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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시죠?
요즘 서평을 자주 남기네요. 사실 독서한 책은 감상문의 횟수보다 많습니다. 하지만 서평을 남겨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하는 작품은 쉽게 만나지 못하죠.
이번에 독서한 작품은 3가지의 반전이 있는, 정말이지 고고한 놀이판의 주역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책입니다.
도서명: 이토록 고고한 연예
저자: 김탁환
* 이 책은 아이프리 도서관 9번 문학에 4번 일반소설에서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 소개글 서평
김탁환, 이 작가의 작품으로 처음 본 작품은 ‘부여 현감 귀신 체포기’라는 책이었다. 전우치, 뱀파이어, 현대와 조선 시대, 인간과 귀신 등의 소재가 어우러진 이야기. 그 후로는 이 작가의 책을 읽은 적이 없다. ‘부여 현감 귀신 체포기’ 말고는 취향을 적중한 제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우연히 ‘이토록 고고한 연예’라는 작품을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낯익은 작가명에 한 번 돌아보았고, ‘연예’라는 제목에 얽힌 뜻이 뭘까 호기심에 귀를 세웠다. 그리고 소개글을 보고 한 번 펼쳐볼까 싶어 다운을 받았다.
달문의 반전 셋! 빈자이나 넉넉하고, 추하되 아름다우며, 글줄 하나 모르는 일자무식이나 누구보다 현명한
달문은 실제 존재했던 인물이다. 그가 등장한 문헌은 여남 박지원이 쓴 ‘광문자전’이다. 여기서 이해를 돕기 위해 저자 소개를 좀 하겠다.
박지원은 조선 시대의 실학자로 그가 집필한 책으로 가장 유명한 건 ‘열하일기’가 있다. 물론 이외에도 많은 책을 남겼겠지만 우리가 흔히 아는 건 ‘열하일기’뿐이다. 그래서 그가 광문 혹은 달문이라는 인물에 대해 기록한 ‘광문자전’을 썼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여기서 광문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런 한편 달문으로도 불린, 이 작품에 주인공인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기실 이 책 자체가 달문에 관해 다루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시점에서 자신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모독’이라는 필명을 쓰는 제3의 눈으로 달문에 대해 전한다.
모독, 그는 동대문에서 인삼 가게를 크게 하는 천송의 아들로, 아버지 모르게, 또 숙부 해송의 방관 하에 매설가, 즉 오늘날로 따지자면 소설가를 목표로 하는 인물이다. 그가 본 달문은 땡전 한 푼 없는 거지였고, 사농공상으로 나뉜 당시의 신분 가운데 가장 비천하다는 광대였고, 세상에 다시는 없을 만큼 추한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달문은 이렇게 별볼일 없는 인물이면서도 그에게는 언제나 사람들이 모였고, 그만큼 많은 이야기가 태어났고, 가장 낮은 자리부터 가장 높은 자리의 사람들까지 두루 넓게 사랑과 신임을 받은 인물이었다. 더불어 고관대작 모두가 자신의 곁에 머물길 바랐으나, 끝내 가난하고 힘없고 빈곤한 이들 옆을 떠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이런 달문에게는 3가지 반전이 존재한다.
“부자라니? 산대놀이로 번 돈을 늙은 재인들에게 주지 않았는가?”
“돈을 많이 지닌 자가 부자가 아니라, 그 돈을 남에게 많이 준 자가 부자입니다. 오늘 밤, 저보다 더 많은 돈을, 그 돈이 꼭 필요한 이들에게 나눠 준 사람은 없겠죠? 그러니까 오늘은 제가 이 나라에서 제일 부자인 겁니다.”
달문은 수표교 아래서 생활하던 거지였다. 더럽고 지져분하고 밥을 빌어먹기 위해 길바닥 한가운데서 재주를 팔고 판을 벌이는 유리걸식 광대. 동시에 수표교 거지 무리를 이끄는 ‘왕초’이기도 했다. 무리의 우두머리든 왕초든, 가장 일천한 거지임에는 변함이 없다. 이 글의 관찰자인 모독과 마주칠 때도 그는 춤을 추고 노래하며 구걸을 하던 중이었다.
모독은 우연한 만남과 호기심에 달문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달문은 수표교 거지 무리를 떠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에게 상업을 배우며 인삼 가게를 하던 모독에게 멍석 2장을 빌리게 된다. 그리고 달문은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인삼 가게 점원으로 취직을 한다.
모독은 물욕이 없고, 소유의 개념도 없고, 마냥 선량한 사람처럼 구는 거지 출신의 달문이 영 미덥지가 않다. 그래서 인삼 가게 점원으로 받아들였으면서도 달문을 계속 시험하고 의심하고 속을 캐내려 한다. 그러나 달문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게에 새로운 방식을 도입해 사업을 번창시킨다. 그가 쓴 전략은 인삼에 ‘이야기’를 덧입히는 것, 요즘 말로 하면 스토리텔링을 이용한 영업이었다. “이 인삼은 저 인왕산에서 햇볕을 받고 자란 놈으로써, 몇 번의 고비를 겪고.... 그리하여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이었다.”라는 재담을 선보이면서 손님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그런 한편 우연히 찾아온 기회로 포도청과 군기시, 의금부와 형조가 편을 갈라 대결하는 산대놀이의 우익에 으뜸 광대로 서게 되고, 제법 짭짤한 이문을 거두게 된다. 물론 의금부와 형조는 달문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좌익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설득하고 회유하고 은근 협박도 했다. 그러나 달문은 이미 약속을 했다며 끝까지 신의를 굽히지 않았다. 결국 심하게 치졸한 훼방 속에서도 산대놀이는 벌어졌고 달문은 끝내 최고의 연예를 선보인다.
하지만 달문은 그 공연을 통해 번 수입을 흔쾌히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이들, 먼 훗날 자신의 미래가 될 수 있는 이들에게 일말의 주저나 망설임도 없이 나눠준다. 그러면서 위의 저 대사를 친다. 거지, 돈을 만지기 요원한 팔자, 그런 사람이 선뜻 자신의 수입 전부를 쏟아 스승도 아니요, 가족도 아니요, 그저 한때 이 나라에서 으뜸인 재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쾌척하는 게 어디 가능한 일일까?
개인적으로 이 대목에서 모독이 달문을 왜 그렇게 신용하지 못했는지 일부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여유가 있으면 말을 안 한다. 달문에게는 그런 여유도 없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이기적이다. 아무리 이타심이 넘쳐도 일단 자신이 살아야 남이 있는 거 아닌가? 자신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면서 타인을 챙기는 건 어쩐지 너무 바보 같다. 그런 의미에서 달문의 행동은 퍽 이질적이다.
그런 한편 참 달문다운 모습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는 땡전 한 푼 없는 거지이되 누구보다 부유한 인물이었다. 이것이 그의 첫 번째 반전이다.
“달문의 마음이 아름답다는 뜻이라면 받아들이겠소.”
“마음이 아니라 몸이라니까요. 얼굴부터 팔과 다리와 가슴과 배와 엉덩이까지 달문 오라버니처럼 아름다운 사람을 본 적이 없답니다.”
한바탕 신나게 놀고 난 건 좋았다. 하지만 의금부와 형조의 제안을 거절한 대가, 그러므로써 산대놀이에서 지게 만든 대가는 제법 컸다. 동대문 인삼 가게는 풍지박산이 나고, 아버지와 숙부는 행방이 묘연하다. 모독 자신의 안위도 장담할 수가 없다. 결국 모독은 달문을 찾아가고 어사 박문수의 도움으로 다시 한양, 즉 도성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는 누군가의 흉수로 죽고, 숙부는 지방으로 내려가 소식이 가물가물하다. 모독은 매설가를 꿈꾸며 이야기 한 편을 끄적이지만 출판계의 절대 안목을 가진 새책방의 쥐 영감에게 복수심이 넘쳐서 읽기 괴롭다는 혹평을 받는다. 모독은 기가 죽다 못해 자포자기로 도성 밤거리를 흥청망청 노닐다가 달문의 제안으로 조방꾸니 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조방꾸니, 일종의 중계업으로써, 기생을 찾는 손님에게 소개하고, 기생을 관리하는 일이다. 기루 같은 거랑은 다르고, 글쎄, 요즘 말로 하면 연예 매니지먼트와 유사한 개념인 것 같다.
한편 달문과 모독 외에도 함께 동업하는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검계 왈자패, 소위 말해 길거리 불량배 조폭의 두목 출신인 표망둥이라는 인물이다. 정말 딱 조폭의 전형으로 달문의 적인지 아군인지 모를 놈이다. 그러나 달문은 그를 친구로 여긴다.
어쨌든 조방꾸니 사업에 뛰어든 달문은 이번에도 인삼 가게 때처럼 획기적인 방식으로 그 바닥을 뒤흔든다. 한마디로 기생 위주로 판을 짠 것이다. 손님도 가렸고, 기생이 원하지 않으면 판을 접었으며, 그만큼 최고의 공연을 선보이도록 노력했다. 또 공연의 핵심인 기생을 존중했으며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하려 애를 썼다. 그렇기에 달문 아래 21명의 기생이 모였고, 그 21명의 기생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달문의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툭 튀어나온 왕방울 눈, 귀밑까지 찢어진 아귀를 닮은 입과 빗방울이 그대로 스며들 정도로 넓은 평수를 자랑하는 콧구멍, 어디 귀면탈 내지는 도깨비 탈바가지로 착각될 만큼 추한 얼굴이다. 이게 바로 달문의 현주소라는 사실이 믿기는가? 그런 그가 최고의 기생들 21명을 이끌고 그들의 애정을 독차지했다는 게 정말 믿기지 않는다. 실제로 가면 쓰지 않고 얼굴에 먹을 칠하고 공연에 오른 적도 있다. 모독을 비롯한 사람들이 처음에는 탈을 쓴 광대로 알다가 나중에서야 달문임을 알아채는 장면이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런 추하다 못해 사람이 맞나 싶은 외모에도 달문은 기생들 사이에서는 인기남이었다. 세상에 다시는 없을 정도로 추하되 아름다운 인물, 이게 달문의 두 번째 반전이다.
“너는 바보냐? 멍청이냐? 아니면 바보나 멍청이 흉내를 내는 꾀돌이냐?”
“저는...... 사람입니다. 사람이기에 사람으로 대한 겁니다. 사람이기에 그들이 굶어 죽는 것을 보고만 있지 못한 겁니다.”
훗날 달문은 도성을 떠난다. 아니,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를 벗어나고 싶어 한다. 자신의 이름에 얽매이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떠한 틀 안에 갇히는 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모독은 달문이 일본 통신사 일행으로 참여하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독은 뒤늦게 달문의 사람됨에 반해 그를 소설로 남기려 하고, 때문에 달문을 찾으려 한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달문이 유랑단을 이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천신만고 고생을 겪고 겨우 달문 유랑단과 합류한다. 3년 흉년으로 굶줄이는 백성을 구원하는 의로운 광대, 그가 바로 달문이었다. 양반님들에게 놀이판을 펼치면서 돈을 받고, 가난한 이들에게 놀이판을 베풀고 부자에게서 걷은 돈으로 백성들을 도왔던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사회적 기업이 따로 없다. 실제로 달문 유랑단에 속한 재인들은 몇몇을 빼고는 병들고 아프고, 어디 하나가 불편하고, 또 늙은 이들이 다수였다. 소외 계층을 고용한 것과 진배없다. 현대에도 이런 적극적인 소외 계층 고용을 실천하는 기업이 없는 판에 저 먼 조선 시대에 이런 사회적 고용을 실천한 인물이 있을 줄이야. 그것도 그 고용주가 부유한 대상인도 아니요, 학식 충만한 고관대작도 아니요, 높으신 나라님도 아니요, 그저 한낱 거지에 불과한 떠돌이 광대였다.
달문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고 홀로 살기를 원했다. 그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고, 그 무엇에도 속박당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책임져야 할 사람이나 나서야 할 일이 생기면 머뭇거리지 않고 서슴없이 자신을 내던졌다. 그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독창성이다. 예전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제안을 스스럼없이 했다. 인삼 가게에서도 그랬고, 조방꾸니 사업을 할 때도 그랬고, 유랑단을 결성할 때도 그랬다. 그렇기에 달문은 싫든 좋든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가 의도한 건 아니되, 세상이, 사람들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어떻게든 붙들었고, 어떻게든 끌어들여 판에 세웠다. 심지어 달문의 이름을 사칭해 역모까지 도모했다.
매설가 모독은 달문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모진 고초를 당하고 나라님이 직접 죄인을 심문하는 친국장까지 끌려왔다. 그리고 그 곁에 달문도 서게 된다. 그는 잡혀오지 않았다. 자신의 발로 천안 관하에 찾아와 왕의 앞까지 이른 것이다. 왕은 달문에게 묻는다. 어째서 스스로 나섰냐고, 너를 사칭한 무리를 믿느냐고, 왜 한낱 거지가 백성을 구제하는 일에 끼어들었느냐고...... 달문은 왕의 안전에서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답한다.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사람으로써 같은 사람을 개돼지 취급할 수 없었노라고, 그저 사람이기에 사람을 믿는 것뿐이라고, 누가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고.....
솔직히 그의 대사는 멋졌다. 그러나 듣고 보고 읽고 있노라면,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찼다. 그뿐인가, 답답해서 환장할 지경이다. 아니, 멋대로 이름을 도용당하고, 죄를 뒤집어쓸 뻔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추국장에 서야 했고, 좋은 일만 했을 뿐인데, 돌아온 결과는 생고생이요, 우스꽝스럽다 싶은, 정말로 애꿎은 귀향이었다. 그럼에도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싶다.
그는 거지였다. 자신의 이름만 겨우 알아보고 겨우 쓸 줄 아는, 글줄 하나 제대로 읽지 못하는,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무식쟁이 까막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누구보다도 현명했다. 할 말을 했고 하고 싶은 행동을 했고 해야 할 일을 했고, 그로 인해 떳떳했다. 그렇기에 부끄러움이 없고 현명했다. 이것이 달문의 마지막 반전이다.
“거리에선 놀아야죠. 거리에서 공부하면 이상하잖습니까? 거리에선 춤추며 놀고 노래하며 놀고 이야기하며 놀고 걷거나 뛰며 놀고 그러다가 싸우면서도 놉니다. 그러면서 놀다 보면 함께 즐기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렇게 신난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고통이나 외로움 따윈 사라진답니다. 그리고 새 친구들이 생기죠. 우리도 거리에서 놀다가 만났잖습니까?”
소설이든 수필이든 모든 글은 필자의 의도를 내포하고 있기 마련이다. 적어도 나는 국어 시간에 그렇게 배웠다. 그래서 거의 습관적으로 무언가를 읽으면 그 글의 요지, 주제, 주장하는 바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논설을 쓸 것도 아닌데도, 즐기기보다 그의, 작가의, 이야기의 의도를 파악하려 했다. 요컨대 달문의 속내를 캐내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염두를 굴렸던 모독처럼 말이다.
물론 내 행동이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다. 무언가를 봤으면 정리하고 축약해서 어떤 정보를 추출하는 건 정보가 과다하게 주어지는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는 당연한 일이니까. 최소한 수능을 칠 때는 그래야 하니까. 그래서 계산적인 모독의 행동이 좀 고깝게 보였지만, 또 그를 마냥 탓할 수가 없었다. 그의 이름보다는 사람의 생김새로, 그 사람을 만난 날의 풍경으로 그를 기억한다는 달문. 그 어떤 물질적 소유도 하지 않고, 심적으로 의지할 가족도 만들지 않고, 그저 거리에서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그러면서 즐기며 사는, 모두를 아우루는 그런 모습이 나에게는 퍽 낯설었기 때문이다.
또 달문이라는 사람은 카멜레온처럼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인물이었다. 거지 왕초로, 인삼 가게의 점원으로, 그런 한편 대부분의 삶은 광대로 살았고, 그러다 수입 짭짤한 조방꾸니가 되었고, 그도 잠시 손을 훌훌 털고 거리의 떠돌이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달문은 그가 말한 대로 아무도 아닌, 그저 사람이기도 했다. 사람을 한없이 믿었던 사람이었고, 마냥 착하기만 하던 사람이었다. 돈과 관련된 셈이 됐건 대인관계에서 실리를 따지는 계산이 됐건 무언가를 재는 것에 능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상대의 의도, 목적 등은 물론 자신조차 미래의 목적도 없이 사는 인물이었다.
달문의 사람에 대한 한없는 믿음보다는 오히려 모독의 사람에 대한 근거없는 의심이 합리적이다. 논리적이고 객관적이고 이성적이며 세상을 살아가는 데 더욱 도움이 된다. 모독의 심경이 애교일 정도로 내게 무엇이 이득인지 따지고 계산하는게 익숙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더더욱 달문이라는 사람이 생경하리라. 그저 지금을 즐기고, 길 위에서 이어지는 만남을 즐기고, 삶을 놀이판 삼아 흥겨운 춤사위를 펼치는 그가, 그렇게 이질적일 수 없을 만큼 이질적이다.
그의 삶에는 치열함이 없다. 어딘가에 속하고 규정짓고 나누고 경쟁하고 다투는, 일채의 구분이 없다. 바람을 닮고 구름을 닮고, 강물처럼 거리처럼 한없이 흐르고 유유히 뻗어나간다. 아마 그렇기에 달문을 한 번쯤 만나보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게 아닐까? 이해가 되지 않고 낯설고 어색하지만, 그래도 어딘가에서 마주치면 좋겠다고 내심으로는 바라게 되는 게 아닐까.
그건 어쩌면 우리가 사는 시대가 그가 살았던 당시만큼 강팍하고 고달파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가 베푸는 ‘연예’가 이제는 찾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 탓인지도 모른다. 왜냐면, 우리는 ‘거리’로 나서길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매설가 모독처럼 안전한 ‘집’을 짓고, 그에 틀어박히고 얽매이고 갇힌 채 그저 창문 너머 거리의 풍경으로 빼꼼 열린 문 틈으로만, 슬쩍 보기만 하게끔, 도무지 놀 줄 모르게 변했기 때문이다. 계산하는 게 익숙하지, 공부하는 게 낫지, 차라리 경쟁하는 게 더 친숙하지, 즐기고 어울리고 노는 건 이제 도무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되어버렸다. 우리는 집이라는 안정을 얻은 대신 거리라는 가능성을 놓아버린 건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달문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사람이다. 달문 이전은 물론, 달문 이후에도 이런 사람은 다시는 없을 거다. 이토록 고고한 ‘연예’가 세상 어디에 다시 있단 말인가? 이제는 거의 스러져 겨우 명맥만 이어지고 있는 광대 놀이판, 마당에서 노는 마당놀이판, 아-예 사라져버린 산대놀이처럼. 자신의 얼굴을 뭉개버린 표망둥이와 친구가 되길 꺼리지 않았고, 자신의 이름을 이용한 자들 또한 믿었으며, 무엇 하나 소유하지 않았지만 배곯고 아프고 형편이 어려운 사람을 돕기를 주저하지 않은 인물이 또 어디 있으랴.
김탁환의 소설 ‘이토록 고고한 연예’가 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는 아직도 파악하지 못했다. 작품 소개글에서 설명하고 있듯, 달문이라는 인물을 통해 조선 시대의 정세와 휴머니즘을 녹여내고자 했는지, 어사 박문수 등의 실제 인물과 광대 놀이판의 디테일한 묘사로 역사의 한 대목을 옮겨놓으려 했는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놀이판의 아쉬움을 달래고자 했는지, 혹은 몇백 년 전 실존했던 ‘달문’이라는 사람의 선한 행동으로, 몇백 년이 지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귀감을 주려고 했는지. 나로서는 달문의 이야기를 그저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찼고, 그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며, 나중에는 달문이라는 사람 자체를 즐기며, 그의 놀이판에서 구경꾼으로나마 참여하기에도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할 필요, 추측할 필요가 없는 삶, 이야기를 그저 즐기는 독서란 정말 가볍기 그지없다. 훌떡 재주를 넘는 달문의 몸놀림처럼. 그와 동시에 무겁기 그지없었다. 그런 놀이판을 이제는 볼 수 없을 테니까. 지금에 충실한 삶, 달문의 서글서글한 웃음처럼 넉넉한 인생을 살기란 모독에 가까운 내게는 요원한 일이니까.
그러나 소설가 김탁환이 아니었으면 몰랐을 달문에 대한 이야기를 만나게 되어 흥겨웠다. 적어도 오늘 이후로 나는 ‘한없이 좋은 사람’ 한 명은 알게 되었으니,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그의 못생긴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고 그와 말 한 번을 나눠본 적 없고 그의 몸에서 나는 악취 한 번 맡아본 적 없지만 세상에 정말 착하기만한 사람이, 사람을 마냥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세상 사는 게 조금은 덜 고단하지 않을까. 적어도 책으로나마 ‘그의 연예’를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쯤에서 우리나라 문화인 ‘광대패’에 대해 어떻게 보존, 육성, 발전시킬 정책 없나 싶다. 저 외국의 유명 서커스단 ‘태양의 서커스’인가 ‘퀴담’이란 공연으로 유명한 그 서커스에 전혀 꿀리지 않는 구성인데..... 사실 그런 ‘고고한 연예’가 이 시대에도 필요하지 않느냐 이 말이다.
지금의 행복을 누리는 연예, 그런 삶을 사는 건 솔직히 영 불가능에 가깝지만, 달문이라는 인물의 존재를 알았으니, 최소한 노력이라도 해야 덜 쪽팔리지 않을까. 욕심 좀 내려놓고 살아야 삶이 덜 고단한 법이다. 끝으로 달문이 고전소설 ‘구운몽’을 듣고 뱉은 감상으로 이번 작품의 감상을 마무리하겠다.
“아 정말, 몽몽 몽몽몽 거리는 말씀만 하십니다. 깨어나긴 뭘 깨어납니까, 현실이 낮에 꾸는 꿈 같고 꿈이 밤에 찾아드는 현실 같으니, 밤이든 낮이든 현실이든 꿈이든 어디서나 행복하면 그만입지요. 뒤늦게 깨어나면 뭘 하겠습니까? 욕심입니다, 그건. 지금 누리는 행복보다 더 나은 행복이 있을 거라는 황당한 욕심!”