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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로 사망.. 쿠바 정부 9일간 애도 행사
쿠바 수도 아바나는 슬픔에 잠겼고,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의 쿠바계 주민 밀집지역 ‘리틀 아바나’는 환호했다.
쿠바 공산혁명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 전 국가평의회 의장의 죽음은 그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듯 누군가에게는 슬픔을, 다른 누군가에겐 기쁨을 가져다줬다.
쿠바 내부와 중남미 좌파 정부는 ‘혁명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음을 슬퍼한 반면, 독재를 피해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온 쿠바인들은 독재의 종언을 기뻐했다.
20세기 혁명 아이콘, 역사 속으로
카스트로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은 “25일 밤 10시29분(현지시간) 쿠바 혁명의 총사령관이 90세로 숨을 거뒀다”고 발표했다.
라울은 유언에 따라 고인은 화장될 것이라고 밝혔다.
쿠바 정부는 26일부터 9일간 애도 기간을 가진 뒤 다음달 4일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 장례식을 거행한다. 이곳은 카스트로가 학창시절을 보낸 곳이며 쿠바 혁명 승리를 선언한 ‘혁명의 도시’다.
추모 행사는 28일 아바나의 호세 마르티 기념관, 29일 아바나 혁명광장, 다음달 3일 산티아고 데 쿠바의 안토니오 마세오 광장에서 열릴 예정이다.
화장된 카스트로의 유해는 30일부터 전국을 순회한 뒤
다음달 4일 산티아고 데 쿠바의 산타 이피헤니아 묘지에 안장된다.
쿠바 국민들은 침울한 분위기 속에 혁명 지도자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아바나의 한 주민은 “우리 쿠바인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더라도
모두가 카스트로주의자(Fidelista)였다”고 말했다.
반면 마이애미의 리틀 아바나에 사는 쿠바계 이민자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폭죽을 터뜨리거나
미국·쿠바 국기를 흔들고 서로 얼싸안았다.
“사탄이여, 이제 카스트로는 너의 품으로 갔다”고 써 붙인 식당도 있었다
한 쿠바계 주민은 “이것은 죽음에 대한 축하가 아니라 우리가 오랜 세월 기다려온 자유의 시작을 축하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반세기 집권…미국 대통령 11명 괴롭혀
1926년 스페인 출신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카스트로는 변호사로 활동하다 친미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에 맞서 게릴라가 됐다.
53년 몬카다 병영 습격에 실패해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2년 뒤 특별사면되고 멕시코로 망명했다.
이곳에서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와 만나 세력을 모으고 56년 쿠바로 돌아와 게릴라전을 시작했다.
결국 59년 1월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사회주의 정권을 세웠다. 이후 49년간 쿠바를 통치했다.
재임 49년은 고(故) 푸미폰 아둔야뎃 태국 국왕(70년 재위)과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현재까지 64년)에 이어 3번째로 길다. 왕족이 아닌 지도자로는 20세기 최장기 집권 기록이다.
카스트로는 극렬 반미(反美) 지도자였다.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인 쿠바는 카스트로가 이끄는 동안 초강대국 미국에 손톱 밑 가시 같은 존재였다.
뉴욕타임스는 “11명의 미국 대통령을 괴롭혔고 세계를 핵전쟁 직전까지 몰고 가기도 했다”고 전했다.
핵전쟁 위기는 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를 말한다.
당시 소련의 쿠바 미사일 배치를 둘러싸고 미국과 소련이 갈등을 빚어
핵전쟁 발발 직전까지 갔다가 극적으로 협상이 타결됐다.
경제는 실패…생전에 대미 관계개선 목도
카스트로는 미국과의 극한 갈등을 감내하며 중남미와 아프리카의 좌파 혁명을 지원했다. 공산혁명 성공의 씨앗을 세계 각국에 전파한 것이다.
그러나 쿠바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카스트로가 자국 경제 개혁에 의지가 없었던 것이 같은 공산국가인 중국에 자극제가 됐다는 분석도 있다
. 빅터 가오 중국에너지안보연구소장은 “카스트로는 위대한 정치 지도자였지만
위대한 경제 지도자는 아니었다”며 “그가 타계함으로써
쿠바의 다음 세대는 경제 개혁과 발전이 쉬워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카스트로는 건강 문제로 2006년 라울에게 정권을 넘겨줬다. 쿠바와 미국이 오랜 단절을 끝내고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도 생전에 지켜봤다. 2014년 국교 정상화 선언에 이어 올해 3월 아바나에서 라울과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이뤄졌다
쿠바 사회주의 혁명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90)가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9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카스트로는 20세기 사회주의 ‘혁명의 아이콘’이었고, 중남미를 비롯한 제3세계 좌파의 맏형 노릇을 했다. 사진들을 통해 그의 인생을 살펴본다.
1926년 8월 쿠바 동부 비란 출생
1945~1950년 아바나 대학에서 법학·사회학 공부
1952년 군사 쿠데타로 바티스타 집권
1953년 7월 몬카다 병영 습격 실패, 징역 15년형 선고
1955년 특사로 석방, 멕시코로 망명. 이후 체게바라와 합류해 게릴라투쟁 시작
1959년 1월 바티스타 정권 전복, 혁명 승리
1960년 기업 국유화, 미국은 전면 금수조치 이어 이듬해 국교 단절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
1972년 쿠바, 공산권 경제공동체 코메콘 가입
1975년 쿠바공산당 제1차 전당대회
1976년 새헌법 발표, 피델이 국가·당 최고직 취임
1980년 ‘쿠바 엑소더스’, 쿠바인 12만명 미국으로 망명
1991년 냉전 종식 뒤 경제위기, 경제특별기간 선포
2006년 장출혈로 수술, 동생 라울에게 임시 권력 이양
2008년 국가평의회 의장 사퇴, 라울에게 권력 공식 이양
2016년 11월 25일 사망
쿠바혁명 지도자로써 반세기 동안 미국 대통령 10명과 맞섰던 피델 카스트로
쿠바 전 국가평의회 의장이 25일(현지시간) 밤 향년 90세로 타계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그의 타계소식에 “역사가 그를 판단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반면에 트럼프 당선자는 “그는 야만적인 독재자였다”고 비판했다.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그는 혁명이 불러일으킨 희망과 뒤따른 환멸 등 쿠바 혁명을
구현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흔히 쿠바는, 세계 최빈국으로 불리어진다!
콜럼버스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상 낙원’이라 극찬했던 땅!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 혁명, 정열적인 살사 댄스, 독한 시가와 야구의 나라!
혁명 후 55년 동안에, 쿠바는 세계최고 문맹국가에서, 세계최고 학력국가로 거듭 났다!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전 국민 무상교육이다. 보육교사와 대학교수의
급여수준이 같고, 교사는 의사와 더불어 학생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업이란다.
또 암 치료부터 심장이식까지, 의료비 전부가 무료다!
지역단위의 패밀리 닥터가 예방의학 중심으로 질병관리를 한다.
의사 수준도 최고이고 매우 친절하다. 항암제와 백신 개발 등 의약품 수준도 매우 높다.
혁명 쿠바는, 정치적 종속과 경제적 수탈로 신음했던 빈한한 식민지에서
'가난하지만 행복한 나라'로 다시 태어났다. ‘지구촌 행복 지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행복감은 143개국 중 118위, 미국은 114위이나, 쿠바는 ‘7위’ 이다!
그래서 제3세계 국가들은 쿠바를 선진 강소국으로 여긴다.
1959년 쿠바혁명으로 친미 ‘바티스타’ 괴뢰정권을 무너트린 ‘피델 카스트로’는,
만사를 제쳐두고 워싱턴으로 달려간다. 당시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그의 화해 제스쳐를 묵살하고 면담조차도 거부한다.
멀쑥해진 ‘카스트로’는 링컨 기념관을 방문하여 화환을 놓고, ‘자기가 제일 존경하는
사람은 링컨대통령이며, 쿠바에 링컨의 꿈을 꼭 실현하겠다’고 약속하며 귀국한다.
약소국 민족주의와 ‘강대국 제국주의’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역사의 숙명이다!
혁명전 쿠바는, 빈부의 양극화, 경제적 수탈, 심각한 부정부패, 특권계층의 사치와
횡포 등으로 ‘미국인과 부자들에게는 천국이고, 빈자에게는 지옥’과 같은 나라였다.
60년 혁명정부는 전국민적 문맹퇴치 사업과 함께 ‘토지개혁’ 등 사회개혁을 단행한다.
소작농을 금지시키고, 식민시절의 Plantation 농장을 철폐한다.
쿠바 경제를 주름잡고 있던 GF, 네슬레 등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은 철퇴를 맞는다.
케네디 행정부는 대노하여, 1차 ‘경제 제재’를 가하고 혁명 전복을 수차 시도한다.
사탕수수와 커피, 담배를 경작하여 미국에 수출하고 그 돈으로 미국에서 밀, 옷, 의약품
등 생필품을 수입하여 먹고 살아왔던 나라가, 하루아침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어진다.
혁명정부는 옛날 식민지 본국이었던 스페인에 경제적 지원을 요청했지만,
힘 없는 스페인 정부는 별 도움이 못된다. 카스트로는 할 수 없이
소련정부의 경제지원을 받아, 전시 사회주의 체제로 옹색한 살림을 꾸려나간다.
쿠바와 카리브 해역은 미국 워싱턴과 뉴욕의 앞마당 격이다!
유럽의 터키는 소련 모스크바의 옆구리에 해당된다!
터키의 미국 공군기지에 배치된 핵미사일 위협에 늘상 좌불안석해오던 소련정부는,
반색하며 맞이한다. 두 연놈들이 눈이 맞아 서로 뱃가죽을 맞대고 박장대소한다.
흔히 쿠바는 반미, 공산주의 국가라고 일컬어진다.
이것은 양국 간 갈등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이다! 카스트로로써는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생존을 위한 방어책이었을 뿐이다. 카스트로는 말한다.
“들어라! 미국이여!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전쟁, 인종차별, 경제적 불의 이다!”
당시에 미 행정부가 냉전 초기의 강경분위기에 들떠서 힘으로 마구 밀어붙이는
패권주의 정책을 구사하지 않고, 노련하고 고차원적인 '햇볕 정책'으로 카스트로를
잘 구워 삶으려했더라면, 오늘날 쿠바는 '자본주의 천국'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체 게바라’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미국의 피그스 만 공격을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오. 덕분에 혁명정부의
지지 세력을 견고하게 다지고, 우리의 중산층 반대 세력을 잠재울 수 있게 되었소”
-1959년 혁명직후 카스트로(왼쪽 첫번)와 체게바라(중앙)-
케네디 대통령은 온건주의자인 것 같기도 하지만, '공화당원 같은 민주당원‘ 이었다.
재임기간 내내 강경파 네오콘(NEOCONS)들에게 휘둘린다.
1961년 4월 ‘케네디’는, 미 중앙정보국(CIA)이 훈련시킨 反카스트로 쿠바 망명자
1500여 명을 쿠바의 ‘피그스’ 만(灣) 해안에 침투시킨다.
카스트로가 주문한 벨기제 소총을 싣고 오던 선박은, 직전에 하바나 항구에서
이상하게도 폭파된다. 그래서 쿠바군대는 무장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어이없게도 침공대원들은 싸움 한번 제대로 못하고서, 전부 다 포로로 붙잡혔다.
‘펜타곤’은 침공군들이 상륙하면, 쿠바국민들이 쌍 손을 들고 열렬히 환영하고
수비 군인들도 무기를 버리고 바로 투항할 줄 알았단다. 그러나 웬 걸!!
쿠바인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삽자루,곡갱이 들고 행주치마에 돌멩이 싸담고 뎀벼들었다.
자기 동족들의 이런 처절한 모습을 보고, 침공대원들은 총과 선무공작용 레이숀 박스를
내팽개치고 함께 부등켜 안고서 엉-엉 울어버렸단다.
다급해진 ‘카스트로’는 소련에 군사 지원을 요청한다. 소련은 쿠바군에 무기를 공급하고,
미사일 기지를 건설한다. 카스트로는 고래 등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는 경우를 우려하여,
미사일 발사 결정권한을 쿠바에게 달라고 하나 ‘후르시쵸프’는 일언지하 거절한다.
1962년 10월 16일에서 28일 까지 13일간,
미국과 소련이 핵전쟁의 벼랑 끝에서 대치하는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한다.
역사책에는 ‘케네디 대통령의 용기 있는 결단력과 강력한 리더쉽이 미,소 핵 전쟁을
막고 미국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기술된다.
또 혹자는 미국의 핵폭탄 보유량이 소련의 두 배였기에 소련이 꽁무니를 뺏다고 한다.
젊고 패기만만한 ‘케네디’는, 여차하면 핵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하고 공세적인 자세로
쿠바해역을 봉쇄하고, 공해상의 소련선박을 나포한다. 국제법상 명백한 침략행위이다!
당시 소련 수상 ‘후르시쵸프’는 ‘스탈린’의 강경, 제국주의 노선을 청산하고,
평화공존의 친 서구주의 정책을 지향하는 '온건주의자'였다.
미국 허리우드 영화 ‘크림슨 타이드’나 ‘Thirteen Days’에서는 소련 측의 도발성을
강조하지만, 그는 애초부터 미국과 핵 전쟁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듯하다.
미국의 터키 군사기지와 소련의 쿠바 기지를 상호 맞교환하여 철폐하고,
쿠바의 안전을 보장하는 선에서 거래가 이뤄지며 위기는 끝난다.
그의 평화주의가 인류역사상 가장 위험했던 순간에 핵전쟁을 피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미국은 건국 이래로 전쟁을 치르지 않은 해가 없을 만큼 호전적인 국민성의 나라이다!
승전의 팡파레 속에서 ‘케네디’는 일약 ‘구국의 영웅’으로 떠오른다.
‘후르’는 소련 내의 강경파 스탈린주의자들로부터 비겁자, 매국노로 매도되어 실각된다.
‘후르’의 친 서구, 평화공존의 정책은, 1985년 ‘고르바쵸프’에 의하여 다시 부활된다!
1962년 미국은 서방세계와 연대하여, 가혹한 쿠바 ‘경제 봉쇄령’을 발동시킨다.
쿠바와 거래한 기업, 개인은 미국 내 자산이 압류되고, 미국입국 비자가 금지된다.
카스트로 암살시도 269회 등 잦은 테러와 파괴공작으로 쿠바를 혼란 속에 몰아넣는다.
1991년 소련연방이 해체되며 원조가 끊어지자, 쿠바는 최악의 경제위기에 봉착한다.
허나 ‘동유럽의 봄’이 ‘중남미의 봄’으로 이어지며, 베네주엘라, 칠레,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남미 여러 곳에 좌파 민족주의 정권들이 들어선다.
그들과 상부상조해 나가며 독특한 ‘쿠바식 사회주의’ 체제로 신통하게 잘 버티어 왔다.
<카스트로 장례식이 치뤄질 쿠바 혁명광장>
미국과 쿠바는 작년 7월에 국교정상화 했다.
지난 3월, 오바마는 쿠바를 방문하여 라울 카스트로 의장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워싱턴은 가혹한 경제봉쇄도 단계적으로 해제한단다. 참 기쁜 소식이다!
허나 미국과 쿠바의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영리한 ‘오바마’는 종전 거칠은 '토끼 몰이'대신에, ‘햇볕정책’으로 전환했다.
플로리다, 뉴저지 등에 살고 있는 150만 쿠바계 이민들을
‘자본주의’의 ‘미인계’로 활용하여, 쿠바 내에서 ‘오렌지 혁명’을 꿈꾸어 본다.
카스트로는 혁명후 55년 동안 갈고 닦은 국민교육과 사회복지에 기대를 걸어본다.
이 정치적 大도박에서, 과연 누가 이길까??
나는 후자 쪽에 돈을 걸어보고 싶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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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NGO,투우의 나라, 스페인의 눈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