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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문화의 원류 원문보기 글쓴이: 솔롱고
<天官怨 ③>(계속): 천관원(天官怨)과 <六部軍 騎馬 聖母’의 눈물>
2. 천관원(天官怨)이란 노래와 이것이 만들어진 유래(由來)
그런데 김유신(金庾信) 화랑께서 천관녀(天官女)인 의회여경(議會女警)과 또 ‘남자로 구성된’ 의회경찰(議會警察)인
용화향도(龍華香徒)에게 이처럼 말(馬)들에게 ‘됴’를 들여서 무공마(武功馬)로 바꾸게 되는 과정에 관한 천관녀
(天官女)들이 자신이 점점 허기(虛飢)에 차게 한 자기자식과도 같은 말(馬)들이 상처가 나서온 것을 고쳐서 다음날
내보내면 이윽고 죽어가고, 훌륭한 무공마(武功馬)가 되었지만, 마지막 3단계를 통과하지 못해서 자신의 눈 앞에서
참마(斬馬) 당하는 것을 보면서 ‘피눈물’을 흘리면서 부른 유명한 노래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천관원(天官怨)이라는 노래이고, 이 ‘노래’의 유래(由來)가 잘못 전(傳)해진 것이 바로 ‘기생(妓生)
천관녀(天官女)와 김유신 화랑(花郞)과의 사랑’에 관한 설화(說話)인 것입니다.
가. 천관원(天官怨)이 만들어진 유래(由來)에 대한 해석(解釋)
문제는 <천관원(天官怨)의 유래(由來)> 자체를 신라시대의 특이한 사회제도와 관습을 고려하면, 지금까지 좌계가
이야기한 ‘말(馬)에 <됴>를 들이기 위해서 소도(蘇塗)를 활용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사회제도와 관습을
이해하지 못한 후세(後世)의 사람들이 ‘기생(妓生) 천관녀(天官女)’와 김유신 화랑과의 애닲은 러브 스토리(love
story)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전해지는 천관원(天官怨) 유래(由來)를 다시 복원(復元)해서 재해석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천관원(天官怨)의 ‘노래가사’가 적혀 있는 것은 <星湖先生全集卷之七 海東樂府 天官怨>이 유일(唯一)합니다.
이 이외에도 이 천관원(天官怨)과 그 유래(由來)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문헌에서 발견이 되지만, 정작 천관원(天官怨)
의 가사(歌詞)가 없기 때문에, 성호(星湖)선생의 문집을 판본(板本)으로 해석을 함이 좋을 듯합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천관녀(天官女)와 김유신 화랑에 관한 전래되는 이야기는 전해지는 모든 문헌이 글자 한글자도
틀리지 않고 똑같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이상한 일치를 보이는가?”
그것은 곧 살펴보게되겠지만, 원문(原文)을 읽어볼 때, “좀 뭔가 이상한 이야기이다.”라는 생각이 한문(漢文)에 밝은
선비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그런 글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뭔가 이상하다.”라는 느낌이 들때에는 원전(原典)을 확인해서 ‘글자 한 자(字)도 틀리지 않게 그대로 전해서
“ 후세(後世)에서 올바른 해석을 기다리는 것이 옛 선비들의 도덕성(道德性)이었던 것입니다.
즉 천관녀(天官女)와 김유신 화랑의 <사랑-이야기>는 “그것이 전달되는 것이 글자 한 자도 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해서 이미 선비들 사이에 “뭔가 우리들이 잘못 해석하는 것 같다.”라는 공감(共感)이 있었음을 알수가 있는 것입
니다.
이제 “왜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전래(傳來)한 선학(先學)들께서 하셨으며, 원래의 의미는 무엇이었는가를 따져
보기로 합니다.
알단 천관원(天官怨)이란 노래가 생기게 된 유래(由來)에 대한 기록은 아래에 보다시피 문단(文段)으로 나뉘면
7개의 문단으로 나눌 수 있는 ‘짧은 글’입니다.
① 金庾信爲兒時。母夫人日加嚴訓 。不妄交遊。
② 一日偶宿女隷家。母面敎之曰。
③ 我已老。日夜望汝成長立功。爲君親榮。今乃爾與屠沽小兒。戲遊淫房酒肆耶。號泣不已。
④ 庾信卽於母前自誓。不復過其門。
⑤ 一日被酒還家。馬遵舊路。誤至娼家。娼且欣且怨。。垂泣出血。
⑥ 庾信旣悟。斬所乘馬。棄鞍而返。
⑦ 女作怨詞一曲。傳之天官寺。寺卽其家也。天官其女號也。
그런데, 이 ‘짧은 글’에는 고리조(高麗朝)나 조선조(朝鮮朝) 선학(先學)들께서는 상상하기 매우 힘든 관경사국
(管境四國) 시절의 독특한 ‘사회문화’가 있었던 것입니다.
[① 문단의 해석(解釋)과 해설(解說)]
가) 원문(原文)의 직역(直譯)
① 金庾信爲兒時。母夫人日加嚴訓 。不妄交遊。
위 원문(原文)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김유신이 어린아이일 때에, 모부인(母夫人)은 나날이 엄격(嚴格)한 훈계(訓戒)와 훈련(訓練)을 하여서 함부로
사귀어 놀지 못하게 하였다.”
나) 아동(兒童)과 모부인(母夫人)은?
먼저 여기에 나오는 모부인(母夫人)은 김유신 장군의 생모(生母)가 절대 아니라는 점입니다.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 김서현(金舒玄)은 신라 26대 진평왕 때의 장군으로 가락국 시조인 수로왕의 12세 손이며 명장
김무력(金武力)의 아들이십니다.
김서현은 진평왕 25년인 서기 564년에 출생하여 진흥왕의 질녀인 만명(萬明) 과 중매를거치지 않고 옛말로 야합
(野合)하시어 거의 도망(逃亡)하다시피 한 분이시기 때문에, 열열히 서로 사랑하고, 자유연애를 한 부모(父母)에서
김유신(金庾信) 장군은 태어나셨던 것입니다.
이 천관원(天官怨)과 관련해서 등장하는 모부인(母夫人)은 생모(生母)가 아니라, 아직 사료(史料)에서 그 실명(實名)
이 밝혀지진 않았지만, <육부군(六部軍) 기마(騎馬) 성모(聖母)>인 것입니다.
신라의 군(軍)제도는 ‘벅수군을 총괄하는 오로군사(五路軍事)’일 경우 반드시 군모(軍母)를 두는 제도이고, 순방체제
를 따르는 관경사국(管境四國)의 소도(蘇塗)를 지키는 육부군(六部軍)일 경우 성모(聖母)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육부군(六部軍)의 육부(六部)자체가 ‘배달화백’을 운영함에 있어서 필요한 기능적인 6부서를 나타내기 때문에,
내외(內外)의 의사결정을 ‘화백회의’로써 하고, 이때에 성모(聖母)라는 오로군사(五路軍事)의 군모(軍母)보다
그 책임과 권한이 훨씬 큰 성모(聖母)가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육부군(六部軍)은 과포선(戈砲船)이라고 칭하는 막강하기 짝이 없는 군선(軍船)을 바탕으로 수군(水軍)이
형성이 되어 있는데, 기병(騎兵)부대 모두가 명적(鳴鏑)화살만 쏘는 기마군단(騎馬軍團)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육부군(六部軍)이 특이한 것은 적(敵)과 접전(接戰)을 할 때에 ‘포위’를 해서 영역군(領域軍)을 벅수군으로 투항
(投降)하고, 그 대신에 도전(刀錢)을 주어서 ‘현장에서 즉각 배달화백’으로 참여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육부군은 태(兌)나 자정(子井), 여정(女井), 심지어는 7가지의 위기 때 들어가는 거대한 허달성(虛達城)까지
죄다 육지(陸地)에 오를수 있게하는 토착화(土著化) 기술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거대한 수중(水中)-구조물(構造物)을 육지에서 ‘바퀴’를 달아서 움직이려면, 이를 말(馬)과 소(牛)가 끌게
하여야하는데, 이를 현실적으로 이루려면, 말(馬)들에게 ‘됴’를 들이는 방법을 쓸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관화랑(天官花郞)이셨던 김유신(金庾信) 화랑께서는 ‘됴’를 들이는 방법과 기술을 전수(傳授) 받기 위해서
이 <육부군(六部軍)-기마(騎馬)-성모(聖母)>의 아들이 되는 의식(儀式)을 치룬것입니다.
의식(儀式)을 치룬 후부터는 마치 스님이 된 다음부터는 법랍(法臘)이란 ‘새로운 나이’를 쓰기 때문에, 김유신 화랑
은 실제 나이가 18세 되던 때였지만, 갓태어난 1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아(兒)’라고 표현된 것입니다.
이때 천관녀(天官女)와 용화향도(龍華香徒) 모두가 모두 <육부군(六部軍) 기마(騎馬) 성모(聖母)>의 아이가 됨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신라의 소도(蘇塗)에서 ‘됴’를 들이는 방법을 훈련받기 시작하는데, 이러자면, ‘물과 먹이를 점차 줄이면서
야외-마굿간인 거(阹)’에서 말(馬)을 용화향도(龍華香徒) 즉 ‘남자 의회경찰’들에게 넘겨주고 산등성이를 굴러떨어
지는 상처를 밤새도록 치료하고 간호하다가 ‘물과 음식도 줄여가면서’ 다시 내보내는 천관녀(天官女)와의 교류(交流)
를 함부로 못하게 하는 것이 중요해집니다.
훈련목표를 어긋나게 하는 부탁을 하게 마련이고, 또 혹독한 훈련을 시키는 용화향도도 밤새 치료해준 천관녀
(天官女)의 부탁을 외면할수도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원문(原文)은 ‘나날이 엄격한 훈련을 하여 함부로 만나서 어울리지 못하게 하였다.’는 말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속설(俗說)과 같이 김유신 장군이 기생 천관녀 어울리는 것을 알고 “나날이 훈계(訓戒)가 엄격해지고,
함부로 만나서 어울리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은 좀 이상한 것입니다.
못 어울리게 하면 그만이지, 나날히 엄격한 훈계(訓戒)가 무엇인지? 왜 이미 17세가 된 화랑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지가 아귀가 안맞기 때문에 이상한 문장이 되는 것입니다.
[② 문단의 해석(解釋)과 해설(解說)]
가) 원문(原文)의 직역(直譯)
② 一日偶宿女隷家。母面敎之.
하루는 <여자 노예(=종(從))> 집에 (김유신 화랑이) ‘짝(=우(偶))’을 지어 잠을 자게 되었는데, 모부인(母夫人)이 면전
(面前)에서 교육하시었다.
나) 왜 김유신 , 천관녀(天官女)는 ‘짝’을 짓는 현장에서 모부인(母夫人)이 함께 숙박(宿泊)하게 되었는가?
조선조(朝鮮朝)나 고리조(高麗朝)의 선학(先學)들께서 “뭔가 이상하다.”라고 생각하게 한 대표적인 문장입니다.
앞에 하루는 하면서 문장이 시작하였는데 이어지는 문장인 ‘母面敎之’가 기후(其後)라든가 하는 따위의 문장이 없게
되면, 이는 김유신 화랑에 ‘짝’을 지어서 천관녀(天官女)와 잠을 자는 현장(現場)에서 대면(對面)하고 가르침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참으로 해석이 곤혹스러운 것인데, 교육하는 말씀을 나중에 살펴보면, 역시 ‘짝을 지어 천관녀와 김유신 화랑’
이 있는 곳에서 말씀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더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 어떤 패륜아(悖倫兒)도 생모(生母) 앞에서 다른 여자와 성행위(性行爲)를 하지 않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이 문장은 몹시 곤혹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남당(南堂) 박창화 선생께서 화랑세기(花郞世紀)의 필사본을 공개하셨기 때문에, 이 이상한 의미는
해명(解明)이 된 것입니다.
화랑(花郞)제도에서는 낭도(郎徒)들 중에 직위(職位)가 높은 사람들은 자신의 부인이 임신(姙娠)을 하게 되면,
화랑(花郞)과 동숙(同宿)하게 하는 제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는 ‘일종의 살아있는 영혼(靈魂) 결혼식’이 되어서 그 태어난 아들은 화랑(花郞)의 ‘정신적인 아들’
즉 귀복자(鬼腹子)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임신(姙娠)안 천관녀(天官女)들이 김유신 천관화랑(天官花郞)과 동숙(同宿)함으로써 태어나는 아들이 천관
(天官)의 귀복자(鬼腹子)로 되게하는 독특한 의식(儀式)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의식은 천관녀(天官女)들이 천관화랑(天官花郞)을 ‘살아있는 영혼의 남편’으로 생각하는 특이한 가족의식에서
의회경찰(議會警察)로써의 일을 하였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여자 노예 집>이라고 표현한 것은 “우리들은 천독(天毒)들의 종(從)이다.”라는 생각에서 붙여진 것이지,
절대 김유신 화랑의 가계(家系)에 속해있는 종- 즉 사노(私奴)는 아닌 것입니다.
[③ 문단의 해석(解釋)과 해설(解說)]
가) 원문(原文)의 직역(直譯)
③ 我已老。日夜望汝成長立功。爲君親榮。今乃爾與屠沽小兒。戲遊淫房酒肆耶。號泣不已。
“나는 이미 늙었다. 낮이나 밤이나 간에 나는 너희들이 자라나서 공(功)을 세워서, 임금을 위하고, 양친(兩親)를 영예
(榮譽)롭게 함을 바란다.
오늘의 이 일이 너와 고기파는 어린 아이들이 ‘성행위(性行爲)를 하는 방(房)(=음방(淫房))과 술집에서 유희(遊戱)를
하는 일이더냐??!! “하며 소리치면서 우시며 그치지를 않았다.
나) 육부군(六部軍) 기마(騎馬) 성모(聖母)께서는 왜 소리치면서 우셨는가??
일단 위 문장에서는 천관녀(天官女)가 도고소아(屠沽小兒)로 표현이 됩니다.
이는 ‘육류(肉類)와 술(酒)을 파는 작은 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 너를 뜻하는 이(爾)과 함께(=여(與)) 있는 것이 확인이 되기 때문에, 천관녀(天官女)와 김유신 화랑이
동숙(同宿)하는 장소에서 면교(面敎)하는 내용이 확실한 것입니다.
바로 이점 때문에, 선학(先學)들은 “이해가 가진 하지만, 좀 이상하다!”라는 생각을 하고, “내가 잘못 옮긴 것이 아닌가?”
를 일일히 확인하다가 보니 글자 한자 안틀리고 같은 내용이 계속 전해지는 까닭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천관녀(天官女)들이 소도(蘇塗)의 사교항(社交巷)에서 천독들의 안전을 위해서 ‘고기와 술을 파는 행위’를
하였고, 또 천관녀들은 천관화랑과 ‘살아서 서로 영혼 결혼’을 하여 낳은 아들은 ‘귀복자(鬼腹子)’로써 계속 용화향도
(龍華香徒)가 되게 하는 선가(仙家)의 법도를 생각하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다가 임신(姙娠)하거나, 처녀이거나 상관없이 ‘살아있는 영혼결혼식’을 왜 육부군
(六部軍) 기마(騎馬) 성모(聖母)가 직접 주재(主宰)하면서 면교(面敎)하는가?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미 신라의 소도(蘇塗)에서는 ‘말(馬)들에게 ’됴‘를 들이는 훈련을 시켜왔기 때문에’ 서로 함부로 만나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말들에게 서로 가혹행위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부탁’을 하는 길을 없앤 것입니다.
그러나 점점 천관녀(天官女)와 천관(天官)들은 말(馬)을 혹사(酷使)하는 상대에 대해서 뜨악 하게 생각하는 정서
(情緖)가 쌓이기 시작한 때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열 마리가 참여했으면 벌써 세 마리 정도는 죽어나가고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이럴 때, 육부군(六部軍) 기마(騎馬) 성모(聖母)께서는 ‘이런 혹독한 훈련을 평생시켜온 사람’으로써 ‘울부짖으며
울면서’ 이 ‘됴’를 들이는 아픔이 아무리 힘들어도, 너희들은 ‘살아있는 영혼의 부부(夫婦)의 애정(愛情)으로써 극복
해내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言)이 ‘육부군 기마(騎馬) 성모(聖母)’가 할 때에 호소력이 있는 것은 수많은 전쟁에서 육부군(六部軍)이 동원
되어서 현장(現場)에서 영역군(領域軍)을 벅수군으로 바꾸어주면서 ‘배달화백으로써 평화로서 반전(反轉)하게 하는
것 때문에, 전쟁(戰爭)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많이 살리게 의해서는 태(兌), 자정(子井), 여정(女井), 영성문(靈星門)
이 달린 허달성(虛達城)을 <됴>를 들인 말(馬)들이 끌어서 하는 방법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특수선박과 수중구조물이 말(馬)들이 수십필(=태(兌)의 경우), 수백필(=허달성(虛達城)과, 여정(女井), 자정
(子井)의 경우) 끌고 나오서 마치 호수(湖水)에서와 똑같이 진(陣)을 치는 것을 우리는 ‘어강대진(御罡大陣)’이라고
이름 지을수 있습니다.
이는 ‘북두칠성(北斗七星)의 큰 진(陣)’을 뜻합니다.
어강대진(御罡大陣)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태(兌), 자정(子井),여정(女井), 허달성(虛達城)과 같은 특수선박과 수중
구조물(水中構造物)를 육지에 말(馬)이 끌고 올라가는데, 산언덕 등을 올라가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특수선박과 수중구조물을 비록 대형수레와 ‘특수 수레’에 올려다 놓아서 끈다고 할지라도 이는 ‘당나귀’에는
어울리는 일이나, 말의 생리(生理)와 체질에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체질개선’을 하는 ‘됴’를 들이는 훈련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육부군(六部軍) 기마대(騎馬隊)들인 경우, 전투를 하다보면 화공(火攻)에 휩싸이는 일이 많습니다.
이럴경우, 저절로 일산화탄소가 짙게 깔리는데, 주인(主人)이 의식을 잃어서 낙마(落馬)했을 경우 경우, 말(馬)이
입(口)으로 물어서 높은 곳으로 끌고 올라가지 않으면 반드시 죽게 됩니다.
또한 계곡(溪谷)에서 의식을 잃고 낙마(落馬) 할 경우 역시 말(馬)이 입(口)으로 주인의 소매 등을 물어서 높으로
곳으로 이끌고 올라가지 가지 않으면, 비(雨)가 왔을 경우 반드시 익사(溺死)하게 됩니다.
따라서 육부군(六部軍) 기마대(騎馬隊)들의 말들은 ① ‘조로마리 주법(走法)을 익히는 것과 ② 높은 언덕으로 주인
(主人)이나 무거운 특수선박들을 끌고 올라가는 훈련을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됴’를 들이는 것 자체가 마치 자기자식 같은 애마(愛馬)에게 지옥훈련을 시키고 죽음을 강요하는 것이고,
이를 평생(平生) 겪어온 성모(聖母) 입장에서는 ‘늘 생생한 아픔’을 떠올릴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울부짖으면서 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인 것이고, 이를 멈출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식같은 말(馬)이 죽어가는 훈련을 함에 있어서 ‘넉넉하게 먹이’라도 주고, ‘잠도 푹 재우면’ 어미로써 한(恨)
이 덜 할 터인데, 점점 먹이와 물은 적게 주고, 노역(勞役)은 많이 시키도록 강요당하고, 또 그렇게 해보았자 많은 말
(馬)들이 죽어가는 것을 뻔히 바로보면서 이 일을 계속한다는 것은 모성(母性) 자체에 깊숙한 상처가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육부군(六部軍) 기마(騎馬) 성모(聖母)의 “나는 이미 늙었다!”로 시작하는 말은 ‘모성(母性)의 상처(傷處)를
받다보니, 실제 나이보다 조로(早老)하는 삶을 살았도다!“라는 처절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즉 육부군 기마 성모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의 실제 나이는 40대 정도 밖에 안되지만, 그녀의 외모(外貌)는 70대 노모
(老母)의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녀가 천관녀(天官女)와 천관(天官)들어게 ‘살아있는 영혼 결혼식’을 주재하면서 ‘나의 어린 아이들’로써 너희
들이 어서 빨리 성장하기를 바란다고 한 것은 ‘됴’를 잘 들이는 조련사(調練師)로써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임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말(馬)들이 ‘됴’가 들어서 이 ‘됴’가 제대로 든 말들이 끄는 특수선박과 수중구조물이 육지(陸地)에서도
어강대진(御罡大陣)을 펼쳐서 ‘전쟁(戰爭)을 즉각적으로 평화로 반전(反戰)’하는 것을 ‘공(功)을 세운다’고 표현한 것
입니다.
“이것 이외에 의회경찰(議會警察)인 너희들이 임금을 위하고, 친부모(親父母)를 영예(榮譽)스럽게 하는 일은 없다.”
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자신을 조로(早老)하게 했고, 특히 천관녀(天官女)들에게 모성(母性)에 상처를 주는 일을 진행하는 일을
하면서 육부군(六部軍) 기마(騎馬) 성모(聖母)께서는 평생쌓아온 자신에게 가해진 모성(母性)의 상처가 절대 멈출수
없는 통곡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 통곡(慟哭)은 ‘됴’를 들이는 조련(調練)문화가 얼마나 말(馬)을 친자식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성(母性)에 상처를
주는 것인가를 현대인들은 이해하기 곤란한 것입니다.
[④ 문단의 해석(解釋)과 해설(解說)]
가) 원문(原文)의 직역(直譯)
④ 庾信卽於母前自誓。不復過其門。
김유신(金庾信) 화랑은 즉각적으로 ‘어미니’ 앞에 스스로 맹서(盟誓)하는 말을 하고, 다시는 그 문(門)을 지나지 않았다.
나) 김유신(金庾信) 천관화랑(天官花郞)의 ‘어머니 앞의 자서(自誓)’는 무엇이고, 어떤 문(門)을 넘지 않았는가?
자신의 ‘살아있는 영혼 아내’ 즉 천관녀(天官女)들과의 결혼식에서 처절한 ‘육부군 기마 성모(聖母)’의 훈계(訓戒)를
들은 김유신 천관화랑(天官花郞)께서는 2가지 맹서(盟誓)를 나서서 하게 됩니다.
하나는 “다시는 그 문(門)을 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정목대문(政目大門)이고,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백마복원로(白馬複垣路)가 깔대기 경사로(傾斜路)로 나있는 곳
가운데, 사대원로(射臺垣路)쪽의 경사로(傾斜路) 즉 천관녀(天官女)들의 숙소가 있는 쪽을 계속 올라가서 정목대문
(政目大門) 광장(廣場)에 나있는 문(門)을 뜻합니다.
이곳은 밤중에 전차진(戰車陣)으로 닫히는 곳이고 전차진(戰車陣)으로 닫았다가 열수 있는 문(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정목대문(政目大門)을 “다시 넘지 않겠다.”라는 것은 말(馬)에 대해 ‘됴’를 들이는 훈련을 함에 있어서
김유신 천관화랑(天官花郞)께서는 ‘한밤중에’ 굴러 떨어진 말(馬)들을 치료하는 청구(靑丘)의 ‘야외 마구간’에 가셔서
천관녀(天官女)들을 위로(慰勞)하기 위해서 의회경찰(議會警察) 수장(首長)으로써 갈수 밖에 없었던 사정을 먼저
이해하여야하는 것입니다.
즉 ‘야외 마구간’에 가서 천관녀(天官女)들이 말(馬)의 상처를 돌보고 있는 현장(現場)을 다시는 “가지 않겠다.”는
맹서를 한 것입니다.
‘육부군 기마 성모’의 말씀은 천관녀(天官女)들께서 그 어떠한 위로(慰勞)를 받더라도, 말(馬)에 대한 ‘됴’를 들임에
따르는 모성(母性)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의미한 영혼 부부놀이>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김유신 화랑께서는 다시는 천관녀(天官女)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정목대문(政目大門)을 넘지 않겠다고 맹서
(盟誓) 한것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 있는 모전자서(母前自誓)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 모전자서(母前自誓)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각마(一角馬) 즉 ‘유니콘’의 신화가 신라(新羅)로 부터 저 서역(西域)
으로 건너갔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보 91호 신라의 <도제기마인물상(陶製騎馬人物像)>은 말(馬)에 뿔이 나있는 모습이고, 이는 ‘유니콘’의 모습임이
분명합니다.
(*)신라의 유니콘인 국보 91호 <도제기마인물상(陶製騎馬人物像)>을 볼수 있는 곳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VdkVgwKey=11,00910000,11
그런데, 이 일각마(一角馬)는 육부군(六部軍) 기마대(騎馬隊)가 어강대진(御罡大陣)을 칠 때에나, 혹은 ‘배달화백’을
할 때에 천독(天毒)들께서 타는 말(馬)의 마면(馬面)의 철갑에 꼭 ‘유니콘’처럼 단 것에서 유래합니다.
즉 일각(一角) 마면철갑(馬面鐵甲)을 철기병들이 전쟁에서 기절(氣絶)한 주인을 입(口)으로 물고 높은 곳으로 끌고
가서 ‘일산화탄소’나 폭우(暴雨)에 주인이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됴’가 들어져 있는 그대로 행동을 하자, 며칠 후에
주인이 살아나는 것이 자주 사람들이 목도(目睹)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유니콘’은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신수(神獸)라는 이야기가 널리퍼져 나갔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유니콘’이 실제로 엄격한 훈련에 의해서 생산되기 때문에, 또 다른 신화(神話)가 생성되기 시작한 것입
니다.
그것은 저 하늘의 천관(天官)도 똑같이 ‘유니콘’을 훈련시키기 위해 ‘됴’를 들이고 있는데, 마지막 단계에서 ‘크게 취
한듯 중심’을 못잡는 주인(主人)을 태우고 있을 때, 언덕으로 오르지 않을 경우 하늘의 천관(天官)은 귀검(鬼劍)으로
써 천마(天馬)를 벤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천마(天馬)는 다시 탄생하여 ‘유니콘’이 된다는 신화인 것이지요.
놀랍게도 이러한 참마(斬馬)에 의해서 ‘죽은 말’이 ‘유니콘’으로 탄생되기 때문에, 결국 참마(斬馬)하는 ‘하늘의 천관
(天官)’은 ‘유니콘’의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인 것입니다.
천관화랑(天官花郞) 김유신께서는 ‘육부군 기마 성모’ 앞에서 스스로 맹서(盟誓) 한 내용이 “나는 인박산(咽薄山)에
들어가서 하늘의 천관수광(天官垂光)이 나의 보검(寶劍)에 서리도록 하는 기도(祈禱)를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됴’를 들이는 말(馬)이 죽어서 새로 ‘유니콘’이 되도록 하겠습니다.”는 맹서이고,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인박산(咽薄山)의 깊은 골짜기에서 나오지 않겠습니다.”라는 맹서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허각이성(虛角二星)의 ‘붉은 빛’이 수평으로 올때에, “새로운 생명을 주는” 남두육성(南斗六星)이 남중(南中)
하여 그 빛이 아래로 드리워지는 것에 의해서 그 의미를 알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됴’를 훈련받는 말(馬)들에게는 천관녀(天官女)가 ‘어머니’라면, 천관(天官)은 ‘아버지’라는 것입
니다.
말(馬)은 자식(子息)으로써 무공마(武功馬)로 성공해서 부모인 천관녀(天官女)오 천관(天官)에게 효도(孝道)할 의무
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마(斬馬)를 하는 행위는 참마(斬馬) 당하지 않는 말(馬) 즉 ‘제대로 훈련’을 쌓은 말(馬)에게도- 이는
주인을 입에 물고 높은 곳으로 오르는 말을 뜻합니다. - 무공마(武功馬)가 되어 효도(孝道)를 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참마(斬馬) 당하여 ‘유니콘’으로 탄생하게 말에게도 효도(孝道)를 하게 하는 일이라는 이상한 신화적 서사
(徐事)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김유신 천관화랑(天官花郞)께서는 인박산(咽薄山)에 들어가 자신의 ‘아들’이기도 한 ‘됴’를 들이는
말(馬)들이 반드시 효도하게 하기 위해서 천관수광(天官垂光)이 보검(寶劍)에 깃들기를 바란 것입니다.
즉 “천관녀(天官女)가 말(馬)의 어미로써 모성(母性)의 상처를 받는 것처럼 천관(天官) 역시 말(馬)의 아버지로써
부성(父性)의 상처를 받는다.”것이 인박산(咽薄山)에 들어가기 전에 용화향도(龍華香徒) 마음 밑바닥에 깔려있었던
것입니다.
또 인박산(咽薄山)이란 산 이름 자체가 매우 특이합니다.
인(咽)은 ‘목구멍’이란 뜻이지만, “목을 메다” 즉 자살(自殺)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따라서 인박산(咽薄山)은 ‘목을 메게하는 것을 희박(稀薄)하게 하는 산’이란 뜻을 지닙니다.
이는 천관녀(天官女)들 께서 애마(愛馬)를 혹독하게 대하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목을 메고 싶어하는 충동’이 늘
일어난 것과 관련해서 음미하면, 왜 김유신 천관화랑(天官花郞)께서 이 인박산(咽薄山)에 들어가서 천관수광(天官
垂光)이 자신의 보검에 서리도록 기도하였는지가 분명히 들어나는 것입니다.
“김유신 천관화랑(天官花郞)이 ‘하늘의 천관(天官)이 인증(認證)하셔서’ ‘됴’를 들이는 말의 목을 치게 되면 ‘유니콘’
으로 환생(還生)하게 된다.”라는 ‘유니콘’에 관한 관혼상제(冠婚喪祭)에 따른 신화적인 서사(敍事)가 아니고서는
이미 천관녀(天官女)들이 깊은 자살충동의 세계로 빠지는 것을 막을수 있는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맹서(盟誓)는 만약에 하늘의 천관수광(天官垂光)이 깃들지를 않으면, 인박산(咽薄山) 깊은 계곡에서 절대나오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용화향도(龍華香徒)들과 천관녀(天官女)들은 인박산(咽薄山)까지 가서 ‘마지막 별리(別離)’를 한다는 마음으로
배웅을 하였는데, 불과 3일째 되는 날 한밤 중에 천관수광(天官垂光)이 내려오는 모습을 모두 목도(目睹) 하였던 것입
니다.
따라서 신라의 소도- 즉 오늘날 태호(太湖)와 소호(巢湖)에서 ‘됴’를 들이는 일은 계속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한가지 달라진 것은 주마복도(走馬複道)에 일산화탄소를 피워내는 ‘석탄(石炭)을 태우는 곳’을 만들고, 그 훨씬 앞에서
‘술에 만취(滿醉)한 주인’을 태우고, 이를 지날 때에, 말(馬)이 즉각 산언덕으로 올라가기 시작하고, 주인이 떨어지면,
입(口)에 물고 올라가는 훈련을 할 때에, 그냥 지나치는 말(馬)에 대해서는 김유신(金庾信) 천관화랑(天官花郞)께서
허각이성(虛角二星)의 빛이 내려온 귀검(鬼劍)으로써 목을 쳐야 그 말(馬)이 ‘유니콘’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서사(敍事)
를 천관녀(天官女)들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석탄(石炭)을 피우는 지점이 ‘깔대기 경사로(傾斜路)’로 올라가는 직전(直前)에 피우게 되는 것이 현장(現場)
지리로 볼 때 가장 적절한 위치입니다.
왜냐하면, 떨어진 주인을 입(口)으로 흙 방죽으로 끌고올라가는 말(馬)들이 그냥 지나쳐서 깔대기-경사로(傾斜路)로
올라가는 말들이 참마(斬馬)되는 곳에 있어야만 ‘말(馬)에 대한 교육’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⑤ 문단의 해석(解釋)과 해설(解說)]
가) 원문(原文)의 직역(直譯)
⑤ 一日被酒還家。馬遵舊路。誤至娼家。娼且欣且怨。。垂泣出血。
“하루는 술(酒)에 취해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말(馬)이 옛길을 따라가서 잘못 ‘소리하는 여인 집’으로 이르게
되었다.
천관녀는 노래하며 또한 기뻐하며, 또한 원망(怨望)하면서 눈물을 흘렸는데, 피가 나왔다.
나) 왜 천관녀는 노래하며, 또 기뻐하며, 또 원망하였는가?
‘됴’를 들이는 마지막 단계는 “실제 상황에서 과연 무공마(武功馬)들이 제대로 대처하는가?”를 훈련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경우, 말을 탄 사람들이 가볍게 일산화탄소에 중독되어서 말(馬)을 제어하는 능력이 없는 상태에 있음을
말이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이 방법은 술(酒)에 만취(滿醉)한 상태로 말을 타는 것 이외에는 적절한 방법이 없음을 일단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석탄(石炭)을 피우는 가장 최적 위치는 바로 ‘깔대기 경사로(傾斜路)’가 있는 곳에서 100미터나 200미터 앞이 됩
니다.
따라서 이 마지막 훈련관문에서는 석탄(石炭)을 피우고 있는 곳에서 훨씬 아마도 300미터 앞 정도의 주마복도(走馬
複道)에서 기수(騎手)들이 독주(毒酒)를 먹어서 빨리 만취(滿醉)된 상태에서 말을 타고, 석탄(石炭)이 불피워진 ‘사이’
로 해서 빠져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원문에, 환가(還家)라고 되어 있는데, 따지고 보면, 김유신 천관화랑(天官花郞)과 천관녀(天官女)의 집은 가까운 곳에
있을 수 밖에 없읍니다.
왜냐하면, 백마복원로(白馬複垣路) 가운데, 사대원로(射臺垣路)가 깔대기 경사로로 정목대문(政目大門) 광장으로
올라가는 곳에 천관녀(天官女)의 집이 있고, 그 반대편의 폐섭원로(蔽涉垣路)가 깔대기 경사로로써 정목대문(政目
大門) 광장(廣場)으로 올라가는 곳에 천관(天官)들의 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목대문(政目大門)이 정목(政目) 마다 있기 때문에, 김유신 천관화랑(天官花郞)이 있는 곳은 가장 중요한 정목(政目)
이 있는 곳이라고 추정할수 있고, 또 맞은편에 있는 천관녀(天官女)들 역시 천관녀(天官女)들 가운데 직급(職級)이
높은 천관녀(天官女)라고 할수 있겠읍니다.
아무튼 석탄(石炭)에 불(火)을 피운 곳을 말(馬)이 지나게 되면, 제대로 되려면, 백마복원로(白馬複垣路) 흙 방죽 위로
올라가야되고, 이곳이 가파르기 때문에, 기수(騎手)가 떨어지면, 말(馬)은 소매 등을 입(口)에 물고 끌어당겨서 이
흙방죽을 올라가는 것이 올바른 것입니다.
그런데, 김유신 천관화랑(天官花郞)께서 탄 말은 불행하게도 이 마지막 단계에서 그대로 ‘깔대기 경사로’를 통해서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다른 말들은 모두 주인(主人)의 소매를 입(口)에 물고 올라가는 도중이었던 것입니다.
원문(原文)에 보면 오지창가(誤至唱家)로 되어 있는 여기서 천관녀(天官女)의 집을 창가(唱家)로 칭하는 까닭은
천관녀(天官女)들께서 의회여경(議會女警)으로써 여러 안내(案內)와 사회(司會)를 ‘맑고 큰 목소리’로 창(唱) 즉
‘앞장서서 소리치기’ 때문인 것입니다.
(창(唱)에는 “압장서서 주장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창가(娼家) 즉 ‘몸파는 여자’나 기생을 의미하는 창기(娼妓)의 집임을 나타내는 글자와는 전혀 다른 글자임을 유의
해야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지창가(誤至唱家)에서 창가(唱家) 앞에 ‘잘못 도달하게 되었다.’라는 오지(誤至)가 붙어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대로 도달한 이른바 정지(正至)가 무엇인가?”가 중요해집니다.
이는 기수(騎手)를 입(口)에 물고 백마복원로(白馬複垣路)로 올라가는 것이 그 정확한 답인 것입니다.
아무튼 오지창가(誤至唱家)하자, 천관녀(天官女)는 김유신 천관화랑(天官花郞)께서 말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목도
(目睹)하고는 그 반응이 <娼且欣且怨>로 나옵니다.
이는 “노래하였으며, 또 기뻐하였으며(=흔(欣), 또 원망하였다.”난 뜻입니다.
여기서 ‘노래하였다.’는 말이 중요한데, 이는 ‘자기통제의 전통문화’가 잘 발달된 체계에서 사람이 정신이상이 걸릴
정도로 공포스럽거나 혹은 분노하거나 할 때에 이를 달래기 위해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반응 중에 하나입니다.
예를 들면,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극도의 공포 혹은 분노가 치밀때에는 노래를 부릅니다.
이를 쉽게 오늘날의 감각에 비추어서 설명드리면, 몹시 놀랄때에 기독교인의 경우 “여호아는 나의 목자시니..비록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갈지라도...” 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공동묘지 같은 곳을 갈때에, 지금도 공포를 잊기 위해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튼 천관녀(天官女)께서 노래를 부른 것은 이 말(馬)이 참형(斬刑)을 당하는 길로 들어섰음을 알고, 일어나는
극도의 절망감 때문인 것입니다.
아마도 그 당시에는 유니콘의 신화가 있었던 시절이므로, “ 일각마(一角馬)는 나의 애마(愛馬)이니 비록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갈지라도, 나를 ...” 하는 노래를 불렀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또 기뻐하였다.”라는 말이 차흔(且欣)으로 나오는데, 이는 결코 ‘살아있는 영혼의 남편’인 김유신(金庾信)
천관화랑(天官花郞)을 만났기 때문에, 기삐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아직까지 이 말(馬)이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반가움 - 즉 사랑하는 말(馬)을 다시 만난 기쁨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원망(怨望)하였다.”는 뜻의 차원(且怨)이란 말이 등장하는데, 이는 그간 안 만나주던 김유신(金庾信)
화랑에 대한 원망(怨望)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형(斬刑)을 목도해야하는 자신의 가혹한 운명에 대한 원망(怨望)인 것입니다.
이는 자기 자식과 헤어진 ‘어머니’가 자식이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기뻐하면서, 곧 자신의 눈(眼) 앞에서 처형되는
것을 보아야만 하는 환경과 유사한 것입니다.
따라서 정신이상에 걸리지 않게 하는 반응으로써 노래를 불렀던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렸는데, 피가 났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안마나주면 연인(戀人)을 만날 때의 신체적인 반응은 ‘가슴에 칼날이 지나가는 듯’한 아픔이 있어나지, 결코
머리에 열(熱)이 올라서 눈(眼)이 충혈(充血)되고, 이윽고 이것이 터져서 피가 나는 반응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을 배신(背信)하고 다시 나타난 연인(戀人) 앞에서 우는데, 그 눈물에서 피(血)가 흐르는 여인이 과연 인류역사
상에 단 한번이라도 있습니까?!
그러나 극도의 분노(憤怒)가 치밀게 되면, 눈이 충혈(充血)되고 이윽고 피눈물이 나는 현상을 흔한 것입니다.
[⑥문단의 해석(解釋)과 해설(解說)]
가) 원문(原文)의 직역(直譯)
⑥ 庾信旣悟。斬所乘馬。棄鞍而返。
“김유신은 이미 깨달었으므로 타고온 말을 참(斬)하고, 안장(鞍裝)을 버린 상태에서 돌아서 왔다.”
나) 안장(鞍裝)을 버린 상태에서 훈련중인 말 들 주변을 그냥 돌았을까? 또 이미 깨달은 것(=기오(旣悟))은 무엇인가?
그런데, 이런 참마(斬馬)하는 것을 오지(誤至)하자 않고 정지(正至)한 다른 무공마(武功馬)들은 흙방죽 즉 백마복원로
(白馬複垣路)로 주인을 입에 물고 가다가 바라보도록 한 것입니다.
문제는 기안이반(棄鞍而返)의 해석입니다.
이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 안장(鞍裝)을 버려두고, 되돌아서 왔다.
2) 안장(鞍裝)을 버려둔 상태에서, (훈련중인 말(馬)들 주변)을 돌아서 왔다.
그런데, 좌계는 두번째의 해석을 합니다.
즉 말 머리를 참수(斬首)한 다음에, 안장(鞍裝)을 버려둔 채로, 훈련중인 말 주변을 돌아서 왔다는 것으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끔찍해서 표현을 삼가한 것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린 말머리(=마수(馬首))’를 귀검(鬼劍)에
꼽고, 훈련 중인 말(馬)들 주변을 돌아서 온 것인데, ‘귀검(鬼劍)에 말머리를 꼽고’는 문장이 지나치게 잔인(殘忍)스러
워서 유래(由來)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어느 때부터인가 생략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는 훈련중인 말(馬)들에게 “아무리 힘들어도 주인(主人)을 입으로 끌어서 올려놓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처럼
목이 잘리게 된다!”라는 것을 말들에게 생생히 기억시켜서 교육시키는 것인 것입니다.
말머리를 돌려서 외면(外面)하려고 해도, 귀검(鬼劍) 끝에 달린 ‘말머리’가 따라오면서 선명히 기억시키게 한 것이
지요.
그러나 이 장면을 천관녀(天官女)는 차마 볼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가 자기자식의 목이 귀검(鬼劍) 끝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볼수가 있겠읍니까?!
아무튼 이 사건으로 인해서 사대원로(射臺垣路)의 ‘깔대기 거리’는 점차 이름이 참마항(斬馬巷) 즉 ‘말을 참(斬)하는
거리’로 바뀌어 가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문제는 천관원(天官怨)의 유래(由來)를 설명하는 전래(傳來)되는 문장에서 ‘이미 깨달었으므로’는 의미의 기오(旣悟)
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좀 신화적이긴 하지만, “천관수광(天官垂光)이 서린 즉 허각이성(虛角二星)의 붉은 불빛과 남두육성(南斗六星)의
빛이 서린 귀검(鬼劍)으로 참마(斬馬)하게 되면, 어디선가 죽은 그 말(馬)이 ‘유니콘’이 되어서 태어나며, ‘유니콘’은
죽은 사람도 살리게 된다”는 바로 그 내용을 인박산(咽薄山) 깊은 골짜기에서 깨달었던 것입니다.
이 당시 ‘됴’를 받는 말(馬)들 입장에서는 “죽어서 유니콘으로 태어나 주인(主人)을 물고 높으곳으로 끌어올릴 것인가?!
아니면 살아서 무공마(武功馬)로써 주인을 물고, 백마복원로(白馬複垣路) 위로 끌어올릴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하는 기로(岐路)에 서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천관화랑(天官花郞)은 말(馬)들에게 ‘유니콘’으로 태어나게 하는 ‘아버지’인 동시에, 무공마(武功馬)로 태어
나게 하는 엄부(嚴父) 였던 것입니다.
[⑦문단의 해석(解釋)과 해설(解說)]
가) 원문(原文)의 직역(直譯)
⑦ 女作怨詞一曲。傳之天官寺。寺卽其家也。天官其女號也。
“천관녀는 원사(怨詞) 한 곡(曲)을 지어서 이를 천관사(天官寺)에 전하게 하였다.
천관사(天官寺)는 그 녀의 집이었다. 또 천관(天官)은 그녀를 부르는 호칭(呼稱)이었다.
나) 천관녀(天官女)는 왜 자신이 지은 원사(怨詞)를 천관사(天官寺)에 전(傳)하게 하였는가?
여기서 우리는 천관녀(天官女)가 “왜 원사(怨詞)라고도 칭해지는 천관원(天官怨)이란 이 노래를 천관사(天官寺)
- 즉 배달화백 의회여경(議會女警)의 교육장소에 전하게 하였는가 ?”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분명히, 천관녀(天官女)들은 지속적으로 ‘됴’를 들이는 일을 맡게 되고, 또 자신과 같은 처절한 아픔을 당하기
때문에, ‘됴’들 들이는 실상(實相)을 후배 천관녀(天官女)들에게 전달하기 위함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행히 성호(星湖) 이익(李瀷) 선생께서는 자신의 저술에서 이 천관원(天官怨)이라는 노래의 가사(歌詞)를 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과연 이 천관원(天官怨)이란 노래가 천관녀(天官女)가 김유신 천관화랑(天官花郞)에 대한 사랑의
애증(愛憎)을 담은 노래인가?”하는 관점에서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나. 천관원(天官怨) 노래 가사
1) 해석(解釋)
①준피대로(遵彼大路) 삼집삼수(摻執衫袖)
저 쫓아야할 대로(大路)여! 적삼과 소매를 잡고 끌어 당겨야하는...
② 자불아고(子不我顧) 우참마수(又斬馬首)
님은 날 돌보지 않으시고, 또! 말머리를 참(斬)하셨네!
③ 매매잠고(邁邁寁故) 성영무유(聲影無有)
가고 감이 그리 빠르신가요?! 소리와 모습이 없으시니...
④ 자운유모(子云有母) 모훈극독(母訓克篤)
님의 말씀 ‘어미 있다’하시고, 모훈(母訓)은 참아냄이 도타워야 하느니,
⑤훈기불위(訓旣不違) 첩한미극(妾恨靡極)
훈계(訓戒) 어기지 않는 동안,, 첩(妾)의 한(恨) 쓰러질 지경으로 다했나이다.
⑥첨망불급(瞻望不及) 녁언척촉(惄焉躑躅)
우러러 뵙기에도 미치지 않고, ‘철찌’로도 허출하신 분이여!
⑦ 자유보검(子有寶劍) 강령허각(降靈虛角)
님은 보검(寶劍)있으시어 허각이성(虛角二星)의 영험(靈驗)한 빛 내리셨으니,
⑧ 위자필효(爲子必孝) 서장충국(誓將忠國)
자식(子息)으로 효(孝)를 이루게 하셨고, 맹서(盟誓)는 나라에 충(忠)함이 마땅하셨네!
⑨ 장부유지(丈夫有志) 의여경독(宜余惸獨)
장부(丈夫)는 뜻을 찾았으나, 나의 의지할 수 없는 외로움까지 마땅한가요?!
2) 해석(解釋)과정에 대한 설명과 숨은 의미
(가) 준피대로(遵彼大路) 삼집삼수(摻執衫袖)에 대해서.
위 해석에 있어서 ①준피대로(遵彼大路) 삼집삼수(摻執衫袖)은 “저 쫓아야할 대로(大路)여! 적삼과 소매를 잡고 끌어
당겨야하는...”로 해석하였읍니다.
그런데, 저 쫒아야할 대로(大路)라는 것은 말하자면, 천독(天毒)들께서 말을 타고 달리는 주마복도(走馬複道)와 또
천관(天官)및 천관녀(天官女)들이 말을 타고 달리는 백마복원로(白馬複垣路)인 것입니다.
그러고 삼(摻)은 ‘잡다’는 뜻이고 집(執)은 ‘놓지지 않고 지키다’라는 뜻인데, 결국 이는 말(馬)이 입(口)으로 그 주인
(主人)의 적삼과 소매를 물어서 끌어당기는 것을 뜻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준피대로(遵彼大路) 뒤에 삼집삼수(摻執衫袖)가 보조(補助)하는 설명문이기 때문에, 만약 사랑하는 정인(情人)을
여인(女人)이 가지 못하도록 적삼과 소매를 잡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앞의 준피대로(遵彼大路)의 감탄문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문장이 됩니다.
대로(大路)에 나오서 적삼과 소매를 끌어댕기면서 못가게 한다는 것도 이상하거니와 더욱더 님이 냉정하게 떠나는
그 대로(大路)를 영탄조로 처음에 노래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 매매잠고(邁邁寁故) 성영무유(聲影無有)에 대하여
‘② 자불아고(子不我顧) 우참마수(又斬馬首)’ 즉 “님은 날 돌보지 않으시고, 또! 말머리를 참(斬)하셨네!”라는 문장
다음에, 매매잠고(邁邁寁故) 성영무유(聲影無有)이 등장하기 때문에, 참으로 묘한 느낌이 오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즉 김유신(金庾信) 천관화랑께서 참마(斬馬)하고 가시는 모습을 “가고 감이 그리 빠르신가요?! 소리와 모습이 없으
시니...”하는 것인지, 죽은 말(馬)에 대한 모정(母情)으로써 그리워하는 것인지가 혼란이 되는 그런 말이 나오는 것입
니다.
이 천관원(天官怨) 이란 노래는 이처럼 묘한 혼동으로써 천관녀(天官女)께서 당하는 심리적 고통을 호소하는 힘이
있는 노래임이 그 다음에도 들어납니다.
(다) 자운유모(子云有母) 모훈극독(母訓克篤)에 대해서
바로 ‘④ 자운유모(子云有母) 모훈극독(母訓克篤)’의 노래가사 즉 “님의 말씀 ‘어미 있다’하시고, 모훈(母訓)은 참아
냄이 도타워야 하느니,”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는 당연히 육부군(六部軍) 기마(騎馬) 성모(聖母)가 ‘어미’인 것이지만, 천관녀(天官女)께서 말(馬)에 대한 모성
(母性)의 상처를 입은 것으로 보아서 자기 자신의 말(馬)의 어미이라는 그 혼돈이 자타(自他)구분이 힘들게 하는
묘한 구석으로 노래가 이어져 감을 발견할수 있습니다.
그만큼 깊은충격을 느께게 하는 노래가사인 것입니다.
(라) 훈기불위(訓旣不違) 첩한미극(妾恨靡極)에 대하여
이 ‘⑤훈기불위(訓旣不違) 첩한미극(妾恨靡極)’을 해석을 “훈계(訓戒) 어기지 않는 동안,, 첩(妾)의 한(恨) 쓰러질
지경으로 다했나이다.”로 한 것은 기(旣)가 접속사(接續詞)로써 “그러는 동안에...”라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 첨망불급(瞻望不及) 녁언척촉(惄焉躑躅)에 대하여
이는 “우러러 뵙기에도 미치지 않고, ‘철찌’로도 허출하신 분이여!”라는 뜻인데, 그 대상은 당연히 김유신 천관화랑
(天官花郞)입니다.
뒷 귀절인 녁언척촉(惄焉躑躅)인데 녁(惄)은 “허출하다.” “먹어도 허기지다”라는 의미입니다.
척촉(躑躅)은 ‘철찌’ 즉 ‘철쭉’을 뜻하는데, 이는 화랑(花郞)을 꽃으로 표현할때의 상징이 ‘철찌’이라는 면에서 중요합
니다.
즉 천지화랑(天指花郞)의 천지(天指)는 ‘철찌’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천관녀(天官女)들께서는 ‘살아있는 영혼의 남편’인 천관화랑(天官花郞)이 그 어떤 화랑보다도 존경하고 든든하게
여기는 마음의 지주(支柱)이기 때문에, 다른 화랑(花郞)은 허출하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바) 위자필효(爲子必孝) 서장충국(誓將忠國)에 대하여
이는 그 앞에 ‘⑦ 자유보검(子有寶劍) 강령허각(降靈虛角)’ 즉 “님은 보검(寶劍)있으시어 허각이성(虛角二星)의 영험
(靈驗)한 빛 내리셨으니,......” 다음에 등장하는 문장이기 때문에, 당시의 신화적 서사(敍事)와 관련되는 중요한 말입
니다.
즉 ‘⑧ 위자필효(爲子必孝) 서장충국(誓將忠國)’의 뜻인 “자식(子息)으로 효(孝)를 이루게 하셨고, 맹서(盟誓)는 나라
에 충(忠)함이 마땅하셨네!”에서 중요한 것은 ‘됴’를 드리는 말(馬)들에게 김유신 천관화랑(天官花郞)이 참마(斬馬)
하는 것이 자식인 말(馬)들이 효도를 ‘반드시 이루게 한 것으로 파악하여야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김유신 장군께서 자신의 부모(父母)나 혹은 ‘육부군 기마성모’에 대한 효도를 ‘반드시 이루어낸 것’으로 해석하면,
이 탁월한 노래의 오묘한 맛이 죽어버립니다.
즉 다음 노래가사와 문맥(文脈)이 시정(詩情)으로써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 장부유지(丈夫有志) 의여경독(宜余惸獨)에 대해서
‘⑨ 장부유지(丈夫有志) 의여경독(宜余惸獨)’를 해석하기를 “장부(丈夫)는 뜻을 찾았으나, 나의 의지할 수 없는 외로
움까지 마땅한가요?!”로 하였습니다.
장부유지(丈夫有志)에서 유(有)는 “찾다”라는 의미로 해석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경독(惸獨)은 ‘의지할데 없는 외로움’의 뜻입니다.
이 천관원(天官怨)의 마지막 귀절이 사람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는 명 가사(歌詞)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말(馬)들이 ‘됴’를 받는 과정에서 죽어나가자, ‘살아있는 영혼의 남편’인 김유신(金庾信) 당신이야 장부(丈夫)로써 뜻을
찾았지만, 나는 ‘말(馬)의 어미’로써 ‘의지할데 없는 외로움’ 앞에 살아가야하는 것이 그리 마땅한 일인가요?! 하는
말로 끝나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저 육부군(六部軍) 기마(騎馬) 성모(聖母)를 우시게 한 대목이고, 또 천관녀(天官女)께서 후임 천관녀
(天官女)들에게 천관원(天官怨)이란 노래 가사를 전한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3) 소도(蘇塗)의 문화와 천관원(天官怨)
이 천관원(天官怨)이란 노래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태호(太湖)와 소호(巢湖)에 있었던 ‘신라의 두 경주(慶州)’의 배달화백을 하는 소도(蘇塗)에서 이처럼
천관녀(天官女)들이 천독(天毒)들의 말(馬)을 무공마(武功馬)로써 조련(調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모(美貌)인 천관녀(天官女)들께서 배달화백의 주권자이신 천독(天毒)들을 모시고, 안내(案內)및 사회(司會)를 하
였기 때문에, 혹 일어날 수 있는 성희롱이 전혀 일어날 수 없게 하는 ‘옷깃을 여미게 하는 일’들이 일어남을 천독(天毒)
들께서 잘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배달화백을 하는 소도(蘇塗)’에 조련(調練)하는 말(馬)들을 공급하는 것은 결국 ‘신라(新羅)의 천독(天毒)’들인 것
입니다.
그런데, 천독(天毒)들께서는 10마리 말을 보내어서 비록 3미라 정도 밖에 안 남아서 돌려준다고 할지라도, 이 훈련
과정이 얼마나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馬)의 ‘어머니’로써 모성(母性)의 상처를 받으면서 훌륭하게 말(馬)을 키워내는 그 거룩한 모성(母性) 앞에 모두가
숙연(肅然)해 질수가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배달화백을 하는 소도(蘇塗)’는 국가(國家)의 구분이 없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여, 고구리(高句麗)나 맥제(百濟)의 천독(天毒)들께서도 신라의 ‘태호(太湖)’와 ‘소호(巢湖)’ 소도(蘇塗)에
자유여행, 자유이민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맨처음 천관원(天官怨)이란 노래는 ‘천관사(天官寺)’를 통해서 의회여경(議會女警) 들이 부르는 노래였지만,
이들은 친절한 안내(案內)와 사회(司會), 그리고 헌식적인 안전보장(安全保障) 때문에, 이 천관녀(天官女)들에 대한
존경심과 고마움의 마음에서 천관원(天官怨)이란 노래는 번져나갔다고 할수 있습니다.
이윽고, 천관원(天官怨)은 서로 다른 나라의 천독(天毒)들이 만나서, ‘배달화백 의회(議會)를 떠받치어 존중하는
상징적 노래’로써 널리 불리워 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천관원(天官怨)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천독(天毒)들 자신과 깊은 관련성을 가졌기 때문에, 더욱더
애창곡(愛唱曲)으로 불리워 질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첫 문장 - “①준피대로(遵彼大路) 삼집삼수(摻執衫袖)” 인 “저 쫓아야할 대로(大路)여! 적삼과 소매를 잡고 끌어 당겨
야하는...”는 대로(大路)는 배달화백에 임한 천독(天毒)들 께서 늘 말(馬)을 타고 달리는 주마복도(走馬複道)와 양쪽
위로 난 백마복원로(白馬複垣路)를 뜻합니다.
이는 천독(天毒)들께서 ‘늘 쫓아야하는 대로(大路)’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마복도(走馬複道)에서 자신들이 쓰러졌을 때, 맑은 공기가 있는 백마복원로(白馬複垣路)로 ‘유니콘’들이
끌어올려서, 그 성(聖)스런 길을 ‘노래 첫머리’ 부터 나오는지라 천독(天毒)들 께서 애창할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마지막 문장 - ⑨ 장부유지(丈夫有志) 의여경독(宜余惸獨)인 “장부(丈夫)는 뜻을 찾았으나, 나의 의지할 수 없는
외로움까지 마땅한가요?!”라는 노래가사가 특히 천독(天毒)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노래가사가 아닐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독(天毒)들 역시 배달화백에 임하여 어떤 사회통합에 대한 뜻을 찾고져 하지만, 아무래도 이런 참여를
뒷받침해주는 가족(家族)이나 이웃의 ‘의지할수 없는 외로움’의 희생(犧牲)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되뇌이게
하는 노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소도(蘇塗) 예찬가(禮讚歌)’ 비슷하게 불리워져서 전 아시아(Asia) 지역에 번져나갔다고 할수 있습니다.
이처럼 천독(天毒)들께서 배달화백에 임할 때, 필수적인 말(馬)을 훈련하기 위해서 모성(母性)의 상처를 입는 의회
여경(議會女警)에 대한 존중심을 애창곡(愛唱曲)으로 부르고, 또 즐거히 이들에게 말(馬)을 조련(調練)시키기 위해
맞겼던 천독(天毒)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이점 때문에, 결국 피(血)를 가장 적게 흘리면서도 해내(海內)의 삼국(三國)이 일통되는 기운이 점점 축적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3. ‘천마(天馬)의 아버지’ - 김유신(金庾信) 장군(將軍)
우리는 지금까지 김유신(金庾信) 장군(將軍)께서 15세부터 천관화랑(天官花郞)으로써 ‘배달화백 의회경찰(議會警察)’
의 수장(首長)으로써 무공마(武功馬)를 키워내는 매우 힘든 기초작업을 하셨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는 48년이 지난 후에, 신라의 기마병(騎馬兵)이 탄현(炭峴)을 지내서 석탄로(石炭路)를 지날 때, ‘부득병마(不得幷
馬)’라는 천험(天險)의 지리적 특성을 뚫고 불가능에 가까운 전승(戰勝)하게 되는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후임 천관화랑(天官花郞)들이 하늘의 천관(天官)이 친히 임재(臨齋)하여 이루어낸 토대를 깰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천관화랑(天官花郞)은 무공마(武功馬)의 ‘아버지’일뿐만 아니라, ‘유니콘의 아버지’라는 인식이 신화적 서사
(徐事)로써 내려옴을 우리는 천문(天文)과 천관원(天官怨)의 유래(由來)를 분석해 봄으로써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천관원(天官怨) 가사(歌詞) 가운데, “무공마(武功馬)가 천관(天官)의 자식(子息)이다.”라는 것을 당연한 사실로
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⑦ 자유보검(子有寶劍) 강령허각(降靈虛角)
님은 보검(寶劍)있으시어 허각이성(虛角二星)의 영험(靈驗)한 빛 내리셨으니,
⑧ 위자필효(爲子必孝) 서장충국(誓將忠國)
자식(子息)으로 효(孝)를 이루게 하셨고, 맹서(盟誓)는 나라에 충(忠)함이 마땅하셨네!
만약 위 ⑧의 ‘노래가사’에서 “김유신 장군이 아들이고, 부모(父母)가 김서현(金舒玄)과 만명부인(萬明夫人)로 부자
관계를 설정”하고 보면, ⑦의 ‘노래가사’와 전혀 안맞게 됩니다.
보검(寶劍)에 허각이성(虛角二星)의 빛이 내리는 것이 김유신(金庾信)이 자식으로써 김서현(金舒玄)과 만명부인에
대해서 효(孝)를 “반드시(=필(必)) 이루게 하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됴’를 들이고 있는 말이 참마(斬馬)당하여 ‘유니콘’으로 태어나게 한다는 것이 남두육성(南斗六星)과 허각
이성(虛角二星)의 의미이고 보면, 이는 분명이 보검(寶劍)이 말(馬)들에게, ‘골짜기에서 죽어야하는 사람’을 높은 곳
으로 끌어들여서 ‘살리게 하는’ 일을 완성하게 함으로써 ‘아비’인 천관(天官)에게 효도(孝道)를 ‘반드시’ 완성하게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즉 김유신 장군 - 그 당시 사람들의 인식으로서는 무공마(武功馬)와 ‘유니콘’의 ‘아버지’로써 말(馬)들에게 ‘반드시
효도(孝道)를 받았던’ 의회경찰(議會警察)로써 인식되었던 것입니다.
즉 탁월한 무장(武將)이나 위대한 전략가(戰略家)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훨씬 나중이고,
“아 소도(蘇塗)에서 무공마(武功馬)를 키워내신 말(馬)들과 ‘유니콘’의 엄부(嚴父)인 천관화랑(天官花郞)! 그분!”이
라는 인식이 더 강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말(馬)들이 김유신 장군에게 과연 언제부터 효도(孝道)하였을까?”하는 문제를 우리는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天官怨④>무공마(武功馬)의 효도전쟁, 낭비성(娘臂城)전역(戰役)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보면, 김유신 장군께서 ‘배달화백 의회경찰’ 수장인 천관화랑(天官花郞)으로써 용화향도
(龍華香徒)를 이끄는 다음의 기록은 중당(中幢) 당주(幢主)로써 참전(參戰)한 기록입니다.
가. 신라의 무공마(武功馬)들의 효도(孝道) 전쟁
1) 열전(列傳)의 기록
즉 김유신(金庾信)이 의회경찰(議會警察)인 천관화랑(天官花郞)이 아니라, 무장(武將)으로써 화동하는 첫 기록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무공마(武功馬)를 타시고 상상을 초월하는 전과(戰果)를 올리는 ‘역사적 사실’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놀랍게도 무공마(武功馬)들은 김유신(金庾信)의 첫 출전(出戰)에서부터 자신들의 ‘아버지’에게 멋진 효도(孝道)를
하였던 것입니다!
[김유신 열전 발체 원문(原文)과 해석]
① 建福四十六年己丑秋八月 王遣伊飡任永里-波珍湌龍春-白龍-蘇判大因-舒玄等 率兵攻高句麗娘臂城 麗人出兵逆
擊之 吾人失利 死者衆多 衆心折衄 無復鬪心
: 진평왕 건복(建福) 46년(629년) 8월에 왕은 이찬 염영리(任永里)와 파진찬 용춘(龍春) 백룡(白龍)과 소판(蘇判)
대인(大因), 김서현(金舒玄) 등을 보내어 병사를 거느리고 고구리(高句麗)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고구리 사람들은 출병(出兵)하여 역습(逆襲)하여 공격하여 왔다.
우리측 사람들은 전세가 불리하여서 죽은 자가 심히 많았고, 뭇 사기(士氣)가 마치 ‘코가 깨져 코피가 날 때처럼
(=뉵(衄))’ 꺽이고, 싸우려는 전투의욕 자체가 다시 생기지 않았다.
(의마해설)
진평왕(眞平王) 29년(612년) 때 김유신 천관화랑(天官花郞)께서 인박산(咽薄山)에 들어갈때의 나이가 18세였기
때문에, 그 후인 진평왕 건복(建福) 46년(629년) 8월은 (629년-612년=17년)이 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공(公)의
나이가 (18세+17세=35세)가 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 공(公)이 이 중당(中幢)의 당주(幢主)가 되기 전(前)까지는 계속 ‘배달화백의 천관화랑(天官花郞)으로써 의회경찰
(議會警察)’을 이끌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공(公)께서 15세에 용화향도를 이끌었고, 또 35세에 중당(中幢) 당주(幢主)가 되기까지 계속 천관화랑(天官花郞)
으로 있었다고 한다면, 약 19년 동안 ‘의회경찰(議會警察) 수장(首長)’ 생활을 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무장(武將)으로써 첫 출전(出戰) 기록이 바로 이 낭비성(娘臂城) 전투인 것입니다.
이 전투가 중요함은 진평왕(眞平王)께서 신라(新羅)에서 가장 중요한 중신(重臣)들을 연합(聯合)하여 ‘각자의 군사
(軍士)’를 끌고 원정(遠征)하게 한 것이기에, 지정학적(地政學的)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要衝)이 바로 낭비성(娘臂城)
임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이런 ‘중신(重臣) 연합 원정(遠征)’은 점령하려는 지역이 지정학적으로 중요해서, ‘신라 내부의 계파’를 통합하는 힘을
더욱 공고히 할 때가 대부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낭비성(娘臂城)에서 신라군은 역습(逆襲)을 당해서 더이 상 싸울 마음까지 안들 정도로 큰 패배(敗北)를
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김부식 선생께서는 삼국사기에 매우 재미있는 중심절뉵(重心折衄)이란 용어를 써서 이 상황을 설명합니다.
뉵(衄)은 ‘코피가 나는 것’을 뜻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싸울 때에, ‘코피가 나면 기(氣)가 꺽이어서’ 앙~ 하고 울고 싸움
을 포기하는데, 이런 상태를 절뉵(折衄) 즉 ‘아이들이 코피가 나서 싸움의욕이 꺽이듯’ 뭇 사람들의 마음이 그러하였
던 것입니다.
② 庾信時爲中幢幢主 進於父前 脫冑而告曰 我兵敗北 吾平生以忠孝自期 臨戰不可不勇 蓋聞振領而裘正 提綱而網張
吾其爲綱領乎
: 이때 김유신(金庾信)운 중당(中幢) 당주(幢主)였는데, 나아가서 부친인 김서현(金舒玄) 앞에 나가서 투구를 벗고
고(告)하여 말하였다.
“우리 군사는 패배를 하였습니다. 저는 평생(平生)을 충효(忠孝)로써 스스로를 기약(期約)하였기에, 전쟁(戰爭)에
임해서는 용기(勇氣)를 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대개 듣자오니 ‘옷깃을 정돈하여야만 갓옷이 바로 잡히고, 벼리를 당기어야만 그물이 펴진다.’하였으니, 소자(小子)
가 어찌 옷깃과 벼리가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의미해설)
김유신 장군의 언행(言行)을 보면, 놀라울 정도로 무게가 있고, 위엄(威嚴)이 있는 특징이 들어나는데, 진평왕(眞平王)
께서 중신(重臣)들을 연합시켜 보낼정도로 중요한 이 낭비성(娘臂城) 전투에서 역습을 만나서 패배(敗北)를 하여서
‘더이상 싸울 투심(鬪心)이 없는 상황’에서 부친(父親) 앞에 나가서 하는 말씀 역시 그러합니다.
즉 “충효(忠孝)로써 살기를 평생 기약(期約)한 소자(小子)가 전쟁에서 용기를 내지 않을수 없습니다.”라고 운(云)을
떼신 후에, “사기저하(士氣低下)를 되살리려면, 옷깃이 갓옷을 바로잡고 벼리가 그물을 펴듯 그 핵(核)을 치고 나가야
하는데, 소자(小子)가 그 일을 하겠습니다.”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문장은 “출전(出戰)을 부탁한 것이고, 또 부친인 김서현(金舒玄) 공(公)께서는 당연히 ”중당(中幢)의 출전(出戰)을
허락한다.“는 말씀을 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중당(中幢)은 ‘중군(中軍)에 있는 기마대(騎馬隊)’를 뜻합니다.
따라서 중군(中軍) 기마대(騎馬隊)가 출동하여서 전투를 하게 되는 장면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읽게 되는데,
그 다음에 나오는 문장은 놀랍게도 단기필마(單騎匹馬) 로써 적진(敵陣)에 뛰어드는 장면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③ 迺跨馬拔劍 跳坑出入賊陳 斬將軍 提其首而來
곧 말에 걸터앉아 검(劍)을 빼고는 해자(垓字)를 뛰어넘어서 적진(敵陣)으로 들어가서 적장(敵將)의 머리를 베였다.
그 머리를 ‘칼에 꿰어 손에 들고서’(=제(提)) 돌아왔다.
(의미해설)
워낙 ‘놀라운 이야기’를 단숨에 서술(敍述)해 놓았기 때문에, “이것이 얼마나 기적(奇蹟)에 가까운 일인가?”를 우리는
실감(實感)할수가 없기 때문에, 좀 상세한 상황을 설명해야할 듯합니다.
일단 신라(新羅) 군이 전투의욕을 잃고 있는 상황에서 김유신 장군께서는 단기(單騎)로써 뛰어 나갔는데, 낭비성
(娘臂城)의 해자(垓字)를 뛰어넘은 것입니다.
이것이 도갱(跳坑)으로 표현이 된 것입니다.
대개 성(城)은 성곽(城郭) 바로 앞에 해자(垓字)를 파게 됩니다. 그리고 곧 성벽(城壁)이 있게 되기 때문에, 성벽(城壁)
을 설혹 사다리를 놓아서 올라가려고 해도, 해자(垓字) 속에 들어가서 물(水)속에서 사다리를 올려야하기 때문에, 공격
측에 부담감을 많이 주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해자(垓字)가 있는 성(城)’은 드뭅니다. 따라서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거성(巨城)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해자(垓字)와 성(城)을 성밖에서 동시에 말(馬)을 타고 넘는다는 것은 ‘날개 달린 천마(天馬)’를 타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직 김유신(金庾信) 장군(將軍)께서 말을 타고 해자(垓字)를 뛰어넘을 수 있는 곳은 오직 한군데 밖에는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문(城門)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성문(城門)이 있는 앞에 해자(垓字)가 있을 경우의 독특한 성곽(城郭) 구조를 이해하여야만 김유신 장군
께서 단기(單騎)로 해자(垓字)를 뛰어 넘은 이 사건을 이해할수 있습니다.
성문(城門) 앞에 해자(垓字)가 있을 경우에는 ‘위에서 아래로 내리고 올리는’ 교량(橋梁)이 있게 마련입니다.
또 이곳은 성문(城門)이 ‘열린 상태’에서 교량(橋梁)이 들리면, 말(馬)을 타고, 질주해서 점프(jump)해서 넘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성곽 밑의 해자(垓字)보다 폭(幅)이 넓습니다.
보통 10미터 내외가 됩니다.
교량을 들어올리거나 내리는 것은 이 교량에 철삭(鐵索)을 걸어서 이를 연자방아 갈은 거대한 원통(圓筒)에 말(馬)
들이 멍에목을 매고, 돌려서 교량을 올리거나 내리게 됩니다.
따라서 이런 행위를 적(敵)의 공격 앞에서 막기 위해서 서울의 흥인지문(興仁之門) 처럼 반원(半圓) 모양의 옹성
(甕城)이 교량을 올리고 내리는 곳 주변에 쳐져 있기 마련입니다.
(*) 흥인지문(興仁之門)의 옹성(甕城)을 볼 수 있는 곳.
http://k.daum.net/qna/view.html?category_id=QQO012&qid=3FtQx&q=%C8%EF%C0%CE%C1%F6%B9%AE
+%BF%CB%BC%BA&srchid=NKS3FtQx
그런데, 교량을 들어올리면, 그 높이가 해자(垓字)의 길이보다 약간 더 길게 되기 때문에, 성문(城門)의 문루(門樓)
앞을 가리면서 ‘하늘 높이’ 가리게 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됩니다.
문루(門樓)는 아래에 아치(arch) 모양으로 된 성문(城門)이 있고, 그 위에 누각(樓閣)이 있게 되는데, 교량(橋梁)을
올릴 경우 ‘앞’이 안보이게 되기 때문에, 교량을 올려서 ‘가려지는 부분’을 피(避)해서 좌우(左右)로 누각(樓閣)을
세웁니다.
이를 관구(關丘)라고 통칭하는데, 천자(天子)의 궁궐 앞에 있는 것은 쌍관(雙關)이라고 하고, 제후(諸侯)의 경우는
양관(兩關)이라고 구분해서 칭합니다.
즉 하나의 옹성(甕城)이 쳐진 안쪽에 ‘왼쪽 양관(兩關)-교량(橋梁)-오른쪽 양관(兩關)’이 있게되는 그런 모양인 것
입니다.
아무튼, 낭비성(娘臂城)의 성문(城門)은 이런 구조로 되어 있는데, 고구리(高句麗) 군(軍)이 하시(何時)하도 출격
(出擊)을 하기 위해서 성문(城門)은 열어 둔채로, 교량(橋梁)만은 올려둔 상태에 있었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런 구조에서 ‘해자(垓字)를 뛰어넘는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김유신(金庾信) 장군(將軍)께서 말(馬)을
타시고 약 10미터 정도되는 해자(垓字)를 건너 뛰어서 성문(城門) 안으로 뛰어 들어간 것을 의미합니다.
낭비성(娘臂城) 양관(兩關) ‘위’ 문루(門樓)에서 질주(疾走)해 들어오는 단기(單騎)로 달려오는 신라(新羅)의 김유신
장군을 보았을 때, “왜 달려오지?” 하는 의아심이 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뜻합니다.
무려 10미터나 되기 때문에, 교량(橋梁)을 내리지 않는 한 절대 넘을수 없는 것을 ‘말(馬)을 타고 뛰어 넘는다.’는
것은 상상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천관화랑(天官花郞)으로써 참마(斬馬)하면서 무공마(武功馬)로 ‘됴’를 들인 말은 이것이 가능합니다.
이 말은 ‘음식과 물을 점차 줄이면서 추위에 노출된 채로 있었기 때문에’ 당나귀처럼 허리를 구부렸다가 펴는 것을
계속해서 그 ‘추위’를 이겨낸 말입니다.
또 달릴때 역시 ‘조로마리’ 주법 허리힘을 계속 쓰도록 훈련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말보다 허리힘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하도록 체질(體質) 자체가 변경이 된 말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무공마(武功馬)들은 좀 힘들지만 그래도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즉 김유신 장군께서는 고구리(高句麗)가 대승(大勝)을 거두고, 가장 빠른 시간에 출격(出擊)하기 위해서 성문(城門)
을 열어둔채, 교량(橋梁)만 올린 것을 보고, ‘해자(垓字)를 뛰어넘어서 대번에 적성(敵城) 안으로 들어갈 계산’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뛰어들어서 적성(敵城)안으로 들어가 적장(敵將)의 목을 베어서 이를 칼에 꿰어서 다시 열린 성문(城門)을
통과해서 또 한번 해자(垓字)를 뛰어 넘어왔던 것이지요.
이를 원문(原文)에서는 매우 간단한 문장 - 즉 <③ 迺跨馬拔劍 跳坑出入賊陳 斬將軍 提其首而來>로 처리한 것입니다.
즉 <도갱출입적진(跳坑出入賊陣)>은 해자(垓字)를 뛰어 넘는 것을 도갱(跳坑)으로 표현하였는데,
그 다음이 출입(出入)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갈 때도 뛰어넘고, 올 때도 뛰어넘은 것을 뜻함이 분명한 것입니다.
문제는 원문(原文)이 ‘도갱(跳坑)+출입(出入)+적성(賊城)’으로 되어 있으면 지금까지 말한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데, 문장이 ‘도갱(跳坑)+출입(出入)+적진(賊陣)’으로 되어 있어서 진실한 상황파악을 하기가 약간 어렵게 하는
문장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진(陣)이라고 할 때에는 이동하기 좋은 텐트(tent)나 파오(Pao)등의 시설이 되어 있고, 이를 중심으로 군사(軍士)
들이 주둔(駐屯)한 이미지(image)를 주고, 성(城)은 가게와 집이 즐비하게 있는 그런 이미지(image)를 줍니다.
문제는 고구리(高句麗)의 경우 성(城)이 있어도, 그 안(內)에는 가게와 집이 즐비하게 있는 유형이 아니라, 오히려
텐트(tent)나 파오(Pao)등이 져져있어서, 전부대가 출동할수 있는 구조 즉 진(陣)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김유신 장군이 필마(匹馬)로 뛰어든 것은 해자(垓字)와 성곽(城郭)으로 둘러 쌓인 적진(賊陣) 속으로 뛰어
든 것을 뜻하고, 오히려 도갱출입적성(跳坑出入賊城)으로 표현하는 것보다도, 도갱출입적진(跳坑出入賊陣)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욱 실제 상황에 맞는 기술(記述)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성곽(城郭) 속에 ‘적장(敵將)이 있는 곳으로 김유신 장군께서 단기(單騎)로 어찌 아시고 가장빠른 시간 안에
접근하고, 이를 제지하려는 적군(敵軍)을 제압하면서 목을 베어가지고 올수 있는가?’를 현실감있게 우리들이 이해
하기 어려운 점에 있습니다.
그러나, 적장(敵將)이 있는 곳은 진(陣)을 칠 경우, 별로 어렵지가 않습니다.
막사(幕舍)의 크기와 기(旗)에 의해서 저절로 파악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혀려 이런 적장(敵將)이 있는 곳까지 김유신 장군이 접근을 할 때, 고구리(高句麗) 군사(軍士)들이 왜 막지를 못했
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워낙 빠르게 출기불의(出其不意)로 그것도 단기(單騎)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이를 알리고 대처하는
것도 매우 힘들었음을 이해할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김유신(金庾信) 장군이 지닌 무기(武器)와 무술(武術)이 ‘기마(騎馬)를 한 상태에서 귀검(鬼劍)으로써 문제가
발생한 곳에 최대한 빨리 접근하여 경호(警護)와 체포술(逮捕術)을 하는 형태’임을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즉 암살범들이 들어왔을 때, 기마(騎馬) 의회경찰이 닥아 오는 것을 중간에서 가로 막은 것에 시간을 가급적으로 안
쓰고 ‘지나쳐 가는 방법’에 대해서 고도로 수련이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낭비성(娘臂城) 전투에서 단기(單騎)로 적장(敵將)의 목을 베어서 귀검(鬼劍)에 꼽고 돌아오는 일은 김유신
장군께서 기마천관(騎馬天官)의 생활을 오랫동안 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 것입니다.
생각컨데, 적장(敵將)의 머리를 베는 동안에, 도중에 가로막는 적(敵)을 살상(殺傷)한 것은 아마도 열 명을 넘지
않고, 전부 공격을 흘려보내면서 상대하지 않고 따돌렸고, 초고속도로 접근해서 적장(敵將)의 목을 베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열린 성문(城門)에 ‘적장(敵將)의 목’을 귀검(鬼劍)에 꼽고 해자(垓字)를 뛰어 넘어온 후의 기록을 열전(列傳)
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④ 我軍見之 乘勝奮擊 斬殺五千餘級 生擒一千人 城中兇懼無敢抗 皆出降
: 우리 군사(軍士)들은 이를 보았다!. ‘이김’을 타고서 북받치듯 공격(=분격(奮擊))하여 5,000여급을 베었으며,
1,000명을 산채 포로를 하였다. 성(城) 안에서는 크게 두려워하여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성(城) 밖으로 나가서 항복
하였다.
(의미해설)
김유신 장군이 적장(敵將)의 목을 귀검(鬼劍)에 꼽아서 해자(垓字)를 뛰어 넘어오는 것을 신라의 군(軍)들이 보자,
신기한 현상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것은 “저 해자(垓字)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섬광(閃光)처럼 전군(全軍)에 들어온 것입니다.
특히 용화향도(龍華香徒) 출신이 많은 중당(中幢)의 기마병(騎馬兵)들과, 또 신라의 소도(蘇塗)에 자신의 말(馬)을
조련(調練)시켰던 천독(天毒) 출신의 기마병(騎馬兵)들 역시 마찬가지의 생각이 든 것입니다.
문제는 귀검(鬼劍)에 적장(敵將)의 목이 걸려있는 모습이, 말(馬)들에게 전혀 엉뚱하게 느껴졌다는 점에 있습니다.
“저 해자(垓字)를 뛰어넘질 않으면, 저렇게 되는구나!!”
또 용화향도(龍華香徒) 출신의 중당(中幢)의 기마병들은 물론이고, 신라의 소도(蘇塗)에 말을 조련시키기를 부탁
했던 천독(天毒) 출신의 기마병들은 이 모습을 보자,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무공마(武功馬)들에게 “엄부(嚴父) 앞에 효도(孝道)를 할 것인가?! 아니면 ‘유니콘’으로 탄생할 것
인가?! 가자!!” 하는 소리를 치면서 달려나가서 너도 나도, 낭비성(娘臂城) 양관(兩關) 앞의 해자(垓字)를 훌훌 뛰어
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표현한 것이 승승분격(乘勝奮擊)인 것입니다.
문제는 이때 양관(兩關) 앞 해자(垓字)를 뛰어넘은 신라의 기마병(騎馬兵)이 도대체 몇명인가 하는 것입니다.
원문에 참살오천여급(斬殺五千餘級)이란 표현이 있는데, 기마병(騎馬兵) 1 사람이 5명을 참살하였다고 계산하면,
무려 1000 기(騎)가 해자를 뛰어넘은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되돌아올 때에는 분명히 낭비성(娘臂城)의 교량(橋梁)을 내린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1,000명이 생포되었다라고 되어있는데, 생포(生捕)한 사람을 말(馬)을 태우고 올리는 없고, 포승(捕繩)
으로 묶어서 다리를 걸어서 건너오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신라의 기병(騎兵)들은 이 낭비성(娘臂城) 성곽(城郭)의 도로(道路)를 통해서 성(城) 내부의 모든 군사
(軍士)들을 사살할수 있는 포위망(包圍網)을 형성하고 난 후의 상태인 것입니다.
따라서 <城中兇懼無敢抗 皆出降 > - "성(城) 안에서는 크게 두려워하여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성(城) 밖으로 나가서
항복하였다."는 현상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2) 신라본기(新羅本紀) 진평왕(眞平王) 51년(629년) 조(條) 기록
그런데, 열전(列傳)의 기록은 해자(垓字) ‘밖’에 아무런 진(陣)이 쳐져있지 않은 것인양 기록되어 있고, 해자(垓字)가
강조되어 있지만, 신라본기 진평왕 51년 조에는 좀 다르게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원문(原文)과 해석]
① 五十一年 秋八月 王遣大將龍春-舒玄 副將軍庾信 侵高句麗娘臂城 麗人出城列陣 軍勢甚盛
: 가을 8월에 왕은 대장군 용춘(龍春) 김서현과 부장(副長)으로써 김유신을 파견하여 고구리 낭비성(娘臂城)을 침공
하였다. 고구리 사람들이 성(城)을 나와서 진(陣)을 쳤는데, 그 군세(軍勢)가 심히 성대하였다.
(의미해설)
즉 열전(列傳)의 내용과 비교하면, 역습(逆襲)을 한 후에, 고구리 군은 성(城)을 나와서 진(陣)을 치고 있었음이 드러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양관(兩關) 사이의 교량(橋梁)의 올린 상태에서 해자(垓字)가 놓인 것과 결부해서 생각하면 우리는
더욱더 김유신 장군의 ‘놀라운 용기’를 알수가 있습니다.
즉 고구리(高句麗)군은 낭비성(娘臂城)의 해자(垓字)를 배경(背景)으로 배수지진을 치고, 거대한 학익진(鶴翼陣)을
치고 있음을 알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학(鶴)이 날개를 벌린 듯한 가운데로 단기(單騎)로 달려나가서 해자(垓字)를 뛰어 들었음을 알수가 있는데,
학익진(鶴翼陣)을 친 성밖의 사람들이 생각할 때에는 “미친놈 호랑이 입(口)으로 들어가구나!”라고 가만히 내버려
두었음을 뜻합니다.
② 我軍望之懼 殊武鬪心 庾信曰 吾聞振領而裘正 提綱而網張 吾其爲綱領乎
: 이에 우리 군사는 이를 바라보고는 매우 두려워하여 싸우려는 마음 자체를 포기하였다. 김유신이 말하기를 “소장
(小將)은 ‘옷깃을 떨쳐야 갖옷이 바로 잡히고, 비리릘 들어야 그물이 펴진다.’는 말을 들었다. 어찌 이 소장이 옷깃과
벼리가 되지 않으리!!”라고 하였다.
③ 乃跨馬拔劍 向敵陣直前 三入三出 每入 或斬將或搴旗
: 그러고는 말을 올라타고, 귀검(鬼劍)을 뽑아서 적진(敵陣)을 향하되, 정면 앞으로 똑바로(=직전(直前)) 세번 들어
가고 세번 나왔는데, 매번 들어갈 때마다 적장(敵將)을 참(斬)하고, 기(旗)를 뽑아왔다(=건(搴))
(의미해설)
신라본기 쪽은 단 한번 김유신 장군이 들어갔다 나온 것이 아니라, 세번 들어갔다 나왔으며, 그 때마다 적장(敵將)의
목이 귀검(鬼劍)에 걸려있거나, 혹은 기(旗)를 뽑아 왔다는 것입니다.
첫번째 들어갈 때는 학익진(鶴翼陣)을 친 고구리 군사들이 “호랑이 입에 들어가는군!”하고 방치했었겠지만, 해자
(垓字)를 뛰어 나오면서 적장(敵將)의 목을 귀검(鬼劍)에 달고 나오고, 그 다음에 다시 해자(垓字)를 뛰어 넘어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에는 고구리의 성 밖 학익진(鶴翼陣)을 친 장수(將帥)들은 난감(難堪)해짐을 느끼지 않을수 없습
니다.
“교량을 내려라. 성곽 속으로 후퇴하겠다.”라고 하기도 이상하고, 그렇다고 해서 뻔히 눈 앞에서 학익진(鶴翼陣)을
펼친 자신들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양 3번씩이나 들락거리는 것을 막기 위해 진형(陣形)을 바꾸어서 해자 앞에
일자진(一字陣)을 치기도 또한 우스운 것입니다.
완전히 판단마비를 일으키는 행동을 김유신 장군은 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낭비성(娘臂城) 밖의 학익진(鶴翼陣)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계속 단 한사람인 김유신(金庾信) 장군의
‘해자(垓字) 넘기 게임(game)’을 구명만 하고, 점차 기(氣)가 죽어가는 채로 아무것도 할수 없었음을 뜻합니다.
한편, 밖에 이런 이상한 광경을 목도(目睹)하는 신라군은 신라의 소도(蘇塗)에서 무공마(武功馬)를 훈련시킨 말을
타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도 저 해자(垓字)를 넘어가야한다.’라는 생각을 하고, 그렇지 않은 신라군들은 “우리는 이
밖에 있는 학익진(鶴翼陣)을 전부 쓸어버리자!”라는 쪽으로 자연히 의견이 구경을 하면서 정리되게 하였음을 뜻합
니다.
그리고 이런 자연스런 무언(無言)의 전략이 일어나자, 순식간에 이를 실천해내는 거짓말 같은 현상이 벌어졌음을
열전(列傳)과 똑같이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④ 諸軍乘勝 鼓噪進擊 斬殺五千餘級 其城乃降
: 제군(諸軍)은 승리(勝利)의 기회를 타서 북을 올리고 함성을 지르며 진격(進擊)하였다. 5,000여급을 참살하였고,
성(城)이 항복하였다.
(총괄적 의미해설)
진평왕(眞平王)께서 중신(重臣)들의 연합군을 구성 원정(遠征)시킬 정도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전역(戰役)을 고려
하면, 열전(列傳)보다 신라본기에 있는 성(城) 밖에 학익진(鶴翼陣)을 겸, 해자(垓字)의 배수지진(背水之陣)을 치고,
또한 성(城) 안에서는 교량만 내려면 하시라도 전 기마병(騎馬兵)이 출동할수 있는 그런 전략을로 임했음이 분명합
니다.
단지 열전(列傳)은 보다 구체적인 당시의 성곽(城郭) 구조를 짐작할수 있도록 해자(垓字) 이야기가 들어가 있는 것
뿐인 것입니다.
아무튼, 이 낭비성(娘臂城) 전역(戰役)을 통해서, 김유신 장군은 일약(一躍) 명장(名將)으로써의 이름을 삼한(三韓)
사람에게 남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뉴스(news)를 듣고, 미소(微笑)를 지을 분이 있으니 바로 저 천관녀(天官女)와 김유신 천관화랑
(天官花郞)의 ‘살아있는 영혼 결혼식’을 주재(主宰)하던 ‘육부군(六部軍) 기마(騎馬) 성모(聖母)’였던 것입니다.
“소아(小兒)들이 드디어 공(功)을 세웠구나!” 하고 말입니다.
아무튼, ‘육부군 기마 성모’ 입장에서 보면, 낭비성(娘臂城) 전쟁은 신라의 무공마(武功馬)들이 자신들의 엄부(嚴父)
인 하늘의 천관화랑(天官花郞)의 현신(現身)인 김유신 장군 앞에 효도(孝道)를 기필코 해낸 효도전쟁에 불과하였던
것이고, 그 녀를 그토록 조로(早老)하게 만들었던 말(馬)에 대한 모성(母性)으로써의 상처가 이때 치유(治癒)가 많이
되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나. 낭비성(娘臂城)은 어디인가?
그런데, 이 김유신(金庾信) 장군께서 기마(騎馬) 의회경찰(議會警察)이 아닌 무장(武將)으로써 첫 출전(出戰)을
해서 큰 전과를 올리고, 또 진평왕(眞平王)께서 ‘중신(重臣) 연합 원정(遠征)’을 할 정도로 지정학적(地政學的)으로
중요한 낭비성(娘臂城)은 어디인 것일까?
이를 조사해 보았더니, 참으로 흥미있는 정보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 낭비성(娘臂城)이 “원래 맥제(百濟)의 상당현(上黨縣)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후에 고구리(高句麗)에 빼앗겼다가, 다시 신라 진평왕(眞平王)때 김유신 장군의 활약을 통해서 신라의
땅이되었다가, 통일신라 후에는 서원소경(西原小京)으로 된 곳인데, 고리(高麗) 때 청주(淸州)로 불리워진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상당현(上黨縣)의 상당(上黨)은 차(茶) 가운데, 가장 최고급 품의 차로 치는 상당차(上黨茶)가 나는
지역은 즉 오늘날 장야(長冶=창쯔)분지(盆地)를 뜻합니다.
즉 오늘날 청장하-자아하 고대의 패수(浿水)가 브이(V)자로 꺽이어 올라가기 전에 불(乀)자로 내려가는 지역인 것
입니다.
좌계가 볼 때에는 이곳이 맥제(百濟)시대의 상당현(上黨縣)으로 보는 것입니다.
즉 오늘날의 장야시(長冶市) 정도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 상당차(上黨茶)의 산지(産地)이자 낭비성(娘臂城)이 있었던 장야(長冶) 분지를 볼수 있는 산서성 지도
http://www.coo2.net/files/san030225-1.gif
이곳은 삼국(三國)이 패수(浿水)를 확보하기 위해서 서로 획득하려는 지정학적 요충이 되고도 남는 자리입니다.
또 이곳이 낭비성(娘臂城) 혹은 낭자곡성(娘子谷城)으로 불리우는 이유도 있다고 봅니다.
차(茶)는 유목민들이 채소(菜蔬)가 부족하기 때문에 중국대륙과 교역(交易)하는 대표적인 산물입니다.
또 고대에 서로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소통(疏通)하는 방법은 ‘결승(結繩)-가림토’로써 ‘쌍방방향적 학습기’ 이른바
언지(言只)를 사용하였는데, 주로 몸이 유연한 ‘아가씨’들이 담당하였습니다.
낭비성(娘臂城)의 낭비(娘臂)는 ‘아가씨의 팔’이란 뜻이고, 또 낭자곡성(娘子谷城)은 ‘아가씨들 계곡의 성(城)’이란
뜻입니다.
이는 차(茶) 교역을 위해서 ‘아가씨들이 오늘날 장야분지(長冶盆地)에서 대규모로 언지(言只)를 쓰는 계곡이 있음을
뜻합니다.
즉 오늘날 탁장하(濁漳河)가 흐르는 계곡 주변이 낭자곡(娘子谷) 이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 이런 탁장하(濁漳河) 같은 물이 흘러들어오는 지역이라야만 낭비성(娘臂城) 주변에 해자(垓字)를 두르는 지역이
될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 지역이 원래는 맥제(百濟)가 관할하던 곳이었는데, 개로왕 때 장수왕의 공격으로 하남 위례성의 북성
(北城)인 진성(晋城)이 떨어지는 바람에 이 지역이 고구리(高句麗)로 넘어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이를 김유신 장군의 탁워한 용기와 전략으로 신라가 차지하게 되고, 이 정도의
지정학적인 위치이면, 진평왕(眞平王)께서 중신(重臣)들의 연합 작전으로 점령하도록 명령할 만한 ‘위치’가 되는 것
입니다.
그런데, 고리(高麗)시절 때에는 패수(浿水)는 대륙택(大陸澤)이 있었던 하북성 안국시-진주시 부근은 분명히 고리
서경(西京)의 땅입니다만, 패수(浿水)의 남쪽지역으로는 어쩌면, 청장하(淸漳河) 근방에만 한정되고 오늘날 장야
(長冶)-시(市) 쪽은 관할하지 못하였을런지 모릅니다.
고리는 청장하(淸漳河) 지역을 청주(淸州) 즉 ‘청장하(淸漳河)가 흐르는 주(州)’란 의미로 청주(淸州)라고 칭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비록 탁장하(濁漳河)가 흐르고, 고리(高麗)의 관할이 아니지만, “오늘날 청주(淸州) 쪽이다.”라는
의미로 금청주(今淸州)라는 기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고대(古代)의 지명(地名)을 비정(比定)하는 것은 ‘혼란’에 빠지기 매우 좋은 분야(分野)입니다.
그것은 같은 지명(地名)이 한 시대(時代)에 여러 곳에 있을 수 있고, 또 시대(時代) 마다 다른 지명(地名)을 쓸 뿐만
아니라, 국가(國家)나 족속에 따라 그 명칭도 다르기 부르기 때문에, 이들을 연결하다가 보면, 전혀 엉뚱하게 연결
할 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정학적(地政學的) 혹은 경제지리학적으로 충돌하게 되는 요충지(要衝地)는 그리 많지가 않고,
또 사서(史書)에 적힌 지리적 특성에 일치하는 것도 제한(制限)되기 마련인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에, 주변에 해자(垓字)를 치고, 삼국이 전략적 요충으로 부닥치는 지역으로써의 낭비성(娘臂城)은
좌계는 오늘날 탁장하(濁漳河) 근방의 어떤 성(城)으로 보고, 이곳 주변에서 나중에 신라의 장구진(長口鎭)과 패강진
(浿江鎭)이 파생적으로 생겼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신라는 이 낭비성(娘臂城)을 확보함으로써 일통삼한(一統三韓) 할수 있는 토대를 쌓았다고 할수 있습
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신라의 무공마(武功馬)를 길러낸 ‘배달화백의 의회여경(議會女警)’의 모성(母性)의 희생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낭비성(娘臂城)이 항복하는 날....
천관원(天官怨)의 노래는 조용히 울려퍼졌겠지요.
천관원(天官怨)의 마지막 노래 가사가 마음을 아리게 합니다.
⑨ 장부유지(丈夫有志) 의여경독(宜余惸獨)
장부(丈夫)는 뜻을 찾았으나, 나의 의지할 수 없는 외로움까지 마땅한가요?!
늘 거대한 역사적 성취(成就) 뒤에는 ‘의지할 수 없는 외로움’으로 그 밑거름을 이룬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좌계)
첫댓글 <天官怨③> 천관원(天官怨)과 육부군 기마 성모(六部軍 騎馬 聖母)의 눈물.
<天官怨④> 무공마(武功馬)의 효도전쟁, 낭비성(娘臂城)전역(戰役)
공부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