는 나무가 무성한 들을 임야(林野), 숲의 나이를 임령(林齡), 각종 임산물에서 오는 경제적 이득을 목적으로 삼림을 경영하는 사업을 임업(林業), 수풀의 나무를 임목(林木), 수풀 사이 또는 숲 속을 임간(林間), 넓은 지역에 걸쳐 우거져 있어서 바다처럼 보이는 큰 숲을 임해(林海), 수림이 잘 자랄 수 있는 산을 임산(林山), 산과 숲 또는 산에 있는 수풀을 산림(山林), 나무가 많이 우거져 있는 곳을 삼림(森林),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깊은 숲을 밀림(密林), 농업과 임업을 농림(農林), 나무가 우거진 숲을 수림(樹林), 소나무 숲을 송림(松林), 대나무 숲을 죽림(竹林), 나무가 우거진 숲을 무림(茂林), 나뭇잎이 떨어져 공허한 숲이나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숲을 공림(空林),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듦을 조림(造林), 여러 가지 종류의 나무가 뒤섞여 있는 수풀을 혼림(混林), 산이나 들에 계획적으로 나무를 심어 숲을 가꾸는 일을 육림(育林), 정부 소유의 산림을 관림(官林), 새 숲이 생기기 전에 있었던 살림을 모림(母林), 천연으로 이루어진 삼림을 천연림(天然林), 태고부터 벌목이 없었던 천연대로의 삼림을 원시림(原始林), 파종이나 묘목과 이식 등에 의한 인공 조림 및 천연 갱신에 인위적 작업을 가한 삼림을 인공림(人工林), 원시림으로 초자연적으로 이루어진 숲을 자연림(自然林), 사람이 들어가거나 나무를 베어내거나 한 적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숲을 처녀림(處女林), 병 치료나 건강을 위하여 숲에서 산책하거나 온몸을 드러내고 숲 기운을 쐬는 일을 삼림욕(森林浴), 숲 속을 거닐면서 숲의 기운을 쐬는 일을 산림욕(山林浴), 특수한 목적을 위하여 인위적으로 만든 삼림을 시업림(始業林), 숲이 우거져야 새가 깃든다는 뜻으로 사람이 인의를 쌓아야 일이 순조로움을 이르는 말을 임심조서(林深鳥棲), 부귀할지라도 검소하여 산간 수풀에서 편히 지내는 것도 다행한 일임을 임고행즉(林皐幸卽), 벼슬이나 속세를 떠나 산골이나 시골에 파묻혀 글읽기를 즐기며 지내는 선비를 산림처사(山林處士), 술이 못을 이루고 고기가 수풀을 이룬다는 뜻으로 매우 호화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이르는 말을 주지육림(酒池肉林), 푸른 숲 속에 사는 호걸이라는 뜻으로 불한당이나 화적 따위를 달리 이르는 말을 녹림호걸(綠林豪傑) 등에 쓰인다.
▶️ 七(일곱 칠)은 ❶지사문자로 柒(칠)과 통자(通字)이다. 다섯 손가락을 위로 펴고 나머지 손의 두 손가락을 옆으로 편 모양을 나타내어 일곱을 나타낸다. 아주 옛날 숫자는 하나에서 넷까지는 선(線)을 그 수만큼 한 줄로 늘어 놓고, 다섯 이상은 다른 기호를 사용했다. 그 중 五(오)와 七(칠)과 九(구)는 닮음꼴, 六(육)과 八(팔)과도 닮음꼴로 되어 있다. 일설에서는 七(칠)은 베다란 뜻의 글자를 빌어 쓴 것이며 후세의 切(절)이란 글자를 기원이라 한다. ❷상형문자로 七자는 '일곱'이나 '일곱 번'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七자는 칼로 무언가를 내리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갑골문과 금문에 나온 七자를 보면 十자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칼로 사물을 자르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갑골문에서는 十(열 십)자가 막대기를 세운 그려졌었기 때문에 十자와 七자는 혼동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소전에서는 두 글자의 구분이 어려워지면서 끝을 구부리는 방식으로 지금의 七자를 만들게 되었다. 七자는 본래 '자르다'라는 뜻으로 쓰였었지만, 후에 숫자 '일곱'으로 가차(假借)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여기에 刀(칼 도)자를 더한 切(끊을 절)자가 '자르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七(칠)은 일곱의 뜻으로 ①일곱 ②일곱 번 ③칠재(七齋; 죽은 지 49일 되는 날에 지내는 재) ④문체(文體)의 이름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한 해의 열두 달 가운데 일곱째 달을 칠월(七月), 사람의 일곱 가지 심리 작용을 칠정(七情), 바르지 못한 일곱 가지 견해를 칠견(七見), 그 수량이 일곱이나 여덟임을 나타내는 말을 칠팔(七八), 나이 70세로 일흔 살까지 산다는 것은 옛날에는 드문 일이다는 뜻의 칠순(七旬), 일곱 걸음에 지은 시를 칠보시(七步詩), 한 줄이 일곱자로 된 한시를 칠언시(七言詩), 일곱 줄로 매어 만든 거문고를 칠현금(七絃琴),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일어난다는 칠전팔기(七顚八起), 유교에서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일곱 가지의 조건을 이르는 말을 칠거지악(七去之惡), 사물이 서로 연락되지 못하고 고르지도 못함을 이르는 말을 칠령팔락(七零八落) 등에 쓰인다.
▶️ 賢(어질 현)은 ❶형성문자로 贤(현)은 간자(簡字), 贒(현)은 고자(古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조개 패(貝; 돈, 재물)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구휼(救恤)한다는 뜻을 나타내는 글자 臤(현, 간)으로 이루어졌다. 많은 재화를 가지고 있어 남에게 나누어 준다는 뜻이 전(轉)하여 뛰어나다, 어질다는 뜻으로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賢자는 '어질다'나 '현명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賢자는 臤(어질 현)자와 貝(조개 패)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臤자는 신하가 일을 능히 잘 해낸다는 의미에서 '어질다'나 '현명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래서 본래 '어질다'라는 뜻은 臤자가 먼저 쓰였었다. 그러나 후에 사람이 어질고 착해 재물까지 나누어 줄 정도라는 의미가 반영되면서 지금은 여기에 貝자가 더해진 賢자가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賢(현)은 흔히 편지에서 자네의 뜻으로 아랫 사람을 대우하여 쓰는 말의 뜻으로 ①어질다 ②현명하다 ③좋다 ④낫다, 더 많다 ⑤넉넉하다, 가멸다(재산이 넉넉하고 많다) ⑥존경하다 ⑦두텁다 ⑧착하다, 선량하다 ⑨지치다, 애쓰다 ⑩어진 사람 ⑪어려운 사람을 구제(救濟)하는 일 ⑫남을 높여 이르는 말,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어질 인(仁), 어질 량(良),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어리석을 우(愚)이다. 용례로는 마음이 어질고 영리하여 사리에 밝음을 현명(賢明), 어질고 훌륭함 또는 그런 사람을 현준(賢俊), 어질고 총명하여 성인의 다음 가는 사람을 현인(賢人), 어질고 총명하여 성인의 다음가는 사람을 현자(賢者), 어진 신하를 현신(賢臣), 어짊과 어리석음을 현우(賢愚), 어질고 훌륭한 사람을 현영(賢英), 현명한 보좌를 현좌(賢佐), 어진 이와 착한 이 또는 어질고 착함을 현량(賢良), 여자의 마음이 어질고 깨끗함을 현숙(賢淑), 현명하게 생긴 얼굴을 현안(賢顔), 남보다 뛰어난 재주 또는 그런 재주를 가진 사람을 현재(賢才), 남의 아내를 공경하여 일컫는 말을 현합(賢閤), 어진 사위를 현서(賢壻), 덕이 높고 현명한 사람을 고현(高賢), 매우 현명함이나 아주 뛰어난 현인을 대현(大賢), 성인과 현인을 성현(聖賢), 유교에 정통하고 행적이 바른 사람을 유현(儒賢), 밝고 현명한 사람을 명현(明賢), 재주가 뛰어나서 현명함 또는 그런 사람을 재현(才賢), 뛰어나고 슬기로움을 영현(英賢), 이름이 난 어진 사람을 명현(名賢), 어진 사람을 존경함을 상현(尙賢), 어진 어머니이면서 또한 착한 아내를 일컫는 말을 현모양처(賢母良妻), 현인과 군자로 어진 사람을 일컫는 말을 현인군자(賢人君子), 남의 눈을 어지럽고 아뜩하게 한다는 말을 현인안목(賢人眼目), 현인은 중용을 지나 고상한 행위를 함을 이르는 말을 현자과지(賢者過之)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