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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15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제1독서 : 신명 30,15-20
복 음 : 루카 9,22-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22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하고 이르셨다.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루하루 삽시다.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세월 흘러 나이 들어가니 간간히 들리는 부음訃音 소식입니다.
어제 70대 초반의 사촌형과 주고받은 카톡 내용입니다.
-“어제는 시동리의 초등학교 동창 서울 사는 조대희가 집에서 역기 운동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네.
콜레스톨이 높으면 뇌졸중, 뇌경색, 심장마비가 오지.
핏속에 불순물이 혈관을 타고 돌다가 혈관을 막아 절명하게 만드네. 조심해가며 살아가야 하네.”
“조대희가요! 제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그 나이에 웬 역도인가요.
아마 경찰 근무했지요. 덧없는 인생, 참 허무虛無하네요.”
“그저께 작고하여 어제 경희대 의료원에서 장례를 지냈네. 허무하지. 이렇게 한사람씩 잊혀져 가는 거라네.”-
참 허무한 인생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어제 ‘재의 축복과 재를 머리에 얹는 예식’중 응송 후렴입니다.
“저희가 모르고 죄를 지었을지라도 뉘우치며 살고자 하오니,
갑자기 죽음을 맞지 않게 하시고, 회개할 시간을 주소서.”
아프고 약한 인생에 대한 무한한 연민과 더불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 한일전 여자아이스하키 4:1 패배에도 불구하고 격찬이 쏟아졌다 합니다.
감동의 원인은 남북선수 모두가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예전 병고病苦중 돌아 간 형이 깊이 공감한 시편 한 구절도 생각납니다.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 년, 근력이 좋아서야 팔십 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이오니 덧없이 지나가고, 우리는 나는 듯 가버리나이다.”(시편90,10).
이런 말씀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자각自覺을 갖게 합니다.
마침 어제 써놓은 짧은 잠언 같은 ‘하루만 산다’라는 체험적 고백의 글이 생각납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강론을 쓴다
미사를 봉헌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하루만 산다
“아, 감사하다. 하루를 살았다!”
고백하며
하루 마친 후
잠자리에 든다
하루하루가
인내와 겸손
비움의 수련이구나-
그렇습니다. 하루하루 살 때 환상은 걷혀 삶은 단순, 투명해집니다.
오늘 지금 여기에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 신명기에서 모세는 우리 모두에게 시공을 초월한 충고 말씀을 주십니다.
무려 ‘오늘’ 이란 말마디가 4회 나옵니다.
하느님께는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영원한 오늘’만 있을 뿐입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신명30,19-20ㄴ).
바로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주님 말씀입니다.
생명과 축복은 선물膳物이자 동시에 선택選擇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선물로 주어지는 생명과 축복을 선택하여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주 우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 매달려야 삽니다.
분도 성인도 그의 규칙에서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마라.’는 말씀과 더불어,
‘그 무엇도 하느님의 일인 기도보다 앞세우지 마라.’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하느님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오늘 복음에서
구체적 ‘생명의 길’, ‘축복의 길’, ‘구원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참으로 어렵고 힘들어도 ‘사람이 되는 길’, ‘성인聖人이 되는 길’은 이 길 하나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구원법칙입니다.
모두에게 활짝 열린 구원의 길, 생명의 길입니다.
‘주님 사랑’으로 ‘날마다’
1. 자신을 버리고, 비우고, 내려놓고,
2. 제 책임의 십자가, 운명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3. 주님을 충실히, 항구히 따르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구원의 세요소입니다.
셋 모두가 동사動詞로 이루어진 아주 구체적 수행입니다.
셋 모두여야지 하나 둘만 빠져도 실격입니다.
이 모든 수행의 원동력은 주님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하루하루 이렇게 살아야 구원의 나날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끝으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자작 좌우명 애송시 마지막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학창시절에 시험을 보는데 생각보다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지요.
‘나만 이렇게 어려운 것이 아닐 거야. 다른 아이들도 어려워서 많이 틀렸을 거야.’
그런데 예상과 달리 100점을 맞은 친구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에 반해서 저는 몇 문제를 틀렸지요. 이때 저는 자랑스러웠을까요? 아니면 부끄러웠을까요?
너무나 부끄러웠고 자꾸만 친구들의 100점 맞은 시험지만 생각나면서,
나도 100점을 맞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지요.
여기서 친구들의 100점은 제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단지 부러움의 대상일 뿐, 저의 점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친구들의 100점 점수만을 바라보고 있으면서 저의 점수를 가리고만 싶은 부끄러움을 가지고 있었지요.
제 자신이 열심히 했든 열심히 하지 않았든 상관없이
나의 점수인 만큼 소중하게 여겼으면 어떠했을까 싶었습니다. 부끄러워도 저만의 점수이니까요.
사실 지금의 삶 안에서도 이렇게 남의 것만을 바라보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을까요?
분명히 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부러워하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그럼으로 인해서 지금의 삶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아니라, 의기소침해하면서 어렵고 힘들게 살아갑니다.
부러움의 대상은 절대로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게 있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대신 나의 것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나의 사랑, 나의 꿈, 나 삶 등을 소중하게 여긴다면 단순히 부러움을 뛰어넘어서
지금보다 더욱 더 기쁘게 행복한 길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참, 여기에 하나 더 반드시 신경 써야 할 나의 것이 있습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다른 사람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내가 부러워하는 남의 십자가가 아니라 나만의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지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솔직히 어렵고 힘든 상황이 주어지게 되면, 우리들은 주님께 불평불만을 던집니다.
‘주님, 제가 짊어질 십자가가 너무나 크고 무겁습니다.
다른 사람은 이렇지 않은데 왜 저의 십자가만 이렇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다른 이의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지요.
대신 자신의 십자가만 보고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자신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하시지요.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바로 진정으로 목숨을 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러움의 대상만을 찾을 것이 아니라, 내 십자가를 잘 짊어지고 주님을 따르는데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요?
“나때문에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재의 수요일’을 지내고 맞이하는 첫 날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 수난을 예고하시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곧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사명,
곧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실 분임을 밝혀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었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일어날 일 네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수난을 당하신다는 것이요,
<둘째>는 버림을 받으신다는 것이요,
<셋째>는 죽임을 당하신다는 것이요,
<넷째>는 죽은 후에 살아나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네 가지는 모두 수동형으로 표현되어 하느님의 권능이 개입할 것임을 시사해줍니다.
“반드시”(이백주년 성서; “마땅히”)라는 단어는
이 모든 것이 필연성이나 당위성에 의해 다가오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당신을 따르는 길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지만, 세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요,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이요,
<셋째>는 이를 지속적으로 날마다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주권이 오직 하느님께만 있음을
믿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신뢰를 둔다는 것이요,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서 지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애기를 가슴에 품듯 끌어안는다는 원어의 뜻대로 자발적으로 기꺼이 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버린다거나 자기 십자가를 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왜 하는가?’ 가 중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이것들을 행해야 한다는 사실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인생의 길에서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인 자기 부정과 자기 십자가를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기 위해서’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바로 이어서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결단이 요청됩니다. 생명과 죽음의 결단이 요청됩니다.
때문에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 24)
<제1독서>에서도 바로 이 생명과 죽음의 길에서 결단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길을 이렇게 말해줍니다.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신명 30,20)
오늘, 우리가 자신을 버리더라도 예수님을 위하여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더라도 예수님을 사랑하여 사랑으로 짊어진다면,
바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분께 매달리는 일이 될 것이요,
생명의 길을 선택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아멘.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십자가 없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프지만
십자가를 신뢰합니다.
삶을 엮어가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십자가였습니다.
사람의 무게와
십자가의 무게는
늘 같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버리는 것이
내려놓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십자가는
거짓된 우리의 허물을
벗어 버리게 합니다.
십자가의 초점은
하느님께
맞추어져 있습니다.
버려야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습니다.
삶을 산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비로소
우리는
사람다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로 이어진 이 길이
우리를 살리는
하느님의 길임을 믿습니다.
마지막까지
십자가를
놓치지 않길 기도드립니다.
십자가는 천국의 열쇠
반영억 라파엘 신부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기도입니다.
“나의 빈약하고 연약함을 생각하면 두렵습니다만 주님께 바라는 굳센 믿음으로 실망하지 않겠습니다.
원컨대 저 십자가의 능력이 내게 힘을 주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주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이 십자가를 감당하게 합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십자가는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9,24)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이 곧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사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을 버리면 모두를 잃어버리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바라보면 답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 앞에서 당신의 뜻을 버렸기 때문에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었습니다.
아니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알퐁소 성인은
“당신이 제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를 맞추겠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주님의 뜻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를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힘들게 고생하면서 따라오라는 말씀이 아니라
매 순간마다 자신의 뜻을 비우면서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라는 요구입니다.
그러나 막상 일상 안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주장, 뜻을 양보한다는 것이 정말 마음 같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 공로를 내세우지 말고 또 내 생각에 고집을 부리지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신명기의 말씀은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 놓는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신명11,26;30,19-21).
마땅히 생명과 행복을 선택해야 하지만
그것이 아주 사소한 일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양보하는 것 하나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하겠지만 그 시작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요까짓 것’ 하는 것이 정말 대단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고까짓 것’일 수 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매사에 신중한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어렵고 힘든 것을 선택한다는 것이 지금은 십자가이지만
그 십자가가 더없이 큰 축복임을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당신에게 증거 할 방법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고 순종하며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러면 마지막에는 그 십자가가 여러분을 져줄 것입니다”(성 토마스 아 켐퍼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전삼용 요셉 신부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신명 30, 20)
매우 부자였던 어떤 아랍 사람이 사막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식량이 다 떨어졌습니다.
이틀간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결사적으로 걸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사막 가운데의 한 작은 샘터를 발견하고 거기에 이르렀습니다.
급히 물을 마시고 보니 얼마 전에 거기에 천막을 쳤던 흔적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혹시 천막을 치고 머물렀던 사람들이 아무런 음식 조각이라도
떨어뜨린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자세히 주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놀랍게도 어떤 주머니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얼른 그것을 만져보니 손에 떡처럼 단단한 것이 만져졌습니다.
그 사람은 미친 듯이 주머니를 헤쳐서 열었습니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속에 있는 것을 한 움큼 움켜서 꺼내 보니까
그것들은 아주 좋고 큰 진주알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손에 한 움큼 쥐었던 진주들을 사방에 던져 뿌리며 외치면서 죽어갔습니다.
“겨우 진주였단 말인가?”
결국 사람의 목숨을 유지하게 해 주는 것은 약간의 물과 음식이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식량자급률이 27%입니다.
자동차, 핸드폰, TV, 선박 등의 수출을 늘이기 위해 FTA란 것을 체결하며
우리농촌 사정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아르헨티나 브에누스아이레스에는 영국에서 본 오래된 지하철이 있었습니다.
세계에서 지하철을 영국 다음으로 만든 나라가 아르헨티나라는 것입니다.
유럽에서 전쟁할 때 식량이 부족해서 각 나라들이 금을 싣고 와서
고기와 곡식으로 바꾸어 가서 세계에서 5번째로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나라도 세계 경제공황이나 전쟁과 같은 일이 벌어지면
핸드폰을 뜯어먹어야 할 일이 머지않은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다른 나라들의 경제 상황에 따라 우리 경제도 휘청휘청 하는 이유가 너무 수출에만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나라뿐만 아니라 사람에게서도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을 선택하며 진정 중요한 것을 버리는 사례가 허다합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10원도 채 안 되는 액수 때문에 부부가 자살한 사건이 최근 인도에서 있었습니다.
인도 동부 서벵골 주에 사는 한 부인이 차(茶)를 사기 위해 남편 옷에서
50파이세(미화 1센트)의 동전을 꺼내간 것이 발단이 되어 부부가 싸움이 난 것입니다.
화를 이기지 못한 남편이 독약을 먹고 자살하자 부인도 5개월 된 딸을 남겨둔 채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또 전에 어머니가 야구방망이 등으로 아이를 전국1등 만들기 위해서 두드려 패다가
오히려 아이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전국1등이라는 허상과 아이의 삶, 또 자신의 생명과 바꾼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모세를 통해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이 말은 생명과 행복을 택하든, 죽음과 불행을 택하든 결국 우리가 선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신자가 돈을 버는 일에 바빠서 냉담하다가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해 죽었다고 합시다.
아마 그 사람은 진주를 먹으며 사는 고통을 당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무엇이 생명이고 행복인지 선택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있는데도 죽음과 불행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지금 여자의 삶은 100년 전에 하인 300명을 데리고 사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밥해주는 하인, 청소해주는 하인, 빨래 해 주는 하인, 불 때주는 하인,
또 TV만 틀어도 얼마나 많은 하인들이 나옵니까?
2천cc 차 한 대는 말 200마리가 끄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옆에서 음악을 연주해주고 길도 안내해 주고 하는 삶은 예전의 왕보다도 화려한 삶입니다.
그런데도 왜 계속 물질, 물질만을 선택하며 살고 있을까요?
예수님은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라고 말씀하시며,
당신 자신이 ‘생명의 양식’이라고 하십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체를 택하든, 세상의 명예나 재물, 쾌락을 택하든 둘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십자가의 삶입니다. 십자가의 삶이란 ‘아낌없이 주는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으로 주신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이신 당신을 선택하려면 당신처럼 매일매일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베풀지 않으면 썩어서 죽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마치 흐르는 물처럼 받은 것을 내 보낼 때 새로운 생명으로 채워지게 되어있습니다.
주기 싫어 모으려고 하는 것이 죽음을 택하는 것입니다.
콩나물이 물을 흘려버리지 않으면 썩는 것처럼,
사해도 물을 받아들이기만 하고 내보내지 않아서 죽음의 바다가 된 것입니다.
오늘도 하느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놓고 선택하며 살라고 하십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