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 하린 (시인)
39. 상상 테마38 - 직전이나 직후 상황을 바탕으로 상상하며 시 쓰기
@ 직전이나 직후 상황을 적용할 때
어떤 사건이나 특정 시간 혹은 특정 공간을 경험할 때, 경험의 직전과 직후는 본질적인 것을 드러내는 자리가 된다. 평상시에 드러나지 않던 가장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존재성이 솔직한 심리 상태로 나타나는 지점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이별 상황에서 이별을 경험하기 전에는 그 사람의 속마음을 100% 알 수 없다. 그런데 이별 직전에 이르게 되면 사람의 본성이나 본질이 알몸으로 드러나게 된다. 또한 직전의 태도와 직후의 태도도 사뭇 다르게 나타난다. 이별의 경우 직후의 태도가 직전의 태도보다 더 진솔한 심리 상태를 드러낸다.
이번 상상 테마에서는 철저히 화자 입장이 되어 특별한 경험에 대한 직전과 직후를 섬세하게, 솔직하게 생각해보기로 하자. 예를 들어 우리는 감옥에 갔다 온 적 없지만 시적 상상을 통해 감옥의 직전과 직후를 쓸 수 있다. 시를 쓰기 전엔 화자의 경험 맥락을 무조건 구체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어떤 상태에서 감옥에 가느냐에 따라 직전과 직후에 따른 심리선이 확연히 달라진다. 최대한 안타까운 상황을 상상해보자. 생계형 범죄의 경우로 설정했다면 화자가 갇히고 남겨진 식솔에 대한 마음을 시로 쓸 수 있다. 그럴 때 이런 상상도 만날 수 있다. 그 사람은 ‘큰 감옥에서 작은 감옥으로 옮겨가는 느낌이 아닐까.’ 감옥에 가지 않고 일평생 가난하게 살다가 늙어 죽는다면 가난이 감옥이었을 거라는 상상. 그런 식으로 새로운 화자를 창출한 후 직전과 직후에 대한 상상을 적용하면 나만의 시에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생긴다.
실제적인 감옥이 아니라 상징적이거나 비유적인 감옥을 떠올리는 것도 좋다. ‘A도 나에겐(당신에겐) 감옥이다’ 이 문장에서 A 자리에 최대한 낯선 단어를 대입시켜 보자. ‘봄도 나에겐 감옥이다’ ‘자정도 나에겐 감옥이다’ ‘어머니도 나에겐 감옥이다’ ‘광장도 나에겐 감옥이다’ ‘일요일도 나에겐 감옥이다’ ‘녹색도 나에겐 감옥이다’ ‘남쪽도 나에겐 감옥이다’ 등의 문장을 만들게 되면 낯선 세계에 한발 다가서는 느낌이 든다. 그런 문장을 바탕으로 직전과 직후의 느낌을 섬세하게 형상화시킨다면 나만의 좋은 시를 쓸 수 있다.
필자의 시를 바탕으로 그것이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후에 / 하린
사랑한다가 사랑했다로 돌아선 이후 나의 직전과 직후가 달라졌다
침실 앞에서
차라리 직전엔 여자이고 직후엔 남자여도 좋았을 거다 직전엔 냉소주의자이고 직후엔 허무주의자여도 괜찮았을 거다
아, 지독히 철저한 이 1인분의 기분은 어디서 오는가
서로에게 안쪽을 들키는 일은 현관문의 직전과 직후처럼 마침내 명징해서 불이 꺼진 방은 직전보다 직후가 더 두렵다
저 혼자 극장을 실천하다 깜짝 놀라는 척을 하고 있는 거울 그 속엔 유령 같은 몰골만 있다
직전을 원하지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직후가 될까 봐 나는 소품인양 적막하다
꽃 앞에서 나무 앞에서 한결같던 태도는 어디로 갔는가
아픈 직전과 슬픈 직후를 만나기 싫어 현관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은 채 나를 내내 열어둔다 ― 《포엠포엠》 2021년 가을호
1단계 - 스스로 점검하기 – 메시지 분명히 하기+ 내 시만의 장점 찾기
「후에」는 이별 직후에 놓인 화자의 심리 상태를 상상을 통해 형상화한 작품이다. ‘화자가 이별한 것에 대해 많이 후회하고 있다면 어떤 상태일까’ ‘그럴 때 직전과 직후에 대해 골똘히 생각한다면 어떤 발화를 할까?’하는 상상을 통해 간절한 시적 진술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도록 했다.
“철저한” “1인분의 기분”이 되어 “차라리 직전엔 여자이고 직후엔 남자여도 좋았을 거다/ 직전엔 냉소주의자이고 직후엔 허무주의자여도 괜찮았을 거다”라는 발화를 하게 만들었고, 지독한 외로움이나 지독한 고독에 몸부림치게 했다. 이게 바로 직전과 직후가 가진 ‘힘’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직전보다 직후가 더 솔직하게 본질을 드러낸다. 직후엔 “서로에게 안쪽을 들키는 일”이 허다해서 돌이킬 수 없게 갈등이 증폭하게 된다. 자존심을 쉽게 건드리게 되고 평소에 말하지 못한 불만이 다 쏟아져 나와 더더욱 파국이 명징해진다.
따라서 이 시의 장점은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했던 사람이 되어 떠난 직후 후회로 남겨진 자의 심리 상태가 상상적 체험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2단계 - 객관적 상관물(현상)을 찾기+관찰과 조사 정밀하게 하기
이 시에 활용된 객관적 상관물은 침실, 거울, 꽃, 나무, 비밀번호다. 침실은 1인분의 기분을 극대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거울은 1인 극장을 펼치며 독백을 일삼는 못난 몰골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꽃과 나무는 한결같지 못한 화자의 태도를, 비밀번호는 열린 기다림을 암시한다.
시의 부분 부분에 배치된 상관물들은 결국 헤어진 직후 후회와 고독과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는 화자의 심리 상태를 대변하는 역할을 한다.
3단계 - 확장하기 – 상상적 체험을 섬세하게 극적으로 하기
필자는 상상을 통해 이별의 후경으로 남은 화자의 몸짓과 심리 상태를 체험했다. 침실 앞에서 묘한 심리 상태를 드러내는 상황을 먼저 떠올렸다. “차라리 직전엔 여자이고 직후엔 남자여도 좋았을 거다/ 직전엔 냉소주의자이고 직후엔 허무주의자여도 괜찮았을 거다”라고 말한 구절을 통해 화자가 가진 여러 감정과 태도를 함께 공유했다. 침대의 직전엔 여자이고 침대에 올라온 후엔 남자여도 괜찮았다고 말한 것을 통해 두 사람 사이 이성적 코드가 맞지 않았음을 암시했고, 침대 직전엔 냉소주의자가 되고 침대 위에선 허무주의가 되어도 괜찮다고 말한 것을 통해 떠난 사람이 불만을 많이 갖고 있었음을 암시했다. 그런 상태임에도 화자가 내내 후회하는 것을 통해 화자가 떠난 사람을 더 많이 사랑하고 있음을 암시했다.
그런 후회의 감정을 가지고 다음과 같은 행위도 함께 체험했다. 혼자 극장을 실천하는 행위, 이별 직전의 상태를 원하면서도 괜히 연락을 하면 더더욱 멀어질까 봐 소심하게 소품을 연기하는 행위, 현관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은 채 내내 기다리는 행위 등이 거기에 해당한다.
* 그 밖에 예문
직전 / 이화은
닥치는 대로 살자는 말은 닥치는 대로 죽자는 말이다 맹수 한 마리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맹속력으로 달려오고 있다 오래 가둬두었던 굶주린 짐승을 神이 방금 풀어놓은 것이다 공포와 불안은 피의 성찬에 에피타이저 같은 것 이미 심장은 갈가리 찢어졌고 저들의 두터운 발바닥은 눈 먼 트럭처럼 몇 번인가 몸뚱이를 뭉개고 지나갔다 지레 죽는 자는 저승의 명부에도 편안히 들 수 없어 일백 번 고쳐 죽고 있는 중이다 죽으면 그만이지 죽음을 방패로 삼던 자들은 모두 죽었다 이별을 예감한 연인처럼 돌아가고 싶은데 숨고 싶은데 전생은 출구만 있고 입구는 없는 마을 저녁연기처럼 소문만 자욱할 뿐 눈 감지 마라 총구를 떠난 총알이 막 닥치고 있다 막다른 골목에서 그대로 돌아설 수는 없어 삶만큼 무서운 짐승은 없지만 적에게 등을 보이면 이미 진 것이다 - 《열린시학》 2018년 봄호
이후에는 / 이재연
피할 수 없이 나무는 공허해져 갔습니다 아이들은 아이들에게서 멀어져 아이들에게 더 가까워지고 허기는 개별적인 것이어서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새벽의 별을 보다가 다시 이불을 찾아 이불속으로 기어들어 갔습니다 이불 속 온기는 부드럽고 조용했으며 과식하는 버릇을 고쳐야겠다는 불편한 속을 다스려주기도 했습니다 개들은 간혹 앞서서 두 발로 걷기도 하지만 기계를 물려받은 우리는 기계처럼 일어나 걷는 습관으로 저녁에는 두 발을 어디에 둬야 할지 숙고했습니다 모두들 황급히 걷고 황급히 사라지는 곳이지만 아무도 아무 곳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증식하고 있습니다 꾸준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고 자꾸만 올라가고 나무는 유례없이 앙상하여 과식은 나쁩니다 특히 저녁 일곱 시 이후에는 앉아 있는 시간을 줄이고 두 발로 걸어가십시오 그곳이 어디든 괜찮습니다 좀 오래 걷다가 휴일이 오면 아이들보다 먼저 어른이 되십시오 우리는 기계를 물려받은 적이 없지만 기계처럼 걷고 있습니다 고마워서 기계로부터 멀어지지 못합니다 이후의 일에 대해 낙담은 금물입니다 나무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공허하지만 결코 여기를 떠나지 않습니다 두 발로 더 걸으셔야 됩니다 그보다 더 이상 좋은 것은 없습니다 여기보다 더 좋은 곳도 없습니다 기계는 결코 현혹되지 않습니다 미래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오직 지금만이 필요합니다 기계적인 판단이지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간입니다 - 《시인수첩》 2018년 봄호
절정, 직전 / 허은희
혀에 바늘이 돋았다 염증이란 곪아 터지기 직전에 깔리는 허밍 같은 것 오톨도톨한 요철이 혓바닥에 오선지를 그립니다. 낮은음자리표와 높은음자리표를 걸어둡니다. 우물우물 음표들이 매달립니다. 중얼중얼 마디를 만듭니다. 마디마디에 몸을 푼 전사(傳舍)들이 뒤척입니다. 마디 밖은 절벽입니다. 언젠가 찢긴 악보에서 떨어지는 마디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절벽은 안도 밖도 절벽이었습니다. 떨어져나간 마디에서 까만 음표와 흰 음표가 흘러내렸습니다. 소리를 잃고 허물어지는 것들은 뼈가 없습니다. 꺾인 관절과 근육 속에서 온음으로 살던 음표들의 냄새가 피어납니다. 갈 곳이 없다는 엄살입니다 - 《시선》 2017년 겨울호
- 출처 :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더푸른, 2021.09)
* 하린 시인 1971년 전남 영광 출생.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 학위. 1998년 〈광주매일〉신춘문예 시 당선, 2008년 《시인세계》 등단.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 『1초 동안의 긴 고백』. 연구서 『정진규 산문시 연구』 시 창작 안내서 『시클』 시 창작 제안서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이것만 알면 당신도 현대 시조를 쓸 수 있다』 청마문학상(2011), 송수권시문학상(2015), 한국해양문학상(2016),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2020) 수상. 현재 중앙대 문화예술대학원 전문가과정 시 창작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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