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을 노래하게 하였더란 말인가 ~ !
모란봉과 대동江은 평양에서 경관이 가장 뛰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모란峰 정상의 최승대[最勝臺]가 보이고 그 아래에 을밀대[乙密臺]가 있고
강변쪽에 있는 누각건물이 부벽루[浮碧樓]이다. 최승대는 옛날에는 봉화대로 이용하였다 한다.
부벽루는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 남원 광한루와 함께 우리나라 사대루(四大樓)로 역사적 명소이다.
이 사진은 작가 미상으로 1947년경에 촬영된 것으로 희귀한 흑백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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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남도 대동군 출신,가곡 '황혼의 노래', 작사.작곡가 김노현(金魯鉉 1920~1993)
김노현은 1920년 9월 20일, 치과의사인 아버지 김재조와 어머니 조재만의 3남 2녀중 장남으로 평양에서 태어나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평양 숭실전문학교와 현재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전신인 경성치전을 졸업한 치과의사로 유복한 집안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숭실중학교 재학시절 부터 노래를 잘 불러서 음악가로서의 꿈을 키우면서 성악가 박정원과 숭실전문 교수 루스부인과 성악가 일본인 교수로 부터 개인지도를 받았고 중2때부터 작곡가 김동진에게 바이올린을 개인지도 받았으며, 일본 무사시노 음악학교에 입학원서를 냈지만,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서 부친의 모교인 경성치전에 입학을 했다.
총학생회장, 기독학생회장, 음악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일제에 대항하는 학생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분류되어 감시를 받던중 붙잡혀 1년간 감옥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부친의 반대로 성악가의 꿈을 접고 대학 졸업후 치과병원을 개업하지만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제1회 독창회'(1949년 1월)를 개최하였고 '한국 성가 순례단' 단장(1950년 1월)을 역임했다.
아울러 <칼멘>(1960년 2월)에서 에스카 미엘로 역을, <마루타> (1961년 1월)에서 투룬켓 역을 맡기도 했다. 또한 '한국 성가 순례단' 일본 순회연주(1961년 12월), <일트로바토테>( 63년 10월)에서 헬란도 역을 맡았다.
집안의 반대로 치과의사가 되었지만, 평생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음악에 대한 일이라면 병원 문을 닫고 참석했다는 일화는,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느끼게 한다.
53세가 되던 1973년에 경희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김동진교수의 지도로 작곡을 전공,석사학위를 받았고(1975년 3월), 미국 캘리포니아 신학대학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1979년 11월).
실향민인 그는 울적하고 고향 생각이 사무칠 때마다 찾아간 부여에서 고향의 위안을 느겼을 것이다. 낙화암과 고란사 절벽 밑으로 흐르는 백마강을 바라보면서, 늘 대동강과 부벽루, 청루벽, 능라도 반월섬에서 놀며 보냈던 어린 시절을 .떠 올리며 향수를 달랬다는 실향민 김노현은 남쪽에 살면서도 한평생 고향을 얼마나 그리워했으랴.
1970년 어느 봄날 낙화암에 올라 백제가 멸망할 때 삼천궁녀가 꽃처럼 몸을 날려 백마강에 투신한 한서린 정경을 상상하다가
지금쯤 진달래 꽃피고 아지랑이 아롱지는 고향 생각이 떠올랐다
마침 해가 서쪽 수평선으로 잠기는 황혼녘이라 애수는 더욱 짙어만 갔다.
나이로 보아서도 인생의 황혼에 선 그로서는 고향이 더욱 그리워졌을 것이다.
황혼녘에 낙화암에 오른 시인은 그리움에 밀려드는 향수를 담아 ‘황혼의 노래’를 만들었다. 평남 대동군 고향의 봄을 사무치게 그리움으로 회상하며 어스름 해 지는 황혼녘, 그의 머릿속에는 다시는 가 볼 수 없는 꿈의 고향이 마음에 저리도록 애련한 그리움으로 담겨지고 있었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시정을 그대로 토해냈다.
그리고 곡을 붙였다.
악보를 정리한 곳은 전쟁후 살아온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169의 10 자택겸 병원(안성치과)에서였다.
황혼의 노래
-김노현 시, 김노현 곡 -김남희 노래
E
낙천주의자, 여행가,오토바이를 타고 낙화암과 백마강을 둘러보면서 향수를 달래 보곤 하던 김노현,
중후한 풍채(173cm - 73kg), 미성의 바리톤, 시원한 이마, 호인의 모습을 보여주던 그는 그렇게 그리던 고향을 가보지 못하고 1993년 4월 25일 당뇨병으로 세상을 떠났다(향년 73세).
* 테너 김남희 선생 : 2011.11.14. 새벽 5시 50분에 영면하시다.
첫댓글 그 옛날 아련한 추억들이
엊그제만 같은데
이제는 황혼의 노래를 듣게 되고
황혼의 노래가 좋아지고
낙조처럼 황혼을 즐기며 살아야 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가고 세월은 흘렀어도
주옥같은 노래는 남아 심금을 울립니다.
님도 가고
세월도 가도
님의 흔적은 남고...
어차피 한번은 부르고
가야하는 길
심금 울리면서 ㅎ
인생의 황혼녘에는...
명절 잘 지나셨지요.
황혼의 노래
이제는
주변에서 많이 느끼게 하는 가사들이 ...
이제 서서히 받아들여야겠지요?
황혼의 노래
잘 들었습니다 ~^^
해 넘어갈 땐
해지는 노래
해가 뜰때는
해뜨는 노래 ㅎ~
자연은 인간이 어찌하는 것이 아닐진데.
자연환경 망쳐 놓았다가
지금 지구촌엔 천벌이 쏟아지자나요. ㅉㅉㅉ
황혼의 노래 ! 참 오랫만에
듣네요. 귀에 익은 곡이라
그런지 저도 모르게 흥얼흥얼
따라 부르게 되네요.
작곡가 김노현님은 재능이 뛰어나신
분 이시군요. 고향이
평남이셨으니 얼마나 고향을
그리워 하셨을까 를 가히
짐작해 보네요.
올리신 글과 노래 잘 읽고
들으며 기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 꾸 벅 ) !
아익운아
바람온냐의 인사를 받다니요.
칭찬에 고래도 아닌데 ㅎ
춤을 추네요.
다재다능 김노현님
님의 절절한 향수가
저려오고 스며드는 황혼이오니다.
음악 노래 둏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