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꽃전 / 김용옥
경칩이 오자 어김없이 우리 집 진달래꽃이 핀다. 땅의 한기寒氣가 풀리는 때를 맞춰, 아직은 창백한 아침햇살에 소박하고 영롱하게 그 여린 꽃잎이 살포시 벙그는 것이다. 하루하루 새 꽃송이가 핀다. 바람이 실실 옷을 뚫고 맨몸까지 기어드는 꽃샘철에 애처로이 피는 것이다. 수수하게 숨어 피는 진달래꽃은 첫사랑의 눈물 같은 꽃. 진달래꽃 피는 봄은 아직 풋봄이다.
봄바람이 옷깃 속으로 기어든다. 창 너머 하늘에 흰구름이 서두르듯 남으로 흘러가는데 진달래의 해맑던 표정이 시들부들 사위어가기 시작한다. 먼 길 떠나는 백운白雲거사를 잡지 못하고 북향으로 돌아앉아 상사병을 앓는가. 시드는 꽃잎이 뚝뚝 떨어지지 않고 짓이겨진 빛깔로 끈적하게 달라붙는다.
진달래꽃은 저 만치 산속 큰나무 그늘 아래 마른 땅에서 살지만 오직 북쪽의 임을 그리어 북향하여 꽃얼굴을 벙글어내는, 화품 5품의 꽃. 세종대왕 시대에 식물학자이며 명신名臣이었던 강희안을 떠올린다. 꽃은 그 곱고 예쁘고 향기로운 외색外色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지조와 쓸모와 뜻함 즉 내색內色을 반영하여 꽃의 품격을 가렸다. 향훈香薰 그윽한 인격을 가리듯. 이렇게 가름할 때 진달래꽃은 살신성인의 꽃이다.
나는 찌꺼분하게 시든 꽃잎들을 한 잎씩 쏙쏙 뽑아낸다. 손가락 끝이 끈적거린다. 엄지와 검지를 혀로 핥으니 달착지근하다. 그 순간, 아, 화전! 언제부턴가 화전 부치는 걸 잊고 살았구나.
젊어 한때엔 서방에게 드리는 정성으로 화전을 부쳤다. 딸애에게는 한국적인 어미 노릇하느라 꽃이야기 들려주며 꽃전을 부쳐 먹였다. 깊은 산자락의 진달래꽃을 따다가 냉동보관 하였다가, 방학 때면 귀국하는 딸아이에게 하얀 찹쌀반죽에 살포시 얹어 꽃전을 지져주곤 했다. 지명을 넘기고선 노모에게 옛 추억을 돌려드리느라 진달래꽃전을 부쳤다. 그런데 어머니, 아주 먼 길 떠나신 후부터 화전 부치는 걸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딸아, 이젠 늙어가는 엄마에게 네가 화전을 부쳐줘야 하는 거 아니냐?”
피자나 브라우니를 더 잘 만드는 딸애에게 진달래꽃전, 쑥전, 국화전을 말하면 뭐하나. 이젠 그립게 떠올리는 음식이 되었구나. 아니다. 올핸 대륜황국을 두어 그루 길러 가을 중양절에 국화전을 부치며 이 그리움을 달랠까. 아버지 생전에는 대륜황국 꽃잎을 따서 국화주를 올려드리기도 했다. 아버지 주안상에 국화전을 지져 올리던 어머니처럼. 진달래꽃 꽃꿀이 달콤한 꿈을 꾸게 한다.
꽃. 참 고운 꽃 예쁜 꽃. 누구나 좋아하는 꽃. 그리고 여인에게는 꽃보다 더 곱게 느껴지는 꽃전. 꽃이 누운 꽃전은 그 때맞춘 시간과 마음과 손을 쓰는 정성, 사랑의 헌납이 담겨서인지 형용키 어렵게 곱다. 꽃에게는 시와 노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꽃전에는 서정과 사랑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박경리 선생의 소설 <토지>의, 지지지 못한 진달래꽃전이 생각난다. 산속 움막에서 병든 별당아씨가 봄 햇빛을 바라보며 남편 구천이에게 중얼거리는 말. “진달래가 피겠지요. 진달래가 피면 당신에게 화전을 부쳐드리고 싶어요… 싶어요… 싶어요…” 하던 그 말.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시적詩的으로 기억되는 ‘화전’이라는 단어다. 나의 누옥에 초대하여 진달래화전을 부쳐드리고 싶다고 한들… 어느 누가… 그 마음빛깔을… 알랴….
아아아, 내버려두고 꽃반찬을 차리자.
개다리소반만 한 발코니 꽃밭에 흐드러지게 만발한 샛노란 하루나의 꽃을 따야겠다. 강추위를 견딘 하루나 이파리, 스티로폼 대체화분에서 겨울을 난 붉은 상추, 대구의 친구가 보내준 세미칼 미나리를 아우러지게 담아 매실청을 솔솔 뿌린다. 그 위에 반쪽으로 자른 딸기와 하루나 꽃송이를 둘러앉힌다. 한가운데 진달래꽃 한 송이 꽂는다. 채소샐러드가 꽃다발처럼 곱고 향기롭다. 아침식탁이 환하다. 봄맛이 상그럽다. 꽃찬. 예쁘고 향기로운 먹거리 사치다.
추억의 화전 너머에서 얇은 봄빛이 안겨든다.
[김용옥] 시인, 수필가, 국제pen 한국위원회 언어보존위원.
* 시집 6권, 수필집 11권 발간.
선생께선 개성적인 언어의 집과 독창적인 문학 세계를 이루셨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 ‘만 권의 책을 읽으리라’ 했었다지요. 선생님은 능히 그렇게 사셨으리라 싶네요. 득만권서 행만리로(得萬卷書 行萬里路 만 권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걸어라.) ‘만 권’이나 ‘만 리’에 얽매일 필요는 없겠고요, 다만 지향합니다.
선생은 움직이는 식물학자라 일컬을 만큼, 야생초 이름에 막힘이 없었어요.
울산 태화강변 대숲을 거닐며 들려주셨던 풀꽃이름들이 여직 귓가에 삼삼하네요.
<백화百花를 말려> 수필을 소개하려 했지만,
꽃 이름 100가지를 나열한 서두 부분 워드작업이 벅찼어요.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작업해서 다음 기회에 올리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