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그컵
2021.6.17.
석야 신웅순
정수기 물을 받으려는 찰나였다. 순간 쨍그랑 하더니 머그컵 아랫부분이 도막났다. 모서리에 부딪친 것이다. 아침이었다.
3년 전 쯤이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내 머그컵을 만들었다. 한 번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던 머그컵이다. 이제 더 이상 쓸 수가 없게 되었다.
뻐꾹새, 소쩍새가
앉았다 간 걸 보면
산국, 씀바귀꽃
피었다 진 걸 보면
바람도 울다가는 곳
따로 있나보다
-신웅순의「어머니 24」
컵에 실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시이다. 특별한 의미를 둔 것은 아니나 새삼 읽어보니 컵도 바람처럼 울다간 것 같다. 미안하다. 매일 따뜻한 물과 커피를 준, 언제나 내게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컵이다. 무생물이라 한들 정이야 없었겠는가. 나 역시 정이 들어 이별의 심정을 어찌 한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우금 삼년은 따라서는 짧은 시간일지 모르나 수차례 입술을 부벼대며 나와 떨어진 적 한 번도 없었으니 어찌 말로 헤아릴 수 있으랴. 하룻밤 풋사랑도 인연이라는데 하마 삼년이다. 이렇게 나와의 인연은 남다르다.
차 한 잔 할 때마다 내 그리운 생각들을 정리해주었고 내 외로운 생각들을 진정시켜주지 않았는가. 때론 이별의 슬픔도 다스려주었고 때론 기쁨의 감정도 아늑하게 해주지 않았는가. 그 때마다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던 컵이었으니 어찌 그냥 보낼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나는 선생이었다. 왠만하면 사람을 고쳐쓰고자 했다. 번번이 실패였다. 상대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사람도 컵과 다를 것이 무엇이던가. 이것을 인연이라 하는 것인가. 나 말고 다른 인연을 만나면 되는 것이다. 퍼즐이 맞는 사람이 따로 있다. 굳이 고쳐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내 곁을 떠나지만 그대 할 일은 다했다. 그동안 나를 이만큼 성숙하게 해주었고 만남과 이별을 사색하게 해주었다. 힘들 때마다 지혜를 주었다. ‘저 나무를 바라보라.’ ‘저 꽃을 바라보라.’ 내게 은은하게 말도 건네주지 않았는가. 저 산의 높이와 저 강의 깊이를 내게 귀뜸해 주지 않았는가. 내 이름 석자도 새겼으나 내 부주의 탓으로 너를 그만 보내게 되었으니 그것이 미안하고 또 미안할 뿐이다. 너는 내게 할 일 다 했다. 어느 흙 속이라도 영원히 편안한 잠을 잘 것이다. 그 동안 고생했고 수고했다.
네게 해 줄 말이 부족해 내 조침문으로나 영결하고자한다.
인간 부녀의 손 가운데 종요로운 것이 바늘이로대, 세상 사람이 귀히 아니 여기는 것은 도처에 흔한 바이로다. 이 바늘은 한낱 작은 물건이나 이렇듯이 슬퍼함은 나의 정회가 남과 다름이라. 오호통재라, 아깝고 불쌍하다. 너를 얻어 손 가운데 지닌 지 우 금 이십 칠 년이라. 어이 인정이 그렇지 아니하리요. 슬프다. 눈물을 잠깐 거두고 심신 을 겨우 진정하여 너의 행장과 나의 회포를 총총히 적어 영결하노라.
한 세상 잠깐 왔다가는 것이 인생이 아니더냐. 하루살이도 하루가 일생이요, 인간도 길어야 백년이 일생이다. 3년이 너의 일생이었으니 조금은 짧은 듯하나 여기까지가 나와의 인연이다. 아쉬운 일생을 살다가는 것이 인생이다. 네가 내게 큰 가르침을 주었으니 그만으로도 나는 너무나 행복하다. 스승의 뜻을 새삼 새겨주고 갔으니 고맙고 고맙다.
나에게 행복을 주고 간 나의 머그컵아.
- 석야 신웅순의 서재, 둔산동 여여재
첫댓글 멋진 작품이 깨져서 어찌해요.
누군가 그랬던가요!
그릇은
깨지라고
있는거다~~라고.
무생물도 우리가 情을 넣는 순간부터
생물이 되는거지요.
그래도 이 머그컵은
조문글도 받고
일생이 헛되지않았네요.
함께 명복을 빌어드립니다🙏🙏🙏
인사동
일중 여초 선생님 전시보러 가는전철입니다.
설레이는 발길입니다.
누군가에게
설레임을
줄 수있는 작품을 남긴다는 것...
🙏🙏🙏
오늘도 오셔서 등불을 달고 가셨네요.
시인은 설레이는 가슴을 죽을 때까지 졸업하지 않는 사람이랍니다.
님이 진정 시인이십니다.
친구가 제 글을 보고 깨진 머그컵을 달라더군요.
순간 접착제로 부치면 된다고.그 컵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면 된다고요.
그 컵도 사람들처럼 제2의 인생을 살 것 같습니다.
잘 다녀오시고요,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감사합니다.
등불을 달고가다.
선생님께
수업을 받고있네요~~^^
순간 접착제로
다른 용도로.
참 훌륭한 아이디어네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
무슨 말씀이십니까? 수업이라니요.님의 글솜씨가 저보다 나은 걸요.
다른 용도로의 사용, 저도 생각 못했습니다.
외려 다행입니다.주말 잘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감동적이네요
좋은글과 마음에 짠한 깨진머그컵 사진 멋있어요
누군가가 재활용으로 더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는 머스컵의 사진이 보고싶네요
저보다 더 좋은 인연이 있는가 봅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춘암 선생님.
머그컵 사진입니다.
정년 퇴임 기념 전시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