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와 이방원, 세종대왕 (1) 2012.4.15
음양오행과 개인의 운명을 통해 조선 건국 초의 일들을 얘기해보고자 한다.
이성계와 이방원, 그리고 세종대왕에 이르는 격동의 시기에 대해 몇 차례에 걸쳐 얘기할 생각이다. 상당히 흥미로울 것이고 기존의 역사책만으로는 알 수 없던 역사의 내막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는 1335 년 음력 10월 11일 생(양력 11월 4일)이니 乙亥(을해)년 丙戌(병술)월 己未(기미)일이다.
帝王(제왕)의 운명이라 하기 보다는 威嚴(위엄)과 仁德(인덕)을 갖춘 武將(무장)의 기상이다.
이성계가 易姓革命(역성혁명)을 통해 조선을 개국했다 하지만, 그의 운세를 보면 아들 이방원에 의해 등 떠밀려서 그런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실상의 開國君主(개국군주)는 아들 이방원, 그러니까 태종이라 볼 수 있다.
이는 마치 중국에 있어 隨(수)나라를 무너뜨리고 唐(당)을 개국한 사람은 초대황제 高祖(고조)가 아니라 그 아들 태종 이세민인 것과 같다.
이성계는 고려 말 원나라 땅이던 쌍성총관부-오늘의 함경도-에서 국경수비대 대장인 이자춘의 아들로 태어났다.
다시 말해서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은 몽골 제국인 원나라의 군인이었다.
이자춘이 고려로 투항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당시 중국을 지배하던 몽골의 원제국은 중국 남쪽에서 새로 일어난 주원장의 명나라에 의해 약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이에 고려의 공민왕은 그동안 元(원)에 붙어서 권세를 농단하던 이른바 附元派(부원파)를 몰아내고 자주권을 되찾고자 했다.
오늘의 함경도는 당시 원나라가 쌍성총관부를 두어 지배하고 있었는데, 공민왕은 이 땅을 되찾는 전략으로서 쌍성총관부에서 가장 명망이 높던 무장 이자춘을 회유했다.
이에 원제국이 기울고 있다는 판단을 내린 이자춘은 1355 년 고려에 투항했고, 쌍성총관부를 공략해서 공민왕에게 넘겨주었다. 이로서 고려는 무려 99년 만에 오늘날의 함경도 지역을 수복할 수 있었다.
이자춘이 고려로 귀순한 1355 년은 이성계의 운명에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한 때였다.
1335 乙亥(을해)년에 태어난 이성계의 60 년 운명 주기를 보면 1339 己卯(기묘)년이 입춘 바닥, 따라서 15 년이 지난 1354 년부터 立夏(입하), 여름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마침 그 다음해인 1355 년에 부친이 고려로 귀순한 것은 결국 이성계의 앞길을 활짝 열어놓음은 물론 훗날 개국의 군주가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神弓(신궁), 활의 명수였던 이성계는 1361 辛丑(신축)년, 그러니까 운세 바닥으로부터 22 년이 지날 무렵, 운세가 한창 뻗어가던 시점에 부친 이자춘이 사망하자 그 자리를 이어받아 함경도 땅의 수비를 담당했다.
그렇다고 이성계가 아버지의 감투를 이어받음으로서 클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해 말, 중국 내부의 반란세력이던 홍건적의 일부가 원의 관군에게 쫓기는 과정에서 그만 고려로 쳐들어와서는 수도 개경까지 함락하는 일이 있었다.
이에 이성계는 자신 휘하의 병사 2천명을 이끌고 맞섰는데 이 과정에서 이성계는 백발백중의 활솜씨로 적의 우두머리들을 모조리 쏘아 사살했을 뿐 아니라 수도 개경에 가장 앞서 입성해서 되찾는 大功(대공)을 세웠다.
다음 해 1362 壬寅(임인)년에는 원나라 장수 나하추(納哈出)가 수만의 군대를 이끌고 함경도로 쳐들어오자 이성계는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되어 적을 막았다.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함흥평야에서 원나라 군대를 격퇴시키니 이로서 이성계의 명성은 일거에 고려 전체에 울러 퍼졌다.
이때는 이성계에 있어 1339 년을 입춘 바닥으로 할 때 최초의 성과를 보는 財運(재운)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성계는 1362 년에 세운 功(공)을 바탕으로 30 년이 지난 1392 壬申(임신)년에 가서 조선을 건국하게 되었던 것이다. 30 년간의 흐름이었으니 훗날 이성계의 개국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하겠다.
이성계는 이후로도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연이어 공을 쌓았다.
1370 庚戌(경술)년-이성계의 운기 상 立秋(입추)는 1369 己酉(기유)년-에는 압록강 너머의 요동을 정벌하였고, 1380 庚申(경신)년에는 침탈해온 일본의 왜구를 맞이하여 신궁의 솜씨를 통해 왜구를 섬멸했다. 이를 ‘황산대첩’이라 부른다.
이성계의 활솜씨에 대해 잠깐 소개하면 이렇다.
황산대첩 당시 이성계는 화살 70여 발을 쏘았는데 모두 왜구의 얼굴에 적중시켰고 이에 왜구들은 활시위 소리만 나면 고개를 숙이고 도망치기 바빴다 한다.
게다가 왜구의 대장 아키바츠를 쏘아죽인 솜씨는 정말 대단했다. 이성계는 먼저 아키바츠가 쓴 투구를 활로 쏘아 맞혀서 벗긴 다음 다시 화살을 쏘아 이마에 적중시켜 죽였다고 한다.
1379 己未(기미)년으로서 이성계의 운세는 가장 빛이 나는 寒露(한로)를 맞이했다. 연이은 승전으로 이성계는 고려 조정 안에서 확실한 입지를 굳혔다.
벼슬도 높아갔고, 백성들의 신망은 물론 자연히 신진 사대부들이 주변에 몰려들었다.
이때 정치판에서 苦杯(고배)를 마시고 고향에서 은거하던 鄭道傳(정도전) 역시 ‘이성계가 대세’라는 판단 하에 이성계를 찾아왔으니 때는 1383 년, 이성계의 운세는 가을의 추수기인 霜降(상강), 그 위명이 천하에 떨치던 때였다.
정도전이 이성계에 귀부했던 1383 癸亥(계해)년에는 또 다른 재미난 일이 있었으니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바로 그해 文科(문과)에 병과 7등으로 급제하면서 본격적으로 권력의 장에 등장하였다는 점이다.
정도전과 이방원은 모두 잘 알다시피 훗날 이성계 밑에서 양대 라이벌로서 권력 쟁투를 벌였던 사이인데 두 사람이 이 무렵에 마침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실로 흥미롭기 그지없다.
이쯤에서 李芳遠(이방원)의 운명을 먼저 살펴보자.
훗날 태종이 된 이방원은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로서 1367년 음력 5월 16일(6월 21일)에 태어났다.
干支(간지)로 변환해보면 丁未(정미)년 丙午(병오)월 辛卯(신묘)일 생이다.
운세 주기는 1371 辛亥(신해)년이 입춘이고 1401 辛巳(신사)년이 입추가 된다. 따라서 1383 癸亥(계해)년, 그가 문과에 급제했던 때는 이방원의 운세 상 이제 본격적인 노력을 시작하는 때, 자신의 씨앗을 뿌리는 穀雨(곡우)의 절기에 해당된다.
그런 까닭으로 1383 년 정도전과 이방원이 조우하게 된 것이니 실로 묘한 인연 혹은 악연이라 하겠다.
다시 돌아오자.
이성계의 운세를 보면 1384 년이 立冬(입동)이었고 1386 丙寅(병인)년이 小雪(소설)이었다. 늘 하는 얘기이지만 소설부터는 서서히 모든 일들이 어려워지기 시작한다.
승승장구의 이성계 역시 고려 조정에서 비중이 너무 절대적으로 커지다보니 이런저런 어려운 일들이 생겨났다.
유교 사대부 계층들은 처음에 이성계에 대해 무척이나 우호적이었다. 정도전만이 아니라 정몽주와 이색 등의 거물들도 당초에는 모두 이성계를 지지했으나 이 무렵부터 이성계의 속마음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견제하기 시작했다.
이제 고려 조정은 고려 조정을 지키면서 개혁을 해나가야 한다는 온건파와 이참에 아예 이성계를 통해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 개혁을 도모하고자 하는 급진파로 나뉘었다.
이에 이성계는 1388 戊辰(무진)년에 요동 정벌을 떠났다가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쿠데타를 시도했다.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우왕의 장인이자 무장인 최영을 반역죄로 몰아 처형했으며, 정도전을 통해 고려 왕조를 지켜야 한다는 온건파, 이색과 정몽주를 탄핵하여 조정에서 축출했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 삼군 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가 되어 모든 군권을 장악했고, 조준 등을 통해 사전(私田)을 기득권층으로부터 빼앗아 그들의 세력을 좌절시켰다. 이로서 조정은 신흥세력이 확고하게 기반을 다졌다.
그러나 이색과 정몽주 등의 온건파들은 여전히 고려 왕조를 지켜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이성계의 뒤에서 역성혁명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이가 바로 아들 이방원이었다.
당초 이성계는 반대파를 제거하고 새로운 왕조를 연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미 그를 둘러싼 신진세력들은 그럴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이에 1392년이 되자 병을 핑계로 은신해있던 이성계를 정몽주가 찾아왔다. 사실상 최후의 담판이었던 셈이다.
담판은 결렬되었고 아들 이방원은 정몽주 뒤를 따라가서 마침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타살한다.
이제 모든 장애물이 사라졌고, 모든 신하들은 허수아비 공양왕에게 임금 자리를 이성계에게 넘겨줄 것을 아무 거리낌 없이 청하게 되었다. 이에 공양왕은 스스로 부덕함을 탓하며 1392년 7월 양위를 선언한다.
신왕조가 開國(개국)하는 순간이었다.
이성계가 1362 壬寅(임인)년, 원나라의 군대를 동북 병마사가 되어 격퇴하면서 명성을 떨친 이해 30 년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사실 이로서 이성계의 모든 財運(재운)은 끝이 났다. (그 6 년 뒤인 1399 년으로서 이성계의 운은 바닥에 도달했다.)
다음 글에서는 두 번에 걸친 왕자의 난을 통해 이방원이 권좌에 오르는 과정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출처]<a href='http://www.hohodang.com/?bbs/view.php?id=free_style&no=797' target='_blank'>호호당 블로그</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