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란 다 그런거야...그래 포니 차 잘 굴러가나?
07년 2월 정부에 제출하였던 사표가 수리되어, 나는 정부를 떠나 평 시민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서 5년이 흘렀다. 되돌아 생각하니 지난 38년간 나 같은 사람을 봉직(奉職) 케 해 준 우리 정부와 국민에게 감사한 마음뿐이다. 하나님의 은총으로도 여긴다.
훌륭한 인품을 갖췄던 것도 아니었고 그저 평범한 공무원이었다. 외교관이란 직업을 택하여 나라 위해 일할 수 있었다는 데에 무한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 대사 자리 ... 아무나 하는 것 아닙니다!”고 말씀하실 분 계시다는 것,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정말이다, 그 자리 정말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해외에 나가 작은 공관의 대사를 맡을 경우 소사에서부터 대사까지 다 해야 하고, 따라서 젊어서부터 그 분야에 훈련이 안 된 사람일 경우, 정말 짜증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내 경우 독일대사처럼 큰 공관장 할 때를 빼놓고는 ‘소사에서 대사까지’ 정말 안 해 본 일이 없다. 물론 이를 경험하지 못한 큰 대사를 하신 Political Appointee께서야 다른 이야기들이 많겠지만!
일부 정치인 출신이나 다른 부처 출신 대사 가운데 큰 공관을 맡았는데도 일찍 귀국하고 싶다거나 임기가 상당히 남아 있는데도 짐을 싸고 있다는 소리가 들리는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괜찮은 자리려니 하고 멋모르고 왔다가, 막상 ‘소사’ 역할까지 하자니 “이게 아니다!” 느꼈기 때문이리라. 하기야 요즈음 같이 정치적 임명 해외공관장 자리도 국내에서는 인기라지만! 옛날 같다면 선진국이 많았지만 어떻게 하다 보니 이들의 대부분은 Political Appointee 차지였었다.
특히 난감한 일은 공관예산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외무부 예산이 우리 전체 예산의 0.6-0.7% 밖에 안 되니 공관에 넉넉한 예산이 배정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전투기 한 두 대 살 정도의 예산이나 될까, 아니면 웬만한 지자 체 예산의 몇 십 분의 일도 안 되는 그 예산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버텨야만 하니 열불 날 때가 너무 많았다.
허기야 서울 외교본부나 주미대사관처럼 우리 안보와 직결된 사업을 계속 추진 중인 부서에서 그 만큼 더 돈이 들어가기 때문임을 모르는 바 아니나, “열불은 열불 아닌가!” 문제는 그 열불 중에도 깨우치는 바가 많다는 점이다. 우리가 ‘국민의 혈세’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청렴결백’이 괜한 말이 아님을 저절로 실감한다는 말이다. 선진국에 체재하는 경우, 그런 실감을 더욱 절감하게 된다. 이 ‘청렴결백’이라는 단어...최규하 대통령 모시면서 더욱 더 실감했지만, 공무원 시작하는 사람은 죽어 무덤 속에 들어갈 때가지 꼭 가지고 가야 할 단어라고 말하고 싶다. 요즘처럼 공직 물러나고 나서 더욱 절감하는 단어다.
딱 까놓고 말해 그 놈의 돈이라는 것...있으면 물론 좋지만, 설령 모자라더라도 큰 지장은 없잖은가! 원체 없는 대사라고 공직 생활을 하다 보니 다소 불편한 건 사실이지만, 덜 쓰면 되는 것 아닌가 이 말이다. 다시 해외공관 시절 이야기로 돌아간다.
정치적으로 임명된 공관장들의 처사를 보면 정말 화가 나는 경우가 많았다. 툴툴거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런 나라에 나를 보내 놓고 대접이 이게 뭐냐?”는 것이 그들 Political Appointee (정치적으로 임명된 대사) 들의 주된 불만이었는데, 우리처럼 젊어서부터 현지공관 훈련을 받은 직업 외교관들은 잘 참아 넘기는 일을 그들은 참아내지를 못하는 것이다.
내 경우, 공직을 다 끝낸 지금까지도 나라와 연계된 삶을 살고 있다. 연금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실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연금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것을 보면 나는 우리나라에서 특혜를 받고 있는 사람이다.
정신적으로 나를 키워주신 최대통령 내외분에 대해 내가 서서히 자료를 챙기기 시작한 건 그래서였다. 특히 그 분이 몸소 보이신 ‘선공후사’와 ‘청렴결백’ 그리고 공직자로서 철저한 자기관리정신을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야겠다 여겼고, 특히 지금 같은 살벌한 시기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선 그분에 관한 일화를 모으기부터 시작했다.
누가 뭐라 말하던 내가 본 최규하 대통령 부부는 한마디로 향기로운 내외분이었다. 1969년 8월부터 외무부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나는 육영수 여사가 시작한 양지회 때문에 1970년 12월부터 최규하 외무부장관과 부인 홍기 여사의 일을 직접 도왔다.
그 이후 최규하 장관이 국무총리를 거쳐 대통령직을 맡고 나서도 홍기 여사를 자발적으로 보좌했다. 그 덕분에 최 대통령 부부와는 많은 시간을 함께할 수 있었고, 이 외교관 출신 대통령을 통해 외교가 어떤 것인가를 옆에서나마 어렴풋이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1979년12월6일 최규하 국무총리가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됐을 때, 나는 서독의 수도 본(Bonn)에서 영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듬해인 1980년1월 최 대통령이 다시 나를 찾았고, 청와대 부속실에서 영부인이 된 홍기 여사를 모시고 일을 하게 되었다. 물론 신 군부와의 사이에 일로 법정에 나가, 그 당시 일을 자백을 않는다고, 대한민국 외교의 초석을 놓으신 분의 명예가 땅에 떨어진 적도 있었지만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외교의 정석대로 살다가 가신 분이었다.
그 당시 내가 담당한 일은 최 대통령 부부의 선행을 조용히 수행하는 일이었다. 영부인이 사회복지시설을 방문할 때 수행하고, 사회의 불우한 사람이나 모범이 되는 사람들을 소리 소문 없이 지원하는 일 등이었다. 최 대통령은 좋은 일을 많이 하면서도 나를 비롯한 비서관들에게 그 선행이 신문에 보도되지 않도록 철저히 입 조심을 시켰다. 천성이 그랬다. 그래서 나는 기자들의 눈을 피해 대통령부부가 지시한 일을 처리하느라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처럼 최 대통령부부는 모든 언행에 신중했고, 국민들에게 철저히 자신을 낮추는 분들이었다. 나의 졸저 “자네 출세했네”는 그래서 씌어 진 것이다. 국가원수란 국민에게 투명하게 비추어야 한다고 느낀 생각 때문이었다. 이런 분이 어디 있단 말인가?
책을 낸 즉, 2008년 “한국간행물 윤리위원회”가 선정한 우수도서로 선정되어 상금 1천만 원을 주기에, 그 중 5백만 원은 받고 5백만 원은 출판사인 현문미디어에 송금했다.
그리고 며칠 지나 퇴근한 어느 날 일이었다. 공돈이 생긴 것아, 자랑 삼아 집사람에게 5백만이 원 생겼다고 한 마디 하였더니 집사람이 예상치도 않았던 말을 하는 것 아닌가! 아내 말인 즉 이러했다.
“참말이지 성모 마리아 님은 대단하시단 말이야. 우리에게 돈이 생길 줄을 어떻게 아셨을까? 꼭 750만원이 필요했었는데!”
“ ......... ” (사람, 환장할 일 아닌가!)
다음날 나는 서둘러 외국인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사는 안산시의 박주원 시장을 찾아갔다. 솔직히 말해 추모하던 최대통령 내외분들이 하던 그대로를 흉내 내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해서 준비한 봉투를 박 시장에게 내 밀었다. “마침 연말이 가까이 닦아오는데 경제를 위해, 애 쓰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남의 나라라고 소외감을 받지 않도록 해 달라”는 부탁 말씀도 곁들였다. 그래 대 해 보니 창피 하다는 생각이 앞을 질렸다.
시장 실을 나와 큰 한 숨을 내 쉬고 기지개를 폈다.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을 가지고 생색 낸 것 같아 창피하기도 했지만 나는 어느새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그 일로(집사람은 성모 마리아 님이 하려던 일을 못했다고 지금도 입을 삐죽 내밀고 있지만) 나는 집사람의 입을 막으면서 동시에 고 최대통령의 뜻에도 맞는 대표적인 일타이매(一打二枚)의 고스톱을 친 것 아닌가! 그리고 Napoleon 도 못한 정치적 술어 "시종에게 영웅이란 없다"(No man is a hero to his valet)라는 말이 틀렸음을 실증한 것이 아닌가?
누가 뭐래도, 이번 달 10월 22일이면 돌아 가신지 벌써 5주기... 고인을 정말 기리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