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氏)와 가(哥)의 차이 // 성씨(姓氏), 성(姓), 씨(氏)의 유래와 차이점
1. 씨(氏)와 가(哥)의 차이 누가 당신에게 성(姓)이 뭐냐고 물었다. 무어라고 대답해야 적절한 대답일까? '김씨'? 아니면 김가? 올바른 대답은 '김가'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이처럼 '씨'와 '가'는 쓰임새가 비슷해서 혼동해서 쓰는 일이 많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씨'와 '가'에 대한 설명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 씨(氏) / 1.「의존명사」로 성년이 된 사람의 성이나 성명, 이름 아래에 쓰여 그 사람을 높이거나 대접하여 부르거나 이르는 말. 공식적이고 사무적인 자리나 다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글에서가 아닌 한 윗사람에게는 쓰기 어려운 말로, 대체로 동료나 아랫사람에게 쓴다. 또한 의존명사이므로 앞말과는 띄어 쓴다. (예) 김 씨 / 길동 씨 / 홍길동 씨 / 희빈 장 씨 등
2. 「접미사」로 인명에서 성을 나타내는 명사 뒤에 붙어 '그 성씨 자체'의 뜻을 더하는 말. (예) 김씨. 이씨. 박씨 등
* 가(哥) / 「접미사」로 인명의 성(姓)을 나타내는 대다수 명사 뒤에 붙어 '그 성씨 자체' 또는 '그 성씨를 가진 사람'의 뜻을 더하는 말. (예) 김가 / 박가 / 이가 등
이상에서처럼 '씨'와 '가'를 사용함에 있어 혼란을 일으키는 이유는 '씨'와 '가'에 모두 '성씨 자체'와 '그 성씨를 가진 사람'이란 뜻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냥 '김씨'라고만 하면 단순히 성씨를 지칭할 수도 있고 그 성씨를 가진 사람을 지칭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김가'라고 할 때도 마찬가지다.
(예) 성이 뭐지? 김가입니다. / 그 일은 김가가 하기로 했다.
다만, 전통적으로 성씨를 물을 때는 '○씨'라고 하지 않고 '○가'라고 하는 것이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씨'와 '가'는 문법적으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씨'는 의존 명사도 되고 접미사도 되지만 '가'는 오직 접미사이다. 따라서 '씨'의 경우는 사람을 가리킬 때는 의존명사이므로 '김 씨'라고 하여 성과 씨를 띄어 써야 하지만 성씨를 가리킬 때는 접미사이므로 '김씨'라고 성과 씨를 붙여 써야 한다. 반면에 '가'는 단지 접미사이므로 언제나 '김가'와 같은 식으로 성과 씨를 붙여 쓴다로 점이다. 또한 호칭으로 사용한 '김 씨'라는 말 다음에 조사인 '야'를 붙여 "김 씨야!"로 호칭하지 않지만 '김가' 다음에는 "김가야!"처럼 조사를 붙여 호칭어로 쓸 수 있다는 것도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2. 성씨(姓氏), 성(姓), 씨(氏)의 유래와 차이점 원래 성씨(姓氏)는 혈족(血族)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이름 앞에 붙이는 표지(標識)로, 성(姓)은 혈족(血族)을 나타내며, 씨(氏)는 그 성(姓)의 계통을 표시하는 말이다. 오늘날에는 성(姓)과 씨(姓)의 구분이 없어져 성씨(姓氏)가 성(姓)을 높여서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하지만 과거에는 성(姓)과 씨(氏)는 엄격히 구분된 개념이었다.
우리나라의 성씨는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중국에서는 성(姓)이 먼저 나타나고, 뒤에 씨(氏)의 구별이 나타났다. 성(姓)은 ‘여자[女]가 낳은[生] 자식’이라는 한자의 의미(六書 중 形聲의 원리)처럼 모계 씨족사회에서 동일한 모계혈족을 구분하기 위해 나타났다. 때문에 ‘희(姬)’, ‘사(姒)’, ‘강(姜)’, ‘영(嬴)’ 등 초기의 성(姓)들에는 ‘계집 녀(女)’ 자가 포함되어 있는 것들이 많다. 이러한 성(姓)은 부계사회(父系社會)로 바뀌면서 부계(父系) 혈통을 나타내는 것으로 쓰이게 되었는데, 종족(宗族)에 따라 자신들의 거주지나 숭배물 등을 성(姓)으로 삼기도 하였다. 사회가 발달하면서 종족(宗族)의 인구가 늘고 거주 지역이 확산되자, 하나의 성(姓)에서 갈라진 지파(支派)는 새로운 거주지나 조상의 이름 등을 따서 자신들을 구별할 새로운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하나의 성(姓)에서 갈라진 계통의 구별을 나타내는 칭호를 씨(氏)라고 한다. 쉽게 말해 경주 김씨, 김해 김씨, 광산 김씨, 안동 김씨 등에서의 본관(本貫)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러한 성(姓)과 씨(氏)의 구별은 하(夏), 상(商), 주(周) 3대(三代)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BC 770~BC 221)에 이르기까지 뚜렷하게 나타났는데, 당시 귀족들은 분봉(分封) 받은 국읍(國邑)의 지명(地名)이나 관직(官職), 조상의 자(字)나 시호(諡號), 작위(爵位), 거처(居處) 등을 씨(氏)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보니 부자(父子) 사이에도 성(姓)은 같지만 씨(氏)가 다른 경우가 생겼고, 성(姓)이 다른데도 씨(氏)는 같은 경우도 나타났다. 그래서 성(姓)이 같으면 결혼을 하지 않았고, 씨(氏)가 같아도 성(姓)이 다르면 결혼을 할 수 있었다. 예컨대 ‘이소(離騷)’라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전국시대 말기 초(楚)의 문인(文人) 굴원(屈原)은 초(楚) 무왕(武王) 웅통(熊通)의 아들 굴하(屈瑕, ? ~ BC 699)의 후손으로 굴(屈)은 씨(氏)이고, 성(姓)은 미(羋)이다. 초(楚)의 왕들은 무왕(武王)처럼 대대로 웅씨(熊氏)가 계승했지만, 성(姓)은 마찬가지로 미(羋)였다. 때문에 진(秦, BC 221∼ BC 207) 말기에 항량(項羽)이 서초(西楚)을 세우면서 옹립한 의제(義帝,?~ BC 206)의 이름이 기록에 따라 미심(芈心)이나 웅심(熊心)으로 달리 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이르러 종법(宗法) 제도가 무너지면서 성씨(姓氏) 제도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종족(宗族)의 유대와 연결 관계가 약해지면서 씨(氏)가 성(姓)처럼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전국시대 이후에는 평민(平民)의 지위가 상승해 그들도 성(姓)을 지니기 시작했다. 결국 진(秦), 한(漢) 시대 이후에는 성(姓)과 씨(氏)의 구별이 점차 사라져 하나의 의미로 쓰였으며, 백성(百姓)이 민중(民衆)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자리잡았다.
사람플러스 | 내맘
http://blog.naver.com/won_2063/1100679308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