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가분하면서도 약간 우울했던 지난 금요일. 슬쩍 비도 왔더랬다. 때마침 걸려온 K모 여인의 전화. 두시간 후에 조선호텔 베키아앤누보에서 만나기로 하고 옷을 입기 시작했다. 가볍게 와인을 마시고 홍대로 와서 소폭이나 마셔야지...하며 핸드폰을 챙기던 그때만해도, 이렇게 많은 와인을 내 혀와 머리와 위장에 저장하게 될 줄을 미쳐 몰랐지. (이럴 줄 알았다면 카메라를 챙겨가는 건데...죄다 핸드폰 사진이라 뿌옇다.) 새로운, 게다가 훌륭한 와인을 만나는 것만큼 기쁜 일이 또 있을까. 금요일의 시름을 가시게 했던 그 와인들을 떠올려 본다. 새로 알게 된 것도 좀 있고 해서.
100억 인테리어 공사로 깔끔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시끌벅적한 조선호텔 지하 1층. 대충 먹고 자리를 떠야지 했는데 와인 셀러 룸에 예약이 돼있었다. 오호-. 작고 아담한 방에 의자 네개, 셀러가 하이얼인게 좀 안어울렸지만 그래도 아늑함만은 100점. 물론 와인을 위한 방이라 약간 서늘한 것을 감수해야했다. 덕분에 술에 늦게 취할 수 있었다는.
크루그(KRUG) 1996년산. 이렇게 남성미 넘치고 파워풀한 샴페인은 처음이다. 진한 금빛 색깔과 끊임없이 풍부하게 보글보글 올라오는 기포, 버섯내음이 살짝 느껴지는 뒷맛은...샴페인 그 이상인 거다. 최상위 샴페인 중에서도 희소가치가 있다는 설명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는데. 영어사전에는 크루기스트(krugist)라는 말도 등록돼 있다한다. 열혈 크루그 매니어를 지칭한단다. 돈만 있으면 못될 것도 없겠다. 최근 20~30% 정도 와인 가격을 인하했다는 조선호텔에서 테이크아웃 가격 100만원. 한번 마시면 한달 굶어야 하는 건가. 빈티지 샴페인의 매력이 이런거구나, 했다. 다시 볼 날을 기대하며.
혓바닥으로 굴리고 쓰다듬어 그 맛을 기억해 둔다. 이만큼 즐거운 공부가 또 있을까?
샴페인 코르크만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ㅋㅋㅋ
두둥~
심플한 등심스테이크(3만 8천원). 미디엄 레어로 구웠더니 완전 살살 녹는다. 레드글라스가 스테이크 최고인 줄 알았는데, 음흠.
고기 중독증엔 약도 없어.
요즘 조선호텔에서 12만원에 판매중인 딸보 2005. 지난해까지만 해도 코스트코에서 2004가 4만 8천원이었는데. 와인 가격 참 무섭게 오른다. 제때 마셔두는 게 재테크아닐까. 여전히 오묘하고 부드럽지만 밍밍한 맛. 한국인들이 너무 사랑해주시는 샤토딸보.
샤또 라 미시옹 오브리옹 1994. 술이 좀 오른 상태라 기억이 가물가물. 짙으면서도 엷은 애매한 향이 난다. 취하고 싶은 날에 어울리는 맛과 향이다. 가격은 40만원 내외. 조선호텔이 다른데보다 좀 싸다고 들었는데 리스트에서 확인을 못했다.
감자튀김 리필해주면 행복해진다. 마리아주는 이럴 때 쓰는 말일까.
티냐넬로 2005. 오브리옹과 미숑 오브리옹의 명성이야 인터넷만 찾아봐도 알게 되는 것. 신선함이 필요한 시점에 나타나준 풋풋한 와인. 그냥 가기 아쉽다며 룸을 뛰쳐나가 주문해온... 여기부턴 기억이 잘. 디캠을 마셔보지 않았다는 내 말에 롯데호텔 바인으로 디캠을 마시러 가자며 시끌시끌했던 것과 소믈리에의 키가 작다며 3천만원짜리 농담을 해댔던 것과...
비를 살짝 맞으며 롯데호텔로 건너왔다. 고속도로 휴게실같은 분위기의 롯데 1층 바인. 우습게 생긴 안경을 걸친 소믈리에가 조심스레 디캠을 만진다.
다소 소심했던 치즈. 그러나 배가 불렀으므로. 그런데 3차로 로바다야키에 가는 건 �미.
말로만 듣던 샤또 디캠 1989. 이탈리아의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 지하 꺄브앞에서 소믈리에들을 소리지르게 했던. 한병에 100만원이 족히 넘는다하니 가격만 듣고도 현기증이 난다. 디저트 와인은 달고 지루하다는 편견을 한모금에 홈런으로 날려버린 디캠. 향만 맡아도 단물이 뚝뚝 떨어진다. 입안에 넣으니 놀라울 정도로 깔끔하고 부드럽다. 열심히 일해서 돈 많이 벌어야지, 하게했던 와인.
딱 한잔만 더할까, 에 딸려나온 인시그니아. 미국 나파벨리 조셉 펠프스 와이너리에서 보르도 스타일로 만들었다는 블렌디드 와인. 소매가 30만원 내외. 이 간사한 혓바닥은 앞서 너무 좋은 걸 많이마셔서인지 이제 감동도 없다. 그래도 맛은 기억해야지. 공부이자 재테크 아니던가? ㅋㅋ 금요일의 우울함을 가시게했던 스타 와인들, 그보다 더 큰 행복을 주었던 새벽을 잇는 만남과 대화. 다시 떠올려도 흐뭇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