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심도(只心島)
사람이 살고 있는 섬중에서 자연생태가 가장 잘 보전되어 있는 섬
#지심도 동백길
하늘에서 내려다본 섬의 모양이 한자 마음 심 (心) 자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거제 지심도
거제 장승포항, 지세포항에서 배로 15분거리에 위치하며 섬 전체가 동백나무로 뒤덮여 있어
동백꽃이 만발하는 봄이 될 무렵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모여 듭니다.
지심도 동백숲
지심도는 경남 거제시 일운면에 속한 섬으로 해안선 길이 4km
20여가구 4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지심도 지도
지심도 동백나무 터널은 참으로 운치 있으며 동백꽃을 배경으로
인생샷이 펼쳐 집니다.
지심도 동백꽃
2020년 성탄연휴 때, 세번째로 방문해서 동백나무숲을 걸었어요
변한 것은 거의 없었고 길을 걷고 있는 저만 변한 듯했습니다.
제는 아래 지도의 반대 방향으로 걸었습니다.
선착장을 시작으로 동백하우스 → 노랑바위 삼거리 → 동백숲 → 일본가옥 → 대나무 군락지 → 방향지시석
→ 해안선전망대 → 망루(땅끝 전망대) → 높은여 → 동백터널 → 활주로(헬기장) → 마끝 → 선착장
※ 포진지, 탄약고, 노랑여 방향은 공사로 통제되어 발길을 돌려야했습니다.
지심도 트레킹코스
일제시대 일본의 전략적 요충지로 해군기지로 이용되었으며 활주로로
이용되었던 곳이 지금은 헬기장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2016년 지심도의 소유권이 국방부에서 거제시로 이전되기 전까지
국방부 소유였기에 주민들이 함부로 나무를 벨 수없었기에 동백나무들이
보호될 수있었다고 봅니다.
지심도 동백나무
지심도 주변은 바닷물의 수심이 깊어 방파제가 없어 어업이 발달 할 수없는 섬입니다.
감성동, 도다리 볼락등이 잘 잡혀 낚시꾼들이 모여듭니다.
마끝에서 바라 본 노랑여
마끝 (해안절벽)
마끝에서 바라 본 노랑여
마끝 (해안절벽)
지심도 마끝(해안절벽)
지심도 배 내리는 곳의 인어상,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누굴 기다리는지 . .
이상 거제 동백나무의 섬, 지심도 간략한 답사기였습니다.
동백꽃 피는 봄에 좋은시절이 돌아와 다시 가보고 싶습니다.
지심도의 이해를 돕기 위해 1957년 한국일보에 실린
"내던져진 남해의 고도-거제군 지심도의 분교장" 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소개합니다.
부산에서 정기선으로 거제도 동남단을 네 시간 달리면 장승포와 지세포에 다다르고 이 포구에서 다시 덴마를 빌려 타고 근 2시간 저어가면 동백, 여정실 등 상록수로 뒤덮인 지심도가 본토를 향해서 마음 심 자를 그리고 있다. 십리나 되는 섬 둘레를 구석구석 찾아봐도 배 한 척을 매어 둘 곳이 없도록 섬은 절벽만 가리어져 있다.
아무리 깊은 밤중이라 할지라도 ‘배가 들어왔다!’ 는 소리가 들리기만 하면 모두들 초롱을 들고 뛰어나와서 배를 육지에 끌어올리는 것이 바다에 시달린 이 섬사람들의 인정이었다. 오랫동안 자랑거리라고는 동백꽃뿐이었던 이 섬에 5년 전부터 동화의 소재에 십상 알맞을 새로운 자랑거리가 생겼다기에 기자는 찾아온 것이다.
그것은 단 28명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작은 초등학교가 세워졌다는 사실이었다. 산마루턱에 자리잡은 이 학교의 정식이름은 일운초등학교 지신분교장. 교사라고는 8평짜리 교실에 덧붙여 놓은 이곳 4평짜리 사택뿐이었다. 유리창도 끼우지 못해서 창호지를 발라 놓은 방안을 기웃거려 보니 교탁도 없고 학생들의 의자도 없었다. 여기에 어울리지 않은 것 같아서 눈에 거슬렸던 풍금은 역시 음정을 잃은 채로 시계도 바늘이 멎은 지 오래였다. 하지만 이 작은 방안에서 1학년 8명과 3학년 9명과 4학년 5명과 5학년 6명이 네 개의 반으로 나뉘어 한 사람의 교사로부터 4복식의 수업을 만족스럽게 받고 있었다.
해에 따라서는 5복식, 6복식으로도 가르쳐야 하는 비결을 조창래32세 선생한테 물어본 즉 동일학과로서 전 학년의 시간표를 짜놓고 각 학년마다 10분 내지 15분씩 직접 수업을 하고는 문제풀이를 맡긴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가르쳐 보면 우수한 하급생들은 상급생의 수업까지 엿들어 엉뚱하게 실력이 늘게 되고, 열등한 상급생은 또한 하급생의 수업까지 엿듣고 잃어버린 기초를 재삼 닦게 되는 결과를 나타내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보통 한 교사가 한 학급을 맡았다고 해서 한 시간 내내 직접 수업하는 것도 아니니까 여기 아이들이 4복식 수업을 받았다고 해서 교과의 진도가 떨어질리야 없지 않느냐?”는 반문을 받고 이 외떨어진 섬에 자진해서 찾아온 젊은 조 선생의 정열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학교가 생긴 것은 1954년 4월 1일이었다. 일본해군이 여기에 포대를 만들려고 원주민을 쫓아낸 지 80년 만에 해방을 맞고 돌아온 귀환동포와 제집차지를 못했던 사람들이 이곳으로 모이게 되었다. 집집마다 7명 이상의 큰 식구를 거느리건만 밭이라고는 한집에 일곱 마지기밖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나마 워낙 비탈진 밭이라서 고구마를 캘라치면 큰 것은 돌멩이마냥 궁글어 바다에 풍덩 빠지는 일이 많았다는 것이다. 섬사람들은 이렇게 살림에 쪼들리는 십년 동안에 아이들을 가르치지 못해서 몸부림쳤다.
(중략)
교무실이자 섬사람들의 집회소가 되어 있는 조 선생의 방에는 색다른 식구 한 사람이 있었다. 이 섬학교의 5학년생이라는 윤현철(13세) 군은 본섬의 일운초등학교 2학년 때 조선생이 맡은 반의 학생이었다.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부산을 가려던 때에 조선생은 윤 군의 가정이 어려운 줄을 알고 ‘부산에 가면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닐 테고 구두닦이로 버림받게 될지 모르니 맡겠다’고 데려온 아이라는 것이다.
섬사람들 말에 의하면 조선생과 사모님은 추석 때도 윤 군에게만 명절치레를 해주었다고 한다. 윤 군은 이 섬에서 기차구경을 한 유일한 소년이었다. 그 밖의 27명의 아이들은 아직 정기여객선도 못 타봤다고 말했다. 여름이면 맨발로 쏘다니기가 예사이고 운동화를 신어봤다고 뻐기는 아이라야 12명밖에 안 되었다.
그들은 아침에 쌀낟을 섞었다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은 고구마와 보리가 반반씩 섞인 시커먼 밥덩어리를 먹고 나면 점심과 저녁은 고구마로 때우고 말았다. 하지만 이 섬에서 이제는 적령아동 치고 학교에 안 다니는 아이는 한 사람도 없으니 완전히 의무교육이 실시되고 있는 셈이었다. 그 뿐 아니라 일체의 징수금을 아동으로부터 거둘 필요가 없었다. 섬사람들은 학교를 유지해 내기 위해서 공동으로 미역을 따고 부역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 섬사람들은 자기들의 교육열이 식는 날엔 선생님이 떠날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희망을 약속해 주는 일이 한 가지 있었다. 그들 손으로 세워진 학교에서 처음으로 지난 봄(1956년) 졸업한 7명 가운데 최초의 유학생으로 본도(本島)에 간 유기광 군과 임성호 군의 커가는 모습이었다. 섬사람들은 토요일만 되면 덴마를 갖고 본도까지 마중 나가서 이 두 유학생을 실어왔다. 윤 군은 그 아우와 함께 홀어머니의 품에서 커 온 학생이었다. 그래서 중학에 들어가서도 부지런하고 성적이 좋다는 칭찬을 받고 있었다.
그 어머니는 ‘만약 섬에 학교가 안 생겼으면 기광이를 중학교는커녕 초등학교에도 못 보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는 공부가 얼마나 중한 것인지 알았으니 끝까지 가르치겠다’고 남자들도 허덕대는 판에 희망이 가득차 있었다.
배경음악, 사랑의 이름으로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