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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길리성
의사 김필순(金弼淳)의 생애와 독립운동
김필순(金弼淳, 1878년∼1919년), 의사 독립운동가
김필순(金弼淳, 1878년∼1919년)은 1878년 6월 25일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886년 언더우드를 만나면서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다. 1894년 언더우드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다음해 언더우드의 요청으로 김필순은 서울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배재학당에서 수학하였던 김필순은 영어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배재학당을 졸업한 김필순은 1899년 제중원에 들어갔다. 제중원에서는 주로 선교사들의 통역이나 조수역할을 담당했다. 1900년 10월 에비슨[魚丕信]은 한국 고전에 지식이 있고 영어를 아는 젊은이를 찾고 있었는데, 김필순이 그 적임자였다.
김필순은 스승 에비슨의 강의를 도왔을 뿐만 아니라 의학서적을 번역할 수 있는 수준의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에비슨이 교열을 본 이 책은 제중원과 세브란스에서 교재로 활용될 만큼 수준이 높은 번역서였다.
1908년 세브란스병원의학교(제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인 김필순은 한국 최초의 면허의사 7인(김필순, 김희영, 박서양, 신창희, 주현측, 홍석후, 홍종은) 중 한 사람으로 그들 가운데서도 뛰어난 학생에 속했다. 에비슨이 장차 세브란스 병원을 맡아 한국 의학계를 이끌어갈 재목으로 눈여겨보았을 정도였다. 실제로 그는 졸업 후 모교는 물론 간호원양성소의 교수로 활동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을 뿐만 아니라, 서양의 의학 서적들을 번역하는 작업에 매진함으로써 한국 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의사 김필순의 행적은 다음의 글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먼저 김필순의 동생 김필례(金弼禮)의 전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1901년 김필례는 오빠 김필순의 지시에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필순은 제중원에 있으면서 의학서적을 우리말로 번역하고 환자 진찰 시 통역을 맡았다. 그러다가 자신도 의술을 조금씩 배워 진찰할 수 있게 되었다. 제중원은 차차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사람들이 몰리어 환자도늘어가니‥‥
한편 통감부는 1907년 도산 안창호의 귀국과 함께 김필순의 동정에도 주목했다. 1907년 2월 도산 안창호는 미국에서 귀국한 후 줄곧 김필순과 그의 가족들의 안부를 미국에 있는 부인에게 전했다. 그만큼 안창호는 김필순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의 열정을 실현할 수 있었다. 도산은 1908년 8월 군대해산 당시 급박하였던 서울의 상황이 진정되자 부인에게 한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도 김필순 부부의 도움으로 서울생활을 평안히 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1908년 1월 11일 김필순은 서북학회 개교식에 참석하였다. 당시 서북학회 회장은 정운복이었으며, 이동휘가 내빈들에게 답사를 하였다. 도산 안창호는 격정적인 언사로 연설하였다. 김필순의 활동은 이미 독립운동에 깊숙이 관여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가 이재명 의사의 이완용 처단 미수 사건에 노백린과 함께 관련된 사실만 보더라도 이를 충분히 입증해 준다고 할 수 있다.
1908년 4월 도산 안창호는 양기탁, 전덕기, 이동휘, 이동녕 등과 함께 신민회를 설립하였다. 신민회는 안창호의 발기로 설립된 만큼 그와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김필순이 신민회의 일원으로 활동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신민회는 외연을 확대하였으며, 1910년경 그 회원수가 800여 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반대로 그만큼 일제의 감시가 뒤따랐으며, 105인 사건은 일제가 신민회의 위세를 두려워해서 조작한 사건이라는 점은 시사(示唆)하는 바가 크다.
김필순 역시 신민회원으로서 활동하면서 일제의 감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안창호가 김필순과 그의 형이 운영하는 김형제 상회에 거주하면서 신민회 업무를 관장하였다는 점이 일제에게도 비상한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다.18) 신민회에서 가장 중요시 여겼던 사업은 국외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도산은 만주에 먼저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자 했다.
신민회원의 동의를 얻어 그 일환으로 이동녕의 8촌 동생인 이장녕 일가가 1907년 12월에 서간도 유하현으로 이주하였다. 신흥무관학교의 초석은 바로 이때 마련되었다.
김필순은 신민회 활동뿐만 아니라 제중원에서 의사로서의 활동도 병행하였다. 하지만 1910년 8월 한일병탄은 김필순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1911년 6월 2일 제2회 졸업식에서는 부의장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선교사들에 의해 주도되어 온 세브란스 운영이 김필순으로 대표되는 한국인 의사에게로 많이 이양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이른바 ‘105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일제는 한일병탄과 함께 독립운동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자행하였다. 신민회는 가장 규모가 큰 비밀결사단체로서 조선총독부의 통치를 위협할 수 있다는 일제의 판단으로 와해의 단계에 들어섰다. 알려진 대로 105인 사건은 조선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다케 암살미수사건으로 일제가 조작해서 약 700명의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105인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사건이다. 이러한 와중에 김필순은 일제의 사전 검거를 피해 1911년 12월 31일 세브란스에 편지 한 통을 남겨두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김필순의 망명에 대한 정황과 동기는 몇몇 자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먼저 그의 여동생 김필례의 사례를 통해 그의 망명에 대한 편린(片鱗)을 잠시 살펴보겠다.
필례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김필순으로부터 보내지고 있던 학비가 중단되었다. 오빠가 소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행방불명된 것이었다. 105인 중에서 핵심 주동 세력이 김필순 집에서 모의했다 하여 일경은 김필순을 잡아들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어 김필순은 하는 수 없이 신의주에 있는 세브란스 분원에 출장간다는 말을 남긴 채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사실 그는 서간도 통화현으로 가서 병원을 개업했다. 어느 날 일본에 있는 김필례에게 뜻하지 않은 손님이 새벽에 기숙사로 찾아와 허리춤 속에 감추어 온 하얀 종이로 꼰 새끼를 꺼내어 김필례에게 건네주었다. 새끼를 풀어보니 그것은 종이 조각마다 순서를 적어 넣은 편지였다.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필례 동생 보아라. 내가 긴 말을 자세히 적어 보내지 못함이 서운하나 지금 형편으로는 어쩔 수 없다. 나는 국내의 일로 일경에 쫓기는 몸이 되어 이곳 서간도로 왔다. 이곳에서 난 내 인생을 개척할 생각이다. 난 이곳에서 지금까지 꿈꾸어 오던 이상촌을 세우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우리나라 독립의 기틀을 닦고자 한다. 필례야 넌 이곳으로 와 그동안 배운 지식을 가지고 교육을 맡아주어야겠다. 편지 전해준 분을 따라 귀국하기 바란다. 귀국 즉시 가족들을 데리고 서둘러 서간도로 오기 바란다.
먼저 이태준은 도산에게 중국 대륙에서 일어난 신해혁명(辛亥革命, 1911년)에 대한 소회를 ‘감격’이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자신과 김필순이 국권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막막하게 여기던 중에 신해혁명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를 일거에 없앨 수 있게 한 희망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김필순과 이태준이 신해혁명에 큰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세브란스병원에서 근무하던 둘은 자연스럽게 망명에 대하여 비밀리에 협의하였으며, 김필순이 먼저 망명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태준 역시 병원 내에서의 소문을 감지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였지만 김필순과 연락이 닿지 않아 남경에 정착하였다. 김필순의 행방을 안창호에게서 찾고자 하였던 이태준은 의사로서의 생활도 중요하지만 독립운동에 투신하고자 했던 자신의 신념을 재차 강조하였다. 다만 안창호가 김필순의 거처를 이태준에게 통보했다는 사실은 아직까지 확인되고 있지 않다.
김필순은 통화로 이주 정착한 후 도산에게 자세한 정황을 편지로 알렸다. 1911년 12월 31일에 서울을 떠나 다음해 통화현에 정착한 후 3월경에 집중적으로 도산 안창호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이주현황을 전했다.
“떠나신 후 청국 선인현에 편지 밧사옵고 또한 런던서 부친 순애한테 온 엽서 받아 그까지는 알았으나 그 후로는 아모 말도 듣지 못하오니 궁금하옵나이다. 제는 작년 십이월에 청국혁명전쟁에 위생대로 종사코져 하매 건너왓삽더니 지금 전쟁은 정지되였사오나 도망하여 온 사람이 다시 돌아갈 수도 업사옵고 이곳 형제들이 이곳에 있서 일을 좀 도와달라 하올 뿐더러 와서 며칠 지내며 정형을 살펴있는 즉 이곳 건너오는 사람들은 매일 수 십 명씩 남부여대하고 속히 들어오는데 전쟁시키는 일이며 교육이며 기타 여러 가지 일에 종사하는 이는 몇 명되지 못하니 말도 못하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도로에 방황하는 형상은 차마 못 보겠소이다. 제(弟)는 아직 몇 해 던지 이곳에서 일을 좀 도우려 하는 데 자금이라는 것이 한 푼도 없사오니 민망하옵나이다. 이곳에서 일을 주장하는 이동녕 씨와 이회영 씨인데 인심이 잘 돌아가지 아니하는 모양이오니 민망하옵나이다.‥‥”
위의 편지를 보면 청국 선인현이라고 했는데 당시에는 선인현은 없는 지명이며, 환인현(당시 회인현)이 아닌가 한다. 다만 김필순이 위의 편지를 보낸 후 다시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에는 주소가 통화현으로 되어 있어 지명에 착오가 있는 것은 아닌가 여겨진다. 위의 편지에는 한인의 이주상황이 그대로 묘사되고 있다. 이주원인이 경제적이든 정치적이든 김필순의 눈에는 ‘말도 못하는 사람들이 방황’하는 것으로 비추어졌으며, 그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또한 그해 3월에는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유하현 삼원포에서 통화현 합니하로 이전하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우당 이회영과 이동녕이 그 중심에 있었는데 독립군 기지 건설 상황이 여의치 않은 점을 도산에게 전했던 것이다.
며칠 뒤인 1912년 3월 11일 길림성 통화현에서 김필순은 안창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내가 편지를 보낼 수 있는 주소를 기억하지 못하는 바람에 하와이에 있는 내 친구 한명에게 편지 봉투 아래 작은 메모를 보냈단다. 어제, 나는 이 편지를 부칠 수 있는 주소를 알아냈어. 내가 여기에 온 것은 1월 초, 적십자회 사업에 대한 희망에서였지. 하지만 너무 늦었다는 것을 알았단다. 몇 명의 친구들이 이곳에 머물면서 그들을 도와주자고 해서 난 이곳에 2년 이상 머물기로 결정했지. 그리고 병원을 지으려고 노력하고 있단다. 이곳에는 아주 많은 동포들이 있는데도 아직 작은 병원이 하나도 없단다. 게다가 의료진들도 전혀 없어. 난 내년 6월 즈음에 우리 가족들을 이곳에 데려올 계획이다. 이곳에서나 다른 곳에서 우리의 목적을 위해 할 수 있는 더 좋은 일을 제안해 준다면 매우 고맙게 여길 거야.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중국인들은 우리 동포들에게 매우 친절하단다. 우리 동포를 깊게 동정하고 있지. 이곳은 6,000여명의 사람들과 800개의 집이 있는 작은 도시야. 하지만 도시외곽 쪽에는 빈 대지가 많이 있다. 아마 많은 수의 우리 동포들이 있을 수 있을 거야. 모든 것이 훌륭하고 좋아. 하지만 집과 가까운 곳에 별로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이 한 가지 있어. 600∼700리 되는 지역 내에 철도가 없다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나라의 다른 지역에서 들어오는 모든 것이 귀하고 비싸지‥‥.”
위의 편지를 통해 한인 이주 현황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먼저 유하현 및 통화현 지역에는 근대적 시설을 갖춘 병원이 전무했다는 사실이다. 한인들의 집단적 거주지인 이곳에 김필순이 병원을 설치하고자 했던 것은 이주한인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의료지원을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둘째 자신의 가족을 이주시키고자 했으며, 셋째 중국인들의 태도가 적대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병원을 개설하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 도산에게 의약품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 편지에는 의료행위에 사용할 정제나 알약의 가격 리스트 및 안경의 카달로그나 가격표 등을 부탁한다는 내용이 자세히 적혀 있다. 김필순의 주소는 만주 통화 동관의 기독교 교회라고 되어 있다.
김필순이 통화현에서 의사로서의 활동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주역이었던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을 치료한 것이다. 1913년 그녀는 마적 떼의 습격을 받아 어깨 관통상을 당하게 됐는데, 이때 김필순의 도움을 받고 회생하게 된다. 이은숙(李恩淑)의 수기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서간도시종기(西間島始終記)에 실린 내용이다.
“날은 차차 밝아지고 도적들은 달아났다. 그 후에야 학교 선생들이 와서 나를 치료하는데 그때서야 비로소 총 맞아 맞구멍이 난 줄을 알고 아연해 하나 산골에서 무슨 약이 있으리요. 우선 급한 대로 응급 치료로 치약을 창구에 넣고 싸맨 후 이곳 학생 박돈서가 통화현에 가서 의사를 데리고 왔다. 이 학생은 바로 다섯째 댁 본집 동기가 되며, 의사 김필순 씨는 우리 동지로서 세브란스 병원의 의학 박사로 적십자 병원을 통화현에 와서 내고 때를 기다리며 생활을 하는 분이다. 내왕 240리나 되는 길을 밤을 도와 21일 오후에야 의사와 함께 군대들도 와서 의사는 나를 치료하고 군대는 영석장 모시러 산으로 갔다. 의사는 치료 후에야 지혈을 하니 생혈을 이틀 밤 하루를 쏟고도 지금껏 칠십이 넘도록 살았으니 기구한 운명이로구나.”
이은숙은 김필순의 적극적인 치료를 통해 목숨을 건졌다는 표현을 우회적으로 했다. 고마움의 표시였다. 김필순이 통화현에 병원을 개설하고 이주한인들을 적극적으로 치료하였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총은 들지 않았지만 서간도 지역 이주한인들의 위생을 책임지는 위치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필순에 대한 일제의 정보문서도 이를 뒷받침한다.
1914년 7월 15일자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산현이삼랑(山縣伊三郞)이 외무차관 송정경사랑(松井慶四郞)에게 보낸 문서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김만호에 관한 건 : 본명은 김필순이며 동인은 경성 세브란스 병원(기독) 부속의학교를 졸업하고 동원(同院) 의사로서 7, 8년간 근무를 하였으며, 항상 불온사상을 고취하여 해외에서 온 불평선인을 동원에 은닉한 저명한 불평분자이다. 1912년 봄 돌연히 서간도 유하현으로 거주하여 불평선인으로 일대 병원 건설을 기도하였으며, 같은 해 가을 조성환이 북경으로 퇴거를 하게 되니 불평자의 수령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동지로 이거하게 된 자이다.”
이 정보문서에서는 김필순의 가명을 김만호로 파악하고 있다. 김필순이 중국으로 망명한 시기를 1911년 12월이 아닌 1912년 봄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문서가 정확한 정보문서는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김필순의 행적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또한 1914년 12월 28일 조사에 의하면, 김필순의 이명을 김윤열로 파악하고 있다. 일제가 김필순에 대해 ‘제중원 졸업생으로서 세력이 있다’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그의 활동에 주목하고 있었다.
김필순은 통화에서의 활동을 정리하고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하여 하얼빈에서 북서쪽 300여km 떨어진 치치하얼로 향했다. 왜 통화에서 약 1,000km 떨어진 치치하얼로 이전했을까.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근거는 부족하다. 다만 김필례의 전기를 통해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처음 서간도 통화에서 병원 개업을 했던 김필순은 차츰 그곳도 일제의 영향권에 들어 감시와 압박이 심해지자 내몽골 가까운 오지로 근거를 옮겼다. 그는 근동의 130여리가 넘는 땅을 사서 이상촌 건설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는 중이었다. 러시아에서 농기구를 도입해 우리나라 사람들 중 아주 살기 어려워하던 빈민 삼십 가구를 집단 이주시켜 이곳에서 농사를 짓도록 했다. 김필순은 병원일로 바빴으므로 형인 김윤오를 불러다가 감독 일을 맡겼다. 선생의 어머니 안씨도 이곳으로 와 일을 함께 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흙벽돌을 직접 찍기도 했다. 필순은 이곳에다 이상촌을 세우고 중국 일대에 흩어져 있던 애국 청년들을 이곳으로 규합 독립군을 양성하기도 했다. 선생도 1916년 여름 치치하얼에 다니러 간 적이 있다. 선생이 필순을 찾아갔을 때 그는 대단히 반겼다. 선생은 치치하얼에서 그곳 사람들을 위해 피아노 연주를 해주기도 했다.”
위의 글에 의하면 김필례가 치치하얼에 간 1916년 8월은 김필순이 치치하얼에서 병원을 개설한 시기와 일치한다. 당시 치치하얼 일본영사관에서 조사한 정보 문서에는 김필순이 1916년 8월경에 통화를 떠나 치치하얼에 온 것으로 되어 있다.
“김필순은 경정으로 불리며, 김명이라고도 칭한다. 김필순은 7년 전(1912년) 중국에 귀화하였으며 당지에는 대정 5년 즉 1916년 8월 경 통화에서 와서 의원을 개업하였으며, 북제진료소를 경영하고 흑룡강 포로수용소 촉탁의를 겸임하였다. 지난 8월 31일 사망하였으며, 유족은 그의 모, 처 이하 12세, 3세의 여아 등 7인이 당지에 있으며, 장남은 18세로서 안동에 거주하고 있다.”
위의 정보에 의하면 김필순이 1912년 중국으로 귀화하여 1916년에 ‘북쪽의 제중원’이라는 의미를 지닌 북제진료소를 개설하였으며, 1919년 8월 31일 사망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일제는 치치하얼 영사관의 정보원들을 통해 김필순의 행적을 계속 추적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치치하얼 한인 기독교학교 교원이었던 김동우에게 김필순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기도 했다.
당시 김필순은 임도재라는 인물을 1919년 6월에 고용하였다. 김필순이 치치하얼의 농장과 진료소 사업을 병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김필순이 사망하면서 임도재도 김동우와 함께 1919년 9월 9일 장춘으로 이동하였다.
김필순이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선 사례도 발견된다. 만주에 거주하는 한인의 자치기관이자 독립운동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생계회와 연계해서 장기적인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생계회는 길림독군 맹은원이 독립을 선언할 때 장래 무상 관유지의 대부, 국권회복의 경우에 있어서 원조 및 특별 보호 등 대상적(代償的) 조건 아래 불령선인(不逞鮮人)을 용입(庸入)하여 밀정 기타에 복무하게 할 계획으로, 이때 치치하얼(齊齊哈爾) 거주하고 있는 불령선인 김필순이 도모함에 동인들을 매개로써 넓게 동서간도 각 지방의 불령선인들을 권유하였으며 이에 응하는 자가 3백여 명에 이르렀다. 단체를 조직함에 기인하여 불일 무상 토지를 경작하기 위해 생계회로 하였지만 정작 그 목적은 한국 부흥을 위한 동지의 결속을 공고히 하기 위함에 있었다. 맹독군의 독립은 중도 좌절되었기 때문에 밀약은 자연스럽게 소멸되었다. 현재 이 회의 본부는 길림성 밖에 설치하였다.
생계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일찍부터 추진했던 김필순은 맹은덕이 실각하고 맹부덕이 실권을 장악하자 흑룡강성으로의 이주를 단행한 것으로 보인다.
치치하얼에서 김필순은 의료활동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서도 분주히 활동하였다. 그와 함께 농장을 경영하고자 했던 인물은 이광범이었다. 김필순은 이광범과 함께 치치하얼로부터 서북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가칭 용강현 김씨농장 운영을 위해 진력하였다. 일본 정보문서에 보이는 이른바 ‘김씨 농장’의 현황이다.
치치하얼에서 서북방향으로 140리 동지선 자란툰역 동남쪽 80리 지방 일대를 통칭하여 대구전자라고 한다. 1918년 봄 이래 조선인 김필순, 이광범 외 여러 명은 중국인 지주와 상의하여 토지의 개간에 종사하기 위해 근년에 계속해서 추진했으나 날씨가 좋지 않아 제대로 농장이 개간되지 못하였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은 남녀 11명 중국인 7명인데 조선인들은 농장으로 칭하며 혹은 고려촌으로 부른는데 인접 촌락 중국인들은 김고려촌이라고 한다. 당시 중국인 지주 가운데 김필순의 파트너는 조좌향 이었다. 그는 일찍이 길림성 산림 경비대장이었으며 대전자에서 25방(1방은 45상, 1상 2000평, 15상은 조좌향, 10상은 고 김필순의 소유)의 황무지를 불하받아 개간을 위하여 1918년 말 이래 친족 관계의 조선인을 초치하였지만 한발(旱魃)이 계속 되어 수전(水田) 경영의 의지를 이룰 수 없었다. 특히 작년 말 마적이 습격하여 마필 여러 두를 약탈하여 갔다.
위의 자료는 김필순이 치치하얼 용강현에서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제의 대표적인 정보자료이다. 이른바 ‘김고려촌’은 김필순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최근에도 대전자전 순흥촌에는 ‘김씨농장’ 또는 ‘김씨촌’으로 기억하는 한족들도 있었다.
한편 지금까지 김필순의 순국에 대해서는 명확한 자료를 발견하지 못했다. 일제는 콜레라(虎列刺)로 죽었다고 하지만 가족들은 독극물에 의한 사인을 주장했다. 간략하게나마 그의 순국을 둘러싼 문제를 정리하였다. 1919년 8월 31일 김필순이 순국하였다. 그 과정도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하지만 일제의 문서를 종합적으로 검토하면 그가 왜 치치하얼에서 순국하였는지 일정 부분 수면위로 드러낼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김필순과 김규식에 대해 일제정보기관에서 작성한 문서를 보면 3・1독립선언 이후 파리강화회의와 연동해서 김필순과 김규식은 상해와 치치하얼에서 독립운동의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바로 독립선언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하였고 이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두 사람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일제가 1919년 3・1운동 이후 정보원을 통해 조사한 김필순에 관련된 사항이다.
조선인 김동우(金東佑)는 치치하얼 기독교학교의 교사로 초빙되었다. 1919년 4월 경 조선본적지에서 당지로 와서 편의상 김필순 집에서 동거하였다. 김필순은 8월 31일 의사호열병으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미국 워싱턴에 체류하고 있는 조선인 김규식이라는 자로부터 약 2주 전에 집주인 김필순에게 미국으로부터 한 부의 별지에 첨부한 것이 송부되어 왔다. 윌슨 등 두 명에게 파리에 제출할 청원서 및 각서를 비밀리에 부쳤다. 별지에 부친 선언서 3통은 약 1개월 이전 하얼빈과 블라디보스토크 사이의 소학령 역에 거주하는 배일조선인 전일으로부터 집주인 김필순에게 송부해 왔다고 한다. 수령한 이후 이들 인쇄물은 각지로 보내졌다고 사료된다.
김필순이 김규식의 처남이라는 점은 일제가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김필순이 제중원 의사로 도산 안창호와 연결되어 있으며,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중국으로 망명하였다는 사실은 1912년부터 일제가 정보원을 통해 알아낸 사실이다. 일제가 김필순의 사망 원인을 호열자(虎列刺)라고 파악한 것도 분명 문제가 있다. 따라서 김필순의 사망은 김규식과 연결되어 독립선언을 적극적으로 해외에 알리면서 병행하여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 했던 그의 활동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