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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부어짐에 대한 해석-
시간 1935년 11월 18일 오후 3시
장소 : 천주(泉州)
여기서 성령의 부어짐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아마 열흘의 시간을 들여서 전해도 다 말하지 못할 것이다. 제한된 시간 때문에 조금만 말하겠다. 그렇다고 이 일에 관해 성경에서 이 정도만 말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단지 조금만 제시할 뿐 결코 깊은 연구를 할 수 없다. 지금 우리는 한 면으로 연구하면서 다른 한 면으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많은 빛을 주시기를 구한다.
성령의 부어짐과 악령의 부어짐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부어짐의 외적인 표현에 관하여 약간 비정상적인 표현을 기이히 여긴다. 성경 안에 틀림없이 비정상적인 예가 있다. 나는 지난 8~9년간 이 문제를 연구하면서 성경 안에 분명히 이러한 일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표현이 반드시 성령의 부어짐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고린도전서 12장 1절에서 3절은 이것을 증명한다. 1절은 영적인 은사를 말하는데 '은사'라는 두 글자 옆에 작은 점(중국어 성경 참조)이 있다. 이것은 원문에는 이 두 자가 없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결코 성령의 은사를 말한 것(pneumatikos)이 아니라, 영감을 받은 것을 말한 것이다.
고벳(Govett), 펨버(Pember), 팬톤(Panton) 등은 다 그것을 영감을 받는 것, 즉 영이 사람에게 달라 붙어서 있게 된 비정상적인 행동이라고 번역했다. 2절의 '이끌려 미혹 된다'는 원문에서 무술(巫術)적인 영감이다. 원문은 일반적이고 평상적으로 이끌려 미혹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초자연적인 문제이다.
바울은 고린도의 믿는 이들이 영감을 받는 일을 분명히 알기 원했다. 오늘 우리는 성령의 부어짐과 악령의 부어짐이 어떻게 다른가를 보기로 하자.
바울은 이 두 가지의 외적인 표현이 어떠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는데, 그는 물론 분명히 알았지만 설명하지 않았다. 바울은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반드시 주의해야 한다.
이 두 가지는 외적인 태도로 분별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외적인 분별은 어렵지만 내적인 차이는 매우 크다.
두 종류의 부어짐의 분별은 표현하는 말에 있다.
성령의 부어짐과 악령의 부어짐의 주요한 차이는 입에서 표현하는 말에 있으며 몸의 행동이나 태도에 있지 않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한다.
사람이 성령의 부어짐을 받았는지의 여부는 그의 입에서 표현하는 말로 알 수 있다. 3절 후반절의 말씀의 뜻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만이 예수를 주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성령의 감동이 아니면 '예수는 주'라는 이 말은 할 수 없도록 정해졌다. 이러한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은 악령이 부어진 사람이다.
영이 사람에게 임할 때 우리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조사하거나 시험할 수 있다. 예수는 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성령이 부어진 것이요, 반대로 예수는 주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악령이 부어진 것이다.
혹은 어떤 사람에게 무엇을 물어보면 가 버리는데 이것은 의심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만일 "주여, 나는 자격이 없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것은 당신의 은혜이다. 이러한 사람은 여전히 성령에 감동된 것이다.
성령과 악령은 역사(役事)의 원칙이 다름
우리는 또 성령과 악령의 역사의 원칙으로부터 성령의 부어짐과 악령의 부어짐을 판단할 수 있다. 악령이 사람의 몸에 부어지거나 사람의 몸에 붙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있는데, 첫째는 의지가 피동적인 것이다. 의지가 피동적인 사람은 쉽게 악령이 붙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피동적인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 둘째는 생각이 비어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의 생각이 게으르고 자기의 생각을 기꺼이 사용하지 않으려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사람도 악령에게 속기 쉽다.
성령의 부어짐과 악령의 부어짐에는 원칙상 매우 큰 차이가 있는데, 중요한 것은 사람의 생각과 의지의 상태가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
성령의 부어짐을 받은 사람에게는 두 가지 특징이 있는데, 첫째는 그의 생각이 분명하며 그의 의지가 피동적이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매우 능동적이어서 외부의 힘이 그의 몸을 역사하게 하지 않는다.
성령은 당신이 의지를 능동적으로 사용하여 그분과 함께 협력하길 원하는데, 이것은 악령이 사람의 피동적인 의지에 역사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것으로 능히 성령의 부어짐인가, 아니면 악령의 부어짐인가를 판단할 수 있다.
성령의 부어짐을 구하는 조건
1. 감추어진 죄와 죄를 처리하지 않으려는 것이 없음
우리가 성령의 부어짐을 구하려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몇 가지 조건이 있다. 먼저 당신은 주님 앞에서 감추어진 죄악이 없어야 하며, 기꺼이 처리하지 않으려는 죄도 없어야 한다.
사람이 만일 감추어진 죄가 있다면 그가 성령의 부어짐을 구할 때 악령의 속임을 당할 수 있다. 이는 그의 마음 안에 악령의 지위가 남아있기 때문에 악령이 그의 몸에 붙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2. 의지가 능동적이어야 함
두 번째로 만일 성령이 우리 몸에 임하려면 우리의 능동적인 원함이 필요하며 그래야 그분이 오실 수 있다. 그러나 악령이 우리 몸에 붙으려면 우리의 능동적인 원함이 필요치 않으며 다만 피동적이기만 해도 그가 올 수 있다.
어떤 사람이 기도할 때, "만일 성령이면 나는 원하고 악령이면 나는 원치 않는다." 라고 말한다. 이러한 기도는 여전히 피동적인 기도이다.
우리와 성령의 협력은 이와 같다. 성령이 당신의 몸에 임할 때 성령이 당신께 묻거나 혹은 당신 안에 미세한 음성이 있어서, 너는 성령이 얼마만큼 오게 하겠느냐고 묻는다.
당신이 그분으로 오시도록 허락하는 것 만큼 그분이 오실 수 있다. 결정권은 당신에게 있다. 만일 이와 상반된다면 피동적인 것으로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악령의 역사인 것이다.
성령이 나의 몸에 임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원해야 한다.성령이 단독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능동적으로 하고 성령은 돕는 것이다.
성령이 내가 웃기를 원하면 나는 이미 웃은 것인데 성령이 나에게 웃을 능력을 주신 것이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협력이다.
당신이 성령의 부어짐을 구할 때 반드시 주님의 보혈로 당신을 덮어 주실 것을 구해야 하며, 당신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한다면 성령은 자연히 그분이 해야 할 것을 하실 것이다.
자신을 매우 견고하게 지키는 한 형제가 있었는데 그는 기도하여 말하길 "성령님 오시려면 빨리 오십시오." 라고 기도를 몇 시간 했지만 성령이 그의 몸에 임하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기도는 성령의 역사와 부합되는 조건이 아니므로 성령이 그의 몸에 강림하지 않은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그분과 협력하는 우리의 의지가 필요하며 그래야 그분은 역사하신다. 이것은 사람이 말을 타는 것과 같다. 말의 고삐는 말을 탄 사람이 쥐고 있다. 말고삐가 느슨해질 때 말은 힘을 다해 달릴 수 있으나 어떻게 달리든 간에 말고삐는 여전히 말을 탄 사람의 손에 있는 것이다.
성령의 부어짐의 원칙도 이와 같다. 한 면에서 우리는 반드시 느슨하게 하여 성령으로 자유롭게 해야 하며, 다른 한 면에서 우리는 여전히 의지로 협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제력을 잃게 된다.
성령이 왜 부어지는가?
우리는 왜 성령의 부어짐을 얻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사도행전 2장 33절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게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 고 말한다.
그는 36절에서 말한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36절의 시작에 '그런즉' 은 33절에서 이어지는 것으로 하나님이 주님을 높이신 일을 가리킨다.
그런즉 성령이 부어지는 것은 마치 너희 회중이 듣고 본 것과 같이 오순절날의 일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령의 부어짐이 반드시 나사렛 사람 예수가 이미 높이 들리워지고 이미 승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주님이 만일 높이 들려지지 않았다면 성령이 부어질 가능성이 없다. 오늘날 하나님은 이미 나사렛 예수에게 기름을 부으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으므로 성령의 부어짐을 받지 못할 가능성은 없다.
우리가 성령의 부어지심을 받는 것은 사람의 믿음이나 승리를 증명하는 것이 결코 아니고, 예수가 주요 그리스도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분께 감사와 찬미를 드린다. 만일 주님의 높여지심이 사실이라면 성령의 부어짐도 사실인 것이다.
반대로 주님이 만이 높여지시지 않았다면 성령도 부어질 수 없는 것이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보혈을 흘리시고 죄 사함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은 죄 사함을 얻을 수 있다.
같은 원칙으로 그분이 이미 높여져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는데도 우리가 성령의 부어지심을 얻지 못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럴 가능성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주님이 이미 보좌로 높이 들리워지셨으므로 주님이 우리를 충만케 하시기를 원한다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충분한 믿음으로 주님과 그분이 이루신 역사를 믿는 것이 필요하다.
저는 이와 같은 워치만 니 형제의 사역의 글을 지방교회 형제 자매들에게 소개하면서 매우 조심스러운 생각을 감출수 가 없습니다. 이유는 이같은 워치만 니형제의 사역은 그동안 지방교회 형제자매들에게는 닫혀 있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며 또 한 가지 이유는 성령의 부어짐에 대한 체험이 없이는 이러한 사역을 충분히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사역을 받아들이고 접촉하는 것은 계시의 영역이지 결코 이해의 영역이 아닙니다.
제가 지금까지 접촉한 대부분의 지방교회 형제나 자매들에게 있어서 특별한 진리에 대하여 지각을 통해 이해함으로 얻은 바 있는 큰 확신(믿음)을 계시로 오해하거나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누누이 경험한바 있습니다.
거듭난 믿는 이에게 있어서 지각으로 이해한 것과 영으로 계시를 얻은 것의 차이를 이해하기 쉬운 그림이 성경 안에 있습니다.
마가복음 8장 22.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23.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위 말씀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맹인에게 "두 번" 안수하신 후에 맹인의 눈이 온전케 회복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말씀하심만으로도 죽은 지 삼 일된 나사로를 살아나게 하실만큼 능력이 충분하신 분인데 여기서는 맹인을 "두 번" 안수하신 후에 온전히 안력을 회복시켜주신 것이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는 여기서 예수님으로부터 "한 번" 안수받은 후의 맹인의 상태를 "주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의 내주하시는 거듭난 믿는 이"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두 번' 안수받은 후에 비로소 온전한 안력을 회복한 맹인의 상태를 "믿고 거듭난 후에 성령의 부어지심을 체험한 믿는 이"로 보았습니다.
비록 은혜로 거듭났을지라도 영적인 세계를 온전하게 볼 수 있는 안력을 얻고 계시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 육체 위로 부어지는 성령을 체험해야 합니다.
믿는 이가 "지혜의 영"이신 성령 안에서 지각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완전한 확신은 일반적인 믿음이나 은혜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일반적인 은사에 속합니다. 그러나 "계시의 영"이신 성령 안에서 영적인 세계를 밝히 볼 수 있는 안력을 소유하는 것은 초자연적인 은사에 속한 것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좀 더 자세한 것은 다음에 제시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믿는 이들에게 두 번 도달하는데, 한 번은 두뇌에 오고 또 한 번은 영에 온다. 영에 오는 것은 항상 머리에 오는 것보다 느리며, 어떤 경우에는 몇 개월, 어떤 경우에는 몇 년이나 늦게 온다.
하나님은 믿는 이들에게 진리를 주시고서(곧 두뇌에서 이 진리를 이해함), 그들이 오직 그 진리만으로 승리하는 단계에 이르도록 환경 가운데서 역사하신다. 그때서야 비로소 믿는 이들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 진리를 알고 만족된 체험을 갖게 된다.
그러나 매우 안타까운 것은, 믿는 이들이 두뇌로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것으로 만족하여 체험을 온전히 추구하지 않거나, 더욱 그 진리로 다른 이를 가르침으로써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 진리의 실재를 주시기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 W.Nee -
첫댓글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말하고,
14장 16절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요한복음 3장 16절만 외우고 14장 16절은 외우지 못한다.
그러나 이 두 구절은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두 번 주셨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고, 14장 16절에서는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그분의 아들을 주셨고 그분의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는 성령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에게 그분의 아들을 주신 것은 그들이 그분을 통하여 구원을 얻도록 하시려는 것이고,
그분의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신 것은 그들이 능력을 얻고 승리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