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 하린 (시인)
35. 재발견 기법으로 상상하며 시 쓰기
@ 재발견 기법이란?
재발견 기법은 필자의 저서 「시클」에서 제시한 시 쓰기 방법 중 하나다. ‘새로운 시’를 계속 쓸 수 있는 노하우로 제시한 방법인데, 효과가 좋아 많은 사람들이 실천하고 있다. 방법은 간단하다. 시를 쓸 때 가제(假題, 임시로 붙여 놓은 제목)에 꼭 ‘재발견’이란 단어를 붙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시를 쓴다고 치자. 아버지는 너무나 친숙한 존재이기 때문에 새로운 시를 쓰기 정말 어렵다. 그럴 때 ‘아버지의 재발견’이란 가제를 붙이고 시를 쓰게 되면 ‘재발견’이란 단어 때문에 아버지의 새로운 면이나 색다른 면을 자꾸 끄집어내게 되어, 신선한 시를 쓸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된다.
이 기법의 중요한 효과는 익숙한 것을 새롭게 인식하게 도와준다는 점이다. 여기에 상상을 가미해보자. 다양한 시적 정황(상황)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다. 제목을 ‘구름의 재발견’으로 하고 시를 쓴다고 했을 때, 어머니의 고단한 삶과 결합시켜 쓰고 싶을 때 끝없이 인내만 하고 있는 어머니의 상황을 떠올리는 것이다. 눈물조차 흘리지 않는 ‘건조한 삶’을 이미지화시키고 싶다면 ‘어머니의 머릿속엔 건조한 구름만 산다/ 고통에 흠뻑 젖어 있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라는 문장으로 시를 시작할 수 있다. 만약 노모가 치매에 걸린 상황으로 쓴다면 ‘어머니의 머릿속엔 지독한 먹구름이 팽창하고 있다/ 기억을 먹고 끝없이 자라는 먹구름’이란 문장으로 시를 시작할 수 있다.
필자의 시를 바탕으로 그것이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냉장고의 재발견 / 하린
냉장고에겐 잘못이 없지 소주 2병과 500원짜리 싸구려 두부를 삼켰을 뿐이야 어떤 숨소리가 그 안에 기거하고 있었는지 아무도 몰라, 또 저러다 말겠지 열림과 닫힘의 사생활을 용인하는 순간 부글거리는 얼굴이 반복되는 것인데, 아버지는 견딤보다 숙성을 좋아했고 첨가물들의 유통기한은 징글맞게 길어져서, 끝내 어머니의 오장육부는 탈 나고 말았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어머니는 재빨리 아버지의 반성을 냉장실에, 오지랖을 냉동실에 집어넣고 전원을 뽑아버렸지
너 때문에 내가 저 인간하고 살았던 거 알제, 내게 던져진 마지막 말은 누가 책임지라고…
지금쯤 아버지는 지하 저장고에서 공동체를 꿈꾸고 있는지 몰라, 무심과 무능이 더욱 견고해질 때까지 흙의 충고를 방부제처럼 삼키고 있는지도 몰라, 그런데 내 잠꼬대가 아버지를 닮았다고 아내가 말하고 있어, 이미 닮아 있다는 건 나도 오래지 않아 냉장고를 사랑하게 될 확률이 높다는 건데, 아버지를 제일 먼저 떠난 것이 형도 누나도 아닌 냉장고였다고 믿고 싶었는데, 내가 이렇게 효율이 낮은 인간이었다니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떻게 각자의 독방을 견뎌냈을까
아, 독설의 슬픔이여! 밀폐의 감정이여! 나에게 연결된 아버지를 몽땅 뽑아다오, 난 지금 냉장고에게로 다가가는 중이다 아버지 몰래 소주를 마시고 다시 채워 넣던 어머니처럼… ― 『1초 동안의 긴 고백』, 문학수첩, 2019.
1단계 - 스스로 점검하기 – 메시지 분명히 하기+내 시만의 장점 찾기
이 시의 밑바탕에는 암울한 가족사가 흐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진지함만 있을 뿐 신선함을 가지긴 힘들다. 그래서 필자는 재발견 기법을 활용해 시를 쓰기로 했다. 냉장고를 재발견하게 되면 냉장고에 넣을 수 없는 것도 넣을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탄생한 표현이 “어머니는 재빨리 아버지의 반성을 냉장실에, 오지랖을 냉동실에 집어넣고 전원을 뽑아버렸지”이다. 이런 상상으로 인해 평범한 내용의 시가 개별화를 획득하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2단계 - 객관적 상관물(현상)을 찾기+관찰과 조사 정밀하게 하기
냉장실과 냉동실에 아버지의 반성과 아버지의 오지랖이 각각 들어갔으니 냉장고는 어머니의 심리와 아버지의 존재성을 동시에 암시하는 존재다. 그렇게 냉장고가 객관적 상관물의 역할을 수행하게 했다. 냉장고는 가족 모두의 습관과 식욕과 식탐과 허기진 마음을 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냉장고가 가진 특성을 잘 관찰한 후 그 특성을 적용해 객관적 상관물이 되도록 했다.
‘열림과 닫힘의 사생활’ ‘숙성’ ‘첨가물들의 유통기한’ ‘탈 나다’ ‘전원을 뽑다’ ‘방부제’ ‘효율이 낮은 인간’ 등이 바로 그런 과정을 통해 얻어진 단어나 구절들이다.
3단계 - 확장하기 – 상상적 체험을 섬세하게 극적으로 하기
이 시에 적용된 상상적 체험은 아버지, 어머니, 화자 모두와 관련이 있다. ‘무심과 무능’만을 보여주었던 아버지를 상상했고, 그런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소주를 몰래 마시고 채워 넣던 어머니의 마음을 상상했다. 그리고 아버지를 벗어나고픈 심리를 안고 살아가면서도 어느 순간 아버지를 닮아버린 화자의 상황을 상상했다.
* 또 다른 예문
백색의 재발견 / 구애영
밤새 나 몰래 유령들이 다녀간 걸까 식탁에는 먹다 남은 식빵이 반 봉지가 있고 커피포트의 물 끓는 소리, 유리창 두드리는 소리가 여운처럼 떠돈다 냉장고는 애써 증명한다 누가 와서 위장을 다 비우고 갔는지 가장 다정했던 사람이 떠날 때 사람은 왜 허기가 지는지
나는 나를 의심한다 내 몸속에 백색이 우글거린다고 의사는 말했다 불면증도 강박증도 아닌 백색, 나는 나와 백색 사이의 연관성을 찾는다 잠들기 전 거북이가 뭍으로 걸어 나와 흰 알들을 몽땅 쏟아낸 장면을 TV에서 본 그 기억밖에 없는데
식탁 위에 덩그러니 사진 하나가 놓여있다 처음 보는 얼굴처럼 낯설고 마지막에 본 얼굴처럼 아리다 색깔도 없고 기척도 없이 소품처럼 놓여있는 사람, 나이었다가 또 다른 나이었다가, 못난 사람 못난 사람 혀끝에서 빠져나온 단어들이 스멀스멀 흰 벽으로 스며들 때
쏟아지는 은하의 한가운데였다
스며든다는 건 손에 쥔 것들의 색깔을 지우는 것이라 했던가 수백 번 수천 변 날 세운 것들이 아직 거기 남아서 꿈틀대고 있다 여전히 내가 허기가 진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적요나 적막, 고요 따위는 분명 백색이다 - 『나의 첫 사과나무에 대한 사과』, 고요아침, 2020.
신발의 재발견 / 이정원
1. 신은 완성되지 않았고, 발은 여전히 자라고 있었다 벌어진 생각들은 각자의 방향으로 모아져 갔다 신이 언제부터 발의 보호대가 되었을까 신의 품질보증서는 발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신과 발의 관계성과 유용성에 대하여 증명하려 노력 했지만 의존성을 찾아내는데 그쳤다 신은 무슨 색일까 레드, 그린, 블루, 블랙, 화이트... 또 발은 무슨 색일까 신의 색에 발을 맞추는 것이 옳을까 발의 색에 신을 맞추는 것이 좋을까 난해한 철학적 질문은 유보하지만 오랫동안 바라보고 가까이 하면 색과 모양이 바뀔 것 같은 예감이 든다
2. 토방으로 나가 마루 밑에서 오래된 신발 하나를 꺼냈다 그가 들어 올려진다 그의 흔적들이 들어 올려진다 찢어진 그의 신이 올려진다 신발 바닥을 돋보기로 확대해 보았다 신발 앞쪽 어두운 곳에 숨어있던 알들이 발각되었다 저 알들은 지금껏 무엇을 먹고 살아 왔을까 떠나버린 그의 흔적이 마음를 마구 휘젓다가 발까지 내려가 먹이가 되었을까 아니면 늘어진 넥타이를 매고 이리저리 일자리를 찾아 굴러다니느라 맺힌 발바닥의 혈흔이 먹이로 변했을까 그는 신발을 부여안고 꺼억꺼억 울어댄다
3. 배율을 높이자 알속에서는 일곱 살 소년이 아버지의 상여를 절룩거리며 따라가고 있다 신발도 신지 않은 채... - 2021년 42회 근로자문학제 수상작
- 출처 :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더푸른, 2021.09)
* 하린 시인 1971년 전남 영광 출생.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 학위. 1998년 〈광주매일〉신춘문예 시 당선, 2008년 《시인세계》 등단.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 『1초 동안의 긴 고백』. 연구서 『정진규 산문시 연구』 시 창작 안내서 『시클』 시 창작 제안서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이것만 알면 당신도 현대 시조를 쓸 수 있다』 청마문학상(2011), 송수권시문학상(2015), 한국해양문학상(2016),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2020) 수상. 현재 중앙대 문화예술대학원 전문가과정 시 창작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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