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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16일 설
제1독서 : 민수 6,22-27
제2독서 : 야고 4,13-15
복 음 : 루카 12,25-4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축복받은 삶
-하느님은 축복의 근원이시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축복받은 삶입니다. 살아있음이 축복이요 행복입니다.
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행복하게 살라고 세상에 태어난 우리들입니다. 행복은 우리의 존재이유입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의 마땅한 권리이며 의무입니다.
언젠가의 행복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서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바라는 하느님의 유일한 소망이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마지막날 당신을 뵈옵는 날, 단 하나 ‘행복하게 살았는가?’ 물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행복하게 사십시오. 주님 사랑의 명령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새해 설날을 맞이하여 이 강론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민수기의 참 좋은 사제 축복을 드립니다.
하느님은 축복의 근원이십니다. 하느님이 참 좋아하시는 일이 축복주시는 일입니다.
-“1.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2.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3.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 라.”-
세 차례에 걸쳐 거푸 주시는 주님의 축복입니다.
사제의 축복과 더불어 우리에게 내려오는 주님의 복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축복받은 존재들입니다.
살아있음이 축복이요 행복입니다. 끊임없이 죽는 날까지 축복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마침 눈에 띠는 선물 받은 ‘오색약과’ 포장지에
선명히 눈에 띠는 유통기간 ‘2018.05.10.까지’ 라는 글자였습니다.
판매되는 모든 식품에는 유통기간이 있는 것처럼 사랑에도 ‘유통기간’이 있다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사랑에는, 하느님 축복에는 유통기간이 없습니다.
우리 사랑의 유통기간을, 행복의 유통기간을 무한히 늘리는 길은 단 하나
축복의 근원인 주님과 일치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제 써놓은 짧은 글이 생각납니다.
-“조각彫刻을 하듯/강론講論을 쓰네
말씀으로/예수님 얼굴을 조각하네
날마다/조각하는 예수님 얼굴
“어, 예수님 얼굴이 내 얼굴이네!”
이런 날도 있으리라/소망所望하며/날마다/조각하듯 강론을 쓰네”-
하루하루 예수님 얼굴 조각하듯 사는 인생이라면 얼마나 복된 삶이겠는지요.
바로 렉시오 디비나의 생활화가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읽고 듣기-묵상하기-기도하기-관상하기-실천하기’의 리듬 따라 하루하루 사는 길이
바로 예수님의 얼굴을 조각하는 일입니다.
언젠가의 ‘어, 예수님의 얼굴이 내 얼굴이네!’ 탄성을 발할 날도 올 것입니다.
늘 겸손해야 합니다.
축복받은 삶의 진위를 가늠하는 첫째 잣대가 겸손입니다.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래야 렉시오 디비나의 생활화로 예수님 얼굴을 잘 조각하여 관상적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 야고보 사도를 통한 주님의 당부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하고 말해야 합니다.”
비단 부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는
‘자만하지 마라’, ‘겸손하라’, ‘분수를 알라’ 는 뜻이 담긴 충고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순식간 한 줄기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는,
준비 없이 당하는 참으로 안타까운 죽음도 흔히 목격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겸손히, 받은 행복을 잘 가꾸고 돌보며 관리하는 책임이 참 막중합니다.
행복 또한 선물이자 과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깨어 사는 일입니다.
축복받는 삶의 진위를 가늠하는 둘째 잣대가 바로 깨어있음입니다.
영성생활의 궁극목표도, 끊임없는 기도의 궁극목표도 깨어 있음입니다.
깨어있을 때 깨끗한 마음이요, 이어지는 복된 깨달음들입니다.
어제 읽은 사막교부 팜보 압바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만일 네가 마음을 지녔다면, 너는 구원받을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마음은 깨어 있는 마음을 뜻합니다.
생각 없이, 영혼 없이, 마음 없이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깨어있음은 열림이요 빛이요 생명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도 ‘깨어 있음’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돌아오는 주님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님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주님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을 행복하다! 너희는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주님이 올 것이다.”
‘주인’을, ‘사람의 아들’을 아주 간명하게 ‘주님’으로 바꿨습니다.
이런 깨어 있는 이들이 바로 축복받은 이들입니다.
주님의 축복을 받기에 앞서 우리의 준비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준비되지 않아 아깝게 낭비되는 또 차버리는 주님의 복은 얼마나 많은지요.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말도 있듯이
활짝 열린 마음의 문으로 들어오는 축복입니다.
겸손은, 깨어있음은 하느님의 축복을 담는 그릇과 같습니다.
그릇이 깨끗해야, 텅 비어 있어야 주님의 축복이지 그릇이 욕심으로,
나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면, 또 그릇이 꽉 닫혀 있다면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이는 하느님 탓이 아니라 내탓입니다. 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는 일이 죄짓는 일이라면 하느님 하시는 일은 ‘용서하시는 일’과 ‘축복주시는 일’ 둘입니다.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미 우리는 모두 축복받은 복덩어리 존재들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 자체보다 큰 축복은 없습니다.
그러니 늘 겸손하십시오. 늘 깨어 있으십시오. 이래야 비로소 축복의 완성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겸손히 깨어 활짝 열려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온갖 좋은 것들을 가득 내려 주십니다.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시편90,17ㄱ).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동방의 임금이 인간에 대해서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의 가장 지혜롭다는 현자를 불러서 인간에 대해 알려주는 500권의 책을 가져오라고 명했습니다.
현자는 500권의 책을 가지고 왔지요.
그러나 막상 이 500권의 책을 차분하게 읽으려고 하니 나랏일이 너무 바빠서 읽을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현자를 불러서 이 500권을 요약해서 가져오라고 시켰습니다.
20년 후, 현자는 인간에 대한 500권의 책을 요약해서 50권으로 만들어서 가져왔습니다.
임금은 이제 나이가 들어서 책을 보는데 어려움을 느끼니 더 줄여오라고 시켰습니다.
그로부터 또 20년의 시간이 지나서, 백발이 된 현자는 딱 1권의 책으로 줄여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죽음을 바로 앞둔 임금은 정신이 혼미해서 이 책마저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거의 죽어가는 소리로 인간에 대해서 더 줄일 수 없느냐고 물었지요.
이에 현자는 다음과 같은 한 줄로 요약해서 곧바로 가져왔다고 합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고생하다, 죽는다.”
인간이 뭐 별 것 있겠습니까? 모두가 태어나서 고생하다가 죽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 없는 세계에서의 삶이 중요합니다.
즉,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삶이 중요하기에,
이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준비를 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갑곶성지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초봉헌대가 부서진 것을 보고서 CCTV를 확인해보니 도둑이 한밤중에 찾아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자물쇠 한 개가 손상된 것 외에는 그 어떤 피해도 없었습니다.
중요한 곳은 보안업체를 통해서 방범시설을 해놓았고,
초봉헌대 역시 부술 수 없도록 새롭게 교체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도둑은 아무런 소득 없이 빈털터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지요.
도둑을 대비해서 미리 준비를 하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살아 있을 때 잘 준비해서
죽음 이후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영광을 차지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오늘은 민족의 큰 명절인 설날입니다.
특별히 조상님을 기억하면서 차례를 지내고 웃어른께 세배를 드리면서 가족과 좋은 시간을 보냅니다.
조상님을 통해 자신의 미래 삶을 떠올릴 수 있으며, 가족과 함께 하는 사랑의 시간이
먼 미래를 위한 준비가 되면 어떨까 싶습니다.
단순히 하루 편안하게 쉬는 날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올 미래를 잘 준비하면서 지금이라는 현재를 잘 살아야 할 것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고,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인의 귀환을 깨어 기다리는 종들이 복을 받는다는 말씀(루카 12,35-38)과
사람의 아들이 갑자기 오실 것임을 명심하라는 말씀이다(루카 12,39-40)로 되어 있습니다.
<루카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남겨주신 최후의 행위는 축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장면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루카 24,50-51)
그렇습니다. 우리는 축복받은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생명과 자비를 입은 존재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은 존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생명을 주시고, 당신 존재를 건네주셨습니다.
그러기에, 비록 지금 내가 그 어떤 어려움에 있다하더라도,
그 속에서 축복을 느끼는 자는 진정 복된 자입니다.
복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깨닫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 축복은 궁극적으로 하느님 존재 자체를 깨우쳐줍니다.
그러기에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존재와 자비에 깨어있는 사람이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에 깨어있는 만큼, 꼭 그만큼 축복받은 사람이 됩니다.
<성경>에서, ‘축복’은 하느님의 놀라우신 자비를 말하고 있습니다.
축복을 뜻하는 히브리어 ‘바레크’라는 단어는 ‘어떤 것을 선사함’이요, ‘주어진 선물’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생명체만이 축복을 받을 수 있고, 무생물은 하느님께 봉사하기 위해 축성될 뿐입니다.
‘축복’은 말씀과 그 말씀의 신비를 통해 표현되고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곧 축복은 말씀입니다.
‘좋은 말’(εύλογία, benedictio) 입니다. 좋게 되기를 빌어주는 말입니다.
곧 좋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말입니다. 곧 ‘위하여’ 건네주는 말입니다.
때로, 우리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도 역시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습니다. 피하고 싶고, 보고 싶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긴장과 갈등, 불화와 대립, 적대감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한 상대를 뜯어고쳐 변화시키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나 자신을 변화시키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 어찌합니까! 그 질곡은 진절머리 날뿐! 벗어나지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럴 때, 그를 거부하면 더욱 더 멀어지고, 미워하면 더욱 더 미워지기만 합니다.
바로 이럴 때가, 진정 ‘축복’을 빌어주어야 할 때입니다.
복을 빌어주어야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그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축복기도’는 아주 간단합니다.
주님, 그를 축복해주십시오. 저도 그를 축복합니다.
당신의 축복이 실현되도록 저희가 응답하게 하소서!
참 묘한 것은, 그렇게 하면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렇게 할 때, 이미 내 자신이 변한 것입니다.
거부하고 미워하던 그 상대를 축복해주는 그 순간, 바로 그 순간에
변화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이미 내 안에서 함께 하십니다.
벌써 내 안에서 그를 ‘위하는 마음’을 북돋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서로 변화됩니다.
이처럼, 이 소박한 우리의 축복기도는 우리에게 당신의 권능에 응답할 수 있는 장을 열어 줍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공간을 열어 드립니다.
그분의 자비가 흘러들게 하고, 그분 존재를 건네받게 합니다.
바로 이 소박한 축복이 가져다 준 선물입니다.
다시 한 번 축복을 빕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받아 누리는 축복의 한해 되길 빕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대를 통하여 세상의 모든 이가 복을 받을 것입니다.”(창세 12,3).
‘축복 빕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매일성경묵상
염철호 신부
● 시작기도
희망의 영이신 성령님, 주님을 향해 늘 깨어있도록 당신의 인도에 저를 의탁합니다. 아멘.
● 말씀 들여다보기
오늘은 민족의 고유한 명절인 설입니다.
가족이 함께 차례를 지내고 조상과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며
올 한 해도 하느님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사 청하며 미사를 봉헌합니다.
그런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늘 깨어있으라고 가르치십니다.
새해 첫날 교회는 왜 깨어있으라고 가르치십니다.
새해 첫날 교회는 왜 깨어있으라는 예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일까요?
이 점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루카복음에서 오늘 복음 앞뒤에 나오는 이야기 문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앞서 예수님은 세상 걱정에 빠져 하느님 나라를 잊지 말고 애써 찾으라고 강조하십니다.(루카 12,22-32)
그리고 세상 곶간에 재물을 쌓지 말고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권고하신 뒤,(33-34절)
오늘 복음에서 늘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에서 예수님은 주인이 늦게 올 것이라고 생각하며 함부로 사는 사람은 반드시 매를 맞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41-48절)
새해 첫날부터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한 해를 살아가면서
무엇에 더 관심을 기울이며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루하루 우리에게 닥쳐오는 여러 어려움에 매몰되어 살다가는
삶의 방향 자체를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하더라도 눈을 들어 자신이 걸어가야 할 방향,
하느님나라에 시선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고 세상 걱정에 매몰되어 세상의 재물에만 관심을 기울이며 살아가는 이는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때 불충실한 자들이 얻게 될 그런 운명을 겪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걱정에 매몰되지 않고 늘 깨어 자신이 걸어가야 할 바를 잘 준비하는 이들,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는 이들은 주인과 함께 식탁에 앉아 영원한 생명의 음식을 먹게 될 것입니다.
● 나를 건드리는 말씀 한마디
● 말씀 따라 걷기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세상 걱정은 무엇인가?
*내 삶의 궁극적인 방향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 마침기도
제 삶의 주관자이신 주님, 언제 어디서나 저를 당신께로 이끌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아멘.
깨어 기다리며 친교를 이루는 기쁨의 날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음력 정월 초하룻날에, 우리는 한데 모여 조상을 기억하고, 서로를 축복하며 감사와 친교를 나눕니다.
아울러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우리는 이 축제의 주인이신 주님이 누구이신지 생각해야겠습니다.
"아침에 돋아나 푸르렀다가 저녁에 시들어 말라버릴 풀과 같음"(시편 90)을 기억하며,
늘 깨어 준비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도록 힘써야겠지요.
오늘의 말씀들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생각하도록 이끌어줍니다.
제 1독서에서 주님은 축복의 원천이요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선하신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축복하시고 지켜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와 평화를 베푸십니다.
하찮은 인간은 당신 자신 전부를 건네시는 주님의 충만한 축복 속에 살아갑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아무도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 4,14)
따라서 현세 이익을 추구하려들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께서 원하시는 일을 성실히 실행하도록 할 것입니다.
주님의 축복 안에 머물려면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할까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종처럼 주인이 언제 돌아오든 맞이할 준비를 하고 깨어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그분의 선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그분에 대한 기다림은 '사랑에 대한 갈망'입니다.
우리가 깨어 주님의 자비와 선을 기다릴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 삶을 '영원한 기쁨의 축제'로 바꿔주실 것입니다.
행복은 생각지 않은 때에 찾아듭니다.
주님은 그렇게 예기치 않은 순간에 내 영혼의 문을 두드리실 것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기쁨의 축제에 참여하려면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오시는 분이 내 삶의 주인이시며,
선과 은혜와 평회를 들고 오심을 알아차리고 그분께 집중하는 것이지요.
그저 허송세월하는 게 아니라 빛의 자녀다운 삶의 준비를 하며 기다려야 하겠지요.
믿음과 희망 속에 오시는 주님을 인내롭게 기다릴 때 주어지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선과 사랑을
갈망하며 기다리는 이들의 시중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축복이 있을까요?
설 명절을 맞아 우리가 행복하도록 자비와 은혜와 평화를 베풀어주러 오시는 주님을 깨어 맞이해야겠습니다.
사랑하는 님에 대한 갈망을 키워가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주님과 깊은 친교를 이루고, 주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겠지요.
세상 유혹과 시련, 불의와 절망에 맞서며 모두가 주님의 기쁨 안에 머무는 참 축제의 날이었으면 합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깨어있음과 자아
전삼용 요셉 신부
자아에 대한 강론에 이어 자아에 대해 더 알아보겠습니다.
자아는 자신을 불만족스럽게 만들어서 행복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밭에 묻힌 보물처럼 결국 행복은 자신 안에 있습니다.
자아는 끊임없이 외적인 것들에 신경을 쓰게 만들어서 자신 안에 있는 보물을 발견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페르샤 사람인 알리 하베트는 맑은 강이 흐르고 높은 산이 뒤로 있는
물 좋고 공기 좋은 아주 넓은 농토를 경영하는 대농사꾼이었고 큰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어느 날 수도사 한 사람이 찾아와서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다가
진기한 보석이 있는데, 만일 그 보석의 광산을 찾게 되는 사람은 부자가 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부로 인하여 왕도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답니다.
그 보석은 햇빛에 응고된 것으로 신기하기까지 한 다이아몬드에 대한 얘기였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알리 하베트는 그날 밤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그 광산을 찾아내어 대부호가 되는 공상 때문이었습니다.
날이 밝기를 기다린 알리 하베트는 수도사에게 쫓아가서 어디를 가면
그런 광산을 찾을 수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수도사는 “무엇 하시게요?” 하고 물었고 알리는 “대 부호가 되고 싶다”고 했답니다.
한참 있다가 수도사는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높은 산이 있고, 맑은 물이 흐르고 하얀 모래가 있는 곳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알리 하베트는 가산을 전부 정리하여 다이아몬드 광산을 찾아 떠났습니다.
그는 중동을 비롯해서 전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 북부를 돌아다녔으나 광산은 찾지 못했고,
결국은 거지가 되어 스페인 어느 해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고 합니다.
알리 하베트의 농장을 샀던 농부는 어느 날 시냇물에서 몸을 씻다가
유난히 반짝이는 돌 하나를 주어다가 방 선반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농부는 농사일을 부지런히 하는데 정신을 쏟아서 하느라고 돌에 대한 생각은 잊어버렸는데,
또 얼마가 지난 후에 수도사 왔다가 방에 들어서자 큰 소리로 “알리가 돌아왔군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농부가 오지 않았다고 하면서 왜 그렇게 말하는가 묻자
그러면 저 선반위에 있는 돌은 누가 가져왔느냐고 물었답니다.
농부가 대답하기를 얼마 전에 자기가 시냇물에서 몸을 씻다가 하도 신기해서 주어왔다고 말했답니다.
수도사는 빨리 그리로 가보자고 해서 뛰어가 그 시냇가에서 손으로 돌을 조금 헤집고 보니
바로 다이아몬드가 묻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더스 골곤다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된 것이며,
그 다이아몬드로 영국의 왕관과 러시아 왕관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다이아몬드는 바로 내 안에 있습니다. 내 안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자아입니다.
이렇게 자아는 참 나를 세상 것들에 집착하게 만드는데 그래서 내 안에 일어나는 현상이 ‘정서불안’입니다.
계절이나 날씨를 타는 분들이 계시지요?
비오면 기분이 우울해지거나 가을이 오면 허전해 지는 분들도 계시지요?
외로울 때도 있고 작은 것에 짜증과 화가 날 때도 있지요?
그러나 가만히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다 비 온다고 기분 나쁘거나 가을이 된다고 쓸쓸해지지 않습니다.
이런 감정들은 다 자아가 만들어내는 감정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작은 일에도 누구를 미워하여 용서 못하게 되지만,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일가족을 모두 살해한 사람도 용서하고 자신의 자녀로 삼겠다고 합니다.
누구는 자아를 내려놓을 줄 알고, 누구는 자아가 일으키는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자아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이 자신의 뜻대로 안 됩니다.
자아에게 자신을 빼앗긴 것입니다.
일찍 일어나는 것도, 소식을 하는 것도, 화를 참는 것도, 미워하지 않는 것도 안 됩니다.
매우 기뻤다가도 금방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감정에 사로잡혀 어떤 때는 누가 매우 사랑스러웠다가 금방 미워 죽을 지경이 됩니다.
자기를 빼앗긴 것입니다.
잠을 잘 때는 자기는 자기 뜻대로 안 됩니다.
몸이 어떻게 뒤척이는지, 꿈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뜻대로 자신을 움직일 수 없는 자아에 사로잡힌 상태가 바로 잠을 자는 것입니다.
지난 주 금요일에 저의 신학교 입학 동창인 유 안드레아 신부가 서품을 받고
첫 미사를 저희 성당으로 왔었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한지 17년 만인 것입니다.
이제 잠비아로 선교를 떠나게 되는데, 강론 때 사제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감명 깊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안드레아 신부가 부제품 받기 전, 당시 김화태 제르바시오, 현 수원교구 평택대리구장님이
부제품 피정지도를 하고 계셨습니다. 김화태 신부님은 공교롭게도 안드레아 신부의 추천신부셨습니다.
당시 안드레아 신부는 심적으로 성소에 대해 갈등을 하고 있었습니다.
워낙 여러 가지 재능이 뛰어난지라 밖을 바라보고 있었고, 결국 부제품 3일 전 피중 중,
아버지 신부님께 서품을 못 받겠다고 말씀드려 신학교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취직준비를 하고 있을 때 아버지 신부님이 찾아오시더니
당신이 기도해 보니 안드레아는 반드시 신부님이 될 것이라고 하느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는 믿지 않았지만 1년 뒤에는 프란치스코 전교봉사 수도원에 입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수도회는 자신과 같이 상처가 많은 사람들을 다 받아주고 있었고,
그러니 상처받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 것이 지옥과 같았다고 합니다.
다시 종신서원 3일 전, 피정 중에 수도원을 나오기로 마음을 먹고 짐을 다 싸놓고
성당에 가서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리기 위해 밤 12시에 혼자 앉아있었습니다.
3시간 정도 지난 뒤에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더랍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기 위해 내 손과 발이 뚫려 나무에 박혀있는데, 너는 나를 떠나려고만 하느냐?
보아라, 나는 우도뿐만 아니라 좌도에게도 내 팔을 벌렸다. 너는 왜 쉬운 쪽만 찾느냐?”
그리고는 자신이 너무 교만했다는 것에 눈물을 흘리고,
다시 짐을 풀고 종신서원을 하고 곧 이어 서품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밖에 있으면 안으로 들어가고 싶고,
안으로 들어가면 다시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자아의 습성입니다.
자아는 우리가 행복한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런 감정에 휩쓸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자신을 조정할 수 없다는 나는
자아가 일으키는 감정의 노예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예전, 혼자 영화관 가서 ‘7번방의 선물’이란 영화를 보려고 앉았는데
옆에서 커다란 팝콘 바구니를 안고 계속 부스럭거리며 집중을 방해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자존심을 상하더라도 저는 옆의 빈자리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왜냐하면 영화에 몰입할 수 없다면 방해하는 사람을 떠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서 비싼 돈 내고 영화 보러 들어온 것이 아니라,
내 행복을 위해서 들어온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우리가 몰입하여 행복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 합니다.
유재선 신부와 같은 경우는 사제가 되려 할 때는 밖이 좋아 보이고,
또 밖에 있을 때는 안이 좋아 보여 그리스도를 온전한 마음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자아였고, 본인은 교만이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설입니다.
조상님들을 생각하고 우리의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죽었을 때, 오늘 복음에서처럼 살아있었을 때 항상 깨어 있어서
예수님이 허리에 띠를 매고 우리를 식탁에 앉힌 다음 우리에게 시중을 들어줄 수도 있고,
혹은 깨어있지 못해서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주인으로 항상 우리 마음 안에 계셨습니다.
풍랑 속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깨어있지 못해서
배 안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기억해내지 못했습니다. 교만한 자아는 그런 것입니다.
깨어있다는 말은 내 안의 주인을 깨우는 일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아를 이길 수 없고,
그래서 절대 행복할 수 없음을 깨닫고 우리의 참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몰입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참 행복의 길을 찾고 싶어서 세상에서 제일 현명하기도 하고
그만큼 재산도 많은 현자를 찾아갔습니다. 오랜 여행 끝에 그 집에 당도하였습니다.
산 정상에 있는 그 집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화려한 모습의 궁궐이었습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니 현자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자 온 수 많은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현자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예, 저는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선 저의 집을 좀 구경해 보십시오.
집 안에는 세계의 귀한 예술품들이 모아져 있고 정원은
세상 어디서도 보지 못한 식물들과 꽃들을 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기름이 담긴 숟가락을 드릴 테니 제 집을 구경하시면서
이 기름이 든 숟가락을 들고 다니십시오.
만약 집을 다 구경한 뒤에도 숟가락에 기름이 그대로 남아있다면
그 때서야 행복의 비밀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다른 손님들을 만나야 하니 그 동안 집을 다 돌아보며 구경하도록 하십시오.”
그 사람은 기름이 담긴 숟가락을 조심스럽게 들고 집을 돌아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위에 있는 예술품들과 볼거리들에 너무 정신이 팔려
어느 순간에 숟가락에 있던 기름이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로는 걱정에 싸여 예술품이 예술품으로 보이지 않고
궁궐의 화려함도 정원의 아름다움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몇 시간 후에 집을 다 둘러본 후 현자를 다시 만났습니다.
“집 구경을 즐겁게 하셨습니까?”
“아니요, 기름이 흘러내려, 그 걱정에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서도 즐겁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다시 한 번 기회를 드릴 테니 이번엔 잘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은 기뻐서 이번엔 숟가락에서 정신을 떼지 않으면서도 주위의 것들을 잘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끝까지 집을 다 돈 후에도 숟가락에는 기름이 그대로 들어 있었습니다.
현자는 손님을 보며 말했습니다.
“이제, 행복의 길을 말씀드리지요.
행복의 방법은, 손님께서 하신 것처럼, 숟가락의 기름을 떨어뜨리지 않고
주위의 것들을 즐길 수 있는 기술입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이란 주위의 것들에 휘둘려 내 안에 계신 그 분께 대한 몰입을 잃게 될 때 깨지게 됩니다.
행복의 기술이란 세상 것들에 휘둘리지 않고 내 안의 그분께 집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누군가 나를 기억해주고 있었다면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마찬가지로 당신을 기억해주었기 때문에 당신께서 나중에 우리에게 식탁에 앉는 영광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분께 집중할 때야만 마음의 평정을 찾게 됩니다.
내 배의 참 주인이신 그분께서 내 안에 계심을 항상 잊지 말고 살아갑시다.
이것이 깨어있음입니다.
새 해 복 많이 받으세요~ ^ ^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