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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 밖의 장소에 아흔아홉칸 기와집이 덩그러니... [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제3부]<8-1>
경남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남사마을 예담촌
다랭이마을과 남해의 아름다운 도로를 다시 한 번 음미하면서 또 다른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는 경남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남사마을로 향한다.
한국은 땅덩이가 좁은데다 산악지대가 많아 오지가 많다. 그 중에서도 경남 산청은 과거에 그야말로 ‘오지 중의 오지’였다. 이런 오지에 남다른 전통마을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자랑하는 지리산 깊은 곳에 위치하면서 18?20세기 전통한옥 40여 호에 85채의 전통한옥을 갖고 있는 ‘예담촌’은 오지에 있는 남다른 전통마을의 명성에 알맞은 곳이다.
남사 예담촌 전체 마을지도. 이종호 제공
예담촌은 농가 105호, 비농가 30호, 주민 숫자가 340명이나 돼 전통마을 기준으로 볼 때 작지 않은 마을이다. 많은 가옥들이 남부지방 양반가옥의 모습을 잘 보여줘 마을 전체가 살아있는 한국 전통 역사박물관이라고 평가되며, 한국의 미를 잘 간직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경북의 대표적인 한옥마을이 ‘하회마을’이라면 경남에는 ‘남사마을’이 있다고 자랑할 정도다.
오지 중의 오지에서 번듯한 기와집이 여러 채 모여 있는 점과 다른 마을처럼 특정 성씨의 집성촌이 아니라는 점이 이 마을의 특징이다. 우선 이 마을에는 성주이씨, 밀양박씨, 진양하씨, 밀양손씨, 연일정씨, 진양강씨, 전주최씨, 현풍곽씨 등 여러 성씨가 살고 있다.
많은 성씨가 수백 년 간 마을 전통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양반 가문의 반가를 유지할 수 있는 경제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또한 고려말 하즙(河楫, 1303?1380)과 하윤원(河允源, 1322?1376)부자, 그의 외손 통정공 강회백(姜淮伯, 1357?1402), 강회중(姜淮仲, ??1441), 영의정을 지낸 하연(河演, 1376?1453) 등이 이 마을에서 태어난 것을 비롯해 많은 가문의 선비가 과거에 급제해 명성을 유지했던 것도 큰 요인이다.
근현대에 들어서도 이 마을에서는 많은 인재가 배출됐다. 구한말 애국지사인 곽종석(郭鐘錫, 1846?1919)과 국악운동의 선구자인 기산 박헌봉(朴憲鳳, 1906?1977) 등이 그 주인공이다. 결속력이 남다른 씨족마을이 근본이던 조선시대에 많은 성씨들이 한 마을을 이루면서 동고동락했다는 것은 마을 자체가 특이한 내력을 갖고 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옛 담이 아름다운 마을
남사마을은 마을 북쪽의 실개천을 경계로 상사마을과 인접해 있다. 과거 행정구역상으로는 개울을 경계로 남사는 ‘진주’, 상사는 ‘단성’에 속했다. 한때는 두 마을이 합쳐져 ‘사월마을’로 불려지기도 했다.
행정구역이 산청군으로 통합되면서 남사마을과 상사마을로 분리됐지만 두 마을을 사월(沙斜) 또는 남사(南沙)라고 부르며 두 마을을 함께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동제를 지낼 때에도 두 마을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는데 이곳에서 다루는 전통마을은 엄밀하게 남사마을을 뜻한다.
이호선 씨가 그린 남사 예담마을 전경. 박찬종 제공
한국 근현대사를 돌이켜보면 남사마을이 현재 같은 모습을 간직하는 것이야말로 놀라운 일이다. 남사마을은 광복 직후 혼란기에 극심한 좌우대립을 겪었던 곳이다. 또 한국전쟁 때 연합군이 대규모 폭격해 상당 부분이 파괴되기도 했다. 특히 마을 중앙 부분에 99칸의 최씨대가 집이 있었는데 완전히 파괴돼 공터로 남아있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3년 ‘전통테마마을’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은 마을의 역사가 오래됐고, 흙돌담과 돌담이 공존하는 조화의 아름다움이 과거부터 계속 이어져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담은 마을에 살던 사람들의 위계에 의해 달라진다. 반가 집은 주로 약 2m 정도로 말을 타고 가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담장을 만들었고, 서민들이 거주하는 민가는 돌담을 주로 사용했다. 담의 총 길이는 5.7km에 이르는데, 이 중 3.2km가 대한민국등록문화재 281호로 지정됐다. 예담촌이라는 이름도 ‘옛 담 마을’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반가의 건축물 주위에 쌓은 토담은 대체로 하부는 길이 50?60cm 정도의 큰 막돌을 2?3층 메쌓기 한 후 그 위에 황토를 편 다음 막돌을 일정한 간격으로 벌려놓고 돌 사이에 황토를 채워 넣어 쌓았다.
담 상부는 전통한식기와 또는 평기와를 사용하였다. 이들 토담과 돌담은 남사천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강돌을 사용했다. 사양정사와 최씨고가 골목 등은 누구나 걸어보고 싶은 골목길로 추천된다.
X자 회화나무 통과하면 부부의 정이 살뜰~ [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제3부]<8-2>
경남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남사마을 예담촌
남사마을의 기본은 지리산이다. 이 산은 ‘어리석은 사람(愚者)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智者)으로 변한다’ 해서 ‘지리산(智異山)’이라 불린.
1967년 우리나라 최초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지리산국립공원(智異山國立公園)은 국내 국립공원 중 최대의 규모다. 남한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인 천왕봉(天王峰, 1915.4m) 위세에 걸맞게 그 주변으로 화엄사와 같은 대사찰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지리산 자체가 한국 남부의 문화권을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리산을 배경으로 한 남사마을 예담촌은 풍수지리적으로 쌍룡이 머리와 꼬리를 맞물고 있는 ‘쌍룡교구‘ 형상이다. 산과 마을 아래로는 강이 휘감아 천혜의 입지를 이루고 있다. 경남 산청군청 제공
이런 명산의 최고봉(천왕봉)에서 100여 리를 흘러나온 봉우리 ‘니구산’을 배경으로 한 마을이 과거에 ‘여사촌’으로 불렸던 남사마을이다. 풍수적으로 해석할 때 니구산이 암룡의 머리, 당산이 숫룡의 머리가 돼 서로 머리와 꼬리를 무는 형상이다. 이를 ‘쌍룡교구’의 모습이라고 부른다. 이 아래를 휘감아 흐르는 ‘사수천’이 쌍룡교구와 조화를 이루면서 넓은 들과 울창한 숲이 주위를 둘러친 천혜적인 입지를 갖추고 있다.
남사마을 생김새는 반달 모양인데 그 중심부에는 집을 들이지 않았다. ‘달이 차면 기운다’라는 말이 있어 반달 가운데 집을 짓지 않고 그대로 뒀기 때문이다. 마을 중심부로 들어가는 길에 있는 주차장이 바로 반달의 중앙 부분이다.
한편 상사마을은 배가 물 위에 떠가는 ‘행주형(行舟形)’이다. 우리나라 여러 마을이 행주형인데 이런 지형에 우물을 파면 배가 가라앉는다고 생각해 우물을 파지 않았다. 상사마을도 같은 이유로 우물 파기를 금했다. 참고로 우리나라에 행주형 마을이 많은 이유는 사람들이 이 지형을 명당으로 여겨 선호했기 때문이다.
●남사마을 스타, 600년 감나무·700년 매화나무·300년 회화나무
남사마을에서는 남다른 맛이 느껴지는데, 이는 마을 ‘간판스타’라고도 볼 수 있는 세 그루의 고목 때문이다.
첫 번째 고목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감나무로 수령이 약 600년, 열 갑자를 지낸 것이다. 이 나무에서는 지금도 감이 열리는데 전형적인 ‘반시(감)’로 산청 곶감의 원종이다. 이 고목은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하연이 7세 때 심었다고 알려지며 하씨고가 안에 있다.
두 번째 고목은 약 700년 된 매화나무다. 이 나무 역시 하씨고가에 있으며 고려 말의 문신 원정공 하즙(하연의 증조할아버지, 1303?1380)이 심었으므로 ‘원정매’라고 부른다.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고관들이 심은 다른 매화나무 중에서도 ‘원정매’가 가장 기품 있는 나무로 알려진다.
하씨고가에 있는 600년 된 감나무(왼쪽)와 700년 된 매화나무(오른쪽). 감나무에는 지금도 감이 열리며, 매화나무는 원래 고목이 고사해 시멘트로 원형을 만들어놓은 상태다. 이종호 제공
아쉽게도 원래 고목은 고사해 시멘트로 원형을 만들어 원정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들 주위로 새로이 가지가 내려 보는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 더욱이 옆으로 틔워진 곁마당에도 후대에 심은, 제법 가지가 실한 홍매가 그득하다. 비석에 적혀 있는 영매시는 다음과 같다.
‘집 앞에 일찍 심은 한그루 매화 섣달 찬 겨울에도 아리따운 꽃망울 나를 위해 피었네. 밝은 창에 글 읽으며 향 피우고 앉았으니 한 점 티끌도 오는 것이 없더라.’
참고로 지리산 줄기 산청에는 ‘삼매(三梅)’가 있다. 정당매(政堂梅), 남명매(南冥梅), 원정매(元正梅)가 주인공이다. 정당매는 고려 말 통정 강회백(1357?1402)이 어릴 때 ‘단속사’ 터에 심은 것으로 수령이 640여 년에 달한다. 강회백이 자라서 정당문학 겸 대사헌에 오르자 이 나무가 정당매로 불리게 됐다.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뤘던 남명 조식(1501?1572)이 말년에 산천재 마당 한가운데 심은 매화가 남명매다. 산천재는 조식이 제자를 양성하던 곳인데, 이곳에 있는 남명매에서는 450년 세월의 고고함이 흘러나온다.
이씨고가에 있는 300년 된 회화나무의 모습. 두 나무가 서로 엇갈려서 자라나 X형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 아래를 지나가면 부부가 백년해로한다는 말이 전해지며 이 마을 상징이기도 하다. 이종호 제공
세 번째 고목은 300년 된 회화나무다. 마을 초입 이상택고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18호)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나무인데 X자로 몸을 포갠 것이 인상적이다. 이 나무 아래를 통과하면 부부가 백년해로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남사마을의 상징이기도 하다. 서로 엇갈려 자라는 회화나무에 감탄하지 않는 사람은 감정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신할머니 배꼽에 손 넣고 ‘소원을 말해봐~’ [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제3부]<8-3>
경남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남사마을 예담촌
예담촌에서 가장 오래된 성주이씨고가다. 이 마을 초입에 자리 잡고 있으며, X자 회화나무를 지나면 입구가 나온다. 이종호 제공
마을 초입에 자리 한 성주이씨고가 즉, ‘이상택고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18호)는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다.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 어귀에 남사 예담촌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X자형 회화나무가 서 있다. 회화나무는 보통 곧게 자라는데 이 나무는 특이하게 굽어 X자형으로 수문장 같은 역할을 한다.
이 나무를 통과해 나지막한 돌담 끝에 있는 대문을 지나면 건축된 지 약 200여 년이 된 집이 나온다. 사랑채·익랑채·곡간채가 안채를 중심으로 해 ‘ㅁ’자로 배치됐으며, 가운데 왼편으로 사당이 있다.
이씨고가 안쪽에 자리 잡은 또 하나의 회화나무의 모습. 이 나무는 ‘삼신할머니‘라고도 불리며 가운데 배꼽 부분에 손을 넣고 소원을 빌면 들어준다고 전해진다. 이종호 제공
대문에 들어서면 바로 사랑 마당이 나오는데, 이곳에 또 한 그루의 거대한 회화나무가 서 있다. 삼신할머니로도 불리는 이 나무는 마을에서 가장 키가 크며 수령은 약 450년이다. 몸통에 난 배꼽 구멍과 뿌리 위로 돋아난 돌기가 음양의 상징처럼 부각돼 보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배꼽에 손을 넣고 소원을 빈다고 한다.
대문은 북쪽을 향해 조금 낮게 만들었는데, 이는 왕이 있는 방향으로 머리를 숙여서 충성심을 다지기 위한 것이다.
●‘ㅁ’자 형태로 배치… 세월에 따른 한옥 비교 가능
사랑 마당의 북쪽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 반의 팔작지붕의 사랑채가 동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계자난간(鷄子欄干, 닭다리 모양의 난간 기둥) 모양의 사랑채는 안채와 앞뒤로 나란히 배치됐다. 사당은 곳간채 뒤쪽에 있지만 안채에서 보면 왼쪽 전면에 있고, 시각적으로 막혀 있는 특이한 배치를 보인다.
안채는 전형적인 남부 일자형 구조로 정면 6칸과 측면 3칸 규모의 집이다. 앞뒤로 툇마루가 있고, 건넌방 툇마루를 대청보다 20cm 가량 올리고 그 밑에 아궁이를 설치했다. 일반적인 사대부 주택에서는 부엌이 사당 방향과 반대편에 있지만, 이 집에서는 사당과 같은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안채는 전형적인 한옥 모습인 반면 사랑채는 과장된 규모와 장식으로 돼 있다. 20세기 초반에 지어진 사랑채에 다소 위세를 드러내려 했기 때문이다. 사랑채와 안채가 건설된 연대가 거의 200여 년 정도 차이가 있으므로 세월에 따른 한옥의 구조적?조형적 차이를 비교하기 좋다.
익랑채는 초가지붕으로 정면 4칸과 측면 1칸 반 크기다. 동향인데 남쪽에 부엌과 방, 대청 등을 배치하고 앞면에는 개방된 툇마루를 만들었다. 곳간채 뒤에 있는 사당은 맞배지붕으로 붉은 옻칠을 한 4개의 위패(아버지, 조부, 증조부, 고조부)를 좌측에서 우측으로 나란히 모셨다.
같은 ‘ㅁ’자 형태의 집인데도 중부지방과 달리 이곳 남부지역은 덥고 습한 날씨를 반영했다. 공기의 흐름을 원활히 하기 위해 각 건물 사이에 공간을 둬 각기 독채로 지은 것이다.
명당 중의 명당에 위치한 탓인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마을이 불바다가 되었을 때도 이씨고가는 멀쩡했다고 한다.
이씨고가의 안채(오른쪽)와 익랑채(왼쪽)의 모습. 안채는 전형적인 남부형 일자 구조를 하고 있고, 익랑채는 초가집이다. 이종호 제공
이씨고자의 사랑채는 다소 과장되고 큰 규모로 만들어졌다. 안채보다 200년 정도 뒤에 지어져 건축 형태를 비교하기 좋다. 이종호 제공
●‘다정도 병인양 하여….’ 이조년·이제의 사연
남사마을에서 일가를 이뤘던 성주이씨 가문에는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가보가 있다. 조선개국 때 공을 세운 정무공 이제에게 내린 ‘이제개국공신교서’로 보물 1294호다.
이제는 이성계의 사위로 셋째 딸 경순공주와 혼인한 인물이다. 정몽주 격살에 참여해 개국 1등 공신으로 책록, ‘흥안군’에 봉해지고 ‘의흥친군위절제사’가 되어 한마디로 남사마을의 명성을 높이는데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이제의 아버지 이조년(李兆年, 1269~1343)은 한국인들에게 매우 잘 알려진 사람이다. 한국인이라면 거의 모두 외우고 있을 ‘다정가’의 작자이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데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양 잠 못 들어 하노라’
조선 후기엔 ‘2층 화장실’ 썼다 [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제3부]<8-4>
경남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남사마을 예담촌
1920년대 지어진 최씨고가의 입구 모습. 일제강점기의 실용적인 구조가 도입돼 당대 반가 모습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가 된다. 이종호 제공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17호로 지정된 최씨고가는 1920년에 지어졌으며, 3겹으로 된 사랑채 지붕이 크기로 유명하다. 부농이었던 주인의 상황을 말해주듯 이집은 집안 위세를 과시하는 화려한 모양새를 강조한다.
전통적인 남부지방의 사대부 한옥이지만 곳곳에 일제강점기에 물밀 듯이 들어온 실용적인 구조를 도입했다. 그 덕분에 한옥 특유의 안정적이고 소박한 멋은 없지만 당대의 반가를 보여주는 좋은 자료가 된다.
건물은 안채를 중심으로 사랑채와 익랑채가 ‘ㅁ’자형으로 배치됐으며 사랑채 좌우에 중문이 두 곳에 설치돼 있다. 사랑채는 정면 5칸과 측면 2칸에 앞뒤 툇간이 있으며 안채와 마찬가지로 5량가로 조성된 팔작지붕이며 겹집형식이다.
동쪽 중문을 통과하면 안채가 눈에 들어오지만 서쪽 중문을 지날 경우 ‘ㄱ’자 담으로 차단되어 안채와 익랑채가 보이지 않는다. 익랑채는 정면 4칸과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인데 이와 같은 차단은 전형적인 유교 사상에 따라 남녀의 생활공간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다.
안채는 정면 6칸과 측면 3칸 규모로 앞뒤 툇간이 있고 5량가로 조성된 팔작지?이다. 안채에는 쇠방울 하나가 매달려 있는데, 이는 사랑채와 연락하기 위함이다. 방울이 울릴 때마다 사랑채로 필요한 주안상들을 준비해 달라는 신호를 보내는 용도다.
최씨고가의 안채(왼쪽)와 익랑채(오른쪽)의 모습. 안채를 중심으로 사랑채와 익랑채가 ㅁ자 모영으로 배치된 걸 볼 수 있다. 이종호 제공
●‘똥’을 좋은 ‘비료’로 만드는 ‘2층 뒷간’
최씨고가의 뒷간은 여느 변소와는 달리 2층으로 되어있어 계단을 올라가야한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있었던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를 따른 것이다. 이 책에서는 위생적이고 효과적으로 인분을 활용하려면 올려 만드는 게 좋다고 설명하고 있다.
2층 화장실에서 나온 변(便)이 아래에 자리한 흙 상자에 담겨지면, 그 위에 재를 덮어 냄새를 줄이고 발효를 촉진시켜 유용한 비료로 사용하는 것이다. 또한 뒷간 남쪽으로 홈을 내 오줌을 누면 자연스레 흘러나와 고이도록 둥글게 구덩이를 팠다. 당대 최고 비료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는 아이디어다. 이런 화장실은 이상택고가에서도 볼 수 있지만 화장실 문은 이상택고가에만 있다.
일반적으로 화장실은 남녀유별한데 여자용은 안채 인근에 있고 남자용은 건물 밖에 있다. 최씨고가의 경우 남자용 화장실이 두 개이며 하나는 주인가족 전용이다.
●장독대 옆 비상문, ‘여자의 외출을 허하라’
최씨고가의 대문 빗장은 거북이 모양으로 장식돼 있다. 왼쪽 목을 당기면 문을 열 수 있으며 이는 무병장수를 기원한 것이다. 이종호 제공
이 집에서 특이한 것은 안채 뒤편에 마련된 장독대에 작은 문이다. 조선시대 여자들은 집안 가장 깊숙한 곳에서 폐쇄적인 생활을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 집은 여자들이 대문을 통하지 않고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비상문을 만든 것이다. 이런 예는 조선시대에서 특별한 사례이며 엄밀한 의미에서 여자들의 자유로운 외출 자유를 인정했다는 것을 뜻이다.
다른 아이디어도 찾아 볼 수 있다. 우선 처마 밑에 선반 같은 구조가 특이한데, 이것은 천연 냉장고 역할을 하던 곳이다. 처마 밑이 다른 곳보다 시원하다는 점을 이용한 선조의 슬기가 엿보인다.
대문에 있는 빗장이 남다른 거북 모양도 재미있다. 왼쪽의 목을 당기면 문을 열 수 있는데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주인의 마음이 담겨있다.
공자를 사랑한 양반들, ‘집’을 보니... [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제3부]<8-5>
경남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남사마을 예담촌
연일정씨고가의 사랑채이자 위패를 모신 재실인 ‘사양정사‘의 모습. 이 건물은 선조들을 추모하기 위해 1920년대에 지었으며 규모가 크고 위세가 당당하다. 이종호 제공
연일 정씨의 사랑채이자 위패를 모신 재실인 ‘사양정사(泗陽精舍, 문화재자료 453호)’도 만만찮은 역사적 고가다.
사양정사는 ‘사수천(泗水川)’ 남쪽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 ‘사수(泗水)’는 공자의 고향인 중국 산동성 곡부에 있는 강 이름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공자를 흠모하는 뜻으로 남사마을 뒤를 감싸고 있는 개울을 사수라고 불렀다.
연일 정씨는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이며, 조선시대 사육신 사건의 주역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연일정씨가 남사마을에 토대를 마련한 것은 구한말의 유학자 계제 정제용(1865~1907)의 아들 정덕영과 장손 정정화가 남사마을로 이전한 후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이 선친을 추모하기 위해 1920년대에 마련한 거대한 집이 사양정사다. 돌담장과 감나무가 잘 어우러진 골목을 볼 수 있는 사양정사는 그야말로 당당하다.
사양정사는 정면 7칸과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며 보통 건물 2?3배나 되는 단일 건물로는 매우 큰 규모다. 궁궐 회랑처럼 길고 우람한데 천장이 높고 부재가 건실하며 치목이 정교할 뿐 아니라 다락과 벽장 등 수납공간을 풍부하게 설치됐다. 당시 새로운 건축 재료인 유리를 사용해 근대기 한옥의 변화된 면모를 보여주며 내부에는 이중 다락도 있다.
연일정씨고가의 정문(왼쪽)과 후문(오른쪽)의 모습. 두 대문 모두 솟을대문으로 만들어져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이종호 제공
연일정씨 고가는 전면과 후면에 대문이 있는데 이들 모두 솟을대문으로 만들었다. 솟을대문 자체가 집의 위세를 보여주는 증표인데, 정면뿐 아니라 후면도 솟을대문을 만들었다는 것은 주인이 그만큼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면 즉, 주입구의 경우 솟을대문 옆에 세워진 맞배지붕 형식의 기와를 얹은 행랑채는 6칸이나 되는 장대한 규모다. 언뜻 보면 솟을삼문 같은 위엄이 있는데 충절을 상징하는 홍살을 넣은 게 특징이다.
연일정씨고가에 있는 배롱나무(왼쪽)와 선명당(오른쪽)의 모습. 배롱나무는 이 마을에서 수령이 가장 오래된 것이며, 선명당은 제사를 지내던 공간이다. 이종호 제공
원형기둥을 세웠는데 이는 과거 민가에서 사용할 수 없던 것이다. 건축연대가 20세기 초반이라는 시대적 여건 덕분에 이런 형태가 가능했을 것이다. 마당 건너에는 ‘선명당(善鳴堂)’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으므로 대청은 제사를 지내던 공간답게 엄숙한 느낌이 곳곳에 배이도록 계획했다.
토석담은 담 중간 중간에 흙이 빠져 나갔다. 이런 형태는 퇴색해도 아름다운 한옥의 남다른 멋을 보여주는 예이다. 특히 이 집의 창호를 보면 한옥을 얼마나 고급스럽고 품위 있게 만들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집 안에 120년 된 배롱나무가 있는데 마을의 배롱나무 중 가장 오랜 수령을 자랑한다.
●원나라에 더 당당했던 원정공 하즙의 집
고려 시대에 원나라 관리보다 백성들을 위해 공정한 정사를 펼첬던 원정공 하즙이 살던 하씨고가의 모습이다. 이종호 제공
감나무와 매화나무가 일품인 진주하씨 원정공 하즙의 고택인 ‘하씨고가’의 대청마루에는 ‘원정구려(元正舊廬)’라는 편액이 있다. 이 글은 대원군의 친필로 ‘원정공이 살던 옛집’이란 의미다. 당대 최고의 실력자인 대원군이 ‘원정공의 옛집’이라고 친필을 내릴 정도로 한말 남사마을 진양 하씨들의 명성이 남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정공 하즙은 1324년 진사를 거쳐 문과에 급제했다. 당시 원나라가 고려 조정에 감독관을 둬 내정을 간섭했다. 고려에서는 몽골 관리보다 이들에 빌붙어 사는 사람들에 대한 원성이 높았고, 사헌부에서 이들의 만행을 규제했다. 하즙도 그 당시 사헌부 관원 중 한 사람이었다.
그 무렵 행주지방 기자오의 딸이 원나라 순제의 제2왕비로 왕자를 낳은 뒤 기씨 일가들이 안하무인의 권세를 누리기 시작했다. 하즙은 이를 지적해 밉보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았다. 심지어 기왕후의 인척을 매질하고 감옥에서 죽게 할 정도로 강개를 보이기도 했다.
하씨고가에 있는 600년 된 감나무(왼쪽)와 700년 된 매화나무(오른쪽). 감나무에는 지금도 감이 열리며, 매화나무는 원래 고목이 고사해 시멘트로 원형을 만들어놓은 상태다. 이종호 제공
하즙의 증손인 하연(河演, 1376?1453)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정몽주의 문인이다. 태조 5년(1396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후 봉상시녹사(奉常寺錄事)와 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을 거쳤다.
세종 즉위 후에는 예조참판·대사헌·경상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대제학·좌찬성·우의정·좌의정·영의정에 오른 정통관료다. 그 경력을 보더라도 관운이 매우 좋은 사람으로 진주의 종천서원, 합천의 신천서원에 배향됐다. 단종 2년(1454)에는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어 진주하씨의 명성을 드높이기도 했다.
감나무는 하연이 어렸을 때 직접 심은 나무라 그 중요성이 배가됐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나무의 건강에 따라 마을의 길흉화복이 점쳐졌다. 특히 하연이 글을 읽을 때 날씨가 춥고 비바람이 치면 도깨비불이 나와서 감나무를 보호했는데, 도깨비가 나타나면 하씨 집안의 경사와 가문의 번성을 가져왔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 길을 따라가보니... [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제3부]<8-6>
경남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남사마을 예담촌
면우 곽종석이 벌린 독립운동 등을 기리기 위해 세운 ‘이동서당‘의 모습(왼쪽)과 ‘곽종석 유허비‘의 모습(오른쪽). 이종호 제공
문화재자료 196호인 ‘이동서당(尼東書堂)’은 면우 곽종석이 벌린 조국의 독립운동 등을 기리기 위해 유림과 제자들이 건설했다. 곽종석은 고종 초기 음보(蔭補)로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이 됐으며, 1903년 비서원승(秘書院丞), 이어서 참찬(參贊)으로 시독관(侍讀官)을 겸했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폐기와 조약 체결에 참여한 매국노를 처형하라고 상소했다. 1910년 국권이 침탈되자 고향에서 은거했는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 유림(儒林)들의 궐기를 호소하고, 거창(居昌)에서 문하생인 심산 김창숙(金昌淑, 1879~1962)과 협의해 파리의 만국평화회의에 독립호소문을 보냈다. 이 때문에 투옥됐고 그 후유증으로 74세에 세상을 하직했다.
이동서당 대문에는 ‘일직문(一直門)이란 현판을 달고 있고, 대문에 들어서면 강당·서재· 사우로 나뉜 건물을 볼 수 있다. 지붕을 옆면으로 보았을 때 강당은 정면 5칸과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이다. 서재는 사다리꼴, 사우는 사람 인(人)자 모양으로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도 특이하다.
남사마을 사람들은 일제강점기에도 독립운동을 한 곽종석을 기리기 위한 서당을 건립할 정도로 기개가 남달랐다. 현재 이동서당 옆 부지에 ‘유림독립운동기념관’을 새로 짓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길을 따라
이사재의 모습. 이사재는 조선 전기 ‘임꺽정의 난’ 진압에 공을 세운 송월당 박호원의 재실이다. 이종호 제공
남사마을 남사천을 건너면 경북문화재 328호 지정된 ‘이사재(尼泗齋)’를 만날 수 있다. 이사재는 조선전기 토포사의 종사관으로 ‘임꺽정의 난’ 진압에 공을 세운 송월당 박호원(朴好元, 1527~1584)의 재실이다.
이사재는 전후면 반 칸씩을 퇴간으로 한 정면 4칸과 측면 2칸 규모다. 중앙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 1칸씩 방을 만들고, 좌우 각 반 칸은 마루로 꾸몄다. 마루 부분에는 모두 계자난간을 설치했다. 세 짝 분합문과 창살의 조형미가 수려하고, 5량가로 서까래만 쓴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이처럼 조선 후기 건축양식 특징이 잘 적용돼 옆에 있는 연못과 잘 어울린다.
이 건물은 1857년에 건립됐는데 정문 앞에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 중 이곳을 지났다는 행로 표석이 있다.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위해 권율 도원수부가 있는 청수역(淸水驛)을 떠나 합천으로 가던 길에 이사재에서 하룻밤을 유숙했기 때문이다. 충무공이 억수처럼 내리는 빗속에서 박호원의 노비 집에서 하루를 묵었다는 기록이 ‘난중일기’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이사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던 시절 한 차례 묵어간 곳으로도 유명하다. 사진은 충무공이 묵었던 장소다. 이종호 제공
‘정유년(1597) 6월 1일 경신, 비가 계속 내렸다. 일찍 출발하여 청수역 시냇가 정자에 도착해 말을 쉬게 했다. 저물녘에 단성과 진주 경계에 있는 박호원의 농노 집에 투숙했다. 주인이 반갑게 맞이했으나 잠자리가 좋지 못하여 간신히 밤을 지냈다. 비는 밤새도록 멎지 않았다.’
박호원은 명종에서 선조에 이르기까지 조정에서 활동한 인물로 대사헌과 호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이순신 장군은 이 지역의 유력한 집안인 박호원의 내력을 알고 이곳에서 유숙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박찬종 예담촌 사무장은 ‘난중일기’에 주인이 반갑게 맞았지만 잠자리가 불편했다고 쓴 것은 상당히 환대를 받았으나 죄인 신분이라 ‘극진한 대접 속에 잘 잤다’고 표현하기 어려워서였을 라고 추정했다.
우리나라 가장 아름다운 마을서 먹는 ‘어탕국수’ 맛은? [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제3부]<8-7>
경남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남사마을 예담촌
예담촌의 아름다운 길‘예담길‘ 입구(왼쪽)와 입구주변 남사천에 있는 전설의 바위(오른쪽). 위쪽 바위에는 어미거북이 살고, 아래쪽 바위에는 두 마리의 새끼거북이 산다고 전해진다. 이종호 제공
이사재 우측으로 남사 예담촌을 한눈에 조망하면서 걸을 수 있는 ‘예담길’이 있다. 이 길은 약 2.4km의 둘레길로 마을과 아름다운 하천을 따라 정겹게 걸을 수 있으므로 시간을 할애해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예담길 입구 남사천에는 흥미로운 전설을 가진 큰 바위 2개가 있다. 이사재로 들어가는 다리 옆에 있는 새끼 거북 바위다. 여기서 약 100m 떨어진 큰 바위에 어미 거북이 살고 있어 새끼 거북이 있는 바위를 항상 바라보고 있다고 전한다. 이는 아무리 후대에 위대해지더라도 부모의 보살핌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나라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1호
‘원정공송헌하선생유적비’의 반대 쪽 마을 입구에 남사마을이 자랑하는 ‘사효재(思孝齋)’가 있다. 사효재는 이제의 8대손 이윤헌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1687년 마을에 천연두가 만연하자 이윤헌은 부모를 모시고 산촌으로 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산적이 부친에게 칼을 들이대자 그는 부친을 보호하려고 막아서다가 온몸에 칼을 맞고 팔이 잘렸다. 그 상처로 8년 뒤 사망하자 정부에서 정려를 건립하고 실행록을 종가에 소장토록 했다. 사효재는 현재 ‘예담촌맛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외에도 이씨문중 월포공이 과거에 급제하고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후학을 가르치던 ‘초포정사(草浦精舍)’, 이씨문중 유생이 공부하던 ‘내현재(乃見齋)’, 박씨문중의 서재였던 ‘삼백헌’, 박씨문중 유생이 공부하던 ‘망추정(望楸亭)’도 남사마을의 역사를 담고 있다.
남사마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1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이는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한 게 아니라 프랑스에서 시작한 기구에서 정한 것이다.
1982년 프랑스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연합회’라는 기구를 구성해 자국의 작은 농촌 마을들을 지정하기 시작했다. 본래 프랑스 농촌의 아름다운 경관과 문화유산을 알려 관광을 활성화시키는 게 목적이었는데, 이후 이탈리아와 벨기에, 캐나다, 일본 등도 동참하게 됐다. 우리나라도 여기에 참가하면서 남사마을을 우리나라에서 가장아름다운 마을 1호로 발표한 것이다.
●1급수 물고기로 만든 ‘어탕국수’ 맛은?
산청에서 잘 알려진 음식은 ‘어탕국수’다. 어탕국수는 모래무지·피라미·꺽지·붕어·미꾸라지 등을 잡아 뼈를 추린 뒤 풋고추·호박·미나리 등의 채소를 넣고 푹 끓인 ‘어탕’에 국수를 말아 만든다. 1급수인 경호강이 흐르는 산청이므로 1급수 물고기를 쉽게 잡는 건 당연한 일이다. 전형적인 경상도의 맛을 즐길 수 있는 어탕을 먹고 어떤 이는 ‘어탕국수야말로 보약 한 첩을 먹은 것 같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인근 단성면 사월리의 ‘목면시배유지’는 고려말 공민왕 때 문익점(文益漸)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면화(棉花)를 재배한 곳이다. 또 석가모니 다음으로 사리가 많이 나왔다는 성철스님 생가와 옆에 겁외사(劫外寺)도 자리하고 있다.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릉으로 추정되는 피라미드 무덤이 이 근처에 있으며 보물 72호인 단속사지동?서삼층석탑, 대원사다층석탑(보물 1112호)이 있는 대원사, 법계사삼층석탑(보물 473호), 삼청대포리삼층석탑(보물 1114호) 등이 유명하다.
참고문헌: 『궁궐의 우리나무』, 박상진, 눌와, 2002 『한옥마을』, 신광철, 한문화사, 2011 『남사예담촌』, 이효신, 산청군농업기술센터, 2012 「세월도 비켜 간 산청 남사마을」, 경남은행, 2010 「이사재」, 강쥐, 우리가사는세상, 2010.10.08 「산청 남사마을」, 남동우, 금강신문, 2012.02.12 「[한국의 美] 경남 산청 남사예담촌, 돌담길 따라 옛이야기 소곤대는 마을」, 최갑수, KB국민은행 사외보 GOLD&WISE, 2012. 07.05
이종호 한국과학저술인협회 부회장/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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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