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세 김형석 교수의 위대한 가족愛 '사랑이 있는 가정으로 돌아가라'
가정의 달이 되면 기억에 떠오르는 한 평범한 가정이 있다.
박 선생은 50전 후의 여자였다. 서울 강남에서 다과와 음료수를 겸한 알뜰한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어떤 날 전혀 모르는 한 남성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미국에 사는 초등학교 친구가 꼭 전해 달라는 편지 부탁을 받고 서울에 왔는데 만났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편지는 부산에서 초등학교에 다닐 때 가까이 지냈던 친구의 두툼하게 밀봉한 흰 봉투였다. 전해 준 남자는 심부름만 했으면 되니까 곧 떠나야겠다면서 자리를 떴다. 박 선생은 집에 돌아와 옛날 친구의 어떤 사연인가 궁금해 뜯어 읽어보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어렸을 때 같이 지냈던 일들이 생각난다. 나는 결혼을 하고 3,4년이 지난 후에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시카고에서 남편과 두 딸과 함께 지낸다. 식료품재료상을 경영하고 있는데 지금은 주변사람들이 성공했다고 부러워 할 정도로 자리가 잡혔다. 남편은 성실하고 더할나위 없이 착한 사람이다. 이 편지를 전해주는 사람이 남편인데 나는 아직 모든 내용을 비밀에 부치고 있다. 큰딸은 고등학생이고 작은딸은 중학교에 다니는데 아버지를 닮아서 성격이 온순하고 공부도 잘하는 우등생이다. … 그런데 3년 전에 내가 건강검진을 받다가 불치의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두 딸들에게는 숨기고 있으나 남편은 잘 알고 있다. 지금은 병세가 악화되어 내 생각에는 앞으로 3~6개월 정도가 남은 인생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 나는 세상을 떠나면 모든 것을 잊게 되겠지만 저렇게 착한 남편과 희망에 가득 차 있는 딸들을 두고 갈 생각을 하니까 눈을 감을 수가 없을 것 같다. 남편은 길고 긴 세월을 두 딸들과 보내려고 결심한 모양이다. 나는 아내와 엄마의 책임이 이렇게 소중한 줄은 지금까지 모르고 지냈던 것 같다.
한 달 가까이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네가 아직 결혼을 안 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 같고 주소는 모르지만 서울 영락교회에 다닌다는 얘기는 들었다. 그래서 이 편지를 써보내기로 했다. 그 사이에 결혼을 했거나 사랑하는 남자가 있으면 이 편지는 찢어버려라. 만일 아직 결혼을 안 했으면 우리 가정을 좀 책임맡아 주었으면 좋겠다. 간절한 부탁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위해 너를 보내 주신다면 가족들과 더불어 감사기도를 드리면서 눈을 감고 싶다.
깊은 생각의 몇 날을 보낸 박 선생은 친아버지와 같이 지내던 정 장로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상의했다. 정 장로는 나에게 의견을 물어봤다. 박 선생은 내가 이끌어오던 성경공부 모임의 한 중진회원이었다. 우리는 부산에 사는 박 선생 친아버지의 동의를 얻어 선생의 미국행을 돕기로 했다. 내가 상배(喪配)하고 서울로 온 박 선생 친구의 남편을 맞아 결혼식 주례를 맡아주었다. 박 선생은 주인이 떠난 한 가정의 구세주가 되어 미국으로 떠나갔다.
최근 우리는 가정상실과 파괴에서 오는 고통을 직접 간접적으로 너무 많이 보고 체험하면서 살고 있다. 그 가정파괴에서 오는 상흔이 많은 사회악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가난한 서민층만이 아니다. 지도층 인사들의 가정에서도 흔히 보는 현상이어서 더욱 걱정스럽다.
가정에서 실패했고 불행해진 사람이 어떻게 행복한 인생을 영위할 수 있으며 이웃과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가정은 사랑의 보금자리이다. 참 사랑이 있는 가정은 언제 어디서나 행복을 찾아 누릴 수 있다. 사랑은 빼앗아 갖는 것도 아니고 혼자 누리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위해주는 마음과 실천이다. 사랑은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이 더 행복한 것이다.
나는 가정의 극치는 여성들의 모성애에 있다고 믿는다. 우리 어머니의 눈물이 우리 가정을 키워주었다. 내 아내의 희생적인 고생이 지금은 30여 명의 가족을 행복으로 이끌어주고 있다. 나는 우리 주변의 많은 여성들이 그 모성애를 베풀어주기 바란다. 그것만이 따뜻하고 행복한 가정과 사회를 다시 건설해 줄 것으로 믿고 있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글 김형석(金亨錫) 연세대 명예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