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보다 순종
삼상15:17-23
(삼상 15:17, 개역) 『사무엘이 가로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삼상 15:18, 개역) 『또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삼상 15:19, 개역)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
(삼상 15:20, 개역)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왔고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였으나』
(삼상 15:21, 개역)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취하였나이다』
(삼상 15:22, 개역)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 15:23, 개역)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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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보이지 않는 분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나와서
약속의 땅까지 가는 도중에는
오로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이름’만이
해낼 수 있는 일들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실을 현실로 인정하지 않고 자꾸만 보이는 모세에게만 원망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살아있음을
얼마나 대단하고 무서운 일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아말렉 민족과의 전쟁을
허락하셨습니다.
본문도 이런 취지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보이는 장애를
어떤 무서움으로 해결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장애 중의 하나가
바로 사울왕 본인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께 순종했다고 우깁니다.
이로서 사울이 주장하는 바와
사무엘의 주장 사이에
소통이 잘 안되고 있음을
느끼실 것입니다.
자신의 주장이 나오게 되는
그 생각의 창고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즉 사무엘이 하나님을 보시는 바와
사울왕이 하나님에 대해서 여기는 바가
같지 않습니다.
얼른 보면, 제사의 의미에서
차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즉 사울왕 본인의 생각이나
백성들의 생각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제사할 때는
제물이 필요하고,
하나님께서 분명
제일 좋은 양을 원하실 것이 분명하니
이번 아말렉 전쟁의 전리품들 중에서
하나님께서도 흐뭇해하실 만한
실은 양을 죽이지 않고
생포해 온 것입니다.
만약에 양을 죽여버린다면
그 순간 ‘죽음’ 그 행위 자체만
일시적으로 행사될 뿐이고
뒤에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남는 것이 없다’라는 것이
왜 잘못된 의식인가를
분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남는 것’을 원하실까요?
‘남는 것’이 있어야
산 보람이 있다는 것은
장사치들의 본성입니다.
‘남는 게’ 없으면
진리가 아니라고 보는 겁니다.
‘남은 것’이 없으면 불안합니다.
공연한 짓이나 했다고 판단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만들어나가시고
그들을 약속의 땅에 심으시는데 있어
오로지 인간이 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할 수 있는 방식만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 자신들이
자기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고자
머리 쓰고 있는 겁니다.
즉 뭔가 자기네들 손에 남는게 있고
건진게 있어야
그것을 활용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나 순종이나 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이렇게 되면
이런 이스라엘은
인간들의 이스라엘이 될 뿐이며
하나님이 빠진 채,
저들만의 천국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인간 손에
아무 것도 남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순전히 하나님의 의로만
이기는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존재는
이 전쟁의 와중에서
출현되는 겁니다.
아말렉족속을 비롯해서
인간들은 돌부처 같은 하나님에게
나름대로 대드는 개미 군단에 불과합니다.
자기 딴에 각가지 솜씨를 발휘해보지만
하나님은 전혀 요동하지도 않으십니다.
이런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의 작품인 이스라엘은
‘왜 자신들은 이방 민족들처럼
다 진멸당하지 않는가?’는 점을
새삼 알아야 합니다.
그 내막은
제사를 통해서 알려집니다.
제사란 곧 ‘죽음의 자리’입니다.
제사드리는 장소에 들어가면
거기에 누군가는 피를 흘리고 죽어 있습니다.
순종 못하는 자기 백성을 위하여
온전히 순종한 분의 죽음이
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법을 전달받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곡해하고 있는 겁니다.
즉 인간들도 자기 나름대로의
딴 살림을 차릴 자격이 있는 것처럼
군림하고자 하는 겁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 것을 따로 갖듯이
우리 인간도 하나님처럼
자기만의 것을
따로 가질 입장에 있다고 보는 겁니다.
이는 제사라는 율법의 의미를
하나님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나의 제사’, ‘내 몫의 제사’로
곡해하고 있는 바도 됩니다.
제사가 하나님께 즐거움이 아니라
제사드리는 자신들의 ‘즐거움’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일종의 자기 존재를 과시하려는
수단으로서
하나님의 법이 동원되는 겁니다.
백성들도 역시 이러한 분위기입니다.
제사만 계속 성사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하나님에게 해야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제사는
모든 남은 것을 없애는데
취지가 있음을
이들은 알지 못한 겁니다.
즉 제사 속에
이미 ‘진멸’의 의미가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치뤄야 할 전쟁은
곧 ‘바깥 제사’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말렉에게
죽음의 의미로 다가가야 했습니다.
궁극적으로
제사 안에서 메시야의 죽음,
곧 ‘하나님의 죽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마저
죽음 안에서 자신을 구현하시는 겁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조치는
자기 백성들이 죽음과 저주와 죄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 지경 속에서
그들을 구원해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이들은 전쟁을 통해서
진정 그들이 오해하고 있는
제사의 의미를 청산하고
본디 제사의 의미로 되돌아와야 합니다.
곧 순종이 제사의 완성입니다.
순종없는 제사는
성사될 수 없습니다.
제물만 풍부하다고 해서
제사가 유지된다는 생각은
이방인들이 생각하는 제사입니다.
즉 추상적인 신을 믿을 경우에나 나올
사고방식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산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알지 못하고
그저 이방인들이 생각하는 제사처럼
제사 예법이나 치르면
그것으로 제사 완성을
외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제사가 ‘자기네의 정신들을
다시금 사로잡기 위한 단합대회’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겁니다.
인간들이 단결을 도모하는 구실거리로
제사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순종의 정신은
어디에도 찾을 길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일방적으로
자기네들 방식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만 이루어진 제사를
그들이 허락하지 않는 겁니다.
제사에 대해서
어떠한 발전된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그들은 알고 싶어하지를 않습니다.
자신이 살아 있는 한,
순종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12:1-4에 보면,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지경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를 생각 안합니다.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지나면 내일
또 하나님께서 이벤트를
준비해 놓고 계십니다.
아예 우리 자신이 걱정할 필요없는 존재임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