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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임금의 자식 중에 안安이라는 인물이 보입니다. 순임금은 상균에게 자리를 물려주지 않고 우임금에게 자리를 물려줍니다. 그런데 만약 순임금이 세미라미스와 동일인물이고, 요임금과는 부부지간이었다면 상균은 요임금의 장남 단주와 동일인물 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역사종합탐구에 ‘세미라미스와 순임금’을 기록하였으니 참고바라며 편의를 위해 이글 하단에 덧붙여놓았습니다.
그러면 순임금은 후계 중에 결국 안安이라는 인물이 ‘단안/돈안’임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의 그림은 집안集安에 있는 장군총입니다. ‘집안集安’이란 말 그대로 안安들이 모인 곳입니다. 즉 안安들의 무덤이 되겠네요.
이러한 돌로 쌓은 적석총 피라미드형식의 무덤은 한반도의 어디에도 없으며 고구려의 다른 지역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학자들은 이 무덤의 양식은 고구려무덤의 양식이 아니라는 점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즉, 장군총 역시 나중에 고구려 사람들이 그곳을 무덤으로 사용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처음 용도는 무덤이 아니었다는 말이며 이 피라미드를 쌓은 사람들은 고구려 사람들이 아니고 고구려이전에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이 쌓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피라미드를 쌓은 사람들은 누구이며 이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요. 그리고 이 피라미드를 쌓은 목적은 무엇일까요? 집안에는 이러한 피라미드가 약 100여기 정도 있다고 하며 본인이 확인한 것만 20개가 넘습니다. 그렇다면 이것들은 확실히 고구려왕들의 무덤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BC2000년경에 이곳은 바다와 가까워졌고 갑자기 추운 지역으로 기온이 바뀌었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살던 종족들이 이동해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피라미드는 언제 지어진 것인지 추정 조차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피라미드는 이집트의 피라미드와는 다른 목적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집트 기자의 피라미드 3개와는 많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부도지를 확인해보면 유호씨 일 족은 원래 이곳에서 살다가 신강성 투루판으로 이동합니다.
그런데 문명은 쇠퇴하여졌으나 피라미드를 세우는 목적 만큼은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위의 피라미드는 맨 윗 부분이 매우 넓고 평평하며 두터운 흙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것이 다른 지역에서 발견되는 피리미드와 차이입니다. 즉 맨 위에는 살아있는 나무를 심었던 것입니다. 이 피라미드위에 세운 살아있는 나무가 바로 우주목이며 신단수였던 것입니다. 위 그림은 필자가 컴퓨터그래픽으로 버드나무를 그려 넣은 것이며 버드나무는 단군을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이 피라미드는 기자의 피라미드 등보다 훨씬 후대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피라미드를 세우는 이유에 대해서는 매우 명확히 알고 있습니다. 이 피라미드는 5층 정도의 높이로 각각의 돌들은 모두 그곳으로부터 20킬로정도 떨어진 채석장에서 운반해 온 것입니다. 이 각진 석재의 윗면은 테두리를 5센티정도 남기고 가운데 부분을 약 1센티미터 두께로 모두 납작한 홈을 파내었습니다. 즉 윗 층에 있는 돌은 이 홈에 맞게 제단되어서 미끄러질 염려가 전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돌들은 자세히 조사해 보았는데 이 돌들의 홈은 정으로 판 자국이었습니다. 즉 BC1000년 이상 되는 시기에 분명히 철로 된 연장이 있었습니다.
왜 맨 꼭데기에 살아있는 나무를 세웠을까요? 그 해답은 정신세계사<식물의 정신세계>를 보시면 정확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보겔이라는 프랑스 학자는 식물의 정신을 실험하는 연구를 합니다. 그는 거짓말 탐지기를 식물의 입에 연결하고는 식물에 어떤 행위를 가할 때 그 전기 반응을 기록하였는데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식물은 매우 민감한 감정을 지니고 있고 수십킬로나 떨어진 존재들하고 텔레파시 등으로 교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매일 한번씩 어떤 나무에 가서 그 나무를 괴롭힙니다. 예를들어 불로 그 나뭇잎을 태운다든지 가지를 부러뜨린다든지 합니다. 그러면 나무와 연결된 거짓말탐지의 전기신호는 엄청난 격동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이 나무를 괴롭히는 사람이 나무로부터 20키로 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나무를 괴롭히기 위해서 막 출발하려고 하면 나무에게서는 두려움에 떠는 반응이 나나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 사람이 나무가 있는 쪽을 향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간다면 나무는 반응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마음속으로 진짜 나무를 괴롭힐 마음없이 그에게 라이터 불을 붙이는 시늉을 한다면 나무는 두려움의 반응을 전혀 일으키지 않습니다. 즉 어떤 행위에 대해서 반응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인간의 마음을 벌써 읽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우주인과의 교신을 시도하려는 많은 사람들은 머나먼 우주에서 오는 우주인이 보내는 전파 신호를 고성능 안테나로서는 잡아내기는 역 부족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택한 최선의 방법은 살아있는 나무를 높은 산 꼭데기에 세우고 그 나무에 컴퓨터를 연결해서 미세한 우주에서 오는 전기신호를 잡아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즉 꼭데기에 나무를 세운 것은 우주인들과의 교신을 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것입니다. 첫 번째의 난점은 피라미드의 꼭데기 까지 어떻게 물을 공급 하느냐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집트 기자의 피라미드는 꼭데기로 통하는 수로들이 있음이 발견되었고 그 수로는 나일강의 강물과도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왕비의 방 왕의 방이라는 곳에서는 실제적으로 무덤이 아니었습니다. 이집트는 왕들의 무덤이라는 왈들의 공동묘지가 따로 있습니다. 그곳에 쿠푸왕의 기록이 새겨진 것은 실제로 쿠푸왕이이것을 만들었던 것이 아니고 그전부터 있었던 거대구조물을 마치 자신의 업적처럼 광고하기 위해조작을 한 것 뿐입니다. 사실 이집트기자의 피라미드도 전통을 따르지만 그 꼭데기가 뾰쭉한 것은 이미 피라미드를 세운 목적이 잊혀진 것을 의미합니다.
다음의 그림은 크리스토퍼 던이라는 사람이 그린 피라미드 용도에 대한 추정입니다. 그는 왕의방과 왕비의 방이라고 하는 곳이 사실은 발전실과 동력실이 있었던 곳이며 이곳으로부터 전파를 발신하고 수신하는 장치가 있었다고 합니다. 즉 시리우스별과 오리온자리별과 의송수신을 했던 송수신탑이라는 주장입니다. 다음은 앤릴의 상형문자로서 정확하게 고성능 안테나를 상형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성능 송수신기는 처음 살아있는 나무를 사용하던 기법이 퇴화해서 나타난 것이지요.
기자의 피라미드를 보면 표면을 화강석을 갈아서 윤이 나게 하여 마감 처리한 흔적을 보실 수가 있습니다. 현제는 꼭데기에 그 것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는 붉은색이 도는 화강암을 거울처럼 갈아서 우주 높은 곳에서도 금방 볼 수 있도록 하는 비행유도장치로 쓰였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이것들은 자체적으로 전기를 생산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즉 수정압력에 의한 전기 생산인데 이 잘 연마된 화강암덩어리들은 그러한 효과를 내어서 피라미드에서 필요한 전기를 공급합니다.
즉 피라미드는 우주와 교신하는 교신소였습니다. 피라미드는 원래 두가지 특징 돌과 나무로 구성된 것이었지요. 이 피라미드의 특징이 하나로 남은 것이 바로 선돌이라는 솟돌이고, 또하나는 파오의 중앙에 세우는 나무로 변한 것입니다. 이것이 작은 형식상의 형태로 변한 것이 석성황의 중앙에 세우는 나무였거나, 또는 그 나무가 선돌로 대치 되기도합니다. 이것이바로 헤르마(석성황)입니다. 이것을 가느다란 막대위에 새로 표현한 것이 솟대가 된 것입니다.
第二十四章
유호(有戶)씨가 이와 같이 단단히 타일러서, 제법(諸法)을 폐지하고, 부도로 돌아 올 것을 권하였으나, 우(禹)가 완강하게 듣지 아니하고, 반대로 위협이고, 모욕이라 하여, 곧 무리를 이끌고, 유호씨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수차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모산(茅山) 진지(陣地)에서 죽었다. 이에 하중(夏衆)들이 비분하여, 죽기를 원하는 자가 수 만이였다. 이는 거의가 우와 함께 치수(治水)를 한 무리들이었다. 우의 아들 계(啓)가 이 대군을 이끌고, 유호씨의 읍(邑)으로 진격하여 오니, 유호씨의 군은 불과 수 천이었다. 그러나, 하군(夏軍)이 싸우면 반드시 패하여, 한번도 전적을 거양하지 못하였다. 계가 마침내 두려워서 퇴진하고, 다시 공격하지 못하자, 그 무리가 격양되었다. 이에 유호씨가 하중(夏衆)이 눈이 먼 것을 보고, 고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여, 장차 서남제족(西南諸族)을 가르치기 위하여, 그 무리를 이끌고 가니, 그 읍(邑)이 자연히 없어졌다.
제 6 장 : 잃어버린 부도의 법
第二十五章
이로부터, 천산(天山) 남쪽 태원(太原)의 지역이, 뒤숭숭하고 떠들썩하며, 주인이 없는 것과 같아서, 소위 왕이란 자는 눈이 멀고, 소위 장님은 백성이 되어, 암흑이 중첩하였다. 강자는 위에 있고, 약자는 아래에 있어, 왕과 제후를 나라에 봉하고, 생민(生民)을 제압하는 풍폐(風幣)가 만연하여 고질이 되고 마침내 서로 침탈하기에 이르니, 헛되게 생령(生靈)을 죽이고, 한가지도 세상에 이로운 것이 없었다. 그러한 까닭으로, 하은(夏殷)이, 다 그 법으로 망하고서도, 끝내 그 까닭을 알지 못하니, 이는 스스로 부도에서 떨어져 나가, 진리의 도를 들을 수 없게 된 까닭이었다. 어느덧 유호씨가 그 무리를 이끌고, 월식성생(月息星生)의 땅에 들어가니, 즉 백소씨(白巢氏)와 흑소씨(黑巢氏)의 후예가, 오히려 소(巢)를 만드는 풍속을 잊지 아니하고, 고탑(高塔)과 층대(層臺)를 많이 만들었다. 그러나 천부(天符)의 본음(本音)을 잊어버리고, 탑을 만드는 이유를 깨닫지 못하여, 도를 와전하여, 이도(異道)가 되고,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여, 싸우고 정벌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마고(麻姑)의 일은 거의가 기괴하게 되어, 허망하게도, 형적이 아주 없어지니, 유호씨가 두루 제족의 지역을 돌고, 마고와 천부의 이(理)를 설(說) 하였으나, 모두가 의아하게 여기고,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오직 그 전고자(典古者)가 송구스럽게 일어나서 맞이하였으므로, 이에 유호씨가 본리(本理)를 술회하여, 그것을 전하였다.
第二十六章
임검씨가 유호씨의 행상(行狀)을 듣고, 그 길을 장하게 여겨, 유호씨의 족(族)에게 교부(敎部)에 취업하게 하여 살도록 하였다.
옛날에 적제(赤帝) 즉 황제요, 휘가 부해(復解)이고 호가 「축융(祝融이란 사람이 한국의 제(帝)가 되어 BC 7,900년경에 기묘년에 나라를 세우고 풍주의 배곡에 도읍했다」라고 소씨 족보 서문인 <부소부서>에 기록되어 있다.
풍風씨는 지구상에 처음 있었던 성씨이다. 태호복희씨의 성씨로서 이미 사라지고 풍채, 풍모 등의 용어로만 남아있다고 하나 필자는 운남성에서 풍風씨를 만났다. 카인은 아벨을 죽이고 아벨의 형제와 짝이 되어 그곳을 쫓겨나가 둔황에 정착하게 된다. 이들은 그 후 계속 동진하여 중국 중원과 황하 유역에 살게 된다. 토얼번은 바다보다 115m나 낮은 곳이고 바람이 모이는 곳이라 하여 풍주風州라고도 불렀다. 풍이風夷/馮夷족은 이곳 풍주風州에서 발생한 종족이라는 뜻도 있을 것이다.
비옥한 땅이 아닌 황량한 평지에 심었던 곡식이 바로 콩이다. 콩은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라고 비가 적은 땅에서도 잘 자란다. 그래서 처음 조상들은 모두가 콩을 작물로 심어서 짐승도 기르고 사람도 살았다. 따라서 풍주風州는 풍주州라고도 쓴다. 풍주州는 풍년의 도시인데 풍이라는 글자는 콩이 콩깍지에 충실하게 열려있는 것을 표상한 글자이다. 따라서 척박한 땅인 풍주州에서 콩을 길러서 생활하였을 것이므로 풍주風州를 풍주州라고도 부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벨은 태호복희라고 쓰는데 태호太昊는 콩 하늘이라는 뜻도 된다.
환인천제의 깃발인 휘가 부해, 즉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호가 축융이란 말은 불을 다스리는 사람이란 뜻이다. 즉 하늘에서는 태양을 상징하고 땅에서는 불을 다스리는 신이라는 뜻이다.
환인천제의 부인이 해를 의미하는 오이(烏夷)족 출신이라는 것과 이름이 항영(姮英)이라는 것도 해를 의미하고 있다. 항(姮)자를 파자하여 보면 하늘과 땅(바다) 사이에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는 여자로 풀이할 수가 있다.
부해(復解)라는 말을 한자 표기대로 되새겨보면 “부”는 ‘다시 되풀이하다’로 풀이가 되고 ‘해’는 ‘풀다’는 뜻이 있으므로 부해 라는 말은 무엇인가 용서를 구하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무엇인가 얻기 위하여 잘못된 일이나, 노여움을 푸는 일을 되풀이하는 사람이란 뜻이 있다. 즉 노아의 방주같은 일이 되풀이 되고 있음을 말한다.
축융은 《성서》에서 두발카인과 동일인물일 것이다. 원래 축융이라는 호를 썼던 분은 고시高矢씨였다(BC 2,482) 묘룡의 후손 중에 황제 헌원이 태어난다. 따라서 중국민족 전체는 묘족의 후손이며 축융의 후손임을 알 수가 있다. 황제헌원이 축융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소씨문중의 축융이라는 선조는 태양주기 5,200년 앞에 동일한 분이 있었다고 하면 BC 8,712년경에 해당된다.
또 축융(祝融)이라는 말을 풀이하면 ‘축(祝)’은 빌다, 기원하다, 또는 신을 섬기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융(融)은 화합하다, 녹이다, 녹다 는 뜻이 있으므로 축융이라는 말의 뜻은, 신을 섬기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으로 신의 노여움을 녹이고 인간들 상호간에 화합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을 맡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유호씨가 살던곳은 천산(天山) 남쪽 태원(太原)의 지역이,라고 되어 있는데 지금의 태원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태원은 콩밭이라는 뜻으로 당시의 콩밭인 천산아래의 콩밭인 풍주였던 투루판을 뜻하는 말임이 분명하다.
고수(유호)=구스(제곡고신)인가?
고수(유호)와 고신(제곡고신)은 영어와 중국식발음으로는 모두 ‘구스’로 발음된다. 그러면 고수(유호)와 고신(제곡고신)은 동일인물인지 알아보자. 금문을 보면 여황(세미라미스)은 제곡고신의 딸로 되어 있다. <사기><서경><부도지>에는 고수는 ‘순임금’의 아버지이다. 순임금은 실제로는 여황(세미라미스)가 ‘순임금’으로 조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제곡고신은 구스가 틀림없고 순임금의 아버지 고수 역시 동일인임이 틀림없다.
‘구스’의 아들 ‘니무롯’은 실제로는 ‘구스’의 아들이 아니라, 강원姜原이 친정집에 갔을 때 용과 교접하여 얻은 아들이다. 즉 신으로부터 얻은 아들이다. 즉 성서에는 처녀의 몸으로 임신됨을 알려주는 수태고지가 그림으로 그려지는데 바로 이 예부터 내려오는 수태고지의 그림이 사천성에 많이 있다.
즉, ‘구스’는 ‘니무롯(요임금)’을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월등한 능력을 가진 ‘니무롯(요임금)’에게 왕권을 물려준 것이 아니라, 그의 다른 아들 ‘지’에게 넘겼다. 그가 ‘제지’이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금문의 가계도는 전혀 믿을 수가 없다. 아비부父는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신神이라는 뜻이었고, 자子는 아들이 아니라 사위의 뜻이었다.
그러면 이집트에서 제곡고신씨는 누구인가? 이시스=여황(세미라미스), 호루스=순임금, 제곡고신(구스/고수)=오시리스 이다. 그러므로 순임금은 실제로는 여황(세미라미스)과 제곡고신(구스/고수)=오시리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그는 니무롯(요임금/세트)에게 죽임을 당하고 찢겨지지만, 나중에 ‘토트’와 ‘이시스’의 마법으로 되살아나게 된다. 그래서 제곡고신의 문장기호는 귀신鬼神의 귀鬼를 사용하게 되었다.
제사를 지낼 때 제물이 되는 동물은 신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고 제물을 바치는 자의 제의를 통하여 이 힘과 하나가 된다. 마지막 희생제의를 끝내는 자는 하늘을 나는 ‘매’와 동일시된다. 이 지위를 획득한 자를 매와 같은 이름인 ‘남무-발’이라고 했다.
은나라를 세우는 설卨, 楔임금을 설왕한발卨王桓撥이라고 한다. 따라서 그가 바로 ‘호루스’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설’의 어릴적 이름이 ‘매’였다. 그리고 한발桓撥은 황제헌원이 치우와 싸울 때, 황제헌원을 도운 여신이며, 황제헌원 역시 황제여발皇帝女魃 이라고도하며 헌獻과 발魃은 같은 글자라 했다. 즉 이글을 보면 이는 ‘이시스=여황(세미라미스)’에 대적하는 황제헌원과 동일한 이야기임을 알 수가 있다.
여황(세미라미스)에 대한 이야기는 산해경에 실려있다. 그녀는 ‘기弃’라는 여신이며 강원姜嫄은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기弃’를 낳았다고 한다. ‘기弃’는 버려졌고, 새가 날아와서 날개를 덮어주고, 강원姜嫄이 다시 거두어 길렀다고 한다. 이 기독교에서는 이 새를 ‘비둘기’라하고
동양에서는 ‘기러기’라고 한다. <금문신고>에서는 기弃라는 인물은 ‘후직’으로 제곡고신의 딸로 강원姜嫄의 자식이다. 이시스=여황(세미라미스)=‘기弃’는 가짜 강원姜嫄/치우(대단군)로서 치우를 죽이고 자신이 그 자리를 노리려는 반역자였던 것이다. 즉 그녀는 실제의 ‘이시스’가 아니며, 자신을 ‘이시스’라고 주장한 반역자였다. <금문신고>를 보면 ‘여황女皇’은 분명 강원姜嫄의 딸로 되어있다. 즉 그녀는 자신을 강원姜嫄이라고 주장하며 강원姜嫄/치우(대단군)에게 항거한 한발桓撥이라는 가뭄의 여신이었다.
심청은 대단한 효녀였다. 그녀는 아버지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해주려고 공양미 삼백석에 팔려가서 인당수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용궁에서 용왕의 왕비가 되었고, 연꽃 위로 피어나서 지상에 돌아오게 되고 지상의 왕비가 되었고, 아버지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 심청역시 순임금(세미라미스)의 이야기를 미화한 것 임을 알 수가 있다.
순임금은 사실 이시스=여황(세미라미스)=‘기弃’와 그의 아들 ‘호루스’가 조작된 인물이다. 호루스는 셋트와의 전쟁 중에 눈알을 하나 잃는다. 전쟁이 끝나고 토트의 중재로 화해를 하였는데 그때 잃었던 눈을 그의 아버지 오시리스에게 바친다. 즉 오시리스는 ‘장님’이었다는 것이다. 즉 순임금의 아버지 고수(구스/제곡고신)가 장님이었다는 것과 일치된다. ‘예’는 ‘요임금’이 하늘에 요청하여 보낸 신장이었다. 그는 전투 중에 용(호루스)의 눈을 맞혔다고 되어있다.
만약 유호(고수)씨가 제곡고신씨이며 성경에 나타난 ‘구스’라면 그의 행적을 추적해보자. 구스는 처음에 천산 아래 지역에서 출발한다. 신강성 아래부분에 쿠처라는 곳이 있는데 쿠처가 바로 ‘구스’로 발음이 나며 , ‘힌두쿠시’ 역시 ‘구스’의 힌두식 발음이며, 이집트의기자의피라미드 역시 ‘기자’ 역시 ‘구스’의 발음이며 결정적으로 아프리카의 ‘이디오피아’를 ‘구스’라고 불렀다. ‘구스’는 이디오피아에서 홍해를 건너서 가나안 지방으로 들어간 것이다.
유호씨는 단군의 신하이면서 ‘고시’씨의 친형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필자의 생각으로는 ‘고시’씨가 바로 ‘구스’인 제곡고신 /유호씨로 보인다.
위의 부도지 기록을 보면 유호씨가 아프리카와 가나안에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그들은 소를 쌓는 습성이 있었으나 소에 대한 자세한 이력을 알지 못하여 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나온다.
성경 창세기 14:18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하나님의 제사장 은 ‘구스’였던 제곡고신 /유호씨로 보인다. 그의 이름을 딴 예루살렘 역시 그와 관련되어 보인다.
성경적인 근거는 창세기 13장 5절부터 나옵니다.
아브람(아직은 아브라함이 되기 전입니다 ) 과 롯은 양과 소와 장막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재산이 증가하여 땅이 부족하게 되자 목자들 간에 다툼이 일고 아브람은 롯에게 먼저 좋은땅을 고르게 합니다. 그리하여 롯은 여호와의 동산같고 애굽 땅같이 좋아 보이는 소돔과 고모라를 택하고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게 됩니다.
당시에 소돔왕, 고모라왕, 엘람왕 등 여러 왕들이 배반하여 두패로 나뉘어 싸우게 되고 소돔왕과 고모라왕이 결국 패하여 소돔에 있던 롯도 그 재물과 함께 사로 잡히게 됩니다. 아브람은 롯이 사로 잡힌 소식을 듣고 집에 있던 318명을 데리고 가서 조카 롯과 가족, 재물 등 모든 것을 찾아 옵니다. 승리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영접하였고 바로 이 장면에서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옵니다. 그리고 멜기세덱은 아브람을 축복하고 아브람은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줍니다. 특이한 점은 여러 왕들이 싸울 때에 살렘왕 멜기세덱은 없었는데 아브람이 승리하고 처음 나와서는 축복해주고 십일조를 받았습니다. 십일조를 바치는 습관은 단군임검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군임금의 뒤를 이은 임금인 부루단군의 ‘부루단지’라고도 하고, ‘업주가리’라고도 하는데 우리어머니들이 부엌에 두고 밥을할 때 꼭 쌀을 한줌씩 덜어내어 그 단지에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단지에 모인 쌀은 반드시 선업에 쓰도록 했습니다. 즉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든지,또는 스님들의 공양미로 썼던 것입니다.
세미라미스와 순임금
중국의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순을 성군으로 묘사한다. 이는 중국의 한나라가 공자의 이상을 위조하여 통치의 규범을 만드는 과정에서 유교의 기본 3강5륜을 만든다.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부위자강(父爲子綱)·부위부강(夫爲婦綱)을 말하는데, 각각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강조했다.
오륜은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을 말하는데 삼강과 더불어 기본적인 실천윤리로 강조되었다. 오륜도 삼강과 마찬가지로 상하관계적 질서의 확립을 통해 봉건적 신분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지배층의 통치이념으로 기능했다. 이는 남성위주의 질서이다. 순임금당시에는 여성위주의 전혀 다른 세계였다. 이것을 철저하게 남성위주의세계로 조작하다보니 역사를 완전히 위조하게 된 것이다.
중국의 <서경>과 <사기>를 따르면 순은 전욱 고양의 후손으로 성은 우(虞), 이름은 중화(重華)이고 우순(虞舜) 또는 제순유우(帝舜有虞)로도 부른다. 제왕의 후손이나 여러 대를 거치면서 지위가 낮은 서민이 되어 가난하게 살았다. 부친인 고수(瞽叟)는 장님으로, 순의 모친이 사망한 후 계비를 들여 아들 상(象)을 낳았다. 고수는 상을 편애하여 순을 죽이고자 하였고 순은 부모가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를 잘 피하면서 효도를 다하였다. 20세 때 효자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30세에 요가 순을 후계자로 삼고자 하고 순을 시험하기 위해 여러가지 임무를 맡기고 두 딸을 시집보냈다.
순이 등용되어 20년이 지난 후, 요는 순을 섭정으로 삼고 은거하였다. 8년 후 요가 사망하자, 순은 요의 아들 단주(丹朱)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변방에 은거하였다.
순은 왕위에 즉위한 이후 여러 신하들을 전문적인 직분에 따라 임명하였으며 사방의 오랑캐를 정벌하고 회유하여 넓은 강역에까지 통치가 미치게 되었다. 특히 홍수를 다스리기 위해 우(禹)를 등용하여 마침내 치수에 성공하였다. 우의 성공적인 치수로 농토가 증대되고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순왕의 뛰어난 인재 등용을 칭송하였다. 순왕은 우를 치하하며 그에게 구슬을 하사하였다. 우의 공로가 뛰어났고, 순의 아들 상균(商均)이 왕위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순은 재위 22년 만에 우를 하늘에 천거하여 후계자로 삼았으며, 재위 39년에 남쪽을 순수하던 도중 사망하였다.
《회남자(淮南子)》의 〈주술훈(主術訓)〉 편에 "요임금은 감히 간언하는 북을 설치하였고, 순임금은 그릇된 정치를 꾸짖는 나무를 세웠다(堯置敢諫之鼓, 舜立誹謗之木)"라는 말이 있다. 또 《구당서(舊唐書)》에도 "요임금은 북을 두드려 간언하도록 하였고, 순임금은 나무를 세워 경계할 말을 구하였다(堯鼓納諫, 舜木求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마루둑을 ‘말둑’으로 읽을 수도 있으므로 순임금이 ‘마루둑’과도 연결됨을 알 수가 있다.
요는 제곡고신帝嚳高辛의 아들이다. <죽서기년竹書紀年>(죽간竹簡에 기록한 연대표)에서 그를 도당씨陶唐氏라 하였다. 왕자시절엔 동궁東宮(태자)으로 불렸다. 그러나 아버지 제곡고신은 요를 젖히고 동생 지摯를 제위帝位에 올렸다. 요가 대권 경쟁자인 중려를 죽였으나 허사가 되고 말았다.
요의 씨칭은 천군天君이다. 요는 두 아들 단주丹朱, 고도皐陶와 두 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두었다.
순(제위 9넌, BC 2320~3212)은 전욱고양顓頊高陽(BC 2467~2421)의 제5자이다. <죽서기년竹書紀年>에서 그를 유우씨有虞氏라 하였다.
순은 모계사회를 부계사회로 혁신하고자 했던 인물이다. 그에게서 유신維新이라는 말이 나왔다. 당시는 푸날루아로 맺어진 사회였다. 푸날루아는 근친상간의 복수複數 혼인 제도를 말한다. 남편이 둘에 부인이 둘이다. 이를 개혁하여 1부1처제로 만든다는 뜻을 가진 말이 유신이다.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제위에 올랐다. 유신에 성공하는 듯싶었으나, 그의 혁명정책에 반기를 든 모계사회가 우禹를 내세워 쿠데타를 일으켜 순을 죽임으로써 그의 혁명은 실패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쿠데타의 주동자는 요의 어머니이면서 순의 왕고모인 종규가 곤의 딸 간적, 그의 아들 우, 우의 부인이자 곤의 딸 사모무, 또 순의 딸 사모신이었다. 우가 순울 죽이고 모계 가족과 친족이 우를 제위에 올려놓았다.
동서同壻라는 말은 두 여자의 공동 남편이라는 말이다. 이들이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그래서 동서라는 말이 배신背信이라는 말로 바뀌었다.
그러나《부도지》의 기록을 중심으로보면 요순은 악당으로 묘사되고 있다.
유호씨는 <부도지>의 기록 이외에 알려진 것이 없다. 부도지에서 유호有戶라 하였고, <죽서기년>에서 유호有扈라 하였다. 第十八章
이에 임검씨가 그것을 심히 걱정하여, 유인씨(有因氏)의 후손 유호씨(有戶氏)의 부자로 하여금 환부(鰥夫)와 권사(權士)등 100여인을 인솔하고 가서 그를 깨우치도록 하였다. 요가 그들을 맞아, 명령에 복종을 하고, 공순하게 대접하여 하빈(河濱)에서 살게 하였다. 유호씨가 묵묵히 그 상황을 관찰하고, 스스로 사람들을 가르치며, 여러 번 그 거처를 옮겼다. 이보다 먼저 유호씨가 부도에 있을 때에 칡을 먹고 오미를 먹지 아니하였으므로, 키는 열 자요, 눈에서는 불빛이 번쩍였다. 임검씨보다 나이를 100여 살이나 더 먹었으며,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직업(業)을 이어, 임검씨를 도와, 도를 행하고, 사람들을 가르쳤다. 이에 이르러 사자(使者)가 되어, 완미(頑迷)한 세상을 구제하니, 그가 하는 일에 어려움이 많았다. 때에 요가 유호씨의 아들 유순(有舜)의 사람됨을 보고, 마음 가운데 딴 뜻이 있어, 일을 맡기고, 도와 주며, 두 딸로 유혹하니, 순이 곧 미혹하여졌다. 유순이 일찍이 부도의 법을 행하는 환부가 되어, 마침내 (능력이) 미치지 못하여, 두 딸을 밀취(密娶)하고, 어리석게도 요에 붙어 협조하였다.
第十九章
이 때 유호씨가 수시로 경계를 하였으나, 순은 예, 예, 하고 대답만 하고는 고치지 않았다. 그는 끝내 요의 촉탁을 받아들여 현자를 찾아 죽이며, 묘족(苗族)을 정벌하였다. 유호씨가 마침내 참지 못하여 꾸짖고, 그를 토벌하니, 순은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고, 요는 몸을 둘 땅이 없으므로, 순에게 양위하고, 자폐(自閉)하였다. 유호씨가 이르기를, 오미의 재앙이 끝나지 않았는데, 또 다시 오행(五行)의 화를 만들었으므로, 죄는 땅에 가득하고, 북두성은 하늘을 가리어, 수사(數事)가 많이 어그러져, 인세(人世)가 곤고(困苦)하여 졌다. 이는 불가불 바로잡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또 알지 못하고 범하는 자는 혹 용서하여 가르칠 수도 있으나, 알고 범하는 자는 비록 지친(至親)이라도 용서할 수가 없다 하고 곧 차자(次子) 유상(有象)에게 명하여 권사(勸士)를 이끌고 무리를 모아 죄를 알리고, 그를 치게 하니, 수년 동안 싸워서, 마침내 당도(唐都)를 혁파(革罷)하였다. 요는 유폐(幽閉) 중에서 죽고, 순은 창오(蒼梧)의 들에 도망하여, 도당(徒黨)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요의 무리 우(禹)가 순에게 아버지를 죽인 원한이 있으므로 이에 이르러, 그를 추격하여 죽여버렸다. 순의 두 처(妻)도 역시 강물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우가 곧 정명(正命)으로 입공(立功)한다고 말하고, 상의 군사를 위로하고 돌아가므로 유호씨가 물러나서 우의 소행을 관찰하니, 이 때에 우가 도읍을 옮기고, 무리를 모아 방패와 창을 보수하고 유호씨에게 항거하여, 자칭 하왕(夏王)이라 하였다.
그때 요가 유호씨의 아들 유순의 위인 됨을 보고 마음 가운데에 다른 생각을 그리더니 일을 맡기면서 도와주었다. 그의 두 딸로 유혹하니 순이 미혹 당하였다. 유순이 일찍이 부도의 법을 집행하는 환부가 되었으나 능력이 모자라 절도를 지키지 못하니 요에개 미혹당하여 요에게 가서 있게 되었다. 두 딸 여영과 안을 몰래 취하여 몰래 붙어 협조하였다.
<열녀전>에 유우이비有虞二妃라는 기록이 있는데, <부도지> 18장에는 <열녀전>에서 有虞를 순이라 하였다. 유우와 순이 같은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요의 두 딸에게 장가 간 사람이 유순有舜이었다. 그러므로 유우, 유순이 같은 사람이라 하겠다.
조선의 단군왕검 치세 때 BC 2198년(병진 49년)에 “당요가 순을 불러들여 두 딸 중에서 큰 딸 아황娥皇은 정비로 둘째 딸 여영女英은 차비로 시집보내어 순으로 하여금 국정을 맡아 보게 하였다. 순이 요지遼地(요서와 요동)에 3주를 설치하고자 하였으나 단군왕검이 불가하니 중지하라고 유시하라 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朝鮮紀>)
순이 한 때 환부를 맡아 보았으나 능력이 딸려 절도를 지키지 못하였다. 우가 반란을 일으켜 순을 죽여 창오蒼梧에 장사지냈다.
그러나 앗시리아의 기록을 보면 우리는 순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 수가 있다.
니누스는 니누스 혹은 니네베를 수도로 한 전설상의 앗시리아 제국의 창건자며, 그는 위대한 전사로서 기원전 2182년 무렵 니누스(니무롯) 혹은 니네베를 건설하고 아시아의 거대한 부분을 정복했던 한 위대한 전사였다.
세미라미스는 시리아쪽 설화에 의하면 시리아에서 아스칼론의 물고기-여신의 딸이었다.
그녀가 태어나자 너무 나약해 이를 부끄럽게 여긴 여신이 딸을 바닷가에 내다 버렸다.
그러나 불가사이하게도 아기는 이웃의 목동이 발견할 때까지 갈매기들의 보호를 받고 먹여졌다. 그녀는 그후 시마스라고 하는 궁전 가축 떼의 수석 목자에 의하여 양육되었다.
그리하여 그녀의 이름, 세미라미스를 얻게 된다. 그녀의 놀라운 용모의 아름다움으로해서 그 나라 국왕의 친구들이자 장군들 중의 일인이었던 오네스(오아네스/곤곤)의 주의를 끌어, 그는 그녀를 아내로 맞았다.
박트라와의 전쟁 때, 세미라미스는 도시의 성채를 공결할 계획을 입안했고 한 두명의 용감한 동행자들과 성벽들에 올라가 요새를 점령했다. 왕 니누스(나무롯/요임금)는 그녀의 용감함과 용모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마침내 그녀를 아내로 맞고자 그녀의 남편(구스/제곡고신)을 제거했다.
니누스로부터 그녀는 닌야스란 한 아들을 얻었으며 니누스 서거 후, 그녀는 아들을 왕으로 세우기에 성공했다.
니네베에 그녀는 남편을 위하여 높이 9스타디아, 폭10스타디아의 능을 축조했고, 그 모든 불가사이 함을 지닌 도시 바빌론을 건설했으며, 메디아에는 공중정원을 축조하여 나중에 문필가들이 우리들에게 그처럼 놀라운 이야기들을 남겼다.
아시아의 다수의 나라들을 정벌했을 뿐만이 아니라 그녀는 이집트를 정벌하고 이디오피아의 큰 부분을 그렇게 했지만 그녀가 인도를 공격한 일은 성공하지 못했다.
42년간 통치후에 그녀는 아들 닌야스(탐뮤주/순임금)에게 자리르 물려준다. 그후 그녀는 갈매기 모양으로 하늘로 날아가 사라졌다.
설화에 의하면 세미라미스는 아름다운 아르메니아 왕, 에이라의 명성을 듣게 되었다고 하며 그의 인물상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기와 결혼할 것을 청했다. 그러나 그는 거부한다.
이를 듣게 된 여왕은 아시리아 군을 소집하여 아르메니아로 진군했다. 전쟁터는 아레이레 협곡으로 여겨지며 전투 중에 에라이에아는 살해당했다.
아르메니아와의 계속 되는 전쟁을 피하려고 세미라미스는 죽은 자들 중에서 에이라를 소생하게 해달라고 신께 기도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이 그들의 지도자를 복수하기 위하여 진군하자, 그녀는 그의 애인중의 하나를 변장시켜 제신들께서 에이라를 다시 소생하게 했노라는 소문을 퍼트렸다. 그 결과로 전쟁은 끝이 났다.
세미라미스는 그녀의 대적할 이 없는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그와 같은 기품으로, 그녀는 바로 단순한 인간이상의 그녀의 장려한 우미를 앞세우는 것 같으며, 그러나 동시에 그녀의 평판은 강력한, 시리아의 반신/인간 여걸, 허클레스(그리이스명 헤라클레스) 의 여성 전 타입으로서 더욱 더 묘사 되고 있다.
그녀의 석비( 기념석판)는 아수르에서 발견이 되었고 , 반면에 칼라(님루드)에서의 명문은 그녀가 남편 사후에 그녀 아들이 통치하기 전에 통치를 했었음을 보이고 있다.
우리는 순임금이 요임금(니무롯)의 섭정을 했다는 부문을 의심해 볼 수가 있다. 즉, 니무롯(요임금)은 일찍이 세미라미스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고 세미라미스가 섭정을 한 것이다. 그녀의 아들인 순임금(타뮤즈)가 아직 어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순임금은 성장하자 남성중심의 국가를 세우려고 했다. 그래서 여성 중심국가를 세우려고 한 우임금의 손을 세미라미스가 들어 준 것이다.
요임금의 부인은 강원姜源이었는데, <금문신고>에는 제곡고신의 부인중에 강원姜原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여황은 요임금의 딸이 아니라, 요임금과는 배다른 여동생이다. 즉 여황이 바로 세미라미스이며 그녀가 다시 아들인 순 임금의 부인이 된다. 요임금의 아들은 단주, 안, 고요, 여영이고, 순임금의 자손은 진, 상균, 사모신, 반번이다.
《산해경》에는 실제로 순임금이 누구였는지 진실을 말해주고 있다.
황제헌원은 기箕를 죽여서 북채를 만들고 뇌신을 죽여서 북을 만들었다고 되어있다. 악사들은 그 직업의 조상이 되는 장님노인 괴와 옥황이 그 가죽을 벗겨 최초로 북을 만드는 기를 숭배한다. 그런데, 북은 무엇인가? 요임금이 바로 북을 만들어놓고 정치를 했던 인물이며 고수가 바로 장님노인이라 하지 않는가? <부도지>를 보면 천신은 요를 도와서 예라는 신장을 보냈고, 예는 하늘에 뜬 아홉 개의 해를 모두 쏘아 떨어뜨렸는데 나중에 천신의 미움을 받아서 예는 버려졌고, 예는 그의 제자 봉몽에게 몽둥이로 맞아죽었다.
다시, 앗시리아에서 발견되었다는 길가메쉬 서사시 점토판 예기로 돌아가 보자. 여신 인난나(아쉬타르)는 길가메쉬에게 반하여 그에게 청혼했다. 그러나 그의 어미는 여신 이난나가 수많은 남성 왕들을 애인으로 삼았다가 결국 그를 차버린다는 것을 알았기에 길가메쉬에게 이난나에게 넘어가지 말도록 설득한다. 그 뒤 이야기는 없지만 길가메쉬는 결국 그녀가 권력을 주겠다는 유혹에 빠지게 되어 결국 왕이 된다. 그가 바로 니무롯(요임금)이다. 길가메쉬는 홍수이전부터 살았다는 노인을 만나서 영생의 약초를 캐러 머나먼 곳으로 간다. 힘들여서 불노초를 구하지만, 뱀이 그것을 먹어버린다.
예의 부인은 황아이다. 예는 서왕모로부터 불노초 두 개를 구했는데, 그것을 모두 황아가 먹고는 달나라로 도망가버렸다. 즉, 예와 길가메쉬는 여러 가지로 일치하고 있다. 황아는 <삼국유사>에는 황아가 소호금천씨를 낳았다. 라고 기록되므로 소호금씨씨의 어머니는 <사기>에서는 ‘뇌조’이다. 그러므로 ‘황아’와 ‘뇌조’는 동일인물이다.
윗그림은 사천성 구채구의 쇠라톤호텔 방에서 찍은그림으로 수태고지를 받는 성모마리아.
요임금의 둘째아들 이름이 안安인데, 단군은 단씨성을 쓰므로 ‘단안’이라 했다. 또는 ‘돈’이라고도 했고 ‘돈안’이라고도 했는데, ‘단안’의 딸과 결혼해야만 왕이 될 수 있었다. ‘단’이란 ‘여성’의 뜻이었다고 하고, ‘안安’이 ‘암’으로 읽혀서 ‘바위’ 또는 여자(암컷)라고도 했다. 예가 용으로 변한 하백의 왼쪽 눈을 쏘았다는 기록은 이집트신화의 내용과 같다. 즉 세트와 호루스의 전쟁에서 호루스(하백)는 셋트(예)가 쏜 화살에 맞아서 한쪽 눈을 잃었다. 즉 이시스 여신이 세미라미스에 해당하고 그의 어린 아들이 호루스(탐뮤즈/순임금)이며 , 예가 바로 니무롯임을 알 수가 있다. 예는 하나라 왕 태강중랑(고수/유호)를 핍박하고 그 아들 상相을 쫒아내고 왕위를 찬탈하고 스스로 제로 칭했다.
예수님은 ‘샤론의꽃’으로 불리었는데 ‘샤론의 꽃’은 ‘순화’인 무궁화 꽃이고, ‘순화’는 순임금의 어릴적 이름이다. ‘아가’라는 말은 어린아이를 부르는 말이다. 즉 어린 아기예수이다.
샤론의 꽃 같은 그대, 사과나무 같은 당신.
1.(여자) 나는 샤론의 수선화, 골짜기에 핀 나리꽃이랍니다.
2.(남자) 아가씨들 사이에 있는 나의애인은 엉겅퀴 사이에 핀 나리꽃 같구나.
3. (여자) 젊은이들 사이에 있는 나의 연인은 숲속나무들 사이의 사과나무 같답니다, 그 이의 그늘에 앉는 것이 나의 간절한 소망 그이의 열매는 내입에 달콤하답니다.<아가서 2장 1절>
명왕성의 위성인 샤론의공전주기는 6일로 1978년에 발견된 위성이며 명왕성 크기의 반에 해당한다. ‘카론’이라고도 읽고 지옥의 강을 건너는 뱃사공이다. 영어로는 ‘새런’이라고 읽는데 여자이름으로 많이 쓰이고 ‘매우 아름다운 공주’를 뜻했다. 성서의 외경에서는 그리스도의 모성적 신을 지칭할 때 소피아, 프뉴마, 로고스라고 했다.
요임금의 아들인 단주는 순임금의 아들인 상균이라한다.<산해경>
요임금이 취한 산의 씨의 자녀가 여황女皇이다. 여황은 단주를 낳았다.<산해경>이 기록을 보면 여황女皇(세미라미스) 이 바로 순임금인 것처럼 되어있다. 즉 두 사람이 부부인 것 처럼 되어있다.
위를 종합해보면 세미라미스는 향년 62, 재위는 42년간에 달하였다. 그러나, 순임금은 100세에 죽었다. 세미라미스는 섭정을 했고, 순임금 역시 섭정을 했다. 즉 동양의 모든 기록은 남성 우월주의의 입장에서 쓰인 것이므로 세미라미스 여황女皇의기록을 삭제한 것이다. 그리고 세미라미스와 순임금을 합하여 하나의 인물로 조작하였다. 세미라미스는 그의 아들(순)이 자신과는 반대로 남성중심의 국가를 만들려고 하자 결국 아들에게 양위를 한다.
사천성 성도는 아직도 도시명을 ‘부용’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도시에는 부용을 많이 심어놓았는데 ‘부용’은 무궁화 꽃을 부르는 이름이다.
사천성 성도공항에서 찍은 아기예수를 낳은 성모상
세미라미스는 이시스 여신과 동일시되었고 그녀로부터 삼위일체신의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위는 사천성구채구 쇠라톤 호텔방에서 찍은 성모상과 사천성 성도공항에서 찍은 성모상이다.
첫댓글 다음글은 바벨탑은 누가 어디에 왜 세웠는지 그리고 그것을 누가 왜 무너뜨렸고 어떻게해서 인류의 말이 서로 다르게 만들었는지 정확한 근거를 대어서 진술하겠습니다.
요임금과 고수(제곡고신)은 중국기록에는 서로 원수관계인데 금문에는 제곡고신의 아들이 요임금으로 되어있고 성서에서도 구스(제곡고신)의 아들이 요임금(니무롯)으로 되어있다. 중국기록에는 요임금은 제곡고신(고수)의 실제아들이 아니고 의붓아들이라는기록이다. 그러나, 아들자는 사위라는 의미였고, 앗시리아기록과 <부도지>기록을 참고하면 요임금은 제곡고신의 아들이 아니라 사위가 틀림없다. 옜날에는 여성중심사회로서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지않고 사위에게물려주었다. 그런데 이권력은 선양이란 것이없었고 항상 무력과전쟁에의해서 물려졌다.즉 장인과 사위사이에는항상 전쟁이있었다. 즉 뛰어난 장인은 그의 제자들중에서 뛰어
뛰어난 자에게 자신의 딸을 주어서 사위로 삼고 그자를 아들이라고했다. 즉 사위가 아들자子로 기록된 것이다. 사위는 장인을 아비라고 불렀다. 그래서 직업의 스승인 장인과 처의 아비인 장인이 똑같이 장인이라고 부른 것이다. 프레이져 경의 <황금가지>를 읽어본 분이라면 위의이야기를 금방 알 수가 있다. 모든왕구너은 항상 전쟁으로물려지는것이었다. 왕은 그에게도전하는자를 항상 이겨야만 왕의 자리를 보전할 수 있는 것이었고 새로운왕은 전왕을 죽여야만 왕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대체로 새로운 왕은 그의 사위였다. 그러므로 신화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고대사를 이해 할 수가 없는것이다.
글이 너무 길어서 다 보진 못했습니다. 두가지 기초사실을 알려 드립니다. 피라미드는 '피라=불火', 미드='가운데'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스핑크스는 바위를 통체로 조각하여 만든 것이랍니다. 피라미드처럼 돌로 쌓아서 만든것이 아닙니다. 신전앞에 있는데 신전을 보호하는 수호석정도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공중에서 보았을때 스피크스는 개가 편안하게 앉아있는 모습입니다. 신전을 바라보면서 말입니다.
하이돌님은 너무 상상력이 좋으셔서, 제가 따라가기가 힘듭니다. 읽는 사람들의 수준을 고려하여 최소한의 논리전개와 논리와 논리사이의 얼개를 잘 맞추어 주면 그런데로 이해가 될 것이나, 그런 것이 없이 비약하니 머리가 쥐나려고 합니다. 물론 하이돌님의 머리속에 무엇이 들어있고 하이돌님만의 세계가 그려져 있겠지요...
그리고 말씀하고자 하는 요점을 정리해주면 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듯합니다.
우처쿠님 말씀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쓰는글이 난해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알고있는 상식과는 전혀 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사실은 제가하는이야기들은 우리들상식과는 정 반대의이야기들입니다. 첫째, 피라미드는 왕의 무덤이아니다. 둘째, 피라미드는 엤날에는 훨씬 과학이 발달 되었고 지금은 과학이 뒤쳐졌다. 즉 과학문명은 쇠퇴하는 역사다. 나무나 식물은 인간보다도 훨씬 발달된 존재다. 우리민족은 아프리카까지 같다가 이디오피아를 거쳐서 왔다. 요임금은 제곡고신의 아들이 아니다. 우리가 아는 역사는 완전히 엉터리다. 즉 이제까지의지식체계 우리가알고있던 모든세계가오나
완전히 뒤집혀지는 내용들입니다. 즉 하나의 이야기만 하려 해도 각각 6개의 박사학위 논문을 써야합니다. 그러나 피라미드 단 하나의 이야기를 하는 데도 이 모든 이야기들이 서로 얽혀 있어서 설명을 안할 수가 없습니다. 솔찍히 저자신도 구성하면서 머리에 쥐가 날 지경입니다. 그러니 이글을 읽는독자 특히 저의글들을 처음 접하는사람들이야 오죽 이해하기어렵고 도무지 말도 안되는 소설 같겠습니까? 그만큼 우리학문이 모두가 엉터리라는 것이지요. 저도 많은사람들이 그렇게느낄것이라고 생각하고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생각해도 별뾰쭉한 방법이 없습니다. 한번에 이해하시려고하시지말고 몇차례 반복해서 읽어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