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와 15세기 중앙아시아를 지배했던 티무르 왕국.. 이 왕국의 창건자 티무르는 참으로 묘한 인물입니다. 잔인무도하고, 냉혹하면서도 뛰어난 전략,전술가라는 양면성을 지닌 독특한 인물입니다
티무르는 중앙아시아의 유목민 출신으로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까지 사마르칸드를 근거지로 아프가니스탄, 인도와 이란, 이라크 그리고 동유럽과 러시아 남부지방까지 차지해 아시아를 제외한 칭기즈 칸의 영토를 거의 전부 회복했던 위대한 정복자의 한 사람이었어. 그는 정복자로서는 드물게 칠순의 나이까지 장수를 누리면서 줄기차게 권력을 추구하며 정복사업에 열중했어. 그의 정복욕구는 끝이 없어서 마지막으로는 당시 명(明)왕조가 지배하던 중국 원정까지 감행하려고 했던 스케일이 아주 큰 정복자였다.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의 수도인 타슈켄트 시 한복판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지만 그는 그 공화국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우즈베크인들과는 혈연적인 관계가 별로 없어. 또한 티무르 자신이 칭기즈 칸의 적손이라고 주장하고 칭기즈 칸의 후예들과 두 번 결혼까지 했어. 티무르 왕조의 역사가들은 그와 칭기즈 칸의 둘째아들인 차가다이의 가계과 연관성을 부여했지만 실제 그것이 사실일 가능성도 거의 없다. 그는 투르크의 귀족가문인 바를라스(Barlas)씨족 출신이엇으며 종교도 칭기즈 칸처럼 탱그리를 숭배하는 우상숭배자가 아니라 독실한 이슬람교도였어. 그는 큰 키와 건장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왼쪽 다리를 절기 때문에 '절름발이 티무르'라는 별명으로 불렸어. 서구인들은 '태멀레인(Tamerlane)'또는 '탬벌레인(Tamburlaine)'이라고도 불렸다. 이 이름은 '절름발이 티무르'라는 뜻의 페르시아어 '티무르 이랑(Timur-i lang)'을 인도 유럽 언어로 옮기려다 발생한 착오이다
그는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기>와 <내전기>를 편찬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뛰어난 문장력과 함께 이보다는 훨씬 고단수의 아첨 실력을 가진 '알리 샤라프 앗 딘(Ali Sharaf as-Din)'이라는, 저술가를 고용해 <승전기(Zafarnama)>라는 책을 기록하게 했다. 이 채근 몽골인들의 대서사시<몽골비사>를 연상시키는 유장한 문체로 되어 있고 <꾸르안>의 여러 구절들이 인용되어 정복자의 이미지와 알라의 위대함을 교묘하게 중첩시켜 서술되기 때문에 현대적인 의미에서 홍보 관련 직업 종사자들의 필독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티무르가 태어난 트란속사니아(마 와라 알 나흐르)지방은 고대로부터 동서 교역의 교차로인 사마르칸드를 중심으로 하는 부유한 지역이었다. 그가 태어날 당시에는 명목상으로는 차가다이칸국에 속하는 목골의 작은 속국이엇지만, 실질적으로는 국제무역과 상업에 종사하던 투르크인들의 독립적인 연합체였다. 티무르가 등장할 무렵, 이 지역은 분열되어 있었어. 그 중 실력자들은 티무르의 숙부인 핫지 바를라스, 트란속사니아의 남부 지역과 현재의 아프가니스탄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미르 후사인 그리고 몽골 계통의 투글룩 티무르 등이었지. 바를라스 씨족의 영지는 현재 사마르칸드의 남쪽에 위치한 게시 지역으로 국한되어 있었다.
당시 이 지역의 실력자들 중에서 투글룩 티무르는 칭기즈 칸의 둘째아들 차가다이 가계의 방계 출신으로, 일리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고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존재였으며 실질적인 지배장기도 했다. 그는 이 정도에서 만족하는 인물이 아니라 ,풍요로운 트란속사니아를 차지함으로써 차가다이칸국 전체의 패권까지 노리던 야심가이기도 했다. 그는 분열되어 있던 이 지역을 공격해 들어왔고 이들을 격퇴해야 할 핫지 바를라스는 도망가고 말았다.
그러자 당시 25세의 젊은 나이였던 티무르는 운이 좋은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듯이 트란속사니아의 다양한 민족들을 규합해 대 몽골 항전에 나선 것은 절대 아니었어. 반대로 그는 투글룩 티무르에게 적시에 충성을 서약했다. <승전기>에 의하면, 그는 "숙부의 도망으로 인해 몰락의 위기에 처한 부족들을 보호한다는 공적인 이익을 위해 개인적인 희생을 감내하면서까지 투항을 결행했다". 투글룩 티무르는 그에게 그의 숙부의 영지인 게시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해줬다. 몽골군이 회군하자 핫지 바를라스는 돌아왔고 티무르는 그에 대한 군사적인 공격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병사들이 명분 없는 그의 행동에 반대해 등을 돌려버림으로써 그는 숙부에게 사죄해야만 했고 결국 용서를 받았어.
그렇지만 투글룩 티무르가 돌아오자 사정이 달라졌다. 칸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그는 투르크 귀족의 대표자 격이었던 사람을 본보기로 처형해버렸고 이에 놀란 핫지 바를라스는 다시 한 번 도망가다 암살당했다. 티무르는 즉시 펄펄 뛰며 암살자들을 응징하겠다고 나섰는데 그 누구도 체포되거나 처형당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투글룩 티무르는 이번에는 그의 아들 일리아스 호자를 트란속사니아 총독으로 임명하고 티무르를 그의 자문으로 임명했다.
티무르가 갠지즈 강변에 있을 때 티무르는 투르크와의 국경지대인 그루지아와 아나톨리아에서 소요가 발생했고, 투르크의 왕인 바야지트 1세가 티무르의 왕국을 공격하려 한다는 보고를 접했다.
티무르는 갠지즈 강에서 사마르칸드로 돌아온 후 몇 달 동안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63세 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의 서쪽 지역에 대한 원정을 선포하였다.
인도원정에 참여했던 병사들에게 있어서 원정에의 참여는 그들 자신의 결정에 맡겨졌다. 고향에 남든지 티무르를 따라 원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반면 페르시아의 모든 속주와 왕국의 부대는 이스파한에 모여 왕국의 군기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원정의 최종 목표는 그루지아의 그리스도 교도였다. 그루지아는 견고한 바윗돌로 만들어진 성벽에서 방어전을 펼친다면 정복하기 쉽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티무르의 열성과 인내 앞에 이는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정복된 그리스도 교도에게는 공납을 바치든지 코란을 받아들이든지 선택할 것을 강요 받았다.
이 무렵 티무르는 투르크의 바야지트가 보낸 사절을 처음 맞이하게 된다. 실제 두 왕국사이에 본격적으로 대규모 군사적 충돌이 있기까지는 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두 왕국 사이에는 언제든 군사적 충돌이 발생할 소지가 있었다. 두 국가가 맞대고 있는 에르제룸과 유프라테스강 근방에서 서로의 경계선은 모호했고, 야심만만한 두 군주는 여기서 상대방에게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특히 두 군주는 모두 그들이 벌인 전쟁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도 좁을 수밖에 없었다. 티무르는 전과는 다른 경쟁자의 막강한 힘을 인정하지 않았고, 바야지트는 자신보다 더 강한 군주가 있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티무르가 바야지트에게 보낸 최초의 친서는 바야지트를 격분시켰을 것이다.
친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아시아의 거의 전 지역이 이미 짐의 무기와 법규에 복종하고 있으며, 짐의 무적의 군대는 동서 양대륙에 걸쳐 진을 치고 있고, 지상의 유력한 자들이 짐의 성문 앞에서 장사진을 이루는 가 하면 행운의 여신도 짐의 왕국의 번영을 잠자코 바라보는 것 이외의 다른 대안이 없는 현실을 귀하는 왜 모르고 있는가?
귀하의 어리석은 오만성과 어리석은 행동의 기초는 도대체 무엇인가? 물론 귀하가 아나톨리아 산림에서 몇 번 전투를 벌여 승리한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무훈이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유럽의 그리스도 교도들을 상대로 몇차례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요. 그러나 이는 귀하의 검이 신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이었소.
사실 이교도를 대상으로 한 성전을 명한 코란의 규정에 귀하가 복종하고 있기에, 짐은 무슬림의 최전선이며 보루인 국토를 침입하지 않았던 것이요. 이것이 짐이 침공을 삼가한 유일한 이유였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생각을 달리하여 현명해 지기를 바라는 바이외다. 회개하여 지금이라도 현실적으로 귀하의 머리위에 드리워져 있는 짐의 분노의 우뢰소리를 회피하기 바라오.
한마리의 개미와도 같은 존재인 귀하가 왜 감히 코끼리 무리를 화나게 하는 것이오? 아~~ 슬프도다. 코끼리는 귀하를 발로 짓밟아 뭉개버릴 것이외다.”
이에 대해 바야지트는 사막의 밤도둑이며 반도인 몽골인에 대하여 저속한 말로 받아넘기고 나소 티무르가 자랑하는 이란, 투란, 인도 정복을 모두 상대방의 배신과 악덕의 산물에 지나지 않음을 말하는 답신을 보내었다.
이와 함께 자신의 영토와 군대의 강력함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귀하는 자기 병력이 강대하다고 하였소. 과연 그럴지도 모르지요. 허나 짐의 견고하고 무적의 예니체리 군단의 신월도와 전부에 대하여 타타르의 부랑배의 화살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소? 짐의 보호를 간청하는 황후는 짐도 보호하오. 짐의 천막안에서 그런 사람을 찾아보시오. 아르징간과 에르제룸의 거리들은 짐의 영토이므로 공납이 규정대로 바쳐지지 않을 경우 지체된 이유를 반드시 타우리스와 술타니아 성밑에서 요구할 것이요.”
여기에 다음과 같이 가정적인 문제까지 언급하는 모욕적인 언사도 들어가 잇었다.
“짐이 귀하의 군대에 밀려서 도망칠 경우 과인의 아내들은 세번 이혼을 언도받아도 좋을 것이오. 그러나 귀하가 전쟁터에서 짐과 대적할 용기가 없다면 귀하는 이미 다른 사내의 애무를 세번받은 귀하의 처첩들을 다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이오.”
이리하여 두 군주 사이에 정치적인 문제에 더하여 사적 감정까지 더해지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티무르는 아나톨리아 변경 지대에 있는 요새도시인 수바스(세바스테)에 대한 공격을 감행, 이 요새를 파괴하였다. 그리고 수비병이었던 아르메니아인 4천명을 생매장하였다.
하지만 티무르는 그 이상 투르크에 대한 공격을 가하지는 않았다. 같은 무슬림으로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봉쇄작전을 벌이고 있는 바야지트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차원이었을 것이다.
대신 티무르는 공격의 방향을 시리아와 이집트 쪽으로 돌리게 된다.
당시 시리아와 이집트는 마말루크의 군사정권 아래 있었다. 투르크인 왕조인 바흐리 맘루크 왕조는 키르카스인 마말루크에 의하여 타도되고 새로이 옹립된 바르쿠크에 의하여 부르지 맘루크 왕조가 열린 것이다.
이런 반란과 내홍의 와중에 바르쿠크는 티무르가 보낸 몽고인 사절을 무시하고 억류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티무르는 바로 공격하지 않고 그의 아들 파라즈가 집권했을 때 공격하였다.
이에 시리아 태수들은 알레포에 소집되었다. 그런데 태수들은 티무르를 성이 아닌 평원에서 맞섰다. 마말루크의 명성과 규율, 다마스커스의 철로 만들어진 훌륭한 칼과 창, 성채의 견고함, 게다가 6만명이라는 주민을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리아 태수들의 군대는 사기도 낮았고, 통제가 잘 되지 않았으며, 일부 태수들은 배신하거나 탈주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기도 하였다.
그런데 티무르의 군대는 정면에 인도산 코끼리들로 진지가 굳혀지고, 이동탑드은 궁시병과 그리스의 불을 만재하고 있었다. 여기에 몽골군 기병대는 신속함을 지니고 있었다.
몽골군 기병대의 신속한 공격에 시리아 태수들의 군대는 실색하여 뿔뿔히 흩어지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병사들이 짓밟혀 질식사하거나 압사하였다.
몽골군은 곧 도망병을 추격하여 알레포의 거리까지 들어왔고, 시리아의 태수들은 겁에 질려 배신하면서 항복해 왔다. 견고하던 알레포 성채가 함락된 것이다.
알레포의 성채를 함락한 후 티무르는 다마스커스로 진군했다. 당시 다마스커스에서는 마말루크들의 반란이 일어나 술탄이던 파라즈는 카이로로 도망치고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다마스커스의 주민은 티무르 군대에 맞서 성벽을 방위하고 있었다.
견고한 다마스커스를 무력으로 함락시키기 보다는 티무르는 꾀를 내었다. 다마스커스에 대한 포위를 푸는 대신 항복에 대한 표시로 한 품종에 9개씩의 선물과 속신금을 낼 것을 요구한 것이다. 다마스커스는 이를 받아들였고 티무르 군대의 입성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입성한 티무르 군대는 다마스커스에 금화 1만매의 공납을 요구해 왔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옛날 마호멧의 손자인 알 후사인을 살해한 시리아인의 자손을 징벌하라고 부추겼다. 결국 대량 살육이 벌어졌고 다마스커스는 초토화되었다.
다마스커스를 점령했지만 티무르의 군대의 손실과 피로는 이집트와 팔레스티나로 진군하기 어렵게 했다. 유프라테스 강변으로 군대를 귀환시킨 것이다. 귀환도중 알레포를 불살라 버리기도 하였다.
시리아 원정은 티무르 군대에게 엄청난 부를 제공했다. 시리아에서 약탈한 재화와 보물은 티무르 군대에 밀린 봉급을 지불하고 향후 7년 동안 지불할 수 있는 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티무르의 군대가 시리아 원정을 떠난 동안 바야지트는 티무르와의 일전을 위한 준비를 계속해 나갔다. 티무르와의 첫번째 대면 후 2년이 지나는 동안 바야지트의 군대는 40만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비록 그 수가 40만이지만 군대의 전력과 충성도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주력부대로 4만 명에 달하는 예니체리 군단, 투르크군이 중심이 된 비정규 기병대에 해당하는 국민기병대, 검은색 갑옷으로 완전무장한 유럽출신 중기병 2만, 바야지트에 반대해 티무르 휘하에 들어간 아나톨리아 지방의 군후 지배지의 군대, 킵챠크 지방에서 티무르에 쫓겨 난 타타르인으로 구성된 부대 등으로 크게 나눌 수 있었다.
구성이야 어찌되었건 대군을 구성한 바야지트는 앞서 티무르에 패한 바 있던 수바스에 복수를 하듯이 진을 치고 티무르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티무르는 전장을 수바스로 정하지 않고 있었다. 티무르는 투르크의 심장부에서 전투를 벌이고자 했다. 그래서 아악크세스강으로부터 아르메니아와 아나톨리아의 국경을 통하여 이동하였다.
이동중 적에게 노출을 회피하여 엄정한 질서와 규율속에 신중하게 전진하고 있었다. 수색대에 의하여 삼림, 산맥, 하천이 면밀하게 탐험되었고, 바야지트 군영을 우회하여 케사레아를 점령한 후 소금사막과 할리스강을 건너 앙카라를 포위하였다.
앙카라에 티무르의 군대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접한 바야지트는 크게 놀랐다. 티무르군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전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단지 티무르군의 진군 속도에 대해 비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앙카라 포위 소식을 접한 바야지트의 군대는 서둘로 앙카라로 이동하였고 여기서 대규모 회전을 전개하였다.
앙카라에 바야지트의 군대가 도착하자 마자 양군은 바로 전투에 돌입하였다. 티무르군은 몽골군의 전통적 방식대로 기병대가 소지한 날으는 도구와 신속한 전투대형으로의 공격을 감행했다. 최선두에 있는 전열이 돌격을 감행하면 바로 뒤의 주력부대가 올바른 대형으로 지지해가며 공격을 퍼붓는 것이다.
티무르의 좌우익에 있는 정면과 후위 부대는 직진 또는 사행으로 전진하였다. 18 ~ 20회에 이르는 공격을 감행했고 티무르군은 공격할 떄마다 승기를 잡았다.
바야지트도 그의 군사적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대항하였다. 하지만 그의 군대가 결정적 순간에 배신함에 따라 패배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의 아들인 술래이만 조차 일찌감치 전쟁터에서 이탈하였고, 아나톨리아 군대도 그들의 합법적 군주가 있는 티무르의 군대로 배신하였다. 타타르인들 역시 티무르가 한때 그들의 노예였던 투르크 술탄에게 복종하는 수치스러움을 비난하면서 그들에게 새로운 국토와 자유를 주겠다는 티무르의 친서와 밀사들의 말에 넘어갔다. 유럽출신의 중기병도 대열이 흩어지고, 무적의 예니체리 군단도 몽골병에 포위되고 말았다.
전황이 완연히 기울자 술탄은 그의 준마를 타고 필사적인 탈출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티무르군의 추격에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고 난 후 티무르는 그의 맏손자인 미르자 메헤메드 술탄으로 하여금 3만의 기병대를 이끌고 오스만 투르크의 수도인 부르사로 진군케 하였다.
미르자 메헤메드 술탄은 5일간 230마일(370km)를 진군해 갔다. 그의 진군 속도가 워낙 빨라 3만 기병대 중 부르사의 성문 앞에 같이 도착한 군대는 4천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미 투르크는 앙카라 전투의 패배로 기울어져 있었다.
바야지트의 아들인 술래이만은 왕궁의 주요 재보를 갖고 이미 유럽으로 탈출한 상태였다. 주민들도 이미 도주한 상태였다. 몽골군은 그럼에도 아직 막대하게 남은 재보를 취하고 목조건물의 시가지를 불태운 후 니케아로 전진하였다. 몽골군의 전진을 멈춘 것은 프로폰티스해(마르마라해)였다.
티무르 황제는 로도스 기사단에 의하여 7년 동안이나 바야지트에 대항했던 스뮤르나로 향했다. 티무르는 14일간의 공위전 끝에 이곳을 점령했다.
포로가 된 바야지트는 티무르 앞으로 연행되어 왔다. 티무르는 포로라기 보다는 이슬람 제국의 통치자로서 바야지트를 맞이했다. 자신의 천막으로 연행되어 온 바야지트에게 예의를 갖추어 맞이하고, 자신의 옆자리에 바야지트를 앉게 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슬프도다. 운명의 섭리는 이제 귀하의 잘못으로 종결되었소. 이는 귀하 자신이 엮어낸 거미줄이요. 귀하가 직접 심은 나무의 가시 때문이었지요. 과인은 이슬람 전사인 귀하를 가능하다면 눈감아 주고, 심지어는 원조까지 하고자 원하였소. 하지만 귀하가 과인의 위협을 무시하고, 우정을 경멸한 까닭에 과인도 본의 아니게 무적의 군대를 이끌고 귀하의 국토를 침입한 것이외다. 그 결과는 지금 보는 바와 같소. 만일 귀하가 이겼을 경우 귀하가 과인과 과인의 군대에 어떤 운명을 부과할 지를 모르는 바는 아니오. 하지만 과인은 보복을 좋아하지 않소. 귀하의 생명과 명예를 보장하리다. 과인은 신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인간에 대한 인자함을 표현할 것이외다.”
바야지트는 패배자로서 티무르에게 후회하는 마음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그의 자식과 가족을 찾아줄 것을 부탁하였다. 티무르는 포로들 중에서 바야지트의 아들인 무사(Mousa)를 찾아냈다. 죽은 줄 알았던 자식을 만난 바야지트는 무사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바야지트와 무사는 장려한 막사에서 같이 생활하게 된다. 물론 이들 막사는 엄중한 감시와 관리가 이루어졌지만, 티무르의 명령에 의하여 경비병들은 시종 정중하고 예의바른 태도를 유지했다.
얼마후 오스만의 수도인 부르사로부터 바야지트의 처첩과 딸들이 끌려왔다. 데스피나 황후와 딸들은 모두 바야지트를 대면할 수 있었다.
포로인 바야지트에 대한 티무르의 대우는 형제국 황제에 대한 예우를 지켜주려고 하였다. 하지만 완전하지는 않았다.
티무르는 바야지트와의 전쟁이 마무르되자 큰 잔치를 벌였다. 이 자리에는 바야지트도 초대되었다. 이 잔치에서 바야지트는 이중의 대우를 받았다.
티무르에 의하여 그의 머리 위에 왕관이 씌워지고, 그의 손에 왕홀이 쥐어졌다. 그리고 언젠가는 바야지트를 왕위에 복귀시켜주겠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처첩들이 노예들 속에 섞여서 면사포를 쓰지 않은 얼굴로 나타났고, 잔치 참여자들의 호기심 어린 눈초리를 받는 모습을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2년 전 티무르와 주고 받은 서신에 따른 모욕을 느낀 것이다.
전승축하연이 끝나고 나자 티무르는 바야지트를 데리고 사마르칸드로 개선하였다. 그런데 바야지트는 사마르칸드로 이동중 탈출을 시도했다. 그의 지지자들이 천막 밑에 갱도를 파고 그를 탈출시키려 한 것이다. 이에 티무르는 바야지트를 천막이 아니라 철제 우리에 가두었다.
이제 티무르의 출세는 보장된 듯 보였다. 그렇지만 변덕스러운 투글룩 티무르에 의해 곧 다른 투르크인 귀족이 총독의 보좌관으로 임명되자 티무르의 위치는 불안해졌으며 이때부터 몽골인들에 대한 그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는 남부지방의 실력자 아미르 후사인을 찾아가 동맹을 결성했어. 그러나 티무르가 지휘할 군대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후사인의 부대만을 함께 지휘해 차가다이칸국의 군대를 격파하고 사마르칸드와 타슈켄트 지역을 해방시켰다. 사실은 군사적으로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니라 일리아스 호자가 투르크인들과 싸우던 도중에 투글룩 티무르가 병사하는 바람에 칸의 지위를 계승하려고 근거지인 '일리'로 돌아갔던 것이다. 이 기회를 이용해 후사인과 티무르는 재빨리 몽골 왕가 출신으로 이슬람 수도원에서 자신의 정신세계를 탐구하고 있던 몽골 왕족 '카불 샤'를 억지로 끌어내 트란속사니아의 칸으로 추대한다
다음에는 당연히 몽골인이 반격할 차례지. 칸의 지위를 계승한 일리아스 호자가 트란속사니아를 침공했는데, 이때의 영웅들은 후사인이나 티무르가 아니었다. 그들의 군대는 몽골군에게 손쉽게 깨졌어. 둘은 멀찌감치 토꼈고 사마르칸드는 포위됐다. 그런데 예상외로 사마르칸드의 시민들은 이슬람교도 성직자들의 지도하에 몽골군에 대항해 오랜 기간 동안 격렬하게 저항했다. 게다가 침공한 몽골군 사이에 전염병이 돌자 일리아스 호자는 철군했다. 이로서 투란속사니아 지방은 몽골의 지배에서 해방되었고 이 처절하고도 영웅적인 투쟁에서 별로 한 일이 없는 티무르와 후사인은 투르크인들의 해방자로 행동했다. 이때에 후사인의 여동생과 티무르가 결혼해 두 사람의 사이는 더욱 공고해졌다. 그런데 두 사람의 통치방식은 완전히 상반된 것이었다. 후사인은 바닥난 국고를 채우기 위해 귀족들에게까지 세금을 뜯는 반면 티무르는 이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자기 주머니까지 털었다나..
때가 되자 티무르와 후사인의 충돌은 필연적인 것이 되었고 티무르의 아내이자 후사인의 누이동생이 급사하자 둘의 사이는 되돌릴 수 없을만큼 악화됐다. 무력대결에서는 후사인이 우세해서 트란속사니아의 양대 도시인 사마르칸드와 부하라를 함락시키자 티무르는 지극히 '정복자다운 방식'으로 이 문제를 손쉽게 막았다. 몽골인들을 부추겨 다시 트란속사니아를 침공하게 했다. <승전기>에 적혀진 이 부분은 '부적절하게 처리된 사건에 대한 자기 합리화'라는 주제를 가지고 펼쳐지는 현대적인 홍보활동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몽골군의 위협 때문에 후사인은 굴복하고 양자는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제야 티무르의 개성을 대강 파악한 후사인은 트란속사니아에 대한 야심을 포기하고 현재의 아프가니스탄에 숨어서 그의 근거지인 발흐시의 성채를 다시 쌓았다. <승전기>에 따르면 후사인의 이 행동이 티무르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후사인에 대한 공격을 다음과 같이 정당화했어. "알라는 위대하다. 그는 하고자 하신다면 그의 섭리에 따라 이루어질 수 있도록 그 원인을 만들어주신다. 알라는 백성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선정을 예견하시고 티무르와 그의 후손들에게 아시아의 제국을 예정해주셨다."
사마르칸드(위)와 부하라(아래)의 모습
티무르는 위대한 알라께서 예정한 대로 그와 그 후손들의 아시아 왕국에 대한 지배를 위해서 사전에 선전포고도 없이 후사인을 공격했다. 후사인은 항복했고 드디어 티무르의 시대가 온거야. 티무르는 스스로 이슬람의 해방자임을 자처하고 각지에서 수십 번의 전투를 벌이지만 그 전투 중 대부분은 이교도들이 아니라 같은 이슬람 형제들과 싸운 것이었다. 물론 이슬람 형제들에 대해 우대정책을 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포로로 잡힌 병사들 중에서 별로 위협이 되지 않는 소수의 이슬람교도들을 석방한 적도 몇 번 있었고 후일 자신이 이슬람 세계를 보호하기 위해서 최고지도자인 '술탄'의 지위에 올랐기 때문이야. 이교도 포로들은 이슬람교도인 포로들보다는 좀더 신속하고 잔인하게 처형되었다. <승전기>에 따르면 그가 벌인 모든 정복전쟁은 알라의 뜻을 구현하기 위한 '성전'이었고 당시에 술탄이 지배하고 있는 이슬람 형제국이었던 인도에 대한 침공 역시 그 명분은 마찬가지였다. 엄청난 규모의 살육과 파괴를 야기한 그의 군사행동은 델리의 술탄이 수백만 힌두교도들을 학살하지 않고 관용을 대했다는 이유로 알라의 뜻에 따라 응징한 것이 였고, 침공 후 학살 대상에는 힌두교도뿐 아니라 이들을 관용했던 이슬람교도들도 포함되었다.
티무르가 트란속사니아를 장악한 후, 현재의 이란 일부와 아프가니스탄, 인도까지 점령했을 때, 이슬람권에 남아 있던 강력한 세력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던 이집트와 시리아를 점령하고 있던 맘루크 왕조(13~16세기경의 투르크계 이슬람 왕조)와 비잔틴 왕국과 대치하고 있던 오스만투르크였다. 티무르의 관심은 일단 맘루크쪽으로 먼저 향했다. 그는 인도에서 데리고 온 전투 꼬끼리를 앞세워 교역의 중심지로 매우 부유했던 알렙포를 먼저 함락시켰는데, 여기서 이슬람 학자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면서도 맘루크 왕조의 병사들과 주민들을 학살하며 '잘린 머리로 쌓은 탑'을 세웠다.
그가 이 지역을 유린하고 맘루크의 술탄 파라즈의 군대까지 격퇴한 뒤 다마스쿠스를 포위하자 이 불운한 도시는 그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항복 조건을 타결하러 온 대표자들에게 티무르는 손에 염주를 들고 관용과 경건함을 강조했고, 이에 깊은 인상을 받은 다마스쿠스 시민들은 티무르에게 안심하고 성문을 열었다. 그렇지만 다마스쿠스는 철저한 약탈과 학살이라는 믿어지지 않는 사태로 항복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 <승전기>에서는 이 참혹한 조치에 대해 티무르가 예언자의 사위 알리에 대해 불경스럽게 대했던 다마스쿠스 주민들을 응징하기 위한 거였다고 적고 있다. 근데 알리가 다마스쿠스에서 박해를 받았던 사건은 티무르가 이 도시를 포위하기 약 750년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자 그는 최후로 이교도 왕국 중 가장 강력한 상대인 중국을 정복하고 중국인 이교도들을 전부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고 말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이를 공언했지. 당시 티무르의 맞상대는 명(明)의 영락제로,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피인데다 티무르와 비교해서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로 호전적인 사람이었어.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이 세기의 대결은 성사되지 않았어. 티무르가 중국을 침공하기 직전에 69세의 나이로 오트라르에서 병사했기 때문이야. 그는 진정으로 자신의 물리적인 나이까지 부정했던 정력적인 정복자였어.
첫댓글 감사합니다. 타메를랑... 근데 이 게시물은 동양사 게시판으로 옮기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아, 이사람 무지 궁금했었으요. 제가 알기로는 중국 쳐들어가는 도중에 병사했다고 하던데... 그건 아닌가영?
원나라를 몰아낸 명이 원수라고 해서 20만 대군을 끌고 처들어가다가 병사했지요
티무르는 분명 정복자긴 하나 정복지에 주둔지를 남기지 않고..거의 약탈수준으로만 ..했죠. 바그다드인가..아제르바이잔에 있던 잘라이르도.. 티무르가 떠나고 나서. 곧바로.회복했죠.또 오스만제국을 멸망직전까지 몰아갔습니다만 완벽히 마무리 짓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 북방의 킵차크를 아작내면서..러시아가 성장하는데 일죠 하죠 @>@~
이때는 오스만의 콘스탄티노플점령 바로 직전에 있었던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