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7: 6 허락이요 - 고전 7: 9 절제할 수 없거든
고전 7: 6 허락이요 -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니라. (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권도요 명령은 아니라 )
바울이 결혼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은 명령이 아니고 허용하는 것뿐이다. 그는 이미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다’고 말했고 또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한다’고 말한다(8절).
1]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권도)이요 명령은 아니니라.
'허락'(권도, 슁그노멘)이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는 본 절에만 나오는 고대 단어로 '용서' 또는 '양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Robertson).
바울은 교회 공동체 속에서 같은 동료로서 자기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지 종속관계 속에서 명령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곧 공동체의 질서를 추구하는 그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권도'가 무엇에 대한 것인가 하는 문제는 쉽지 않다. 그것은 '이 말을 함'이라는 것이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이에 대한 견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하나는 앞부분에 서술한
모든 부부 생활에 대한 의무를 지시할 수도 있다(Barrett).
(2) 다른 하나는
다음 절에 기록된 것과 같이 결혼이냐 독신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 그가 제시하는 견해일 수도 있다(Farrar).
전자를 주장하는 자는 구체적으로는 5절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기도하기 위하여 분방하는 것이나 잠시 후에 서로 다시 합하는 것이 명령이 아니요, 권도라는 것이다.
후자를 주장하는 자는 자신과 같이 독신으로 지내기를 원하는 바울의 소신(所信)이 권도이지 명령이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다시 말해서 부부 생활에 대한 명령은 모두 강조적인 요구라고 할 수 있으나 결혼에 대한 견해, 즉 결혼할 것이냐? 독신으로 살 것이냐에 대한 견해는 권도라는 주장이다.
사실 성경에 제시된 결혼의 질서를 생각해 볼 때 부부에 대한 의무를 단순한 권고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따라서 본 절에 제시된 그의 권도는 후자를 향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
그는 결혼한 사람의 의무에 대하여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Morris).
그러나 바울이 자신의 주장에 대한 겸손의 표현으로 '권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고 가정했을 때 '이 말'은 바울이 제시한 모든 복음적 내용을 지시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고전 7: 7 하나님게 받은 자기의 은사 -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
그는 분명히 독신의 유익을 말하고 있다. 물론 결혼이 두렵다거나 귀찮아서가 아니고, 또 자유 분방하게 살기 위해서도 아니다.
독신이 유익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일들에 전념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독신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가 있어야 가능하다(마 10: 10-12).
1]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이것이야말로 결코 명령이 될 수 없는 '권고'요 '하나의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또한 당시의 박해와 시련 속에서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고대하는 심각한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구절이다.
본 절의 문자적인 뜻은 '나와 같이 결혼하지 않은 사람으로 있기를 바란다.'는 간절한 요청이지만 광의적인 의미에서 그 뜻은 다음 구문과 연결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2]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각 사람은 하나님께서 각자 자신들에게 베풀어 주신 은사를 따라 결혼하거나 독신 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이는 바울과 같은 독신의 삶이 하나님께서 주신 독특한 은사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은사를 받지 못한 자는 결혼해야 한다. 그렇다고 결혼의 은사를 받은 자만 결혼을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결혼이나 독신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시는 선물로서 하나님 편에서 그것은 언제나 동일한 은사이다. 결혼이 완전한 결혼으로서 육체적인 욕구가 충족되어야 하듯이 독신도 완전하고 성결한 삶으로서 영위되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떠한 삶의 형태를 취하든지 음욕의 유혹으로부터 그들의 거룩한 신분을 보존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3]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한 사람은 결혼이라는 은사를 통해서 또 다른 사람은 독신이라는 은사를 통해서 순결한 삶을 유지할 때 비로소 '바울과 같이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독신의 삶이 순결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타락한 고린도 교회의 상황 속에서 ‘나와 같기를 바란다.’라고 말한 바울의 표현은 결혼이냐 독신이냐 하는 선택의 문제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실제적인 삶에서 음란한 유혹으로부터 순결을 유지했던 삶의 모범을 본받으라고 하는 말이다.
따라서 결혼한 자들이 바울을 본받는다는 것은 무질서한 방종으로부터 결혼의 순결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바울은 말한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바울이 결혼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은 명령이 아니고 용인하는 것뿐이다. ‘허락(권도)’이라는 원어는 ‘허용, 용인’이라는 뜻이다.
그는 이미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다’고 말했다. 또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한다.’고 말한다(8절). 이 말씀에서 그는 분명히 독신(獨身)의 유익을 말하고 있다.
물론 결혼이 두렵다거나 귀찮아서가 아니고, 또 자유분방하게 살기 위해서도 아니다. 독신이 유익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일들에 전념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독신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가 있어야 가능하다.
* 마 10: 10-12 – 10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11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12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고전 7: 8 그냥 지내는 것 -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
바울은 결혼하지 않은 자들이나 과부들에게 “나와 같이 그냥[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1]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본 절의 '나와 같이'라는 표현은 앞 절의 광의적인 의미와는 달리 보다 개인적인 의미로서 독신의 모든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제한된다.
그의 요구는 앞 절과 같은 적극적인 요청이 아니다.
2]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그는 단지 그들이 현재 있는 상태 그대로 있으라고 충고한다.
혹자는 이처럼 그대로 있기를 바라는 바울의 위치를 홀아비와 같은 상황이라고 이해하기도 한다(Barrett).
이에 대한 근거로는
(1) 결혼이 유대인들에게는 의무적인 규례였다.
* 창 2: 18-24 –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 그가 한때 산헤드린의 회원으로서 투표를 하였다.
* 행 26: 10 -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만약 그가 실제 산헤드린의 회원이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결혼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산헤드린의 회원은 반드시 결혼을 한 자들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3) 또한 본 절에서
'혼인하지 아니한 자'(*, 아가모이스)는 남성 복수로서 '과부'(*, 케라이스)라는 말과 동격이며 그 뜻은 '홀아비'라는 주장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홀아비들과 과부들에게 나와 같이 그냥 있으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는 결혼한 적이 있는 홀아비이다.
그러나 '아가모스'(*)는 헬라어의 관용적인 특성상 남녀 모두를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이러한 해석은 불가능하다.
또한 '아가모스'는 32절에서 단순히 '장가가지 아니한 사람'을 뜻하는 말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 '홀아비'라는 해석은 더욱 불가능하다.
혹자는 이러한 난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바울이 결혼했으나 지금은 결혼하지 않은 자와 같은 상태에 있다는 현재적 의미를 강조하기도 한다(Farrar).
그는 바울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루터등과 같이 상처(喪妻)한 이후에 혼자 지내게 되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초대 교부들(Tertullian, Jerome)과 칼뱅은 이와 같은 바울의 결혼설에 대하여 단호히 부정한다. 칼뱅(Calvin)은 만약 그가 결혼한 사람이었다면, 아내와 자식들을 아무렇게나 팽개쳐 놓고서 어떻게 부부에 대한 의무와 가정에 대한 질서와 사랑을 그토록 고조된 표현으로 강조할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한다.
바울이 율법주의자들과 같이 스스로는 질 수 없는 법들을 이웃들에게만 강요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고전 7: 9 절제할 수 없거든 -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
그러나 그는 즉시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고 말한다. 절제할 수 없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낫다. 사람이 절제하지 못하면 범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육신의 욕구는 결혼을 통해 정당하게 해소되는 것이 좋다(딤전 5: 14).
1]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바울은 성적인 욕구 그 자체를 금욕주의자들과 같이 금지하지 않는다(Morris).
그렇다고 해서 결혼 그 자체를 욕망의 도피처로 삼지도 않는다.
그는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를 최대한으로 존중한다.
2]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나으니라.'의 헬라어 '크레잎톤'(*)은 독신보다 결혼이 더 낫다거나, 결혼보다 독신이 더 낫다. 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은사의 분량에 순종하는 것이 제일 낫다는 의미이다.
(1) '절제한다.'는 것과 '불같이 탄다.'는 말은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절제'(*, 엥크라튜온타이)는 '스스로를 제어하는 것'을 의미한다.
'불같이 타는 것'은 실제적인 욕망에는 굴복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내적으로는 욕망이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이 솟아오르는 욕망을 바울과 같이 절제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은사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2) 바울은 말한다.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사람은 감정과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면 범죄할 수 있다. 연약한 감정은 결혼을 통해 정당하게 해소되는 것이 좋다.
* 딤전 5: 14 -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결혼의 한 목적은 음행을 방지하는 데 있다.
또 결혼한 자는 부부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절제의 은사를 주신 자라면 독신으로 하나님의 일들에 전념하며 주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절제하지 못하여 시험해 떨어지며 죄를 범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