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내가 광화문에서 목격한 풍경들 | | | [독립기자 정지환의 촛불시위 참가기] | | |
| | | | ⓒ오마이뉴스 남소연 | 광화문 네거리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 사통팔달의 네거리에는 쌀쌀한 칼바람이 불고 있었다. 나뭇잎이 떨어진 앙상한 가로수를 뒤에 거느린 이순신 장군 동상도 오늘 따라 쓸쓸하게 보였고, 광화문 네거리 지하도의 구세군 자선냄비 종소리도 오늘 따라 더욱 구슬프게 들렸다.
그러나 잠시 후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려들면서 추위는 조금씩 가시기 시작했다. 두터운 방한복으로 완전 무장한 어린 자녀의 손을 잡고 온 부모들,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온 젊은 부부, 삼삼오오 옹기종기 모여있는 청소년들…. 그들의 손에는 촛불이 하나씩 들려져 있었다.
광화문 네거리 지하도에서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로 인하여 인파는 어느새 인도를 넘쳐 차도까지 점령했다.
인산인해(人山人海).
사람의 숲은 서로의 방풍림이 되어 칼바람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리고 잠시 후 광화문 네거리는 훈훈해지기 시작했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교보빌딩 전면에 내 걸린 문구가 시선을 끌었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뭇잎은 흙으로 돌아갈 때에야 더욱 경건하고 사람들은 적막한 바람 속에 서서야 비로소 아름다운가."
8시 20분.
'적막한 바람을 이겨낸 아름다운 사람들'은 마침내 도저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경찰의 방어벽을 뚫고, 미대사관 앞으로 노도와 같이 밀려갔다. 이 촛불시위를 가장 먼저 제안했던 네티즌 '앙마'의 연설처럼, 시청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 15년이 걸렸다. 1987년 6월항쟁 당시 학생지도부의 일원으로 '광화문 패전'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던 나에게 그 말은 어떤 구원의 메시지처럼 들렸다.
대한민국 땅이지만, 마음대로 접근할 수 없었던 성역이자 금단의 공간에서 사람들은 목이 터져라 온갖 구호를 외쳤고,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 나를 감동시킨 구호는 이것이었다.
"대한민국 만세!"
누구는 그것을 국수주의적 몸부림이라고 과소평가하겠지만, 그리고 어느 신문사의 주필은 그것을 '식민지 콤플렉스'라고 해석한 모양이지만, 나는 그 '원초적 구호'야말로 가장 극명하게 정곡을 찔렀다고 본다. 그 신문사 주필께서도 미대사관 앞의 차가운 아스팔트에 주저앉아 서울 하늘을 쳐다봤다면, 내 심정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나는 보았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내지른 구호가 미대사관 건물을 뒤흔드는 동안 불켜진 창으로 고개를 내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전에 철저하게 교육했던 결과일까, 아니면 애초에 그들의 문화가 그런 것일까. 한 사람이라도 고개를 내밀어 볼만도 하건만, 그들은 철저한 외면과 침묵으로 일관했다. 나는 거기서 '오만한 미국'을 다시 한번 보았다.
'외면하는 침묵자'는 또 있었다. 광화문 네거리의 조망권을 완전히 장악한 두 신문사의 대형 전광판이 바로 '그들'이었다.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그 신문사는 대한민국 남녀노소의 '21세기판 만세시위'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듯 딴청을 피운 채 무심하게 상업광고를 쏟아내고 있었다.
오늘 촛불시위에서 명연설로 사람들을 웃기고 울렸던 네티즌 '앙마'는 연설 도중 두 번이나 언론의 책임을 물으면서 각성을 촉구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언론의 역할이 여전히 중요함을 증언했다. 한 방송사가 방영한 프로그램을 보고 새벽 6시까지 잠을 못 이룬 끝에 촛불시위를 제안했다고 한 것이다.
군중은 언론 문제가 언급될 때마다 열띤 호응을 보였다. 옆에 있던 한 청년이 중얼거렸다.
"그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언론이죠?"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