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의 죽음과 다산의 탄생, 참으로 무관한 일이었지만, 역사의 전개는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시파(時派)와 벽파(僻派)라는 당쟁이 격화되었고, 시파 계열에 속하던 자신의 집안 가계로 인해, 다산은 자연스럽게 시파에 속하게 되었다. 벼슬하던 동안의 어려움이나, 감옥에 갇혀 국문을 당하고, 귀양살이의 긴긴 고난이 이런 정치적 관계로 연유되었으니 세자의 죽음과 다산의 탄생은 따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세자의 죽음에 한없이 분노한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丁載遠)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세월을 보내던 때에 다산이 태어났고, 패악한 정치의 계절에 가슴아파하던 아버지는 태어난 아들이 벼슬하는 것보다는 농사나 지으며 행복하게 살라는 뜻으로 다산에게 ‘귀농(歸農)’이라는 아명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역사와 세월은 변하며 흘러가는 것이다. 관료생활에 길이 들었던 아버지는 얼마 뒤에 다시 벼슬길에 올랐고, 벼슬길에 오른 아버지 덕택에 다산은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비록 아홉 살 때에 어머니 해남윤씨께서 세상을 떠나 비애에 젖기도 했으나, 영특한 다산은 주로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다산이 조선 최고의 학자요, 사상가라면, 그가 태어나고 자랐으며 기본적 학문을 습득했던 곳, 벼슬살이와 귀양살이를 마치고 다시 고향에 돌아와 학문과 사상을 집대성한 <여유당전서>를 완성하느라 18년을 보냈던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현(馬峴)마을은 그야말로 역사의 땅이자 사상의 고향이다. 세상을 바꾸고 국가를 통째로 개혁하자던 그의 꿈과 희망이 영글었던 생가가 복원되어 덩실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가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바로 생가의 뒷동산에 묻혀 지금까지 170년이 넘도록 고이 잠들고 계시는 곳이 바로 그곳이니, 그곳을 어찌 역사의 땅이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생가인 ‘여유당(與猶堂:다산 서재)’은 바로 사상의 고향이다. 비록 먼 뒷날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그의 주저(主著)들이 완성되었지만, 그의 사상과 철학이 배태되었던 곳은 바로 그의 서재가 아니었겠는가. 1818년 귀양지이던 ‘다산초당’에서 완료한 <경세유표>라는 대저는 누가 보아도 그의 경세학으로는 대표적 저술이다. 나라를 경륜할 계책이 있지만, 죄인의 신분으로 어찌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죽은 뒤에 유언(遺言)으로 올리는 정책이라는 뜻으로 ‘유표(遺表)’라는 이름을 지었으니 국가경영의 방책과 통째로 나라를 개혁하자던 그의 계책은 대체로 그 책에 정리되어 있다. 왜 책을 지을 수밖에 없었는가. 어떻게 나라를 개혁할 것인가. 큰 계책은 무엇이며, 세부적인 방안은 무엇인가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해놓은 문자가 ‘경세유표서문’이라는 글이다.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부분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신하의 입장에서 임금께 국가경영의 정책을 조목조목 아뢰어 바친 내용이 바로 <경세유표>다. 그래서 다산은 그의 자서전 격인 <자찬묘지명>에서 경세유표의 저작 목적을 밝혔는데, 글자로는 다섯 자인 “신아지구방(新我之舊邦)”이었으니, 우리의 오래된 나라를 통째로 개혁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하였다. 전제조건이 ‘개혁’이라는 두 글자다. 개혁하지 않으면 우선 나라가 망한다는 무서운 경고를 하면서, 법과 제도를 개혁하기 위한 대안으로 <경세유표>를 저작하였다. 법과 제도가 제대로 집행되려면 공무원들이 청렴한 도덕성을 회복해야 하기 때문에 <목민심서>를 저작하였다. 수사와 재판의 공정성이 확보되어야만 억울한 누명으로 감옥 사는 사람이 없어지기 때문에 <흠흠신서>를 저작하였다. 국민 모두의 실천과 행위가 없이는 나라가 개혁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정신과 철학을 근본 뿌리부터 바꿔주기 위해서 국민의 교과서였던 주자학의 사서육경을 재해석하여, 성리학적 경서를 민중적이고 실학적으로 전환시킨 232권의 방대한 경학연구서를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서양서적을 읽으며 마음이 열리다 1792년은 정조 16년이었다. 그해 31세이던 다산은 벼슬아치라면 최고의 명예로 여기던 옥당벼슬에 임명된다. 옥당인 홍문관의 수찬(修撰)에 제수되었다. 이런 낭보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던 무렵, 세상이 무너지는 비보를 받았으니, 진주목사로 재임하던 아버지가 임지에서 돌아가셨다는 부음을 받고 말았다. 진주까지 달려가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의 시신을 고향으로 반장하여 장례를 치른 뒤, 집상(執喪) 중이던 다산에게 정조대왕의 명령이 내려졌다. 집상하는 때야말로 책을 보고 글을 짓기 좋은 시간이라며 수원 화성을 축조키로 하였으니 성(城)을 쌓을 설계도와 방법을 올리라는 분부였다. 다산 아니면 그런 큰 역사를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정조의 판단에서였을 것이다. 다산은 사실 23세 때인 1784년부터 친구 이벽(李檗)을 통해 천주교 관계서적이나 서양 책들을 읽기 시작했었다. 우물 안 개구리이던 조선 사람으로 서양에 대한 눈을 뜨면서 다산의 마음은 넓고 크게 열리고 있었다. 그 후 1791년에는 자신의 외종형인 진산의 윤지충이 천주교도로는 최초로 순교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다산은 천주교에서는 손과 마음을 떼었다고 했지만, 서양의 과학사상이나 기술에 대한 책들은 가까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던 다산에게 정조는 성의 설계도에 참고할 만한 서적이라고 하면서 <도서집성(圖書集成)> 안에 있던 <기기도설(奇器圖說)>을 내려주었다. 중국에 와 있던 서양선교사가 쓴 과학기술서적이다. 이런 책을 참고하여 다산은 기중기나 거중기 등의 성 쌓는 도구들을 발명해내는 위업을 성취할 수 있었다. 중국과 조선의 옛날 고전에 해박했던 다산, 거기에 서양의 과학사상과 근대적 논리가 합해지면서 그의 실학사상은 뿌리가 튼튼한 실용주의적 논리로 굳어지게 되었다. 일본의 경학연구서도 읽었다 “일본에서는 요즘 훌륭한 유학자들이 배출되었다. 물부쌍백(物部雙柏)이 바로 그런 사람으로 호를 조래(徠)라 하고 해동부자(海東夫子)라 일컬으며 제자들을 많이 거느렸단다. 지난번 수신사가 오는 편에 소본렴(篠本廉)의 글 세 편을 얻어왔는데 글이 모두 정예(精銳)하였다. 대개 일본이라는 나라는 원래 백제에서 책을 얻어다 보았는데, 처음에는 매우 몽매하였다. 그 후 중국의 강소·절강지방과 직접 교역을 트면서 좋은 책을 모조리 구입해갔다. 책도 책이려니와 과거를 통해 관리를 뽑는 그런 제도가 없어 제대로 학문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 와서는 그 학문이 우리나라를 능가하게 되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示二兒)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의 ‘두 아들아 보거라’라는 글에 나오는 이야기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사람들은 무조건 일본은 왜(倭)이고 못된 나라로 학문도 별볼 것 없는 나라로 여겼다. 그러나 다산은 예의 유학자들과는 달랐다. 일본의 경학연구서를 얻어 보면서 그들의 학문수준이 어느 정도였나를 명확히 관찰하고 있었다. <일본론(日本論)>이라는 몇 편의 논문을 지어서 일본 사정을 정확하게 설명하기도 하였다. 중국과 조선의 학문만을 고수하지 않고, 서양과 일본의 학문에 눈을 돌리고 마음을 기울이면서 세계사적 안목을 넓혔던 다산의 학문 경향은 확실히 남다른 면이 많았다. 요즘 말로는 이른바 ‘세계화 마인드’를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산의 열린 마음과 바로 뜬 눈에서 근대의 여명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지만, 탐관오리나 세도정치의 탐학과 부패에 시달리던 조선은 다산을 유배 보내 바닷가에 유폐시키고는 긴긴 어둠의 중세만을 계속하고 말았다. 역사의 땅 마현 다산의 고향 마현마을, 다산이 열수(洌水)라고 부르던 한강물이 넘실대고, 멀리 운길산의 수종사가 종소리를 울려 퍼지게 하여 나라의 개혁과 인민의 해방이 완성되는 희망도 있었지만, 이제는 다산은 눈을 감고 지하에 영면하고 있다. 그러나 그곳은 역사의 땅이다. 정약현·약전·약종·약용 등 4형제의 뛰어난 학문과 사상이 피어나 형성된 곳이다. 천주교의 초기 신앙인들인 이벽·이승훈·황사영 등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던 곳이다. 정약종과 그의 두 아들 정철상·정하상, 그의 조카사위이던 황사영이 죽음을 무릅쓰고 천주교의 수호를 위해 장렬하게 순교한 피가 연결되어 있는 곳이다. 정약용과 그의 중형 정약전의 실학사상이 자라났고, 다산의 두 아들인 정학연·정학유 등의 계승, 다산의 외손자 윤정기가 외가를 드나들면서 실학사상을 꽃피게 했던 곳도 그곳이다. 더구나 다산이 해배한 뒤, 1818년에서 세상을 떠나던 1836년까지의 18년 동안에는 얼마나 많은 당대의 석학들이 그곳을 출입하면서 다산과의 교유를 통해 학문의 범위를 넓혀갔던가. 석천 신작과 대산 김매순의 학문논평의 서찰이 수없이 오고갔고, 홍석주·길주·현주 3형제와 다산과의 교유는 얼마나 성대했던가. 그 모든 사람 중에서 또 정조대왕의 외동사위인 해거도위 홍현주의 마현출입은 외로운 다산의 노년에 얼마나 위로되던 일이던가. 이런 모든 역사를 그냥 말없이 간직하고 있는 마현, 그러나 열수라던 한강은 오늘도 도도히 흐르고만 있다. <박석무 | 한국고전번역원 원장, 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출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