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민화의 해학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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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민화는
지금까지 민중적인 속화라는 이유로 경시되어 왔지만, 골동 서화 수집
붐과 함께 한동안 인기 품목이 되면서, 이에 대한 관심과 연구도 점점
높아가고 있다.
사실
민화에는 신선미, 자유성, 해학미와 더불어 다양한 가치가 있는 바,
민화에 대한 연구에서 본질적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어 재평가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민화의 가치를 알리는 데에는 체계적이면서도
다양한 각도에서의 미학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연구자들마다 민화를 다양한 시각에서 연구하고 서술한다는 원칙을 세워
놓고도 나타나는 결과는 비슷하였고 주관적 해석이 보편적인 사실로
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민화가 보여주고 있는 형태의
특징과 그것이 지향하는 미적 가치에 대한 고찰이나 연구가 아니고 품목
나열에 얽매여 그 본래의 생명력을 잃었으며, 민화를 마치 오늘날의
미술 창작 태도에 맞추어 설명되는 인상을 주었다는 것이다.
특히
미술사에서의 미적 연구는 별로 없었고, 있었다면 민화의 파격미를 저급한
미, 미숙한 형식으로 설명해 왔었다고 본다. 그러나 미술사에서 민화에
대한 연구 성과가 미진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민화가 언제, 어떻게 제작되었는지 구체적 모습을 고찰하기 힘들고 쓰임새와
표현양식의 시대적 변화, 지방 색채 등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민화가 단순히 감상 차원의 예술 품목으로 이해되거나 서술되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며, 그런 차원에서 더 나아가 서민의 생활 속에서
공유해 온 공동체적 정서와 이상을 표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화 연구의 성공적인 성과를 기대하기 위해서는 먼저 서민의 생활 속에서
공유해 온 공동체적 정서와 이상을 먼저 다루어야 할 것이다.
우리
조상들의 생활은 자연과 하나되었을 때 아름다웠다. 그들은 자연 속에서
살아왔고 그 속에서 정신세계와 역량, 미의식과 예술적 재능이 싹트고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었다. 이를테면, 그들은 자연 속에서 질서와
법규를 지키면서 너그럽고 해학적인 마음의 자세를 지니며 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다른 나라에도 우리와 같은 민중 예술이 있지만, 우리의 민화는 세계
어느 곳의 민중 회화보다도 덜 인위적이고 천진하며 소박한 자연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것이다.
또한
우리 민화에는 흥취와 익살이 있는데, 억지로 흥이나 익살을 내려고
설명하거나 복잡하고 기이하고 직설적인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 민화에는
삶의 자연스런 바탕 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은근한 멋이 있고 은은한
흥취와 익살이 담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우리 민족만이 해낼 수 있고 깊이 느낄 수 있는 것으로 생기 발랄함과
조용한 침묵이 어울어져 아는 듯 모르는 듯 느끼게 하고 있다.
따라서
본 글은 이러한 느낌의 관점에서 조선후기-말기의 민화의 총채적 인식이
가능해지도록 시종 중점을 두고자 하면, 나아가서는 아직까지 미흡한
상태라고 볼 수 있는 형식 구조의 미학적 측면의 분석을 시도하여 해학미의
유형과 내용을 알아보고자 한다. 그러나 그간에 별도의 연구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부분은 간략히 또는 생략하고자 한다.
1-1,
민화의 연구상황
민화
연구를 처음 시작한 사람은 일본인 학자 야네기 무네요시(柳宗悅)이다.
1948년
야네기 무네요시가 <미의 법문>을 저술, 한국 민화를 탐색하기
시작으로 1956년에는 <무유호추의 미>, 1957년에는 <조선화를
보면서>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민화라는 어휘를 붙였던 <불사의
한 조선 민화>를 1959년에 발표했다.
야네기
무네요시柳宗悅는 그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조선
사람 중에 이 분야에 대한 연구를 한 사람은 없다. 문헌도 없으며, 정리된
책도 없었다. 그리고 수집가도 없었다. 민화를 어디서나 소홀히 다루고
귀중하게 보관되지 않고 보존과 계승에 유의한 사람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렇게도
볼 수 있는데, 민화는 한국의 회화사 속에서 거의 무시된 경향이 있었던
바, 우리에게 민화가 본격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시기는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민화에 대하여 그 아름다움의 비밀을 밝히고 역사적 유래와 미술사적
가치를 찾아내는 연구 작업은 불과 30년 역사 밖에 되지 않는다.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에 민화 붐을 맞아, 조자용趙子鏞, 김호연金浩然, 김철순金哲淳
등 민화 연구가들에 의해서 논문과 책이 발간되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60년 조자용을 필두로, 1961년 권옥연權玉淵, 김기창金基昶 등이 민화에
깊은 관심을 갖았다. 특히, 조자용은 한국 민화 재발견에 선각자 역할을
하였으며 1968년에 직접 수집한 민화로 에밀레 박물관을 세우고, 1969년에는
민화를 대표할 수 있는 「호랑이 전」을 개최하여 민화를 국내외에 널리
알렸다.
또한
조자용이 1972년에 「한국 민화의 멋」가 발간되었고, 그 해 오월 한국일보에서
<이조의 민화>를 연재하였다. 1973년에도 역시 조자용이 「한화,
호랑도」라는 화집을 발간하였다.
이러한
흐름이 바탕이 되어, 1970년대 중반이후에 민화 붐이 일어나 많은 연구자와
수집가들이 이에 관심을 갖고 한국 민화의 멋을 알렸다. 그러나 연구의
대부분은 민화의 종류를 나열하는 경향이었으며, 다양한 시각에서의
연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본다.
1-2,
민화 연구의 중요성
예술은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한시대의 소산이므로, 그 시대의 상황이 집약적으로
미화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본다. 특히 미술은 다른 분야보다 더 순수하게
그 시대를 반영하고 있으며, 민화도 우리 전통 속에 뿌리깊게 자리 해온
예술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미술사적 해석에 있어서 민화의 의의와 위치가 중요하다고 보는데, 그
시대의 미적 이상과 민화가 어떻게 형성되고 무엇이 그것을 가능케 했는지에
대한 연구가 구체적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민화가 민족의 가장 본질적인 의식과 정신 문화가 담겨
있는 그림으로 인정받으면서도 미술사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연구되지
않은 분야이다."1)
역사학자들은
미술사를 다룸에 있어 시대 구분을 하면서 민화에 관한 항목을 소홀히
다루었다고 본다. 이를테면 세세하게 시대 구분을 하여 놓고도 민화에
관한 설명을 건너 뛰어 버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즉 다른 사적 상황은
놓치지 않고 있으나 민화에 대한 설명이 제대로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작가나 제작연대가 분명치 않아 사료로서의 한계성이 있다고 본다. 그리하여
미술사가들의 민화 연구는 더욱더 중요성을 띠고 있다. 미술사가들이
민화 속에서 읽어낸 내용들은 그 시대상을 복원하는데서 일반 역사학자
뿐만 아니라 인문학자 모두에게 중요한 정보와 참고 사항이 되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실
음악, 춤, 연극 등의 사적 자료들은 복원할 방법이 적지만 미술품의
경우에는 언제나 당시의 모습 그대로 유전되기 때문에 그 시대를 실
수 없이 잡아내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미술품은 오로지 예술적인 상상력이
풍부하게 작용하는 관점에서 획득되어지는 것이므로, 미술사가들은 다양한
시각과 장점을 살려 당시의 미묘 섬세한 심정의 기분이나 정서의 나타남을
심도 있게 다룰 수 있어야 할 것이다.
1-3,
민화 명칭에 대한 이해
민화는
사실상 미술사학계의 공인된 개념 없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민화의
명칭에 대한 문제는 애초부터 많은 학자들이 비판적으로 제기한 바 있지만,
민화라는 용어는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민화에
정식으로 이름을 부여한 사람은 일본인 학자 야네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이다.
한국에서는 조자용에 의해 민화라는 명칭이 각광을 받았지만, 조자용이
민화라고 부르게 된 것은 어느 정도 야네기 무네요시의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또한
조자용은 민화를 서민은 물론 도화서 환원을 비롯해 다양한 계층과 신분의
사람들의 그림으로 이해했다.
한편
김호연은 민화를 민족의 미의식과 정감이 표현된 겨레그림으로 정의했다.
이처럼 공인된 개념 없이 막연하게 "민화, 겨레그림, 우리그림"2)
등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민화를 포괄적으로 정의한 사람은 없는 바"3), 민화의
명칭은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편,
민화가 그려졌던 당시에는 속화라고 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18세기에
들어서서 종래의 화목畵目에 없던 그림들이 다양하게 등장했는데, 세속적인
내용을 그린 그림도 속화, 세속에서 치레그림으로 장식하는 그림도 속화라고
불렀다.
속화라고
하면 우리는 민화를 떠올리게 되는데, 당시에는 단원이나 혜원의 풍속화
유의 그림도 속화라고 불렀다. 여기에서 속화라는 말은 장르의 개념이라기
보다는 공식적인 장르에 없는 그림이라는 뜻이 강한데, 속화의 탄생과
유행은 곧 장르 개념의 해체 현상으로 보인다.
민화를
상층신분의 불쾌감으로 속화라고 불렀으며, 정통 회화의 범주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잡화, 속화, 별화 등으로 불리우며 천시 받았던 것이다.
사실
새로운 사회적 기류에는 기존의 규범과 형식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내용적
변화가 따르게 되는데, 당시 지배층의 교양과 멋의 상징물이던 그림을
세속에서도 적절히 변용 시키면서 횽내 내는 도전과 확산이 이루어 졌다고
본다.
민화를
속화라고 한 것은 향가나 향악을 외래적인 것과 구별하는 우리의 토착
문학이나 음악으로 호칭했던 것처럼, 우리 본래의 그림을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민화의 명칭에 대해 시비를 논할 입장에 있지 않다.
겨레그림,
민중그림, 민화, 속화 등의 명칭에 대해서 알맞은 지는 여기서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단지 민화라는 명칭이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이미 알고 있고 이제는 민화라는 명칭이 널리 쓰이고 보편화되어
민화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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