섶섬이 보이는 풍경
박 보 현
이중섭 미술관 <섶섬이 보이는 풍경> 앞이다. 따뜻한 흙담 뒤로 대여섯 그루의 나무가 서 있다. 그 사이로 이마를 맞댄 초가지붕 위, 과감히 생략된 터치가 인상적이다. 햇살을 튕겨내지 않고 빛을 끌어안은 초가 분위기가 안온해 보인다. 어둡지도 무겁지도 않은 파스텔 색조의 풍경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산뜻하다. 계절을 가늠하기 어려운 그림 속, 전봇대 하나가 외따로이 서 있다. 간간이 떠 있는 하얀 돛단배가 구도를 완성으로 몰고 간다. 멀리 하늘과 만난 쪽빛 바다 위로는 물감이 미세하게 갈라져 있다. 화가의 인생처럼 터지고 금이 간 그림을 보는 순간 빈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이 휭하니 부는 것 같다.
중학교 때 일이다. 담뱃갑 속의 은박지에다 그림을 그리는 가난한 화가의 이야기를 들었다. 소를 즐겨 그린다는 것도 신기했다. 그 후 D 고등학교에 근무하던 시절, 한 원로 교사의 후일담을 전해 들었다. 그는 이중섭과 자주 술자리를 하는 막역한 사이였던 모양이다. 전후 어렵고 어수선하던 시기였다. 고향을 잃은 예술가들이 대구로 모여들어 의지하며 지냈던 향촌동 선술집에서다. 그날도 이중섭이 담뱃갑에 그림을 그렸다. 술값을 내어준 그에게 건네주며 잘 간직하라고 했다. 그러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매번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던 것을 두고 내내 후회한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어두운 다방 한쪽 구석에서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이는 이중섭의 슬픈 얼굴을 상상하곤 했다.
오늘에서야 그의 그림 앞에 섰다. 1951년 한국전쟁 중 가족과 함께 서귀포로 피난 왔을 때 그린 대표작이다. 일 년 뒤 부산으로 건너간 후 부인은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극한 외로움과 고난의 세월이 그를 옥죄었을 것이다. 서울과 부산, 대구 등 여러 지역을 전전하면서도 작품활동의 끈을 놓지 않았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술로 달래다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사망하여 무연고자로 처리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20년간 창작활동을 했지만, 남아있는 작품은 주로 1950년대 초반의 것들에 불과하다. 가족에게 보낸 엽서화나 편지화 외에 은지화가 남아있다. 담뱃갑 속의 은지를 긁어 선을 그렸다. 그 위에 유화물감을 칠 한 후 마르기 전에 닦아내면 파인 부분에만 색이 묻히는 기법이었다. 당시 대구미문화원 책임자로 있던 사람이 3점을 사들인 후 뉴욕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그 후 외국에까지 알려지게 되면서 은지화라고 불리게 되었다.
15호 남짓한 작은 그림이 주는 느낌이 이토록 강렬한 것은 왜일까. 그가 감당해 낸 삶의 무게 때문인가. <섶섬이 보이는 풍경>은 나무판에 유채로 그렸다. 결 고운 아마로 만든 캔버스가 아니라서 그의 하늘과 바다는 갈라지고 터졌던 모양이다. 캔버스가 없어 이것저것 잡히는 대로 그림을 그린 화가의 애절함을 지켜본 이가 있었다. 평생지기 구상 시인이 한 말이 미술관 액자에 남아있다.
“판잣집 골방에 시루의 콩나물처럼 끼어 살면서도 그렸고, 부두에서 짐을 부리다 쉬는 참에도 그렸고, 다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도 그렸고, 대포집 목로판에서도 그렸다.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니, 합판이나 맨 종이, 담뱃갑 은종이에도 그렸고, 물감과 붓이 없으니, 연필이나 못으로 그렸다. 외로워도 슬퍼도 그렸고, 그저 그리고 또 그렸다.”
먹먹한 느낌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하루다. 이중섭의 그림은 아름답다. 그러나 인생 여정이 그렇지 못했으니 얼마나 마음 아팠겠는가. 그는 게를 주제로 많은 그림을 남겼다. 배고픔을 달래려 그것을 잡아먹고 살던 시절, 그 아픔에서조차 아름다운 본질을 만들어 내었으므로 그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해야 할까. 제주 피난 시절, 1.4평 정도의 단칸방에 네 식구가 함께 살았다. 실내는 방이라기보다 커다란 상자에 불과해 보였다. 가족의 숨소리를 들으며 잠 못 드는 밤을 하얗게 지새웠을 것이다. 고구마와 돌게로 연명하던 기막힌 시간을 살아냈다. 자식을 건사하지 못하는 아비의 고통을 그림으로 승화시켰다고 하기에는 표현이 너무 가벼운 것 같다. 그래도 그림을 통해 우리의 영혼을 위로하는 삶을 살았다고 해야 할지.
예술은 진선미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죽기 두 달 전까지도 전시회에 매달렸던 작품 세계는 그의 인생에서 어떤 것이었을까. 극한 상황 중에서도 그 순간의 의미를 발견케 함으로써 정신과적 문제를 치료하는 이론이 있다. 인간의 특성을 연구한 정신분석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쾌락에의 의지를, 알프레드 아들러는 권력에의 의지를 주장했다. 이어 반해 빅터 프랭클은 의미에의 의지를 핵심으로 삼았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가서 가족을 잃어버리는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매 순간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했다. 끝내 의미 요법의 이론을 정립하여 전후 수많은 환자에게 획기적인 치료의 성과를 거두었다. 절판된 그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현대인으로부터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 도대체 인간이 극복할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궁금하다.
절박한 삶의 흔적을 톺아보는 가슴이 뻑뻑해졌다. 해변을 따라 섶섬이 보이는 풍경 속을 하염없이 걸었다. 햇살에 반짝이는 푸른 바다 위를 날고 있는 하얀 물떼새가 자유로워 보인다. 정신적 자유를 꿈꾸는 성인에게는 경제적 독립이 우선이다. 경제적 독립을 위해서는 하고 싶은 일과 해야만 하는 일 속에서 갈등하며 살아가기 마련이다. 좋아하는 일을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할 때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기쁨과 슬픔이 짝을 이루는 것처럼 행복의 짝은 고통일지 모른다. 매 순간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는 한 고통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불운의 시대를 살다 간 천재 화가 이중섭이 남긴 시의 한 구절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이라 했다.
첫댓글 제주 피난 시절, 가족들이 함께 잠시 살았던 그 작은 방이 눈에 선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