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2. 3. 8. 화요일.
오전에 서울 송파구 잠실에 있는 내과병원에 들러서 당뇨병에 대한 당화혈색소를 검사받았다.
팔뚝에 주사기를 꼽고는 피를 뽑았다. 검사 결과는 모레인 목요일에 핸드폰 문자로 알려주겠다면서 당뇨약을 예전과 같은 4가지 종류로 처방했다.
집에 돌아와 늦은 아침밥을 먹었다.
오래 전에 써 둔 잡글을 종이로 프린트한 것을 발견했기에 아래처럼 자판기를 눌러서 다시 글을 쓴 뒤에 여기에도 올린다.
그냥 일기이다. 빠르게 다다닥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텅 빈 시골집.
뒷방문을 열면 안 변소로 가는 작은 통로가 있고, 그 통로 안에는 예전에 어머니가 사용했던 여러 가지 생활도구가 남아 있다. 무쇠로 된 화로도 있고, 화로 속의 재를 다독거리는 인두도 있다.
이제는 골동품이 되었다.
무쇠화로와 어머니
녹음방초지절(綠陰芳草之節)*이 지난 주말에 고향(충남 보령시 웅천읍 구룡리 화망)에 내려가 시골집의 헛광을 정리하다가 한 구석에 처박혀 있는 무쇠화로(火爐)를 발견하였다. 겉표면이 검으죽죽하고 우둘두둘하여 질감이 매끄럽지 않았고, 또한 모양새도 질박하고 투박하기 그지없었다.
무쇠화로는 겨울철 어머니가 일꾼사랑방의 재래식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고 거기에서 나오는 목탄과 재를 둥근 화로(火爐 가로 25cm 세로 20cm 크기)에 담아 안방 윗목에 놓아두고, 부젓가락, 작은 부삽, 또는 인두로 불담*을 다독거리며 재 불꽃이 오래 살아 있도록 하는 생활도구였다.
잿불이 꺼지지 않도록 부젓가락과 인두로 꾹꾹 눌러 다져 놓으면 잿불은 마지막까지 연소(燃燒)한다. 때로는 장작이 벌겋게 타고 있는 숯에 물을 끼얹어 불기를 끈 검은 숯일 경우에는 나중에 불이 붙으면 매캐한 냄새가 방안에 배고 연기를 살짝 내어서 눈이 맵고 눈가를 짓무르게 한다. 화로에 담은 잿불은 대체로 순하다. 추운 겨울철 바깥에서 바싹 언 손을 화로불에 쐬어서 추위를 녹이기에는 아주 그만이다. 무쇠화로는 볼품이 별로 없다. 질박하고 투박해서 오히려 부담감 없이 뜨거운 잿불을 담아서 요긴하게 사용하며, 추울 때에는 이만한 생활도구가 또 어디에 있으랴 싶다.
조부가 다섯 살 나던 해인가(1897년)? 증조부의 장인(청주 한씨)은 대목수(大木手)이었으며, 장애가 있는 아들 대신에 영민하고 예뻤다는 딸을 더 애착(愛着)하였기에 딸 시댁의 초옥(草屋)을 손수 지어 주셨다고 하니 당가(堂家)의 건축 나이로는 무려 100년도 더 넘는다.
남향받이로 긴 죽담* 위에 이엉(짚으로 나래를 틀어서 만듦)로 담장을 보호했으며, 그 틈새 중간에는 왕대나무로 엮어 만든 사립문이 있었으며, 사립문의 밑자리 틈새로 아이들은 기어들고 나가곤 하여서 무릎팍이 성할 날이 없었다.
집 주변의 서편과 북편에는 빽빽이 늘어선 신우대(키 2m 정도의 작은 대나무 일종)와 아름드리 쭝나무(나무 속 결이 붉은 참죽나무)가 서로 어울러진 울타리가 있는 전형적인 초가였다.
1957년 봄. 내 부친이 대전에서 목재를 지에무시(GMC 트럭)로 실고 왔고, 대전의 목수가 몇 달간 걸쳐서 초가지붕을 헐어내고 그 위에 함석지붕으로 교체했다. 흙벽을 털어내고는 새로 흙을 짓이겨서 벽에 살을 덧붙이고, 그 표면에 사람의 머리카락을 뜨겁게 삶아서 만든 회색의 회(灰) 즙으로 덮어 씌워 발랐다고 하더라도 흙벽은 그대로 남았다.
1969년 여름철(8월) 중순. 작은쌍둥이가 바깥마당에서 쉬다가 대문 안으로 들어와 변소에 가려다가 뱀한테 물렸고, 다음날 저녁 무렵에 요사(夭死)했다. 만 20살 때다. 미움을 받게 된 변소간을 폐쇄했다.
1970년. 건너방 뒤편 공간에 화장실을 새로 내면서 집은 또 한차례나 개보수되었다.
1994년 봄철. 어머니는 건축업자를 불러서 안방의 구들장(온돌)을 걷어내고 재래식 부엌을 헐어내며, 입식(立式)의 주방(廚房)으로 보수를 했다. 부엌광, 안사랑방 뒤편에 붙은 화장실을 폐쇄한 뒤에 기름보일러를 각각 설치했다. 방안에 앉아서도 스위치 버턴을 누르기만 해도 자동으로 불이 켜지고, 뜨거운 물이 끓어올라 방바닥은 후끈거렸다. 외벽은 털어내지 않았기에 흙벽을 통해서 차가운 공기가 통풍되었기에 겨울철의 안방 건너방은 남달리 웃풍*이 세었다.
큰 가마솥은 일꾼사랑방(바깥사랑방) 부엌에만 남았다. 어머니는 겨울철 새벽에는 일찍 일어나 사람도 기거하지 않는 일꾼사랑방에 딸린 재래식 아궁이에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불을 땠다. 집 주변에서 나오는 각종 나뭇가지(잡목), 겨울철 밭에서 나온 검불로 군불을 피워서 목탄과 재를 만들었다.
독거(獨居)함으로써 불을 땔 필요가 전혀 없는 일꾼사랑방 아궁이에 군불을 때서 화로불을 담는 것이 힘이 들고 귀찮은 일이기에 ’기름보일러를 켜서 방을 뜨습게 해서 겨울을 보내세요'라고 말씀을 드려도 어머니는 여러 가지의 이유와 핑게를 들어가며, 고집을 피우듯이 화로불을 안방 안으로 끌어들였다.
어쩌면 당신이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와서 평생을 연기가 풀풀나는 재래식 아궁이에 불을 지피우고 부지깽이로 불담을 다독거리고 불고무래로 긁은 재를 삼태미에 퍼 담아내고, 조석(朝夕)으로 밥을 끓여서 윗대를 공양하고, 어린 자식들을 키웠던 크나큰 살림을 독단해서 운영하던 옛일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다. 붉은 불꽃을 내뿜으며 타오르는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지키는 것이 가문(家門)의 쇠락을 막는 길임을 몸소 실천하는 것인지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겨울철 윗목에 앉아 있어도 이마와 무릎이 시럽토록 웃풍이 센 집에서 독거하는 어머니는 삶의 지혜로써 옛 방식대로 화로불로 안방의 냉기를 다스렸다. 촌가(村家)의 형평상 비싼 유류를 조금이라도 덜 때고, 기름 살 돈을 아껴서 아들인 나한테 넘겨 주려는 궁량일 게다.
칠팔년 전이다. 어머니는 이웃집 황씨네가 내다버린 시꺼먼 재래식 무쇠솥을 얻어 와서 일꾼사랑방 아궁이에 손수 설치하였다. 애착이 많이 가는지 가마솥에 물 두어 바가지를 붓고 데우면 뜨거운 물을 마음껏 쓸 수가 있었다. 불을 때서 생기는 숯과 재를 화로에 담아 안방 아랫목에 놔두면 자연스럽게 온기가 있어 겨울나기가 훨씬 용이하며, 꺼진 재를 텃밭에 부어서 거름을 하면 농사짓기에도 도움이 된다는 실리적인 경험으로 고집을 피웠다.
작년(1998년) 억수장마*가 이어지는 하절기.
나는 휴가를 내서 시골로 내려갔고, 구돌장 수리업자를 불러서 장대비 퍼붓는데도 일꾼사랑방의 구들장을 걷어내어 재설치하는 등 내부를 재보수하였다. 시골에서 살자면 불 때는 아궁이가 필요하다는 어머니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수리를 하였기에 이제는 하나만 남은 재래식 아궁이(바깥사랑방)에서 온갖 지저분한 것을 태운다.
지금 생각해도 어머니의 생각이 옳았다. 한촌(寒村)에서 살자면 땔감이 많이 생긴다. 텃밭에서 나오는 무화과 나뭇가지, 밤나무 가지, 앵두나무 가지, 대추나무 가지 등을 땔 때마다 나오는 숯과 잿불을 화로에 담아서 겨울을 나는 친자연적인 생활방식은 내가 본받아야 할 지혜롭고 검소한 문화유산이다.
1999. 7. 13.
* 불담 : 땔나무를 땔 때, 불기운의 세고 약한 정도('불땀'으로 세게 발음하기도 함)
* 녹음방초지절(綠陰芳草之節) : 잎이 푸르게 우거진 숲과 향기로운 풀이란 뜻으로, 여름철의 자연경치가 한창인 때
* 죽담 : 돌과 흙을 섞어서 쌓은 담
* 웃풍 : 방안에 도는 차가운 기운
* 불씨 : 꺼지지 않고 불을 이어 가는 불덩이(예전에는 성냥이 없었기에 숯불덩어리를 늘 보존함)
* 억수장마 : 여러 날 동안 퍼붓는 듯이 세차게 내리는 장마
무쇠화로, 부젓가락
위 사진은 인터넷에서 검색 : 용서해 주실 게다.
작은 무쇠화로 5만원, 큰 화로는 7만 원에 판매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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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맞춤법으로 검색한다.
'화로+불'은 '화롯불'이라고 '사잇시옷(ㅅ)'을 첨가하나 나는 고개를 흔든다.
국립국어원에서는 두 개의 낱말을 합성할 때 '사잇시옷(ㅅ)'을 남발하는 것 같다,
격한 소리를 유발하게 한다.
그래서 내 고집대로 '화로불'이라고 쓰고, 순하게 발음한다.
20여 년 전에는 내가 위처럼 중국 한자말을 무척이나 많이 썼다는 사실에 지금은 부끄러워 한다.
위 글에서는 한자말을 그대로 놔눈다. 그 당시의 내 실태였기에...
2022. 3. 8. 화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