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 사찰을 거부하면서 시작된 제1차 북핵 위기는 미국이 대북 공습을 계획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했고, 6·25전쟁 이후 최대의 긴장이 한반도에 드리워졌다.
이 위기를 피하기 위해 미국은 사상 첫 대북 특사로 1994년 6월 카터 전 대통령을 평양에 파견했다. 북한도 이 '무게감 있는 방문'에 강한 반응을 보이며 한반도 정세는 단숨에 대화 분위기로 전환됐다. 분단 이후 첫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급전개를 보였다.
카터 전 대통령은 6월 15일 판문점에서 북한으로 들어가 다음 날인 16일 김일성 주석과 회담했다. 김일성 주석은 "무조건 언제 어디서든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싶다"는 뜻을 카터가 김영삼 당시 한국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한국 정부는 6월 20일, 북한에 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부총리급 접촉을 전화로 제안해, 28일에 예비 회담이 실현되었다. 7월 25일부터 27일까지 남북 정상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1994년 7월 9일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김일성 주석이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는 북한의 '중대 보도'였다. 준비 중이던 남북 정상회담은 무기한 연기됐고 역사적 순간은 환상에 그쳤다. 김영삼 정부는 즉각 비상경계 태세를 갖추고 긴급 국무회의를 개최했다. 북한 군부의 오산 리스크도 우려됐다.
국내에서는 북한에 어떤 메시지를 보내야 할지를 놓고 정치권과 정부 내에서 의견이 크게 엇갈렸다. 야당과 시민단체는 회담 합의 사실을 토대로 민족화해 차원에서 조문단 파견이나 최소한의 조의 표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정부는 북한을 경계하는 여론을 의식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후계자인 김정일의 뜻도 불투명한 가운데 대화나 평화의 메시지를 내놓으면 지지율 급락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정부와 여당은 조전이나 조문단 파견은 절대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혀 6·25 전쟁 전범에 조문은 있을 수 없다는 강경론이 지배했다. 이용덕 총리는 국무회의에서 김일성 주석을 동족간의 전쟁과 불행한 사건의 책임자라고 단정하고 조문 여론에 공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조문 주장자에게는 친북이나 북한 신파라는 꼬리표가 붙어 처벌 대상이 되는 등 공안 정국이 다시 나타났다.
북한도 반발해 조선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남조선 당국이 조문단을 가로막고 애도의 뜻조차 보이지 않은 것은 상식 이하의 무례한 행위"라고 비난했다. 남북관계는 급속히 냉각됐다. 정상회담을 통한 평화의 기운과 핵문제 해결의 길은 무너지고 냉전구도가 강화됐다.
당시 우리 사회에서는 북한을 옹호하고 그 입장을 정책에 반영하는 것 자체가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졌다. 김일성에게 조의=미화라는 틀은 지금 다시 1994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유효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정부가 국제적 관례에 따른 최소한의 조의만이라도 표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더 빨리 대화가 진전돼 북핵 위기를 종식시켰을 가능성은 없었는가. 아니면 카터 전 대통령을 파견한 미국이 한 발 더 깊이 관여했다면 트럼프 행정부 시절과 같은 북-미 정상회담이 조기에 성사됐을 수도 있다.
1994년은 김일성 주석의 죽음으로만 기억되기에는 아쉬운 해였다. 그 후에도 북한과 미국은 대화를 계속해, 같은 해 10월에는 「제네바 합의」로, 북한은 영변 원자로의 동결, 미국은 경수로 건설과 중유 지원을 한다고 합의. 현재 비핵화 협상의 기본 틀도 이때 이미 존재했다.
만약 당시 한국이 좀 더 상황을 유연하게 관리하고 북-미 간 대화가 좀 더 활성화됐다면, 그리고 한국이 그 협상에 깊이 관여할 수 있었다면 2025년인 지금 핵문제의 양상 또한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news1 최서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