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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作用 副作用(부작용) 및 正邪와의 關係
어떠한 作用에 의한 부작용은、또 다른 작용을 억압하거나 진행을 촉진시키거나 여러형태를 일으키게 하는 過程에서 附隨的으로 發生하는 어느 한것중 그 反逆 등의 立場을 取하는 것을 말한다.그러므로 이러한 부작용을 최소한도로 하기위해선 완벽에 가까운 보완대책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작용과 부작용의 관계가 역시 힘의 논리로써 그 부작용이 작용의 勢를 누를제에는 正邪의 位置도 따라 顚倒되게 돼 있는 것이다。正邪이라는 것이 또한 힘이내거는 대의명분이나 그勢를 내보일때 사용하는 휘드르는 刀劍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이처럼 부작용은 억압 또는 촉진시키는 과정에서 발생되는 것으로써 이는 곧 또한 반발이나 저항의 個體들의 세력이 모인 필연적인 작용인 것이다.
이러한 필연적인 작용이 앞서의 源泉的인 作用의 힘을 누를제에는 正邪개념이 전도된다는 것이다。소위 약이라고 썼는데 그부작용의 힘이 커서 그 약의 효험이 도리어 害를 끼친 결과를 낳았을때에는 그것은 正이 아니라 邪된 것이 된다는 것이다.그러므로 원천적인 正邪는 없다는 것이다。오직 실력에 의해 정사는 결정되는 것이므로 改世天下나 革命天下와 같은게 있게 되는 것이다.또한 어떠한 작용이라 하는 것은 다른 작용의 傾城侵犯을 가져오므로 그 침범이 德될시에는 간섭치 않을런지 모르나 害를 當할시에는 그 침해를 당한 여러형태의 작용들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한 것이다.
또한 그러므로 作用에 방해가 되는 一切의 如他作用들을 그 뿌리채 뽑지않는 이상 어떻게든 암약하여 그세를 결집시켜 저항하거나 해 넘길려고 하는 것은 旣定된 理致인 것이다。그래서 그 餘力이 있을만한 것까지도 도태시켜야 한다는 것이다。또한 갖은(多數多種) 지혜를 결집시켜 철저한 보완대책을 강구해야지만 다시 일어설려하는 부작용의 세력들을 발부치지 못하게시리 차단 시킬수 있다 할 것이다。그러나 막다른 골목에 몰린 한 쥐가 도리혀 고양이를 물고자한다고 그렇게됨 도리혀 이쪽이 조그만치라도 피해를입게될 것이므로 狹路를 열려있게하여 달아나면서 지리 멸멸케하는 것이 兵家의 戰術이라 한다。그러나 이것 또한 숨어들게 하는 폐단이 있음으로 그런것까지도 방어할 것을 염두에 새긴다면 그 부작용이라는것은 소멸되고 病되다하는것은 完治된다할 것이다.
이상의 말들은 作用의 순수한 논리라서 어지간한 깨인 사람들이라면 잘알텐대도 제대로 대처하질 못하여 그 부작용이라 하는 것에 도리혀 먹히는 모양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이밖에도 副作用에도 먹히는原因이 여러형태가 있지만 察察하여도 不明타고 人間의 智慧로써 感知치 못할 意外의 變數 또한 無視치못한다 할 것이니 측량치 못할 것에 영역침해를 일으켜 의외의 변수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즉 인간의理想을 갖고 左之右之할 것이 아니란 것까지 囑託侵犯함으로부터 그反意(感)를 사서 추구하는 目的의 互解를 가져오게 한다는 것이다. 즉 鬼神같은 領域을 侵害함으로부터 그 鬼神이라 하는 것의 능력의 인發狂하는 症勢가 目的의 와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감)로 나타난다는 것이다。목적의 와해는 正邪의개념까지도 전도시키니 어찌 의외의 변수 귀신같은 것의 능력이 크다 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므로 관념과 理想의 立場과 處地가 다른 他界가 있는 것이며 그런것들을 침해치 말라는 것이다。도리혀 목적이 와해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게 된다는 것이다。人間의 立場에선 그것이 均一한 것이라도 귀신같은 것의 입장에선 그것이 균일이나 公正性을 잃은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이를테면 여기 하나의 막대가있다.그 중심을 잡고 균형을 잡는게 人間들의 思想이라면 그 한쪽으로 치우칠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면人爲的으로 가감하여 균형을 잡을것이 아니라(그렇게 되면 많은 여러 作用들이 隨伴하므로) 그것이 그냥 그렇게 되는 것이 오히려 公正性이고 균형적이라는 것이다。즉 大少의 器를 같게 하는 것은 도리혀 불공평한 것이요 그 그릇들을 제 그릇에 맞게 가득 채우는것이 균형이 잡힌 것이라는 것이다。귀신같은 것은이와 같은 논리를 주장하여 수직적 폭의 확대 제立志를 强化시키고자 하는지도 모른다。귀신같은 것은 시간적 개념 끌고가는 개념 움직이는 개념이고 인간의 균형적 감각은 그 시간에 의해 나타난 공간적인 여러형태의 物事를 보고 판단하는 공간적 개념에 치우친감이 없지 않아 있다 할 것이다。森羅空化가 똑똑한체 하나 어리석어서 안하무인 처럼 되다가 귀신에게 굴복하는 꼬락서니가 나타나는 것이 현실世態의 한 마무리점의 귀결짓는 모습이니 이것이 徒是 運命이니 역사의 흐름이니 하는 것 따위다。그러니 어찌 누리와世間이 가련타 아니하리! 누구나 등뒤로 다가올 것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달린 밤송이 가까이서 장대를휘드른다면 장래에 그 밤송이가 떨어질줄 모른단 말인가? 이쪽에서 연락을 취하는데 어찌 저쪽에서 소식이 없겠는가? 이런 말씀이다。영역을 침범하면 그침범 당하는자가 가만히 있을 것인가? 반응이 있을래기지 사람의 얕은 지혜로는 귀신의 거시적眼目을 當하지 못하여 농락 당하고 만다。사람의 立場에선 보편성 원칙에 의해 균등코자하는 것이라도 귀신의 안목은 사람이 그렇게 하고자 하는 行爲가 事事件件 제領域을 侵害하는 것처럼 나타나 보임으로 제 능력 행사할 곳을 할애치 않고 갈마듦이라 그러니 그일마다 제뜻대로 하겠다고 鬼卒을 풀어놓아 훼방을 놓는 것이 당연지사인 것이다。그 훼방을 놓는다고해서 나타내는 것이 곧 諸事의 부작용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즉 物 그게 그런게 아니라는 것 그렇게 되어돌아갈게아니라는 것이다。즉 과현래 前現後三界나 또는 多界의 因果業을 보아 결정지어져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차등을 두는 권한 또한 제게 있다는 것이다。이와 같은 것인데 森羅空化(인간포함)너희들이 뭣인데 내권능의 영역을 침범하여 멋대로 定하느냐? 이런 말씀인 것이다。이와 같은 우리(귀신 자신)에 뜻의 능력을 제어할 位置에 있는거와 같은 實力(能力) 즉 물 샐틈없는 보완대책이(대처방안) 서 있느냐 이것이다.귀신은 제뜻대로 하는 正當性이라 하는것을 이렇게도 논조를 내거는 것으로써 一片을 삼는다 할 것이다.
◎ 무엇을 持稱하는(法相 家見 眞理 허물 作用 等等)一切의 觀點이 無爲有動이다 그 個體들은 相關 勢力에 의해서 力量의 자리매김을 한다。즉 相食은 相食대로 양보는 양보대로 희생은 희생대로 충돌은 충돌대로 억압은 억압대로 등등 자리매김하여 꽉 차있어 빈틈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다시 말하면 이런저런 등 다양한 형태가 있어서 森羅宇宙인 것이다。
◎ 想念은 여러단계를 일으켜 그 立場을 내비춰(照明)보고자 한다. 그 立場을 내비춰 보이길 다음과 같이 하는데…
불편 부당하다고 불평불만을 제기 헐뜯는 관점은 삿된 것을 보는이(관찰하는이) 보다 한단계 치켜세우는 관점이요(즉 삿된 것에 굽힌 관점 그래서 어떻게든 끌어내리고자 하는 관점 아니면 비굴하게시리 그것이 힘의 위세를 부릴때는 아부하는 관점이 됨) 일체의 고난과 시련 등 참고 견딜만한 것에 원인제공하는 것에 대하여 참고 견디는 것은 삿된 것을 부려쓰는 내가 한 단계 높이서는 관점이니 삿된 것이란 一切의 흐름 家見 眞理 허물 등 여러형태의 각양각색의 단계를 허물을 벗는 修行過程으로 여겨 超越한 立場 즉 器의 虛( 가득찬 것을 기우려서 쏟아내어 비게함)에 到達케 되면 모든걸(包含)收容하는 아무크러소니의 境地의 단계라는 것이다。내가 오히려 辱됨을 무릅쓰는 것은 저 삿된 흐름(神포함 時空의 一切 것)을 항복시킨 것이요 그 헐뜯음을 늘어놓는 것은 저 삿된 작용을 추대하고 살찌우는 것이니 그리고 내려오라고 애성에 받쳐하는 것이니 그에 항복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삿된 흐름이라 몰아부쳐 그가 어떻게 하고자 하는 行爲作用을 농락한다는 관점은 아랫 단계의 관점 내가 나를 위하여 여가(걸러내는)하는 관점 所用되어 흐름을 부려쓴다로 보는 관점은 아직 未達修行의 관점。多樣한 相을 修行과정의 허울(家見 또는 修行을 돕기 위한 方便론적인 假見)로 여겨 파괴해버린 관점은 器虛에 가까운 관점이라 할 것이다。그 삿된 흐름작용의 슬기로움은 얄밉게(밉살맛게=또는 증오의 대상이나 원망의 대상)도 보이지만 그것이 내 일하는 나의 일부로 보면 아직 벗지못해 어린(發芽角) 대견스런 행동이요(소위 잘나게 보이는 高度의 슬기로운 作用도 철부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多樣한 諸相 家見을 들먹이는 것은 아직 벗지 못하였다는 뜻이다。一切의 흐름작용이 귀신의 짓궂은 作亂이 아니라 내가 내 일하는 것이요 그것은 수행과정 나라는 허울을 벗기 위함이니 나라는 것은 각 개인이나 全體宇宙를 代辯(外)하는 것일수도 있다。世上의 時空森羅는 곧 大自我인 것이니 여러가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修行하여 벗기 위한 過程의 日課(一科)인 것이다。다양한 諸相의 관점을 갖고 있는 것은 器의 虛가 아니다(家見의 가득한 그릇을 기우려 쏟아내어 비게 되는 것이 아니다) 多樣한 諸相觀點은 損益 等 屢算에 執着하게 되고 집착하게 되면 편파적으로 어떠한 家見에 쏠려 거기매여 벗지 못한다는 것이다(※이 또 서씨 말의 환태비슷하게 꾸며지고 있는 것이다)。
이럴때 저럴때도 있어 내가 어떨때에 그 시련으로 보이는 그 먹고자하는 것에 먹이가 되는 것은 오히려 궁극적으론 大局的인 나라하는 修行者의 修行하는 하나의 日課(一科)요 방편일뿐이다。그것은 곧 이쪽에서 그 管을 통과하여 저쪽으로 이동하는 방법중의 하나 그런 과정의 번복 속에 방아간에서 곡식 쌓이듯깨이고 깨여서 諸相(象)을 벗어재키고 여러 얼결이 비추어 모두 내그릇 내라하는 해맑은 그릇이 된다 할 것이다。투명性에 이르러 諸相의 허울을 수용한 것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된다 할 것이다。以上의 말씀 또한 물들어 치우친 관점 잡념 번뇌이다。그 先生이란 作者의 弟子門前을 수천년이지난 뒤에 저만큼서 들여다 보고자 기웃거리는 거와 같다 할 것이다.
◎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공포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공포는 家見의 相 眞理의 相 念願을 한허물 벗지못할까(얻어 흡족하게 누림 또 그에서 발전하여 餘恨 없는 벗음)에서 오는 것이다. 또는 사나운 힘 (이 또한 가견이요 허울이다)이 엄습해옴에 환란에 듦을 두려워하는 것이다.모든 공포는 感知하는 모든 감관 기관에 의해서 일어난다. 두뇌에서 시공상으로 저촉 받은걸 갖고 기억해내 상념하여 그리는 妄想과一切의 감을 폐쇄하면 공포 또한 소멸 될 것이다。一切 지어진 것(作品 造物)은 감관(無感管機能을 가진것으로 여기는 土石으로부터 허공에 이르기까지 代身감도 감관이다)이 있다。이 감관의 허울을 부셔버려야지만 감치 못할까하는 공포에서 벗어난다 할 것이다.一切 것을 우려 쏟아내야지만 빈그릇의 허울이 되고 빈그릇의 허울이 되면 장애가 없는 것이다. 김관기관이 있는 자는 그 감관의 機能이 상실될까를 두려워한다. 저 지렁이와 애벌레는 눈이 없다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눈이 있는자는 어두움을 두려워하고 귀 있는자는 적막을 두려워하고 코가 있는자는 냄새 못맡음을 두려워하고 입이 있는자는 먹을거 없을까,
말 못할까?를 두려워하고 혀가 있는자는 맛없을까를 두려워한다。두려움은 공포이다.공포스러움은 본능적으로 떨게된다.모든 공포에서 벗어난 이는 떨지 않는다。왜냐하면 스스로와 何等의 關係가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두려워 말라?는 어떻게든 갖은 억매임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갖은 억매임에서 벗어나니 生하고 死한다는 근원이 끊어질 것이니 이미 그 등신과 같은 육신과 정신 관할하에 있더라도 모르는 것 같아 아무것이의 경지에 든 것이나 진배없다 할 것이다.
◎ 그럴만한 것을 엮어되는 것(틀機를 짜는 것)을 理由라 한다。그렇게 얽기설기 엮는것은 神의 모습神의 活動하는 모습인 것이다.神의 모습은 굳이 어떤 象만을 가르키는 것은 아니다。 感이나 想의 形容이 또한 神의 모습中 하나라 할 것이다.
目的을 추구하는 것에는 神의 모습이 있다。목적을 달성한 단계에도 神의 모습이 있다。그에서 떠난단계 그 허울맛에도 헛상같으나 神의 여운은 남아있다。
理由의 存在가 있는것엔 언제나 神의 엮음이 같이하여 神을 떨쳐버린 것이 된 것이 아닌 것이다。그래서 그 무엇(神 등)에서 벗어나겠다는 自體가 엮음과 같이 뒤집히는 현상이지 벗어남은 없는 것이다。즉 다른形容을 그리는 作用∼神의 활동영역에 들어있다는 것이다。지금 필자의 머리골이 이렇게 쏠려 있어서 그렇지 조금 있다가 보면 그것이 그런게 아니라 하는 또다른 意中으로 變하여 다시 다른말을 하게 될것은 지금 생각해봐도 명약 관화한 일 어떻게 둘러대서라도 귀신을 벗어난 것이다로 논리를 꾸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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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定한 規律과 秩序가 있는것은 混沌이 아니다。혼돈이란? 秩序定立以前으로써 무엇인지 分看할수 없을 단계를 말한다。그러나 一定한 規律이나 秩序는 混沌을 基本根幹으로 形成되어 現相한다。이를테면 綿花는 혼돈이나 그에서 뽑히듯 나오는 絲는 질서를 이룬것이되는 것이다。만약상 여기 쇠붙이(鐵=철)가 있다。이것은 혼돈 元素의 누적된 現象體이다。磁器로 그 性質을 바로잡는다면 음양극의 질서가 형성된다。이러한 질서가 형성되기 以前에는 혼돈의 성질을 가진 철의 원소의 집합 또는 누적 현상체에 불과할뿐인 것이다。그러나 그것 또한 어떠한 理由에 의해서 物質을 具成하는 元素로 形成되었을 것이다。또한 理由에의해서 消滅될 것이다。혼돈은 存在하지만 理由는 具成要件을 充足시킨다음 스스로의 司命이 완수되었음으로 영원性 保存性 있어야할 目的性 價値發揮性向의 추구하는 것을 별도의 관점으로 돌린다면 그에서 존재는 하지만 그것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경계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즉 흐름작용을 타고 떠나간 것처럼 여기게 한다는 것이다。(그렇더라도 그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즉 理由는 神象의 또다른 표현으로 규율과 질서로써 흘러 행하는(無爲作用)것인것이다。흘러 행하는 것이란 어느 한 것에 머물러있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말함이니 또 뭉쳐 있는 것이 아니라 풀어지거나 흩어지거나 한다。즉 叫合(규합)하지 않는다。理由는 流通시키는 性格이 크다할 것이며 어떠한 固定된 塊 氣質體에 比重을 둔다고만 할 수 없다。즉 기를 응결시키는 神의 역할 作用(얽음、엮음)이 곧 理由란 것이다。그럼 質體는 뭣인가? 역시 중구난방의 혼돈누적體일뿐이다。그것을 어떠한 물질구성元素의 氣質 性質이라고도 가르킬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理由를 가르키는 것이지 未知의 혼돈을 헤쳐보고자하는 說明에 치중하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삼라사물은 媒介가 混査에 뿌리를 둔 누적현상인 것이다。深度있게 파고 다룬다면 혼돈처럼 보이는것 또 질서의 체계가 잡혀있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 그 恩惠를 갚겠다는 마음은 가상한듯해도 그것이 執念이되면 서로에게 마땅찮으니 이것은 왜그런가? 그 알량한 (치졸한) 나를 내세우는 자존심이라하는게 은혜를 갚기위한 여건조성(그 감지덕지로 받았으니 그 감지덕지도 짜릿한 감을 더해 되돌아 가라는 그런마음 먹음) 은혜를 베푼이가 溝壑(구렁함정)에 들길 은연중 바라기 때문이다。내가 그 초라한 멍애를 져 오히려 덕을 베풀 원인제공을 한 德引體라하면 은혜를 베품에 대한 갚지않겠다는 구실이라 할 것이나 그에 얽메이지 않겠다하는 내라하는 자존심을 버린것이라 서로를 묶어놓겠다하는 것에서 빠져나옴이라 관련있는 모두에게 마땅할 것이다.이것이 또한 한쪽에 치우친 낮은 차원의 견해일뿐이다。나를 버린자는 구차함으로 모멸을 (능멸을) 받는것 같아도 궁극엔 욕됨이化하여 기쁨이되고 나를 내세우는 자는 심신이 지쳐서 늪속에서 헤메이는것 같으리니 이는 참된 나를 찾음이 아니라할 것이다. 나를 내세우는자는 속에 들은게 없는자가 겉치장으로 속이 가득한 것처럼 보일려고 하는거와 같아。허영에 들뜨게 되고 허영은 사치를 낳고 사치는 낭비적 요소가 되고 낭비는 자신과 주위를 파탄으로 몰고 가는 初入門的인 것이다。 나를 내세우지 않으면 세상 무엇( 여러 이렇다하는 森羅象)이 있겠는가? 허나 이또한 正邪가 전도되는 혼란이 있게되고 허와 實이 있게 된다。실력과 거품은 견양의 차이가 있으니 실력으로 자기를 돋보이려하는 것은 修養해서 湧躍해보고자 하는 과정속의 ―科이요 그 영향이 주위까지도 귀감이되는 덕을 주고 거품은 작은게 부풀려진 것이라 그것이 제거되면 본색의 초라함이 들어날 것이니 거품으로 나를 내보이겠다는 것은 그 영향이 주위까지도 피해가 오게한다 할것이다。이것이 다만 실력과 거품간의 경계의 준칙을 어떻게 세우느냐가 관건이라할 것이다。앞 글과 문맥이 통할런지 모르지만 명심보감에 있길 박시후방자는 불보하고 貴而忘賤者不久라 하였고 내게 오는 것은 막지않고 내게서 가는것도 붙잡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는 왜일까? 남의 원망을 살까해서 일것이다.) 이 두가지 말씀을 갖고 생각해보면 혹시나 마음에 와 닿는바가 있을 것이다。그러나 이제의 善司命은 세상의 판도가 넓어져 어지럽고 먹는 것이 시원찮아 항상 먹어도 배부르지 않아서 그런지 먹을게 있는줄만 알면 빠르기가 病者의 침보다 더하니 차한잔 담배 한가피가 거저 나감이 없다하리로다。그러므로 염두에 두지말고 무조건 베풀고 볼 것이다.그러나 이또한 모든게 다 그렇다는것은 아니니 때따라 일따라 사람 및 物따라 그 적용되는것이 있고 안되는 것이 있다 할것이니 公正公平性을 가리는 것은 사람의 안목에 있는게 아니라 善司命에게 있는 것이니 여기서 그것까지 거론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앞의 얘기는 은혜를 받아 갚는 方法論的 입장차이를 말한 것이고 뒷얘기는 덕이 되고 덕을 베푸는 입장에 선것을 말함인 것이다.
◎ 사람이 不變하는 마음(恒心)과 行實(恒行)을 갖기가 어려운 것이다。세상이 흥망성쇠가 있듯이 사람의 운명도 흥망성쇠가 있고 그 리듬을 타고 흐르는 것이다。머리에 충격 등 저촉을 당함으로 하여 그렇게 하라는 생각이 짚히게(깨이게) 되는 것이고 그리하라는 생각이 짚히게 되면 가만히있던 마음이 어떤 형이던 각양상(두근거리던 설레이던 이상한 흥분상태에 돌입하던 등등)을 띄어 요동케 되고 그렇게되면平正을 잃게 되어 한쪽으로 쏠리게 되므로 날뛰게된다。그래서「왜 이렇게 경망하냐? 지각(知覺)있어야지 하는 질책의 反應이 있게 되는 것이다.그 주위 환경이나 조성된 여건이 부추김으로 因하여 德있는 자가 늘상 그덕을 지키기 어렵고 부덕한이 또한 늘상 부덕함으로 있게 되는것이 아닌 것이다。 그 그릇이라하는 것은 立長을 달리하는 것을 부르는 표현일수도 있으니 차면 기울고 비면 채워질려하는一切의 흐름作用인 것이다。行을 亭止시켜 사진처럼 조각石像처럼 만든다하더라도 오랜세월이 흐르게되면 퇴색되거나 마모되거나 갑자기 변모될 원인이 생겨서 卞하게 될 것이다.시간을 가두고 시간을 초월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다만 그 속도를 지연시키거나 빠르게 할 수는 있을 것이니 이는 곧 사람 및 動作物體의 발전된 技能에 있는지라 걸어서 가면 하루나 걸릴 것을 자동차로 가면 잠깐이면 가니 이 시간을 벌었으니 시간을 늘려 논 것으로 될 것이고 즉 行이 빠르게 진행되면 고정된 시간이라도 많이 늘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또 行에 몰두하면 시간을 빠르게한 것이라고。할 수 있는 것이다。여기서 흐름作用에 의해 盈仄을 말하였는데 인간의 풍요로움과 빈한함이 또한 그러하니、物的이나 心的이나 가득하면 교만해지기 쉽고ㆍ 하는 행동이 교만해져(이는 보는이의 관점 心相 상태에도 달렸다하지만) 보이니 治賀의 度가 높아져 헐뜯음 당하니 그렇게되면 몰골이 비참하게 할수도 있는 法 헐뜸을 당하여 강제로 달라기에 앞서 골고루 나누어 주는 것이 순리요。빈것이면 채울려하는 것이 相情이나 헐뜯는 탓 같은 것만으로 채울려할게 아니라 비어있는 원인이 무엇인가? 비게된 이유가 무엇인가를 겸허한 자세로 성찰해야 실로 유덕한게 채워지게 된다할 것이다。以上이 또한 덜떨어진 치우친 見解이니 一切의 견해가 각자 저마다 그리는 생각과 指稱하는 名分相이나니 이것을 立長을 같게 보는 것이 一合相으로 達貫했다 하는 것이나니라, 마치 神들린 무녀들이 산신상을 상념으로 그리되 기억장치에 입력된 知識에 의해 저마다 각기 그리듯 저마다 그것이라 가르키고 그에 명분을 다는 것이니 아는대로 무엇을 지칭하는 견해를 내 어떤이는 그를 성현이라하고 佛이라하고 主된 것이라하고 지엽이라하기도 하고 根基라기도 하고 돌출된 芽角이라하기도 하고 활짝핀 모습이라기도 하고 土石이나 미물같은 것이라 하기도 하는 등°(이것이 하나의 모습이 아니라 여러 양상이 함께 동시에 나타나는 것 일수도 있으니) 여러성향의 견해나 명분을 달아 照明해 보이는 것이다。또 그것을 서쪽에선 서씨의 동쪽에선 동씨의 무방에선 無方氏의 가르침이라하고 그의 觀이라 하는 것이다。또 다른 입장에서 보면 변모든 환태든 다양 형태의 順하는 反하는 觀이 또한 그런 것이다 함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