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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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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적 요시키와 어머니의 모습 |
요시키는 1965년 11월 20일, 일본 치바현 타테야마시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대대로 포목점[2]을 운영했고 어머니는 기모노를 입고 손님을 맞이했다고 한다. 집은 1층은 가게, 2층은 집의 형태인 특이한 구조였다. 엄청난 부자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부유했었는지, 부모가 일로 바쁠 때면 유모와 가정부가 키워줬다고 한다. 건강은 어렸을 때부터 좋지 않았다. 천식이 있었는데 환절기에는 바깥 공기를 마시기만해도 발작을 일으킬 정도였고, 한 번 발작을 일으키면 밤낮없이 간호해줘야 했다. 한밤중에 병원에 간적도 여러 번 있었다. 이런 요시키를 아버지는 딱하게 여겨 장난감으로 요시키의 방을 가득 채워줬다. 이 장난감들 중 요시키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호랑이 인형이였다. 이런 호랑이에 대한 사랑은 어른이 되어서도 이어져 돈을 들여서 호랑이와 관련된 것을 구매한다고 한다.#
4세가 되던 해에 요시키는 부모님에게 피아노를 사달라고 했다. 부모님은 갑작스러운 부탁에 처음에는 의아해 했지만, 집 근처 걸어서 2분 거리에 있는 피아노 학원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고 요시키가 그랬을 거라고 짐작했다. 아버지는 요시키에게 피아노를 사주고 학원에도 등록시켜 줬다. 그 피아노 학원 앞에는 콜리견이 한 마리 있었는데 요시키는 갈 때마다 항상 무서워했다. 학원에서 수업을 듣는 남학생은 본인 포함 2명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여학생이었다. 그래도 배우는 속도가 빨라서 선생님에게 칭찬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5살 때 유치원을 다니게 되면서 친구 토시를 만나게 된다. 스미레구미(제비꽃 반)으로 같은 반이었다. 토시의 어머니는 피아노 선생님이었고 집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살았다. 이후 토시와는 초중고를 모두 같이 나오게 된다.
1972년 4월, 요시키는 다테야먀 사립 소학교에 입학한다. 여름 방학에는 친구들과 함께 바다에서 낚시를 하거나 인근 덤불에 있는 딱정벌레와 사슴벌레를 잡으러 다녔다. 하지만 여전히 건강은 좋지 못해서 갑자기 발작이 일어나면 다시 조용히 누워있어야 했다. 심한 경우에는 학교를 쉬고 4개월 정도를 병원에서 지낸 적도 있다. 뿐만 아니라 교통사고도 두 번이나 당했다. 첫 번째는 정면에서 자동차에 치이고, 두 번째는 오토바이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두 번 모두 몸과 머리를 다쳐 그 충격으로 천식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했다.
그런 요시키를 괴롭히던 것은 천식과 교통사고 뿐만이 아니었다. 심각한 음식 알레르기도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할머니가 하와이 여행 선물로 사온 마카다미아 넛트 초콜릿 5 박스를 한꺼번에 먹어 버려 급성 알레르기를 일으켜 의식 불명에 빠지게 되었고, 쓰러져 있던 아들을 어머니가 발견해 구급차로 병원에 이송해 간신히 목숨을 구한 것이다. 이후 요시키는 초콜릿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요시키는 의사와 간호사가 걱정할 만큼 자주 입원하며 다테야마 종합병원에서 지내는 시간이 매우 많아졌다. 부모님은 교대로 요시키를 돌보러 병원에 와줬고 발작할 때마다 간호해줬다. 숨쉬기가 힘들 때는 누워있는 것조차 할 수 없었고, 인후통과 가슴의 답답함에 정신이 몽롱해지면 등을 구부리고 가만히 고통이 지나가기 만을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침대에 갇힌 채 좋아하는 피아노 연습도 할 수 없게 되자, 피아노 연주하는 모습을 상상하고 떠올리면서 덮쳐 오는 발작의 고통을 잊으려 했다.
"난 저 아이가 이토록 오래 살 거라곤 생각하지도 못했어요. 그만큼 약한 아이였어요."
- 「WE ARE X」 中 요시키 어머니의 내레이션 -
점점 기력을 잃어가는 아들에게 희망을 준 것은 아버지가 병실에 올 때 가져오는 선물이었다. 아버지는 몇 권의 책을 가지고 요시키의 병실로 찾아왔다. 책들의 종류는 다양했고, 아이들이 읽기 쉽게 쓰인 위인전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요시키는 베토벤의 책을 좋아했다. 병으로 청력을 잃으면서도 불굴의 투지로 작곡을 해나간 베토벤은 요시키에게 영웅이었다. 요시키는 난청과 싸우는 독일의 위대한 작곡가를 매일 학교에 다닐수도 없고 친구도 없는 자신과 겹쳐서 생각하게 되었다. 다행히 요시키는 최소한의 출석 일수로 겨우 3학년으로 진급할 수 있었다. 성적이 매우 좋아 공부의 지장이 없어 가능한 일이였다.
아버지가 통신 판매로 구입한 클래식 EP판 세트가 집에 있어서 유명한 교향곡은 거의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8살 때 요시키는 난생 처음 자신의 용돈으로 LP판을 직접 사게 된다. 매장을 둘러보며 클래식 코너에 다가가서 요시키는 빽빽하게 진열된 LP판의 재킷을 한 장씩 손가락으로 꺼내 제목과 커버 사진을 확인했다. 마침내 골라낸 한 장에는, A면에는 베토벤의 교향곡 5번 C단조 "운명", B면에는 슈베르트의 교향곡 8번 B마이너 단조 "미완성"이 수록되어 있었다. 요시키는 손에 넣은 그 레코드를 가슴에 안고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의 스테레오의 턴테이블에 올려 몇 번이나 듣고 또 들었다. 이후 요시키가 매 달 구입하는 레코드는 요시키의 보물이 되었다.
4학년으로 진급하면서 1학년 때부터 쉬는 것이 당연했던 체육 시간에도 참가했다. 의사의 만류에도 전교 마라톤 대회에도 출전하게 되었다. 뛰면서 호흡이 가빠지고 배도 아팠지만 뛰는 속도는 나날이 더 빨라지고 있었다. 요시키의 달리는 모습을 거의 본적이 없는 동급생들은 그의 질주에 놀라워했다. 고작 몇 킬로였지만, 첫 마라톤 대회에서 학년 상위 입상을 하면서 요시키는 큰 자신감을 얻는다.
요시키는 몸이 조금씩 나아지면서 활동적이게 되었다, 키는 여전히 반에서 가장 작은 편이였지만 어렸을 적부터 여자로 많이 오해받는 외모는 시원스러워지고 행동도 기민해졌다. 공부에도 재미를 느끼던 요시키는 보통의 학원처럼 산수를 가르치는 학원을 병행하며 습자, 영어 회화 교실까지 다녔다. 바쁘게 공부하고 또 여기저기 학원에서 친구들을 만나면서 요시키는 밝아졌다. 요시키의 피아노 레슨은 빠른 속도로 늘어갔고 레슨을 하는 선생님도 요시키의 연주 수준이 오를 때마다 바뀌었다.
요시키는 피아노뿐 아니라 새로운 악기에도 빠졌다. 5학년이 된 요시키는 기악 클럽에 소속되며 트럼펫을 불게 되었다. 기악 클럽 방학을 이용하여 관악기 연주곡의 연습이 한창이었고, 트럼펫을 담당한 요시키도 클럽 활동에 매일 참석했다.
충격의 날은 갑자기 찾아왔다. 1976년 8월 여름 아침, 항상 똑같이 기악 클럽 연습을 위해 향한 나는 오후에 집으로 돌아오니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다. 뭔가 무서운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감지하고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집에는 많은 친척들이 모여 있었다. 거실에는 이불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는 아버지가 누워 있었다. 엄마와 남동생 코우키, 그리고 친척들의 얼굴이 일제히 귀가한 나를 향했다. 엄마 옆에서 조용히 앉아 있는 여섯 살의 코우키를 제외하고 모두 울고 있었다.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친척 한 분이 "아버지는 병이야." 라고 말을 건넸다.
"지쳐서 주무시는 거야. 지금은 일어나지 못하실 거야."
그 말을 들은 나는 잠시 잠자코 있다가 갑자기 가슴 속에서 불 같은 감정이 솟구쳐 목구멍으로 쏟아져 나오는 듯한 것을 느꼈다. 그리고 크게 눈을 뜬 나의 전신에 불규칙한 떨림이 전해졌다. 고함 소리가 울음으로 바뀌면서 나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아빠는 병에 걸린 게 아니잖아요! 죽었잖아! 그러니까 저렇게 누워있는 거잖아!"
나는 통곡했다. 아이처럼 울부짖고 날뛰는 나를 아무도 달래지 못하고 마침내 억지로 몸을 잡아 눌러야 했다.
- 요시키의 자서전 제2장 「갑작스러운 죽음」 中 -
요시키가 10살일 때, 아버지가 사업난에 절망해 34세의 젊은 나이로 차에 배기가스를 틀어 놓고 자살하는 일이 발생했다. 다만 어렸던 요시키는 처음에는 자살이 아니라 심장마비로 알고 있었다. 요시키는 중학생이 되어서야 친척집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자살이라는 사실을 들어 버렸고, 충격을 크게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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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키와 아버지가 같이 찍었던 사진 |
그래도 요시키는 평소대로 학교에 다니며 기악 클럽에서 트럼펫을 불면서 학원이나 교습소를 다녔다. 집에 돌아와서 좋아하는 음악을 듣기도 하고, 친구와 함께 놀러 가기도 했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마음 속에 울리는 슬픔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았다. 요시키는 보통의 초등학생 얼굴 뒤에 조숙한 어른의 마음을 숨기고 있었다. 천식의 발작보다 훨씬 심한 통증을 가슴 속으로 느끼면서 요시키 자신도 모르게 산뜻한 소년의 얼굴 위로 가끔씩 날카로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버지를 잃은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가족은 애써 아버지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으려 했다. 아버지의 것을 말하면 슬픔이 흘러 가슴에 메울 수 없는 큰 구멍이 뚫리는 것 같음을 어머니도 형제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경험은 요시키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를 주고 요시키의 음악에 영원한 동기가 된다. 남편의 자살로 어려워진 사업을 떠맡게 된 요시키의 어머니는 어린 요시키를 키우며 기울어진 가세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많은 고생을 한다.
요시키는 친한 친구들 앞에서도 쓸쓸한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친구들과 인근 해안에서 낚시를 하거나 바다에서 수영도 하고 피아노나 트럼펫 연습 하는 것도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도 진심으로 즐겼다. 집에 있는 동안은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보내고 위대한 작곡가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악보를 암기하고 있었다. 동급생이 가져오는 유행하는 일본의 팝과 해외 팝 음악도 거의 듣지 않았다. 진지한 클래식의 선율만이 요시키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그런 요시키가 11세 생일이 다가올 무렵 관심의 대상을 바꾸게 된다. 단골 레코드점에서 화려한 EP판의 재킷을 발견한 것이다. "다들 왜 이런 모양을 하고 있는 거지?"라고 생각하며 요시키가 바라보고 있던 레코드의 밴드 이름은 "KISS"였다. 4명의 남자들이 얼굴에 흑백의 화장을 하고 검고 기묘한 의상을 입고 있었고, 그 화려한 차림의 록 밴드에 호기심과 자극을 받은 요시키는 레코드를 구입하고 급히 집으로 돌아가 턴 테이블에 올렸다. 그러자 강렬한 기타와 드럼 소리가 진동되어 요시키의 방에 울렸다. 마치 콸콸콸 물결치는 맥이 그대로 음악이 되어 빠져나가는 듯했다. 요시키는 스테레오의 볼륨을 더욱 높였다. 숨을 삼키면서 크게 울리는 소리와 박력 있는 영어 노래에 귀를 기울인 요시키는 폭음 속에서 온몸이 뜨거운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클래식 이외에도 마음을 빼앗길 수 있는 음악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요시키는 이튿날부터 한눈도 팔지 않고 KISS의 레코드만 반복해 들었다. 지금까지 접한 적이 없는 록이란 장르는 초등학교 5학년의 소년을 아주 단번에 사로잡고 말았던 것이다.
록 음악에 심취한 요시키는 어머니에게 생일 때 드럼 세트를 사달라고 한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흔쾌히 드럼을 사주었다. 요시키가 손에 넣은 드럼 세트는 스네어 드럼과 베이스 드럼이 하나, 탐탐이 둘, 플로어탐이 하나, 심벌 2장의 단순한 셋트였다. 2층 자기 방에 드럼을 세팅한 요시키는 즉시 연습을 시작했다. 독학으로 드럼을 두드리는 요시키는 근처 악기점에서 구매한 드럼 교본으로 연주하는 방법의 기본을 배우고 레코드에서 들려오는 드럼 소리를 기억해 비트를 만들어 나갔다. 악보를 읽고 리듬까지 가늠할 수 있던 요시키는 기본적인 테크닉은 금방 익힐 수 있었다. 스틱의 컨트롤이나 베이스 드럼, 4비트, 8비트, 16비트처럼 기초부터 셔플, 슬로우 록, 6/8박자나 3/4박자 등 고급 기술까지 차례로 마스터 해나갔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드럼을 두드리던 요시키는 계속해서 KISS의 LP 레코드를 구매해서 앨범에 실린 모든 곡의 드럼을 연습하여 순식간에 실력을 쌓아갔다. 1층 포목점에 손님이 와도 신경 쓰지 않고 연주했다.
1977년 3월, 6학년으로 진급하기 전인 봄 방학을 보내던 요시키는 무심코 보던 신문에서 "KISS 일본" 이라는 콘서트의 광고가 실린 것을 보고 흥분을 누를 수 없었다. 요시키는 환호를 지르며 어머니에게 꼭 가고 싶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열성적인 아들의 감정을 알고 일본 무도관에서 열리는 콘서트를 같이 가기로 약속했다. 표 예약을 위해 접수하는 곳에 바로 전화했지만 이미 매진되어 콘서트 당일 티켓을 구해야만 했다. 1977년 4월 KISS의 콘서트의 날 당일권을 손에 넣어야 했던 요시키, 엄마, 그리고 남동생 코우키는 다테야마의 집을 나와 구단 시타에 있는 무도관으로 향했다. 기모노 옷 차림의 어머니는 콘서트 도중 배가 고프면 안 된다고 하여 도시락에 초밥 3개를 챙겼다. 무도관에 도착하자 당일권 판매 창구에는 끝없는 행렬이 이어졌다. 3명은 그 줄을 서면서 조용히 티켓이 판매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KISS의 팬들이 줄지어진 그 속에서 기모노의 여성과 11세와 6세의 남자아이까지 총 3명의 모자 일행을 무척이나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렇게 요시키는 자신이 선망하던 KISS의 공연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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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키가 그날 보았던 공연 |
요시키는 KISS를 알게 된 이후부터 초등학교 시절 내내 KISS에 심취해 있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요시키를 공감하는 친구가 아무도 없었다. 요시키가 신나게 KISS와 록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도 그 누구도 요시키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 소꿉친구였던 토시 또한 KISS에 매혹되어 이들과 같이 말할 상대를 찾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같은 초등학교 안에서 로큰롤과 KISS에 빠진 아이는 요시키와 토시밖에 없었다. 반이 가까웠던 두 사람은 자주 만나며 KISS와 그들의 곡에 대해서 열심히 수다를 떨었다. 요시키는 드럼을 두드리고 있음을, 토시는 기타를 치고 있음을 서로 진지하게 얘기하며, "언젠가 함께 밴드를 하자"고 두 사람은 말했다.
혼자서 드럼을 두드리는 것에 질렸던 요시키는 친한 동료 3명과 함께 밴드를 만들기로 계획했다. 요시키가 제일 먼저 지명한 멤버는 토시였다. 토시는 당연히 요시키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또한 이미 토시는 기타 연주도 가능했다. 다른 1명은 요시키가 급하게 구해서 황급히 기타와 베이스를 구입하고 각각 처음부터 연습을 시작했다. 록을 들으며 받은 충격의 크기를 나타내는 이름을 밴드에 붙이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던 요시키는 자신이 리더가 된 그 밴드에 "DYNAMITE"로 이름을 붙였다. 멤버는 드럼과 보컬을 요시키가 담당하고 토시가 기타를, 또 다른 사람이 베이스를 담당했다. Kiss와는 전혀 닮지 않았지만 밴드를 성립시키려면 부끄러워할 틈이 없었다. 다테야마에서 탄생한 이 초등학생 록 밴드는 근처의 악기점 안에 있는 1시간에 300엔의 대여스튜디오 건물에서 연습을 늘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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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시절 결성한 밴드 다이너마이트의 모습 |
중학생이 되어서는 NOISE라는 밴드를 결성하게 된다. 중학교에 진학하고 요시키는 자신과 교사가 절대 상반되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수업 중에 "장래의 꿈"이라는 과제가 주어졌던 날 요시키는 "록 스타가 될 것이다."라고 썼던 것이다. 그것을 읽은 담임 선생님은 교무실에서 요시키를 호출하여, "진지하게 생각하고 적으라고 했는데 왜 이런 실없는 소리를 쓰는 거냐?"라며 요시키의 뺨을 주먹으로 때렸고 요시키는 나뒹굴고 말았다. 록 스타라는 꿈을 장난으로만 받아들인 교사라는 존재가 요시키에게 젊음과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권력자의 상징이 되어갔다.
요시키의 분노는 자신을 무조건 억압하고 있는 모든 것을 향해 가고 있었다. 항상 NOISE 멤버들과는 별도로 교무실로 불리며 불량학생들과 행동을 함께 하게 된 것도 이즈음부터였다. 학교에서 반항적인 태도를 부렸던 불량 그룹은 밤에는 자전거로 집합하여, 정처 없이 밤거리를 누볐다. 오토바이를 동경했던 요시키는 자신의 자전거를 변형해 핸들이나 점멸 라이트를 달고 폭주족 오토바이처럼 개조했다. 이미 포목점을 닫고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가가 되어 생계를 꾸렸던 어머니는 요시키를 걱정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종종 묻곤했지만 중학생이 된 요시키는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지 않았다. 2학년으로 진급하면서 요시키의 말투나 태도는 점점 거칠게 되어, 동급생과 함께 대놓고 담배를 피우는 등, 몸이 약하던 초등학생 시절과는 전혀 딴 사람처럼 난폭해지고 눈초리도 매서워졌다. 반항의 증거로 외모에 집착한 요시키는 눈썹도 가늘게 깎고 머리를 염색했다.
주체 못한 반항심을 발산할 곳이 필요했던 요시키는 축구부에 들어갔다. 하지만 플레이 중에 격앙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며 상대를 스파이크로 밟고, 멱살을 잡는 등 난동을 자주 부려서 경기 시작 15분 만에 퇴장당하기 일쑤일 정도로 이곳에서도 잘 적응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한편으론 중학교 밴드부에서 트럼펫을 담당하고[3] 교내 피아노 연주도 담당하거나 수학을 100점을 맞아 상도 받는 등 교내 문제아면서 여러 재능도 있는 독특한 아이로 학교생활을 했다.
요시키가 색다른 존재로 더욱 인기를 모은 것은 중학교 2학년 말 교내 공연에서 록을 연주한 것이다. 졸업생들을 위한 공연무대에 록 밴드의 등장은 개교 이래 처음 있는 일이였다. NOISE의 무대 데뷔에 자신감을 가진 요시키는 일찍부터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악기나 빌린 앰프를 체육관의 무대에 옮기고, 요시키와 멤버들은 KISS와 DEEP PURPLE의 곡을 선 보였다. 완벽한 연주는 아니었지만 중학생 5명이 연주하는 록을 들은 학생들은 그 음량이나 퍼포먼스의 화려함에 제대로 빠져들었다.
중학교 내에서 가장 돋보이는 존재였던 요시키의 생활환경은 3학년 진급 후 급변하게 되었다. 이때쯤 중학생이 수가 많아져 학교가 대형화가 되었다. 다테야마 시립 제3중학교가 신설되어, 지정된 학군대로 요시키는 이 새로운 중학교로 넘어가게 되었다. 중학교가 두 개로 분리되어 NOISE의 멤버는 흩어지게 되었는데 하필 보컬을 담당했던 친구들만 두 번째 중학교에 남게 되었다. 중학교가 바뀌면서 자주 만날 수 없게 되자 요시키는 그를 대신할 보컬을 찾아야 했다. 토시와 기타와 베이스를 맡은 친구도 같은 제3중학교에 다니게 되어, 요시키는 남은 멤버들에게 "여기서 노래를 가장 잘 부르는 사람을 보컬로 정하자"고 제안했다. 아직 굵은 목소리가 나오지 않던 요시키 본인은 보컬에서 제외했다. 대신 토시에게 "우선 너부터 불러봐"라며 권유했고, 토시는 제일 자신 있는 곡으로 즉석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을 듣는 순간, 요시키는 바로 새 보컬을 정해버렸다. 그렇게 토시가 밴드의 보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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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ISE 시절 모습. 앞에 보컬은 토시, 뒤에 드럼은 요시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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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연구역에서 담배를 물고있는 고교시절의 요시키 |
1981년 3월, 맹렬한 수험 공부가 결실을 맺어 15세의 요시키는 아와 고등학교에 합격을 했다. 1학년 가을, 요시키는 NOISE를 이끌고 문화제의 무대에 섰다. NOISE는 유행하는 하드 록을 카피해서 연주했다. 문화제 1주일 전부터 멤버를 소집하고 집중적으로 합주를 반복한 요시키는 레퍼토리를 완벽히 만들어 공연을 기다렸다. 문화제 당일 1000명이 넘는 관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체육관 무대 한가운데 나타난 그들은 Led Zeppelin과 Rainbow, UFO등 하드 록 밴드의 노래를 멋지게 연주하며 열광을 자아냈다.
아와고등학교 문화 축제에서 NOISE의 연주는 주목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학교측은 록 연주와 그들의 퍼포먼스를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했다. 학교에서는 록은 불량아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뿌리 깊었고, 요시키 이외의 나머지 성실한 멤버까지 "저놈들도 모두 요시키와 같은 문제아들이다"라고 취급해버렸다. 문화제의 무대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불량아로 오해받은 멤버들에겐 미안함 마음의 요시키이었으나 자신에 대해 주위에서 어떤 식으로 떠들든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드럼을 격렬히 더 빨리 치는 즐거움을 느끼며 "왜 이런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는거지?" 라는 생각 뿐이였다.
1982년 4월, 2학년이 된 요시키는 진로별 선택에서 이과 코스를 택했다. 어린 시절부터 수학을 잘했던 그는 별로 생각할 필요 없이 이과를 선택했지만 진학의 구체적인 계획이 있던 건 아니었다. 요시키는 공부에 흥미를 잃고, 밴드를 이끄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시키와 토시 외에 멤버들이 대학 진학에 준비를 시작한다는 이유로 밴드를 빠지게 되었다. 요시키는 결국 NOISE을 해체하고 토시와 함께 새로운 밴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 요시키는 IRON MAIDEN에 빠져 있어서 새 밴드의 리드 기타를 둘로 하는 것을 생각했다. 요시키는 멤버 모집을 위해 기타 실력이 뛰어난 다른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밴드에 참여하지 않을래?"라며 여기저기 물어보고 다녔다.
마침내 1982년 여름, 요시키가 모은 멤버들로 새 밴드가 결성되었다. 이름은 바로 X였다. 당시 긴 이름의 밴드가 많았기에 오히려 한 글자면 문화제나 콘테스트의 책자에 실릴 때 눈에 띌수있다는 이유에 X라고 지었다. 또한 요시키는 "X"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알파벳의 24번째 글자 외에도 수에는 미지수의 부호, 미지의 사물, 무한의 가능성 등 여러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요시키는 밴드의 활동이 바쁘게 되면서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펑크 내기도 했다. 화난 여자친구가 "음악과 나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중요해?"라고 물을 때면, 요시키는 "음악이지"라며 딱잘라 얘기했다. 요시키는 밴드 멤버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잃게될 바에는 차라리 여자친구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요시키는 드럼 연습하는 시간을 확실하게 쌓아 갔다.
요시키는 첫 자작곡 I’ll Kill You를 작사/작곡한다. 고등학교 2학년, 자신의 학교 문화제에서 처음으로 이 노래의 공연을 펼친다. 따지고 보면 이 공연이 X의 첫 공연이다.
요시키는 1983년 4월, 3학년으로 진급하자, 음대에 가기로 마음을 먹고 이과에서 문과로 옮기고 피아노의 레슨을 본격적으로 재개한다. 음대 피아노과를 가려면 보다 전문적인 기술을 배워야 했던 요시키는 도쿄시내에 사는 프로 피아니스트 강사에게 일주일에 2회 왕복 3시간을 걸려 레슨을 받으러 다니며 음대입시를 위한 준비를 밀어붙였다.
입시 준비를 위한 수업내용은 피아노 연주에만 머물지 않았다. 청음, 시창(視唱), 악전을 배우는 훈련을 거듭해야 했다. 또 자주 시험과제를 하기 위해 19세기 독일 작곡가 프란츠 부에루나가 간행한 <합창 연습 곡 모음 집>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처음 보는 악보를 바로 치는 초견 연주의 훈련과 청음 훈련에서 경이적인 능력을 발휘하며 강사이자 피아니스트도 혀를 내두르며 인정했다. 여름이 되면서 일본 대학 예술 학부에서 개최되는 음대 수험자를 위한 강좌에도 다녔다.
청음으로 완벽한 점수를 받은 요시키는 일찍이 지망 학교를 정했다. 제1지망은 무사시노 음악대학, 제2지망은 도호 음악대학, 3지망은 일대 예술학부이다. 국립대학의 도쿄예술대학은 사립음악대학과 다른 수험과목이 많아서 처음부터 제외했다. 2년간의 공백의 시간을 되찾기 위해서 요시키는 필사적이었다.
요시키는 밴드 멤버들에게 콘테스트에 나가보자고 제안을 한다. 요시키의 생각에 반대하는 멤버는 한명도 없었다. 요시키는 야마하가 주최하는 EastWest의 치바현 대회 참가를 신청한다. 시험공부를 잠깐 멈춘 요시키는 X의 멤버와 함께 대회에 나선다. 타테야마에서 나와 치바시에서 연주하는 것 자체가 그들에겐 첫 경험이었다. 사복 차림으로는 절대 연주할 수 없었던 문화제와는 달리 멤버들은 T셔츠에 검정 바지를 입고 무대에 올라갔다. 요시키는 얼굴에 화장을 하고 머리카락을 곤두세웠다. 몸에 쇠사슬을 두른 토시는 주위를 거칠게 돌아다니고 소리치며 노래를 불렀다. 대회 직전에 정학 당했던 또 한명의 멤버는 교사에게 머리가 깎여서 빡빡머리였다. 연주곡으로 선택한 "I'll Kill You"의 폭주하는 멜로디와 토시의 높은 키의 목소리는 참가한 많은 밴드들 속에서도 당연 독보적이었다. 솔로 파트에서는 기타멤버가 피를 보이는 퍼포먼스를 보이면서 심사원이나 관객을 더욱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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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는 이 대회에서 밴드로서의 수상은 놓쳤지만 요시키가 베스트 드러머 상을 거머쥐었다. 작은 상장을 건네받은 요시키는 애써 태연한척 했지만 역시 기쁨을 감출수는 없었다. 자신만의 개성적인 드럼실력이 관객들에게 전해진 것의 기쁨이 17세의 요시키를 자랑스럽게 만들었다.
얼마 후 음악대학의 추천 입학도 정해지고, 요시키는 피아노 레슨에만 집중하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요시키의 집에 토시가 놀러온 것은 겨울 방학 직전이었다. 요시키는 이층계단 아래의 냉장고에서 캔쥬스를 꺼내고 토시에게 초콜릿을 주었다,토시는 끊임없이 입속으로 초콜릿을 넣고있었다. 요시키는 초콜릿을 먹지 못해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때 토시가 물었다. "앞으로 우린 어떻게 되는거지?". 토시는 X의 활동에 대해서 요시키에 물었다. 토시도 EastWest 경연대회 후 다른 대회에서 베스트 보컬 상을 수상하였고, X의 보컬로서의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었다. 확실히 대회에서 얻은 작은 영광은 미래를 비추는 빛이었다. 제법 관객들에게 인정받아 작고 큰 상을 여러 개나 수상한 요시키도 마음이 사실은 용솟음 치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들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대단할지 몰라." 그런 요시키에 이번에는 토시가 맞장구를 쳤다.
요시키의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요시키는 음대를 목표로 입시 공부에 몰두한 1년을 되돌아보았다. 대입을 위해 달려온 그 순간, 요시키는 자신이 오랜 꿈을 꾸는 느낌이 들었다. 대학 입시 시험이라는 목적을 향하여 집중해 있었던 요시키는 이제야 겨우 오랜 꿈에서 깨어나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시키는 빠른 어조로 토시에게 말했다.
요시키: "하면 하는거야. 어중간한 건 싫으니깐. 도쿄에 나가 X로 승부 한다면 나 음대 가는 거 그만둘게. 너와 일본을 정복, 아니 세계 정복을 하자.“
토시: "그래. 요시키 너라면 틀림없이 할 수 있어."
두 말 없이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있었다. 중학생 때 장래의 꿈으로 내세운 록스타는 요시키의 진실된 꿈이었다. 그것이 명백히 드러난 지금 음대입학을 기다릴수는 없다. 어머니에게 미안하고, 선생님들에게 실망감을 안기는일은 어쩔수 없었다. 겨울 방학이 끝난 3학기, 요시키는 담임 교사에게 거짓없이 자신의 마음을 말했다. 그러나 결정된 대학진학을 무산시키고 록 밴드를 하겠다는 건 상식에 맞지 않았다. 요시키는 교무실로 불리고 몇 시간이나 교사의 설득을 들어야했다. 하지만 달라질 수 없는 결정이었다. 진학 포기를 들은 어머니도 계속해서 대학에 가는 게 좋겠다며 아들에게 간청했다. 하지만 요시키는 전혀 물러설 기색이 없었다. 결국 어머니도 그런 요시키에게 손을 들었다. 그런 아들의 성격을 가장 잘 알고 계시던 어머니는 결국 대학포기를 용서해주었다.
하지만 요시키는 아마추어 록 밴드가 어떤 장소에서 활동하면 되는가, 또 실력 있는 멤버는 어떻게 찾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또 어떻게 하면 프로로 데뷔할 수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요시키와 토시는 지식이 부족했다. 음악 잡지에서 얻은 정보에 따르면 밴드 활동의 장소는 대체로 라이브 하우스였다. 유명한 가게에서 라이브를 성공시키면 정기적으로 연주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요시키는 졸업이 가까울 무렵 학교를 빼먹으면서까지, 도쿄에 가서 라이브 하우스의 최신 정보를 수집하러 다녔다. 요시키를 걱정한 선생님이 그를 찾아 직접 라이브 하우스를 가기도 했다. 그러나 요시키에 대한 교사들은 점점 응원의 마음을 갖기 시작했다.
졸업식은 무난히 치러졌다. 졸업 앨범에 요시키가 쓴 메시지는 단 하나의 단어였다.
"X"
요시키와 우정을 같이한 토시는 이렇게 적었다.
"We are X"
첫댓글 요키치로 봤어요 ㅜㅜ 난독인가
양질의 글 잘봤습니다!
<We Are X>는 X-Japan이 아니라 요시키와 토시 중심의 서사 아닌가 생각하긴 했지만 보면서 둘의 우정이 얼마나 두터운지 실감했었습니다. 이런 디테일한 사연도 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