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예한 산천 주유
더위 기세가 한풀 꺾인 팔월 둘째 금요일이다. 남녘 해안 거제에 닿기 전까지 특이한 행보를 보인 태풍 카눈이 큰 피해를 남기지 않고 북상해 간 이튿날이다. 육지에 상륙해 바람 세기는 급격히 약해졌으나 국토를 관통하면서 많은 비를 뿌렸다. 당국에서는 지난달 장마 후반부 극한 호우의 재난을 거울삼아 재해에 대비한다고 하긴 했으나 불가피한 피해가 생김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직 늦더위가 남아 있긴 하겠으나 입추와 말복까지 지났기에 이제 가을의 문턱을 넘는 즈음이다. 더위의 마침표를 찍어줄 처서가 다음 차례로 기다리고 있다. 연일 폭염경보와 열대야로 노약자와 농촌에서 온열질환을 염려하던 재난 안전 문자는 더 날아오지 않을 듯하다. 나는 그동안 더위를 식히러 근교 산자락 계곡에서 몸을 담그고 나오던 웅덩이로 찾아가지 않아도 될 성 싶다.
한밤중 잠을 깨 노트북을 열어 기상청 기상레이더센터로 들어가 태풍 카눈의 현재 위치를 검색해 봤다. 강수대 구름은 남부권을 완전히 벗어나 수도권과 북한 땅 황해도 일대 걸쳐져 있었다. 신문 기사를 살펴보니 태풍은 한반도로 상륙해 더 이상 고수온 해수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지 못해서 복잡한 산악 지형에 가로막혀 계속 나아갈 동력을 상실해 진행 속도가 느려졌다고 했다.
태풍의 당초 진로는 오늘 오후 신의주까지 밀고 올라간다는 밑그림이었다. 그 예상대로라면 한국전쟁 때 미군의 인천 상륙작전 성공으로 기세가 오른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고 평양을 접수해서 압록강과 함경도까지 진격했던 전황과 유사했다. 그런데 바람이 빠지는 풍선처럼 밤새 세력이 약해져 평양 부근에서 열대저기압으로 강등되어 태풍으로서 운명을 다해 소멸하기 직전이었다.
새벽 세 시 베란다 창밖을 내다보니 바람은 잦아들어 잠잠했다. 밤하늘엔 구름이 걷혀 성근 별이 반짝거리고 동녘에는 유월 스무닷새 조각달이 걸려 있었다. 엊그제까지 열대야로 밤에도 선풍기가 돌고 때론 에어컨을 켠 날씨였는데 닫아둔 창문은 그제야 열어볼 정도였다. 장마철엔 대기 중 습도로 눅눅한 느낌이나 태풍이 지난 이후라 그런지 끈적거리는 습기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날이 밝아오는 아침에 무슨 일로 하루를 시작할까 떠올려 봤다. 오후에 집 근처 창원문화원에서 문학 지기들과 행사가 예정된 날이었다. 어느 문학 동인회에서 제정한 문학상 시상식에서 회장이 상을 받고 선배도 동인지 발간 공로로 도지사상을 받는 자리다. 상을 받는 두 분을 뵙고 축하도 해야겠지만 그 자리를 함께할 문우들과 안부를 나누는 뒤풀이에도 얼굴을 내밀어야 할 듯하다.
어제는 태풍으로 집에 머물며 갑갑한 하루를 보냈다. 이번 태풍이 바람은 약해 피해를 주지 않았겠지만 비는 많이 내려 곳곳에 침수지역이 있기는 하지 싶다. 마음 같아서는 날이 밝아오면 이른 아침부터 길을 나서 태풍이 스쳐 지난 산천을 주유하고 싶다만 그럴 여건이 되지 못해 유감이었다. 땀이 젖은 채 오후 창원문화원에서 있을 문학 행사장으로 바로 갈 여건이 못 되어서다.
퇴직 후 집에 머무는 시간은 적게 하려고 노력한다. 누구나 이즈음 나잇살은 여기저기 심신에서 성치 않은 표시가 드러난다. 아내와 대면하는 시간과 공간이 적으면 적을수록 가정의 평화가 유지됨은 퇴직 이전부터 익히 알고 지낸 생활 수칙이기도 했다. 그런데 새벽같이 길을 나서 바깥바람을 쐬고 와 점심나절 귀가해 땀을 씻고 다시 의관을 정제하고 행사장에 갈 형편이 못 되었다.
아직 여름 더위가 가시지 않아 반나절이라도 나들이를 다녀오면 옷은 땀이 젖게 마련이다. 백수 주제에 세탁물을 하루 두 벌씩 벗어내기는 여간 눈치가 보이지 않을 수 없다. 강둑으로 나가든지 산기슭 숲으로 들든지 발품을 팔고 걸으면 땀은 흘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귀로에 시간이 지나 흐른 땀을 식혀도 땀내는 나기에 나들이 이후 곧장 행사장으로 갈 여건 못 되어 집에 머물련다. 23.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