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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
영동고등학교 10731 조 동근
내 이름은 강 민철. 지금 나의 직업은 수의사. 동물을 치료하는 작은 동물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중이다. 매일 많은 손님들이 찾아오고 애완들을 자기 동생과 같이 아끼는 사람들을 보면 꼭 내 옛날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열심히 진료를 하게 된다. 이 일을 하면서 나는 예전에 민이를 키웠을 때의 감정을 살릴 수 있었고 애완의 주인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며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갔다. 처음에는 동물 병원을 작게 열었지만 사람들의 반응이 좋고 돈도 많이 벌어서 가게를 확장하였다. 그 이후로 나는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고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되기 전의 상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내가 수의사가 된 이유는 참 설명하기 길다. 이때까지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고 이 길을 택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결국 난 이렇게 잘 일하고 있다. 그럼 내가 수의사가 된 이유와 동생과 같은 내 애완견 민이에 대한 얘기와 수의사 때의 일들을 잠시 꺼내보려고 한다.
2003년 나는 17살이 되었다. 나는 중언고등학교 1학년 4반이다. 먼저 우리가족에 대해 소개하고 싶다. 우리가족은 4명 나, 엄마, 아빠, 그리고 곧 알게 될 마지막 가족 민이. 나는 외동아들이라 항상 집에 있을 때에는 외로웠다.
우리 집은 한때 우리 동네 에서 가장 잘 산다고 말할 수 있는 부잣집이었다. 하지만 내가 중1이 되었을 때 아버지 사업이 점점 하락세를 보이다가 결국은 망하였다. 아버지는 매일 밤 술을 마시고 들어오시고 우리에게 투정만 부리셨다. 정말 심하실 때에는 엄마와 나를 때린 적도 있었다. 물론 그 다음 날에는 사과를 하셨다. 나는 이때 아빠를 이해했다. 아빠는 가족을 지켜야 하는 책임감이 있는데 지킬 수 없기 때문에 매일 술을 마셨던 것이었다. 하지만 아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기 때문에 매일 길에 있는 쓰레기들을 주워서 팔았다.
나는 이렇게 집이 힘든 줄을 몰랐다. 만약 내가 정말 착한 아이었다면 새벽에 일어나 신문배달이라도 하며 최대한 집에 도움이 되는 일들을 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철없고 착하지 않았던 나의 중2 시절에 나는 우리 집 사정은 생각도 하지 않고 매일 어머니 지갑에서 돈을 빼서 친구들과 매일 놀고 돈만 낭비하였다. 어머니는 이런 사실을 아시면서도 항상 그냥 넘기셨다. 그때 어머니가 그런 것에 대해 나를 혼내셨으면 나쁜 짓을 많이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쓰레기를 치우시며 버시는 돈을 내가 헛되이 썼던 것이다. 나는 노는 데 집에 있는 돈을 쓰고 아버지는 술을 마시는 데에 돈을 쓰고 집에 남는 돈이 거의 없었다.
이런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학생이 정작 해야 할 공부와는 멀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제 친구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공부에 전념하였다. 나는 집에 돈이 없어 공부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때 너무 외로웠다. 나에게는 동생도 없었다. 그래서 그때 문득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아는 친구 중에 강아지를 키워서 외로움을 달래는 얘가 있기 때문이다. 친구는 강아지를 키우는데 돈이 생각보다많이 든다 하였다, 물론 집안사정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이 외로움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었다. 매일 강아지를 키우고 외로움에서 빠져나가고 싶다 같은 생각을 하며 살아갔다.
나는 8월 중순에 한창 더울 때 평소와 같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야, 수혁아! 여기야 여기 ”수혁이가 나에게 공을 주려고 찼을 때 공은 담장을 넘어가 버렸다. “빨리 주워와 시간 없어.” 나는 공을 주우려 담장을 넘고 공을 보니 그 옆에 강아지가 있었다. 나는 이때 많은 생각을 하였다. 주워서 키우면 어머니가 싫어 하실텐데 등 많은 생각들을 하고 고민했다. 그러다 친구가 나의 이름을 불러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강아지는 버려진지 오래된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 귀여웠다. 나는 그때 이 강아지가 나의 동생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공을 주우며 강아지를 가지고 왔다. 축구가 끝난 후 친구들이 강아지에 대해 물어보았고 나는 그냥 불쌍해서 주웠다고 내가 키울 거라고 말했다. 강아지를 집에 데리고 가니 부모님이 나를 이런 것 주워오는 거 아니라고 혼내셨다. 하지만 사실 어머니도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 하셨다. 하지만 그만큼 한 가족의 구성원이 더 늘어나는 것뿐이었다. 지금 3명도 먹여 살리기 힘들어서 강아지를 키우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엄마와 강아지를 씻긴 후 음식을 먹이고 나서 다시 가져다 놓기로 합의하였다. 하지만 나는 씻기고 먹이는 그 짧은 시간동안 강아지에게 정이 갔는지 버리기 싫었다. 엄마에게 죄송하지만 집 앞에서 강아지를 키우기로 결정하고 이름을 민이 라고 지어주었다. 용돈이 부족해 강아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엄마 지갑에서 돈을 빼어 강아지 사료 그리고 개껌 등을 사주고 예방주사도 놓았다. 강아지도 기분이 좋은 지 그날에는 폴짝폴짝 뛰며 집으로 갔다. 나는 내가 강아지를 키우는 것이 뿌듯한 나머지 어떤 날은 집 앞에 있는 공원에 데리고 가서 산책도 시켜주고 친구들을 불러 같이 놀기도 하였다. 어느 날은 지하철을 타고 집 주변에 있는 놀이공원을 가려 했는데 지하철에는 강아지를 데리고 탈 수 없어서 다른 곳에서 놀았을 때도 있다. 동생인 없는 아이들이 애완견을 키워서 외로움을 해소하는 것처럼, 나는 외동아들이기에 민이를 자기 동생인 것 같이 많이 아꼈다.
하지만 엄마도 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채셨다. 매일 지갑에서 돈을 가져가면 늦게 까지 놀다가 오는 아이가 갑자기 일찍 온 것이다. 그러다 우연히 민이를 산책시키고 있던 도중에 엄마를 만나게 되었다, 엄마는 그 즉시 나를 집에 데리고 가셨다. 나는 많이 혼날 까봐 무서웠다. 하지만 엄마는 나를 포근히 안아주시면서 그렇게 키우고 싶었으면 자기에게 솔직히 말하지 등 집에서 민이를 집 안에서 키우는 것을 허락해 주셨다. 그래서 그때부터 강아지를 집 안에서 키우기로 하였다.
하지만 강아지를 집에서 키우려면 개집도 사야하고 평소같이 사료등도 사주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건 내 강아지고 내가 주워왔고 내가 책임져야하기 때문에 이제 일을 시작하여 번 돈들로 강아지를 잘 키우기 위해 매일 아침 5시에 신문배달을 하였고 학교가 끝나고 4시에는 전단지를 돌리기 시작하였다. 아침에 신문배달을 하면 약 10,000원 정도를 벌고 오후 4시에 전단지를 돌리면 15,000원 정도를 벌었다. 내가 사고 싶은 강아지 집은 40,000원 이었다. 그래서 매일 이렇게 일을 하여 내 강아지를 내 돈으로 돌보았다. 그렇다고 그 돈을 모두 강아지에게 투자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제 슬슬 공부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공부할 책들도 사고 부모님에게 조금씩 돈을 드렸다.
하지만 강아지를 집에서 키울 때 많은 문제들이 일어나게 된다. 예를 들어, 내가 학교를 가고 부모님도 회사를 가시면 집에는 민이 혼자 있게 된다. 그럼 내가 집에 오면 온갖 오물들이 마루에 퍼져있다. 그리고 소파의 가죽들이 찢어져 있고 집에 있는 휴지들은 다 망가져 있다. 나는 학교에서 집으로 와 전단지를 돌리기 전에 빠르게 강아지가 변을 본 자리들을 정리하고 어질러 논 것들을 정리하고 나갔다. 나는 계속 빨리 훈련을 시킬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갑자기 엄마는 나에게 할머니 댁에 민이를 맡기자고 제안하였다. 하지만 이 오랫동안 같이 지내고 지금은 동생 같은 존재인데 할머니 댁에 맡긴다는 것은 말도 안되었다. 나는 엄마에게 공부도 하면서 민이를 돌보고 훈련을 시켜 집 안에다가 변을 보지 않게 만들 거라고 조금만 기회를 달라하여 민이가 우리 집에서 계속 살게 된다. 하지만 일을 크게 몇 번 더 부리면 바로 강아지를 할머니 댁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렇게 해서 나는 주일마다 강아지를 훈련시키도록 하였다.
일단 우리 강아지는 너무 많이 짖었다. 나는 입에 공을 물어 짖지 못하게 하고 사람이 들어와도 최대한 안 짖게 하도록 기다리게 하는 훈련을 시켰다. 곧 잘 따라왔고 말도 잘 들었다. 이제 내가 몇 일 동안 고민해온 변 문제인대. 나는 강아지 집 옆에 넓은 구덩이를 파주고 계속 거기서 변을 보게 하였다. 그리고 말은 잘 들으면 강아지에게 개껌을 하나씩 물려주거나 칭찬을 해주었다. 그러면 강아지는 말을 잘 들었고, 정리를 할 때 그 땅 위에 있는 종이만 치워주면 쉽게 해결될 수 있었다. 나는 강아지가 변을 보려 할 때 마다 강아지를 그 종이위로 옮겨주어 변은 거기에서만 해결하도록 훈련시켰다. 곧 잘 따라와서 나는 시간절약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고 고등학교에서의 첫 번째 시험인 중간고사를 보게 되었다. 나는 강아지를 키우면서 짬짬이 공부를 하였다. 학교에서도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 솔직히 나는 이번시험에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인생에서의 첫 공부를 했는데 반은 넘고 싶다는 생각에 열심히 하였다. 운이 좋았는지 내가 공부한 문제만 나왔는지 나는 이렇게 하여 반 67명중에 8등을 하였다. 나는 그 등수에 감명을 받고 더 열심히 공부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항상 시간에 쫓겼다. 이렇게 시험이 끝나고 겨울 방학이 왔다.
아버지는 아직도 일자리를 못 찾으셔서 매일 쓰레기를 주워서 파시고 그 돈으로 저축을 하지 않으시고 항상 술을 드시고 집에 와서 행패를 부리셨다. 그러다 어느 날 나는 아버지가 술에 취하셔서 교통사고가 낫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와 엄마는 바로 병원으로 달려가 수술이 끝날 때까지 울면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수술이 끝나고 수술은 성공하였지만 다리 한쪽이 신경이 나가서 못 걷는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일단 집에 가서 휴식을 취하였다. 다음 날 강아지와 함께 아버지 병문안을 갔는데 아버지는 정말 잘 못 걸으시고 항상 휠체어를 타셨다. 나는 그때 문득 이제 아버지도 일을 못하시는데 나하고 엄마가 무슨 힘으로 집 안을 살려나갈지 생각을 하였다.
몇 달 후 아버지는 퇴원하시고 우리 집안은 쭉 평화로웠다. 아버지는 다리가 아프시지만 이제 술을 안 드시고 정신 차리셔서 어머니가 나가서 일하시는 동안 가볍게 할 수 있는 집안일들을 하셨다. 나는 이런 아버지가 더 좋았다. 이렇게 우리 집안은 나와 엄마에 의해 돌아갔다. 나는 매일 공부하고 일하고 강아지와 노는 일상을 반복하였다.
내일은 나의 생일이었다. 우리가족은 다 같이 놀이동산을 가기로 하였다. 어머니가 운전을 하시고 한 시간 동안 놀이공원으로 달려갔다. 그때 나는 고1때 처음으로 놀이동산을 들어갔다. 옛날의 놀이동산에는 강아지 보관소가 없어서 바로 집으로 갔는데, 이 놀이동산에는 강아지를 보관할 수 있는 곳이 있어서 민이를 데리고 같이 갔다. 민이는 보관소에 맡긴 후 놀이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놀이기구는 계속 나 혼자 타거나 어머니랑 같이 타였다. 그렇게 놀이공원 안에 있는 놀이기구는 거의 다 타고 동물원을 갔다가 밤에 하는 불꽃놀이를 볼 때 아버지가 나를 부르시더니 나에게 생일을 축하한다 말씀하시고 돈은 어디서 나셨는지 비싼 시계를 선물해 주셨다. 아버지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장난으로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는 뭐 없어요?”. 엄마가 말씀하셨다 “야 이 불효막심한 자식아 엄마가 아침에 미역국을 해준게 제일 값진거야.” 그렇게 웃고 떠들며 나는 내 생애에서 최고의 생일을 보내었다. 불꽃놀이를 본 후 우리는 너무 피곤한 나머지 바로 잠을 청했다.
그 다음날 아침 나는 평소와 같이 강아지와 신문배달을 하러 나섰다. 나는 너무 피곤하여 하루만 쉬려 했지만 민이가 내 옆에 와서 나를 깨웠던 것이다. 나는 알겠다고 말하고 옷을 입고 민이와 아침공기를 마시며 뛰어다니며 신문을 배달하였다. 그리고 일요일 아침이기 때문에 민이와 함께 집 앞에 있는 중언산을 가서 정상까지 올라갔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에 약수터에서 물을 마시고 쉬다가 중간에 정상으로 가는 길 중에 쉽지만 먼 길과 어렵지만 가까운 길을 선택하는 갈림길이 있었다. 우리는 항상 쉽지만 먼 길을 갔지만 한번 도전 해 본다는 의미로 멀고 어려운 길을 선택하였다. 역시 어려운 길은 정말 어려웠다. 길도 좋지 않았고 땅이 미끄러웠다. 정상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에 나는 실수로 발목을 삐었다. 그래서 정상에서 쉬다가 민이와 함께 내려왔다. 나는 이렇게 힘든데 나보다 훨씬 작고 약한 강아지가 체력이 강하다는 것이 신기했다. 이 정도로 나는 항상 민이와 무엇이든지 함께하였다.
집에 오니 엄마가 나에게 좋은 소식을 들려 주셨다. 바로 아버지가 취직을 하신 것이다. 아버지의 종이를 파는 회사에서 일하시게 된 것이다. 물론 그 회사는 아버지가 아시는 분의 것이었다. 이제 아버지의 월급도 나오고 저번처럼 가난하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행복했다. 이제 민이에게 사료를 충분히 줘도 되었다. 아버지의 월급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아서 자동차를 하나 장만하였다. 항상 여행을 가면 민이는 가지 못했지만 자동차를 사서 가족끼리 부산을 가기고 하였다. 그러면 민이도 함께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내일 여행가기로 결정이 되어서 나는 짐을 쌋다. 생전 처음으로 차로 여행을 가기 때문에 기대되었다. 민이도 즐거웠는데 밤새 짖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모든 준비를 끝나고 부산으로 출발하였다. 차가 막혀서 오랫동안 달려 겨우 도착하였다. 3박 4일로 부산에 머물기로 하였다. 민이와 저녁을 먹기 전에 바다를 갔는데 우리는 거기서 바다와 술래잡기를 하며 뛰어다녔다. 저녁은 민박집 앞에서 고기를 구워먹었다. 3박 4일의 긴 여행이 끝나고 사고 없이 서울로 잘 돌아왔다.
이렇게 몇 일을 보내고 겨울방학이 끝났다. 이제 곧 고등학교 2학년이 되는 것 이었다. 이제 민이도 나와 같이 나이가 들고 있었다, 어느 새 민이와 시간을 보낸 지 1년이 되었는데 민이가 이때까지 아프지 않고 쭉 큰 것에 고마웠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 슬슬 나의 꿈을 정할 때가 올 것 같았다. 나는 옛날에는 운동에 관련된 직업을 선택하고 싶었지만 경쟁률이 너무 높아 바로 다른 것으로 바꾸려 하였다. 나는 정말로 동물을 좋아했다. 키우는 것이나 보는 것이나 동물에 관련된 것이면 무엇이든 좋아했다. 하지만 예전에 우리 아버지는 말씀하셨던 적이 있다. “민철아 직업을 선택할 때는 너가 제일 좋아하는 일은 취미로 삼고 2번째로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라.” 하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동물을 키우는 것, 하고 싶은 것도 동물을 키우는 것, 내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것은 그냥 무난한 사업이다. 나는 이 일로 민이와 산을 왔다 갔다 하며 생각을 많이 하였다, 그래서 나는 결정 내린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동물을 키우는 사업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구체적으로 동물을 키우며 사업을 하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 까 생각하다가 애완동물의 장난감을 만들고 파는 사업을 만드는 것이었다. 근데 애완동물의 장난감을 파는 것은 경제생활을 하기에는 부족하다 생각되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직업이 바로 수의사였다. 이때부터 나는 수의사에 대한 정보를 찾고 그 길을 달려갔다. 일단 수의사가 되려면 의과대학을 나와야 했다. 제일 가기 어렵다던 의대를 가기위해 매일 공부를 하였다. 나는 원래 문과학생이었다. 국어나 영어는 잘했다. 하지만 수학이나 과학은 정말 못하였다. 그래서 매일 수학, 과학을 공부하고 연구했다. 그렇다고 내가 공부를 하는 동안에 민이를 소홀히 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공부를 하면서도 민이와 할건 무엇이던지 다 하였다. 이렇게 공부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어느덧 수능날이 다가왔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시험을 보았고 결국 의대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제 내가 대학생이 되면 민이를 돌볼 시간이 매우 줄어들게 된다는 점에서 매우 안타까웠다. 그래서 학교 근처 작은 집에 전세를 내서 민이와 함께 살기로 하였다. 항상 학교를 갔다 오면 민이는 집을 어지럽혔고 나는 정리하는 일에 시간을 많이 빼앗기게 되었다. 그래도 밤을 새서라도 내가 부족한 부분을 채웠고 결국 의대를 졸업하게 되었다.
이제 취직을 해야 하는 데 경험 없이 무조건 동물병원을 세우는 것은 좋지 않을 것이다 라는 판단으로 나는 집 앞 작은 동물병원에 취직하여 경험을 쌓을 겸 동물에 대해 더 알기로 하였다. 그곳에서 동물 수술도 해보았고 돌보기도 해보았다. 항상 내가 민이에게 관심을 쓰는 정도로 그 안에 있는 동물에게 관심을 보이고 다정하게 굴었다. 이 병원에 다니면서 민이를 집에 둘 수가 없어서 동물병원 원장님께 허락을 받고 민이를 이 병원에서 같이 키우게 되었다.
이렇게 몇 년을 일하다가 돈이 생겨 이제 나의 동물 병원을 만들려고 그 병원에서 나와 새로운 병원을 할 곳을 찾으러 다녔다. 나는 동물병원도 동물 환자들이 있는 것이라 생각해서 최대한 조용한 곳으로 찾으려 했다. 그러다 집앞 사거리 반대쪽 건물에 임대가 났길래 바로 결제를 하였다. 동물병원 이름은 ‘민이네 동물병원’ 으로 지었다. 나는 동물병원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사고 문을 열 준비를 하였다. 많은 경험으로 무엇을 사야할지를 알았고 어떻게 운영을 해야 할지는 이미 내 머릿속에 있었다. 같은 대학 동기 중 나와 꿈이 비슷한 친구가 있어서 우리 병원에 취직을 시켰다. 내일이면 내가 기대하던 민이네 동물병원이 열어서 가슴이 떨렸다.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면서 그날 밤을 잘 보냈다.
처음으로 문을 연 날에는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홍보 겸 무료 치료라는 프로젝트를 실시했다. 이 날에 아주 많은 손님들이 오셨고 모든 분들이 웃으면서 돌아가셨다. 이렇게 점점 알려질 거다, 라는 생각으로 진료했다. 그 결과 날이 가면서 많은 분들이 오시고 나는 돈을 많이 벌어 가게를 확장할 수 있게 되었다. 가게를 확장하는 동안에는 공사 소리 때문에 시끄러워 동물 환자들을 병원 안에서 보호 할 수 없었다. 대신 나의 집에 데리고 가기로 해서 민이를 포함한 4명의 강아지를 우리 집에 데리고 갔다. 그날 밤에 강아지들 끼리 싸움이 붙어서 아주 시끄러웠다. 하지만 이렇게 강아지를 데리고 있는 것도 재미있었다.
확장공사가 끝난 후 가게에 가보니 그 건물의 1층이 모두 우리의 동물병원이었다. 나는 그 어마어마한 크기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나는 확장 공사 기간동안 더 많은 직원들을 채용하였다. 게다가 제일 행복했던 일은 우리 병원에 자주 찾아오는 김 소희 라는 여자가 있는 데 나이는 나랑 똑같았다. 그런데 소희의 강아지가 우리 강아지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어쩔 때 마다 우리 집에 와서 나는 소희와 얘기하고 강아지들 끼리 놀았다. 놀면서 강아지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민이가 임신을 한 것이다. 그렇게 나와 소희도 점점 친해지고 둘이 사귀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소희와 결혼하고 강아지를 2마리를 키웠다. 강아지가 낳은 아이들은 일단 우리 병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고 집에 강아지는 5마리가 되었다. 결혼 후에도 우리 병원은 계속 갈수록 번성했고 어느 덧 어느 회사에서 우리 병원에 투자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투자에 성공하여 우리 병원의 이름으로 체인점도 몇몇 열었다. 그리고 지금은 애완견 장난감 사업도 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게 내가 수의사가 되기까지의 길 이었다. 정말 우여곡절 끝에 된 직업이고 내가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에 전혀 힘들어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새 아이를 낳아 유치원에 다니고 있으며 우리 가족은 화목하게 살고 있다. 물론 우리 부모님도 잘 살고 계시고 아버지도 다시 사업을 하셔서 많은 돈을 벌으셨다. 나는 옛날 가난했던 시절에 부모님이 나를 강압적으로 잡지 않으신 것으로 인해 지금의 내가 있었다고 생각하고 항상 감사하다. 한편으로는 나의 꿈을 결정해준 민이에게도 고마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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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내 조카가 학교에 제출하느라고 쓴 소설이다. 큰 조카다. 고 1짜리. 600명 중에 제출한 학생은 두 명밖에 없다는구만. 심심한 사람 한번 읽어보라고. 우리 중에 고교 때 소설 쓴 사람은, 내가 알기로는, 민형이밖에 없는데.
고1 조카가 대단한 소설가 기질이 있네.. 삼촌을 닮았나? 잘 읽었구먼.
읽어줘서 고맙네. 나보다야 훨씬 낫지. 난 (대학생 때) 시작한 적은 몇 번 있지만, 끝낸 것은 한 편도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