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사람도 많고 말도 많은 클래시카..
오랜만에 들렀다가 사티에 관한 글을 보고, 저도 생각난게 있어서 옮겨 봅니다.
'객석' 에 실린 것이어서 많이들 읽어 보셨을 지도 모르겠네요..여하튼.. 좀 길거든요. 재밌게 보세요
사티에게는 VEXATION(짜증)이라는 재미있는 제목의 피아노 작품이 있다. 내용물이 1페이지 남짓한 짧은 악보지만 메트로놈 지시(d=52)를 따라 완주를 하면 정확하게 13시간 40분이 걸리는 곡이다. 같은 멜로디를 무려 840 번이나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작곡가 생전에는 빛을 보지 못했다. 사티가 죽은지 24년이 지나서인 1949년, 이 악보를 소장하던 그의 친구가 존 케이지에게 악보를 넘겨주고 나서도 작품은 무명에 불과했다. 전위 예술가로 이름높은 케이지 조차도 작품의 황당함에 질려 연주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가 초연을 결심한 것은 그로부터 15년후인 1963년, 결국 혼자서 완주하는 것은 포기하고 네명의 연주자와 함께 릴레이로 공연을 치렀다. 일본에서는 '다카시 유지'라는 피아니스트에 의해 10시간짜리 야간열차에서 처음 연주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5년 3월 서울대학교 학생라운지에서 초연되었는데 이때 연주에 참가한 학생수만도 40여명이었다고 한다.
많은 음악학자들은 이런 사티의 장난에 대해 골머리를 썩이고 있다. 그들은 < 지루함은 신비하면서도 매우 심오한 것이다 > 라는 사티의 말을 인용하며 '지루함의 미학'을 열심히 탐구하고, 사티가 한때 몰임하던 '장미십자가 종교회'와 연관관계를 살펴보고 있다. 심지어는 불교 독경까지 들먹이고 있지만, 죽은 작곡가는 말이 없는 탓에 정확한 해석은 할수 없는 실정이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연주자든 청중이든 이 작품을 접하게 될 때 처음 느끼는 것은 바로 제목 그대로 <짜증> 이다. 그 공연 분위기를 가장 잘 실감할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여름날 세명의 유명 피아니스트들은 휴식없이 3등분으로 나누어 연주하기로 하고, 곡목과 소요시간은 발표하지 않기로 했다. 겁먹은 청중들이 꺼려할것을 우려해서였다.
연주회가 열리던 날, 객석은 발 디딜 틈이 없도록 메워졌다. 연주를 하기 직전 피아니스트들은 작품의 제목을 소개하고 간단한 해설을 곁들였다. 작품을 아는 극소수의 청중은 아차 싶었으나 새로운 작품을 접하게 된 다수의 관객들의 박수소리에 이 낭패는 묻혀 버렸다.
연주가 시작되고 처음 30분간은 청중들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엄숙했다. 그러나 30분이 지나자 그 곡 참 길기도 하다며 몸을 꼬는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후 지루할 때 인간이 나타내는 모든 반응이 순차적으로 나타 났다. 손바닥 비비기, 팔짱 끼었다 빼기, 머리 긁적이기, 등
몇시간이 흐른후,새로운 피아니스트와 사회자가 무대위에 등장했다. 남아있던 몇몇 청중들은 기다린 보람에 박수를 칠 태세를 갖추었다. 곧 연주가 끝나리란 기대와 함께.
하지만 이 기대는 사회자가 들고 나온 팻말로 인해 허무로 바뀌었다. 팻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피아니스트만 휴식없이 바뀌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
새로운 피아니스트는 이전 연주자 옆에 앉아 악보를 넘겨주다가 자리를 바꾸었다. 음악은 계속되었다. 이미 절반은 자리를 떠났으며, 남아있는 이들도 녹초가 되어 잠을 자고 있었다. 오직 새로운 연주자만이 생기발랄하게 음악에 몰입하고 있었다.
연주회는 별 사고없이 지속되었다. 다만 마지막 연주자가 등장할 무렵 관객수가 10명으로 줄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들도 사실 적극적인 의지보다는 지쳐서 일어날 기운이 없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이 와중에 유독 청중 한 명이 눈에 띄었다.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한 뚱뚱한 남자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눈을 빛내며 굳세게 연주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연주가 끝났다. 몇 시간 동안 연주에 몰입하던 연주자가 힘겹게 일어섰고 관객을 향해 인사했다. 그러자 그 의지의 관객이 열정적인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엄청난 박수소리에 잠을 자던 몇 명의 청중들이 얼떨결에 일어나 함께 박수를 치며 이 감격을 나누었다. 그러나 이 감격은 뚱보 청중의 한마디 외침으로 인해 곧 경악으로 바뀌고 말았다.
"앙코르! 앙코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