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계 이산해 영정 (鵝溪 李山海 影幀) 출처 국가 유산 국가유산포털
이산해 ( 李山海 1539∼1609)조선 중기 문신.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 본관은 한산(韓山). 1561년(명종 16) 식년문과에 급제, 이듬해 홍문관정자가 되었다. 그 뒤 부수찬·병조좌랑 등을 거쳐 사헌부집의·동부승지·대사성 등을 지냈다. 1578년(선조 11) 대사간으로 서인 윤두수(尹斗壽)·윤근수(尹根壽) 등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대사헌·우찬성·병조판서 등을 거쳐 1588년 우의정이 되었는데, 이때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라지자 북인의 영수로 정권을 잡았다. 1590년 영의정이 되었으며,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 3등에 녹훈되고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정철(鄭澈)이 건저문제(建儲問題)를 일으키자 아들 경전(慶全)으로 하여금 정철을 탄핵하게 하여 유배시켰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여 개성(開城)에 이르렀을 때 양사(兩司)로부터 나라를 그르치고 왜적을 침입하게 했다는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 그 뒤 풀려나와 1595년 영돈녕부사가 되었는데 북인이 다시 분당되자 이이첨(李爾贍)·정인홍(鄭仁弘) 등과 대북파가 되었다. 1599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1601년 다시 부원군에 봉해졌고, 선조가 죽자 원상(院相)으로 국정을 맡았다. 서화와 문장에 뛰어났으며, 선조조 문장팔가의 한 사람이다. 저서로 아계집(鵝溪集)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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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해(李山海:1539~1609)
선조22년 10월 28일 영의정 유전이 죽고, 이듬해 2월에 좌의정이던 52세 나이의 이산해가 영의정에 올랐다. 이산해의 본관은 한산(韓山), 고려말의 명신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오늘날의 경기도 김포에서 내자시정(內資寺正) 이지번(李之蕃)의 아들로 태어났다. 내자시정은 궁중의 식료품과 옷감을 관리하며, 연회를 맡는 관청의 정3품 관직이었다.
이산해는 숙부 이지함(李之?)에게서 배웠는데, 이지함은 곧 유명한 <토정비결>을 남긴 ‘이토정(李土亭)’ 으로 ‘토정’은 그의 아호였다.
명종16년(1561) 문과에 오른 이산해는 승문원에서 벼슬을 시작하였다. 특히 글씨가 뛰어났던 그는, 이듬해 홍문관정자가 되었을 때, 명종의 명령으로 경복궁 대액(大額)을 썼다. 이후 움트기 시작한 당파간의 갈등이 들어나기 시작하자 이산해는 시류에 휩쓸려 동인에 속하게 되었는데, 그가 여러 직위를 거쳐 사간원대사간에 올랐을 때, 그 무렵 서인의 우두머리였던 도승지 윤두수(尹斗壽)·경기도관찰사 윤근수(尹根壽)형제와 이들 형제의 조카인 이조좌랑 윤현(尹晛) 등, 이른바 서인의 3인방이라 할 수있었던 ‘3윤’을 탄핵하여 파직 시키니, 이 일로 이산해는 당파싸움의 시초가 된 중심인물로 떠 올라 눈길을 끌었다.
이후 대사헌·형조·이조·예조·병조의 판서, 대제학 등 요직을 거친 이산해는, 선조21년 11월 우의정에 올라,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라 질 때 북인의 영수가 되고, 이듬해 좌의정을 거쳐 곧 영의정에 이르렀는데, 그때 조정의 오랜 과제였던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이 풀려 그 공으로 광국공신3등에 책록 되고,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선조24년 이산해는 아들 이경전(李慶全)과 함께 서인의 영수 정철(鄭澈)이, 왕세자 책봉 문제를 제기하자 이를 탄핵, 강계로 유배시키는 또한번의 정변을 일으켜 주목을 받았다.
선조25년(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산해는 영의정으로 왕을 호종, 파천 중에 개성에 이르러 대간들로 부터, 나라를 그르치고 왜적을 맞게 하였다는 중신들의 탄핵을 받아 파직과 함께 평해에 귀양 보내지는 곤욕을 치렀다. 3년 뒤인 1595년 이산해는 풀려나 영돈녕부사로 복직 되어 대제학을 겸하고, 이때 북인이 다시 소북·대북으로 분당 되니, 그는 이이첨·정인홍 등과 어울려 대북파의 영수가 되고, 1600년(선조33) 1월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해 4월 곧 파직되고 말았는데, 이듬해 부원군 직위는 되돌려 받았다.
1608년 2월 초하루, 이산해를 아끼던 선조가 승하하자 그는 원상의 일원으로 국정에 참여하였다가 이듬해 8월 숨지니 나이 71세였다. 시호가 문충공으로 내려진 이산해의 묘소는 오늘날의 충청남도 보령군 주포면에 있다. 그는 저서로 <아계집(鵝溪集)>을 남겼다.
이산해가 갓 태어 났을때 숙부 이지함이 아이 우는 소리를 듣고 형 이지번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가 기특하여 우리 문호가 이로써 다시 흥할 것이오!” 했다. 과연 이산해는 다섯 살때 병품에 글씨를 써 신동 소리를 들었고, 열 세살 때 충청우도 향시에 나가 장원으로 뽑혔었다.
일찍이 어린 이산해가 밥먹기를 잊고 글 읽기에 몰두하니, 그를 가르치던 숙부 이지함이 아이의 몸이 상할까 염려하여 책을 덮고 밥먹기를 재촉했다. 이에 어린 이산해는 이런 시를 지어 이지함을 놀라게 했다.
『腹飢猶悶況心飢 배주리는 것 걱정이면 하물며 마음 주림이야/ 食遲猶悶況學遲 먹기 더딤이 걱정이면 하물며 공부 더딤이야/ 家貧尙有治心藥 집은 가난해도 마음 다스릴 약은 있사오니/ 須待靈臺月出時 모름지기 마음속에 달 뜰 때를 기다리소서.』배채우기 보다 마음 기르는 일이 더 급하고, 몸 상하면 약 있으니 염려 말라는 기막힌 시구였다.
선조임금이 일찍이 몸이 허약해 보이는 이산해를 보고 칭찬하기를 “말은 입에서 나오지 못할 것 같고, 몸은 옷을 이겨내지 못 할 것 같으나 한 뭉치의 참된 기운이 속에 차고 쌓여서 바라보면 존경심이 저절로 생긴다” 하였다. 이산해는 인망이 높아 젊은 나이에 재상의 반열에 올랐으나 물욕이 없어 집 한칸, 밭 한자리도 마련하지 못했다. 항상 값싸고 허름한 셋집을 얻어 살았으니 쓸쓸하고 곤궁하기가 이를데 없었다.
거처에 손님이 찾아오면 깔아 줄 방석이 없어 말 안장을 내 놓기도 하였고, 비가 내리는 날이면 빗물이 떨어지지 않는 곳을 가려 자주 옮겨 앉았다. 뿐만 아니라 헤진 옷차림과 거친 음식으로 끼니를 겨우 때우면서도 항상 태연하고 의젓하였다. 그러나 자주 당쟁에 앞섰고 정승자리에서 그는 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의 오라비로 말썽 많던 김공량(金公諒)을 가까이 하여, 이이·유성룡 등과 멀어져 정적이 되고 말았다.
이산해의 장자 이경백(李慶伯)은 승문원부정자, 차남 이경전은 형조판서였다. 선조·광해년간 두 번 영의정에 오른 명상 이덕형이 이산해의 사위였고, 임진란 극복에 공을 세운 좌의정 김응남(金應南)이 이산해의 매부가 되니, 그는 한 시대 일문(一門) 3정승을 이룬 셈이 되었다.
[출처] 이산해(李山海:1539~1609)-셋집을 얻어 살았던 영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