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6장 : 유배길 >
##
중궁전 상궁이 편전 앞을 서성이다가 왕의 어명을 듣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 소식을 들고 바로 교태전으로 바삐 향하였다. 전전긍긍,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걸어다니던 중전은 저 멀리서 달려오는 엄상궁을 발견하고는 마루에서 내려와 그 쪽으로 걸어갔다.
" 전하께서 무슨 명을 내리셨느냐. "
" …마마,그것이. "
" 어서, 어서 말해보거라. "
엄상궁이 차마 송구하여 말을 하지 못하자, 중전의 얼굴이 더욱 더 상기되어 갔다.
" 유배를 보내라는 명을 내리셨사옵니다. "
" …유배지는 어디라더냐. "
"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전라도 강진이옵니다. "
" …강진,강진이라-, "
의외로 침착한 중전의 모습에 엄상궁이 마음을 놓으며, 송구함에 조아렸던 고개를 들어 중전의 한 쪽 팔을 잡아주었다.
" 그만 안으로 드시옵소서. 마마. "
" 엄상궁. "
" 예, 마마. "
" 솜을 찾아오거라. 이불과 옷감도……. "
그 말에 엄상궁은 더 묻지도 않았다. 곧 차디찬 겨울이 찾아오는데 멀리 유배를 떠나는 수한에게 솜 이불과 솜 옷을 만들어 주고자하는 마음을 이미 읽었기 때문이었다.
##
편전을 나온 왕은 대전으로 향하지 못하고, 왕을 위해 만들어진 푸른 숲들이 울창한 산책로를 오랫동안 걷고, 걸었다. 자신에게 처음으로 안겨진 자식이었고, 맏 아들이었다. 지켜주고 싶었고, 왕 자신의 자식들 만큼은 피를 보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왕의 권력에 맞서려는 신료들에게 대항을 해서라도 목숨이라도, 지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전날, 영의정에게 어렵지만 왕의 자리를 내려 놓고, 부탁의 어조로 말을 꺼냈었다. 왕의 체통을 내려놓고, 유배를 보내지만 여전히 마음이 편칠 않았다. 오랜 시간동안 산책을 하던 왕이 발길을 돌려 대전으로 향하자 그 앞에 혁을 모시는 상궁과 나인들이 보였다.
" 세자가 들었느냐. "
" 그러하옵니다,전하. "
그 대답과 함께 왕이 들자 내시는 '주상전하 드시옵니다.' 라는 말을 남기며 문을 열었다. 대전 안에는 세자 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왕을 맞이하고 있었다.
" 앉거라. "
왕이 자리에 앉으며 말하자 혁이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혁의 안색을 살피던 왕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형님께서 유배라니요, 그 명을 부디 거두어주시옵소서. "
" 더는 돌이킬 수 없으니 돌아가거라. "
" 아바마마! "
혁이 처음으로 왕의 앞에서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왕은 그것에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혁이 이렇게 간절하게 애원할 만큼 두 형제의 사이가 돈독하다는 말일테니-,
" 소자에게 하나 뿐인 형님이시옵니다. 역모라는 얼토당토 않는 죄로 형님을 잃을 수 없사옵니다. "
" ……. "
" 아바마마보다 더 의지하고, 존경했던 형님이옵니다. 그러니, 부디,부디…명을 거두어주시옵소서. "
" 대군을 유배 보내는것이 지금으로선 최선의 선택이니라. "
" 그럴 수 없사옵니다, 이럴 수는…없사옵니다. "
돌이킬 수 없는 왕의 마음을 알아차린 혁이 고개를 바닥에 조아리며, 눈물이 바닥에 떨구며 애원하듯, 절규하듯 부탁했다.
" 목숨을 건졌으니, 이것으로 위안을 삼거라. "
" 형님은…아무런 죄도…없사옵니다……. "
뜨겁게 눈물로 차오르는 눈물들 사이로, 영의정이 꾸민 역모에 대해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된다면 상황이 지금보다 더 걷잡을 수 없이 커질것 같아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이, 수한과 수희를 떼놓기 위해 영의정이 꾸민 계략인것을 왕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 제발…아바마마……. "
" 세자가 이런다고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
" ……. "
" 그만 물러가보거라. "
말을 마친 왕은 혁이의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려버렸다. 망극하게도 왕의 눈가에도 옥루가 차오르며, 금방이라도 흘러내릴것 같았다.
비극의 수레가 서서희 그 끝, 절벽 앞에 다다르며 속력을 멈춰서고 있었다.
##
달래는 집에만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넋을 놓고있는 수희를 두고 볼 수만 없어서 장이 서는 오늘, 싫다는 수희의 손을 잡고 장터로 나와있었다. 조금 걷다보니 햇빛에 반사되어 옥색의 빛을 내고 있는 고운 노리개를 볼 수 있었다. 수희는 그것을 집어서 달래에게 내밀었다.
" 네게 어울린다. "
" 당치도 않으십니다. 이런건 아가씨께 더 어울리지요. "
달래가 손사레를 치며 그것을 다시 수희에게로 돌려 보내듯 밀어내었다.
" 달래 너는 얼굴이 고와서 이런 것이 어울린다. "
그리고는 달래가 뭐라 말할 틈도 없이 수희는 그것을 장사꾼에게 돈을 지불하고 사버렸다. 기어이 그 옥빛 노리개를 달래의 손에 쥐어준 수희가 그제야 얼굴에 미소를 띄었다.
" 감사해요, 아가씨. "
" 너와 내 사이에 그런 말은 하지 않아도 되. "
더 밝게 웃던 수희는 달래의 팔에 팔짱을 끼며, 다시 앞을 향해 걸어나갔다. 조금 더 걷자, 예전에 수희가 갖가지 서책들이 있다하여 달래를 데리고 들어갔던 곳 앞에 서게되었다. 그곳에서 고개를 조금 옆으로 돌리자 노인의 짐을 들어주던 수한의 모습이 보였다.
[ 이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
[ 그러게요. ]
[ 잘 지냈습니까? ]
사내치고는, 아니 왠만한 여인보다도 더 곱게 양쪽 입꼬리를 올리며 수희를 바라보며 웃던 수한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의 모습과 수한의 모습이 몇 발자국 뒤에 있는 수희의 두 눈에 선명히 보였다.
" 아가씨? 뭘 그렇게 보세요? "
" 생각해보면, 그리 많이 함께한 것도 아닌데……. "
" 예? "
" 왜이리 어딜가나, 그 분이 나를 잡는지 모르겠구나. "
" …아가씨. 괜찮으세요? "
달래의 말에 수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어쩐지 그곳의 두 사람에게서 수희의 시선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다시 돌아간다면 더 하고 싶은 것이 많았고, 해주고 싶은 말도 많았다.
" 그래도 주상전하께서 자식이라고 살려는주셨네? "
그 말에 수희의 추억도, 미소도 사라지고 말았다. 순식간에 창백히 굳어진 수희는 고개를 세차게 돌리며 그 말이 들려온 곳으로 몸을 돌리고, 귀를 열었다.
" 그래도 역모를 저질렀는데, 이러다 화근이라도 될까 무섭구만. "
" 내 말이! "
대체, 무슨 말들을 하는걸까, 참지 못한 수희는 달래를 두고 대화를 하고 있는 이들에게 다가갔다.
" 무슨 말씀들을 하시는 겁니까? "
" 예에? "
" 대군이 어찌 되었습니까? "
자신이 말하고도 심장이 터질듯이 뛰어대고 있었다.
" 오늘 아침에 주상전하께오서 대군을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보낸다 했다오! "
" …유배,유배라니, 그 무슨-, "
" 아, 거참!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단 말이오! "
말을 마친 두 사내는 넋을 놓아버린 수희를 두고 가던 길을 가버렸다. 어느새 옆으로 온 달래는 수희의 팔을 잡고 흔들며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 아가씨! 아가씨? "
" 집으로 돌아가자꾸나. "
" 예? 예,예, 아가씨. "
놀라기는 달래또한 마찬가지였다. 달래의 대답이 나오기가 무섭게 돌아선 수희는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어갔다. 아무런 죄가 없다는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영의정, 그의 얼굴을 꼭 봐야할 것 같았다. 수희는 바닥까지 내려온 노란색의 치마를 두 손으로 움켜쥐듯 잡은 두 손에 힘이 빠졌다가, 쥐어졌다가를 반복하며 위태로이 집으로 향했다.
##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퇴궐을 하고 돌아온 영의정이 안채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수희는 자신을 붙잡는 달래의 손길을 매섭게 뿌리치며, 아버지인 영의정을 따라 안채로 향했다. 그 문 앞에 서서 자신이 왔음을 알리고, 들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문을 열고, 안채로 들었다.
" 네 얼굴을 보아하니, 모두 알고 온 것이로구나. "
" 예, 모두 알고 왔습니다. "
" 대군께서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시는데, 너는 어찌할 것이냐? "
" ……. "
" 주상 전하를 찾아뵙고 모든 사실을 알리기라도 할 것이냐? "
" 그렇게 하겠다면 어쩌시겠습니까? "
수희가 자리에 앉지도 않고, 선 채로 영의정과 마주하고 서서 얼어붙은 눈을했다.
" 그렇게된다면 이 가문은 먼지 조차 남지 않겠지. "
" 무슨 말씀이십니까? "
" 멸문지화를 당할 것이다. "
당장이라도 집을 박차고 나가 궐로 향할것 같던 수희의 기세가 어느새 사그라지고 말았다. 멸문지화, 한 집안이 살육을 당하는 것 을 일컫는 말이었다.
" 아비의 말을 믿지 못할것 같으면, 어디 한 번 해보거라. "
" ……. "
" 나와 네 어미, 네가 그리도 아끼는 몸종이 죽어 나갈것이다. "
눈 하나도 깜짝하지도 않고, 어떻게 이런 말을 술술 잘도 할 수 있을까, 피도 눈물도 없이 잔인하다고는 했지만 영의정은 이제 그 도를 넘어선 인간이었다.
" 아버님은 소녀를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
" 뭐라? "
" 어찌 이리 한결같이 잔인하십니까. "
" 이 아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원망한다고 천지분간도 못하고 날뛰던건 너이니라! "
양 옆에 내려 두었던 손이 주먹을 쥐었다. 그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가 손톱이 살을 파고 들것만 같았다.
" 이 싸움에 승자가 누구일까 참으로 궁금해집니다. "
" 이제는 이 아비와 싸우려드느냐? "
"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
수희의 말에 영의정이 말을 잃고 쳐다보았다.
" 부디, 그 파멸의 끝에선 스스로 지으신 죄를 뉘우치시길 바랍니다. "
" 어디 감히! 아비에게 그런 방자한 말을 하는 것이냐!! "
"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
인사를 하고 수희가 안채를 나서자, 영의정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손바닥으로 연상을 내리치며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날뛰었다.
안채로 나와 바깥 공기를 맡은 수희는 마루에 서서 순간 갑갑해져버린 심장에 손을 얹으며, 내려가지 않는 무언가를 내리듯 주먹으로 가슴을 쳐내었다. 아무리 쳐도 거린것이 내려가질 않았다.
##
의금부 사방에 횃불이 들어서며, 그 앞을 지키는 군사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여뜨려졌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 앞을 세자,혁이가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걸으며, 뒤에서 지켜보는 상궁을 송구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 세자 저하. "
" 왜,왜그러느냐. "
혁이 몇 시간째 이렇게 의금부 앞을 서성이고 있자, 상궁이 말을 거들었다.
" 대군마마께오서 내일 유배를 떠나신다하옵니다. "
" ……. "
"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만나뵈옵소서. "
상궁의 말에 상궁에게 두었던 시선을 거두며, 붉은 횃불이 바람에 일렁이며 보이는 의금부를 쳐다보았다. 무엇이 혁이를 이토록 두렵게 만드는걸까, 대체 무엇이…….
##
수한은 한 쪽 벽에 기대어 자신의 손목에 묶어두었던 붉은 댕기를 어루만지다가 고개를 벽에 기대며 두 눈을 감았다. 어느새 이 곳에서 나는 피비릿내와 습기가 가득한 냄새가 익숙해진것 같았다. 이제 내일이면, 태어나서 한 번도 떠나본적 없은 궐을 떠나 낯선 땅으로 가야했다. 누군가와 함께가 아니라, 홀로…….
" 강진이라, 그곳에 무엇이 유명했드라-, "
" 벌써 그곳에 가실 생각을 하십니까? "
혼잣말을 하고 있던터라, 답이 들리자 수한이 놀란 눈이 되어 소리가 났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혁아! "
얼마나 기다리던 손님이던가, 수한은 활짝 웃으며 옥사 앞으로 다가가 혁이의 얼굴을 가까이서 마주했다. 며칠만이라 그럴까, 다른 때 보다도 더 의젓하고, 세자의 면모가 보이는것 같았다.
" 내일도 못보면 어쩌나했는데, 이리 와주었구나. "
" ……. "
" 끼니를 많이 거른 모양이구나, 안색이 어찌 이 모양인게냐. "
수한이 손을 뻗어 혁이의 마른 뺨을 만져주었다.
" 어찌 아무 말도 하지 않느냐? "
이 말에도,
" 혁아. "
이 부름에도,
" 형님의 목소리를 들으러 온 것이더냐? "
혁이는 결코 입을 열고,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반응에 수한이 더욱 더 활짝 웃으며 고개를 이리 저리 돌리며 혁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 네 마음을 잘 알고 있다. 말하기 힘들거든, 이렇게 있다가 가거라. "
배려깊은 수한의 말에 혁이의 한 쪽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 …죽는것도 아닌데, 울지 말거라. "
그 말에 반응이라도 하듯, 혁이의 두 뺨이 눈물로 얼룩지고 말았다.
" 그만 울래도 그런다, 내내 우는것만 뵈줄 작정이더냐? "
수한이 손을 뻗어 눈물을 거둬주려는데, 그 손을 혁이가 두 손으로 허공속에서 붙잡았다. 따듯한 체온이 오랜만에 수한의 손을 감싸고있었다.
" 제가 꼭…무슨 일이 있어도, 형님을 돌아오시게 할 것입니다. "
" 네가 있어서 이 형님이 듬직하구나. "
" 그러니, 잘 계셔야합니다. 부디…건강히 계셔야합니다. "
" 그래, 내 너를 봐서라도 꼭 그리하마. "
그러나 어쩐 일인지, 혁의 두 눈에선 눈물이 그치질 않고 홍수라도 난듯 흐리고, 또 흐르고 있었다. 수한은 내일 당장 유배를 떠나야하는 자신보다, 이렇게 마음이 약하고 착한 혁이가 더 걱정이었다. 자신보다, 이 곳에 남겨질 이들이 더 걱정인 수한이었다.
" 혁아. "
" …예,형님. "
" 아바마마를 옆에서 잘 보필해드리거라. 옆에 신료들은 많으나 모두 감언이설만을 내뱉고,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이들이니, 네가 굳건히 그 옆을 지켜드려야한다. "
" 예. "
" 어마마마께서는 이 못난 자식을 걱정하시느라, 매일 밤을 뜬 눈으로 지샐 것이니 네가 잘 보살펴 드리거라. "
" 예,그리 하겠습니다. "
당부의 말이 모두 끝났다 여겼지만, 수한의 두 눈이, 혁을 바라보는 눈이 아직 무언가 할 말이 남아있는것 같았다. 혁은 미동도 하지않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채 다음으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수한 또한 많은 생각과 고민 끝에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그렇게 힘겹게 나온 말은,
" 그 여인을, 네 배필이 될 여인을…잘…부탁한다. "
하지 않으려 했던 말이었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조금은 놓일것만 같았다. 그 말을 들은 혁은 조금은 놀란 눈으로 자신을 향해 여전히 웃고있는 수한을 보았다.
" 내가 말하지 않아도, 네가 알아서 잘 할 것인데, 내가 괜한 잔소리를 했구나. "
" ……. "
" 핫핫하-, "
수한이는 맞잡고 있던 혁이의 손을 더 꽉 잡아주었다. 그 온기속에, 서로를 향한 믿음이 가득 서려 있었다.
" 가끔 서찰을 보낼 것이니 그렇게라도 얘기를 나누자꾸나. "
" 곧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
" 그래,그래. "
" 그 때까지 몸 건강히 잘 계십쇼. 형님. "
마지막까지도 수한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혁이 안심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하기 위해서인지, 끝까지 나오지 않는 웃음을 짜내었다. 그리고 혁이가 감옥 안을 빠져나가자 아무도 없는 어둠뿐인 허공에 대고 작게, 나즈막히 말했다.
" 살고싶지…않구나……. "
##
다음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중전은 자신의 옆에 앉아서 꾸벅거리며, 졸고있는 엄상궁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중궁전 문을 열고 처소를 나섰다. 비단 신을 신고, 밖으로 나오니 새벽의 차갑고, 서늘한 바람이 중전의 뺨을 스치며 지나갔다.
" 에구머니, 중전마마! "
" 나 때문에 고생이 많구나. 엄상궁. "
말을 마친 중전에게 엄상궁은 송구하다는 뜻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그 행동에 미소로 보답한 중전이 어디로 가는 것인지, 의금부도, 대전도 아닌 다른 어딘가로 향했다.
잠시 후,
양 손에 다과상을 든 중전이 왕이 있는 대전에 서 있었다. 꼭두새벽인지라, 내시가 잠이 잔뜩 묻어나는 눈으로 중전을 향해 인사를 올리고, 곧 대전을 향해 소리쳤다.
" 주상전하, 중전마마 드시었사옵니다. "
" 들이거라. "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대전 처소 문이 양쪽으로 갈리듯 열렸다. 대전으로 들자, 많이 까칠해진 왕의 용안이 중전의 눈에 들어왔다.
" 이른 시간에 어인 일이시오? "
" 잠이 오질 않아, 봄에 따서 말려 놓았던 국화잎으로 차를 끓여보았사옵니다. "
" …그랬소? "
중전의 말이 끝나자, 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중전이 내려 놓은 다과상 앞에 앉았다. 끓이자마자 국화차가 식을까, 분주하게 걸어온 덕분에 아직도 따듯한 김이 모락모락 퍼져 나오고 있었다. 중전이 두 손을 뻗어,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자세로 왕의 앞에 놓인 찻잔에 국화차를 따랐다.
조용한 대전에 빈 찻잔에 국화차가 내려앉는 소리가 고요히 울려 퍼졌다.
" 어디, 중전의 솜씨를 맛봅시다. "
왕의 용안에 미소가 번지자, 중전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퍼져나갔다. 국화차를 한 모금 마신 왕은,
" 예전이나 지금이나 중전의 차 끓이는 솜씨는 일품이구려. "
" 과찬이시옵니다. "
왕이 들고 있던 차를 찻잔에 내려 놓으며, 고이 모여있던 중전의 손을 끌어다 잡아주었다.
" 중전이 상심하여 앓아 누우면 어쩌나 걱정을 했었소. "
" 그러시었사옵니까? "
" 그렇소. "
" 신첩은 괜찮사옵니다. 전하의 깊은 마음을 알기에, 상심하지 않았사옵니다. "
" 짐의 마음을 안다니, 고맙구려. "
" 세월이 흐르면 언젠가 대군의 손을 잡고, 지금을 추억삼아 차를 마실 날이 올 것이라 믿사옵니다. "
서로가,서로의 마음을 알기에 왕과 중전은 마음속 아픔을 잠시 내려놓고,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남들이 본다면, 자식이 귀양살이 를 떠나는데, 아침부터 한가로이 찻잔을 기울인다고 욕을 하겠지만, 한 나라의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인 이 두 사람에게는 아파할 시간이 없었다. 그것조차도 이들에겐 사치였고, 나라를 흔들리게 만들 요인이 될 뿐이었다.
대전의 삭막했던 공기가, 어느새 국화차의 따듯한 기운과 향긋한 향기로 따사로워지고 있었다.
##
이른 새벽부터 아침을 맞이한 것은 수희또한 마찬가지였다. 달래에게 부탁하여 목욕재개를 하고, 길게 땋아내렸던 댕기 머리를 푸르고, 다시 곱고 단정하게 땋았다. 진한 파랑색의 치마 위에 하얀 천 위에 피가 뿌려지듯 붉은 매화가 그려져있는 저고리를 입고, 그 아래에 색색이 호화롭게 만들어진 노리개를 달아주었다.
" 곱게,곱게 단장해줘야해. "
" …예,아가씨. "
달래는 말을 마치고, 두 눈을 감은 수희를 보다가 몰래 눈물을 훔치고, 다시 단장에 열중하였다. 백분을 바르고, 눈썹을 바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입술에 생기를 더해줄 연지도 발라주었다. 얼굴 단장을 마치니, 방금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라해도 손색이 없었다.
"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는데, 못난 모습을 뵈드리고 싶지 않아. "
" ……. "
" 지난날, 서책에서 떠나는 정인에게 곱게 단장한 모습으로 배웅을 해주는 그 여인네를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
" 그러셨어요? "
" 응, 그런데 이제는 그 마음이, 그 여인이 어떤 심정으로 단장을 했을지 알 것 같아. "
말을 마친 수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운 얼굴에 맞는 고운 미소를 지었다.
" 배웅 해드리러 가자. "
##
밖으로 나가니, 아침부터 거리가 떠들썩했다. 아마도 왕의 아들인, 수한 대군이 많은 소란끝에 유배를 가는 날이라 그런것 같았다. 수희는 떠들썩거리는 이들의 틈을 지나 수한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떨리는 마음으로 두 손을 모으고, 수한을 기다리고 있을 때,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며, 몇몇 군사들과 소가 끄는 수레에 몸을 맡긴 수한이 보였다.
그 때부터 수희는 입꼬리를 양 옆으로 곱게 접어올렸다. 수한이 탄 수레가 어느새 수희의 앞까지 당도해있었고,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듯 서로를 알아보았다.
' 오지 않기를 바랬소. '
' 눈에 훤히 다 보이는데, 거짓을 말하십니까? '
' 그대가 이제는 내 마음까지 읽나보오. '
' 우리는 부부가 아닙니까. '
그렇게 서로를 향해 눈으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수희는 수레가 움직이는 것에 맞춰 발을 떼며, 그 옆을 따라 걸었다. 이제는 그 수레와 한 몸이라도 된듯,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맞게 걸어갔다.
걷고,걷고, 또 걸었다.
'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을 벗어나는 길이오. '
' …조금만 더 가겠습니다. '
수한이 자신을 놓지 못하고 따라오는 수희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주변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잡초와 풀들만이 보였다. 수희는 수레의 곁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 그만 가보시오. "
" 조금만 더, 가겠습니다. "
" 이러다간 유배지까지 오겠소. "
그 말에 두 사람은 비집고 나오려는 눈물을 애써 누르며, 웃어보였다.
" 잘 사시오. 부디. "
잘 지내라는 말 대신, 살라는 말이었다. 그 말이 칼이 되어 수희의 몸을 긁어놓았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 마음은 늘 함께 하겠습니다. "
" 혁이를 외롭게 만들지 마시오. "
마지막 말이 수희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마치, 심장도 발과 함께 멈추듯 그 자리에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달래도 자신의 주인을 따라 자리에 멈추며, 조금씩 멀어져가는 수한의 수레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었다.
수희는 자리에 서서 두 손을 곱게 모으고, 이마에 가져다 대며 멀어져가는 수한을 향해 큰 절을 올려주었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다시는, 두 번 다시는 당신을 다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 멀리, 사랑하는 정인을 지켜주기 위해 목숨까지도 버리려했던 수희의 정인, 김 수한, 그가 떠나고 있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멀고 험한 길을, 동무 하나 없이 홀로, 쓸쓸히 가고 있었다.
* * *
안녕하세요,
너무 시간도 늦었고, 내일 일도 가야하는데 ㅠ_ㅠ
잠깐 쓰려고 했는데 이렇게 늦어버렸네요,
36편 올리고 저는 쏜살같이 사라져야겠습니당.
지난번편에 댓글 달아주신 분들 감사합니당.
우리모두 37편에 만나용? 휘리리릭-
업뎃쪽지 = 왕자의 여자
첫댓글 첫 댓글이네요!!!! ㅠㅠㅠ 이러다가 새드로 끝나지 않나 모르겠어요ㅠㅠㅠ 그러지 않게 해주세용~!!
-안녕하세요, 와우 첫손님이시네요~ 후우 결말까지 정말 몇편 안남았답니다. 저도 그래서 매일 새벽까지!!열심히!! 글쎄요..세드라...
왕자의여자 후후너무많이밀려서다읽고왔어요..결국국혼치르게되네요...수한이랑수희가너무안타까워요ㅠㅠ
-안녕하세요, 밀린것들 완결전에 다 읽으셨다니 다행이네요~ 그러게요, 결국은 이렇게 되어버렸네요, 두 사람의 사이가 안타까워서 저도 쓰는내내 마음이 애잔했답니다..ㅠㅠ
눈물나네요...수한은 정말 호인인거 같네요
마지막까지 혁이에게 하는 당부의 말...
또 수희를 부탁하는 말까지 ...
넘 수희 수한 혁 왕 중전까지 넘 불쌍해요
근데 수희가 모라도 한껀 하겠는데요??ㅋ
또 담편은 언제 기다리죠??
-안녕하세요, 그쵸? 저도 쓰면서 수한이의 처지가 되어서 정말 나라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마음씀씀이가 깊은것 같아요. 모든 인물들이 힘들고, 슬픈 시간을 보내고 있는것 같아서 쓰는 사람으로서도 마음이 좋지 않아요.ㅠㅠ 다음편까지 오래 기다리시지 않게 열심히 써나가겠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안녕하세요, 네, 왕의 어명이니 사약보다야 유배가 났지만...그래도..ㅠㅠ 흑 아무튼 수한이가 유배길에 올랐습니다.
왕자의 여자 / 유배를 가네요! 그래도 죽지 않는게 어디에요!! 그리고 수한과 혁의 우애가 정말 대단해요!
-안녕하세요, 그렇죠? 죽었다면 아마 이번편이 마지막편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ㅎㅎ 이번편에서도 형제의 우애가 여과없이 드러났죠? 저런 형제라니..후후 훈훈하네요 ㅎㅎ
슬퍼요 ㅠㅠ
-안녕하세요, 이번편은 정말 그 세글자로 표현되네요 ㅠㅠ
왕자의여자/우왕ㅜㅜㅜㅜ 너무 슬퍼요ㅜ 수한이랑 수희가 헤어지다니ㅜㅜ 혁이도 불쌍하고ㅜㅜ
-안녕하세요, 슬프다는 댓글이 정말 많네요,저의 의도대로...ㅎㅎ 두 사람의 사랑은 정말 지켜주고 싶었지만 극의 흐름을 위해 댕강- 잘라버렸습니다. ㅠㅠ
삭제된 댓글 입니다.
-업쪽드리겠습니다.
왕자의 여자/요번편이 제일 슬프네요..ㅠㅠ잔잔하면서도 애절해요ㅜ근데 우리 수한이 어떻해요..살고 싶지 않다는
대사가 제 마음을 찌르네요..ㅠ
-안녕하세요, 저도 쓰면서 정말 이번편처럼 제가 겪는듯 이렇게 마음이 아픈건 처음인것 같아요, 새벽이라 감수성이 높아서 그랬나.. 유배지에 가는 수한이에게 웃어주는 수희의 마음이 느껴지네요, 우리 수한이가 남긴 그 한마디.....잘 살아갈수 있을까요? 모든걸 잃고..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안녕하세요, ㅠㅠ슬프게 보셨다니 제 의도와 맞닿았습니다. 다시 돌아온다...음..글쎄요? 그렇게 될까요?
왕자의여자 드뎌유배지를 떠나는군요ㅜ
-안녕하세요, 네, 사약과 유배지 그사이에서 망설이던 나날이 흐르고, 수한이가 귀양길에 올랐습니다.
왕자의여자. 결국 유배를 가는군요ㅠㅠ 앞으로 어떻게될지 궁금해요. 수희랑 수한이 잘될수있는거겠죠?ㅜㅜㅜㅜ
-안녕하세요, ㅠㅠ수한이가 유배길에 오르면서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증을 유발시키죠?1 후후, 과연 두 사람에게 아직도 희망이 있을까요? 두 사람은 이미 모든 희망을 저버린듯합니다..
왕자의여자/ 히히~오늘 명동에서 발빠지게 쇼핑하구 오느라 늦게 왔네요 ㅠㅠ 근데 정말 이대로 끝인가요? 혁이가 제발 정신을(?) 차리고 왕을 설득하면.. 하여간 영의정을 죽여야 해, 영의정을!!!! 우이씨 -,.- 이렇게 미운 악역 처음임 ㅋ
-안녕하세요~ ㅋㅋㅋㅋ쇼핑의 늪에 빠지셨었군요 ㅋㅋㅋ와우,음.......완결을 몇편 앞두고 있는 상황인데...글쎄요...과연 어찌 될까요? ㅠㅠ
애달퍼님 왕자의 여자 37편 언제 오실거에요???
아~~~
왕자의여자.엥이때덧글못달았군요ㅠㅠ흠혁이가자신의권한으로담에라도영의정이꾸민짓이라는걸밝혀내면좋겠어요!!ㅠㅠ수희는피해가지않게가능하다면요...ㅠㅠ그리고수한이랑수희랑이제다시정말로못보는걸까요?!아니겠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