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멈춰 있으면서도 움직이는 시계를 본 적이 있는가? 더구나 그 시계를 멈추게 하는 힘이, 그것이 놓여진 공간에 있는 사람들의 강렬한 욕망, 시간을 지금 이곳에서 이대로 정지시키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탱고 오나다의 벽시계가 그러하다.
1.
그는 히말라야 산을 마주 보고 있다.
붉은 등산복을 입은 몇몇 등반대원들이 가파르게 깎아지른 하얀 빙산을 오르고 있다. 아니, 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 작은 붉은 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오래 전부터 가파른 빙산 위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 히말라야에 가본 적이 없다. 법정 스님, 작가 강석경씨 등이 쓴 [인도기행]을 여러 번 읽었을 뿐이다. 법정 스님의 [인도기행]에는 각 여행지마다 칼라 사진이 들어 있는데, 물고기 꼬리처럼 한쪽이 치켜 올라간 안나푸르나봉이 기억에 남았다. 그런데 지금, 그 안나푸르나봉이 그의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얼음으로 뒤덮인 흰 산, 모든 강이 처음 발원한다는 어머니 산, 그 설산이 눈부시게 흰 살결을 드러내며, 우뚝, 그의 테이블 위에 솟아있는 것이다.
그의 앞에 놓인 3개의 접시. 요구르트 빙수 2인용이 담긴 커다란 흰 접시와, 요구르트 스몰 사이즈가 담긴 작은 흰 접시, 그리고 길쭉한 빵 3개가 담긴 흰 접시가 10분전부터 그의 테이블에 놓여 있다. 그는 물끄러미 그것들을 바라만 보고 있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테이블의 맞은 편 의자에도, 그의 옆에도, 아무도 없다. 그 혼자뿐이다. 그는 지금 [레드 망고] 오렌지색 의자에 앉아 있다.
그는 언제나 이곳에 오면 그러는 것처럼, 스몰 사이즈 요구르트에 토핑 5가지를 넣고 3개가 한 묶음인 트빵을 주문했다. 전자렌지에 데운 따뜻한 빵을 차가운 요구르트에 찍어 먹으면 아주 맛있는 것이다. 5가지 토핑을 선택하는 것을 매일매일 다르다. 하지만 언제나 타피오카는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망고나 귤, 복숭아, 수박 같은 과일을 많이 선택하고 가끔 체리나 블루베리 혹은 라즈베리, 그리고 아몬드 땅콩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콘프레이크는 절대 선택하지 않는다. 혼자 오랫동안 살다 보면, 아침 식사를 우유와 콘프레이크로 먹는 생활에 지겨워지기 때문이다. 밖에 나와서까지 또 그것을 다시 먹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계산대에 서서 지갑을 열고 있는데, 여주인이 그를 보고 물었다.
[이거 드실래요?]
[레드망고]의 계산대에는 언제나 오렌지색 유니폼을 입은 남녀 아르바이트 2명이 있다. 여주인을 본 것은 처음이다. 그 여주인은 그가 들어올 때부터 빈 테이블 위에 요구르트 빙수를 놓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소형 디지털 카메라였다. 디시 인사이드 사이트의 신제품 코너에서 그는 그 카메라를 본 적이 있다. 그 역시 카메라에 관심이 많았다. 카메라 렌즈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다른 모습으로 그에게 다가온다. 프레임 안에 그가 원하는 것들을 선택해서 넣을 수 있다. 사진은 사물을 보는 새로운 눈이었고, 세계에 대한 자신의 독창적 해석을 표현하는 시였다.
아르바이트생들에게 하는 말투로 봐서 그녀는 이 집의 주인임에 틀림없다. 고용자와 피고용자 사이에, 돈을 지급하고 지급받으면서 형성된 수직적 상하관계는, 단순히 친분관계로 형성된 막역함을 넘어선 어떤 분위기가 있다.
[디카를 처음 사서 시험해 본 거예요, 드실래요?]
계산대를 사이에 두고 여주인은 디카 뒷면의 모니터 창을 보면서 물었다. 아르바이트 직원 두 명은 주방에서 방금 전 그가 주문한 요구르트를 만들고 있다. 그는 잠깐 망설였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여주인은 그의 앞으로 직사각형 판 위에 놓인 커다란 요구르트 빙수를 내밀었다. 그때 주방에서 종업원이 나오면서 요구르트 스몰 사이즈가 담긴 똑같은 판을 그의 앞에 내밀었다. 다른 한 명의 직원이 뒤따라 나오면서 트빵 3개가 담긴 흰 접시를 요구르트 스몰 사이즈 판 위에 올려놓았다.
[남기시면 돈 내고 가셔야 돼요]
그는 타피오카, 귤, 망고, 라즈베리, 수박의 다섯 가지 토핑을 고르고 두 개의 판을 두 손에 들고 자리에 왔다. 여주인이 준 요구르트 빙수는 2인용이었다. 커다란 흰 접시에 하얀 얼음조각이 깔려 있고 그 위에 두 개의 요구르트 산이 솟아 있었다. 사각형으로 작게 조각난 빨간 수박이 그 위에 박혀 있었다.
그는 시계를 보았다. 7시 10분. 아직 시간은 있었다. 밖은 환했지만 한낮의 뚜렷한 윤곽은 아니다. 사물들은 조금씩 경계를 지워가고 있었다. 곧 밤이 오리라. 어둠의 도포는 지붕을 덮고 비좁은 골목을 덮으며 탱고 오나다의 계단으로 해일처럼 밀려오리라. 언제나 그곳, 문을 열면 탱고 음악이 울리고 따뜻한 달이 떠 있는 탱고 오나다에서, 어둠은 손님이 아니다. 그는 언제나 탱고 오나다의 첫 손님이다.
지금 탱고 오나다는 화장실을 청소하고 탈의실을 정리하고 홀의 마루를 기름걸레로 밀고 의자를 닦고 있을 것이다. 문을 여는 시간은 7시 30분이지만, 탱고를 추기 시작하는 시간은 8시가 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하나 둘씩 탱고 오나다로 들어와, 옷을 갈아입거나, 혹은 실수로 상대의 발끝을 밟아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탱고 슈즈로 갈아 신어도, 곧바로 춤을 추지는 않는다. 일상의 공기에서 벗어날 시간적 여유, 사실은 심리적 여유가 필요한 것이다.
2.
그녀는 10분전부터 길 위에 서 있다.
종로 2가에서 저녁 7시 10분에 빈 택시를 곧바로 잡는다는 것은 적어도 로또 3등에 당첨될 정도의 행운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오늘은 화요일이어서 금요일 저녁만큼 붐비지는 않지만 지금은 방학 중이고 길가에는 학원가에서 쏟아져 나온 학생들과 아직도 강북에서 약속장소를 정할 때 습관적으로 종로 2가나 인사동을 찾는 사람들로 가득 붐비고 있었다.
그녀는 손에 작은 종이 가방을 들고 있다. 그 안에는 종이로 만든 오색 무늬의 컵 받침 5개, 한복 입은 동자들로 된 냉장고 자석 10개, 장구와 북이 달린 열쇠고리 10개 등 값싼 제품부터, 전통 문양이 그려진 실크 스카프나 가방 같은 고급제품들이 들어 있다. 모두 한국의 전통문화를 상징적으로 알릴 수 있는 제품들이다.
나흘 뒤, 그녀는 한국을 떠난다. 1년 예정으로 가는 것이지만 사람 일이라는 것은 알 수가 없다. 지금 이 땅을 떠나면 언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계획대로 되는 인생은 없다. 그녀는 서른을 넘어선지 몇 년이 된다. 그 나이는, 인생이라는 것이 참으로 변화무쌍하다는 것을 알만한 나이다. 그녀가 알고 있는 인생에 있는 불멸의 영원한 진리는 단 하나, 삶의 끝에 죽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 외의 모든 것은 가변적이다.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사랑도, 한때의 불타오름으로 그친다. 때로는 사랑했던 그 순간을 모두 잊고 차가운 배신의 기억만 아프게 남아있기도 한다.
그녀가 가는 곳은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 왕가위 감독의 영화 [해피 투게더]에서 땅 끝을 향해 여행하던 두 남자들의 슬픈 여행을 본 후, 그녀는 아르헨티나에 가고 싶어졌다. 그래서 책상에 있는 지구본을 돌려 아르헨티나를 찾았다. 그녀의 책상에는 유럽 중세풍의 클래식한 지구본이 놓여 있다. 오래전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갔을 때 공항 면세점에서 사온 것이다. 어린시절 그녀의 꿈은 UN 평화봉사단이 되어 분쟁지의 고통스러운 주민들을 보살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대학에 갈 때 어머니의 권유로 불문학과에 들어갔다. [봉쥬 뜨리떼세] 프랑스와즈 사강의 [슬핌이여 안녕]을 너무나 감동적으로 읽은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불문학과에 갈 것을 강력하게 권유했고, 그녀 역시 [쥐뗌므]의 나른한 콧소리가 싫지는 않았으므로 어머니의 의견에 동의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대부분의 불문과 학생들이 그러는 것처럼 그녀 역시 대학 때는 프랑스 문화원을 자기 집처럼 들락거리며 시몬느 시뇨레 주연의 [황금투구] 같은 프랑스 영화를 수없이 봤고, 프랑스 사람들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유머와 농담들로 가득 찬 퓨전 코미디 [비지터]같은 영화를 극장에서 원어로 들으며 이해했고, 즐겼다. 그녀는 프랑시즈 퐁쥬의 시로 석사학위 논문을 쓰고 대학원을 졸업했다.
그녀가 탱고를 추게 된 것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통역 전문 회사에 다니면서부터였다. 그 회사는 한국에서 개최되는 국제회의나 미국 영국 캐나다 프랑스 독일 일본 중국 등 주요국가의 정치 문화 경제 고위 인사들이 내한하면, 통역을 전문적으로 맡아 하는 통역 전문 회사였다. 외무부에서 인정하는 고급 통역 회사였다. 그녀는 그 회사에서도 프랑스 통역 중 최고의 상위 클래스에 속했다.
어느 날 그녀는 프랑스 행정부의 고위 관료 통역을 맡게 되었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한국의 고문서 반환에 따른 양국의 신경전이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을 때였다. 국내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국내 여론은 신미양요 때 강탈해 간 우리의 문화재를 당연히 돌려받아야 한다는 것이었고, 수년전 테제베를 팔아먹기 위해 내한했던 프랑스 대통령은 한국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고문서 반환을 약속했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프랑스 박물관의 한국 고문서 담당자는 TV 카메라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 소중한 문화재를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통역을 맡은 사람으로서는 이런 때가 제일 난감하다. 그녀는 왜 그 프랑스 박물관의 담당자가 다른 나라 문화재를 그 나라로 돌려주지 않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눈물 흘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프랑스 관리의 입장에 설 수도 없었다. 또 그렇다고 그에게 한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 문화제는 마땅히 한국에 반환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모든 통역관은 절대 자기의 감정을 표현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철칙이었다. 또 통역 때 들은 정보를 외부에 흘려서도 안 되었다.
그녀는 한국 사람이면서도 한국과 갈등관계에 있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사람의 의견을 자기 입으로 전달해야 하는 것이 또 다른 고충이었다. 창와대와, 외무부와, 프랑스 대사관과, 숙소인 신라 호텔을 오가며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보면, 어더워지면 온몸이 노곤해지는 것이었다. 3박 4일의 일정은 그렇게 끝났다. 회담은 양쪽 다 불만족스럽게 끝났다. 특별한 결론도 나오지 못했다. 그 프랑스 관리도 기분이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마지막 업무가 끝나고 호텔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그가 물었다.
[서울에도 밀롱가가 있나요?]
그녀는, 그녀가 알고 있는 단어를 샅샅이 떠올려 보았다. 밀롱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단어였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자존심 강한 통역가로서는 매우 하기 힘든 부탁이었다. 그러자 그 관리는 다시 자기 말을 정정했다.
[서울에도 탱고 바가 있나요?]
그제서야 그녀는, 탱고 바를 밀롱가라고 부르는 거구나 생각했다. 그녀는 고등학교 때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서 같은 방 친구들과 선생님 몰래 맥주 몇 병 마신 뒤 불 끄고 방 안에서 춤을 춰 본 이후, 춤을 춰 본 기억이 없다. 대학 때도 그 흔한 나이트클럽 한 번 가지 않았다. 그녀가 대학 다닐 당시 유행했던 학교 앞 락 카페에 가보기는 했지만, 앉아만 있었다. 친구들의 춤을 구경만 했었다. 그런데 탱고라니!
그는 한 마디 덧붙였다.
[오늘 밤, 아르헨 탱고를 출 수 있는 바에 갈 수 있었으면 참 좋겠는데요]
3
그는 시계를 본다. 7시 30분. 이제 [레드 망고]에서 일어날 시간이다. 트레이를 반환대에 놓고 물을 한 잔 따라 마신 뒤, 그는 탱고 오나다로 향한다. 여름 날 저녁 7시 30분은 아주 기분 좋은 시간이다. 완전히 어두워지지도 않았고, 충분히 밝지도 않다. 그는 이런 순간이 가장 좋다. 우주가 결혼하는 시간이다. 낮동안 분리되었던 하늘과 땅은, 서로 마주 보며 은밀히 연정을 불태우다가 드디어 태양이 지평선 밑으로 내려가면, 몰래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이다. 지평선 끝에서 만나 둥그렇게 궁륭의 지붕을 만드는 저녁 하늘과 땅이 우주적 결혼을 하는 이 순간은, 하루 중 가장 신성한 시간이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서울에서 하늘을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빌딩들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는 하늘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드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이다. 가끔 건물 옥상에 올라가거나 한강 다리를 지날 때거나 아니면 남산 타워나 63빌딩 스카이라운지에 가지 않는 이상, 아무도 하늘을 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검고 우중충한 건물들 사이에서 언뜻 보이는 서쪽 하늘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태양은 지평선 아래로 사라졌고, 늙은 태양이 남긴 피울음만 붉게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한낮에 머리에 떠 있는 태양과,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기 전의 태양의 모습은 얼마나 다른가. 무표정한 태양은 지평선과 가까워지면서 서서히 숨겨졌던 붉은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지평선 밑으로 내려가기 전, 주위의 모든 구름들에게 자신의 피를 나누어준다. 구름들은 태양이 나누어준 피를 자신의 살 속에 섞어서 장엄한 하늘을 연출하는 것이다.
특별히 아름다운 노을을 보는 날, 그는 어떤 강렬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번번이 그의 예감은 틀리기만 했지만, 그래도 그는 광휘롭게 한 폭의 추상화가 그려지는 서쪽 하늘의 노을을 볼 때마다 무엇인가 자신의 삶 앞에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기다리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줄 어떤 힘을.
똑같은 노을은 없다. 이 지상에 똑같은 삶이 없듯이 절대 똑같은 그림으로 그려지는 노을은 없다. 기하학적 질서를 강조하는 몬드리안의 차가운 추상이 되거나, 아니면 감정과 직관을 앞세우며 자유로운 색과 선으로 새로운 세계를 표현하는 칸딘스키 뜨거운 추상이 되거나, 노을은 언제나 새로운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앞에 펼쳐진 노을은, 다른 날하고도 또 다른 느낌이었다. 글쎄, 어떻게 다른가 하고 물으면 대답하기 참 힘든 것이다. 인간의 언어로써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느낌, 모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아득한 진공상태로 빠져들도록 만드는 어떤 무서운 도취가 그 노을 속에는 담겨져 있었다. 그는 [레드 망고]와 [탱고 오나다] 사이에 서서 한 동안 멈춰 서 있었다. 박제된 나비가 핀셋에 꽂혀 장식장에 박혀 있듯이 그는 지상 위에 두 발을 박고 오래도록 노을을 바라보았다.
4
그녀는 수소문을 해보았다. 그녀 친구들 중에서도 춤을 잘 춘다고 소문난 친구들에게 번갈아 전화를 해 보았지만, 그녀들은 한결같이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거냐는 듯, [라 꿈빠르시타]의 도입부를 딴딴딴따 하는 입소리와 함께 따라하면서, 고개를 좌우로 이렇게 흔드는 그 탱고 말이야? 오히려 그녀에게 질문했다. 그녀가 다급하게 자세한 사정 이야기를 하자, 캬바레 가면 혹시 탱고를 출 수 있지 않을까? 자신 없다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하는 친구도 있었고 어떤 친구는 댄스 스포츠 협회에 알아보라고 했다.
그녀는 전화를 했다. 114에 물어봐서 한국 댄스 스포츠 협회 전화를 알아내 전화를 했는데, 전화 받은 여자 역시 밀롱가라는 단어를 몰랐다. 그녀가 탱고 추는 곳이 없겠느냐고 다시 물어보자, 댄스 스포츠 협회에서 실시하는 탱고 강습 시간을 소개해 주는 것이었다. 그녀가 다시 아르헨 탱고를 출 수 있는 곳을 물어보자, 여자는 잠깐 기다려 달라면서 탱고 강사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녀의 전화를 받은 탱고 강사는, 외국에서 오신 어떤 손님이 아르헨 탱고를 추는 곳에 가고 싶다고 해서 전화를 하는 거라는 말을 듣자, 자기는 댄스 스포츠하는 사람이고, 댄스 스포츠 안에 탱고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아르헨 탱고와는 다르며, 국내에 아르헨 탱고가 들어왔는지 아는 바 없다고 대답했다.
통역을 맡은 사람은 때로는 개인적인 업무까지 처리 해주기도 한다. 물론 의뢰하는 사람은 대부분 대단히 미안하다고 조심스럽게 사적인 일을 부탁하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사적인 부탁을 하는 뻔뻔한 경우도 가끔 있다. 그러나 그녀에게 밀롱가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한 프랑스 관리의 표정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는 프랑스 정부의 고위직 관리 중 한 사람이었고, 프랑스를 대표해서 한국과 고문화재 반환 회담을 하기 위해 한국에 온 것이다. 더구나 그는 아주 정중하게, 탱고를 출 수 있는 바를 알아봐달라고 그녀에게 부탁을 했다. 그의 말 속에는 당신을 믿습니다. 이 부탁은 꼭 들어주십시오. 이런 간절한 느낌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보았다. 대학 때 늘 나이트클럽만 돌아다니던 같은 과 여자애들을 경멸하기도 했었지만, 심지어 그런 친구들에게도 전화를 해보았다. 정말 맥이 빠지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간단한 일로 생각했는데, 탱고에도 그렇게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 줄 몰랐고, 아르헨티나가 세계 지도에서 한국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그 나라에서 시작된 탱고를 출 수 있는 밀롱가를 찾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 몰랐다.
탱고, 낯선 단어였고 그녀가 전혀 알지 못하는 분야였지만 나름대로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서 탱고 바가 어디에 있는지 정성을 다해 알아보았다. 그리고 겨우 얻은 정보가, 홍대 앞의 살사 바에서 가끔 아르헨 탱고를 추기도 한다는 불확실한 정보였다. 아, 아르헨 탱고가 한국에도 있기는 있구나. 그녀는 마음이 조금 놓였다.
5
오늘은 화요일이다. 그리고 지금은 방학 중이었다. 그는 지방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그가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한 것은 십년도 넘지만, 그동안 그는 시간강사였고 겸임교수였다. 대학에 발을 들여 놓는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사실 그가 대학을 마치고 곧바로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는, 미치도록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의 꿈은 대학 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꿈은 초등학교 이후부터 갖고 있던 꿈이기도 했다. 그런데 대학원 2년을 다니면서 그는 자신이 절대 대학교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학교수가 된다는 것은, 긴 기다림의 산물이었다. 지도교수에 대한 복종과 존경과 때로는 굴욕의 마음으로 인내의 세월을 견디지 못하면, 결코 교수라는 직위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한 것이 대학원 2년 동안 얻은 소득이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늦은 나이로 군대에 간 그는, 군대 2년을 침묵 속에서 보냈다. 이제 갓 스무살이 되어 하사관에 지원해서 입대한 신참 하사들은 그보다 8살이 어렸다. 때로는 그들에게 야전삽으로 엉덩이를 50대도 얻어맞았다. 그러나 그는 군대생활 대부분을 혼자서 보냈다. 군대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사병들끼리 함께 보내는 내무반 생활이다. 하지만 그는 거의 내무반 생활을 하지 않았다.
논산 훈련소에서 아직 사복을 벗지 않고, 빡빡 깍은 머리로, 그렇다고 군인도 아닌, 장정 신분으로 대기하고 있을 때부터 그는 대학 후배, 고등학교 후배, 고등학교 동기, 고향 후배 등을 여기저기서 만났다. 그들은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그 결과 그는 가장 좋은 군대 보직을 받아서 서울 시내의 비밀스러운 부대에 배치될 수 있었다. 사복을 입고 머리를 기르고 다니는 첩보부대였다. 아버지가 장성이거나 장차관 등 고위 관료거나 아니면 재벌이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고 소문난 부대였다.
그가 처음 배치된 그 부대는 명동 한 복판에 위치한 빌딩 안에 있었다. 밖에서 보면 무슨 주식회사 간판이 달려있고 무역회사처럼 보였다. 드나드는 사람들도 모두 무역회사 임직원 같았다. 그러나 내부에서 하는 일은 국가 안위에 관련된 최고의 기밀사항들이었다. 다른 건물들처럼 그곳에도 입구와 주차장에 경비가 서 있었다. 다른 것은, 경비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곳에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서 외부인들의 침입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외부에서 보면 평범했다. 주위의 다른 빌딩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그가 부대에 배치된 첫 날밤, 그는 10여명 밖에 되지 않는 내무반원들 앞에서 신고식을 당했다. 그 빌딩 안 지하 1층에 있는 내무반은 지금까지 그가 거쳐 온 논산 훈련소나, 후반기 교육을 받던 수원의 부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실내는 좀 커다란 회사의 사무실처럼 되어 있었고 군용품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옷이나 이불이나 모든 것들이 일반 가정에서 볼 수 있는 사제, 즉 민간제품들이었다. 갓 배치된 그 혼자서만 군복을 입고 있었다.
곧 제대를 앞둔 병장 6호봉과, 병장 2호봉의 뒤를 이어 서열 3위인 상병 8호봉이 그의 신고식 집행자였다.
[신병 앞으로]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훈련소에 배운 대로 내무반 침상에서 크게 복창하며 가운데 통로로 튀어나갔다.
[네, 이병 아무개]
그러자 내무반원들이 웃었다. [조용히 해 임마][야, 여기서는 그렇게 소리 안 질러도 된다][오랜만에 군기 서 있는 소리 들어봤네][야, 김일병, 너도 올 때는 저랬어][박상병님, 저는 저렇게 얼빵하지는 않았어요][허, 넌 더했다 짜샤] 그러나 서열 3위는 웃지 않았다.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 권총이야, 세면백이야, 더블백이야?]
그의 첫 질문이었다. 그러자 실내가 조용해졌다. 그리고 모두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녜?]
그러나 내무반 맨 구석에서 느긋이 벽에 기대 책을 보고 있던 서열 2위가 한 마디 거들었다.
[야, 최군. 그렇게 말하면 신병이 못 알아듣잖아. 좀 알아듣게 보충설명 해줘라]
그러자 최군이라고 불린 서열 3위는, 힐끗 서열 1위를 바라본 뒤 다시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자슥, 내숭 떠는 것 봐라. 느네 아버지가 권총 찬 장군이냐, 아니면 장,차관 급이냐, 아니면 재벌이냐, 이 말이야]
그는 잠깐 머뭇거렸다. 사태 파악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없는 것을 만들 수는 없었다. 그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 것도 아닌 데요]
[이 자식이, 계속 내숭 떠네. 너 솔직히 말 안할래?]
서열 3위는 그의 앞으로 한 발 다가와 툭, 탁. 주먹으로 그의 가슴에 원 투 스트레이트를 넣었다. 그는 쿵 하고 뒤로 쓰러졌다가 벌떡 일어섰다.
[녜, 이병 아무개]
상급자의 손이 자신의 신체에 닿으면 무조건 관동성명을 크게 복창해야 한다는 훈련소의 군기가 빳빳하게 들어있을 때였다. 그러나 신고식은 그게 다였다. 가슴에 두 대 주먹을 맞은 게 전부였다. 나중에 다른 부대에 배치된 동기들에게 들은 바로는, 곡괭이 자루로 얻어맞아 며칠동안 걷지도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가 받은 신고식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함께 남산 한 바퀴를 도는 구보를 하고,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근무하다가 저녁에는 명동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셨다. 취사병은 한식 일식 양식 최고급 조리사 자격증을 갖고 있었다. 새로운 병력이 논산으로 들어오면 그들의 신상정보를 보고 최고의 인재를 데려온다는 것이다. 취사병은 매일 아침 남대문 시장에 가서 장을 봤다. 적어도 음식을 먹을 때만큼은 자신이 군대가 아니라 특급 호텔 레스토랑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보직은 타자병이었다. 그는 청와대의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되는 국가 기밀서류를 타이핑했기 때문에 국가 안위와 관련된 비밀스러운 내용들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그가 타이핑을 하면서도 재미있게 본 서류 중의 하나가 [탱고 프로젝트]였다. 첩보요원을 캬바레 바의 탱고 선수로 위장시켜 활동케 하는 내용이었다. 국가 안보와 관련된 일급기밀이기 때문에 더 이상 발설할 수는 없지만 그때부터 탱고는, 그의 머리 속에 무엇인가 신비롭고 은밀하며 어떤 위험과 함께 유혹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단어로 박혀 있었다.
그가 탱고를 추기 시작한 것은, 오랜 겸임교수 생활을 끝내고 지방 대학의 전임교수로 부임하면서부터였다. 그는 매일 반복되는 삶에 지쳐 있었다. 이렇게 자신의 삶을 마치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인가 새로운 움직임, 변화가 필요했다. 그때 떠오른 것이 탱고였다.
탱고.
그는 조용히 소리 내어 발음해 보았다. 회오리바람처럼 눈앞에서 보이지 않는 어떤 기운이 소용돌이치며, 자신의 생을 휘감는 것을 그는 느꼈다.
6
그녀가 알고 있는 탱고에 대한 지식은 [라꿈빠르시타]의 음악이 전부였다. 아르헨티나라는 나라에 대해서도 아는 것은 전혀 없었다. 겨우 알아낸 홍대 앞 살사 바로 전화를 했다. 탱고는 매주 화요일에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날은 마침 화요일이었다. 그녀는 그 프랑스 관리에게 지금까지 자신이 수집한 정보를 자세히 전해주었다.
그는 매우 고맙다면서 그곳의 위치를 상세히 물어보았다. 그녀는 조금 망설였다. 비공식적인 밤의 일정까지 그녀가 책임질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도 탱고에 대해 수소문 하는 과정에서 조금 호기심이 일어났다. 이 프랑스 남자가 어떻게 탱고를 추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녀가 탱고를 출지 모른다는 것을 이 남자가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보고 함께 춤추자고 할까봐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안내하겠다고 했다. 그는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연락처와 위치만 알려달라고, 택시를 타고 가면 된다고 했지만, 그녀는 끝까지 자신이 안내하겠다고 고집했다.
그날 저녁 식사는 프랑스 관리가 샀다. 신라호텔에는 맛있는 레스토랑이 많았지만, 그가 저녁을 사겠다는 말을 했을 때 그녀는 일식집을 선택했다. 저녁을 먹는동안 그는 탱고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와인 이야기만 했다. 신의 선물이라는 프랑스산 와인과 칠레산, 이태리산 와인, 그리고 최근 세계 와인 시장에 등장한 인도산 와인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 반주로 그가 선택한 와인은 1997년 프랑스산 사또 마고였다. 회담도 끝났고, 이제 내일이면 출국하는 일정만 남았다. 그녀가 지금까지 통역을 맡은 경험에 의하면 대개 이런 경우 쇼핑을 하거나 한국 전통 공연을 관람하거나 아니면, 외국 출장을 수없이 다닌 사람들은 호텔 휘트니스 센타에서 간단한 운동을 하고 잠을 자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탱고를 추겠다고 시내로 가는 사람은 그녀가 아는 한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찾아간 홍대 앞 살사 바는 그녀의 인생을 바꿔버렸다. 그날, 그녀는 어둠 속의 의자에 앉아 있기만 했다. 자신의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가 너무 커서 주위 사람들이 듣지 않나 걱정될 정도였지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탱고 음악 소리가 큰 게 다행이었다. 화요일만 탱고 바로 운영된다는 그곳에는, 이미 많은 남녀가 서로 손을 맞잡고 탱고를 추고 있었다. 아, 탱고가 저런 거구나. 그녀는 생각했다.
저녁을 먹고 살사 바, 그러니까 화요일만 탱고를 춘다는 밀롱가에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밤 10시가 넘어 있었다. 그때부터 문을 닫는 12시까지 그녀가 그곳에 머무른 시간은 불과 2시간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말한다. 그 2시간이 내 인생을 바꿔 버렸다고.
탱고 바에 도착하자 프랑스 관리는 가지고 간 손가방에서 구두를 꺼내더니 갈아 신었다. 탱고를 출 때 신는 신발이 따로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그리고 그 관리는 의자에 앉아 있던 긴 생머리의 여자에게 다가가 춤을 청했다. 그때 그녀는 알았다. 아, 저렇게 남자가 여자에게 춤 신청을 하는 거구나. 탱고 추는 남자를 땅게로, 여자를 땅게라라고 부른다는 것도 알았다.
뭐랄까, 탱고를 추는 그 관리의 표정은 나흘동안 그녀가 통역을 하면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그녀는 그와 함께 있었다. 그는 예민했고 일에 대해서는 무척 엄격하고 까다로웠다. 그런데 지금 그의 얼굴 표정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그녀가 알던 사람이 아닌, 다른 얼굴로 변해 있었다. 가면을 쓰지 않았는데도 그가 플로어로 나가 탱고를 추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아니다, 어쩌면 이게 그의 본 모습인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리고 탱고가 무엇이길래 이렇게 신비하게 사람을 바꿔 놓는지 궁금해졌다.
7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날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8월 15일 광복절도 아니고, 하늘이 처음 열렸다는 10월 3일 개천절도 아니다. 그렇다고 높은 산 중턱 바위에서 혼자 풀을 뜯어 먹는 외로운 짐승 산양좌로 태어난 1월 9일, 생일도 아니었다. 그는 같은 산양좌를 만날 때마다 그들이 불쌍해 보였다. 자신도 그 별자리지만, 12월 22일경부터 1월 22일 사이에 태어난 산양좌들을 보면, 동병상린, 같은 운명을 갖고 태어난 동류의식고 함께 그들이 한없이 가엾어 보였다. 산양좌는 외로운 별자리였다. 산양은 무리지어 생활하지 않고 늘 혼자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그 별자리는 고독한 별자리였다.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날은 1월 1일이다. 그는 무질서하게 사는 것을 싫어했다. 일생의 계획을 세우고, 새해가 시작될 때는 1년의 계획을 세우고, 매월 1일에는 한 달의 계획을 세우고, 매일 아침에는 그날 하루의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그는 그 흔한 망년회 송년회를 12월 31일 밤에 해본 적이 없다. 12월 31일부터 1월 1일 새벽까지 밤을 새워 하는 유혹적인 파티도 많았지만, 한 번도 그런 파티에 참여 해 본 적이 없다.
그는 12월 31일에는 항상 저녁 10시 이전에 집에 들어온다. 그리고 집 안팎 청소를 깨끗이 하고 집 안의 모든 불을 환하게 다 켜 놓은 뒤 깨끗하게 샤워를 한다. 그리고 새로운 다이어리를 옆에 놓고 자정이 되기를 기다린다. 아니, 새해의 처음이 되기를 기다린다. TV에서는 보신각 앞에서 개최되는 새해맞이 특집 생방송을 중계하고 있다. 드디어 종이 울리고 새해가 시작되면 그는 기도를 한다. 샤워하고 난 뒤부터 그는 알몸이다. 보통 집 안에서 그는 옷을 입지 않고 산다. 집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옷을 훌훌 다 벗는 일이다. 한 겨울에도 그는 집 안에서는 옷을 입지 않고 생활한다. 작은 삼각팬티라도 걸치면 아주 답답한 것이다.
올해 1월 1일, 그가 세운 계획 속에는 탱고를 배우겠다는 것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는 1월 14일부터 개최되는 방콕국제영화제에 갔었다. 태국 관광청에 근무하는 친구 사두디가 초청한 것이다. 첫날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사두디가 그를 데리고 간 곳은, 호텔 아테네 2층에 있는 탱고 레스토랑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3시간 동안 식사를 하면서 탱고를 추는 아르헨 남녀의 공연을 보았다. 그 커플은 아무 말 없이 3시간 동안, 30분마다 옷을 갈아입으며 오직 탱고, 탱고 오나다만 추었다. 너무나 황홀했다. 사유가 정지되고 언어가 사라진 그곳, 오직 황홀한 움직임만 존재했다.
그때 그는 결심했다. 서울에 돌아가면 더 머뭇거리지 않고 제일 먼저 탱고를 배우겠다고. 그리고 서울에 와서 인터넷 검색으로 집에서 제일 가까운 탱고 강습소를 찾았고, 초급반에 들어가서 탱고를 배우기 시작했다. 화요일, 금요일, 일주일에 두 번씩 탱고를 배웠다. 학기가 시작되면서부터는 수업하다가도 자신도 모르게 탱고 스텝을 밟는 경우도 있었다. 학생들이 보고 소리 죽여 웃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자기 전에도 30분씩 탱고의 기본 스텝, 걷기 훈련을 계속했다.
그가 밀롱가에 와 본 것은 최근이었다. 그는 그동안 강습만 받았다. 실제 밀롱가에서 춤을 청하고 춤을 추는 것은 어느 정도 기본기가 익혀진 뒤에 해야 한다고 그래서 최근에야 밀롱가를 찾은 것이다. 처음 탱고 오나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의 설레임은, 오랫동안 짝사랑 하는 여인과 드디어 약속을 정하고 그곳에 나갈 때의 기분과 틀리지 않았다.
그는 대학이 방학하자, 거의 매일 탱고 오나다에 나갔다. 그리고 조금씩 오나다의 어둠에 길들여져 갔으며 사람들과의 부딪침에도 익숙해져 갔다. 그러나 여전히 탱고는 시지프스의 바위였었다. 오르고 올려도 바위는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가 있었고 그는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탱고 오나다에 갔다.
그런데 그날, [레드 망고]와 [탱고 오나다] 사이에서 그가 오랫동안 박혀서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을 보고 있는 그 사이, 한 여자가 [탱고 오나다]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8
그녀는 이번 주 토요일, 한국을 떠난다. 그녀의 목적지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불문학을 전공한 그녀가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나라에 가서 무엇을 하겠느냐고, 주위에서는 걱정을 많이 했지만, 그녀에게는 믿음이 있었다. 탱고가 자신을 버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어떻게 보면, 터무니 없는 믿음이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물론 무엇을 하겠다는 계획은 있었다. 그녀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학에서 탱고를 연구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시내 교습소에서 탱고를 배울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탱고를 배워서 한국에 돌아와 탱고 강사를 하겠다거나, 탱고 바를 운영하겠다거나, 대학에서 탱고를 가르칠 생각도 없었다. 그녀가 하고 싶은 것은 마음껏 탱고를 추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그녀는 대학 졸업 후 지난 8년 동안 모았던 모든 돈을 투자할 계획이었다.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탱고는 그녀의 앞길을 열어줄 것이다. 그녀의 믿음은 적어도 탱고가 자신을 배반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오늘 밀롱가는, 적어도 일년 뒤, 혹은 오년 뒤, 아니면 더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녀가 다시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는, 이 땅에서의 마지막 밀롱가였다. 지하계단을 내려가서 [탱고 오나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 그녀가 다른 날과 다른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탱고 오나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그는 노을에서 풀려나 [탱고 오나다]의 지하계단 입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9
그에게 먼저 춤을 청한 사람은 그녀였다. 그녀는 오늘, 특히 그동안 한 번도 춤을 춰 보지 못한 땅게로들과 춤을 추고 싶었다. 탱고 바에서는 서로 눈치만 오고 가면서,얼굴은 낯익지만 정작 한 번도 손을 잡아 보지 못한 경우도 많다. 그녀가 그랬다.
그녀는 발이 부르터서 도저히 플로어에 나갈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는 한, 자신에게 춤을 청하는 땅게로들을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땅게로가 그녀에게 춤을 청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보이지 않는 어떤 기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카리스마라고 부를 수도 없지만, 어떤 고귀한 분위기, 시정의 평범한 남자들이 감히 근접할 수 없는 높은 울타리가 그녀 주위에는 쳐져 있었고, 그것이 그녀를 더욱 신비롭게 만들었다.
그는 그녀를 알고 있었다. 닉네임이 무엇인지,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 몰랐지만, 탱고 바를 몇 달 드나들면서 자연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 번도 그녀에게 춤을 청한 적은 없었다. 그녀가 싫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까이 할 수 없는 어떤 기운이 그녀 주위를 구름처럼 감싸고 돌았다.
그녀가 그에게 다가왔다.
[춤추시겠어요?]
땅게라에게서 먼저 춤 신청을 받아본 적이 처음은 아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땅게라에게서 먼저 춤 신청을 받을 때, 그는 정신이 아득해진다. 뭐랄까, 황공한 느낌까지 드는 것이다. 자신이 먼저 해야 하는데 자신에게 걸어오게 만든 그녀의 수고에 대한 미안함이 세포 속에 가득해지면서 더욱 정성스럽게 춤을 추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였다. 그는 천정이 몇 바퀴 회전하는 것을 느꼈다. 어린시절 놀이공원에서 회전목마를 탈 때처럼, 그를 중심으로 세계가 돌아가면서 어지럼증을 느꼈다. 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양쪽 볼에는 붉은 홍조가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이미 두 시간 넘게 쉬지 않고 춤을 췄었다. 8시에 탱고 오나다 문을 밀고 들어와서 낯익은 얼굴이 보이면 다가가 춤을 청했고, 그녀가 이번 주 토요일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떠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먼저 와서 춤을 청했다. 그리고 그가 보였다.
그녀 역시 그를 알고 있었다. 늘 혼자 와서 춤을 추다 가는 그가, 어느 날부터인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그녀에게 다가와 춤을 청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탱고 바에서 자주 얼굴을 마주 쳐도, 어떤 사람들은 절대 자신에게 춤을 청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춤을 청하는 사람들은 몇몇 땅게로들로 제한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춤을 잘 못 추기 때문에 그들이 춤 신청을 안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리 봐도 자신보다 훨씬 춤이 안 되는 땅게라들에게도 춤을 신청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외모에 어떤 혐오스런 점이 없나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었다. 사람마다 호감을 느끼는 상대는 다르겠지만, 그녀가 특별히 어떤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일으킬 정도의 외모는 아니었다. 그리고 역시 아무리 객관적으로 생각해봐도 자신보다 훨씬 옷차림도 단정하지 못하고 외모도 뛰어나지 못한 땅게라들에게 그들은 춤을 신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에게만 춤을 신청하지 않았다. 모든 땅게로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그녀에게 특히 자주, 춤을 청하는 땅게로들이 몇몇 있었다. 하지만 탱고 바 오나다에는 그녀가 춤을 같이 춘 땅게로보다는 춤을 한 번도 추지 못한 땅게로들이 훨씬 더 많았다.
그가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오늘은 한국의 탱고 바 오나다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이제 이번 주말이면 그녀는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을 것이었다. 이 사실이 그녀에게 용기를 불러 일으켰다. 그녀는 두 시간동안 많은 땅게로들과 춤을 추었지만 그중 반 정도는 오늘 처음 춤을 춘 사람들이었다. 대부분 그녀가 먼저 춤을 청한 경우다. 그리고 그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갔다.
[춤추시겠어요?]
0
그들은 플로어에 서서 처음으로 손을 맞잡았다. 그의 오른 손은 그녀의 등 뒤를 돌아서 가냘픈 그녀의 몸을 가볍게 안고 있었고, 그녀의 왼 손은 그의 오른 팔 위, 어깨 바로 아래 쪽에 얹혀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각각 서로의 오른 손과 왼 손을 마주 잡았다.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녀도 눈을 감았다. 그녀는 춤을 출 때 습관적으로 눈을 감는다. 그래야만 땅게로의 리드를 집중해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눈을 뜨고 있으면 [탱고 오나다]로 들어오는 사람, 나가는 사람이 눈에 띄고, 구석 자리에 앉아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것보다는 눈을 감고, 음악을 듣고, 상대의 리드를 섬세하게 읽으면서 그 속으로 몰입해 들어가는 것이 좋았다.
첫 스텝을 밟기 전, 그가 눈을 감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녀였다. 그녀가 먼저 춤을 청한 것이었다. 호흡을 서서히 들이 쉬고 음악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녀가 그의 귓바퀴에 대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저,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그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잠깐 멍하니 서 있었다.
[저, 이번 주말에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떠나요. 탱고 바 오나다는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아아, 그는 이해했다. 그에게 다가와 춤을 청한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리고 음악이 흘러나왔다. 피아졸라였다. Adios Nonino. 그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첫 발을 딛었다. 언제나 첫 발을 내딛을 때가 가장 힘들다. 그 곡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결정해야 했고, 첫 발을 움직이는 순간 자신의 온 몸으로 전해져 오는 상대의 느낌과 특징을 빨리 파악해서 상대 땅게라와 어떻게 춤을 춰야 할 것인지 판단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이 대부분 첫 발을 떼면서 결정된다. 똑같은 상대라고 해도 그날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몸이 조금씩 무겁거나 가벼울 수 있고, 속도가 느리거나 빠를 수도 있었다. 더구나 처음 만난 상대와는 첫 발을 내딛으면서 몸으로 전해오는 각종 정보는 매우 소중한 것이어서 그는 온몸의 신경세포를 활짝 열고 상대 땅게라의 반응과 특징을 파악했다.
그녀는 그때까지 그가 춤을 춘 땅게라 중에서 최고였다. 유연한 허리와 경쾌한 다리 움직임, 그리고 무엇보다 음악을 듣는 섬세한 감각이 발달되어 있었다. 그는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에서 풋풋한 맑은 향기가 배어나왔다. 아, 세상이 지금 이 순간, 멈춰버린다면. 지금 이 순간만 영원히 존재한다면. 그녀의 등 뒤에 놓인 자신의 손바닥으로 그녀의 정신이 흘러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맞닿은 가슴을 통해 그녀의 심장 박동소리와 자신의 심장 박동소리가 하나가 되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렇게 그녀와 자신이 한 몸이 되는 것을 느꼈다. 아니다. 한 정신이 되는 것을 느꼈다. 육체의 움직임으로 정신이 하나가 되는 희귀한 경험을 한 것이다. 그 순간, 지구의 자전이 멈추고 이 지상에는 오직 그와 그녀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녀 역시 전혀 새로운 느낌을 주는 땅게로와 만났다는 것을 알았다. 왜 한국을 떠나는 마지막 밀롱가에서 그를 만났는지 너무나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억울하다는 마음이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정신이 하나로 연결되는 것 같은 정신의 오르가즘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영혼의 희열, 온몸의 실핏줄이 서로 관통하면서 따뜻하게 피가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와 춤을 추는 느낌이 너무 좋아서 순간적으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가는 것을 연기해 볼까 하는, 실현 불가능한 생각까지도 했었으니까. 이 순간, 지구는 자전을 멈췄고 시간은 정지해 버렸다.
[탱고 오나다]의 벽시계는 어느새 멈춰 있었다. 10시 26분이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2003년 12월 13일 [탱고 오나다]가 문을 연 이후, 얼마나 많은 땅게로스들이 춤을 추면서, 서로의 육체와 정신이 일치되는 순간을 경험했을 것인가. 그 순간, 지구의 자전이 멈춰버리고 세상의 모든 만물이 숨죽이며 오직 그들만 이 지상에 존재한다는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탱고 오나다]의 벽시계는 그러므로 매일 매일 멈춰 있었다. 하루에 한 번만 멈춰 있었어도 그 시계는 지금까지 599번을 멈춰 있었다. 하루에 열 커플이 단 한 순간씩의 그런 경험을 했다면 5990번, 2번씩 그 희열, 아니 법열의 상태를 느꼈다면 11980번이나 탱고 바 오나다의 벽시계는 멈춘 것이다.
하지만 오늘도 그 벽시계는 움직이고 있다. 살아있는 생명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한 순간, 절대라고 느꼈던 그 감정도 곧 사라진다. 다만 그 흔적만 남아서 우리들의 핏줄 속 어딘가에 영혼의 집을 짓고 있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선배와 나누던 얘기가 생각난다. 선배는 기승전결이 확연히 구분되는 끊어지는 단락을 좋아했고, 낸 평상시 비추어지는 모습과는 다르게 붓에 머금은 먹물을 물에 싯듯 자연스레 풀어지는 맥락을 좋아라 했다.뉘 해라해라 등떠미는 사람 하나 없는 공간에 정성스레 한자 한자 써 내려가는 글을 보면
첫댓글 픽션.
논 픽션..^^ 마지막 마무리가 좋습니다.
픽션이라니까.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선배와 나누던 얘기가 생각난다. 선배는 기승전결이 확연히 구분되는 끊어지는 단락을 좋아했고, 낸 평상시 비추어지는 모습과는 다르게 붓에 머금은 먹물을 물에 싯듯 자연스레 풀어지는 맥락을 좋아라 했다.뉘 해라해라 등떠미는 사람 하나 없는 공간에 정성스레 한자 한자 써 내려가는 글을 보면
가슴 한 구석이 먹먹 해지며 , 세상을 사랑 하고파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