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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된 화가 빈센트 반 고흐
The Artist, Vincent Van Gogh Becomes the Painting
그림 속에 들어가는 법
화가는 대상을 그린다.
그것이 사람이건, 동물이건, 전화기이건, 악기이건 그림은 그려진 것들의 모양과 성질을 보여준다.
그 대상들을 조합하여 더 복잡한 구성의 그림들을 그려낼 수도 있다.
작크 루이 다비드처럼 국가의 대의명분을 교훈적인 장엄함으로 그려낼 수도 있고,
외젠 들라크롸처럼 실제 사건이나 문학작품을 처참한 몽상으로 그려낼 수도 있다.
그림은 이처럼 모든 것을 그려낼 수 있었지만, 정작 그림의 제작자인 작가는 그림 바깥에 있었다.
화가가 그림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은 렘브란트처럼 자신을 화면 속 사건들의 주인공으로 혹은 구경꾼으로 그려 넣거나,
자신의 초상을 그리는 길이었다.
화가들은 이런 방법을 통해서 자기 작품들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증인이 될 수 있었고, 거기에 있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그림이 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빈센트 반 고흐의 많은 작품들을 떠올릴 수 있다.
검푸른 청색과 선명한 노랑으로 그려낸 별이 빛나는 밤,
노랗게 불타오르는 태양과 해바라기,
짙은 녹색으로 구불구불 하늘을 향해 자라나는 삼나무,
닳고 닳은 군화 그리고 그의 열정적인 자화상들.
그리고 이 작품들은 비록 소재를 달리했지만, 모두 하나같다는 느낌을 준다.
그 모두가 그의 고통과 열정적인 삶이고, 반 고흐 자신이다.
반 고흐는 그림 그 자체가 되었다.
그런데 누구나 반 고흐의 그림을 보면 다 그렇게 느끼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반 고흐와 함께 살았던 동시대인들처럼 당시의 미술의 기준을 가지고 반 고흐의 작품을 보는 경우이다.
이 기준은 원근법과 명암법, 그리고 그 작품이 어떤 흥미로운 주제를 가졌느냐이다.
또 그것이 얼마만큼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느냐이다.
현대인의 경우도 대동소이하다.
반 고흐의 그림을 보자마자 즉시 걸작이라고 평가하는 사람은 없다.
사실 미술사의 흐름을 이해할 때에만 그렇게 평가할 수 있다.
우리 모두 중고생시절에는 그 비틀비틀 휘어지고 왜곡된 형상들이 원색에 가까운 채색으로 덧칠된 반 고흐의 작품이
왜 그리 세계적인 걸작이라 하는 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반 고흐가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은 이렇다.
Impression, Sunrise (Impression, soleil levant), 1872; the painting that gave its name to the style and artistic movement. Mus?e Marmottan Monet, Paris
그림 1. 클로드 모네, 일출-인상, 1873, 48×63 cm, Musee Marmottan, Paris
Alfred Sisley, “Moret-sur-Loing” 1891
그림 2. 알프레드 시슬레, 로엥강변, 65×92 cm, Galerie H. Odermatt-Ph. Cazeau, Paris
Check out Ballet School by Edgar Degas
그림 3. 에드가 드가, 발레학교, 1873 Ecole de Danse By Edgar Degas
Two Sisters, oil on canvas, 1881, Art Institute of Chicago Pierre-Auguste Renoir
그림 4. 오귀스트 르느와르, 테라스, 1881, 100.5×81 cm,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Mr. and Mrs. Lewis Larned Collection
빛과 어둠
에두아르 마네 이후, 화가들이 전통적인 주제가 있는 작품을 그리지 않으면서부터,
그들은 주변의 사물이나 경치 등 이야기가 없는 대상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네는 수많은 정물화를 그렸고, 끌로드 모네와 시슬레는 햇빛으로 가득 찬 풍경화를 그렸고,
르느와르와 드가는 내용 없는 인물화를 많이 그렸다(그림 1,2, 3, 4).
이전과 동시대의 그림들 속에 가득 차 있던 신화, 역사, 상징들은 사라졌다.
‘인상주의’! Impressionism은 말 그대로 인상을 그렸다는 의미인데,
그 전 어느 화가도 인상을 그려내는 것을 그림의 목표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인상주의자들은 하찮고 가벼운 그림을 그린다는 조롱적 의도가 분명한 명명이었다.
당시까지도 대다수 화가의 목표는 우아함, 숭고함을 가지고 선과 진에 도달하려는 것이었다.
인상주의자들도 곧 그 가벼움을 알았고, 그 해결책으로 광학이라는 과학을 그림 속에 끌어들였다.
그것은 주황색을 표현할 때, 빨강과 노랑을 병치하면,
보는 사람의 눈이 이들을 섞어서 주황으로 본다는 이론,
망막에 비친 빨강의 잔상은 그 보색인 녹색이라는 보색 이론,
그래서 자연에는 회색이 없고, 그늘이나 그림자도 회색으로 그려서는 되지 않는다는 방법론 등이었다.
그래서 빛과 색이 목표인 이들의 그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비정신적이었고,
거친 필치의 물감덩어리와 색채 자체가 두드러지는 물질이 되었다.
이는 19세기 말의 실증적 과학시대의 한 표상이기도 했다(그림 5).
이 과학의 이면에서 반작용으로 자라난 것이 상징주의이다.
상징주의는 과학의 물질주의에 대항하고, 문화와 정신을 보존하기 위한 예술운동이었다.
상징 주의자들은 가시적 현실의 세계는 사상(捨象)의 상상된 외관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과학보다 문화, 물질보다는 정신을 추구하였다.
그래서 상징주의는 대상을 보이는 데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대상의 본질과 내면이 드러나도록 그리고자 한다.
Georges Seurat, Alfalfa, St Denis, 1885-1886
그림 5. 조르쥬 쇠라, 셍 드니 들판, 1885~86
The Yellow Christ (Le Christ jaune), 1889, Albright-Knox Art Gallery, Buffalo, NY.
그림 6. 폴 고갱, 황색 그리스도, 1889, 92.1×73.4 cm, Albright-Knox Art Gallery, Buffalo, NY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본질과 내면을 그려낼 것인가?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는 상징주의는
“하나의 사물로 하여금 점차적으로 어떤 기분을 드러내도록 하는 예술,
혹은 반대로 어떤 사물로부터 영혼의 상태를 이끌어내는 예술”이라고 했다.
과학이 분석을 지향한다면, 상징주의는 통합을 지향한다.
분석적인 언어사용이 있다면, 상징주의 시인은 어순을 뒤섞어서 시를 통째로 삼키게 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인상주의자들이 햇빛이 작열하는 풍경을 분석적으로 그리고 있었다면, 상징주의자들은 대상을 기억으로 그리려고 했다.
대중들에게 후기 인상주의자로 알려진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은 인상주의에서 시작해서 상징주의로 나갔던 화가이다.
그는 사람을 대상으로 작품을 할 때, 모델 앞에 장막을 치고 기억으로 그리고자 했다.
기억을 통하면 감각은 단순화되고, 세부적인 면이 없어짐과 동시에 종합적인 것이 부각되기 때문이었다(그림 6).
그는 말한다.
“인상파 화가들은 자신들의 눈 주위만을 찾았고, 사상의 신비스러운 내부세계는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완전히 피상적이고, 물질적이며 또한 감각적인 형태만으로 이루어진 예술이다.”
“작품은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에서 끝나는가?
극적인 감정이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퍼질 때,
그 감정들이 폭발하고, 화산의 용암처럼 생각들이 분출될 때,
바로 이때가 비인간적이고 거친 모습의 작품이 갑자기 창조되는 때가 아닌가?
이성의 차가운 계산은 이를 부화시키지 못한다.”
본질과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어딘지 음울하지 않은가?
과학과 이성이 사라진 곳, 비과학과 어두운 본성이 지배하는 곳,
정상적이고, 기독교적인 사고로는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믿음은 상징주의자들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시인 베를렌느나 랭보가 황음과 방탕 속에서 찾으려했던 진리는
결국 존재의 권태와 허무, 불안과 고뇌와 덧없음과 무의미함으로 만들어진 데카당스 정신 속에 잠겨있었다.
이들이 밀교와 악마주의 같은 秘學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성과 과학으로는 진정한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신념 때문이었지만,
어찌 보면 이성의 통제를 받아 뇌리에 감춰진 무의식을 깨우려는 데 있었다.
이 시도가 성공하기에는 세월을 더 기다려 1930년대 초현실주의 미술에 이르러서이지만,
그 씨앗일 세기말의 방탕과 퇴폐와 천재와 광기에 대한 예찬은 시대정신처럼 공기 중에 떠다녔다.
몽마르트르 언덕의 퇴폐적 유흥가에서 조르주 루오는 거칠고 검은 선으로 그려낸 신을 찾았고,
로트렉은 가스등 아래 창백한 인간 군상들을 그려내었다. 고갱은 심각했고, 반 고흐는 이 모두를 몸으로 겪어냈다.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는 네덜란드 남부의 작은 마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소심했고, 자학적이었던 반 고흐는
미술상의 점원, 벽촌의 어학교사, 서점의 점원, 탄광촌의 전도사 등의 직종을 전전하다 모두 실패한 후,
1881년 동생의 권유로 그림을 시작했다.
농민을 주로 그렸던 프랑스 화가 밀레를 존경했던 그는 처음부터 노동자, 농민 등 하층민들의 삶과 주변 풍경을 그렸다.
소재가 그러했었는지 그의 그림은 우울하고 어두웠다.
네덜란드의 습한 하늘, 후락한 농가의 풍경이거나,
힘든 농사일에 묻힌 농부, 노동집약적 공장의 고된 직공들을 感傷的으로 그렸다.
그는 관찰자가 아니라 대상이 되어서 그림을 그렸다.
<감자먹는 사람들,1885>(도판 7)은 이 시기의 걸작이다. 그는 가난한 식사를 하는 노동자들을 그렸다.
“나는 그렇게도 밭일을 많이 한 이 사람들이 등불 아래서 손으로 감자를 먹는 장면, 그들 자신이 그렇게도 정직하게 얻은 음식과 그들의 일을 표현하는데 힘썼다.”
그의 목표는 해부학적으로 정확한 인물을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보이는 것보다 더 진실에 가깝고 생생한 인물을 그리고자 했다. 그는 농부의 노동과 고통까지 표현해 내고자 했고, 그 표현을 위해서 형태의 왜곡, 변형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나는 아카데믹하고 정확한 형태를 그리고 싶지 않다. 오히려 부정확함을, 뒤틀림을, 현실의 변태나 변형을 습득하는 것이 나의 최대의 열망이다.”
“나는 검은 대지 위에서 몸을 구부리고 흙을 파는 사람의 모습을 그려놓았다. 그 사람의 모습은 <네 이마에 땀
을 흘려 빵을 얻을 지어다>라는 말을 생각나게 한다.”
感情移入. 대상에 자신을 동조시키고, 그 대상처럼 느끼고 이를 표현해내는 방법이다. 햄릿을 연기하면 햄릿이 되어야 하는 것과 같다. 반 고흐는 그 누구보다도 노동자였고, 농민이었다. 노동자와 농민이 언제 아름답고 매끈한 그림을 그려보았겠나? 반 고흐가 어둡게 그린 노동자와 농민들의 삶은 상징주의적으로 그려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교감에 의한 제작은, 그림 속에는 보이는 것만이 아닌 다른 것들도 들어있다고 생각하게 하고, 그림이 그러한 것이 될 수 있다고 믿게 한다. 그리는 방법과 보는 방법의 이러한 소통체계가 만들어지면, 곧 반 고흐가 그의 그림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체계가 만들어진 것과 같다.
The Potato Eaters, 1885. Van Gogh Museum, Amsterdam
그림 7. 빈센트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1885, 81.5×114.5 cm, 암스텔담 국립 반 고흐미술관
Restaurant de la Sirene at Asnieres 1887
그림 8. 반 고흐, 시렌 식당, 1887, 55×66cm, 오르세 미술관
Portrait of P?re Tanguy, 1887. Mus?e Rodin, Paris Vincent van Gogh
그림 9. 반 고흐, 탕기 영감, 1887, 92.0×75.0cm,로뎅미술관
파리, 아를르
동생 테오 반 고흐의 도움으로 빈센트는 1886년 2월에 예술의 중심지 빠리에 갈 수 있었다.
그곳은 인상주의의 빛이 찬란한 곳이었다.
그는 피사로와 시냑같은 인상주의자들, 고갱, 베르나르 같은 상징주의자들과 가깝게 지냈다.
인상주의자들로부터 밝은 색과 빛을 배웠고, 상징주의자들로부터는 상징주의적 감정이입을 배웠다.
<시렌 식당, 1887>(그림 8)에서 우리는 그의 그림이 현저하게 밝아졌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자유로운 짧은 필치로 햇빛에 노출된 풍경을 신인상주의의 기법으로 그려내었다.
파리에서 그린 200여점 대부분은 사생에 의한 것이지만
<탕기 영감>(그림 9)처럼 배경을 일본판화들로 구분하여 평평하게 칠한 작품은 폴 고갱의 영향을 보여주기도 한다.
사생으로부터 벗어나서,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는 길을 그는 고갱에게서 발견할 수 있지 않았을까?
1888년 2월 더 밝은 태양과 색을 찾아 남쪽지방 아를르로 내려간 빈센트는
동생 테오에게 고갱의 여비와 체류비 일체를 대어 고갱을 불러오게 한다.
이 두 화가가 함께 살면서 공동작업을 한 때는 1888년 9월에서 12월까지이다.
고갱과 함께하는 동안 그는 고갱의 화풍과 유사한 작품을 몇 점 그렸다.
보편타당과 객관성보다 인간영혼의 가장 섬세하고 주관적인 측면 혹은 내적 생명력의 신비로운 영역을 탐구하는 상징주의적인 작품들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분석보다는, 사고 이전에 마음에서 형성되는 힘을 포착하여야 하는 것이 중요했고,
고갱은 이를 강요했다.
막상 고갱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반 고흐는 고갱의 방법론을 받아들이기에는 자존심이 강했다.
그는 고갱의 방법에 대해 비판한다.
화가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이다.
“베르나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잡을 수 없을 때는,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처럼 하는 수밖에 없네.
가뜩이나 한정된 지혜를 낭비해 가면서,
종잡을 수 없는 형이상학적이고 비생산적인 명상에 빠진댔자 혼란을 정리할 수도 없고,
그 혼란을 담을 어떤 그릇도 없는 것일세.”
고갱은 대상을 마음으로 보려고 했지만, 반 고흐는 대상의 특성을 강조해서 묘사했다.
객관과 주관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더욱 진리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15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200점 가까이 유화를 그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그의 특징적인 거칠고 구불구불하고 뚝뚝 끊어진 필치들은 그 객관성을 주관성으로 바꾸는데 모자라지 않았다.
너무 정열적인 이들의 불꽃같은 만남 때문인지,
반 고흐는 정신병적 발작을 처음으로 일으켰다.
면도칼로 고갱을 살해하려다 죄책감으로 자신의 왼쪽 귀를 잘라냈고,
그 귀를 포장해서 알고 지내던 매춘부에게 선물?하는 소동을 벌였다(그림 10).
고갱은 파리로 달아났고, 반 고흐는 불안하다는 동네 주민들의 고발로 1889년 아를르의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그가 어떤 종류의 정신질환을 앓았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의 정신병원 수감 경력은 세상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더욱 독특한 것으로 보게 했다.
여하튼 정신병원에 수용된 반 고흐는 더 격렬한 필치로 작품을 그려내었는데,
편지는 정상적이다 못해 진지하기까지 하다.
<해뜨는 밀밭>(그림 11)을 그린 후 쓴 편지를 보면,
그가 대상을 통해서 대상에서 감지되는 의미를 파악하려고 노력했고, 그것을 표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또 한장의 그림은 아직 어린 보리밭의 해돋이일세.
멀어져가는 밭고랑의 선은, 그림 상단의 담장과 라일락 빛을 띤 연이은 언덕에 닿아 있네.
밭은 보랏빛과 황록색. 흰 태양은 커다란 황색 光輪으로 둘러싸여 있네.
이 그림에서는 숭고한 평화, 정적을 표현하려 했네.”
또 반 고흐는 같은 편지에
“적토색과 회색이 섞인 슬픈 초록빛과 윤곽을 이룬 검은 선과의 조합을 통해서
언제나 고통 받는 불행한 정신병원 동료들의 고뇌를 나타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처럼 그려진 대상 이외의 것을 늘 표현하려고 애썼고,
이를 더욱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색채들에 자의적인 상징도 부여했다.
애를 끓게 하는 황록색, 열정을 나타내는 짙은 초록색, 어떤 무한한 것을 환기시키는 강렬한 푸른색 등.
그는 자신의 상징색을 가지고 대상들의 속성 및 그 대상에 대한 그의 감정을 표현했다.
또한 그는 소재를 가리지 않고 그렸다.
정물, 인물, 들, 숲, 거리 등등을 닥치는 대로 그렸다.
그의 발길이 닿는 곳에서 본 모든 것을 열성적으로 그렸다고 해야 할 것인데,
그렇다면 결국 그는 대상들을 빌어서 그의 삶을 그린 것이 아니겠는가?
이때까지 어느 화가도 자신의 삶을 이렇게 표현할 수 없었다.
고갱도 그의 삶 자체를 표현한다기보다는 아직 상징주의 체계에 더 많이 붙들려 있지 않은가?
사실 다른 화가들의 경우보다 훨씬 더 반 고흐의 작품들은 그가 살았던 시기와 장소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가 그린 것이 인물이건, 삼나무건, 황량한 벌판이건, 교회이건
거칠고 구불구불한 그의 필치는 그 대상들을 모방하고 있다기보다는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그 모두에는 그의 삶과 고통이 숨겨져 있으며, 대상의 진실을 포착해 내고자 하는 그의 절실한 갈망이 배어 있다.
그가 재현한 것은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고갱처럼 본질의 세계도 아니고,
자신이 체험한 세계이다.
그가 필치가 되고, 그래서 그가 그림 자체가 되는 것,
그림 속에 자신의 모든 것이 육화되어 있는 것,
물질인 그림이 정신적인 것을 표현하는 것은 그 누구보다 반 고흐에 의해 이루어졌다(그림 12, 13).
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 1889, Courtauld Institute of Art, London. Vincent van Gogh
그림 10. 반 고흐, 붕대를 감은 자화상, 60×49 cm; Courtauld Institute Galleries, London
Wheat Field With Rising Sun by Vincent van Gogh
그림 11. 반 고흐, 해뜨는 밀밭, 1889, 71×90.5cm, 개인소장
The Starry Night, June 1889.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그림 12.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1889, 73.0×92.0 cm, New York, The Museum of Modern Art
The Church at Auvers / Vincent van Gogh
그림 13. 반 고흐, 오베르의 교회, 94×74 cm,오르세 미술관
구두 한 켤레
유랑하면서 풍경화를 제작하는 반 고흐에게 필수품은 햇빛을 막아주는 밀짚모자와 튼튼하고 발이 편한 구두이다.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을 여러 장 그린 것도 그 때문이고,
신발들을 여러 장 그린 것도 그 때문이다.
수 백리를 터벅터벅 걸어 다녀 녹초가 된 낡은 구두를 반 고흐가 그렸는데(그림 14),
미술관에 걸려 있던 이 그림을 보고 철학자 하이데커는 감격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예술의 진리를 발견했다.
“이 구두라는 도구의 실팍한 무게 가운데에는 거친 바람이 부는 평탄한 밭고랑을 천천히 걷는 강인함이 쌓여있고,
구두 위에는 대지의 습기와 풍요함이 깃들여 있다.
구두창 바닥에는 해 저물녘 들길의 고독이 깃들여 있고,
이 구두라는 도구의 가운데에서 대지의 소리 없는 부름이,
또 대지의 조용한 선물인 다 익은 곡식의 부름이,
겨울들판의 황량한 휴한지 가운데서 일렁이는 대지의 거절이 동요하고 있다.
이 구두라는 도구에 스며들어 있는 것은 빵의 확보를 위한 불평없는 근심과
다시 고난을 극복한 뒤의 말없는 기쁨과
임박한 아기의 출산에 대한 전전긍긍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의 전율이다”
진리는 어느 순간 이렇게 홀연히 드러나 보인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구두 그림은 1886년 후반기 파리시절의 작품이다.
그가 그림을 시작한지 5년 쯤 되었고, 파리에 온지 몇 달 만에 그린 것이다.
초보자의 그림을 놓고 하이데커는 호들갑을 떨었던 것인가?
그렇다기 보다는 하이데커가 알고 있는 반 고흐의 열정과 고통과 진지한 예술에의 열망이
그를 이 진리가 드러나는 순간으로 이끌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가 반 고흐의 삶을 잘 알고 있었다 해도,
반 고흐가 새로 산 구두를 그렸다면 하이데커는 들판과 습기와 풍요함과 고독, 부름과 거절 등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무심히 망각되고 은폐된 대지를 드러나게 한 것은
결국 그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을 사람과 그의 구두일 것이기 때문이다.
반 고흐는 그의 삶의 일부인 낡은 구두를 그렸던 것인데,
자신도 모르게 그는 화가의 삶, 하이데커가 아는 농부의 삶을 함께 그려낸 것이다.
하이데커는 그 삶 속에서 대지를 발견했고,
그림이 대상을 모방하고 재현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고 진리를 드러내는 경지에 도달하는 과정을 보았던 것이다.
Shoes - Van Gogh 그림 14. 반 고흐, 구두, 1886, 37.5×45.0cm, 암스텔담, 국립 반 고 흐 미술관
글 :: 오병욱님
동국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Noon Rest from Work, 1890
Van Gogh’s the yellow chair
Old Man in Sorrow (On the Threshold of Eternity) by Vincent van Gogh
Sorrow by Vincent Van Gogh
첫댓글 덕분에 명화감상 잘 했습니다^^
좋으신 날 되세요.
코로나에 건강하시고요
그림설명도 최고지만 공연도 최고네요
다시 공연봐야겠어요
피아노 연주 완전 좋아요
잘 보고있습니다.^^
건강하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