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박인비’ 리제트 살라스
노자의 도덕경에 ‘대교약졸(大巧若拙)’이란 말이 나온다. 풀이하면 '큰 솜씨는 마치 서툰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어찌 보면 황당하게 보이지만 노자의 심오한 철학을 담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깊은 의미를 캐보려면 이 구절이 나오는 『도덕경』 45장 전문을 볼 필요가 있다.
‘大成若缺, 其用不弊. 大盈若沖, 其用不窮.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靜勝躁, 寒勝熱. 淸淨爲天下正.’
- 크게 완성된 것은 마치 부족한 듯하지만 그 쓰임이 닳아 없어지지 않는다. 크게 가득 찬 것은 마치 비어 있는 듯하지만 그 쓰임이 끝이 없다. 크게 바른 것은 마치 굽은 듯하고, 크게 솜씨가 좋은 것은 마치 서툰 듯하며, 크게 말 잘하는 것은 마치 어눌한 듯하다. 고요함은 떠들썩함을 이기고 차분함은 열기를 이긴다. 맑고 깨끗한 것은 천하의 바른 길이다.
노자는 매 구절 모순된 말들을 계속 잇고 있는데 일상의 논리가 아닌 도(道)의 현묘한 작용을 설펴한 것이다. 대교약졸을 현대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소박미, 단순미 쯤 될 것이다.
19일 미국 버지니아주 윌리엄스버그의 킹스밀 리조트에서 막을 내린 LPGA투어 킹스밀 챔피언십에서 LPGA진출 4년 만에 첫 우승을 한 미국의 리제트 살라스(25)를 보면서 ‘대교약졸’이란 말이 떠올랐다.
리제트 살라스는 1990년대 LPGA무대에서 8승을 올렸던 낸시 로페즈(57)를 쏙 빼닮았다. 멕시코 혈통의 가무잡잡한 외모와 크지 않은 키는 물론 걸음걸이와 플레이하는 모습까지 영락없는 젊은 시절의 낸시 로페즈다. 여기에 결코 화려하지 않는 플레이까지 닮았다.
리제트 살라스는 장타자도 아니고 아이언샷의 기교가 탁월한 것도 아니다. 쉽게 말하자면 무던한 플레이를 펼치는 선수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도 별로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올해 기아클래식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더니 이번에 첫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비결은 바로 큰 실수가 없는 무던한 플레이가 아닐까 생각된다. 눈에 띄는 화려한 기량을 보여 주진 않지만 차근차근 자신의 리듬에 따라 흔들림 없이 자신의 플레이를 펼쳐나가는 태도가 바로 그의 최강의 장점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리제트 살라스는 ‘미국의 박인비’로 부르고 싶다. 박인비 역시 비거리가 긴 것도 아니고 아이언샷이 날카로운 것도 아니다. 정통적인 스윙을 익히지 못한 아마추어들이 박인비의 스윙에 용기를 얻을 만큼 스윙 역시 교과서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박인비가 세계랭킹 1위를 고수하고 있는 것은 유별나게 특출 나진 않지만 자신만의 리듬으로 주변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뚜벅뚜벅 자신의 플레이를 펼치는 꾸준하고 무던함 때문이다.
특출한 기량에 빼어난 외모나 유별난 패션감각 등은 골프의 흥행이나 골프팬들의 인기를 얻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승수를 쌓는 데는 기복 없는 무던한 플레이만한 게 없다.
2012년 1월 30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토리파인즈 골프코스에서 막을 내린 PGA투어 파머스 인슈어런스오픈 마지막 라운드에서 5타 차의 선두를 지키지 못하고 골프사에 남을 통한의 대역전패를 당한 카일 스탠리(27·미국)에게 아쉬웠던 것이 바로 무던한 대교약졸의 플레이였다.
그는 4라운드를 시작할 때부터 일찌감치 미디어로부터 우승자로 예견됐고 2위 브랜트 스니데커(34·미국)에 3타 차이로, 18홀을 시작할 때는 사실상 우승이 결정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장갑을 벗어봐야 안다’는 골프 격언을 증명이라도 하듯 스탠리는 손에 다 잡은 승리를, 아니 입을 지나 식도를 지나던 승리를 토해내야 하는 치욕을 당했다.
프로대회 마지막 라운드에서 5타 차이를 뒤집는다는 것은 경천동지할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그런데 3라운드까지 게임을 잘 풀어온 스탠리에게 불행히도 마지막 라운드 마지막 홀에서 결정적 실수가 한꺼번에 일어났다.
572야드 파5 18홀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섰을 때 스탠리는 동반 플레이어인 존 롤린스, 존 허와는 각각 4, 5타의 차이가 있어 아무도 그를 위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단독 2위인 스니데커가 4라운드에서 7타 차이를 3타 차이로 좁혔지만 이미 라운드를 끝낸 상태여서 스탠리에게 영향을 미칠 상황도 아니었다.
스탠리는 그냥 편안하게 파, 최악의 경우 더블보기를 해도 생애 첫 승리를 안을 수 있었다. 드라이버 샷을 페어웨이에 안착시키고 두 번째 샷을 워터해저드 앞에 갖다 놓았을 때까지 는 만사가 순조로웠다.
누가 말했던가. “골프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만사가 순조롭고 진행될 때이다.”라고. 진 사라센의 명언은 카일 스탠리에게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때부터 스탠리의 결정적 실수들이 잇달아 돌출된다. 마지막 라운드 마지막 홀에서 3타 차이 선두라면 긴장을 풀고 아주 보수적인 ‘지키는 플레이’ 즉 무던한 플레이를 했어야 했다. 당시 스탠리에게 필요한 것은 귀중한 첫 승리를 확실하게 쟁취하는 플레이였다.
그냥 무난한 세 번째 샷을 날렸어도 될 텐데 마지막 홀을 멋지게 마무리해야겠다는 욕심이 일어났던지 그가 날린 샷은 심한 백스핀이 걸려 워터 해저드로 빠지고 말았다.
훌륭한 기교는 도리어 졸렬한 듯이 보인다는 대교약졸의 교훈이 절실했다. 생애 첫 우승이 절실한 스탠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졸렬해 보이는 평범한 플레이였다. 파면 어떻고 보기면 어떤가. 우승이 눈앞에 있는데, 그린에 올리기만 하면 되는데.
여기까지도 스탠리는 여유가 있었다. 이후에도 냉정을 잃지 않았으면 우승은 그의 차지였다. 1 벌타를 받고 다섯 번 만에 그린에 올려도 2 퍼트로만 마무리하면 우승은 그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냉정을 잃은 상태였다. 두 번의 퍼트를 남겨 놓은 상황. 스탠리의 첫 번째 퍼팅은 홀컵 1.2m 근처에 멈췄고 두 번째 퍼팅도 빗나갔다. 상상하기 힘든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미 짐을 챙겨 떠날 채비를 하던 스니데커는 전혀 예상치 못한 연장전의 기회를 얻어 연장 두 번째 홀에서 우승을 줍다시피 했다.
멋지게 대미를 장식하겠다는 생각에 ‘대교(大巧)’를 꿈꾸다 졸렬함만도 못한 결과를 얻은 케이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