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1970년대에는 당신처럼 디자인을 했다." 영국인 디자이너에게 이 말을 들은 그는 좌절해야 했다. 만 서른 살에 우여곡절 끝에 영국 런던에서 디자인 회사 탠저린에 입사했을 때만 해도 `이제는 좀 풀리겠거니` 했다. 그러나 그가 자신 있게 내민 드로잉을 본 동료들은 "생각이 중요하지, 그림이 중요한가"라며 시큰둥해 했다. "우리가 1970~1980년대에 한 것인데…"라고 했다. 사실이었다. 한국의 대학에서 배운 지식은 영국에서는 20~30년 전 낡은 유행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오래 살아남기`를 목표로 삼았다. 영국인 디자이너들이 하기 싫어하는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다. "사장이 외국 사람인 절 뽑은 이유가 영국인들은 기피하는 잡무를 시키려고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죠."
이제 그는 자신의 목표를 완전히 초과 달성했다. 입사 7년 만에 탠저린의 공동대표가 됐다. 그가 바로 이돈태 대표(45)다. 외국 공항 입국장에서 서툰 영어 탓에 억지로 세관 검사를 받아야 했던 그였다. 부사장이 된 뒤에도 영어가 서툴다며 고객에게 "청소부 아니냐"는 얘기까지 들었다. 하지만 이 대표는 절실함을 무기로 최고경영자에 올랐다. 매일경제신문은 한국과 영국을 오가며 디자인 경영을 전도하는 이 대표를 최근 서울 충무로 매경미디어센터에서 만났다. 그는 한국 디자인에 대해 "일상 생활에 쓰이는 소비재 제품, 즉 라이프웨어 제품의 디자인 능력이 매우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주방기구, 하다못해 걸레 등 생활 속 제품의 디자인이 한 국가가 보유한 디자인 능력의 기반"이라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여기서 무너지면 대기업 제품도 결국 힘들어진다"며 "이미 중국에 상당 부분 밀리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염려했다. 다음은 이 대표와의 일문일답이다.
- 탠저린 같은 유명 디자인 회사가 한국 중소기업의 걸레 디자인을 맡았다는 게 뜻밖이다. 탠저린은 애플의 수석 디자이너인 조너선 아이브를 배출한 회사로도 유명하지 않나.
▶한 작은 기업이 매우 좋은 원단의 걸레를 개발해 팔았다. 그러나 라벨과 마감이 일반 걸레와 별 차이가 없었다. 색상도 전형적인 걸레 색인 청색이었다. 그러다 보니 가격을 많이 받지 못했다. 매출이 연간 10억원 정도였다. 그러나 해피콜이라는 중소기업이 이 걸레를 인수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탠저린과 함께 모든 걸레 제품을 재검토하고 디자인을 수정했다. 색상은 보라색 계열로 바꾸고 마감을 고급스럽게 처리했다.
걸레 가장자리의 짙은 보라는 작은 디테일이다. 고객이 걸레를 선택할 때 가장자리 디테일을 크게 느끼더라. 해피콜은 올해 들어 6개월 새 걸레를 500억원어치나 팔았다. 디자인을 바꾸니 매출이 100배가 된 셈이다.
- 탠저린은 영국항공의 비즈니스 클래스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그래서 당신을 두고 `항공기 좌석부터 걸레까지 모든 것을 디자인하는 디자이너`라고 부르기도 한다.
▶걸레 디자인이라고 해서 초라하다고 여기는 것은 편견이다. 한국의 디자인은 의자ㆍ전화기 등 라이프웨어 제품에 취약하다. 이런 분야는 많은 기술이 들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인프라다. 여기서 무너지면 대기업도 힘들다. 이미 중국에 밀리고 있다. (실제로 이 대표는 `걸레를 왜 디자인했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고 한다. 그때마다 그는 항상 이렇게 대답한다고 자신의 책 `포어사이트 크리에이터`에 썼다. "비행기가 됐든 걸레가 됐든 내게 중요한 건 얼마나 근사한 것을 디자인하는가가 아니다. 세계 1등 제품을 만들어가는 데 함께 참여하고 싶다는 것이다.")
- 걸레에도 디테일을 강조한다. 한국 디자인은 선진국에 비해 디테일에 약하다고 주장하는데.
▶기술 제품은 한국도 디자인이 뛰어나다. 그러나 라이프웨어 제품의 디테일이 약한 게 문제다. 이래서는 브랜드를 고급화하기가 어렵다. 유럽은 800만원, 1000만원 하는 의자를 만들어내지 않는가. 명품이 되려면 디테일에 강해야 한다. 한국 디자인은 디테일 직전에 멈춘다. 앞으로 중국에 대항하려면 디테일은 필수다.
- 디테일에 강한 나라는 어디인가.
▶북유럽은 사소한 제품에도 디테일이 매우 높다. 소비자들은 디테일에 마땅히 높은 가격을 지불한다. 디자인이 나쁘면 비평도 세게 한다. 미적 수준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영국 디자인너들도 스웨덴과 덴마크 앞에서는 한 수 접는다.
디테일에 강하려면 남들보다 한두 단계는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10단계의 과정을 남들이 거친다면 나는 12단계까지 가야 한다. 시간이 많다고 디테일에 강해지는 게 아니다. 고민에 몰입해야만 가능하다. 몰입은 집중력을 통해서 얻어진다.
- 탠저린의 최대 성공작으로 꼽히는 영국항공의 S자형 좌석 디자인 역시 고민의 산물인가.
▶우리의 좌석 디자인은 대단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덕분에 영국항공은 해마다 8000억원씩 영업이익이 늘었고 지금까지 10조원이 넘는 돈을 벌었다. 우리가 남보다 더 창의적이라서 S자형 좌석을 고안한 게 아니다. 영국항공의 요구사항을 맞추기 위해 고민에 몰입한 결과다. 영국항공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비행이 가능해야 한다는 점, 그러면서도 좌석 수는 줄여서는 안된다는 점 등을 요구했다. 우리는 고객이 180도로 누울 수 있으면서 좌석 수를 유지하는 디자인을 고민했다. 그래서 나온 게 S자 형태의 좌석이다.
그러나 영국항공은 고객이 서로 마주 보고 앉아야 한다는 점을 문제로 제기했다. 우리는 항공사 측을 설득하기 위해 1950~1960년대 여객기와 과거 유럽의 마차는 고객이 서로 마주 본다는 점을 강조했다. 다행히 유럽인들은 마주 보는 좌석에 대한 저항감이 크지 않았다.
- 창조성을 쓰러진 유에서 새로운 유를 만드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창조는 세상에 없는 무엇인가를 만드는 게 아니다. 걸레를 예로 들어보자. 시장에서 점점 사장된다는 뜻에서 쓰러지는 제품이다. 그러나 새로운 전략과 디자인 요소를 가미하니까, 새로운 고급 브랜드 제품으로 재창조되지 않는가. 그런 게 창조라고 본다.
- 좋은 디자인의 원칙으로 `남이 나를 모방하는 것을 허용하라`고 한다. 왜인가.
▶중국을 가보면 짝퉁이 넘친다. 일일이 법적으로 대처하면 우리 회사가 망할 것이다. 모방에 대처할 에너지와 시간을 가치 있는 데 써야 한다. 남들이 나를 모방하는 것을 감내하고 남들이 할 수 없는 플러스를 계속 찾아야 한다.
- 1998년 탠저린 입사 후 야근을 두 번 했다고 들었다. 한국 회사들은 야근을 밥 먹듯이 한다. 덜 일하고도 더 높은 성과를 낼 수 있는가.
▶자정을 넘어 일한 게 두 차례라는 뜻이다.(웃음) 영국은 야근수당이라는 게 없다. 그래서 6시 퇴근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대신 업무 시간에는 엄청나게 집중한다. 점심시간이 따로 없다. 먹으면서 일한다. 한국처럼 직원들이 모여서 함께 식사하는 문화도 없다. 야근은 없지만 업무량은 한국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영국인들이 오후 6시에 퇴근하며 한 일의 양은 한국인들이 밤 10시에 퇴근하며 한 일에 못지않다. 또한 영국은 양보다 질을 중요시한다. 한국 디자이너들이 고객에게 5개의 시안을 내놓는다면 영국은 3개의 뛰어난 시안을 제시한다. 한국이 일을 열심히 하는 나라라면 영국은 일을 잘하는 나라다.
- 내가 잘하는 것은 `버티기`였고 못하는 것은 `발상`이었다고 회상했다. 디자이너가 발상을 못한다는 고백은 뜻밖이다.
▶디자이너에게 발상은 필수다. 탠저린 입사 초기에 영국인들과 비교하면 부족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한국인들은 책임감이 강하다. 영국인은 내일 당장 중요한 발표가 있어도 오늘 휴가를 떠나버리곤 한다. 1년 전에 가족과 함께 짠 휴가라며 미룰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책임감이 있으면 개인적인 일정은 양보할 수 있다. 한국인은 그런 점이 강하다.
- 애플 아이팟보다 먼저 세계 최초로 MP3플레이어를 상용화한 새한정보시스템이 무너진 일화는 안타깝다. 새한에 독자적인 브랜드와 디자인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고 들었다.
▶새한의 제품은 1998년 독일에서 열린 세빗(CeBit) 박람회에서 멀티미디어 부문 베스트 상품으로 선정되는 등 큰 화제가 됐다. 나는 당시 탠저린 대표와 함께 새한을 찾아갔으나 망신만 당했다. 당시 새한은 OEM으로 사업이 번창하고 있었다. 우리가 만난 새한의 엔지니어들은 디자인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당시에는 디자인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았다. 삼성전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 Who he is…
홍익대 산업디자인과 졸업 후 영국 로열칼리지 오브 아트(Royal College of Art)에서 공부했다. 1998년 탠저린에 인턴으로 입사한 지 7년 만에 공동대표 자리에 올랐다.
2008년 대한민국 굿디자인 대통령상, 독일의 레드닷과 iF디자인 어워드를 여러 차례 수상했다. 도요타, 시스코, 히스로 익스프레스 등 국내외 20개 글로벌 기업과 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2005년부터 홍익대 겸직교수, 2013년부터 베이징성시학원 객좌 교수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