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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후죽순처럼 순서 없이 만발했던 갖가지 봄꽃들은 하나 둘 피었다 지며, 어느덧 4월도 사부작사부작 끝자락을 향하고 있습니다. 개화기를 맞은 소나무 가지마다 노란 송홧가루 달리고, 계절이 가고 오는 가운데 산과 들 나뭇 가지엔 초록 잎들이 가득합니다. 불광 법회 형제들은 오늘도 이렇게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맞이하며 법회 보러 보광당에 모였습니다.
보현행자의 서원 : 수순분
요즈음 바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미루자고 하자면 이유 없는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일요 법회를 위해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무국에서 업무를 담당하시고, 일주문에서 법회보를 배부하시며 밝고 맑은 모습의 보현행자들을 법회 안내 배너 속 사진으로 계신 광덕 큰 스님께서 흐뭇하게 바라보고 계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보광당 가는 길, 엘리베이터 안내를 하시는 승강기 봉사팀, 또 떡과 생수를 보시하여 배부하고 계신 송파 2, 5, 8, 32 보살님들.
곳곳에 자리하신 법회 안내팀, 차를 준비하시는 헌다 봉사팀. 빈틈없는 봉사자님들의 거룩한 모습입니다.
인례이신 심진 거사님께서는 법회 전에 금강경 독송을 하시고 타종을 울립니다. 혜안 거사님의 법회 시작 말씀을 하시고 부처님 전에 헌향, 헌다를 올립니다. 일요 법회의 시작입니다.
법회 전에 오늘 법사로 오신 최훈동 법사님과 담소를 나누고 계신 혜담 스님과 법회장님, 부회장님.
일요 법회에 참석하신 보광당 가득 모인 불광 법회 형제들
금주의 법문 : 최훈동 교수(서울대학 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금주의 법어 : 삶 속에서 깨달음 - 무아(참나)의 실천
안녕하세요? 불광법회! 저하고 인연이 굉장히 깊은 불광입니다. 그 인연담을 먼저 간단히 말씀드리고 법문을 시작하겠습니다. 불광! 부처님의 광명, 이것은 외형적인 해석이고요. 내면적으로 해석한다면 깨달음의 빛, 깨달음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깨달음이 너무 하늘 위로, 물위를 걷는 기적과 같은 신비한 깨달음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땅 위에서 삶 속에서 깨달음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그 깨달음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불광법회의 불광의 참 뜻은 이 땅 위에 깨달음이 실현되는 것을 부처님께서 간곡히 부탁하신 그 이름입니다.
제가 불광과 인연을 맺은 것은 용성대조사께서 일제 치하에서 우리나라 33인의 불교계 대표로 참석하셨다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용성조사께서는 당시 경허 선사와는 달리 청정 수행승이셨습니다. 그리고 도심 속에서 부처님의 진리를 펼쳐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셔서 대각회를 결성하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법회장님과 같이 대학 때 종로 대각사에서 광덕스님을 뵈었지요. 또 광덕스님과는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해 계셨을 때 병문안을 가서 뵌 적이 있습니다. 그보다 더 소중한 인연은 동헌 노사, 동헌 대조사, 용성 스님의 두 번째 상좌로 알고 있는데, 동헌 노사로부터 금강경 사구게를 수지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헌노사님의 유지를 저 또한 받들려고 그 당시에 크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 유지는 용성 조사의 뜻과 같습니다. 부처님의 참 뜻을 현대적으로 쉽게 대중들에게 알리는 일에 헌신을 하겠다는 서원을 마음속에 심은 바가 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해서 불광법회에 초대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불광이란 즉,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고통에서 해방되는 방법입니다.고통에서 해방되는 길은 무엇인가? 사성제나 12연기로 낱낱이 규명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성제와 12연기가 교리적으로 너무 낙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적으로 쉽게 접근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이것을 고민해야 될 때입니다.
우선 너무 분위기가 딱딱하니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드리는 걸로 시작하겠습니다. 무학대사 아시죠? 이성계 아시죠? 이 태조와 무학대사의 문답입니다. 하루는 이태조가 왕사인 무학대사에게 “왕사님! 오늘은 왕사와 임금이라는 관계에서 좀 벗어나서 허심탄회하게 그냥 진실한 내용으로 이야기를 좀 해보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하자, 무학대사는 “좋지요. 그렇게 하시지요. 어디 먼저 임금님께서 말씀해 보시지요.”하니까, 이 태조가 “아, 임금님이 아니라니까. 나는 스님을 보면 도둑놈처럼 보입니다.”하고 답하였습니다. 그래서 무학대사가 어떻게 대답하셨을까요? 그러자 무학대사는 껄껄 웃으시면서 “나는 임금님이 부처님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이성계가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이 태조가 “아니, 오늘은 군신의 관계를 떠나서 아부하는 말을 안 하는 걸로 전제를 두지 않았습니까? 왜 또 아부를 하십니까?”하니 무학대사가 뭐라고 했게요? 알고 계시죠? “도둑놈 눈에는 다 도둑으로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다 부처님으로 보이는 법입니다.” 이태조가 한 방 크게 얻어맞았죠. 사실 이 태조가 도둑놈이죠.사실 무학대사께서는 깨달은 부처님이시고요.
부처님의 깨달음은 우리 모두가 깨달을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우리 모두 깨달을 수 없다면 부처님이 굳이 출현하셔서 45년간 설법을 하시지 않으셨을 거예요. 45년 동안 당시에 바라문 교도들에게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굉장히 많은 협박도 받았습니다. 살해의 위협도 당하죠. 극심한 모독도 당해야 했습니다. 엄청난 모욕적인 언사도 면전에서 당하셨죠. 그러한 치욕을 무릅쓰고 45년간 꿋꿋이 진리를 설하신 것은 우리 모두의 고통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그 해결의 방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그래서 모든 이들이 깨달아서 현재에 처해 있는, 현재 가지고 있는, 우리 모두의 고통을 스스로 해결하라는 대자대비한 마음에서 불교가 시작된 겁니다. 즉, 중생의 고통이 없는데 부처님의 깨달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허공 속에 깨달음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죠.
그런데 지금 오늘날 깨달음이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극히 소수만 접할 수 있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이름으로 박제화되어 있습니다. 오늘 저의 사명은 부처님의 깨달음은 그러한 것이 아니다. 이걸 천명하고 증명해 드리려고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것은 최훈동이라는 사람의 독자적인 견해가 아닙니다. 부처님이 45년간 설한 법문에 입각한 내용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이 불광법회에서 부처님의 진실한 뜻을 여러분에게 전해드릴 기회를 주신 데 대해 대단히 감사드리고, 또 그 길을 갖게 됨에 매우 기쁜 마음이 한량이 없습니다. 너무 행복합니다(박수).
부처님은 마음의 고통을 말씀하십니다. 물론 신체적인 고통, 사회적인 고통, 경제적인 고통, 수많은 고통들이 있죠. 그중에서 어떤 고통을 해결해 주시려고 설법을 하셨을까요? 마음의 고통 아닙니까? 부처님이 뭐 떡 하나로 수천 명, 수만 명, 수억 명을 먹이려는 경제적인 고통을 덜어주려고 오신 건 아니죠. 구별을 잘 하셔야 됩니다. 그러면 마음의 고통을 안고 있는 우리 중생들에게 그 해결책으로서 무엇을 제시하셨나요? 우선 마음을 잘 돌아 보셨습니다.
마음을 잘 돌아 보시고 화엄경에도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마음과 부처와 중생은 하나라고 말씀하셨죠. 그리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도 하셨죠.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 바다. 담마빠다(법구경)에서는 마음이 전부다. 마음이 모든 것에 앞선다. 또 마음은 본래 빛나는 것이다. 본래 빛나건만 여러 가지 객진客塵에 의해서 오염되어 혼탁하게 되어서 본래 빛나는 마음을 우리가 발현시키고 있지 못하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의 마음은 빛나는 것입니다. 그 근본 바탕이. 그러니까 따로 빛을 밖에서 구하고 얻는 게 아니라는 게 자명합니다. 즉, 불교의 핵심은 내면을 잘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조사, 인도에서 중국으로 처음 불법佛法을, 불법이라기보다는 선법禪法을 전했다는 달마조사도 관심일법 총섭제행 觀心一法 總攝諸行, ‘마음 바라보는 이 한 법이 모든 수행을 아우른다’ 이렇게 말씀하셨죠. 관심觀心입니다. 관심.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무엇에 관심을 가져야 되는가? 마음에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누구 마음에? 다른 사람의 마음에 관심을 갖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는 것 이게 관심觀心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을 들여다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방법을 낱낱이 여러 가지로 근기에 따라서 45년간 설한 게 <5부 니까야>입니다. 니까야는 초기 경전, 빨리 경장經藏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5부 니까야가 산스크리트어로는 아함경阿含經으로 한역漢譯되었지요. 내용이 거의 일치하지만 일부가 조금 다릅니다. 그리고 한역경전漢譯經典의 원전原典은 산스크리트어인데많이 유실됐지만 빨리 경장經藏 니까야는 지금 온존해 있지요. 7차 결집, 최근 54년도인가 미얀마의 마하시 선사禪師를 상수上首로 해서 마지막 결집대회를 했던 그 니까야입니다. 이 니까야가 얼마나 소중한데, 중국에 이르러서 아함경은 초등학교 정도의 교설이 되고, 방등, 반야, 화엄, 법화 그리고 그 위에 조사요祖師謠를 최우등으로 삼아놓는 이런 교상판석敎相判釋(부처님의 가르침 즉, 敎相을 분류하여 해석하는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중국 불교의 이야기지 부처님 당시의 교상판석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잘 공부해 보면, 살펴 보면 하나하나가 마음을 다스리고, 마음을 어떻게 가리고, 마음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써라 이러한 것으로 귀결이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敎가 곧 선禪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이 곧 선법禪法이지 교와 선이 둘로 나눠져 있지 않은데, 중국 불교의 와서는 선禪을 더 위로 삼아서 나중에는 선禪이 너무 무식해지니까 교敎를 아우러야 된다 해서 선교병수禪敎倂修, 선교일치禪敎一致, 이런 말을 합니다. 선과 교가 원래 둘이 아닙니다. 이러한 막말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불교가 지금 매우 잘못 와전되어 있어요. 부처님 당시의 본래 말씀이 많이 왜곡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옥석을 구별할 수 있는 안목이 여러분들에게 생겨야 됩니다.
마음을 어떻게 볼 것이냐, 마음을 어떻게 잘 볼 것인가, 마음을 잘 알아야 마음을 잘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잘 사용해야 일체유심조, 마치 하얀 백지에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는 화공처럼 멋진 그림을 그려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이 처해 있는 현실은 누가 그려낸 것이죠? 운명이나 과거의 카르마 때문에 그러십니까? 여러분이 지어낸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그렇게 썼기 때문에 현실화된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여러분의 현실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자기 마음을 돌아봐야 한다 이겁니다. 내가 필요한 현실을 스스로 창조해 냈기 때문에. 일체유심조라는 이야기는 과거에 회귀한다, 과거의 업의 카르마에 의해서 현실이 지배된다, 이러한 운명론이나 숙명론이 아닙니다. 일체유심조라는 것은 이제부터 내가 마음을 바르게 쓰면 바른 미래가 현실화된다, 창조된다, 이러한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무상無常이라는 원리도 과거 서양 철학자들, 쇼펜하우어나 카에르게고르,니체 등 유럽의 지성인들은 기독교에 만족하지 못하고 결국은 동양의 정신에 공부를 기울였지요. 그리고 마침내 불교를 접하게 됩니다. 불교의 무상을 허무주의, 니힐리즘으로 파악을 했어요. 불교는 허무주의, 염세주의다 이런 식으로 단정을 했습니다. 매우 잘못된 시각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무상이라는 것은 어느 것도 고정되어서 변함없는 실체로, 딱딱한 덩어리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심지어는 딱딱한 물질마저 끊임없이 변화하고 만다, 그리고 생겨난 것은 모두 사라진다. 이게 무상의 원리죠. 일차적인 뜻입니다. 그런데 무상을 한 번 더 깊이 생각하면은 현재 어떠한 상황으로 다른 상황으로 바꿀 수 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긍정적인 미래가 펼쳐질 것이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계속 마음을 세뇌시키면 불행하고 부정적인 삶으로 변하고야 말 것입니다.
마음을 잘 보고 다스리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마음을 처음부터 잘 보기가 어렵기 때문에 눈만 감고 마음을 보려면 어때요? 잡념이나 졸음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마음을 보려고 해도 어떻게 봐야 될지 모르죠. 그래서 부처님은 처음에 호흡에 집중하라고 했습니다.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해서 호흡이 어떻게 들어오고 나가는가 이것을 면밀하게 관찰하라고 그랬죠.그래서 호흡관이죠. 호흡관. 호흡을 본 다음에는 몸의 감각을 잘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감각들 이것은 어느 정도 바라보기가 쉽습니다. 현재 여러분들이 의자에 앉아서 그렇지 방석에 앉는 분들은 10분 20분만 지나도 다리가 쑤시고 저리고 끊어질 듯이 아파요. 그러니까 움직여야죠. 그렇죠. 그러다가 그냥 우리 얼굴이 그냥 스멀스멀거려요. 조용히 마음을 집중해서 참선을 이어오는데 온갖 방해꾼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이러고 있음을 잘 보려면 몸을 우선 집중해서 잘 바라보는 훈련이 최소한도 10분 또는 20분은 일념으로 호흡에 집중해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몸의 감각도 잘 볼 수 있고 그다음 단계로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라는 게 뭡니까? 마음은 어떻게 생겨났나요? 질문이 너무 형이상학적인가요? 그러나 알아주셔야 돼요. 부처님은 세계를 이렇게 나누셨습니다. 여섯개의 영향으로 나누셨습니다. 무엇이죠?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여섯개죠. 눈으로 보는 세계, 귀로 듣는 세계, 냄새를 맡는 세계, 맛을 보는 세계, 몸으로 감촉을 느끼는 세계, 마지막으로 정신으로 생각하고 추상하고 판단하고, 또 감정을 일으키고, 한마디로 생각과 감정을 일으키는 정신의 세계 이 여섯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안이비설신의는 육입六入이라고 그러죠. 여섯개의 감각 영역 또는 육근 六根, 여섯개의 감각 기관 여섯 개의 감각 때문에 각각 대응하는 것을 외부적인 육처六處, 즉 색성향미촉법, 눈으로 모양이나 빛깔로 등등 마음으로는 생각과 감정을 일으키고 그래서 이 내입처와 외입처 6개, 내가 가지고 있는 여섯개의 감관이 외부 여섯개의 대상을 만나서 지각하고 인지하면 뭐가 벌어져요? 식識이 발생합니다. 의식. 다시 말해서, 눈으로 보는 세계에서 본다는 봄이 일어납니다. 본다는 경험이 일어나게 되지요. 그걸 우리는 촉觸이라고 그럽니다.촉. 눈과 사물, 이것이 접촉을 해서 시각중추 후두부에서 영상을 맺히면 보는 게 일어나는데 그럴 때 본다는 경험이 발생합니다. 그것을 촉이라고 했습니다. 촉. 이 경험이 발생할 때, 즉, 볼 때, 그 경험에서 느낌이 발생한다고 돼 있어요. 촉觸에 연緣해서 수受가 발생한다. 12연기에서 촉연수觸緣受입니다. 우리가 볼 때에 어떤 느낌이 발생하게 됩니다. 아름답다든지 추하다든지 또 중립적인 그러한 느낌이 올 수 있죠. 쾌, 불쾌, 또는 고, 락, 불고불락, 이런 식으로 한문경漢文經에서는 번역을 하는데 좋은 느낌이 발생하고 싫은 느낌이 발생하게 되있어요. 우리가 무엇을 보고 들을 때. 또 오감을 다 닫고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생각을 하면 좋은 느낌, 싫은 생각을 하거나,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굉장히 싫은 느낌들이 발생해요. 이런 느낌이 발생하고 나면, 그 다음에 우리는 반응을 하게 됩니다. 볼 때 가진 그 인상에 따라서 과거 경험이 떠오릅니다. 그것을 연상聯想이라고 그럽니다. 이것은 현대 심리학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부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맛지마니까야에 6개의 감정의 품이 있습니다. 여섯개의 감정에서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발생하는가를 낱낱이 분석적으로 설명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볼 때 좋은 느낌이 발생하면 어떻게 됩니까? 더 보고 싶어 하지요. 보고지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도저히 헤어지면 안 되겠어,영원히 옆에 놓아 둬야 돼, 취하려 그래요, 좋으면. 연취戀取. 집착, 소유가 발생합니다. 소유. 그렇죠.
스토커, 요사이 스토커가 많이 나오죠. 나는 네가 좋은데 왜 안 만나느냐 이래 가지고 이제 안방까지 쳐들어 가서 심지어는 그 부모까지 살해하는 이러한 비극도 여기에서 발생하는 것이죠. 보고 들을 때 그 인상과 그리고 거기에 이어서 과거 경험과 발부된 연상들, 이러한 인상과 연상들, 수많은 이야기를 만드는 주범들이 이 인상과 연상입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눈을 감고 있으면 수많은 장면이 떠오른다, 이 말은 이 인상과 연상이 증폭되어 있다, 부처님은 그것을 꿀보자기다, 요새 말로 말씀드리면 솜사탕이다 이겁니다. 본 것은 빨간 장미 하나인데 거기에 덧붙여서 수많은 것을 연상을 증폭시켜서 솜사탕처럼 부풀려 가지고 붉은 장미를 그냥 단순히 붉은 장미로 보지 못하고 여러 가지로 보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똑같은 장면을 보아도 각각 다르게 보고 있어요. 하나인데 왜 다를까요? 자기 자신의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간단한 예를 하나 들까요? 상담 사례 중에서 빨간 장미만 보면 배가 아파서 동네 가정의학과 나 내과에 가봐도 위염이라는 진단만 나오고 낫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대학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습니다. 아무것도 안 나와요. 신경성이라 그래요. 그런데 나는 붉은 장미를 보면 배가 아파요. 그래서 가기 싫은 정신과, 나는 미치지 않았는데, 왜 정신과 가야 되느냐, 정신과를 권하니까. 마지막으로 몇 년 주저주저 끝에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쭉 들어봤죠. 다른 내과에서는 이야기 잘 안 듣잖아요.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상대방의 마음을 깊숙이 들여다보기 위해서 그러고, 자기 자신이 그것을 모르니까 그 환자가 스스로 자기를 잘 볼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 이게 상담이에요. 그러니까 상담은 멋진 해결책을, 어드바이스를 대답을 딱 제공하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이 지금 불광, 굉장히 고군분투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고 어떤 해결책을 뚝딱 이렇게 주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스스로가 깨달을 수 있도록 이야기를 쭉 이렇게 연상을 시키는 거죠. 아까 연상 연상 있었죠. 연상은 자기 자신이 그 연상에 사로잡히고 그 어떠한 느낌에 사로잡혀서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치료도 그 연상을 통해서 풀어내야 됩니다. 이것이 프로이드가 말하는 자유 연상 Free Association입니다. 정신분석 상담에서는 그 사람의 연상에 귀를 기울이고 연상을 잘 안내할수록 그분은 훌륭한 정신과 의사 상담가라고 할 수 있죠.단순히 이야기를 듣자마자 점쟁이처럼, 도인처럼 네 문제는 어디서 왔고 이는 전생에 어디서 태어나서 어떤 경험을 했기에 지금 붉은 장미가 너를 아프게 하는 거야 이렇게 답을 준다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되죠? 제가 어떻게 풀었을까요? 붉은 장미에서 떠오르는 게 뭡니까? 붉은 장미와 붉은 장미죠. 보면은 아름답고 선사하고 싶고 그렇죠. 언제 선사를 주고받은 적 있나요? 그렇습니다. 선생님. 제가 결혼 전에 어떤 멋있는 남자친구로부터 붉은 장미를 한송이 받고 프로포즈를 받았습니다. 그게 떠오르는 겁니다. 그런데 어땠나요? 프로포즈를 받으니까. 애게 애게 겨우 장미꽃 한송이라니, 이런 마음이 나에게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거절했지요. 근데 그 사람이 좋아했나요? 사실은 무지하게 좋아했습니다. 훈남이고요. 능력도 좋지 성격도 좋고. 그런데 뭐 어떻다는 겁니까? 그런데요. 그다음에 내가 거절을 하니까 나의 절친이 같은 친구니까 제 애인을 아주 잘 알 거 아니에요. 그 절친이 이 남자친구에게 적극적으로 대쉬를 해서 결혼을 하게 되는데 그때 이 남자친구는 실패한 경험을 배워서 백송이의 빨간 장미를 주고 프로포즈를 해서 성공했다는 거예요. 그때도 붉은 장미를 보면 배가 아팠나요? 그때는 배가 안 아팠죠. 최근에 아팠습니다. 어디 좀 더 이야기를 들어봅시다.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그런데요, 한동안 나도 이제 결혼하고 애들 키우느라고 한동안 잊고 살았죠. 서로 바쁘니까 만나지도 못하고 최근에 애들을 중고등학교 보내고 조금 시간이 나서 동창들이 이제 모이자 해서 한번 갔더니 그 친구가 있더라 이거예요.그런데 그 친구는 어마어마하게 잘 살고 있고, 남편은 엄청나게 성공을 해서 사회 저명 인사의 재력을 자랑하고 있고, 그런데 나는 뭐냐 공무원 만나가지고요. 학원비 버는 것도 어려워서 제가 지금 알바를 하고 있어요. 하여튼 그 친구가 딱 비교가 되는 순간, 얼마나 마음이 괴로웠는지 눈물을 흘렸다는 겁니다. 후회도 하고. 내가 그때 그 한송이 에게게만 안 했으면 내가 살고 있을 텐데. 그러고 얼마 안 있어서 붉은 장미를 보았는데 배가 아프다, 그 이유를 몰랐다, 이 근데 지금 선생님하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까 이래서 붉은 장미를 보니까 배가 아파. 붉은 장미는 붉은 장미일 뿐인데 배아픈 것은 누가 아파요? 내가 아파요.
붉은 장미가 복통을 나에게 만들어서 창조해서 선물했습니까? 행복과 불행을 외부 어떤 절대자가 창조해서 우리에게 줍니까? 운명이 우리에게 행과 불행을 딱 결정시켜 가지고 그 판례에 의해서 여러분의 삶이 그냥 그대로 나의 노력과는 아무 상관없이 이 삶이 펼쳐지고 있습니까? 이렇게 부처님은 질문하라고 하셨어요. 경전에 보면. 그러니까 부처님은 질문을 많이 하셔요.바로 답을 안 줘요. 한 여인이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기르는 두 살배기도 안 된 애기가 갑자기 급환에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했어요? 엄마가 거의 실성할 정도가 울며 불며 애통해 했습니다. 세월호나 이태원 사건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갑자기 그냥 느닷없이 충격을 받은 많은 분들의 고통이 다 똑같죠. 지금도 노란 리본하고 진상 규명해 주라고, 오체투지는 아니지만 불교 신자도 아니면서 삼보일배를 많이 하시더만요. 억울하다고. 살려내라. 살려내라고 부처님께 왔을 때, 다른 종교 같으면, 믿느냐 믿습니다. 그러면 살려내주마. 이게 종교의 힘 아닙니까? 그 종교의 주장 아니에요? 너무 간단히 도식화 했나요? 그런데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나요? 그래 살려내려면 너가 먼저 마을에 가서 겨자씨를 좀 얻어오너라. 단, 3대째 송장이 나가지 않는 청정한 집안에서 겨자씨를 얻어야 된다. 동네 가서 그냥 발에 불이 나게 단거리 선수처럼 다 돌았는데 못 찾았어요. 그러니까 옆 동네로 가 옆 동네로 가 사방 팔방 자기가 갈 수 있는 곳을 다 가서 발이 다 해지고 부르트고 깨어지고 갈라지고 피가 나도록 찾아봤지만 그런 집은 하나도 없더라. 그래서 이제 깨달은 것이죠. 빨리 일어나나 늦게 일어나나 차이는 있겠으나, 누구나 죽고야 만다. 이것을 통하여 무상의 원리를 조금은 터득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 실성하고, 비통 애통한 그 마음이 이리저리 찾아다니면서 희망을 가지고 찾아 다니면서 어느새 마음이 진정이 된 것이죠. 그러다가 냉정한 마음을 지닌 채로 다시 돌아본 것이죠. 돌아보니, 모든 사람이 다 집안마다 말 못할 여러 가지 어려움이, 이러한 아들의 상실과 못지않은 다른 상실의 아픔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고, 그렇게 해서 스스로 깨닫고 부처님 제자가 되었다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죠.
이렇게 고통은 그 의미를 깨달아야만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깨달아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무엇을 깨달으라는 이야기인가? 마음이 지어낸 고통, 고통이라는 것은 간단히 예를 들었죠. 붉은 장미를 봤다. 눈으로 붉은 장미를 봤다. 만진 것도 아니에요. 향기에 도취된 것도 아니고 붉은 장미를 볼 때 여섯개의 감각기관 중 하나의 예만 제가 들었는데 붉은 장면을 봤을 때 그 인상이, 그리고 과거의 경험으로 떠오르는 연상이 있고 그 연상과 인상에 의해서 친구와 비교를 하고 추상을하면서 고통이 발생했죠. 그러니까 고통은 붉은 장미 즉, 외부적인 상황이나 사건이 아니라, 상대방 배우자가 나한테 잘못해서 내가 고통스러운 게 아니라, 배우자만 잘하면 나는 행복할텐데가 아니라, 내 아들만 좀 더 공부 잘하면 내가 행복할텐데가 아니라, 아들의 성적이 50점 나와도 나는 행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사성제四聖諦입니다. 무슨 말이냐? 외부를 보는 게 아니라, 아들이나 남편을 해바라기처럼 바라보고, 아들이 공부 잘하면 남편이 행복하면 내가 따라서 행복하는 그러한 행복이 아니라, 내가 왜 고통스러운가를 명확하게 볼 수 있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뭐예요? 고통을 잘 보고, 고통이 무엇에 의해서 발생했는가를 정확히 보라는 이야기예요. 이것이 고통이라는 성스러운 진리, 집성제集聖諦, 고통의 발생의 성스러운 진리 이 사성제죠. 그런데 고통은 영원히 고통스럽냐? 그렇지 않다. 이 고통도 지나간다. 해결된다. 무엇에 의해서? 바른 처방과 바른 해결 방법을 적용하면 고통은 반드시 소멸된다. 이게 멸성제滅聖諦고 그 바른 방법이 도성제道聖諦다 이겁니다. 그 길이 팔정도八正道다.
이 팔정도의 처음이 바르게 본다. 이게 정견正見, 바른 견해라고 하지만 사실은 바르게 보아야 바른 견해가 일어나죠. 붉은 장미를 바로 보아야 붉은 장미가 복통을 일으킨 그 인과관계를 잘 볼 수 있으려면 잘 사유思惟를 해야 돼요. 정사유正思惟, 바르게 생각을 해야 됩니다. 이것을 부처님은 앎과 봄이라고 말씀하셨죠. 앎과 봄 이 두 가지는 굉장히 강력합니다.
앎은 무엇입니까? 분명히 알아야 된다 이겁니다. 봄이라는 건 뭡니까? 바르게 보아야 된다 이겁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바르게 보지 못하면 바르게 생각할 수도 없고 바른 처방이 나올 수가 없죠. 우리 여기에 의사 선생님들도 계시지만 바르게 진단하지 않으면 바른 처방이 나올 수가 없고 오진하면 사람 죽이기까지 하죠. 의료 대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진을 하고 있어요. 오진을. 정확하게 진단을 해야 바른 해결책이 나오는데 잘못된 진단을 정부가 하고 있으니까 최일선에서 진료하는 의사들이 그것도 가장 젊은 의사 지금 늙은 의사들은 열심히 의사 진료하고 있죠. 저를 포함해서. 전공의들만 나갔잖아요. 그러니까 전공의 역할을 이제 의대 교수들이 당직도 서고 응급실도 돌고, 입원 환자도 볼라고 하니까 죽을 맛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제 완전히 소진이 번아웃이 돼가지고 녹초가 돼서 이제 일주일에 하루는 쉬어야 되겠다, 그러니까 그것도 못하게 하고 이런 식입니다.
무슨 일이든 정확하게 보아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을 정확하게 보아야 마음의 문제인 우리의 고통을 바르게 해결할 수 있다, 이게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즉 정견과 정사유는 팔정도에서 혜慧에 해당합니다.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으로 말하면 정견과 정사유는 혜학慧學에 해당되고 그 다음에 정업正業, 정어正語 정명正命,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 이것은 계학戒學에 해당합니다. 나머지 3개,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 바른 노력과 바른 관찰과 바른 집중입니다.
여기서 정념이 굉장히 중요한 말이에요. 사띠sati인데 사띠를 한역한 것이지만, 요즘 유행하는 마음 챙김 영어로는 mindfulness로 번역된 사티가 정념입니다. 정념. 정념은 그 근거를 보면은 상윳다니까야에서는 염처경念處經, 맛지마니까야에서는 대념처경大念處經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염처경, 대념처경을 잘 보면, 중심 단어가 딱 하나 있어요. 뭘까요? 관찰입니다. 관찰.몸을 몸으로 관찰한다. 마음을 마음으로 관찰한다. 느낌을 느낌으로 관찰한다. 관찰이 핵심 단어입니다. 단순히 지금 현재 몸, 마음 이렇게 해석해 가지고는 온전한 뜻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염처경을 보면 네 가지로 관찰을 하라고 그랬어요. 하나는 신身, 몸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수受, 느낌을 관찰하고, 세 번째는 심心, 마음을 관찰하고 네 번째는 법法, 법을 관찰하는 겁니다. 신수심법 身受心法. 그래서 사념처四念處. 4가지 관찰의 대상이다해서 사념처관 四念處觀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남방 불교에서는 윗빠사나 수행이라고 합니다. 우리 대승불교권에서는 반야심경을 핵심 경전으로 삼듯이, 염처경을 남방불교에서는 핵심 경전으로 삼아요. 무엇 하는데? 마음 공부하는 데. 그래서 염처경을 하트 수트라heart sutra, 심경心經이라고 합니다. 핵심이 뭐냐? 부처님께서는 마음을 잘 먹는 법을 네 가지로 펼쳐서 분석적으로 처리해 놓으셨죠.
우리가 조용히 앉아서 눈을 감고 있으면, 다 몸을 정지했는데 유일하게 움직이는 게 뭡니까?호흡. 호흡이죠. 그래서 호흡을 보는 것을 필두로 그다음에 몸의 여러 구성 요소들을 다 볼 수 있어요. 부정관不淨觀이라고 하는 거죠. 수많은 장기들과 뼈와 골격과 그리고 심지어는 시체가 돼서 시체가 어떻게 변하는가 그런 것까지 낱낱이 보게 한 몸에 대한 관찰이 있어요.
그다음에 더 중요한 것은 아까 오감五感을 통해서 느낌이 발생한다고 했죠. 보고 들을 때 그 장미를 볼 때 느낌, 인상이 있어요. 지각, 그 인상과 연상 이런 것을 잘 봐야 돼요. 느낌을. 느낌을 잘 봐야 돼요. 느낌에는 신체적인 감각(sensation)도 있지만 거기에서 발생하는 정신적인 감정(emotion), sensation과 emotion이 결합된 단어가 수受입니다. 수. 그렇게 기본을 잘 닦아야 즉, 몸을 잘 보고, 호흡을 잘 보고 그래야만 마음을 잘 볼 수 있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 다음 마음을 잘 들여다봅니다. 마음을 어떻게 들여다보느냐? 보고 들을 때 그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잘 봐야 돼요. 실시간으로. 아까 붉은 장미를 봤을 때 어떤 마음이 일어나고, 어떤 기억이 일어나고, 어떤 기억에 의해서 현재와 비교되고, 거기에서 내가 질투가 일어나고, 배가 아프고 이런 과정을 보는 거예요. 이런 것을 마음을 잘 본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걸 잘 보지 않으면, 그 인상과 연상을 잘 보지 않으면, 좋은 느낌에 의해서 좋은 인상과 좋은 연상이 일어나면 반드시 반응하게 돼 있어요. 어떻게? 행동으로 반응하게 돼 있습니다.그래서 취하려고 그러죠. 좋은 것은 취하려고 그러죠. 내 것으로 만들려고 그래요. 싫은 것은 어떻게 합니까? 배척하게 되죠. 안 놔두려고 하고 내 눈앞에서 꺼져하고, 심지어는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분노합니다. 하나는 애착 반응, 탐욕이 일어나는 과정이고, 후자는 싫은 느낌 위에서는 분노와 증오와 배척, 혐오가 일어나는 반응이죠. 이것을 애증愛憎이라고 그랬어요. 애증. 그런데 12연기에서는 애愛를 대표적으로만 내세우고 있어요. 애 다음에 취取. 괄호 속에 증憎, 버릴 사捨, 죽일 사死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지금 또 재미가 없죠 좀 졸리려고 하시죠. 그러면 이제 다시 이제 대승불교로 넘어가죠. 달마 조사에 이어서 손자뻘 상좌 누구시죠? 승찬 대사. 승찬 대사가 대표작이 있죠. 아까 저의 대표작을 ‘깨달음의 길 숙고명상’이라고 사회자인 혜안거사님이 소개해 주셨는데, 승찬대사는 신심명信心銘을 지으신 분인데, 대표적인 선어록 중에 하나죠. 신심명의 사구게四句偈를 알고 계십니까? 금강경만 사구게가 있는 게 아니에요. 다 핵심 골자가 있어요. 반야심경의 사구게는 뭐예요?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 모든 고통과 장애를 해결했다. 무엇으로? 조견을 통해서. 무엇을 조견했어요? 오온을 조견했어요. 오온을 조견해서 무엇을 깨달았느냐? 개공. 모두가 실체가 없음을. 우리 몸과 마음의 모든 과정을 계속 깊이 깊이 바라보고 바라봤더니 실체가 없더라. 마치 꿈과 같고 안개와 같고 이슬과 같고 번개불과 같더라. 구름과 같더라. 그래서 그렇게 실체가 없음을. 우리가 견고한 물건 하나를 딱 잡았는데, 그런 견고한 변함없는 어떠한 실체가 아님을, 우리 몸덩어리나 마음덩어리가 덩어리가 아님을,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에요. 마음을 가져와라고 할 때 그 마음을 한 덩어리로 생각하고 아무리 마음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누가 말했느냐? 2조 혜가대사가 달마조사에게 말한 거예요. 그렇게 알아야 돼요. 깨달아야 돼요.
신심명의 사구게는 지도무난至道無難하니 유혐간택唯嫌揀擇하라. 단막증애但莫憎愛하면 통연명백洞然明白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딱 두 구절만 압축하면 지도는 무난하니 단막증애하라.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게 없다. 또는 도에 이르는 것은 어려운 게 아니다. 다만 증애, 미워하지도 말고 좋아하지도 말아라. 이것이 3조 승찬대사의 가르침입니다.
방금 부처님이 말씀도 듣고 이럴 때, 좋은 느낌과 싫은 느낌 또는 유쾌한 느낌과 불쾌한 느낌이 발생할 때 유쾌한 느낌은 어떻게 한다고 했지요? 애愛, 좋아하고 또 하고 싶고 또 보고 싶고 또 보고 또 보고 또 보고 싶고 완전히 거기 대상이 중독되어 상사병 정도가 아니고, 스토커, 살인범이 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게 고통의 발생이 되는 애착 반응이라고 해요. 반대로 싫은 것은 어떻게 해요? 또는 내가 이렇게 좋아하는데 여자 친구 부모가 반대해? 부모를 처음에는 얼르고 얼러서 내가 돈 벌어서 당신 딸을 행복하게 만들겠어요 하다가 이제 안 되고 딸이 그렇게 싫어하니까 만나지 말라고 했더니 집까지 찾아 그 부모마저 살해해 버린 겁니다. 이처럼 싫은 감정은 분노의 감정, 탐진치貪瞋痴의 진해의 마음, 분노의 마음은 혐오 정도가 아니라 증오를 넘어서 무차별 살인까지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진심. 그래서 부처님이 삼독심이라고 그랬죠. 치라는 것은 뭡니까? 어리석음. 무엇을 어리석음이라고 그래요? 모르고 있음을 어리석음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모르고 있어요? 내가 이렇게 탐착貪着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고, 내가 이렇게 혐오하고 배척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어요. 내 마음을 모르고 있다. 내가 하는 행동을 모르고 있어요. 내가 하는 행동이 나는 좋아서 하는 행동인데 상대방에는 엄청난 트라우마와 엄청난 상처와 구속과 고통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어요.이런 것을 모를 때에 무지, 어둠이라고 했어요. 불광이 뭐라고요? 깨달음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깨달음의 지혜, 다시 말해서 12연기의 제1원인인 무명, 무지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모르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무지라고 하지 않아요. 이게 부처님의 선언입니다. 선언. 이것은 부처님이 유훈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초전법륜初轉法輪이 사성제라는 것은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죠. 마지막 유훈을 한번 보면 알 것 같아요.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가 뭔지. 부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괴로움에 대해서 그 실상에 대해 설명을 하셨고, 그 괴로움이 어떻게 발생했느냐를 설명하셨고, 그걸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그것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설하셨습니다. 마무리 80 노인이 되셔 가지고 시봉하는 아난존자가 부처님이 이제 나이 드셔 가지고 허리도 구부정하고 머리는 백발이 성성하시고, 그 젊었을 때 황금색으로 찬란하게 빛났다는 그 준수한 미모도 사라지고 쭈글쭈글한 피부로 변했다. 그리고 이제 자꾸 아프셔요. 아프셨죠? 부처님 안 아프신 줄 알았습니까? 아팠죠. 부처님 안 늙었어요? 영생했습니까?
그러한 부처님을 보고 이제 얼마 이생을 살지 못하시고 우리가 이제 배울 기회가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고 부처님께 질문을 합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에 누구에게 의지해야 됩니까? 그러니까 부처님이 “이 녀석아 네가 그렇게 나의 고구정녕 苦口丁寧 45년간 진리를 제일 많이 듣고 설법을 들은 네가 아직도 그런 질문을 하느냐?” 그 질문은 여러 가지 뜻이 있어요.누구를 후계자로 삼느냐 이런 뜻도 있어요. 그래서 부처님 다음으로 누구에게 가서 우리가 의문날 때마다 부처님께 달려와서 법을 설해 달라고 하고, 서로 같은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부처님한테 같은 법문을 들었는데도 서로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해석을 달리했을 때, 부처님께 물어보면 부처님이 탁 정확하게 판결을 내려주셨는데, 이제 누구에게 의지해야 되느냐 이런 뜻도 되지요. 그렇죠. 다른 종교가 같으면, 내가 죽어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기도를 간절히 하면 언제든지 달려와서 너에게 답을 주고 해결해 주리라, 구원해 주리라 이러한 질문의 요지도 숨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처님의 답은 뭐였어요? 한번 말씀해 보시죠.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고 결코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 그러셨어요. “자기 자신을 섬으로 삼아라.” 이것은 빨리어 텍스트의 번역입니다.산스크리트어 번역은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으라” 이렇게 번역이 되겠습니다. 비슷한 뜻이지만 강렬한 정도는 처음(빨리어 번역)이 더 강렬합니다. 왜? 우리는 고해 속에 표류하고 있는 난파당한 사람을 떠올릴 수 있으면, 그 난파 당한 판자 조각 하나에 의지해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무인도라도 섬을 만나기를 학수고대하는 그 난파당한 사람을 떠올려보세요.섬은 절대 생명의 의지처가 되지요. 그처럼 부처님이나 하나님에게 의지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청천벽력 같은 예상외의 대답입니다.
나는 지금 고통스럽고 문제도 해결 못하고 유한하고 능력도 부족하고 신통력도 없고 하루하루 먹고 살기도 바쁘고 그런데, 이러한 유한하고 부족한 나를 의지하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무슨 말인가요?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라는 사념처관四念處觀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대가 고통스러운 것은 가난 때문도 아니고, 질병 때문도 아니고, 늙음 때문도 아니고, 부모님이나 저 자식의 죽음 때문도 아니고, 그대가 그러한 사건을 만날 때 일으키는 평지풍파, 자기 자신의 마음의 과정 때문에 고통이 발생했다, 즉 고통은 어디까지나 내면적이다, 그 고통을 받은 것은 너가 만든 것이다. 이것은 <화살의 비유경>에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첫 화살은 피할 수 없어도 두 번째 화살은 피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한 말씀을 하셨는데 어떤 뜻이냐? 첫 화살이라는 것은 늙어감, 병 등 내가 갑자기 암이 걸렸다는 청천병력 같은 진단을 받았을 때,, 부모와 처, 자식, 사랑하는 내 자식 갑자기 비명횡사했을 때 이런 게 다 화살이에요. 첫 화살. 나 자신이 늙고 병들고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거 이런 것들은 다 첫 화살이고, 이 첫 화살을 피할 수 없다고 부처님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종교는 첫 화살을 피할 수 있다고 희언戲言을 합니다. 희언은 진언眞言이 아니며 진실한 사실이 아닙니다. 역사를 보면 아시죠? 2천년 3천년 역사를 보세요. 늙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고 구원받은 자가 있는가? 영생불사永生不死하고 있는 자가 있는가? 그럼 뭐가 더 진실한 말이냐? 내가 살면서 행복하게 살지 못하고 괴로워하는데 그 괴로움이 내가 만든 것이라면 2차적인 화살이라면 내가 만든 화살은 안 맞을 수 있다, 피할 수 있다, 이게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만들었기 때문에 고통은 해결될 수 있다, 사성제의 원리입니다. 소멸시킬 수 있다, 어떻게? 내 마음을 잘 보고 이 현재의 괴로운 마음이 어떻게 발생했느냐 이걸 잘 봐야 된다, 이 현재의 괴로운 마음은 아까 부처님이 말씀하신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부처의 마음과 중생의 마음과 본래의 마음이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 마음이 중생심으로 중생의 마음을 사용하면 중생이 되는 것이고, 부처로 마음을 사용하면 부처 의 불심이 되는 것이다, 본래 마음은 순수한 백지와 같아서 내가 어떤 그림을 그 화폭에 물감을 칠해서 멋지게 그리느냐, 아니면 구질구질하게 그리느냐, 이것은 누구에게 달렸다고요?
외부에 달려 있는 게 아니고, 외부 환경에 달려 있는 게 아니고, 외부 배우자에게 달려 있는 게 아니고, 외부 상황에 달려 있는 게 아니다, 탓하지 마라, 외부 탓하지 말고, 밖에다 의지하지 말고, 밖에서 찾지 말고, 자기 자신 안에서 찾으라, 답을! 이미 네가 답을 알고 있다, 왜? 우리는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내면의 지혜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너 자신에게 물어보라!
너 자신을 물어보는 방법이 단계적으로 사념처라는 것입니다. 법념처法念處가 뭐냐? 이러한 것을 법이라 그래요. 사성제 이런 것을 법이라 그래요. 나는 법을 쉽게 설명합니다. 삶 속에서 만나는 모든 문제들을 법이라고 봐요. 그 법을 잘 관찰을 해야지, 삶 속에서 만나고 있는 현실을 잘 직시해야 하는데, 그 전 단계 세 가지가 훈련이 돼 있어야 돼요. 몸과 호흡을 잘 바라보고, 몸과 호흡의 느낌을 잘 바라보고, 감각과 감정을 잘 바라보고, 마음을 잘 바라보고 그다음에 그 준비된 실력으로 삶 속에서 현실을 바라 보아야 된다, 이게 법념처입니다. 법념처.
법념처를 교리적으로 이해하려면 머리가 아프고 알쏭달쏭하고 이 사람 말 다르고, 저 사람 말도 다르고 그래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어요. 어디까지나 우리 삶 속으로 들어와야 돼요. 가끔선가禪家에서 너는 왜 니까야나 초기 불교만 이야기하고 대승불교를 이야기하지 않느냐 그런 말을 해요. 저도 꽤 공부할 만큼 했죠. 선가에서 화두話頭도 많이 받았어요. 우리 부산 선사로부터 시심마 화두도 받았고, 그 전에 백봉거사로부터 마삼근 화두도 받았고, 어떤 큰 스님처럼 10년간 장좌불와는 아니지만 10일 동안 등을 기대지 않고 장좌불와는 해 봤어요. 선가에서는 뭐라고 했느냐, 뭐라고 했을까요?그러니까 여러분이 지금 저한테 쭉 들으면서 온전히 100% 집중해서 듣는 게 아니라 듣는 순간 여러분들은 자기 자신의 지식과 견해와 과거에 들었던 식견 가지고 판단 비교를 해요. 그러니까 온전히 들어오지 않아요. 그래서 뭘 질문했냐 그러면 바로 답이 안 나와요. 모르겠다고 하면서 또 가르쳐주세요 해요. 이게 우리가 수많은 주입식 교육에 익숙해져서 깨달음이 안와요.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라는 이야기는 철저하게 부처님 말씀을 들어서 가지고 와서, 새기고, 명상 속에서 계속 사유를 하는 겁니다.그래서 이게 무슨 뜻인가 하고 사유하고 공부하고 탐구하는 거예요.
이것을 칠각지七覺支에서 제2 택법각지擇法覺支라고 해요. 택법. 제1은 염각지, 사념처관 가운데, 정념이 염각지,염念이 깨달음을 이르는데 한 번을 차지하고, 두 번째 차지하는 게 바로 택법각지입니다. 사실은 칠각지 중에서 무엇이 주장이냐 하면 택법이에요. 택법. 법념처하고 연결되는 게 택법각지. 신수심법. 자기 자신을 관찰할 때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 현실을 관할 때에 현실을 어떻게 잘 바라보고 이해하고 진단해서 처방하느냐 이게 택법입니다. 택법. 법을 삶이라고 그랬죠. 선가에서 십우도十牛圖라는 게 있죠. 십우도. 심우도尋牛圖라고도 하죠.
십우도 아시죠? 십우도의 제일 마지막이 뭡니까? 9단계는 멋져요. 소를 찾으러 나서고, 발자국을 발견하고 흔적을 따라가고, 소를 발견하고, 고삐를 걸고, 소를 길들이고, 소를 올라 타고, 피리도 불고 두 손 놓고 자전거 타는 것처럼 자유자재로 했는데 나중에는 이제 소도 사라지고 나도 사라지고 모든 게 하나가 되고 일체가 되고 일원상一圓相이 되고 그런데 그걸로 끝날까요? 마지막이 뭐예요? 입전수수入廛垂手라. 시장 속으로 다시 돌아와서 삶 속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입니다.누가 명상도 하고 또 안거를 해서 멋지게 수행을 해가 지고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 같고, 나는 아무 두려움도 없고, 분노도 사라지고 욕망도 버렸노라 이렇게 큰소리 친 사람한테 내가 한 말씀 해요. 당신 집으로 돌아가.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 형제 자식 만나봐. 남편 아내 만나서 살아봐. 살아서 욕심도 없어지고 분노도 없고 갈등 관계도 없고 행복하게 산다면 당신은 인가를 받을 만해. 아니라면 아직 멀었어. 결국은 뭐예요? 현실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현실, 땅 위의 삶. 하늘 위에서 허공 중에 나는 것을 여러분들을 희구하면 안 되지. 신통력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물위를 자유자재로 걷고, 포도주 한 병을 수만 병으로 만들어서 또 떡 한 조각을 수많은 떡시루로 만들어서 앉아 있는 모든 수천 대중에게 먹이고 마시게 했다,이런 신통력이 뭐가 중요합니까? 그리고 잠깐 죽은 아빠 자식을 살려내는 게 뭐가 중요합니까? 곧 또 죽을 건데. 또 병들어요. 그건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이런 외향적인 구원을 우리는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인 신드롬이 있어요. 도인 신드롬. 옛날에는 도인이 많았는데 요새는 왜 도인이 없나, 도인 찾아 삼천리! 전국 방방곡곡 도인을 찾아가서 물어봐요. 그 사람이 나에게 대답을 주고 해결책을 줄 것처럼. 부처님의 본 뜻과는 전혀 다르지 않아요? 결국은 누가 대답을 얻어야 돼요. 자기 스스로 깨닫지 않으면 대답은 남의 것이다, 이겁니다. 도인 그 사람의 것이다, 이말입니다. 처방 내려주는 사람은 그 사람의 처방이지, 나의 처방은 아니니까. 그것은 정보에 불과한 것입니다. 수많은 지식, 수많은 훌륭한 법사님들이 여기 와서 법문도 하시고 그러겠지만 그게 그분들의 경험과 지견智見으로 끝나버리면, 내 것이 안 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야, 그것은 남의 것이다, 이 말입니다.어떻게 해야 돼요? 부처님은 문사수聞思修하라! 문, 듣고, 보고 배우는 거죠. 그 다음에는 사, 사유하라. 집에 가서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라. 숙고. 제가 <숙고명상>, 책을 쓴 이유가 그래요. 왜냐하면 선이나 명상에서는 언어도단을 이야기했는데, 쓸 생각을 없애야 되는데, 무념무상으로 들어가야지. 그거는 선정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선정. 선정이 나쁘다는 게 아니고 선정이 필요 없다는 게 아니라, 선정을 하는 목적은 지혜를 개발시키기 위한 것이다는 얘기입니다. 아까 계정혜 삼학에서, 계정혜라는 세개의 발을 가지고 있는 솥과 같아요. 솥이 대개 3개의 발을 의지해야 견고하게 서죠. 두 개 발이나 하나 가지고는 솥이 견고하게 설 수가 없습니다. 팔정도가 아우러지지 않고, 계정혜 삼학이 아우러지지 않으면 올바른 깨달음, 올바른 견해가 다시 일어나지 않아서 올바른 삶의 지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깨달으면 저절로 팔정도가 이루어지고, 깨닫기 전에는 올바르게 살려고 팔정도에 입각해서 살고 지속적인 정진을 해야겠습니다.이게 팔정도입니다. 팔정도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깨닫기 전과 깨달은 후.그런데, 깨닫기 전후가 원래는 없어요. 본래 깨달았기 때문에. 누가 그랬어요? 화엄경에서도 그랬고 부처님의 의중을 보면 그런 말씀이 내포돼 있어요.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그 당장에서 깨달아 가지고 예류과, 수다함과 등등을 얻어 가지고, 눈물 흘리는 제자들이 엄청나게 많았죠. 수만 명에 해당되고 수십만 명에 해당될 텐데. 그래도 깨달음의 위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해서, 수다함 다음에 사다함, 사다함 다음에 부처님과 같은 아라한, 정등정각이 될 때까지 끊임없이 노력 정진을 해야 되는 게 이 마음 길입니다.
깨달음도 수준이 있어요. 수준. 내가 오늘 맛지마니까야를 읽고 터득한 내용이 있고, 1년 전에 읽고 터득한 내용이 있고, 10년 전에 20년 전부터 강독했습니다. 그 내용이 있는데 각각 달라요. 점점점. 같은 경전을 읽고 맛을 보는데도 수준이 달라져요. 그거는 우리가 의식이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의식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우리가 마음 공부를 계속하면 끊임없이 정진하면 우리의 의식은 수준이 점점점 향상일로에 있게 돼 있죠. 이게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이제 마무리를 지으면 우리가 삶 속에서 깨달음을 어떻게 가져 가야 되느냐?
우리의 삶 속에서 보고, 듣고, 맛보고, 생각할 때에 항상 깨어서 여섯개의 문의 수문장을 잘 세워서 항상 깨어서, 잘 보고 있어야 그래서 외적이 침범하지 않게, 도적이나 간첩이 침범하지 않게 해서, 이 여섯개의 감관의 문을 잘 지킨다는 이야기는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 일체처 일체시에 깨어서 알아차리고 있어야 된다,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숨이 끊어질 때까지 호흡을 잘 보고 알아차려야 됩니다. 바라보고 바라보고 바라보고.바라보는 자가 누구냐? 바라보는 자가 누구가 아니라, 바라보는 자를 바라봐야 돼요. 그렇게 바라보고 또 바라보라, 언제? 일체처, 일체시까지. 보고 듣고 생각하고, 움직이고 말하고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잘 보고 깨어서 알아차려야 된다, 그렇게 해서 이것이 과연 나인가, 이것이 정말 참 나인가, 이것이 내 것인가, 내면의 질문에서 내 것이 아니라면 과감하게 버리는 거예요. 방하착放下着. 내려놓는다는 겁니다. 특히 에고ego를 판단, 분별, 시비 비교하는 에고를 나로 착각하고 동일시했는데 그 에고는 가짜 나에 불과하다. 그것도 살아가면서 형성된다. 에고는 본래 나는 아니다. 본래 나는 무엇이냐? 바라보고 바라보면 알 수 있다. 질문을 던지십시오. 시심마의 화두는, Who am I는 모두, 내가 보고 생각하고 이 6개의 영역에서 실시간으로 경험이 일어날 때 이게 과연 나인가, 이게 과연 내 것인가, 내면에 질문하면 내면의 지혜가 답을 주실 거예요. 그렇게 살아가는 게 진정한 불자의 삶이라고 저는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녹취:청명거사)
♬ 찬탄곡 : 청산은 나를 보고( 나옹선사 작사, 백영운 작곡) 마하보디 합창단 ♬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세월은 나를 보고 덧없다 하지 않고, 우주는 나를 보고 곳없다 하지 않네
번뇌도 벗어놓고 욕심도 법어놓고, 강같이 구름같이 말없이 가라하네.
루루루 루루루루 루루루 루루루루, 루루루 루루루루 루루루루루 루루루
말없이 살라하네 푸르른 저 산들은, 티없이 살라하네 드높은 저 하늘은
발원문 낭독 : 대원 3구 명등 현수 거사님 (불광법회.불광사 정상화 기도 발원)
현안 보고 : 현진 법회장님
오늘도 세 분과 함께힌 새 법우 환영식입니다. 반갑게 맞이하며 환영합니다. 법회장님과 사진도 한 컷.
법회가 끝나고 모여앉아 담소를 나누시며 각자 챙겨오신 종류도 다양한 점심 공양을 들고 계신 구 법회, 법등 모임.
군장병 자비의 선물 준비를 위해 모금합을 설치하였습니다. 불교 포교에 마음내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법회를 마치고 오늘도 마음모아 금강경 독송을 이어가고 계시는 불광 형제들입니다.
토요일엔 빠짐없이 보광당 청소 및 좌석 배치해 주시는 청정 봉사팀. 늘, 감사드립니다.
지난 지장재일 법회가 있던 날, 돌아가신 어머님을 기리며 두 개의 호접란 화분을 영단에 올리셨던 어느 보살님께서 합창 연습날 법당에서 화분이 없어진 것을 보고 등 작업하시던 거사님들께 여쭈었더니, 쓰레기장으로 내놓은 것을 보았다고 하셔서 1층 쓰레기장에 버려진 두 개의 화분을 확인하고 다시 법당으로 들여놓은 호접란 화분입니다. 어쩌지 못하고 한 지붕 두 가족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현재 상황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상대가 마음에 안 든다 하더라도 자식의 간절한 마음으로 영단에 올린 꽃을, 아니 그전에 꽃도 생명인데, 어떻게 불광 법회 측에서 공양 올린 꽃이라는 이유만으로 저토록 예쁘고 생생한 꽃 화분을, 버리려는 마음이 생겼는지, 그 알 수 없는 행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화합 기도를 하는 사 측에서 행한 일이라니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화요일, 금요일 조계사에서, 봉은사, 동명사, 화광사에서 1인 시위 정진을 이어가고 계신 불광 형제들.
불광 법회를 지키기 위한 토요일 시위에 동참하시는 불광 형제들의 굳건한 뜻이 하루속히 이루어지길 서원합니다._()_
우 리 는 횃 불 이 다. 스 스 로 타 오 르 며 역 사 를 밝 힌 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용맹정진하여 바라밀 국토 성취한다. |
첫댓글 마음님!
늘 어려운 작업하시느라 애쓰시고 수고많으십니다
법회에서 순간 놓친 법문내용 다시한번
짚어볼수있는 시간이라 많은 도움이됩니다
찬탄의 박수와함께 감사드립니다
불보살님들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 불광은 깨닫음의 빛이다.>
진리인 변화에 순응하며 사는 게 본성대로 사는 것이다.
그라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변화가 내 생명의
근원임을 모른 채 변화를 두려운 것으로 인식하며
거부한다.
진리인 변화에 기대어 존재하는 게 "진짜" 나 인것
같다.
진짜 나로부터 멀어지는 게 불행이며 고통이다.
나를 위해 돌아보면서 공부해 본다.
오늘 법문 감사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마음님! 애쓰신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녹취하신 청명거사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최훈동 교수님의 감로법문
지도무난 단막증애
여섯개 문의 수문장을
*아나빠나 삿띠*
부처님의 호흡법으로 사유해
보겠습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_()_
금빛별님, 매 번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법사님 존함이 최훈동교수님 이십니다.
수정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짚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_()_
수많은 불자님의 노고로 이루어지는 불광법회와 법회일지에 감사합니다
이것이 나인가? 하는 가르침 주신 교수님 감사합니다
일지작성에 애쓰신 청명거사님과 마음님 그리고 사진 찍으시는 지일심님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