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궤변(詭辯)
이치에 맞지 않는 사실을 그럴듯하게 둘러대는 말이다. 얼른 들으면 옳은 것 같지만 실은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억지로 둘러대어 합리화시키려는 허위적인 변론을 이르는 말이다.
詭 : 속일 궤(言/6)
辯 : 말씀 변(辛/14)
출전 : 사기(史記) 굴원열전(屈原列傳)
①도리(道理)에 맞지 않는 변론(辯論). 도리가 아닌 말을 도리에 맞는 것처럼 억지로 공교롭게 꾸며 대는 말이다.
②상대편을 이론(理論)으로 이기기 위해서 상대방의 사고(思考)의 혼란이나 불확정 및 감정의 격앙(激昻)을 이용하여 참이 아닌 것을 참인 것처럼 꾸며대는 논법이다.
③옳은 전제(前提)에서 누가 보든지 이상하게 생각할 결론을 유도해서 쉽사리 반박하기 어렵게 하는 논법을 일컫는 말이다.
궤변은 얼른 들으면 옳은 것 같지만 실은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억지로 둘러대어 합리화시키려는 허위적인 변론을 일컫는 말이다.
상대방을 속여 참을 거짓으로, 거짓을 참으로 잘못 생각하게 하거나, 또는 거짓인줄 알면서도 상대방이 쉽게 반론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사상적 혼란과 감정이나 자부심 등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궤변은 처음부터 어떤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목적을 위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예를 들면 "네가 만약 살 운명이라면 약 같은 것을 쓰지 않아도 살 것이고, 반대로 죽을 운명이라면 아무리 좋은 약을 쓴다 해도 결국은 죽게 된다. 그런데 너는 살 운명에 있느냐 죽을 운명에 있느냐의 그 어느 쪽에 있다. 그러므로 어차피 살려고 바둥바둥할 필요가 없고 약을 쓸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딜레마(양도론법)를 이용한 궤변의 일례이다.
궤변의 원어인 Sophistik란 낱말은 그리스의 궤변학파에서 나온 말이며 궤변학파는 본디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뜻으로 오늘날의 궤변을 뜻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것이 후세에 이르러 목적을 위해 논리적인 규범을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둘러대는 궤변으로 타락해 버린 것이다.
동양에서는 명가(名家)의 학자 공손룡(公孫龍)의 '견백론(堅白論)'이나 '백마비마론(白馬非馬論)' 등이 궤변의 좋은 예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 궤변(詭辯)
궤변은 상대방을 속여 참을 거짓으로, 거짓을 참으로 잘못 생각하게 하거나, 또는 거짓인줄 알면서도 상대방이 쉽게 반론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사상적 혼란과 감정이나 자부심 등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궤변은 처음부터 어떤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목적을 위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궤변의 원어인 Sophistik란 낱말은 그리스의 궤변학파에서 나온 말이며 궤변학파는 본디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뜻으로 오늘날의 궤변을 뜻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것이 후세에 이르러 목적을 위해 논리적인 규범을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둘러대는 궤변으로 타락해 버린 것이다.
그런데 사기(史記) 굴원열전(屈原列傳)에 이 말이 나온다.
굴원(屈原)은 이름을 평(平)이라 하며 초(楚)의 왕족과 동성이다. 초의 회왕(懷王)의 좌도(左徒)가 되었다.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좋아서 치란(治亂)의 도리에 밝고 문장이 능하였다.
궁중에 들어가서는 임금과 국사를 의논하여 명령을 내리고, 밖에 나와서는 손님을 접대하고 제후를 응대하여 왕의 신임이 매우 두터웠다.
굴원이 물러난 후에 진(秦)은 제(齊)를 치려고 하였다. 제나라가 초나라와 합종을 맺었으므로 진의 혜왕(惠王)은 이를 근심하여 장의(張儀)에게 명하여 거짓으로 진을 떠나 예물을 후하게 가지고 초나라에 가도록 하면서 "진(秦)은 매우 제(齊)를 미워하고 있는데, 제(齊)는 초(楚)와 합종을 맺었으므로, 만약에 초(楚)에서 제(齊)와 국교를 끓을 수만 있다면 진(秦)은 상어(商於)의 땅 6백리를 바치겠다"고 말하게 했다.
초의 회왕은 욕심내어 장의 말을 믿고 제(齊)와 절교하여 토지를 받으려고 진(秦)에 사자를 보내었다. 그러자 장의는 속임수를 써서 "장의는 초왕에게 6리의 땅을 약속하였는데, 6백리라고는 말한 기억이 없다"고 말하였다.
초의 사자가 노하여 초나라에 돌아와 초회왕에게 보고하니 왕이 노하여 진(秦)을 치기위해 대군을 일으켰다. 그러나 결과는 초(楚)의 대패로 끝났다.
많은 사상자를 내고 장수가 포로가 되고 한중의 땅까지 빼앗겼다. 거기에 위나라까지 나서서 땅을 차지하고 제나라는 구원하지도 않았고, 초나라는 크게 고통을 당했다.
이듬해에 제나라를 의식한 혜왕이 초와 화의(和議)를 위해 빼앗은 한중(漢中)땅을 되돌려 주겠다고 하자 초왕은 말했다. "토지를 얻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원하는 것은 장의를 얻어서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이다."
장의는 이 말을 듣고, "일개의 신하의 몸이 한중의 땅과 바꿀 수 있다면, 신을 초나라로 보내 주십시오" 하고 말했다.
자진하여 초(楚)로 간 장의는 초(楚)의 권신인 근상에게 정중히 예물을 바치고 또 궤변(詭辯)을 써서 초회왕의 애첩 정수(鄭袖)에게 자기를 돌봐 줄 것을 청하였다. 초회왕은 마침내 정수의 말을 받아들여 장의를 용서하여 보냈다.
이 때 굴원(屈原)은 이미 임금의 곁에서 멀어져 옛 벼슬자리에 있지 않았고, 사자로서 제(齊)에 가 있었는데 나라에 돌아와 초회왕(楚懷王)에게 간하기를, "어째서 장의를 죽이지 않았습니까?"고 책하였다.
회왕(懷王)은 후회하여 장의를 뒤쫓게 하였으나 이미 늦었다.
◼ 궤변(詭辯)
궤변(詭辯)의 특징은 왜곡(歪曲)이다. 궤변은 우격다짐을 앞세우는 무단(武斷), 황당함이 두드러지는 요언(謠言)과 구별된다. 무단과 요언은 마음을 끌지 못한다. 궤변은 왜곡된 근거를 여럿 동원하기 때문에 미혹하는 힘이 강하다.
인간의 간특(奸慝)을 보여 주는 사례가 성경에 나온다. 불의(不義)한 유대인들은 주장한다. 인간의 불의로 인해 하나님의 의(義)와 영광이 드러났다면, 이는 하나님께 공헌한 것이고, 따라서 처벌 받아서는 안 된다고.
성경은 타락한 인간의 대표적인 궤변으로 이를 소개한다. 허물을 감추고 징계를 피하기 위해 왜곡된 논리로 대응하는 교활한 논법이다.
궤변은 얼핏 보기엔 그럴듯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비(是非)가 전도(顚倒)되고, 흑백(黑白)이 섞여 있다. 사람의 마음을 혼미하게 만들고, 결국 빠져들게 한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 오종세가(五宗世家)에서 "팽조(彭祖)는 교묘한 말과 꾸미는 낯빛으로 지나치게 아첨한다. 속이 깊고 법률에 밝아, 궤변으로 마음을 빼앗는다(彭祖, 爲人巧佞 卑諂, 足恭而心刻深, 好法律, 持詭辯以中人)"고 전한다.
궤변의 바탕에는 궤휼(詭譎)이 깔려 있다. 궤휼은 기이하고 기괴하며, 헷갈리게 만들고, 종잡을 수 없다는 의미다. 음모, 간계, 교활의 뜻도 묻어 있다.
비범한 조어(造語) 능력으로 몽환적인 세계를 탁월하게 묘사했던 당(唐)대 시인 이백(李白)은 '상운락(上雲樂)'에서 "만약 이처럼 기괴하고 기이한 경치를 다 보지 못한다면 어찌 조물주의 신묘함을 알았다 할 수 있으리오(不覩詭譎貌 豈知造化神)?" 라고 노래한다.
궤변으로 이름 높은 한 지도자가 궤변을 내세워 대선 결과에 불복하자 한동안 시끄러웠다. 행정 공백으로 시민들이 신음해도 그는 끄덕하지 않는다. 우리 주변에도 궤변에 능한 지도자가 드물지 않다.
공자(孔子) 같은 현인은 누구를 대놓고 미워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공자는 단호했다.
제자 자공(子貢)이 묻는다. "군자도 사람을 미워하나요(君子亦有惡乎)?" 공자는 답한다. "미워하는 일이 있다(有惡)."
누군가 또 공자에게 묻는다. "덕으로써 원한을 갚으면 어떨까요?" 공자는 반문한다. "그럼 덕은 무엇으로 갚으려고(何以報德)?"
모든 악을 일일이 상대할 순 없다. 그렇다고 거악(巨惡)에도 침묵할 수는 없지 않은가.
◼ 궤변(詭辯)
궤변의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남의 소를 훔쳐갔다. 관가에서 그를 붙잡아 왜 남의 소를 훔쳐갔냐며 신문을 했다. 그는 대답했다. "제가 길을 가다보니 길에 쓸 만한 노끈이 떨어져 있기에 그 노끈을 주워가지고 집으로 왔을 뿐입니다."
그는 소 끈에 묶인 소는 보지도 못했고 소를 훔친 의향이 전혀 없었다며 무죄를 주장한다. 이런 억지를 우리는 궤변이라 한다.
궤변의 궤(詭)자는 말을 나타내는 언(言)과 위험하다는 위(危)가 합쳐진 글자다. '속이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속임수가 있는 말이니 위험하다고 해석하면 글자 풀이를 잘한 해석이다.
사전에서도 궤변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얼핏 들으면 그럴 듯하지만 실은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억지로 둘러대며 합리화시키는 것이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궤변 사상가 공손룡은 백마비마론(白馬非馬論)을 궤변의 명제로 삼았다. 여러 색깔을 내놓고 그 중 흰색은 색이 아니라고 하면 여러 사람이 고개를 끄덕인다. "흰색은 색이 아니므로 흰말은 말이 아니다"고 주장한다. 논리의 비약이 분명하나 그의 궤변도 한 시대의 학파로 존재했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소피스트라는 궤변가가 활약했다. 당시 철학자나 교사 등 지식집단이 나서 군중을 상대로 설교한 것이 출발점이다.
그러나 소피스트들이 대가로 돈을 받고 출세욕에 사로잡혀 터무니없는 주장을 양산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는 소피스트는 부정적 집단으로 추락한다.
요즘 우리 사회가 논리보다 궤변과 주장이 더 앞서는 것 같아 안타깝다. 특히 정치인들이 쏟아내는 발언을 보노라면 철학도 논리도 없고 소신도 없다. 목청만 높다.
국민을 대변하는 국회의원이 궤변에 가까운 발언을 해놓고 정작 본인은 궤변인 줄조차 모르고 있으니 답답하다.
◼ 궤변(詭辯)
궤(詭) 자는 부수가 되는 말씀 언(言)에 '위태롭다'는 뜻의 위(危)가 합쳐져 생긴 글자다. 언(言)이 뜻을 위(危)가 소리 요소를 담당한 형성문자다. 남을 속이는 말이니 위태롭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변(辯)은 원래 매울 신(辛) 부수의 회의문자다. 맵고 사나운 양측 사이에 말씀 언(言) 자를 넣어 달변(達辯)으로 '갈등을 푼다'는 뜻을 나타내려 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궤(詭) 자와 합쳐지는 바람에 나쁜 뜻으로 전락했고, '궤변'은 겉모양만 번지르르 하고 속은 남을 미혹하려는 내용이 가득한 말이나 그런 양태를 가리키는 말이 됐다. 언뜻 보면 그럴 듯하게 보이나 속을 들여다보면 사실에 부합하지도 않고 논리도 박약하다는 의미다.
궤변과 비슷한 말로는 견강부회(牽强附會)가 있다. 말을 억지로 끌어다 이치에 맞게 한다는 뜻으로 달콤한 말로 세상을 속이려 하는 경우를 지적할 때 쓴다.
근거가 없더라도 여러 사람이 우기면 곧이듣게 된다는 뜻의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사자성어도 있다. 화려한 말세를 경계한 대변여눌(大辯如訥)이란 말도 있다. 워낙 말을 잘 하는 사람은 가볍게 입을 떼지 않아 말더듬이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주변 사람들의 명의를 빌려가면서까지 땅을 집중 매입해 놓고선 투기가 아니라 문화재 보존을 위한 것이었다고 하는 모(某) 의원의 말은 궤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고 보면 궤변은 정치인과 정치권 주변에서 자주 나온다. 혹세무민하는 주장은 대개 그럴 듯하고 달콤한 말로 포장된다. 단 말 일수록 쓴 결과로 이어지고, 쓴 말 일수록 단 결과로 이어진다는 격언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궤변(詭辯)
외견상 또는 형식상 타당한 것처럼 보이는 논거를 가지고 타인을 납득시키고자 하는 논법이다.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로부터 유래한다.
궤변은 사고의 규칙을 벗어나는 논리의 조립에 의하여 자신의 주장에 맞는 결론을 끄집어 낸다. 예를 들면 소피스트는 가장 기초적인 논리법칙인 동일률을 무시하여 다음과 같은 논리를 주장한다. "당신이 무엇을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당신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뿔피리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뿔피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잃어버리다'는 말을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한 궤변이다. 궤변의 가장 특징적인 방법은 구체적이고 다양한 관련, 본질적인 관련을 무시하고 왜곡하여 단지 외면적인 유사점과 비본질적인 관련을 부각시키는 데 있다.
사물의 여러 가지 측면을 총체적으로 보지 않고, 그 일면만을 들추어내어 부분에만 타당한 것을 전체에 적용한다든지, 혹은 일정 조건하에서만 성립하는 것을 모든 조건에 적용하는 것 등도 궤변에 속한다.
마르크스는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했다. 그렇게 때문에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는 다르다"고 하는 논법은 전후(前後)의 관계를 무시한 궤변이다.
또한 '생물계에서는 자연 도태가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사회에서도 약육강식은 필연적이다'고 하는 결론 역시 궤변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올바른 명제라 할지라도 그것이 구체적인 여러 조건이나 본질적인 여러 관련으로부터 분리되면 궤변으로 전락한다.
▶️ 詭(속일 궤)는 형성문자로 诡(궤)는 간자(簡字), 譌(궤)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말씀 언(言;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危(위, 궤)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詭(궤)는 ①속이다 ②꾸짖다, (책임을)지우다 ③헐뜯다 ④어기다(지키지 아니하고 거스르다), 위배하다(違背--) ⑤어그러지다 ⑥무너지다, 깨뜨리다 ⑦다르다, 차이지다(差異--) ⑧바꾸다 ⑨괴이하다(怪異--), 기이하다(奇異--)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속일 기(欺), 속일 만(瞞), 속일 사(詐), 속일 무(誣), 속일 휼(譎), 속일 편(騙) 등이다. 용례로는 도리에 맞지 않는 변론으로 도리가 아닌 말을 도리에 맞는 것처럼 억지로 공교롭게 꾸며 대는 말을 궤변(詭辯), 거짓 꾸며대는 말을 궤사(詭辭), 남을 간사하게 속이는 꾀 또는 간사한 속임수의 꾀를 궤계(詭計), 간사스러운 거짓 또는 옳지 못하고 간사스러움을 궤사(詭詐), 간사한 속임수의 꾀를 궤술(詭術), 교묘하고 간사스러운 속임 또는 이상야릇한 속임을 궤휼(詭譎), 언행이 온당하지 아니하고 격렬함을 궤격(詭激), 사리에 어긋나고 편벽됨을 궤벽(詭僻), 요망하고 간특함을 궤특(詭慝), 남을 속이는 수단을 궤도(詭道), 거짓으로 하는 말을 궤설(詭說), 간사스럽게 속여 꾸미는 말을 궤언(詭言),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부귀를 얻어 누림을 궤우(詭遇), 괴상하고 야릇한 모양을 궤형(詭形), 이상함을 일컫는 말을 궤괴(詭怪), 거짓으로 속임을 궤위(詭僞), 요사스럽고 괴이함을 요궤(妖詭), 음험하고 궤휼함을 음궤(陰詭), 기이하고 이상스러움을 기궤(奇詭), 속여 거짓말 함 또는 기이한 물체를 휼궤(譎詭) 등에 쓰인다.
▶️ 辯(말씀 변, 두루 미칠 편)은 ❶회의문자로 弁(변)의 본자(本字), 辩(변)은 간자(簡字)이다. 言(언; 말)과 辡(변)으로 이루어졌다. 본디는 辨(변)과 마찬가지였으나, 辨(변)은 구별(區別)하여 정하는 것을, 辯(변)은 주로 말을 잘하는 것을 나타냈다. ❷회의문자로 辯자는 '말을 잘하다'나 '(말에)조리가 있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辯자는 辡(따질 변)자와 言(말씀 언)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辡자는 죄인 둘이 서로 다투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따지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서로 다투는 것을 뜻하는 辡자에 言자를 더한 辯자는 서로 싸우는 사람들 사이에서 변론한다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辯자는 누구의 말이 옳은지 그른지를 대변해준다는 의미인 것이다. 분쟁당사자들을 대변하기 위해서는 말솜씨가 뛰어나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辯자는 '말을 잘하다'나 '조리가 있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辯(변, 편)은 변(辨). 한문학(漢文學)에서의 문체(文體)의 한 가지. 분별(分別)한다는 뜻으로, 옳고 그름 또는 참되고 거짓됨을 가리기 위(爲)하여 씌어진 글에 붙임의 뜻으로 ①말씀 ②이리저리 둘러대는 말 ③문체(文體)의 이름 ④말을 잘하다 ⑤(말에)조리(條理)가 있다 ⑥교묘(巧妙)하게 말하다 ⑦말다툼하다, 논쟁하다 ⑧다투다, 변론하다 ⑨말하다, 이야기하다 ⑩송사(訟事)하다, 맞고소하다 ⑪분별하다, 변별(辨別)하다 ⑫슬기롭다, 민첩(敏捷)하다 ⑬명석(明晳)하다, 밝다 ⑭변하다, 변화하다 ⑮나누다 ⑯다스리다 ⑰바로잡다, 그리고 ⓐ두루 미치다(영향이나 작용 따위가 대상에 가하여지다)(편) ⓑ두루(편)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말씀 언(言), 말씀 화(話), 말씀 설(說), 말씀 어(語), 말씀 담(談), 말씀 사(辭)이다. 용례로는 옳고 그른 것을 가려서 따짐을 변론(辯論), 말로 풀어 밝힘을 변명(辯明), 남의 이익을 위해 변명하고 도와 줌을 변호(辯護), 입담 좋게 말을 잘하는 재주를 변구(辯口), 옳고 그름을 따져 변론함을 변난(辯難), 말솜씨가 아주 능란한 사람을 변사(辯士), 입담 좋게 말을 잘 하는 재주를 변설(辯舌), 말을 잘하는 재주를 변재(辯才), 말로 풀어 자세히 밝힘을 변해(辯解), 옳고 그름을 가리어서 논박함을 변박(辯駁), 강제로 주장하는 말을 강변(强辯), 도리가 아닌 말을 도리에 맞는 것처럼 억지로 공교롭게 꾸며 대는 말을 궤변(詭辯), 재치 있는 말을 교변(巧辯), 사리를 논하여 옳고 그름을 갈라 밝힘을 논변(論辯), 능하게 잘 하는 말을 능변(能辯), 어떠한 물음에 밝히어 대답함 또는 그 대답을 답변(答辯), 남이나 어떤 기관을 대신하여 그의 의견이나 태도를 책임지고 말함을 대변(代辯), 대답하여 말함을 대변(對辯), 망령되이 하는 변론이나 변명을 망변(妄辯), 명백히 말함 또는 그런 변설을 명변(明辯), 말을 잘 하는 재주를 언변(言辯), 불을 뿜는 듯한 웅변이나 열렬한 변론을 열변(熱辯), 화술이 뛰어나며 설득력이 있는 말솜씨 또 그 모양을 웅변(雄辯), 뛰어난 구변을 준변(俊辯), 대드는 말 또는 대들면서 말함을 항변(抗辯), 더듬거리는 말씨를 눌변(訥辯), 도도히 흐르는 물과 같은 변설이라는 뜻으로 거침없고 유창한 말주변을 이르는 말을 현하지변(懸河之辯), 워낙 말을 잘하는 사람은 함부로 지껄이지 아니하므로 도리어 말더듬이 처럼 보임을 이르는 말을 대변여눌(大辯如訥)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