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예전에 본까페에 올린 글을 다시 올립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왕 정권을 잡은 이상 박정권이 해야 할-즉 박정권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해야 할- 역사적 과제는 크게 5가지였습니다.
먼저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되살리는 일입니다. 전후복구와 경제안정이지요.
둘째 민주적 가치를 회복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셋째 전쟁으로 빚어진 남북의 적대감을 씻고 새로운 통일방안을 마련하는 일입니다.
네번째로 외세에 의한 분단이 전쟁의 외적 원인이었던 만큼 자주적인 국가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자주성의 회복이겠지요.
마지막으로 한국전쟁을 통해 반공애국투사로 변신해 우리 사회를 장악한 친일세력들을 척결함으로써 이승만 정권, 장면정권이 남겨놓은 친일잔재를 없애고 건강한 출발을 해야 했습니다.
박정희는 이 모든 문제에서 경제 문제를 빼고는 빵점-아니 마이너스-이었습니다. 경제문제도 사실 따지고 보면 박정희의 공이라 할 수 없고 경제성장의 이면에 감춰진 어두운 그림자가 경제성장의 그래프보다 더 길게 늘여져 있었습니다.
이른바 고도성장에 대해
첫째 박정희 집권 시기 우리가 경제분야에서 고도성장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같이 검토되어야 하겠지요. 하나는 경제성장의 진정한 동력은 무엇이었나, 정말 '조국근대화의 위대한 기수'인 박정희의 지도력 때문인가 하는 점입니다. 또 하나는 박정희식 경제개발이 정말 바람직한 것이었나, 성장만큼 부정적인 유산을 남겨 놓았다면 성장만 놓고 평가할 것이 아니라 그 부정적 측면을 함께 평가해야 공정하지 않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점이 중요합니다.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비슷한 것은 사실 2공화국 때 있었습니다. 다만 장면정권은 총투자액 400억원 규모의 '국토건설사업'이나 경제개발계획 등을 수립해 놓았지만, 민주당 내의 구파(윤보선계)와 신파(장면계)의 갈등으로 미처 추진하지 못한 거죠. 미국 또한 남한을 아시아 반공국가의 자본주의 쇼윈도우(전시장)로 만들기 위해 경제 지원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박정희의 경제개발. 조국근대화는 사실 이것의 연장선이었습니다.
박정권이 경제개발계획을 준비하면서 맞닥뜨린 문제는 공장을 짓고 원료를 수입하는 등 경제개발의 착수금을 어떻게 마련하느냐였습니다. 그래서 졸속적으로 이루어진 게 한일회담과 한일협정이었고, 이때 한일협정을 통해 일본측이 제공한 경제협력기금(우리측은 일제 식민지 지배에 따른 피해보상금이라는 의미에서 대일청구권자금이라고 부르지만, 일본측은 자선의 의미가 강한 경제협력기금으로 부르기를 고집했습니다)이 경제성장의 착수금이 된 셈입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박정권은 과거 일제가 저지른 범죄와 민중의 피해에 대한 최소한의 조사도 하지 않은 채 30억달러의 유무상원조를 받는 것으로 36년의 피해보상을 서둘러 매듭지은 것입니다. 그 결과 지금도 정신대(일본군성노예)문제, 원폭피해자, 재일동포 지위 등 단 한가지도 해결되지 않았고 지금까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일본정부는 한일간의 '과거사'는 한일협정에서 다 해결했다고 오리발을 내밀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때 한일협정의 성사를 댓가로 김종필은 거액의 정치자금을 일본으로부터 받아 이 돈이 공화당 창당자금으로 되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때 한일협정은 박정권이 과단성 있게 잘한 일이었다고 추켜세웁니다. 이 돈이 있었기에 경제성장이 가능했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견해입니다. 일제 36년의 지배에 따른 민중의 피해는 덮어둔 채 몇 푼의 돈을 받는 데 급급했고, 게다가 공화당창당자금으로 뒷돈을 받는 작태를 벌이면서 한일협정을 체결해 숱한 문제점을 남긴 것이야말로 한일회담에 임하는 박정권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박정희가 추진한 경제성장에는 월남전과 중동해외인력 취업이라는 성장요인이 있습니다. 월남전은 쉽게 말해 프랑스-일본-미국의 식민지 상태를 벗어나려는 베트남민중의 민족해방투쟁사입니다. 여기에 미군과 한국군이 침략자로서 들어간 것입니다. 아무리 돈이 탐나더라도 일제 식민지의 고통을 겪은 우리가 '미국의 꼬붕'으로 우리 젊은이들의 피를 팔면서 남의 나라 독립운동을 진압하러 가서야 되겠습니까. 더욱이 이때 간 한국인 사병들은 미국으로부터 미국의 직업군인에 준하는 고액의 봉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이들의 돈을 가로채고 보통의 한국군이 받는 일반 봉급-봉급이랄 것도 없습니다- 수준만 주었죠. 쉽게 말해 정부가 우리 군인들한테 가는 봉급의 대부분을 가로챈 것입니다. 그래도 되는 걸까요? 이게 탁월한 지도력인가요?
박정희의 경제'철학'-경제성장론의 핵심은 국가(정부)가 강력한 리더쉽을 발휘해 경제틀을 짜고 특정기업에 특혜를 주어 육성.지원하는 국가주도의 경제성장론, 수출중심주의입니다. 흔히 개발독재-경제성장의 효율성을 위해 필요하다면 강력한 권력이 독재를 행사하는 것도 정당화되는-라고 하는데 최근 중국이 이를 주목하고 있답니다. 배울 게 따로 있지 참 갑갑한 노릇입니다.
박정희의 개발독재는 경제성장의 대가로 일인독재의 기반 위에 재벌의 정경유착과 부실경영, 한국경제의 미일의존성, 부와 소득의 불균형, 농업의 희생, 노동자들의 인간적 권리 말살 등 지금까지 심각한 후유증을 낳았습니다. 두어가지만 볼까요. 국가의 비호 속에 자란 재벌은 한편으로 국가의 지원 속에 성장을 거듭하면서 그 대가로 막대한 정치자금을 정부에 갖다 바쳤습니다. 보기를 들어 정부가 특정 사업을 설정하고 특정 기업에 사업권을 넘겨주거나, 은행에 압력을 가해 특정 기업에 거액의 융자혜택을 줍니다. 그 기업은 그 대가로 거액의 뇌물(리베이트)를 정치자금으로 헌납합니다. 서로 공생관계이지요. 이를 정경유착이라고 합니다.
자칭 박정희의 신도라도 하는 전 중앙정보부장(국가정보원장) 이후락은 '떡을 만지다보면 떡고물이 묻기 마련'이라고 변명을 했지만 말입니다. 기업은 거액의 정치자금 때문에 공사비를 적게 들이다보니 부실공사가 나오는 거지요. 결코 우리 기술 탓만은 아닙니다.
아울러 박정권은 저임금정책 장시간노동정책을 지지하고 노동자의 인간의 권리는 일체 박탈해-노동자가 자신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 권리조차 없었습니다-, 이 덕택에 기업은 노동자들의 피를 빨아먹으면서 성장했습니다. 70년대 한국 노동자들이 어떠한 상태에 살았는지는 7,80년대에 나온 노동자들의 수기 특히 전태일의 일기가 잘 말해 줍니다.
한번 읽어보십시오. 1987년 7,8월 노동자파업 때 가장 많이 나온 요구조건 중 하나가 '노동자도 사람이다. 머리를 기르게 해달라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재벌 때문에 겪는 국가적 위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너무나 이들은 정치와 결합되어 있어, 구조조정이 불가능한 실정입니다. 다 박정희가 부려놓은 씨앗들이 자라난 거죠. 김영삼만 탓해서는 안됩니다.
부동산투기열풍은 거액의 정치자금을 마련하고 정치인들의 치부수단이었습니다. 개발지역을 권력자들은 미리 알고 싼 값에 사들인 후 개발지역 발표를 해 땅값이 오르면 크게 이익을 남기는 거죠. 이런 이권 챙기기가 권력 차원에서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진 게 박정희 정권 때입니다.
새마을운동은 단순히 경제적 측면에서만 바라보면 큰일납니다. 오히려 박정희를 지지하기 위해지역적 기반을 농촌에 구하고 정치적으로 낙후한 농민들을 동원, 통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마치 1930년대 농촌진흥운동이나 신촌운동 그리고 농촌중견인물양성책이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농촌주택의 시멘트화는 당시 시멘트수출이 부진하자 내수시장(농촌)에서 시멘트 소비를 확보하기 위한 것 아니었을까요. 무엇보다 농촌이 살기 좋아졌다면, 왜 수많은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야 했고, 농민운동은 박정희 때 타오르기 시작했을까요.
새마을운동은 그 성과-농미삶의 향상보다는-사업 그 자체가 대내외의 거대한 선전수단이었습다. 새마을운동은 아직 연구가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이런 정도의 추측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무엇보다도 박정희는 안보와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인간의 모든 가치가 유보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을 오직 빵만으로 사는 동물적 존재로 돌려버렸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근로기준법을 마련했지만, 실제 근로기준법의 핵심인 8시간 노동제나 노동3권(단체결성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국가를 위해 산업전사로서 묵묵히 일만 하라는 것이죠. 어느 노동자 시인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래 우리는 산업전사다 산업현장에서 싸우다 죽으라는 존재이다. 박정희가 민주화를 훼손시켰지만 경제성장의 공로는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인간의 모든 가치를 희생해도 좋은가라는 논쟁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그가 이루어놓은 경제성장에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굴욕적인 한일협정이, 저임금 장시간 중노동에 항의하다 무참히 짓밟힌 노동자의 피와 눈물이 새겨져 있습니다. 고도성장의 금자탑 아래 월남전에서 쓰러져간 젊은이들의 피가 흥건이 고여있고, 고엽제 휴유증에 시달리는 수만명의 참전용사의 신음이 배여 있습니다.
한국 경제의 성장을 얘기한다면 그 공로는 마땅이 이들에게 돌려져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조차 받지 못한 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는 박정희에게만 비춰지고 있습니다. 이게 잘못된 영웅주의사관이죠.
박정희와 친일파 문제
이제 일반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박정희의 부정적 유산-1인독재권력 등-을 살펴보기로 하지요.
박정희의 집권은 친일파들이 권력의 심장부에 영구히 자리잡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박정희의 일제시기 행적과 맞물려 일제 친일잔재 세력은 그의 품안에서 조국근대화의 기수로 때로는 박정희 신도로 자처하면서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는 보호막을 안정적으로 갖게 되었습니다(물론 친일파가 살아남아 권력을 쥐게된 연원은 미국과 이승만정권에게 있습니다만). 그리고 이들은 친미파로 변신하고 자주국가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성과 주체성 마저 훼손시켰습니다.
이들은 일제시기 비민주적인 악법과 다양한 식민지적 제도와 관행을 그대로 남겨두었고, 특히 친일문제를 누가 거론하면 알게 모르게 탄압을 해 과거 역사를 제대로 알고 바로잡는 계기를 원척적으로 봉쇄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역사학계에서 친일파연구는 거의 자유롭지 못합니다. 직장에서 짤릴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식민지 잔재는 박정희 때 오히려 굳어지면서도 친일문제는 망각되었고, 우리 사회의 최소한의 역사의식과 가치관 마저 대중적으로 확립될 수 없었습니다.
친일파들은 일제 시기 자신의 부일협력을 '계몽운동과 문명개화의 선구자의 고뇌'로 정당화했습니다. 해방 후 이승만분단독재정권에 충성한 것과 6.25전쟁에서 '타공전선'에서 활동한 것을 두고 자신을 건국운동의 애국지사, 반공애국투사로 자화자찬하기를 마지 않습니다. 그리고 박정희정권에 빌붙은 것을 조국근대화의 기수로 미화하고 있죠.
나아가 이들은 자신의 닮은꼴인 박정희를 최종적으로 부활.기념시킴으로써 역사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역사를 왜곡하는 공개적인 거대한 사기극입니다. 최근에는 자신들을 아예 21세기 미래의 민족지도자상으로 각인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의 경제발전을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근대화(황제께서 탁월해 자주적으로 근대화의 서막을 열었다)-->일제의 식민지근대화(일제가 근대화를 시켜줬다)-->개발독재/근대화혁명(급속한 경제살리기를 위해서는 독재도 때론 용인될 수 있다. 박정희는 독재자라기 보다 혁명가다)' 라는 기괴한 역사발전론으로 연결됩니다.
박정희평가는 이러한 노선에 있었던, 늘 양지만을 찾아다닌 이 인간군상들의 삶을 긍정할 것인가, 부정할 것인가 하는 20세기 한국의 아마겟돈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승리한 쪽이 21세기 우리 민족의 주도적인 가치로 자리잡을 것입니다.
유신체제
독재정권은 나쁘다는 게 상식이니까-요즘같아서는 정말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약간 다른 각도에서 유신정권을 평가해 보기로 하죠.
먼저 유신체제를 성립시킨 시월유신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시월유신은 박정희 일인영구독재를 위해 남북통일문제를 최악으로 활용한 희대의 사기극이었습니다. 을 박정희는 종신대통령을 해야 겠는데 명분이 없자, 남북통일문제를 이용했습니다.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책임자인 이후락을 김일성에게 밀사로 보내 그후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합니다. 온 국민이 열광했습니다. 드디어 남북의 지도자가 무력대결을 버리고 평화적. 자주적. 민족대단결의 통일의 물꼬를 틔었다고 기뻐했습니다. 노벨평화상은 문제도 아니었지요. 그러나 3달 후 박정희는 통일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10월유신을 단행합니다. 북한에서도 김일성은 주석제를 실시합니다.
통일은 철저하게 남북지도자의 권력 유지에 이용되었고, 국민은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봉건시대 왕보다 훨씬 강력한 권한을 가진 왕이 남한에서 탄생합니다.-사실입니다. 박정희는 왕 이상이었습니다. 그후 남북은 오히려 7.4공동선언이 무색하게 적대적인 경쟁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박정희는 반통일주의자였습니다.
시월유신은 일본제국주의의 군사적 국가주의(파시즘)의 1970년대 한국식 업그레이드판이었습니다. 이시기 박정희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여러 정책은 그 기본성격이 일본제국주의 시절에 그가 훈련받은 군국주의적(파시즘적) 사고방식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박정희는 한일회담을 전후해 일본인들에게 자신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에 감동받은 바가 많으며 한국도 이를 모델로 '제2의 메이지유신'을 하는 심정으로 국가를 일으키겠다고 해 일본의 노정객들을 흐뭇하게 했습니다. 일본은 한반도에서 떠났지만 그들이 뿌려놓은 씨앗이 열매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시월유신으로 실현되었습니다.
박정희의 국가주의와 총체적 후진성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정도가 아니라 군국주의.국가주의로 우리 사회를 재조직해 총체적인 후진성을 구조화시켰습니다. 우리는 조선 중세봉건왕조를 무너뜨리지 못하고, 즉 시민혁명을 거치지 못한 채 일제의 식민지로 노예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해방이 되어도 민주주의 훈련을 받지 못해 제대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어려웠죠. 해방 직후의 정치적 혼란과 이승만독재정권과 전쟁, 짧았던 장면정권을 거쳐 그나마 박정권 때라도 차근하게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정반대로 갔습니다. 박정희는 일제시기 제국주의 군인정신에 입각해 일제의 국가주의를 자신의 독재를 유지하는데 철저하게 적용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정치적 후진성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기초가 되는 개인의 존엄성가 자아의 확립 대신 국가에 대한 충성만을 개인에게 요구했습니다. 국가와 개인 그리고 국가와 개인을 이어지는 국가기구와 관변단체만 존재했지, 국가의 간섭에서 자유로운 개인, 시민, 또는 단체는 아예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것이 있다면, 더욱기 박정희의 눈에 벗어난다면 박해만 존재할 뿐입니다. 그래서 '재야'라는 우리만의 독특한 저항진영이 형성되었습니다. 우리는 시민사회가 없었고 그러기에 시민운동도 없었습니다.
또 박정희의 정책은 1930년대, 40년대의 일본파시즘의 그것을 본뜬 것이 매우 많았습니다. 유신이란 말은 일제가 메이지유신(일본의 근대화), 쇼와유신(일본군국주의의 확립)이니 하면서 단골로 쓰던 용어입니다. 새마을운동은 조선총독부가 추진한 신촌(新村)운동에서 따온 것입니다.
일제의 농촌중견인물양성책은 새마을지도자로 둔갑했고, 일제가 민족의식을 말살하기 위해 농촌에서 대대적으로 미신타파운동을 펼쳤는데, 박정희 또한 미신타파라고 해 그나마 남아있던 이 땅의 전통문화를 깨끗하게 청소해버렸죠. 반상회는 일제가 조선인을 감시하기 위해 조직한 애국반의 변형입니다. 국기에 대한 맹세는 일제시 전국민이 일장기 앞에서 외던 황국신민의 서사의 변형입니다. 학생군사조직인 학도호국단과 교련도 일제 때부터 있었던 거지요. 총력안보도 마찬가지고... 너무 많아서 이쯤 해두지요.
일제가 떠났지만, 일제의 잔재 중 가장 심각한 부분은 조선인 자신이었습니다. 일제말기 국민학교교육을 통해 일제의 군국주의교육과 식민지교육을 받은 세대가 1970년대 쯤이면 40대로 성장하면서 우리 사회의 중견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이들의 의식과 생활은 일제의 조기교육이나 초기체험에 의해 본인이 의식하든 못하든 일본군국주의의 영향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박정희의 등장과 박정희식(군국주의적, 국가주의적) 정책이 의외로 국민 사이에 거부감 없이 자리잡는데는 이런 환경이 작용한 점도 있습니다. 이승만 정권 때 제대로 일제잔재 청산이 안되면서 그것이 저류를 흐르다 박정희의 파쇼정책과 만나게 되면서 박정희의 지지기반으로 전화된 거죠.
그런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박정희는 일제와는 직접 연관이 없는 어린 세대-저같은 경우죠-마저 군국주의식 교육을 통해 성장기부터 비민주적으로, 국가에 절대 복종하는 부속품으로 만들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복장부터 제복입니다. 스포츠머리, 후크와 소매 단추가 달린 교복과 교모, 그리고 '바리깡;을 들고 완장을 찬 채-마치 내무반장같은-복장검사를 하던 선생님, 머리가 길면 가차없이 바리깡으로 머리 한가운데를 박박 밀어 경부고속도로가 생긴 일, 공포심과 복종만 조장하던 교련, 군대사열같은 애국조회, 국민교육헌장과 국기에 대한 맹세의 낭독, 철학이나 사회윤리가 아닌 국민윤리, 체육시간의 수류탄던지기, 자치기구인 학생회 대신 등장한 학도호국단, 봉건적 상하윤리인 충효교육의 강조를 통한 복종정신의 내면화 등 이 모든 것들이 일제시기 교육제도가 꼭 맞아떨어집니다.
박정희는 자신들의 세대가 이어받은 일제군국주의 유산을 어린 세대에게 교육의 형태로 지속적으로 재생산시켜 내었죠. 그래서인지 지금도 저는 줄을 안서고 걷는 사람을 보면 왠지 불안하고 못마땅해 보입니다. 군대식에 익숙해 있기에. 아직도 국정교과서에는 박정희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대학에 와서야 비로소 우리 스스로 자치활동을 하면서 민주주의 훈련을 쌓고 또 그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싸워야 했습니다. 기성세대의 편견과 무엇보다도 권력의 탄압을 받으면서 말입니다. 그 속에서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습니다. 지금 그나마 우리가 누리는 자유에는 여러분 선배들의 피가 묻어 있습니다.
파탄난 민족문화
박정희의 문화정책은 또 어떠했던가요. 박정희정권은 근대화란 미명 아래 전통문화를 미신으로 치부하고 말살했습니다. 그러나 전통문화의 씨가 마른다는 비판이 일고, 외국인이 와도 보여줄만한 우리것이 없다는 위기감과 민망함이 퍼져나가자 박정희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족주의를 이용해 유신독재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통문화의 보존'을 외치며 몇몇 지방 민속문화를 '강제로' 보존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노랫말이나 행사의 절차까지 일체의 변형도 허용되지 않은 채 1년에 한번씩 서울 동대문운동장에 민속경연대회라는 검사를 받는 동원문화로 남았습니다. 일종의 전통문화의 제식훈련이자 박제화 과정이었죠.
박정희는 일본의 대중문화나 미국의 대중문화에 대해서는 금지 또는 적대시하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의 외래 문화에 대한 거부감은 민족문화의 보존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청와대에서 사무라이 영화를 즐겼고 술에 취해 흥이 나면 옛 일본가요를 흥얼거렸던 '제국주의 군인'인 그에게 '현대화된' 일본 대중문화나 서구의 대중문화는 무엇보다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유신독재에 대항한 청년층이 서구 대중문화에 경도되자 더욱 서구문화에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정희는 몇 가지 중요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먼저 충효사상과 같은 중세 가부장제의 봉건윤리를 전통문화의 육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사회의 지배윤리로 강화시키려 했습니다. 마치 일본제국주의가 아버지에 효도하듯 천황에 충성하라고 유교를 이용했듯이 그렇게 한 거죠. 이렇게 보자면 박정희의 민족문화 육성이란 사실 중세가부장적인 유령을 다시 부활시킨 것일 뿐입니다.
박정희는 문화예술에 대한 윤리심의제도를 두어 자신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일체의 문화예술창작행위를 금지시켰습니다. 수많은 금지곡이 나왔죠. 김민기의 '아침햇살'은 발표 직후 가요계에서 우리 대중음악의 수준을 일약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명곡으로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금지되었습니다. 그 이유인 즉,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란 가사가 문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붉은'이 공산주의냄새가 난다는 거죠. 한돌의 '행복의 나라로'라는 노래가 금지된 데에는 우리나라가 지금 행복한데 또 어디로 행복을 찾아간단 말이냐 하는 권력층의 불만이 작용했다고 합니다.
미니스커트와 장발 단속은 1970년대의 세계사적 코메디였습니다. 경찰이 자와 가위를 들고 다니다 장발청년을 붙잡아 즉석에서 머리카락을 자르고, 치마 입은 처녀의 무릎에 자를 대고 치마길이를 재던 웃지 못할 풍경이 연출되었습니다. 청년들은 이 때문에 우리 것을 더욱 촌스럽고 지겨운 것으로 생각하면서 간간히 들려오는 미국의 통기타와 생맥주와 청바지 그리고 포크송에 빠져들면서 급격하게 서구문화에 빠져들었습니다.
박정희류의 박제화된 전통문화와 봉건윤리인 충효사상의 부활 그리고 외국문화에 대한 대책 없는 거부감과 일제의 식민지문화유산이 박정희와 기성세대들이 틀어쥐고 우리 것 허무주의 서구지상주의의 청년문화가 대결을 벌이면서 -낡은 것과 남의 것이 대결을 벌이면서 정작 시민사회의 민주적 가치 위에서 구성되어야 할 민족문화의 건설은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일본문화 개방을 반대하는 이유의 하나도 사실 우리가 일본에 줄 게 없기 때문입니다. 개성 있는 민족문화를 창출할 수 있는 기회를 박정희가 막아버린 대가를 지금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겁니다.
박정희의 일인절대권력체제인 유신독재는 민주주의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리 민족문화 조차 처참하게 일그러뜨렸습니다. 일제 파시즘의 식민지 복제판인 박정희는 민족문화의 육성이라는 명목으로 봉건적 충효사상을 부활하고 여기에 일제 군국주의의 규율을 결합시켜 자신에 대한 복종과 충성을 국민에게 강요했죠. 복종과 획일성, 개인의 자율보다는 집단의 규율만을 강요함으로써 일체의 근대정신이 파멸되었습니다. 일제 파시즘 아래서는 식민지적 노예생활을 통해, 박정희 아래서는 유신독재에 의해 우리 사회의 총체적 후진성이 자리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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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런 찌질이 글 쓴 넘 분명 빨갱이 입니다..
이 글은 슨상님 제자가 쓴글이네요, 문맥이나 문향이 그래요, 박대통령이 하는일 시시콜콜 반대 만하고 학생들 선동하고 데모만 하다 10.26이후 자기차레가 안되니 광주를 이용하고 IMF 직후 청와대 들어가드니 국민들은 국가부도를 막자고 백일반지 돌반지 바치게 해놓고 측근들 시켜 노벨상 위원회에 로비자금 밀어넣은 그 슨상님, 박대통령이 뭐 어쩌구 저째?, 잘된일은 본래 그렇게 될것이었고, 안된일은 전부 박대통령의 실정이라고? 슨상님이 했드라면 이나라는 필리핀이나 북한 정도도 못돼있을 것이고, 그 끄나플들이 박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께서 이뤄놓은 나라, 더이상 망치지나 않았으면 싶소.
그렇습니다.......... 대체 김대중따르는 놈들은 정신상태가 어찌된놈들인지................;;;;; 이젠 입아파서 말 안하렵니다.
2007년 11월 맞나요? 아직도 저런 미개인이 있으니?
정말 혁명가 같은 글이군......역대 대통령 중 가장 칭송받는 대통령인데 저런 악글을 글이라고 한심한 친구구먼......선상님 제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